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성 증명
2023년 8월 6일 디모데후서 4:14-16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4:15)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라 초기부터 사도 바울을 미워하고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의 협력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사도를 도리어 공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알렉산더의 배신에 대해서 무시해서는 아니됩니다.
알렉산더가 즉흥적으로 사도 바울을 대적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심사숙고 해서 결정을 내린 겁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모조리 거짓이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처음부터 사도 바울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변질된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
알렉산더가 사도를 공격한 지점은 사도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었습니다. 즉 사도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을 공격 안하고 있지요? 복음을 알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사도이든 예수님이든 아예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상에 전폭적으로 몰입해 있는 형편입니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연속성을 지켜내려 한다“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 자신에게 끊어진 것을 ‘나의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내가 평소에 사는 것은 나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을 공격하지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 나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내몰라라 하는 식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은 최종적으로 ‘나의 이익’과 ‘내 몫’을 노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떠난 것은 자기에게 돌아올 몫과 이익이 모호해서 그러합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알렉산더라는 인물을 성경을 통해서 늘리 공객합니다. 이는 ‘우리’라는 것 속에는 ‘나 자신’이라는 의식이 빠져 있음을 전제로 하는 ‘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오면서 그들은 죽음 속에서 나온 백성이 됩니다.
이들에게 있어 ‘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에 해당되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즉 성경에서 인정하는 ‘우리’라는 집단은 유일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음에서 나온 ‘우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동일한 음료와 동일한 양식을 먹게 됩니다. 더는 이 ‘우리’ 속에서 나를 개별적 가치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불연속성’입니다. 나로부터의 불연속성입니다.
‘나’가 사라지고 ‘우리’ 속으로 들어온 겁니다. 이를 때 이 ‘우리 안에’ 있는 그 ‘나’ 안에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없었음을 기쁘게 증명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기둥을 세우는데 그 기둥 안에 철근이 들어있지 않아 필히 무너지게 된 형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최후의 날에는 바로 이 ‘철근’이 들어 있는지 여부를 밝히기 위해 찾아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은 ‘우리’로 움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 개인의 일탈로 인해 전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수 7:1)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레위지파들은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같은 백성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 25: 7-9)
심지어 제사를 드리는 레위지파 자신들이 그들이 잘 아는 율법과 제사법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민 16:31-33)
즉 율법은 외우거나 지식이 아니라 율법대로 죽음으로서 세상 모두가 율법 성취차원으로 진행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대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의 익과 몫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대해서 대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외 모든 사람들의 인품이나 성격이나 행동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들은 필히 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 내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참으로 주님이 함께 있는 자들은 기쁘게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 속에 하나님이나 예수님 계시지 않고 ‘우리’ 속에만 하나님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나의 구원을 고집하게 만드는 ‘나’가 아니라 ‘우리’ 안의 예수님이 하신 그 분의 일로 인하여 새로운 ‘우리’가 생긴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을 공격하는 적은 곧 오늘날 성도들의 적도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의인되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디모데후서 4장 14-16절(불연속성 증명)23080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14-16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여기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우리’라는 말에 합류가 되려면 필히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사도에게 향하는 많은 해악, 그것도 같이 공유돼야 되는 겁니다. 구리세공업자인 이 알렉산더가 그 당시 사도 바울과 평소에 가까이 지내려고 애썼다는 것을 사도 바울만 알았던 것이 아니고 그 당시 교회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겁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많이 힘들게 했다는데 도대체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졌느냐, 이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 보면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알렉산더만 괴롭힌 것이 아니고 후메내오라는 사람도 같이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후메내오 이 사람도 알렉산더 이 사람도 그 당시 사도 바울의 집단에서 알려진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왜 사도 바울과 헤어지게 되었으며, 그냥 헤어지지 않고 공격을 했느냐? 그것은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스럽고 거부감을 많이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 후메내오 이 사람들 정말 나쁘다. 이렇게 복음을 복음이라고 하면서도 왜 결국 끝에서는 사도 바울을 버리나?”라고 여러분들이 씩씩거리면서 비난을 할 거예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을 버리지 않죠?
사도 바울을 버린 그 알렉산더, 후메내오, 그 사람들이 도리어 솔직한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에 대해 뭐 알아요?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의 복음을 버리지 않느냐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은 사도다. 예수님의 계시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네 옆에 사도 있는 것이 좋으냐?” 만약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 좋습니다.”라는 말을 할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면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관심조차 없어요.
사도 바울이 있든, 성경 갈라디아서를 누가 썼든 일상에서 사도 바울 자체가 우리에게서 삭제된 지 벌써 오래입니다. 수련회 가니까 갈라디아서 봤지, 언제 “나 갈라디아서 보고 싶어요. 에베소서 보고 싶어요.” 이렇게 살아가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사도를 버렸던 알렉산더가 욕을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있고, 우리는 가만히 사도 바울을 버렸고, 예수를 버린 우리는 욕 안 얻어먹고 슬그머니 다 빠져나와 버렸고.
성경 마태, 누가, 요한복음 보면 참 이상한 일이 있어요. 오늘날에는 예수라는 분이 별 볼 일 없어요. 예수가 우리 일상에 그렇게 비중 있게 스며들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 없이도 평생을 잘 먹고 잘살고 있잖아요. 예수 없이도! 지금 우리의 관심은 예수가 아니고 잼버리에 있어요. 그리고 흉기 들고 설치는 미친 사람, 그게 관심사에요. 예수에 관심 없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 별 볼 일 없는 예수에 대해서 왜 그 당시에 권력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들이 왜 합세해서 공격을 하는가? 왜 아무것도 아닌 그분을 공격하는가? 우리는 공격 정도가 아니고 아예 관심조차 없는데 그들은 관심조차 없는 식으로 예수를 그냥 방치하지 않았던 이유가 뭔가?
“사도 바울? 난 사도 바울 욕 안 해요.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지. 사도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했든 뭘 하든 관심이 없거든요.” 다시 하면 성경은 구리 장색 알렉산더, 후메내오가 사도 바울을 공격했다는 이 사실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해서 처음부터 관심 없다, 이게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계속 ‘뭔가 있을 거다, 있을 거다.’ 하면서 결국엔 ‘같이 할 사람이 못 되네, 상종할 사람이 못 되네.’ 결국 그 알렉산더, 후메내오는 마음에 결심을 다 하고, 결정을 내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몽땅 허접하고, 거짓말이고, 사기고, 앞뒤가 안 맞고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우리가 그 말을 들을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심사숙고해서 사도 바울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그러한 마음의 결정과 판정조차 우리는 할 마음이 없어요. 성경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으니까. 잘 먹고 잘살고 더운데 더위 피해서 살면 되잖아요? 그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인생 뭐 별거 있어요? 그게 인생이죠. 꼭 뭐 누구를 알아야 해요? 이순신 장군 꼭 알아야 돼요? 알 필요 없잖아요.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요. 예수도 마찬가지죠. 이미 죽었는데 알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 15절에 ‘우리’라는 말이 있거든요. 우리말을 심히 대적할 때 과연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들어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나 공격받았어. 복음 전한다고 알렉산더에게 공격받았어. 그래서 내가 굉장히 아팠어.” 그런데, 나도 같이 아파야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이것은 ‘우리’에게 공격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공격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라는 개념이 없어요. 우리는 나만 챙기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알렉산더나 후메내오가, 후메내오 말고 주보 요약 보면 또 나와요. 거기에
【사도행전 19장 24절에 은 세공업자…】 이 세공업자들이 문제네요. 【…은 세공업자 데메드리오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 사람은 에베소서에서 자기 영업, 은으로 우상을 만들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우상 없다고 해서 은 장사에 방해되니까 사도 바울 이름을 고발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 일행에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데미라는 우상을 제작하는 공장을 운영한 사람인데,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 우상이라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자신의 영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악함을 품고 사도 바울 일행을 공개적으로 체포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집에서 편의점 하나 하고 있는데, 편의점 곱게 하고 있어요, 아무 문제 없이 곱게 하고 있는데 절에서 행사한다고 편의점 앞을 다 가로막을 때 그럴 때 경찰에 불교 행사 그만하라고 신고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후메내오도 마찬가지고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은 ‘우리’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로 인해 살아요. 사도의 대적자, 오늘 제목을 일단 ‘사도의 대적자’로 했는데 사도의 대적자는 어떤 자냐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데?’를 최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죽고 부활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나중에 천국이 있는데 그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이걸 들으면 ‘그래. 좋아, 좋아. 오케이! 참 기쁜 소식이네. 정말 하나님이 우리 잘해주려고 애를 쓰는구만? 그런데 내게 돌아올 몫은 뭔데? 내게 돌아올 몫은? 그래. 교회 다녔다, 목사, 장로 됐다. 열심히 봉사하고 다 했다. 그래서? 그래서 내게 돌아올 몫이 뭔데?’라고 생각할 때 그게 알렉산더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대적자예요.
사도 바울한테 그렇게 복음 듣고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내가 어느 교회 수 십 년 다녔다. 그래서, 그래서 내게 어떤 이익이 있고 어떤 손실이 있었는가?’ 마지막에 그걸 따지는 내가 있을 때 그게 알렉산더고 그게 사도 바울 복음의 대적자예요.
그래서 이 알렉산더, 후메내오 이런 사람 없으면요, 사도 바울이 실제적으로 뭔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 대적자들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을, 우리와 같이 사도 바울 복음 좋다고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을 떠나 버릴 때 Bye Bye, 할 때 그 바이 바이, 한 사람들의 의식과 생각을 한번 귀담아 들어보자는 거예요. “당신은 왜 사도 바울을 떠났습니까?” 한번 물어보자는 거예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쭉 그런 사람을 계속해서 들추어내고 등장시킵니다. 왜냐면 사람은 지식으로 복음 안다, 이렇게 되거든요.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귀신까지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던 가롯 유다, 결국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팔아먹었잖아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허망하고, 예수 따라다니면서 실제 이익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요, 건질 게 없었고요. 자기 몫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롯 유다가 간파한 겁니다. 내 몫이 없는 거예요. 몽땅 예수님에게 공로가 다 돌아가고 내가 챙길 내 몫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거 복수해야죠. 그래서 팔아먹는 게 복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이제부터 사도 바울의 복음을 반대를 통해서 설명하는데 간단하게 압축해서 단어를 사용하면 이렇습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사도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다, 또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어, 믿고 있어, 믿고 있어. 계속 가자, 가자, 가자 드디어 천국에 골인!’ 이게 연속성이에요. ‘믿는다, 나는 믿는다, 믿는다, 믿는 내가 천국에 드디어 골인, 들어갔다.’ 이게 연속성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복음은 불연속성이에요.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푹! 지옥으로.’ 이게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알렉산더가 이걸 간파한 거예요. 열심히 행하고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걸 거절하고 있더라, 이 말이죠.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다 동원했는데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그게 바로 지옥 가는 전형적인 모델이고 모습이라는 것을, 그 알렉산더는 머리가 좋은지, 세공업자들이 머리가 되게 좋아요, 그걸 간파를 한 거예요. 아…, 사도 바울의 복음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 그걸 알렉산더가 안 겁니다. 가롯 유다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를 한 두 가지 한 것이 아닌데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이 연속성이 좌절되고 불연속성으로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의 모든 말씀 안에 들어있는데 그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4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여기 ‘우리’ 나오죠, 우리. ‘나’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여기 “다 같은” 나옵니다.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여기 또 “다 같은” 나왔습니다.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리스도라는 ‘나’, 예수님 본인을 지칭하는 나로부터 기존의 ‘나’가 아닌 끊어져 있는, 나와는 불연속적인 것, 예수님 나로부터 확장된 새로운 ‘우리’가 새롭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새롭게 나올 때는 어떤 요소가 전제되느냐면, 다 같이 홍해 물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세례에요. 홍해 바닷속에 들어가야 돼요. 홍해 바닷속에 들어가면서 죽음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죽음속에 들어가면,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 믿고, 살아있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이 자체가 죽음 속에서 끊어져야 되고 불연속적이 되야 돼요. 이걸 알렉산더같이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열심히 다 하면 되잖아요? 노력하면 되잖아요? 성경 공부 참석하고 예배 참석하면 되잖아요? 하나님 하는 대로 내가 다 할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게 다 해버리면 네 속에 ‘나는 하나님 믿는다.’가 되어버려요. 하나님께서 불연속적인 사람들만 구원하는 이유는, 네 속에 하나님이 애초부터 없다는 걸 그걸 증명을 못 했다는 이유때문에 그 사람은 지옥 보내는 거예요. 하나님께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네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너의 내부와 우리의 내부가 다르다는 거예요. 나의 내부는 내가 하나님 믿어서 지금은 고생하지만 천국에서는 호강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더운데 참 평생 사신다고 고생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갑자기 위로 멘트가 막 나오는데, “산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아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천국 가면 충분히 보상이 됩니다.”라는 말을 알렉산더가 듣고 싶은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이 없고 그 자리에 내가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사고방식이에요. 그 ‘우리’ 안에는 우리 자리에 예수님이 차지하고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나’죠. ‘나’가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확장되면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새로운 ‘우리’가 발생돼요. 그러면 예수님을 대적했던, 예수님 복음을 대적했던 그 대적자가 사도 바울을 대적함으로써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우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날 이 말씀을 보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때요?” 하고 사도 바울이 묻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복음 때문에 알렉산더가 공격을 하는데…, 사도 바울을 이런 거예요, 쉽게 말해서. “여러분 알렉산더 알죠? 이름 대면 다 알죠? 그 사람이 결국엔 나를 배신하고, 그냥 배신한 게 아니라 ‘사도 바울 말은 전부 구라고 거짓말이고 엉터리’라고 공격하면서 나갔는데 그래서 나한테 많은 해를 끼쳤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나의 이 아픈 마음처럼 여러분들도 아프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겠죠. “그건 네 문제고. 나는 알렉산더하고 만난 적도 전화한 적도 없어요. 같이 식사한 적도 없습니다. 그건 사도 바울 당신이 처리할 문제지 멀쩡한 나보고 편 먹자고 하면 안 되지. 나는 복음 듣고 내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야.”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게 알렉산더야, 그게!” 그게 알렉산더라는 거예요. “왜 아직도 네가 거기서 나와, 아직도? 네 속에서 왜 아직도 네가 나와? 네가 왜 안 죽고 왜 아직도 살아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가 되었으면 증명할 것은요, 우리 속에 불연속성을 증명해야 돼요. ‘내 안에는 애초부터 하나님 없었다.’라는 것을 기쁘게 증명해야 돼요. ‘나에게는 예수님도 없고 예수 믿는 것도 아예 없다.’를,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굉장히 기쁘게 증명해야 돼요, 기쁘게.
그 예가 마태복음 27장 54절에 나옵니다. 51절부터 보게 되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고 54절이 중요합니다. 거기 백부장이 나오거든요, 백부장, 군대의 중대장입니다.
이 백부장이 왜 여기 있느냐, 누가복음 23장 47절에 보니까 백부장이 여기도 나와요. 백부장은 예수님 처형이라는 공직, 요새는 대위죠, 중대장으로 근무를 하게 된 거예요. 즉 책임자로 있었던 거예요. 그 백부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27장 54절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이고요,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이에요.
그 백부장이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오셨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오셨어. 하나님이 오셨는데 저렇게 사람에게 쳐죽임을 당했네.”라고 백부장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백부장의 그 고백이 성경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 23장 47절에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의인으로 보내신 분, 같은 뜻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로 보내신 분, 하나님이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겠다는 그 메시아로 그대로 오신 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백부장이 받아들인 거예요.
백부장의 이런 고백이 왜 중요하냐면, 백부장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을 만났다, 이것 외에 자기 계급이 대위고 뭐고 관계없어요, 자기에 관한 일체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그 순간 내가 나이가 얼마고, 집에 자식이 몇 명이고, 가진 재산이 얼마며, 지금 직책이 대위냐 소위냐, 그런 것,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관계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았다.’ 하는 순간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한 인생관은 그대로 와르르 다 무너진 거예요. 그 무너짐이 감격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자기의 무너짐이 감격으로 표출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것 외에 모두 다 거짓이다’ 이게 불연속성입니다. 이게 불연속성이에요.
‘뭐 죽어서 천국 가서 호강해야지.’ 그런 생각도 거짓이에요.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앞에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그 사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죽이고자 하는 거짓된 사태고 모습이라는 그 사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무슨 인생 상담, 고민이 어떻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건 주님 앞에서 거론할 가치조차 없죠. 예수 믿으면 내게 돌아올 몫이 뭐라고요. 진짜 하나님 만남 앞에서는 그런 말을 감히 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를 보았다.’ 이 말을 요즘 시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면 ‘나는 철근을 보았다.’에요. 왜? 내가 철근이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서 그래요. 내 속에 내가 아무것도 없어요. 철근 없어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철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7장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나님께서 최후의 날을 준비하신 이유가 뭐냐? 네 안에 철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네 안에 반석이 있는지, 너를 대신한 ‘나’가 있는지, 너 나 말고, 네가 말하는 나 말고 너 나 없이 예수님이 너의 자리에 앉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세상을 멸망 쪽으로 몰아세우는 거예요. 심판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철근 있는지 없는지. 무량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 와서도…, 이게 성도가 아니고 교회의 특징이죠. 성도는 자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는데, 왜? 주님에게 있으니까. 교인들은 자꾸 자기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외부 치장, 외장 공사에 들어가요. 보강 공사에 들어갑니다. 철근 없는 걸 감추기 위해서 뭘 뭘 가르치기도 하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하고. 이것이 우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레위인들도 그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레위인들이.
지난 시간에 잠깐 했지만 다시 하게 되면 레위기 10장에서 모세와 아론이 의견 차이가 나는 대목이 있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속죄 제물을 먹으라고 했는데 왜 다 태웠느냐,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 전에 제사장 둘이 다 죽었잖아요?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향로에 하다가 불이 그들을 삼켜서 죽였어요.
죽은 이유가 속죄 제물을 태웠느냐, 아니면 속죄 제물의 그 고기를 먹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 성소 자체가, 하나님의 제사에 관한 율법의 성취가 누가 죽어야 성취된다는 사실을 아론은 알았고 모세는 몰랐던 거예요.
율법을 해석할 때, 제사장들이 율법을 가르치잖아요, 율법을 가르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의 현실태, 현실 상태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죽는 자가 발생 될 때 율법이 정말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 나는 이 방식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방식이 된다는 거예요. 레위인에게 준 방식이에요. 더 쉽게 말씀드려서 레위인은 제사나 드리고 남한테 율법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레위인 자체가 율법의 위반자로 죽어줘야 레위인에게 줬던 율법이 이스라엘 속에 생생하게 살아서 예수님 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동력, 에너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레위인이 죽어 나가는 역사입니다. 외부의 선지자 발람 선지자가 있습니다. 발람 선지자 하면 유명한 것이 민수기 22장 27절에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발람이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팡이로 자기를 때린다, 그러면 나귀를 자기의 나귀로 본 거예요. 발람은 내 나귀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발람은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해도 내가 있어요, 내가. 나 자체가 있는 거예요. “어디서 말을 안 들어, 내 나귀가!” 하고 때리는 겁니다. 이게 발람의 오해였습니다.
자기 나귀라고 여겼는데 사실은 누가 다스리느냐? 주님이 나귀를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때리고 난 뒤에 나귀가 말을 합니다. “왜 때립니까? 내가 당신 소유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 아니면 당신 죽었어. 하나님의 사자가 당신 죽이려고 했어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러한 발람 선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민수기 24장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이스라엘 내부에 왕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선지자가 아닌 외부 선지자, 모압 선지자 발람은 이걸 알고 예언을 했어요.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그들 내부에는 왕이 없어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의 괴리 현상입니다. 바깥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왕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민수기 23장 21절에도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이렇게 해서 발람이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은 특별한 민족인데 그들의 죄까지 용서한다’는 것을 외부의 선지자인 발람이 이야기해요. 그런데 내부에서는 자신의 왕이 어떤 분인지를 몰라요.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몰라요.
그 괴리 현상을 누가 노리느냐? 발람 선지자가 노렸습니다. 노려서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괴리 현상을 파고 들어가서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해서 음행을 하게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몇 명이 죽었느냐? 2만 4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람이라는 외부 선지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을 섬기도록 유도한 거예요.
그럴 때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만 4천 명이고, 이걸 멈추기 위해서 누가 등장하느냐?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서서 처음에 우상 숭배, 음행한 사람들을 죽여버렸고, 죽이니까 멈췄어요. 그러면 제사장의 역할이 뭐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민족을 처단하는 그 일을 제사장이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레위인이 자기 민족을 망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거예요. 무너지게 만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에 하는 일은 뭐냐? 교인들로 하여금 무너지게 만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머물러 있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그 레위인 중에 하나가 민수기 16장에 보면 거기에 고라 자손이 나오죠. 고라자손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내부에서 괴리 현상이 벌어졌어요. “모세 네가 뭔데, 왜 너만 가르치냐? 우리도 가르치는 사람이다. 출애굽 할 때 너만 나왔어? 우리도 같이 나왔어.”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고라에요. 그런데 그 고라 자손들이 너무 잘 아는 그 제사법에 의해서 그들은 민수기 16장 32절에 보면 산채로 땅이 갈라져서 파묻혀 망했습니다.
레위 자손이 이렇게 해서 사람 위주가 아닌 율법 위주의 이스라엘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겁니다.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것, 이것은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여호수아 7장 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리고성 하나님의 전쟁에서 한 사람이 잘못을 했어요. 아간이 잘못했어요. 아간이 잘못했는데 ‘우리’라는 전체 이스라엘이 전부 다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망했다는 그 사실, 망했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운명에 있어서 절대로 내가 거기 끼어들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실감 나게 느꼈던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라는 집단에 대해서 뭔가 할 것은 일체 없는 거예요. 그냥 우리는 그 안에서 매일 같이 나를 붕괴시키고 망하면 되는 거예요.
망한다는데서 억울할 필요 없습니다. 왜? 우리는 철근이 없으니까. 철근 없으니까 아파트 무너지는 것은, 내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마땅한 조치에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아주 쉬운 말씀을 대했습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의 편지, 알렉산더가 그렇게 공격했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는지를, 우리가 알렉산더의 입장에서 왜 격분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가를 공감하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더는 나쁜 사람이야.’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다 생각이 있어서 사도 바울을 떠났습니다. 복음을 떠난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나는 복음을 좋아한다.’ 우리가 알렉산더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알렉산더라는 것을 모르고 ‘나는 죽도록 충성하리라.’ 알렉산더는 그렇게 생각 안 한 줄 알아요?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도대체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뭐가 문제가 됐는지 그중에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에 보면…, 제가 어렵다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이 어려운 대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대목이에요.
한 사람이 범죄 하므로,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 빼놓고는 ‘우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우리가 들어있잖아요? 우리의 확정된 운명은 나 자신에게 내 운명이 맡겨진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이에요.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이 우리는 애초부터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세상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고, 나름대로 세상에서 칭송을 받는, 뭐 초전도체까지 발명했다고 소문난 그런 사람이 지금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에게 당신이 과학자로서 또는 의사로서 망하는 이유, “당신은 당신의 결정과 상관없이 망하게 되어 있어.” 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전파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당신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한다고? 소용없어 당신의 운명은 이미 망하기로 결정되어 있다.” 그게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뭐 목사 섬기고 주님 섬기고, 그거 다 자기 몫 챙기려는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아무 소용없어요. 한 사람이 범죄하매 다 죽은 거예요. 그게 바로 여호수아 7장이에요. 아간이, 물건은 아간이 훔쳤어요. 다른 사람은 하나님 섬기기에 바빴어요. ‘하나님 저는 물건에 손 안댔습니다.’ 전부 다 제비뽑아 보니까 범인이 딱 한 사람이었어요. 한 사람인데 다 망했어요.
이게 창세기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원칙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되풀이해 나가는 겁니다. “한 사람 때문에 망했어. 한 사람 때문에 망했어. 여기에 대해서 네가 동의할 거야, 말 거야?” “아, 그것은 너무 불합리합니다. 동의 못 합니다.” “그러면 네가 알렉산더야. 그러면 네가 아간이야.” 자신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해석은요, 다 거짓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유대교에 내려오는 하나의 농담 비슷한 건데요. 랍비, 랍비란 유대교의 지도자, 가르치는 자, 스승이지요. 랍비하고 부자하고 가난한 자, 세 사람이 모여있는데 랍비가 먼저 이렇게 합니다. “오, 신이시여! 나는 신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가슴을 쳤어요. 랍비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오 신이시여’라고 하니까 그걸 보고 부자도 고백합니다.
“오, 신이시여! 나는 돈만 밝히고 돈만 챙겨서 지금껏 돈버는 데 열중한, 진짜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가슴을 쳤어요. 그걸 보고 있던 가난한 사람이 “오, 신이시여!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옆에 있던 부자가 발끈 화를 냈어요.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네가 뭘 아무것도 아니라 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왜 끄집어내는데?”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할 때는요, 결코 나라는 존재가, 결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할 그런 능력도 마음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을 해줘야 돼요. 그걸 인정을 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고백 자체가 자기의 주특기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 가난한 자는 “나는 개코도 돈도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되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나는 비록 돈은 없지만 언젠가는 나도 돈 생기고 남들처럼 사람답게 사는 희망을 품고 사는 바로 이 희망이 정말 내가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왜냐하면 있음 자체가…,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있음 자체가 우리의 조상 아담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존재가 되기위해서 선악과를 탐을 내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그 아담의 속성이 되먹임 되어서 계속 우리에게 펄펄 살아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예요. 신앙 흉내 낸다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 봐야 주께는 안 통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했든 “주님, 미안합니다.” 말을 했든 일체 우리에게서 나오는 고백과 말과 행동 일체 거덜 내고 아예 받지도 않아요. 그것은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 당신은 대체, 주님이 아무것도 받지도 않는다는 이 난관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함부로 그런 소리 하느냐.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15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자, 예수 그리스도가 뭐냐 하는 거예요. 16절에 보면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18절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보세요. 사도 바울의 복음은 뭐냐? 계속해서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나오다가 마지막 18절 “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어디에 이른다? “생명에” 천국에 이른다는 게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알렉산더가 반대할 만하지요? 알렉산더나 후메내오가 반대할 만합니다.
알렉산더, 후메내오, 이 사람들 속에는 뭐냐 하면, 그들은 누가 뭐래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믿는데 거기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까지 숟가락 하나 얹는 것처럼 거기에 보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착함에다 예수께서 오셔서 어떤 일을, 죄 사함의 일 했다, 그것까지 보태서 두 개다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두 개 다 살리는 방향으로 마지막에 내 몫은, 천국 가는 몫은 내가 챙겼다, 이게 알렉산더예요. 이게 후메내오입니다.
‘우리’라는 것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나를 빼면 되는데요. 그 뺀다는 말을 설교 처음에 이렇게 했지요. 불연속성, 이어짐이 아니고 끊어짐, 나로부터 끊어짐이 내 안에 있어줘야 돼요. 그걸 아까 쉽게 한다고 ‘내 안에는 철근이 없음’, 철근 없으니까 무너져야지요. 내 안에 철근 없음을 사도 바울의 복음을 가지고 기뻐하게 되면 사도 바울을 욕하고, 비난하고, 사도의 말에 대해서 시비 걸고 할 필요 없습니다.
나의 허황됨과 헛됨을 알려준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고마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갈라디아서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갈라디아서 4장 14, 15절 보면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공격할만 합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때는 괜찮았어요.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는 이 대목이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해서 이미 인간세계는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좋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요소가 인간세계를 이미 덮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끼리의 그 ‘우리’가 뭐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나를 기쁘게 할 경우에만 하나님을 내가 섬길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이미 인간세계의 하나의 경향성, 하나의 경향이에요.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거예요. 여러분들은 불연속적이어야 됩니다. 끊어져야 돼요. 나로부터 해서 내가 뭐하고, 뭐하고…, 그걸 나락, 절벽으로 끊어줘야 돼요.
안 끊어지면 이런 소리를 해요. 이제껏 수십 년 동안 복음을 위해서 열심을 다 했는데 더 뭘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더 뭘 하란 말인가! 셜록 홈즈의 탐정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탐정이 참 예리하잖아요. 범인을 잡는데 조수보고 “야, 가서 조사해봐. 무슨 특이한 사항이 있는지.” 조수가 갔다 와서는 “탐정님, 특이한 사항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딱 하나 있다면 개가 짖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바로 그거다!’ 개가 짖지를 않았던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했다고 해서 나를 원수로 생각하느냐’ 할 때 그들이 멍! 멍! 짖어야 돼요. 욕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아무 감각이 없는 이유가 사도 바울이나 예수 자체를 완전히 일상에서 삭제해 버렸으니까 성경에서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님이 무슨 소리 하는지 관심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개가 짖지를 않는 거예요.
일상이 조용한 일만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거예요. 무탈한 삶, 그것만으로 충분하겠다는 거예요. 참~ 알렉산더 고마워요. 후메내오도 연속적으로 고맙고요. 주보 뒤에 보면 또 한 사람이 나와요. 【그리고 요한삼서 1:1:9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해서 사도 요한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역시 이 사람도 사도 요한에게 대든 사람,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이점 아~, 간파하지요, 놓치지 않지요. 복음을 전파하는 데는 가룟 유다 같은 그런 자들이 등장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와 인격, 품위, 교양 전혀 상관없이 그들은 다 지옥 간다는 이 놀라운 이야기,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도 멍멍 안 짖는다는 것은 이건 완전히 죽은 자죠. 오히려 네가 점잖게 살던, 품위가 있든 상관없이 너는 망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일단 짖고 봅시다. 일단 짖어야 돼요. “너무 허무합니다!” 하고 짖어야 돼요.
짖고 난 뒤에 주의 성령이 와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네가 하는 행동과 어떤 행동거지나 어떤 말, 태도, 인상에 관계없이 “너는 천국!” 할 때, 우리는 그 불연속성, 나를 끊어주시는 불연속성에 참여해야 돼요. 감사해야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 한 번 참석하자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고…, 자기를 끊지를 못해요. 너무 불연속성을 모르고 연속적으로, 연속적으로, 그냥 밀어붙이고 갈 데까지 가 보겠다는 겁니다. 왜, 왜, 왜 그래야 되는데요?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겠지 뭐. 무슨 내 몫이 있겠지.’
이 세상은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화폐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화폐예요.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한테 왔을 때 실수한 거예요. 자기가 화폐인지, 자기가 돈인지, 자기 자체가 돈인지 모르고, 돈은 숨겨놓고, 자기 내부에 돈 숨겨놓고 영생 얻을 생각을 한 거예요. 주께서는 ‘네 속에, 한 사람이 범죄한 결과물이 네 속에 있다’는 거예요.
아담이 범죄한 그 반복되는 사건이 네 속에 있다는 거예요. 챙길 것 챙기고 더 챙기면 된다, 하나님 믿고 거기에다 예수님까지 알면 나는 천국에 합격, 패스, 통박을 이래 잡은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처럼. 성도는 예외예요. 교인들처럼.
주께서 “네 모든 건 다 무너져라, 무너져 버려.” 철근이 없으니까 무너져야죠, 마땅히. “무너진 채로 그다음에 나한테 오라. 텅텅 무너진 채로” 그것이 바로 홍해에 같이 새로운 우리를 형성하는, 같이 예수님과 더불어 바닷속에 빠졌다가 나와서 그때부터는 내 양식이 아니고 주님의 양식, 내 물이 아니고 주님의 음료, 내 반석이 아니고 주님의 반석, 이것이 오늘날 성도로서 굳혀진 ‘우리’입니다. 그 속에 사도 바울 있고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과 괴리된 게 아니고 교회 현상을 그대로 알려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날마다 이 세상에서 무너지는 그 즐거움, 안이 텅텅 비어있기에 마땅히 무너져야 한다는 그 기쁨이 소실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