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오라
2023년 7월 30일 디모데후서 4:9-13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4: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4: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사도는 성경을 마저 마무리하도록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고 남은 이 세상에 구원받는 방식은 말씀을 들음으로서 성립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권한은 사람에게서 나온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사도 바울의 특별함을 믿느냐는 겁니다. 인간들의 평소 생활은 믿는 것이 행하는 겁니다. 물건을 만든다 든지 농사를 짓는다 든지 환자를 치료한다 든지 하는 겁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사도 권한은 ‘사람들에게 난 것’ 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인간들은 평소에 사도가 전하는 말씀에 의존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디에 의존해서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인간됨’을 믿고 삽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말씀 뼈대에 덧입혀진 그냥 흙 구조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들까지도 그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사람들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서 ‘흙이 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으로 중무장 된 요즘 사회에서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자기 자신을 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재질은 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보는 관점은 포기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악마와 한통속이 되고 난 뒤에, 인간들은 악마로부터 모든 지식을 제공받았습니다.
따라서 말씀+ 흙이 되어야 될 자들이, 자아+흙이 된 겁니다. 흙보다 자아성이 우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데마는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안 갔지요? 그들은 이미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벽을 본 겁니다. 이 세상은 온통 죽음으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쳐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악마는 악마를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26에서,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And if Satan casts out Satan, he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then shall his kingdom stand?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악마와 싸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죽음과 싸우지 않고 타협하고 협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에게서 탈출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곧 자신이 갖고 있다는 신앙이 자신을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흙’이라는 재질을 ‘하늘의 형상 재질’로 바꾸시는 일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어디서 바꿀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이 사라진 때에도 역사 자체가 성전 구실을 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에스더 3:7에서는 하만이라는 권력자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날짜를 제비 뽑기로 뽑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에스더 9:26에는 도리어 유대인들이 권세를 행사하는 날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이란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 그 다음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에게 목숨 바칠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흙이지 새삼스럽게 목숨이 있는 게 아닙니다. 현재 형평은 목숨이란 어차피 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죽을 목숨이라고 거두어서 새로운 형상으로 바꾸어주시는 경우가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바뀐 자의 예가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 욥기는, 인간은 사람하고 상대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악마의 한계와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욥을 이용하십니다. 악마는 인간 세계에서 항상 바른 소리를 합니다. 즉 ‘인간이 걸치고 있는 것들 벗기면 그 안에 원망이 가득하다’는 식으로 자신 만만해 합니다.
처음에는 악마가 내기에 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에서 인간의 육신의 건강을 앗아가니 욥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욥은 살고 싶었습니다. 건강하게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 내리신 복은 욥 자체가 복음의 현장이 되게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은 신약에 와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봅시다. 누가복음 22:33에 보면, “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라고 호언장담합니다. 누가 들어도 정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신앙 있는 척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6:16에서는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지만 예수님께서 곧장 개입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베드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사단의 공간인 것도 모르고 신앙고백을 한 겁니다. 사단의 공간은 곧 사람들의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흙의 재질을 하늘의 형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필히 죽어야 된다는 점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영, 곧 특수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영이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이로서 성도는 서로 만날 때 만나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활동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다른 공간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디모데후서 4장 9-13(내게로 오라)23073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9-13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구분을 어떻게 하냐면, 내게로 온 사람과 나에게서 떠난 사람, 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 오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있고 사도 바울에게서 떠난 사람은 성도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사도 바울, 지가 뭔데? 지가 뭔데 남에게 오라 가라 할 수가 있느냐?’ 여러분들이 오라고 하면 오겠습니까? 가라고 하면 가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홀로 독자적 중심체로 살아가고 있어요. 본인이 중심이에요. 본인이 중심적으로, 독자적 독립자로 살아간다는 것, 내가 누구한테 지시나 명령을 이제는 받지 않겠다고 굳힌 자리가 각자의 자리입니다.
그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자기가 과거에 좀 알았다고 해서 “오라.” 이렇게 명령을 한다? 사도 바울은 죄인 아닙니까?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데 왜 자기한테 오라고 그렇게 함부로 타인의 독자성을 뭉개버리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느냐, 우리 그 생각부터 해야 돼요.
그래서 여기에 간 사람도 있거든요. ‘데마는 나를 떠나갔다’. 갈 수도 있는 문제죠.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 하겠다고 갔는데 그걸 왜 문제 삼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 본인을 떠난 데마를 가지고 뭐라고 표현이 되어 있냐면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렸다. 사도 바울 버린 것이 어떻게 세상 사랑하는 것과 일치할 수 있는 진술이 되는가,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증거가 뭐냐?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해봐야 돼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하는 말에 ‘내게로 오라.’ 할 때 그곳이 어디냐는 거예요. 도대체 사도 바울은 왜 사람들보고 오라고 이야기했고 간 사람은 ‘세상을 사랑해서, 아주 작살나려고 지옥 가기 위해 갔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그런 기준점이 본인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뭐하는 사람이냐, 이 말이죠. 이것을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안 돼요. 나에게 안 오면 지옥 간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사도 바울에게만 특별하게 적용되는 그 기준점이 뭐냐? 사도는 성경 말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 21절, 그리고 3장 15절 16절에도 나와 있어요.
이 세상에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사도를 두셨는데 열두 사도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고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데 그 열두 사도와 사도 바울의 공통점은 모두 다 성경을 쓰기 위함이다, 성경의 저자가 되기 위함이다, 이 말이죠.
베드로후서 3장에 15절, 16절에 보면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가 해야 될 일은 사람을 멸망에 보내는 책을 써야 될 사람들이에요. “너는 멸망 받는 자 맞아. 왜? 내가 쓴 책 내용을 이해를 못 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멸망 받아야 돼.”라는 기준이 되는 책을 쓴 사람이 사도입니다. 이 사도 바울에 대해, 이번 수련회에서 갈라디아서 합니다만,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사도 바울, 바울에게 주어진 이름 뒤에 붙어있는 형용사가 아니고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 바울과 바울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은, ‘너희들은 항상 일상이 사람하고 상대하잖아.’ 그런 뜻이에요. ‘너희들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그러나 나의 사도 기능은 사람하고 상대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해야 사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일, 예수님의 일이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성경 마지막 쓰기. 성경 쓰기에요. 말씀 쓰기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이 성경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이루리라. 구원을 받는다는 그 말씀, 국정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 그 말씀. 그 말씀을 쓰는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본문 돌아와서 “사도 네가 뭔데? 네가 뭐 우리보다 잘난 게 있다고 네가 오라고 하면 와야 되고 널 떠나면 그건 곧 세상이 좋고 지옥 갈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근거가 뭐냐? 근거를 제시해라.”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절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내 사도 됨을 믿냐?” 이렇게 나와요. 방금 읽었던 1장 1절, “네가 사도 됨을 믿냐? 내가 특별한 기능을 가진 자인 것을 네가 믿느냐?” 믿는다는 것은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것, 물건을 만들어내는 거 그런게 믿음이 아니에요.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의사가 환자 치료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은 물건 만들 수 있고, 환자 치료할 수 있고, 농사지을 수 있고, 고기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믿음에서 빼세요. 그냥 열심이죠. 그러니 갈라디아서 1장 1절부터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가 뭔가 움직이고 하고 있는 그 일과 같이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딱딱 포진을 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인간 대 인간하고 사귀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고, 사도 바울 물론 알고, 예수님도 아시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뭐라고 하냐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제일 첫 문구에 그게 딱 들어가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그러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데, 왜 사람을 부정하는 조치를 해서 믿음 세계에서 사람을 퇴출시키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은 악마와 싸울 줄을 모르고 같은 인간들 멱살 잡고 인간들하고 싸운다고 평생을 다 보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하고 싸우는 자들이 아니에요, 사람은. 오히려 악마에 매이는 자들이죠.
그런데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하고 싸웠냐면, 이 땅에 와서 악마와 싸웠습니다. 그 싸우는 기능의 연속성, 연장선상에 누가 있느냐? 사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도를 떠난 사람들은 말씀을 떠나고 복음을 떠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에게 오라고 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사도 바울이 성경 말씀을 쓰는데 필요했던 사람들을 오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사도의 자리는 뭐냐? 말씀이 집필되는 자리고 말씀이 최종 마감되는 자리, 말씀이 능력 있게 작용하는 그 자리에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말씀으로 오라.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고 죽은 자 살리신 하나님의 뜻으로 난 이 책 속으로 들어오라’ 이런 뜻이죠.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이걸 함부로 풀 수가 없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전체가 다 사람의 뜻으로 풀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한국말로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어도 풀 수가 없게 돼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에 각종 새를 지으시고” 다시 읽어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에 각종 새를 지으시고”
그래서 과학 시대에 살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이 이 본문을 만약에 봤다면 전혀 어려울 게 없어요. 왜냐하면 각종 들짐승, 하마라든지 낙타, 코끼리, 소, 돼지, 산돼지, 멧돼지도 마찬가지고 공중의 새, 독수리, 그걸 보면서 말씀에 입각해서 보게 되면 ‘어? 흙이 날아다니네? 흙이 물을 먹네? 흙이 새끼를 낳았네?’ 전혀 이것이 어려울 게 없습니다, 과학 시대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되어 있어요.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 쉬운 말이에요, 이게. 딱 보니 딱이죠. ‘사람? 흙이잖아.’ 사람이 흙이 된 게 아니고 흙이 사람 된 거예요.
‘사람이 되어서 내가 흙이 된 건지 한 번 조사해 볼까?’ 그러면 반칙이에요. 그게 아니고 조사하나 마나 조사하는 것도 흙이고 결론 내리는 것도 흙이에요. 인간의 재질이 흙이다, 이 말이거든요. 인간의 재질이 흙이거든요. 인도네시아나 열대 우림 지역에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 후딱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애써서 짓게 되면 금방 지어요. 대나무가 많으니까 대나무를 잘라서 얼기설기 해놓고 뼈대를 만들고 거기에 진흙을 이겨서 거기다 처발라요. 진흙을 발라버리면 그게 집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뭐냐 하면, 말씀 구조에 흙으로 채워 넣어진 구조체, 흙의 구조체에요, 인간이라는 게.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에다가 흙을 입혀 놨기 때문에 거기서 뭘 빼야 하냐면, 철학과 과학, 이걸 다 빼야 돼요. 인문학과 법학, 고고학을 다 빼야 돼요. 이게 지금 안 빠지고 보니까 성경은 신화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뭐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이렇게. 적반하장격으로 나와 버리는 겁니다. 본인 믿음 없다는 소리는 안 하고 “알아듣게 좀 이야기 해. 알아듣게 이야기를 하자.”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인간이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선악 지식이 마귀와 더불어 합작하여, 그다음에 선악 지식으로 이제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나왔잖아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원래 ‘따먹지 말라’는 말씀의 뼈대 위에 처발라 놨는데 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빠져버리고 거기에 뭐가 들어갔냐면, 자아가 들어간 거예요, 자아가. 마귀의 마음이 거기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흙이 걸어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인간의 의무가 뭐냐, 인간의 가치가 뭐냐, 인간의 존엄성이 뭐냐?’ 이 쓸데없는, 들어가지 말아야 될 것들이 거기 자꾸 깃들어져 있는 거예요.
나중에 연세 많아지면 흙이 말라붙어요. 흙이 말라붙어가지고 길을 걷다 보면 하나둘씩 툭, 툭 떨어져요. 관절, 콘드로이친 먹어도 소용없어요. 관절, 허리, 툭, 툭 떨어져요. “이게 왜 이러지?” 원래 그래요, 원래.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 말씀대로 되어가는 거 보고 ‘아, 말씀이 맞구나.’ 하고 상당히 즐거워해야 될 일 아닙니까?
선악 지식을 따 먹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마귀의 앞잡이로 살면서 항상 뭘 생각하냐면, ‘지금 이미 인간 됐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게 인간이 만드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흙을 만들었지, 말씀에다가 흙을 입혀 놨지, 인간이라는 건 만들어 낸 적이 없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인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자라 하는 겁니다. 다른 것은 인간이 아니죠. 그냥 흙이죠.
그런데 이미 인간이 되고 난 뒤에 인간이 선악 지식, 쉽게 말해서 지식이에요,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냥 이 재질을 유지한 채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무리수를 띄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 48절 4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시할 때 재질을 바꿔줘요.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계속 흙으로 규정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양보 없습니다. 그냥 끝까지 흙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끝까지, 인간들이 뭐라고 하든 관계없이 그냥 흙이에요. 흙에 속한 자에요.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여기 하늘에 속한 자로 등장한 분이 인자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재질을 바꿔버립니다. 뭐로 바꾸느냐, 흙에 속하지 않고 천사와 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재질 바꾸기에 우리 주님께서 나서신 거예요.
어떻게 바꾸나? 문제는 어떻게 바꾸느냐? 흙이니까 끝까지 흙임을 분명히 들추어내는 식으로 하늘의 형상과 바꿔지죠. 처음에 흙이라고 해놓고 도중에 갑자기 인간이라고 중간에 새면 안 돼요. 그것은 데마처럼 세상으로 간 사람이에요. 끝까지 가야 돼요, 끝까지.
다시 말해서 흙으로 인정하는, 흙에서 나온 어떤 신앙이라도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흙에서 하늘에 속한 형상, 천사와 같이 형상을 바꿔주는 그곳이 어디냐?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데마가 세상으로 갔거든요. 여기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세상 쪽으로 간 거예요.
갔을 때, 그러면 안 간 사람들은 뭐예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데마는 사도 바울을 버렸다. 그러면 안 간 사람은? 누가, 마가, 두기고, 안 간 사람들은 뭐냐는 거죠. 다 같은 흙에 속한 인간 아닌가요? 그들은 뭐냐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이 평하기를 그들은 세상 끝까지 가 본 사람이에요. 세상 끝까지 가서 벽을 만나요. 그 벽이 뭐냐? 나는 신앙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흙이 신앙을 가지면 안 돼요. 흙은 신앙이고 소망이고 어떤 것도 소유할……, 은혜도 가지면 안 돼요. 은혜부터 해서 어떤 것도 소지할 권한이 없는 자가 흙이 흙다운 거예요. 모든 사단은, 문제는 신앙이 있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신앙을 버려야 돼요. 신앙을 안 버리면 우리는 이 종교 생활, 신앙생활이 문화생활이 돼버리고 맙니다.
아직 여러분들 교회 나오시잖아요. 배부르단 뜻이에요. 아직까지 살 만하다는 뜻입니다. 살 만 해서 오락 생활, 취미 생활하는 거예요. 그냥 어려우면 신앙생활 털어버리면 그만이에요. 교회 생활 털어버리면 그만이에요. ‘내 신앙 가지고 내가 구원받겠다는데 덤으로 교회 나와 주지.’ 아닙니다. 그거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획득된 신앙, 이 신앙 자체가 나한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세상 끝에 가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이 신앙, 내게 생긴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줄곧 이스라엘 내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성전입니다.
성전 이야기하는데 이 성전이 이스라엘 초반에는 건물이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후반에 들어서는 이게 역사가 돼요. 에스더 3장 7절 읽어보겠습니다. 하만, 바사 나라의 2인자, 아하수에로 왕 때 권력의 2인자가 하만이고, 그 하만이,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으니까 독이 올라 모르드개 뿐만이 아니고 그 민족 자체를 다 몰살시키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제비를 뽑는다)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12월 13일은, 유대인들을 한꺼번에 다 죽여서 권력이 유대인의 여호와보다 더 세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날을 골랐습니다. 그게 제비 뽑아서 뽑은 거예요.
유대인들 이제 다 죽었습니다. 확정되었습니다. 에스더 9장 25절에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 26절에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이게 부림절이에요,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뜻을 정하고” 하고 이제 부림절을 지키는 거예요.
부림이라고 하는 것은 제비를 뽑는 거예요. 선택된 거예요. 선택을 어디서 했냐면 저쪽에서 했어요.
■기존의 세상 쪽에서 선택을 한 겁니다. 어떻게 선택했는가? 죽이기로, 없애기로 작정을 한 거예요. 이게 세상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이 땅에 성도될 사람이 세상 속에 평온한 가운데 살지만 언젠가는 세상의 벽에 부딪힐 그때가, 세상이 성도를 간택하고 선택한 거예요, 죽이기로.
에스더 같은 경우에는 성전이 없어요. 성전이 없지만 성전의 취지는 역사 속에 그대로 살아서 유대인과 함께 있는 거예요. 성전은 뭐하는 곳이냐? 성전은 세상의 끝, 천국의 입구입니다. 세상의 끝, 천국의 입구. 세상을 청산하고, 세상에서 출생했던, 존재했던 나를 청산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출발하고 새롭게 탄생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성전이에요. 그 성전을 유대 역사에서는 역사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세상 쪽에서 다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선택된 거예요.
그 선택된 날에 주님께서는 역전을 시켰는데 뭐로 바꿨느냐? 비로소 죽어야 될 유대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했던 날로 선택된 날이 12월 13일입니다. 이게 원래 성전기능이에요, 성전기능.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게로 오라’는 말은 나한테 말씀 있다는 것, 말씀이 있다는 말뜻은 뭐냐? 구약 때부터 내려왔던 성전기능, 바로 이 성전 안에서 온전하게 재질이 바뀝니다. 흙에서 예수님의 형상, 영광된 형상으로 바뀌는 자리가 성전이에요.
베드로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했거든요. 그 질문 잘못됐습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어야죠. 주님은 성전에 계시죠. 그 성전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형성된 성전이에요,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그러면 예수를 만나라는 것은, 내가 나였던, 내가 흙으로 만든 재질의 옛날 아담이 갖고 있던 것을 이제는 주님께 반납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으로 새롭게 부여받는 자리가 바로 성전의 자리에요.
성전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그동안 건물 안에서의 성전이 왜 실패로 끝났는가? 그 점을 잠시 보겠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게 되면,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적을 필요도 없어요. 울산 강의 때 한 겁니다. 역대상 21장에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했거든요. 인구 조사를 하면서 ‘현재 멀쩡하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은혜로 사랑으로 이만큼 우리 민족이 이렇게 번성했습니다’라고 하나님의 결과물에 기뻐하기 위해서, 기쁨의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 인구 조사를 했는데 결국엔 어떻게 됐냐면, 거기서 7만 명 죽었습니다.
사흘 동안에 죽은 자가 7만 명,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죽은 자가 7만 명 맞아요. 7만 명 죽었습니다, 14절에. 살아있는 숫자를 카운트를 하려고 했는데 그 카운트에서 7만 명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른 조치가 있지 않으면 7만 명에서 더 죽습니다.
여기에 누가 나서는가?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조치는 뭐냐? 이스라엘이 살아있는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원래 자리를 유지를 해야 남은 이스라엘도 살아있다, 그래서 다윗이 한 것이 뭐냐?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다가 제단을 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립니다.
역대하 3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정한 그곳에 다윗이 죽어가는 백성을 살리려고, 왕으로서 저주를 멈추기 위해 자기가 “죄인 되었던, 사람을 죽이는 그 짓을 한 당사자입니다” 하고 고백하고 제단을 쌓았던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세우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면 성전은 뭐냐?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불러다 죽여 놓고, ■그 흙으로 죽은 인간을 하늘의 형상으로, 재질로 바꾸어주는 그 기능이 작동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예요. 내게로 오라 이 말이죠. 내게로 오라. 세상으로 나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서, 사도바울에게서 떠나간 사람은 왜 갔느냐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요, 하나님이 지시한 사도요, 그렇게 복음이 있는 걸 다 들었어요. 심지어 이 데마라는 사람은 주보에 나오듯이 【데마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중간에 보면 【데마는 한 때 복음 전파의 주력 자였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로마감옥에 투옥될 당시에 바울과 같이 있을 정도로 열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골 4:14절, 빌레몬서 1:24) 하지만 데마는 결국 천국 문턱에서 탈락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세상을 겸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22,23)】 주보 뒤에 나와 있거든요.
왜 떠났느냐, 하는 거예요. 왜? 이게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 보세요. 왜 복음을 떠났습니까? 선택 자체가 신앙을 가지라고 준 선택이 아니고 내게 있는, 뭐든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 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나서 떠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롯유다처럼.
선택의 반대말이 뭐냐면, 도 닦는 거예요. 도 닦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하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옛날부터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는데 사람들이 잘 안 받아드려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하고, 인간은 무슨, 흙이죠. 이 흙하고는 약속을 한 적이 없어요. 약속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6장에 보면 그걸 맹세라고 합니다. 맹세는 본인이 본인보고 하는 거예요. 타인보고 하는 건 약속이고 본인이 본인보고 하는 걸 맹세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죽음을 못 이깁니다. 인간은 마귀를 못 이겨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이긴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자신의 고집과 의지를 못 이겨요. 본인이 본인의 자의식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악마는 악마를 못 이긴다는 게 마태복음 12장 2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모순이라는 말이죠. 사탄은 항상 사탄을 이기는 게 아니라 사탄을 지키죠. 따라서 사탄의 종인 인간은 나를 지키는 거예요. 나를 이기는 게 아니고 나를 지키는 겁니다. 인간은 도 닦아서, 수련회 참석한다고 해서 자기가 새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나를 이겼다, 하는 고집의 일부에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안 이기면 되잖아요. 자기 이기는 걸 포기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믿음이 없는데요?” 안 믿으면 되잖아요. 얼마나 쉬워요? 믿음도 아닌 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그걸 지켜낸다고 얼마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약속이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이 하는 약속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약속하지 않아요.
그 대목에서 적절한 노래 가사가 나올 타이밍이 됐어요. <안동역에서>라는 노래에 보면요, “안오는건지 못오는건지~” 안동역에서 눈 올 때 만나자고 약속을 했거든요. 누가? 인간 대 인간이.
안오는건지 못오는건지
오지않는사람아
안타까운 내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끊어진 밤에
기차가 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이 가사에 보면 그 사람이 기다리는 약속에는 안 오니까 “어차피 지워야 될 꿈이었나” 그게 지 꿈이었죠. 이 세상 자체가 꿈이죠. 내가 꾼 꿈이죠. 그 꿈이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지를 못합니다. 안 믿고 살면 될 문제를 그저 믿음으로 구원받나, 해서 계속 믿으려고 하니까 믿음이 강화되는 게 아니고 내가 강화되는 거예요, 내 자신이.
그래서 신앙생활 해보려고 악바리로 해 보지만 신앙보다 더 쎈 게 있었죠. 생활이 어려워져 보세요. 신앙이고 뭐고 없어요. 돈 벌기 바쁘죠. 신앙이라는 건 애초부터 그다지 다급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어느 누구든 나보다 내 목숨이 더 센 거예요.
그 어떤 목사는 주장하죠. 목숨 바쳐 주를 섬기라고 주장하죠. 원래 인간은 바칠 목숨 자체가 없었어요. 그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맙시다. 바칠 목숨 자체가 원래 없는 거예요. 죽어가는 것이 주님의 프로젝트에요. ‘태어났거든 죽어봐라.’ 이게 주의 착실한 일관성 있는 일입니다. 그냥 곱게 죽어 가시면 되는 거예요. 우리한테는 뭐 큰 거 요구한 적 없습니다. 그냥 죽어달라는 거 외에는 요구한 적 없어요. 요구한다고 우리가 뭐 거부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마귀가 우리의 목숨을 노리지만 우리의 목숨은 어차피 버릴 목숨이에요. 어차피 버릴 목숨을 마귀가 버려주니까 얼마나 마귀가 고마워요. 뭐 마귀에게 고맙다, 할 소리는 아니지만. 문제는 이거에요, 흙의 재질이 어떻게 천사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늘의 속과 형상이 바뀔 수가 있느냐? 우리는 못 하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떻게 하시느냐, 그것만 우리가 알면 되는 겁니다.
그게 욥기에 나와요. 욥기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마의 정체와 악마의 한계, 악마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악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악귀의 정체와 그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욥을 이용한 이야기가 욥기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마귀가 등장하는데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아야 될 것은 마귀는요, 항상 옳은 이야기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귀 입에서 틀린 말이 나올 리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욥 믿음 좋다, 이렇게 하니까 마귀가 하는 말이, 바른 소리를 해요. “하나님, 욥이 지니고 있는 껍데기를 한 번 벗겨 보시죠. 벗겨 보시면 욥이 원망할 겁니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마귀가 알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든 이 흙이라는 재질과 그리고 악마 자기가 부채질해서 집어넣은 ‘나는 나답게 지키고 유지해야 된다’ 이 두 가지가, 하나는 흙이 돼야 되고, 나는 나로서 계속 유지돼야 되고, 이 두 가지가 인간 내부에서 모순되기 때문에 절대로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게 악마의 자신만만함이에요. 이게 맞는 말이에요, 이게.
신앙생활 아무리 해 봤자 인간은 원망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집단으로 보여준 것이 뭐냐? 홍해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없을 때 양식 없는 곳으로 가니까 여지없이, 손대면 툭 튀어나오듯이 원망이 팍 터져 나왔어요. 그러면 속에 원망이 흐르고 넘친다는 뜻이거든요.
흐르고 넘치는 욕망을 소위 저 인간입네, 점잖은 인격이 괜찮네, 훌륭한 사람으로 유지했네, 라는 이 껍데기를 그냥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 뒤집어씌운 가운데서 대단히 돈이 많고 자식들 하는 일이 쭉 쭉 잘 되는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사람이 누구냐? 욥입니다.
하나님께서 악마가 어떤 식으로 치고 들어올지 뻔히 아시고 잘 먹고, 잘 살고, 아무 문제 없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가정을 채택했는데, 선택되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택의 반대말은 도 닦는 거, 소위 성화 되는 거 말하는 겁니다. 도 닦는 거, 열심히 뭐 하는 것, 이게 선택의 반대말입니다.
그 욥을 선택해서 악마의 정체와, 악마가 인간에게 평소에 어떤 마음을 집어넣어 줬는가를 인간은 모르죠. 인간은 모르는데, 하나님은 이제 들추어내려는 거예요. 악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을 지배했는지. 욥을 가지고 집어넣으니까 욥이 재산 날아갔을 때 뭐라고 했냐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지고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욥이 딱 그런 이야기 하니까 마귀 불러서, “봤지? 내가 욥이 신앙 있다고 했잖아. 봤잖아. 원망 안 하는 거 봤지?” 이게 축구로 말하면 전반전입니다. 아직 후반전이 있어요.
마귀가 후반전에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아직 몸이 성하니까 그런데 그 육신 자체에 대해서 건강이라는 껍데기를 한 번 벗겨보시죠. 건강, 멀쩡함. 그러면 그 안에 꽉꽉 쌓여 있던 마귀가 집어넣은 원망이 퍽 하고 아마 터지면서 쏟아질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악마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욥기 2장 6절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마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악귀가 인간을 그동안 숱하게 죽여 왔다는 뜻이에요. 죽여 왔다는 뜻입니다. 악마가 죽일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 인간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욥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굳이 죽이지 말라고 단서를 붙인 이유가, 악마의 힘으로 인간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우를 두고 의도적으로 언급한 거예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나옵니다. 제가 갈라디아서를 하겠지만 사실은 이번 수련회에 초반부터 핵심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마태복음 16장 16절입니다. 수요일에도 제가 잠시 언급했는데요, 그 대목을 다시 보겠습니다. 거기 15절에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할 때 뭐 선지자나 예례미야라고 했다 하지요.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했을 때의 베드로가 나서서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거 베드로가 이야기할 수 없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베드로가 할 수 없는데 했어요.
할 수 없다는 말은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의 아버지가 너를 알게 했다는 말은, ‘베드로야, 네가 그 말을 한 이유로 말미암아 너 자신은 왜 이 고백을 너의 의지와 너의 지성과 지혜로 왜 말을 못 하는지의 그 이유를 이제부터 네가 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말은 네가 했지만 네가 한 게 아닌게 되기 위해서 네가 무엇이어야 하냐면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바로 “사탄아 물러가라” 곧 너는 사탄에 속했다. 베드로야 너는 사탄이라는 겁니다. 왜? 네가 하나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에 들어올 수 없는, 사탄에게 매여 있는, 사람의 일 중의 일부가 뭐냐?
그게 베드로고 그 베드로 입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 고백한 대로 베드로는 사탄에서 하나님의 일로 들어가도록 주께서 일을 추진하려는 거예요. 베드로가 고백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베드로야 기다려라. 사탄에 속한 너를, 인간의 일에 속한 너를, 기어이 하나님에 속한 일로 만들기 위해서 기다려. 내가 너 빼내줄게.”
빼내주는 일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때 베드로가 도망친것 아시죠. 베드로는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면 악마는 무슨 말을 한다고 했습니까? 악귀는 무슨 말을 합니까? 항상 옳은 이야기만 하고 바른 이야기만 해요. 그 악마가 하는 옳고 바른 이야기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22장 33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거, 이거 누가 들어도 굉장히 신앙적으로 들리는 거예요. 지금 이 이야기 할 때 베드로가 뭘 모르냐면, 내가 지금 신앙 있는 척을 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신앙이 없는데 있는 척을 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그건 뭘 겪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성전, 죽고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신앙 개코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을 하는 이 동네가 악마가 지배하는 동네라는 사실을 베드로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마귀 들린 척을 하면 되죠. 반대로 나가면 되는 거예요. 마귀 들린 척, 그건 쉬워요.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왜 그러냐면, 사탄의 나라에서는 본인이 신앙 있는 줄 알고 착각해서 신앙적인 발언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도 닦는 사람이 돼요. 교회 와서 도를 닦아요.
기도하고, 열심히 선교하고, 성경 공부하고, 수련회 참석하고, 도를 닦는다니까요. 그게 사탄의 일인 것은 상상도 못 하는 거죠. 그러니까 본인이 신앙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다음부터는 이제 슬슬 요령 부리기로 나서는 거예요. ‘수련회는 집에서 동영상 보면 되지.’
본인 재질이 흙으로 돼 있어요. 흙으로 되어 있다는 말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이라고 자꾸 치장을 해주고 포장을 해주는 그것이 지식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계속해서 ‘네가 이래야 인간답고, 이래야 사람답고, 이렇게 바르게 사는 이것이 이게 신자답다’ 계속 악마에게서 정보가 유출 제공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둘 다 같이 놀고 있네.’ 주님께서는 제공을 하든 말든 관심도 없어요. 왜냐면 주님은 인간하고 약속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주님은 어떤 인간이나, 신앙 있든 없든 그냥 죽이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욥이 첫 번째 껍데기, 부자 된 것, 자식 잘 되는 것 다 날아갔을 때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것도 하나님’이라고 버텼는데 두 번째, 자기의 육신의 껍데기가 벗겨지니까 그 속에서 ‘내가 누군지를 내가 모르겠다’는 거죠.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걸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욥,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욥이 ‘하나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욥의 복음은 그거에요. ‘내가 복음 자체인 것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복음 자체인 것을, 내가 성전인 자체를, 하나님이 일하는 장소인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아닙니다. 주께서 일하는 현장인 것을 감사합니다, 에요. 이게 바로 선택의 뜻이에요. 선택의 반대말은 도 닦는 거, 도 닦는 것의 반대말은 선택이죠.
끝으로, 그러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이 작동하는 현장이 되는 그 방법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느냐? 내가 그걸 소지 하는가? 인간은 소지하면 안 된다고 했죠. 소지 하는 것 때문에 사달나는 거예요. 컴퓨터 바탕화면에 보면 휴지통 있죠. 휴지통 자주 비우세요. 휴지통에 뭐가 들어있어서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소망이고 사랑이고, 비워 놔야 돼요. 텅 비워야 돼요. 자꾸 있으면 있는 것으로 뭐 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뭔가 해보려고. 보이스피싱 하는데 하는 사람만 나쁜 거 아니에요. 걸리는 사람도 나빠요. 본인이 뭔가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전세 사기부터 해서 전원주택에 투자하시죠, 전부 다 이거는 뭔가 있다는 겁니다. 뭔가 있으니까 있는 거 키워보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창세기 4장부터 이미 나와 있어요. 아벨의 인생 성공은 자기를 잊어버리는데 성공한 것이 인생 성공이었습니다. 아벨. 제사 잘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 받았다는 이유때문에 형에게 맞아죽은 사람, 아벨이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벨이 성공했습니다.
아벨이 분명히 인생 성공했거든요, 하늘나라 갔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상하죠. 그게 분명히 인생 성공인데 그 성공을 탐내지 않아요. 그걸 원하고 싶지도 않아요.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재질을 흙에서 하늘의 형상으로 만드는 방법은 사도행전 2장 1절에 나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새로운 성전이 등장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오게 되면 너는 이미 죽었고, 한자리에 모였어요. 너나 할 것 없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한자리에 모인 전체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한쪽이 다 죽고 그 영, 영이 어떤 영이냐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그 영이에요, 그 영이 옴으로서 그들은 비록 육신은 죽어가는, 늙어가는 모습에 지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사람은 살았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죽었지만,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산 자로 보이는 거예요.
사도행전 14장 11-15절 길어서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사도 바울이 앉은뱅이 낫게 하니까 그 주위 사람들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서 하는 말이 “이 분은 사람이 아니고 신입니다.” 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려고 해요. 제사를 드리려 하니까 15절에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성정이 똑같습니다. 재질이 똑같습니다.” 하고 말렸어요.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그 사람들이 하나님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왔다고 이렇게 해서 두 사람에게 제사 막 지내려고 했어요, 산 사람 앞에서. 이 말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제가 어떤 사람에게, 주의 일을 하시면 된다 하니까 그 사람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위험한 일, 그건가요? 무서운 일인가요? 드라마에 악귀 나오는 것처럼 마귀하고 싸우면서 이악귀를 물리치는 그렇게 끔찍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낯선 일이에요. 내가 보기에도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자꾸 낯선 쪽으로, 게나 가재는 옆으로 막 새잖아요, 이상한 데로 가는 것 같아요. 주께서 이끌어 가요. 나 가지고 있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길로, 나의 가치와 의미와 나의 재질과 자랑과 주특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길로 자꾸 가재걸음으로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교회라고 했는데, 고린도전서 12장에,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12장 24절에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다시 말해서 따로 독자적인 ‘나’라는 게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게 오라. 손이여, 발이여. 나 손이다. 내가 머리는 아니지만 내가 발할게, 너 손 해라. 그런데 발이 아파. 발이 필요한 것이 있어, 손이여, 발에게 오라”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원하는 대로 가지 않게 해주시고 너나없이 그리스도 몸으로 하나 된, 하나의 성전인, 날마다 그곳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곳에 가서 나의 모든 것은 필요치 않고 주님의 십자가 피 흘린 하나님의 약속, 맹세만이 유효한 곳인, 그래서 죽음을 이긴 곳인 것을 날마다 만끽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