송민선

자기의 의 반란

아빠와 함께 2023. 5. 10. 09:02

한 남자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런 진지한 소감을 토로했다. ‘중학교는 너무 무서운 곳인 거 같아요. 배가 아파서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휴지가 없었어요...’ 휴지가 없다는 것이 공포로 다가온 아이를 공감해 주면서 학교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화장지는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고 주머니에 항상 여분의 화장지를 준비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 여분이 없어서 당황스러운 사태가 벌어지면 너의 걸치고 있는 옷들의 일부를 버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처리하고 과감히 버리라고.

인간의 자체 제작하고 조작한 자기 잘남을 벗겨내는 일도 이와 같지 않을지. 나를 가리고 걸쳤던 이미지들을 벗겨내시고 최종적으로 나를 제거하시는 주의 작업에 혹시라도 운 좋게 걸려들었다면 그것은 깨끗하고 고상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예측 못 한 민망한 사태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자기 의는 고상한 상태에서는 들통나지 않는다.

선악체제 안에서 가능한 최대로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종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포로 노비, 그중에 더 보잘것없은 어린 여자아이의 말을 의지해서 별 힘도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예의를 갖추고 찾아온 나아만 장군은 인류가 모두 죽을병에 걸렸음을 증거 할 샘플로 자신이 주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상상도 못 했다. 움직임의 계기가 자신의 겸손이 아니라 그를 택하신 분이 잠복된 저주를 밖으로 드러나게 해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나아만이 향해야 할 방향을 손수 이끄셨다.

이미 준비되고 완성된 결과물이 드러나기 전까지 나아만은 자신의 겸손과 자신의 믿음을 붙잡고 스스로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에게 나아왔다고 오해했다. 이스라엘 왕조차도 주께서 조성한 사건을 생각하지 못했다. 저 나라가 공격의 빌미를 만들려고 이스라엘에 왔다는 것에 왕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 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왕하5:7)

나아만에게 일어나는 외부에서 조성한 불가능성은 인간 쪽에서는 숨겨져 있었고 나아만이 시도해보려는 겸손의 극치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엘리사의 모욕적인 태도 앞에서 나아만은 자기가 참은 만큼, 아니 그보다 몇 갑 절로 부푼 분노감이 올라왔다. 종들의 강권함과 요단강 물에 자신이 들어가는 그것까지도 모든 것이 하나님 일하심의 표출인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에 나아만은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횟수가 찰 때마다 이스라엘과 그곳에 속한 엘리사를 작살 내줄 분노를 더욱더 키웠을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입수는 인간의 분노와 하나님이 분노하심의 이유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나아만이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이 죽어 마땅한 이유가 그의 문둥병이 사라지면서 그의 마음에서 드러나게 하셨다. 나아만은 알았다. 문둥병이 고쳐진 것이 아니라 잠시 보이지 않게 사라졌을 뿐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운명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난 나아만의 깨끗함이 최종결과라고 오해하며 사례를 요구했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문둥병이 되었다. 그러나 나아만은 자기 속에서 최종결과를 나타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믿음이 되었고 자신을 지옥 보내실 하나님이 계신 그 공간에 속하기를 기뻐했다.

오직 예수님만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고, 믿고 싶었고, 그분만 바라보고 싶다는 그 마음만 가득 담아 지옥의 숨 막히는 바닷물 속에서 빛을 향해 위로, 숨을 쉴 수 있는 참빛이 계신 수면 위로, 온 몸짓과 발짓을 하며 올라갔는데 투명한 얼음으로 막혀있다. 수면이 꽁꽁 얼어있다. 막혀있다. 그리고 이 지옥에 뛰어드셨다가 다시 빠져나가신 예수님이 얼음 바깥쪽에서 나를 바라보신다. 내가 만난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

나와 합쳐질 수 없는 곳에 계셨고 ‘주여, 주여’를 애타게 부르짖는 나를 주님은 얼음을 깨고 끄집어내시지 않았다. 답답함으로 죽을 것만 같은데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계신 분이 주님이었다. 내가 그대로 죽기를 원하는 분은 악마가 아니라 주님이었다. “이것만이 내가 너와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네가 죽고 내가 너로 살게” 이것이 죽음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이었다.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빠져나가셨기에, 여기 계시지 않기에, 비로소 내가 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분의 바라보심이 사랑이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주님이 오셨기에 나는 없어지고 사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것은 하나도 나에게 없음을 온전히 알게 하시는 사랑은 나의 완전한 죽음에서만 피어나는 것을 알려주신다. 이제 뼈다귀같이 바짝 마른 죽은 몸이 주의 업적을 증거하기 위한 두 노선을 그리는 도구가 된다. ‘네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리고 ‘네가 태어난 것을 없던 일로 해줄게. 너의 생명을 무효로 해줄게’ 이 둘 중 어느 것에 속할 내가 없이, 그저 주 안에 있기에 두 노선을 비추는 영사기가 된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네가 죽을 수 있도록 한 번도 쉬지 않았고 너에게 손을 떼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숨 막혀 죽을 때까지 구출하지 않으시는 진짜 주님과 합치되는 지점에서 나를 없이하시는 주께 감사 외에는 할 것이 없어진다. 만약 얼음에서 산채로 꺼내 지면 또다시 예수님부터 죽일 수밖에 없는 에일리언을 속에 담고 있는 나를 아시기에, 절대 꺼내주시지 않는 그 주님이 왜 이리 고마운지 이유도 모르면서 고마워하는 것 같다.

속에 있는 마귀가 출산 될 때까지 나를 몰아가실 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지옥가도 할 말 없는 자임이 확실해지는데,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참혹한 상황을 끝까지 지켜봐 주시는 그 주님이, 내가 아기 낳을 때 손잡아주던 남편과 감히 비교할 쨉이 되겠는가. 살려주시지 않아서, 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마울 수 있는 그 감사가 불가능성이다. 물소리처럼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어린양의 음성은, 그리고 말씀은 장난이 아니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 1:17~18) 나를 살려주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는 복음을 듣는다. 그 자리에서 마음이 합치되고 있다면 말씀을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고 듣고 나서 평하려는 의도도 생기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함께 찌꺼기에 합류되고, 참여했는지를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는 것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스스로 일하고 계실 뿐이다.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저를 통해 나오는 어떤 것에도 뛰어드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여기에서 작동되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요소뿐이다. 사랑 아니면 의심. 사랑 안에서는 그 어떤 말과 모습도 향기롭고 의심 안에서는 모든 것이 역겹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면 복음이 악취가 되고, 나를 의심하면 복음은 향기로운 책망이 된다.

복음은 세상적 관점에서는 배설물처럼 더럽고 무섭기까지 하니 아무도 붙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한 방울이라도 튈까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깨끗한 유리막에 쌓아 보호하며 상대를 마주한다. 함께 뛰어든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자기 의로 만들어진 유리막 여부가 결국 실상을 드러낸다. 자기 의를 힘써 지키기에 자신만을 믿는 밀폐된 공간에서 귀로 듣는 모든 정보를 본인이 지배받고 있는 정신에 휘둘리며 해석한다.

몸이 악마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지옥으로 향하고 있고 지옥에 갈 짓밖에 할 수 없는 것을 확인하는 귀와 눈이 복되다. 사도바울의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라는 말씀은 정말 끊어져 마땅한데 도리어 붙들려있는 것이 참으로 그럴 수 없는 일이고, 이 십자가의 진리를 모든 인간이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말씀이었다.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는 모두 멸망 당해야 한다는 이 외침은 ‘나는 어떻다. 나는 어느 쪽이다’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채로 터져 나올 때 참이 되고 ‘예’가 된다.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주의 사랑을 맛보게 되는 자리가 바로 지옥의 생생함을 뜨겁게 맛보는 자리이기에 무슨 말을 들어도, 어떤 일이 생겨도 모든 것은 당연하지 않을 수 없다.

밀려드는 수치감은 피할 수 없는 육의 결과이기에 잠시도 입 벙긋하고 싶지 않은데 입을 열라고 주변에 붙여주신 분들에게 속에 담긴 더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쏟아낸다. 말을 하고 나면 그 말이 참말이 되고 거짓말이 되고는 말 한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도대체 내가 하는 내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자기를 바라보면 두려움이고 진짜 일하시는 분에게 시선이 꽂혔다면 깃털처럼 가벼울 것이다.

실상은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인간 자체를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고, 참말도 진리가 와서 그 인간이 무엇을 말하든지 참말이 되게 하실 때, 그건 오해고 이건 해명을 하고 싶은 모든 것이 하든지 안 하든지 아무 쓸데 없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생성의 도구가 되어 놀이기구의 울렁거림과 비할 수 없는 오싹한 전율 속에 출렁거린다.

오싹함을 자기 탓으로 소유하려고 하면 금식은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내 탓이요~내 탓이요’라고 해봤자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죽어. 죽어’라고 주께서 보내신 메뚜기떼처럼 밀고 들어오는 군대에 계속 짓밟히기만 할 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앗수르를 보내서 진멸하려 하신 것이 사랑인 것을 멸절시키신 뒤에 알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하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죽은 내가 살려고 버둥거리는 나를 소급해서 볼 재간이 없다.

방향이 변경된 채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이러하다. 우리의 수치가 드러날 때 성도는 다가와서 그 수치를 가려주는 것이 아니라 수치가 심히 수치가 되도록 돕니다. ‘어디서 동정심 유발 코스프레야’ 기이한 일은 수치가 더해 갈수록 나에 대한 미움은 커지고 상대를 향한 고마움도 덩달아 더 커진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고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도 싫어하던 내가 이제 복음을 듣기에 그런 것들을 다 ‘자기 의’로 여기며 버렸다는 것이 순전히 자기기만이고 사기였음을 폭로시키면서 원래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복음과 아무런 상관없는 나로 돌아와서 ‘날 동정하지 마. 나를 불쌍하게 보지 마’라는 의식이 생생히 올라올 때 또다시 주님의 환호가 들린다. ‘마귀 잡았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아프다는 말을 수치스럽게 여겨 잠자코 있으려 해도 온몸으로 소리를 뿜어낼 수밖에 없도록 주께서 조성하셨다면 이건 내 몸이 아니라 자기 의를 수색하려는 주님의 공간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성경에서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로 뽑힌다고 할 때 우리가 얼마나 자기 의에 충만한 상태인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지적당한 꼴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아는 자라면 이 말씀이 너희에게 가장 쉬워야 한다고 지적하시며, 너희 본성대로만 하면 되는 이런 기본적인 일조차도 지혜가 오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형편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알려주신다. 이 말씀을 어렵다고 하면서 다른 성경 구절은 이해 간다고 하는 나는 정상이 아니다.

오용익목사님이 어깨가 이상이 생겨서 녹취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글을 보며 나야말로 정신 이상으로 오후 설교 녹취를 더이상 못하게 되었다는 게시글을 올려야 할지 진지한 농담이 올라왔다. 내가 있는 곳에서 주를 찾는 이 정신없는 상태를 율법을 대동해 함부로 취급해 주시는 말씀의 손길이 아니고서야 어찌 빈공간이 만들어지겠는가. 내가 보고 있으면 빈공간이지만 내가 처리되고 나면 실재는 빈 곳이 아니라 빈틈없이 꽉 찬 율법 망에 접촉되면서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현장이 포착된다. 주의 증인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이 제거되는 곳에서만 출현한다.

 

이근호

‘약속의 땅’에 들어서고 난 뒤 이스라엘의 혼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를 제거하는 땅이었습니다. 제거당하지 않기 위한 사도는 헛수고였습니다. 이처럼 천국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자가 천국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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