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악한 자 생산

아빠와 함께 2023. 8. 13. 19:39

악한 자 생산 

2023년 8월 13일                디모데후서 4:17-18

(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는 피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결코 능동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건져내시고’가 이점을 반영합니다.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맹수같은 초월적 세력에서 자신이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이 상대보다 세다면 굳이 피동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가 사도보다 더 셉니다.

도대체 사도는 어디서부터 건짐을 받은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사울’로 인정한 그 집단에서부터 건짐받은 겁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가 죽는 데 있는 실무책임자로 관여했습니다. 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부심으로 거칠 게 없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예수라는 존재는 이미 고인입니다.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위하는 방법은 예수 믿는 자를 처단하는 것이라는 논리에 이르렀던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하자가 있을 수 없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유대교 집단이 바로 ‘구원받게 된 사도 바울’에게는 맹수같은 단체였던 겁니다.

즉 사도 바울에게 있어 ‘악한 자’는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교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야기된 새로운 차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 이 세상에 인간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 내부에 인간보다 더 센 존재가 들어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마의 가현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악마’입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의 약속 작업에 인간은 빠집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라고 나옵니다.

우리 주님과 악마의 싸움판이 이 세상입니다. 인간은 빠지되 악마의 종이나 주님의 종이 되어 인간의 독자성을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냄비 안에 쥐가 들어가면 비록 부엌 바닥에 냄비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안에 쥐가 들어있는 것처럼, 인간은 인간보다 센 존재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이것을 인간을 속이기를, 인간이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들은 자기와 타인과의 차이만 고집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건짐’이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완전한 자아로 발전하고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악한 일’ 혹은 ‘맹수’가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최후의 맹수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를 격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이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기존의 인간 속의 악마가 ‘악한 자’로 발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의 소유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소유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기 소유가 없고 그 대신 주님의 칭찬만 있을 뿐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인간은 그 내부에 딱딱한 복숭아 씨 같은게 있어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씨가 파괴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성도는 하나님의 기능만 부여받게 됩니다. 그 기능은 천사가 하던 일입니다. 천사의 일은 이 지옥을 답사하는 일입니다. 성도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예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밟히고 밝혀야만 되는 길입니다.

오늘날 인간 자체가 하나님에 있어 악한 자가 되는 연유에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예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품고 있는 핵심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악한 자’가 생산되는 현장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7:10-11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남자가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민족과 가는 곳마다 전쟁을 일으키게 하시는데 그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곡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시인 할례 및 율법이 자기들과 함께 있기에 그 거룩성으로 전쟁에서 늘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상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정착되고 난 뒤부터 이스라엘은 무너져가는 조짐이 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외부에서 멈추는 것이 내부로 뱡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소용없고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온전한 할례라는 겁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께 대드는 대항력같은 것이 노골화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마음 할례’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마음의 할례’가 되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태도입니다. 즉 말씀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면서 인간 내부에 예수님에 대한 거부 자세가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 안에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안’에 자신의 절대적 신처럼 살기를 원하고 있음이 발각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자기 안’에서 ‘예수 안’으로 이동을 말합니다. 그들 악한 자들은 기껏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만 내놓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지만 막상 예수님 앞에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미리 확보한 자기만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자리가 무덤이 된다고 할지라도 평생을 다 바쳐 그 무덤을 내부를 장식하여 자기만의 세계을 즐기고 싶어합니다. 바로 이런 악마적 성향에서 사도 바울을 건짐을 받은 겁니다.  

천국은 ‘나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 자리’입니다. 따라서 ■나의 자리가 철저하게 주님으로 밟혀서 내가 곧 악한 자였음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동시에 영생을 얻은 자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리가 결국 사라질 자리에 불과함을 도리어 과감하게 자랑하고 선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디모데후서 4장 17-18절(악한 자 생산)23081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17-18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건져낸다는 것은 건짐받기 전의 위치와 건짐받은 후의 위치의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차이를 의도적으로 주입하시는 분이 바로 18절의 “주께서”라고 되어 있어요. 주께서 차이 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도 바울에게 찾아왔고, 사도 바울에게 찾아온 그 결과가 18절의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17절 끝에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이렇게 피동성으로 되어 있어요.

수동성이라고 하죠.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강제로 나에게 일을 벌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동작하게 하시는 그 주인공은 주님이고, 나는 그 동작의 결과물로서 지금껏 주님에 의해 붙잡혀서 나는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피동적으로 참여하게 된 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천국은 내가 들어가고 싶어서는 갈 수 없는 동네고 그런 세계라는 것을 이 지상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죠.

출애굽기 3장 2절, 3절에 보면 모세가 피동적으로 움직이기 전의 활동과 출애굽기 3장에 와서 피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그 중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떤 차이를 줬는지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입니다. 그 전까지는 모세가 독립정신이 강한 독립투사였죠. 불쌍한 우리 민족, 내 힘으로 내가 권력 있을 때 한 번 끄집어 내보자, 하다가 작살 났습니다. 수배자 신세 돼서 쫓겨났죠.

그게 바로 떨기나무 이전의 상태라면, 떨기나무 이후에 모세는 철저하게 피동적으로 움직여요. 그게 모세 인생 내부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모세가 양 무리를 치는데 호렙산에 이를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그렇게 나타나시고 모세가 ‘이게 뭐지?’ 하고 다가갔죠? 그런데 거기서 “신발 벗어라.” 네가 신발 벗으라는 건 이 되라는 거예요. 너 자신이 너의 주인이 아니고 나의 종으로 살아야 된다, 이게 바로 그 ‘차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냐면, 어떤 특정인이 있는데 그 특정인이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그리고 뭔가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면 그 사람의 활동을 통해서 천국은 분명히 있다, 가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뭐 죽어봐야 알지.’ 이 문제가 아니에요.

자꾸 우리는 능동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데 주께서 그걸 피동적으로 바꾸는 이유는 그 차이 때문에 그런데요, 그 차이를 집어넣을 때 주께서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는 건 이겁니다. “너는 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냐? 너는 왜 매사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왜? 내가 너 할 수 있는 걸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잖아.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나에게 내놓아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주여 이걸 원하십니까? 이거 드릴까요? 이거 주께서 바라고 계시죠?” 제발 그런 것 좀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피동성이에요? 자기 즐거움이죠.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것을 한 곳 찾으라면 이것입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여기서 이 사자의 입, 차이를 드러내기 전에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그것. 사자가 맹수잖아요. 라이언(lion), 이 맹수라고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는 그런 완력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살아오면서 내가 내 식대로 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빠져나오는 그 차이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천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좀 어렵습니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될 것은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이 말이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가 지옥과 천국 차이잖아요. 우리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 매여 사는 것,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건 우리가 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누구로부터 소유가 되지 않고 내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것,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누구의 철저한 소유가 된다는 것, 이건 할 수 없는 겁니다. 나는 나의 것이 있다는 것, 우리는 자랑스럽죠. 내 것이 있다는 걸 막 자랑하고 싶어해요. 그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 것이 없다는 것, 이 피동성은 피동적으로 만드는 어떤 외부의 외세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 그건 말도 안 되지. 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상식 없는 소리를 하면 되겠어?” 이렇게 분노가 막 나올 거예요.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에서 나오는 직원 세 사람이 있는데 그중 두 사람이 자기 것이 없어요. 그런데 있는 게 뭐냐면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는 이 주인 되시는 분의 칭찬만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충성된 종아 네가 충성해 착하다.’라고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그 칭찬만 있고 내 것이 없다는 조건 하에 칭찬을 받는 겁니다. 주인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이유가 ‘이게 네 일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내 일이라고 생각해?’라는 것을 탐색하기 위해서, 테스트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킨 거였거든요.

이렇게 방금 이야기한 이것, 이걸 다 모아서 차이를 만든다면 어떤 차이냐? 내가 내 안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 안에 살고 있는지의 차이입니다. 내 안에 살고 있으면 땅 위에 살고 있는 거고, 예수 안에 살면 천국에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 18절에 사자의 입에서 건졌다, 모든 악한 이에서 건졌다, 할 때 우리가 여기서 뭘 중점으로 알아야 하냐면 ‘악한 일이 뭐였던가? 도대체 나에게 “꼼짝 마라!” 했던 그 사자의 강력한 이빨이 뭐였던가?’

이것을 오늘 설교에서 중점적으로 알아야 해요. 악한 일이 뭐냐는 거예요. 악한 일 또는 악한 자가 뭐냐는 거예요. ‘악하다.’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유대인, 유대인들의 종교. 깊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에게 악한 자가 누구였냐? 사울이었어요. 나를 사울로 인정해주는 집단이 악한 자의 집단이었습니다. 사울에서 바울이 되어 빠져나온 거예요. 이게 지옥에서 천국으로 빠져나온 거예요.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온 거예요.

그때 내가 속해 있던 내 세계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내어놔도 얼마든지 하나님 믿는 것으로 인정받는 그 집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한꺼번에 여러분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 요청을 받고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구약 성경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어떻습니까?” 그걸 몇 시간에 걸쳐서 강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청이 와서.

구약은 외부에 있던 말씀이 내부로 꼬꾸라지게 들어가는 것이 구약 역사에요. 외부에 있던 말씀, 인간집단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 집단의 입장에서는 뭐냐? 내부가 아니고 외부에요. 외부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계시해서 드디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들어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니까 외부에 있는 적들, 이방 민족이 있잖아요, 이방 민족과 부딪히면서 전부 다 승리, 승리케 한 거예요. 여리고 성도 무너지고, 아이 성도 무너지고, 약속의 땅의 토박이들이 갖고 있던 것 다 무너뜨리면서 하나둘 정복해 나가면서 드디어 약속의 땅을 접수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역시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외부가 아니고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외부에, 내 바깥에 있을 때는 창세기 17장에 보면 너희가 할례를 받으라, 했어요.

그래서 할례받는다, 남성의 생식기 끝의 표피를 자르면 영원히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고 하나님이 약속했단 말이죠? 그거 할 수 있잖아요. 우리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거. 좀 아프기는 하지만 사흘만 참으면 되니까. 할 수 있는 거예요.

할례 행하고 적들 우리에게 무너지고, 그거 누가 안 합니까? 기분 좋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할례 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는데 그 할례에서 의미가 점점 더 추가되더니만 “너희가 마음의 할례는 왜 안 행해? 마음의 할례 행해야지.” 이렇게 나왔던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17장에서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요. 창세기 17장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그냥 육신에다가 문신 새기듯이 표시하게 되면 너희는 영원한 나의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렇게 나와 있단 말이죠.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스라엘 역사 전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나중에 선지자에 의해서, 선지자가 계속 투입되면서 뭘 하냐면 “너는 왜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어?” 하고 자꾸 추궁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 주는 현장에서 나에 대한 악한 자가 발생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 악한 자가 발생 되는 그 공장 현장, 악한 자 생산 공장 현장으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잡은 거예요. 우리 인생이 그런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뭐냐? ‘내 악한 자 물러가라!’ 이게 우리 인생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너의 인생 속에서 진정 하나님의 악한 자가 누구냐를 생산하는 현장으로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말씀을 자꾸 기피하고 밀쳐버리면요, 내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에 악한 자인지 말씀으로, 논리적으로 정립이 안 돼요.

“뭐 죄 많이 지었으니 나쁜 놈이죠.” 그 정도가 악한 자가 아닙니다. 신약에 오면, 구약 사람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나중에 또 회개를 해요. “우리가 과거에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안식일도 안 지키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구나. 그렇다면 십일조 내고, 즉 복지 펀드를 해놓고 우리가 선배들이 실패한 걸 되풀이 하지 말자. 우리 역사 속에서 교훈을 배우자.” 뭐 이런 식이죠.

그렇게 했는데 그들이 뭘 빠뜨렸냐? 이걸 빠뜨렸어요. 하나님의 악한 자를 하나님이 생산한 것이 아니고, ㉰진짜 악한 자는 예수님의 악한 자가 진짜 악한 자라는 사실을 그들이 누락시킨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상대했어요. 하나님, 하나님만 상대했어요. 가상의 하나님, 상상의 하나님이었던 걸 몰랐던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가상의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살해하는 현장에서 자기가 실무를 담당하는 자로 거기 참여했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는 지금 하나님에게 잘해본다고 그 짓 했거든요. 사울 입장에서는 당당하죠. 왜냐면 예수님은 고인이잖아요, 죽은 사람이잖아요. 살아 있는 하나님 안 믿고 죽은 예수를 왜 믿냐는 거죠. 도대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사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너무나 충성 됐다는 그 이유 때문에 예수에게 원수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악한 자가 누구냐면, 하나님 믿는 자에요. 악한 자에서 건진다는 말은 하나님 믿는 집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게 바로 천국이고, 그게 구원이고, 그게 바로 악한 자로부터 탈출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믿는 신앙 집단에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라는 뜻이에요.

왜 사도 바울 생각이 그렇게 되었는가? 물론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 계시 듣고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알게 된 계시의 내용이 뭐냐, 이겁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인간 자체가 없었던 거예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있어요. 있다고 하는 것은 여자의 후손 있고, 뱀의 후손이 있어요. 거기에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있어도, 없는 존재예요. 실질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실질적으로 이 우주를 주의 나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이 나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나서서 될 일이 아닌 이유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은 바로 악마의 가현체가 되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있는 존재는 악마예요. 배후에 악마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악마의 아바타가 되는 거예요. 가현체, 눈에 보이고 형태가 있는 어떤 체, 실체,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천상의 기능을 해야 할 천사의 가현체가 되는 겁니다. 왜냐면 천사에게는 육신이 없어요. 육신이 없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의 기능을 성도에게 주는데 그 기능이 지옥 답사 기능입니다. 지옥답사기능. 마태복음 10장, 11장에 보면 열두 제자한테 그 기능을 맡겼어요.

원래 이스라엘의 본질이 천사 집단에서 원형을 갖고 있어요. 야곱이 꿈을 꿀 때 사다리가 왔는데 그 야곱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야곱은 하나의 껍데기고 천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야곱의 육체를 향하여 사다리를 타고…, 짚라인 알죠, 짚라인, 주르륵 미끄러져 야곱 육체로 전부 쏠리고 있는 거예요. 야곱이 꿈꾸면서 그걸 발견한 겁니다.

창세기 28장 11절,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그래서 야곱이 그 꿈을 꾸고 난 뒤에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한 거예요. 그것도 야곱이 또 잘못 생각한 거예요. 특정 지명이 하나님의 문이 아니고 야곱 네가 하나님의 문이에요, 야곱 네가! “그러면 야곱 내가 하나님의 문입니까?” “아니야, 인간은 없어. 사람은 없어.” “그러면 왜 내가 하나님의 문입니까?” 네 안에 이스라엘이 들어있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문입니까?” “옳지” “그럼 내가 이스라엘이니까 내가 이스라엘 문이겠네요?” “아니야.”

이스라엘이 누구냐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지금 구약 성경 해석해 드리는 겁니다. 구약 성경에서 인간을 사용하되 인간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배후에 숨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저쪽에서는 인간을 배제하고 숨어있는 악마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맞짱뜨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 이스라엘 역사를 방해한 것이 뭐냐? 나도 사람이다, 내가 사람이라고 우기며 나왔던, 자기가 여전히 사람이라고 여겼던 자들의 집단으로 인하여 주의 일이 훼방되고 방해되는 거예요. 인간은 왜 사람이라고 주장 하냐면,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행세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하겠다는 겁니다. 주께서는 “하지 마, 제발!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지 마. 그게 주의 일에 도움이 안 돼.”라는 거예요. “제발 좀 빠져줄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악한 자라고 하는 것은 사울에서 바울로 되지 못한 자,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것에서 못 빠져나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게 왜 마귀에게 속했느냐는 것은,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서 1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들어본 분들이 많을 거예요.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 그 대목’ 이렇게 할 거예요.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666이니라. 마트 갈 때 조심하세요. 또 바코드 어쩌고 하는지.

여기에 인간은 이름을 못 붙인다는 거예요. 짐승의 이름만이 인간의 이름이에요. 인간의 이름은 몽땅 다 짐승의 이름이에요. 그 짐승의 이름을 숫자로 표현하면 ‘666’입니다. 무슨 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666’이에요, 인간 자체가. 악마는 인간을 앞장세워서 “네 할 일 해라. 너 열심히 하면,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이 인정해준다.” 자꾸 이런 식으로 뒤에서 부추겼던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만들어진 겁니다. 교회라는 종교 집단이 만들어진 거예요.

사도 바울의 탈출은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탈출은 그 종교 집단으로부터의 탈출이었어요. 그러니까 유대교가 사도 바울을 현상금 걸고 죽이라고 난리도 아니었죠. 가는 곳마다 사도 바울이 유명세를 떨치면서 죽음의 표적이 된 겁니다. “배신자여~” 이 배신자여. “누구야?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다른 말로 하면 사도 바울에게, 사도에게 그렇게 욕하는 거예요. “너 어떻게, 왜 그렇게 사는 거야?” 이런 거지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사자의 입에서 건져냄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 왜 그렇게 사는 거야?’ 그 대목은 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가사에 나오는데 제가 수십 년 전에 굉장히 인상이 깊었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 듣고 막 울었어요, 가사가 너무 절절해서. 어떻게 내 신세를 그렇게 잘 보여주는지. 노래 가사를 보게 되면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 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안고 놓지 않으리
헤어져 있던 시간만큼

자, 여기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하는 건 지금 좋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 신세가 서글퍼서 하는 이야기에요. ‘왜 난 이것밖에 안 돼?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내 인생 왜 이렇게 되었어?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어? 도대체 탈출구는 없는 거야?’ 여러분들이 여기 교회에 앉아 있어서 그렇죠, 교회 밖으로 나가보세요. 세상에서 모든 만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속 밑에 뭐가 깔렸냐면 ‘친구야,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하고 신세 한탄하는 겁니다.

자기가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자기가 사람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사람은 없는데 꼭 사람이고 싶어 해요. 그것도 못난 사람이 아니고 잘난 사람.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만드는 차이에요. 못난 인간 따로, 잘난 인간 나를 포함해서 따로. 인간은 그 차이를 가지고 승부 걸면서 이 땅에서 내가 성공했다는 티를, 나보다 못난 사람을 대조해 차이점을 통해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싶은 거예요.

주께서는 그 차이, 차이 남의 차이에요. 차이의 차이에요. 그런 차이는 차이로 인정하지 않는 그 차이. 그 세계에서 나를 건졌다는 거예요.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누가 인간이냐 시합하는 그 뭐 같지도 않은 거기서 건진 거예요. 여러분 하와이에 산불 난 거 아시죠? 하와이는 태평양의 진주라고 했어요. 산불 나서 시체가 바다에 둥둥 떠다닌답니다. 태평양의 진주가 아니고 태평양의 나가리 됐어요. 남자들의 로망이 그거 있잖아요. 하와이 가서 모히또 한 잔 하는 거. “네가 가라 하와이!”

그게 뭐냐면, 이 궁상맞은 서울 생활, 이 고시원 생활과 평화로운 하와이…, 여행사 가면 하와이 야자수 그림 있죠, 그 그림. 꿈같은 파라다이스, 그 차이. 그 차이가 나의 삶에 동력을 준다는 거예요. “아이고~, 제대는 언제 하노?” 이런 거. 우리 인간 아닙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사람 아니에요. 사람이 더 나은 사람 같은 거 없습니다.

인간 속에 마귀 들었어요. 하나님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해요. 흙 취급하는 거예요. 인간 속에 복숭아 씨앗이 들어있는 거예요. 복숭아 씨앗.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습니다. 그 말씀이 복숭아 씨앗까지 안 오고 외부에 남아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율법 배우면 우리나라는 우리 이스라엘은 적들을 이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복숭아 씨앗을 노리고, 그 복숭아 씨앗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라는 그 점을 노리고, 하나님 나름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 우리를 왜 자꾸 치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미 신약에 있는 그 차이를 미리 이스라엘에게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 사이 차이를 내서, 이 예루살렘이라는 지정된 공간의 차이가 나중에 신약 시대에 오면 하늘과 땅 차이, 천국과 지옥 차이라는 것을 미리 율법을 통해, 예루살렘의 실존, 그 존재를 통해서 알려줬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게 바로 복이라는 것이 시편 84편에 나옵니다. 시편 84편은 교회 좀 다닌 사람이면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죠.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여기 뭐 참새도 나오고 제비도 나오고 다 나와요. 3절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84편에서 왜 이 특수한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을 마련했는가? 예루살렘은요, 이 버림받은 지상에 유일하게 하나님 자기 소유로 등재된 부동산이 예루살렘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 갖다 버려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자기 소유로 부동산을 마련한 게 예루살렘이에요.

왜 마련했느냐?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을 집결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자, 복 있는 사람이 뭐냐?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이렇게 시작해서 시편 1편 끝에 보면 공간이 구분이 됩니다. 죄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시편 1편에는 아직까지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죄인은 의인의 집단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그리고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심판 내리기 위해서 심판 안 받는 장소를 차이 나게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마련해놓고 나머지는 다 심판, 저주해서 지옥 보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땡 잡았다, 복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시편 84편 5절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온의 대로, 길, 말씀 속에 길이 있는데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는 그 복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복을 주시려면 길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 했으니까 우리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좀 상세히 설명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밟힌 사람은 그 사람이 길이 돼요. 예수님에게 밟힌 사람. 원래 잡초가 많은데 밟으면 나중에 잡초 많더라도 그게 길이 돼요. 주님께서 야무지게 밟고, 피동적으로 밟힌 사람은 바로 그 자체가 이 세상에 천사의 기능을 보여주는 주님의 길이 되는 겁니다.

야곱에게 천사가 와르르 쏟아졌을 때, 야곱이 주님은 아니에요. 그러나 주님으로 통하는 길로서 활용되기 위해서 주께서 야곱을 야무지게 자근자근 밟으신 거예요. 밟을 때 야곱도 자기 안에 마귀 들어있거든요. 악한 자가 있잖아요, 악마, 주님에 대한 대적자. 말씀으로 그걸 뚫고 들어오는 겁니다, 말씀이.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으로 밟히지 못하고, 뚫고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말씀이 오면 그걸 피해버려요. 무슨 뜻이냐면, 복숭아 씨앗이 내뿜는 그 특질을 그대로 바깥으로, 도로 반발심으로서 말씀에 대항하는 힘으로 그걸 뿜어내 버려요. 뭐라고 하냐면, “아, 예수님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라.” 소원이 뭐냐 하면, 예수님 없는 곳에서 살고 싶은 게 소원이에요. 교회 나오면서도요. 희한하죠?

그러면 그걸 어떻게 판단하느냐? 주님 없어도 되는데 내 것 없으면 용서가 안 돼요. 하나님이든 주님이든 내 거 가져가면 용서가 안 돼요. 그게 딱딱한 복숭아 씨앗 같은 딱딱한, 그러니까 마귀로부터 완전히 훈련받은 똥개 된 거예요. 주님한테는 짖고 마귀한테는 꼬리 흔들고. 이런 사람들은 피서는 가되 이 세상에서 탈출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평생에 자기 내부, 자기 안에 있으니까 예수 안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으니까 자기 안을 가꾸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이미 이 세상을 인간은 다 무덤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런 소리 듣고도 ‘무덤? 그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자기 내부를 아름답게 꾸미는데 전력을 다해요. 평생을 다 보태서 자기 내부를 아름답게 꾸며서 자기가 살만한 공간으로 만드는데 모든 역량을 다 투입합니다.

이게 세상 사람이에요. 세상 사람이 직업이 많더라도 솔직하게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직업이 뭡니까?” 나는 뭐 농부다, 어부다, 하지만 다 거짓말이고요. 진짜 직업은 내 무덤 내부 인테리어업자예요. 모든 인간이 자기 앞만 살 만큼 가꾸면 그걸로 됐다는 겁니다.

그 안에는 피동성이 없어요. 자기가 하나님이에요. 자기가 하나님으로 살고 있는데 무슨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이것이, 인간은 자기 무덤 밖으로 못 나가는 존재로 평생을 무덤 안에 갇혀 있으면서 무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분과의 차이점을 그들은 발견하질 못한 겁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십자가 달린 그 현장인데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 대목에서 그 불신자들이, 지옥 갈 자들이 왜 지옥 가야 하는지를, 무심코 자기의 본마음을 십자가 앞에서 토해내고 말았어요. ‘예수여, 네가 널 구원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참……. 그러니까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나봐라. 나는 내 식으로 살려고 애쓰는 걸 봐. 난 이만큼 살았잖아. 그러니까 너도 네가 사는 식으로 그쪽으로 생각을 해 봐.’라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조언하고 충고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런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내가 열심히 알아서 잘살고 있는데 성경이 왜 필요해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 성경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있는 게 뭔데?” 이게 성경에서 묻는 거예요. “그래, 네 말대로 성경이 없다고 치자. 그럼 있는 게 뭔데?”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있잖아.” 하잖아요. “아니?”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안개 같아서 만지면 없어요. 곧 없어요, 곧.

우리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은 떠났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가 있는 곳에 영원히 계실 주님이 떠났다는 말은 우리가 있는 곳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떠난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되었으면 적어도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있는 곳은 이것은 없는 곳이다.” 그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있는 곳은, 내가 살고자 하는 이곳은 없어질 곳이다. 나도 같이 덩달아 없어.” 왜 이 말을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은 싫고, 주님도 싫고, 하나님도 싫고, 나는 좋은데 우리의 앞길, 우리의 미래, 누가 나한테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직 제가 구약 성경에 대해서 마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대적자가 누군가를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를 계속 더 해야 어느 정도 구약이 틀이 잡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질 때에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가지고 어디로 보내느냐? 모세가 나왔던 그곳 애굽으로 다시 모세를 보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히브리인들을 건지기 위해서 모세를 보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히브리인들을 건지기 위해서 모세를 보낸 게 아니고요, 인간이…, 히브리인들은 몰라요. 그들도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몰라요. 애굽인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만 알아요. 모세도 희미하게 알게 되었지요. 뭘 모르느냐 하면,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악한 자가 집결되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집결하도록, 악한 자들을 생산하도록 하나님은 이 세상을 허용했다는 사실을 세상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에 가서 애굽의 바로왕으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참 이런 게 성경에서 어려운데요. 바로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지도자치고 그렇게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본의 아니게 피동적으로 악해야 돼요. 누구 앞에서? 모세 앞에서. 특히 모세의 지팡이 앞에서 악해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이 땅은 악한 자를 생산하는 현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악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악하도록 유도하시는 겁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악함의 극단, 악함의 극단을 체험해주셔야 돼요. 이게 복음입니다. 인간도 아닌 게 그 주제에 천당 가려고, 제발 좀 그러지들 마세요. 천국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주님의 세계에요. 우리가 훌쳐보내고, 떨쳐 보내고, 우리가 조롱했던 분의 세계에요. 왜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갑니까? 말도 안되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분이 오셔서 뭘 만드느냐? 왜 우리가 예수를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지를 우리가 이 땅에서 남은 인생 살면서 그걸 극대화 시키는 그 작업을 주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지구온난화 현상이니 엘니뇨 현상이 극대화되고 뭐 라니냐 현상이 어떻고, 어려운 용어 써 가면서 어쨌든 간에 바다의 수온이 높아가지고 그야말로 세상의 환경이 개판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종잡을 수 없고 통제 불가하게 되었다. 무슨 태풍이 인간도 아니고 갈지자로 움직이고 오면 오는 것이지 뒤로 갔다가 다시 왜 이런 식으로 오느냐 말이지요. 태백산맥을 넘은 태풍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예요. 이거는 뭐 미친거지요. 자연이 미친 거예요. 그럴 때 사람들은 모든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 외부에 있어요, 외부에.

내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있다고요. 가뭄이고 산불이고 태풍이고. 너무 덥다, 너무 춥다, 석유가 고갈된다, 뭐가 없어진다, 전부 다 내 외부의 일이에요. 마음의 할례하고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 말씀은 뭐냐 하면, 우리 내부에 꽂아요, 우리 내부. 우리 내부에 복숭아 씨앗이 있는데 그 복숭아 씨앗이 뭐냐 하면, 나는 내 안에 살고 싶은 거예요. 이게 무덤이든 뭐든 간에 내가 내 안을 예쁘게 인테리어 해가지고 그 내 안에 살면 그만인 거예요.

이것은 타고난 본성이라서 내가 못 고칩니다. 고치지 마세요. 그걸 못 고치는데 어떻게 그걸 고칩니까? 차이를 내는 것은 주님 몫입니다. 주님이 할 일이에요. “내가 너하고 다르다.” 이게 차이잖아요. “너는 네 안에 살지? 나는 내 안에 산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에 들어간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꼭 오늘날 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의 리얼리티, 눈에 보이는 게 다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자기 바깥의 일에 신경 씁니다. 신림동먹자골목에서 칼 들고 설치는 그것, “하~, 세상이 무서워서 살겠나!” 주님께서는 “네가 더 무서워 네가, 네가 더 무섭다고! 네가 너를 질식시켜서 네가 너를 지옥보낸다는 말이다. 네가 너를!”

자기 안에 복숭아 씨앗 있는 것은 모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거예요. 갑자기 호신용 무기 싸서 뿌리는 것 연습해 보고, 갑자기 태권도 배우고…. 그게 바로 주께서 악한 자를 주변에 깔아놓은 이유잖아요. “거봐!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 너밖에.” 목사가 목회하면 자기 교회밖에 몰라요. 자기 교회가 복숭아 씨앗이에요. 마귀의 전당입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어디서 건짐을 받았느냐 하면, 사자 입에서, 사자 이빨에서 건짐을 받았어요. 사자라 하는 것은 라이언(lion), 이것은 우리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로소 자기가 구원받고 난 뒤에 무엇을 증거하느냐 하면, 내가 내 능동적 행동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들은 자꾸 목사보고 뭘 요구하느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갑니까?” 천국가는 방법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마세요. 할 수 있는 것.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을 내놓으세요, 할 수 없는 것. 웃을 일이 아니에요 지금. “수련회 참석할 수 없었는데 참석했습니다.” 이게 바로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게 하셨다는 두 개 다를 이야기하잖아요.

요한 스트라우스의 <박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바람둥이 남자, 귀족이죠, 돈은 있고 심심하고 할 일이 없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바람피울 상대자를 얻기 위해서 가면무도회에 참석했어요. 가면무도회에 가면 쓰고 떡 참석해서 대화해보니까, 또 태도 보니까 자기 이상형이고 ‘아, 저 사람 같으면 연애할 만하다’ 한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둘만 있을 때 가면 벗기예요.

둘 다 흥미롭죠. 가면을 확 벗으니까 자기 아내였어요. 인간은 누굴 상대해도 자기 얼굴이에요. 자기와 똑같이 ‘우리 망한다’는 말을 못하는 존재들이에요. ‘나는 망하고 있어’라는 말을 못 하는 똑같은 존재들이에요. 해답도 없고 진리의 어떤 대책도 없으면서, 망하고 있고 늙어가고 있으면서 기어이 끝까지 나는 사람이고 싶다는 거예요.

사람 없어요. 사람은 없습니다. 아바타예요, 그냥. 사람 없습니다. 그냥 흙덩어리인데 마귀가 다루느냐 아니면 성령이 다루느냐 그 차이뿐입니다. 마귀가 다루면 나는 내 안에, 성령이 다루면 우리는 주님 안에, 아담에 속한 인간 자체가 악한자임을 들춰내는 식으로 주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지난주 설교한 로마서 5장 그 대목이 제 마음에 너무너무 은혜가 되고 너무너무 여운이 남아서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생명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3장 17절 말씀처럼 생명이란 예수님 알면 생명돼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은 보면 천국 안 갈 사람처럼 이야기하는데 천국 가세요! 그냥. 가는데 예수님 알면 천국 가요. 예수님 알면 천국 가는데 예수님 아는 방법은 예수님나를 내가 모르는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그 사실을, 주께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사람은 이미 영생 얻은 사람입니다.

시편 51편, 참 두고두고 봐도 감사한데요, 시편 51편, 제가 아까 예배 중에 언급한 거예요. 4절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그리고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다윗이 새삼스럽게 하게 된 것은 나단 선지자 때문이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평생을 밧세바 만나고, 그 남편 우리야 죽이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주께서 이거 하나, ‘네가 바로 애초부터 죄 중에 태어났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왜 다윗이 알아야 됩니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거든요. 진짜 이스라엘 왕은 백성들도 왕과 똑같아야 돼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죄를 행해서 죄인 된 것이 아니고, 인간은 뭘 행하고 안 행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주께서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그 절차가 뭐냐? 주의 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악한 자가 되어야 됩니다.

주께서 잘난 나를 자근자근 밟아서 악한 자로 될 때 그 밟힌 우리가 주께서 가신 길이고 이게 천국 길이에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자, 죄인은 뭐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우기는 자, 이게 죄인이에요. 우리는 아무리 복음 들어도 돌아서면 ‘역시 내 할 것은 내가 해야지’ 그걸 주께서 그때그때 마다 밟아 주십니다.

뭐 맹장에 문제가 있다든지, 관절에 문제가 있든지. “너는 완전하다면서 왜 관절에 문제가 있어?”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잘났는데 왜 그렇게 늙어가고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뭐가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는 딱 하나, 내가 사람도 아닌데 사람인양 지금 가상 가면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 벗은 가면에 진리가 있습니다. 가면 벗으면 아무것도 없고 벗은 가면에 악한 자라는 그 진리 내용이, 주께서 붙여준 그 정보가 벗은 가면에 있어요. 가면 벗지 마세요. 그 진리 내용, 악한 자라는 그걸 덮어쓰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성도는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부엌에 있는 냄비가 움직여요. 보니까 그 안에 벌레가 들어있어서 그 벌레가 냄비를 움직이니까 냄비가 움직였듯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네가 한 게 아니다. 너는 인간도 아니고 너는 그냥 주의 기능자야.”라는 식으로 우리를 움직여줄 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악한 자에서 제가 빠져나왔습니다.”라고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옵소서. 무엇이 그렇게 주의 복음을 반발하고 있는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싫어하게 만들고 예수님보다 내가 더 좋게 만드는지의 그 사실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바로 그 사실을 우리가 돌아서서 기뻐하면서 진리로 반길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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