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법의 완성
2023년 7월 23일 디모데후서 4:6-8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생하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가 인간의 여명입니다. 그런데 고생하는 이유는요? 이게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이 동네가 지옥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저주가 매일같이 풀풀 일어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저주를 싫어하겠지만 이게 인간이 싫어한다고 해서 기피하거나 피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마음 내부에는 이 세상의 생리, 곧 이 세상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악마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서로 부등켜 안고 격려합니다. “고생 뒤에 낙이 온다. 그러니 참고 견뎌보자”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짐과 각오를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헤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인간의 마음은 악마가 장악하고 있기에 싫든 좋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악마의 본성에 충실하기 위해 인간들은 말씀으로부터 도망치고 얼굴을 돌리고 기피하는 식으로 대처합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말씀에 더욱더 충실히 다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기피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줄테니, 말씀 잘 듣고 있는 나를 독립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게 도망치는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합니다. 마귀가 이런 식으로 인간을 다루는 이유는 인간 세계를 가치 중립의 세계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즉 천국인지 지옥인지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는 중립적 지역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예수님이 다녀 오시면서 이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 저주가 계속 생산되는 지옥임이 밝혀졌습니다. 지옥성의 일관성은 예수님을 기피하는데 사력을 다한다는데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는 내가 나를 놓치고 포기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악마의 생각이요 모든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악마는 인간들을 앞장 세워서 이 세상이 악마의 거처다는 사실을 들통나지 않으려 사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모든 사람이 일단 죽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산 사람은 없음이 확정났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가 등장합니다. 즉 이미 죽어버린 자에 대해서는 악마가 유혹할 것도, 매혹할 것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는 ‘자신을 위해 살 자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를 처리하므로서 더는 예수님을 피할 수 있다고 부추겼는데 그 배후에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가룟 유다는 제자로 심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나머지 11제자의 태도와 상관없이 가룟 유다에 의해서 12제자 군이 와해되고 그 사단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실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8) 즉 예수님이 살아 있고 말씀이 살아 있는 한 인간들이 염두에 두는 죽음은 성사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제우스 신에게 벌 받는 프로메테우스는 신화 속에서 절벽에 묶인채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먹히고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간이 먹히면 고통도 끝날 수 있게지만 문제 그 간이 늘 새롭고 생겨나서 또 독수리에게 끝도없이 뜯어먹힌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9:47-49에 보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복입니다. 이 반복적인 영원히 저주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 고통은 제대로 죽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옥에 죽음이 없는 이유는, 천국에 생명나무 과실이 그득하기 때문입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2)
선악과 과실의 훼손성을 영원토록 문제삼기 위해 대비가 되도록 천국의 생명나무는 영원토록 마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사법의 완성 효과로서 생겨난 새로운 자아를 지닌 자의 등장입니다. 관제란 관제(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레 23:12, 13, 18/민 15:
5).
즉 사도 바울은 제사법 완성이 응축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에 의한 제사법이 완성되었을 때나 등장하는 열매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 마지막에 참여된 존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법, 곧 율법은 유일한 그 안에 악마의 더러움이 침범되지 못한 공간을 이 땅에서 창조했습니다.
이 세상에 율법에 의해서 틈이 생기고, 그 틈바구니에서 생명이 비쳐나옵니다. 그것의 진수가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 법’입니다. 나실인 법은 인간의 신체 일부가 감히 거룩한 하나님의 제물에 합체되는 법입니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민 6:18)
즉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온갖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소산물인 포도와는 멀리해야 하는 것을 서원하며, 또한 그 어떤 죽음과 접촉되지 말아야 할 것을 서원한 서원자는 실은 살아 있으니 죽은 자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이는 홍해 물 속에서 이스라엘이 통과할 때, 그들은 비록 홍해 물에는 적지 않으나 본격적으로 율법과 율례 속으로 진입되고 있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홍해는 갈라지면서 먼저 흘렸던 물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 길을 터주는 물 벽이 되어야 했습니다. “물이 좌우로 벽이 되었더라”(출 14:29)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말씀 속에서만 생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말씀(제사법) 완성이며 그 안에 성도는 이미 죽었고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는 자입니다. (고후 1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말씀을 피해서 도망치지 말게 하시고 말씀 안에서 생명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디모데후서 4장 6-8절(제사법의 완성)23072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6. For I am already being poured out as a drink offering, and the time of my departure has come.
7.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course, I have kept the faith;
8. in the future there is laid up for me 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award to me on that day; and not only to me, but also to all who have loved His appearing.
사도바울의 이 말 속에 성경전체에서 중요한 개념들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6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된다는 말은 붓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부어버리는 거예요. 영어로 ‘offering’이라 하는데 그냥 부어 버리는 이것은 제사법에 해당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시내산에서 받은 그 제사법을 함축해서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 있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는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수시로 말씀하시는 내 때가 되었다는 그 때라는 것, 인간 시간을 잘라버리는 것 생선을 토막 내듯이 잘라버려서 시간 흐름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일이 쑥 들어와서 개입되는 거예요.
인간의 사건사건으로 이어지던 역사에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수직적으로 만나게 되면 이게 토막 납니다. 딱 토막이 나면서 전의 일과 그 다음 앞의 일이 끊어지게 됩니다. 끊어지게 되면 모든 지나온 의미가 한꺼번에 무산되어버리지요. 살아온 것이 다 소용없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납치하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사람을 낚는……’, ‘잡아당겨서 끌어올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했거든요. 구출이지요. 끄집어내는 거예요. 기존의 공간 그 세계에 있지 말고 나에게 낚여서 말씀에 낚여서 끌어당겨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때라는 거예요 때.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의의 면류관” 이라 되어 있는데 그 의의 면류관 이라는 그것을 처음으로 쓰신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자기가 죽었을 때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 아들이 아들로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칭찬 받을 때가 되었다. 그 말 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지나고 있는 이 시간 속, 시간의 흐르는 이 시간 속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 분이 이 땅에 뛰어들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분의 세상에서 살던 분이 시간 속에 살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구현되고 보여지느냐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냈습니다.
인간들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지요.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왜냐? 인간들은 불연속성을 몰라요. 어제가 있었으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었으면 내일이 있다. 그냥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고 계속 가보겠다는 거예요. 끊어져야 되는데 끊어질 줄을 모르지요. 그런데 주님은 애초부터 끊어진 단락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남아있다.’ 또는 ‘드디어 내가 때가 되었으니.’ 그 때라 하는 것은 인자가 인자답게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또 나오는 개념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여기에 “그 날”이 나와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또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8절, 이 길지 않은, 짧은 구절이지만 이 구절 속에 성경 전체가 다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사도 바울 인생 자체에 성경 전체가 압축해서 꽉꽉 담겨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마치 여러분같이. 여러분이 여기에 해당이 되는지 안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성도들하고 똑같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라고 해서 사도 바울에게 응축된 말씀의 완성이 “나만 그래? 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 너희들도 똑같이 너희들 인생 자체가, 성경 전체가 압축되고 응축된 상태로 그런 입장에 지금 있다” 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전체를 다 알고 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떻게 성경 전체가 이 짧은 우리 인생 속에 응축되어 있는가를 우리도 같이 알아야 된다 그 말 이에요.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첫 번에 나오는 것 6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퍼붓는 거예요) 되고” 라고 하는 이것, 이것을 가지고 제사법이라 하는 겁니다.
제사법에 나오는 그 모든 기능이 함축해서 사도바울의 인생에 꽉꽉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완성된 채로 꽉꽉 담겨 있어요. 그러면 관제라는 이것이 뭐냐? 주보에 보면 설교요약에 실어놨습니다. 거기에 보면 【관제(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관제는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번제나 소제와 함께 드려지는 주된 제물이 아닌 일종의 보조적인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레 23:12, 13, 18/민 15:5)】
여기에 제가 ‘보조적인 제물’이라고 언급한 이유가 있어요. 이것은 뭐냐? 기관차가 힘을 받아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힘을 받아서 앞으로 달리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관제가 된다는 말은, 제일 끄트머리 객차로 붙어서 앞에서 달리는 기차의 동력에 그냥 끌려가는 식으로, 완성된 동력의 뒤에 매달리듯이 자리하나 그냥 얻어걸린 것, 앞에서 당기는 대로 당겨지는 인생.
이때 무엇이 당겨지는가? 제사법의 완성이 팍팍 잡아당기면 우리 하루하루의 삶이 그 제사의 능력, 관통하는 제사의 능력이 우리 속까지 도달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5장 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3절부터 보면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으로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는 그 예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기름 한 힌의 사분지 일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사분 일을 예비할 것이요.”
여기 포도주를 붓는 것 그게 바로 여기 나오는 관제(灌祭) 또는 전제(奠祭)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사가 진행되는, 착수되고 실시 되는 현장에서 마지막 마무리, 모든 제사에 다 들어가는 마무리 작업이 관제에요. 사도바울의 인생은 뭐냐? 끄트머리 인생, 주께서 다 이룬 것, 그 효과로서 발생된 끄트머리인생, 그래서 ‘내 인생, 나는 이렇게 살았다’가 아니라 앞에 있는 기관차 역할, ‘주님이 하신 일의 혜택으로서 나는 이렇게 성도가 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 이룬 제사법에 나는 끼어들었을 뿐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나뿐만이 아니고 주께서 오시는 날을 사모하는 모든,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제사법이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느냐 하는 문제지요. 제사법 없이는 왜 구원되지 않는가?
주께서 우리에게 천국 면접을 본다고, 어떤 질문을 한다고 칩시다. 질문을 던지는데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고 칩시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6절에 근거해서 단 하나의 질문을 주께서 하신다면 이런 질문만 하실 거예요. “제사장이 왜 등장했나?” 그 질문에 답변이 되면 통과고 안 되면 탈락이 되겠지요. “제사장이 왜 있어야 돼? 너한테 제사장이 왜 있어야 돼?”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제가 심하게, 심하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심하게, 독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안 듣기 위해서 들어요. ‘들었으니까 이제 내 맘대로 살아도 되지요?’라고 빨리 내빼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듣는다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사는 목적은 말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도망치는 그것을 자기 승리, 인간승리로 간주해요. 스스로 자축합니다. ‘나 하나님 말씀, 잔소리 안 듣고도 멀쩡해. 이렇게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졌잖아.’라는 자기에 대한 찬미,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 그걸 포기를 못 하는 겁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교회 나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말씀 들었으니 나한테 더 이상 간섭하고 관여하지 마소’ 이렇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말씀에서 도망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지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출생 자체가 지옥입니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출생 자체가 지옥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한 예가, 주께서는 ‘네가 지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한 명을 택해서 열두 제자 가운데 박아놨어요. 열두 제자 안에 포함을 시켰습니다. 그 열두 제자 안에 포함된 한 명이 그냥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열두 제자의 조직을 와해시킬 핵심적인 요소로써 거기에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그 이름이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 속에 사탄이 들어갔어요. 악마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악귀, 악마, 사탄의 나라가 지금 이 세상을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통치하고 지배한다는 것을 가룟유다의 존재를 통해서 분명히 알려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 먼저 사탄부터 일어서서 활동을 해 줘야 돼요. 사탄이 예수님을 친히 체포를 해 줘야 됩니다. 가롯 유다가 고자질 해야 돼요. 그리고 그 가롯 유다의 움직임은 사탄의 움직임이고, 그 사탄의 움직임에 그 당시의 모든 사법체계가 움직여 줘야 돼요. 가롯 유다의 말에 동원되야 돼고, 들어줘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날 수가 있어요. 떠날 때 예수님이 빈손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리가 들어가고 자기 자리가 빠질 수밖에 없는 세계에 너희가 살고 있다는 거예요. 말씀을 기피하는 세계에 너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업무를 주께서 자기 제자 뽑는 것을 통해 친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님이 떠난 자리에 그들에게 뭐가 있냐면, 말씀과 율법이 가득한 게 그들의 세계에요. 그게 유대 사회에요. 유대 사회에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해요. 그런데 가득한 그 말씀이 아무리 듣고 배워도 자기 내부까지 들어오질 못합니다. 겉만 훑고 떨어지고, 겉만 훑고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주장합니다. “말씀 들어줬잖아요. 말씀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씀 듣는 것으로 진짜 말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기들의 포장용 지식으로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싶어 예수님의 그 잔소리를 추방시켰는데 예수님은 그걸 미리 아시고 요한복음 5장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바로 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내 음성 듣기 싫어서 도망치는데 도망쳐 봤자라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엔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그 장소가 무덤 속이라는 거예요. 죽었어도 주님의 말씀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인간의 팔자입니다. 도망치면 어디로 도망치는데? 도망칠 데가 어딨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왜 도망칠 수 없는 인간들이 힘을 합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왜 하나님을 죽이는가?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들이 현재 있는 나라가 악마가 지배하는 나라,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을 들키게 되는 거예요. 악마가 힘이 있잖아요.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악마는 바로 인간 사는 이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들키기 싫은 거예요.
왜냐면 악마의 거처인 동시에 모든 인류의 거처가 지옥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지옥인 것을 안 들키게 하려고 말씀의 지식으로만 포장을 하고 내부로 들어와서 “어? 내가 지옥에 사네? 난 지옥맨이네?”라는 말을 못 하도록 우리 안에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요.
말씀 듣고 설교 듣는 것으로 퉁 치자는 거예요. 말씀이 내 안에 못 들어오게 만드는 거예요. “들어줬잖아!” 그거에요. “성경 공부했잖아요. 성경 100독 했잖아요.” 마가복음 9장 4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은, 인간이 사는 모든 세계가 현재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뜻이고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뜻은 중립지역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겁니다. ‘정말로 이 세상이 지옥이고 너는 지옥맨인데 네가 지옥에서 살기 싫다면 네 눈을 빼서라도, 팔을 잘라서라도 나올 생각을 해야지. 뭣들 하고 있냐?’ 이런 뜻이죠.
‘생각이 도대체 뭐냐? 머릿속 돌아가는 생각에 뭐가 들어있느냐’는 거죠. 여기에 보면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지옥은 어떤 곳이냐?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도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받는 세계가 지옥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가 있는데 제우스의 벌을 받는 신인이 프로메테우스인데 이 자가 받는 벌의 내용이 뭐냐? 바위에 묶여서 독수리에게 생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당했어요. 그럴 때 참 아프죠. 아프지만 ‘그래. 간 이거 다 빼 먹히면 두 번 다시 고통스러운 순간은 오지 않을 거야. 뭐 간이 있어야지. 없잖아. 없으니까 독수리가 날 아프게 쪼아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제우스가 간이 다 먹히면 새 간이 돋아나게 해요. 그러니까 독수리가 또 쪼아 먹게 만들었어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반복이죠.
성경에서는 뭐냐? 구더기도 죽지 않아요. 마가복음 9장 48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문제는 제대로 죽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인간의 문제는 제대로 죽지를 못해요. 칵 죽으면 좋은데, 자살해도 안 돼요. 제대로 못 죽어요. 안 죽어요. 안 죽으니까 문제가 돼요. 안 죽으니까 지옥이에요, 안 죽으니까! 칼로 난도질을 해도 죽지를 않아요. 지옥에 죽음이 없어요. 이게 미칠 지경이에요, 정말.
하나님에 대한 원망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하나님 너 잘났다, 그 욕설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욕설이라도 해야 인간승리거든요. ‘나 하나님 안 믿거든요. 잘 버티잖아, 봐라.’ 그 인간승리는 욕설로 나와요. 욕설이 집대성된 것이 십자가 사건이고요.
왜 지옥에서는 죽지를 못하느냐? 그것의 내막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 나무가 천국에 활짝 만개되어 있어요. 생명 나무가 많아요. 그러면 생명 나무의 과실을 따먹을 때 한 개 따먹고 두 개 따먹고, 점점 줄어들면 안 되잖아요. 생명 나무가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천국에서, 예수님의 나라에서 저쪽에서 계속 살아있으려면 이쪽의 지옥에서 계속해서 구더기도 죽지 않고 고통이 계속되어야 저쪽의 복락이 계속되는 겁니다.
선악과의 손상된 그 결과가 지옥에서 계속 살아있는 것과 연동하여서 천국에서는 생명이라는 게 이렇게 영원토록 마르지 않고 끝없이 줄곧 계속 이어짐을 알리기 위해서 반대쪽의 세계에서는 영원토록 반복해서 고통이 고통에 고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게 다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 선악과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놓은 탓이에요.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요, 하나님이 심어놨는데.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해요. 내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문제에요.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천국, 지옥을 주께서는 이미 가롯 유다의 죽음을 통해 보여줬어요. ‘네가 가는 곳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세계에 네가 가고 있다.’ 어떤 식으로 가느냐, 네가 그런 식으로 가고 있다. 말씀을 피해서 도망치는 방식, 예수님을 피해서 도망치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한 말씀들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우리가 태어나면서 가정에서 양육 받고 학교에서 교육받는 모든 교육이 지옥에서 살아남는 교육을 줄곧 받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학교에서 그런 교육을 시키는가? 그것은 마귀가 이 세상 자체가 악마가 왕이라는 것을 감추는 식으로 공교육이 이루어지고 사교육이 이뤄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정이라는 이름의 지옥, 교회라는 이름의 지옥, 학교라는 이름의 지옥, 국가라는 이름의 지옥, 직장이라는 이름의 지옥, 우리가 만나는 모든 공간은 다 지옥의 다양한 면을 훑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 지옥의 단면들이에요.
왜 그렇게 하게 하느냐? 주께서 왜 우리로 하여금 지옥 생활하도록 이렇게 만드시는가? 오늘 본문에 나왔듯이 우리가 여기서 떠나야 될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떠나는 기쁨을 더욱더 크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실망스러운 고생과 고생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돌게 만드는 겁니다. 죽도록 일했는데 결국은 그 죽도록 일한 것이 나를 죽도록 고생시킵니다. 아주 단축해서 말하면,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뭉개는 일에 태어나서 종사하게 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을 못 떠나게 만들어 버려요. 성도는 떠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불신자는 ‘고생 많이 했으니까 안 떠나야 된다’는 식으로 자기 내부의 방향성이 ‘떠나면 나만 손해다, 헛 짓 했다’는 자기 자긍심과 결부해서 이해합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래요.
그래서 성경 시편에서는, ‘우리 바닥에 음부가 있다, 지옥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시편 여러 군데에 나와요. 그 말은 우리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이곳에 우리가 숨을 곳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지옥이라는 것, 지옥 위에 베니어합판이 있어요. 그 얇은 베니어합판 위에서 먹고 마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 베니어합판만 쑥 빠져버리면 그다음에 가는 곳은 지옥이에요. 그러니까 지옥에서 뿜어 나오는 힘의 에너지에 의해 베니어합판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베니어합판 위에서. 베니어합판은 뭐냐면, 가려 놓는 거예요. 받치는 힘은 별로 없고 그냥 ‘아,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고, 밑에는 지옥인데 지옥이라는 사실을 감춰놓기 위해서 베니어합판 하나 딱 해놓은 거예요.
자칫 힘주면 푹 꺼져서 죽습니다. 17세기 1600년경에 일본의 서민 문학 가운데 ‘바쇼의 하이쿠’라는 문학이 있어요. 짧은 시인데 시가 이렇습니다. ‘퐁당’ 퐁당으로 끝이에요. ‘고요한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드는 소리. 퐁당’ 퐁당. 얼마나 함축했습니까? 여백을 강조하기 위한 거죠. 저도 시를 짓겠습니다, 한 자로. ‘푹’ 푹, 그냥 빠져버린 거예요. 원래부터 지옥에서 살던 것이 죽으면 그냥 푹 빠지는 거예요. 유황불에 빠지는지 어디로 빠지는지 그냥 푹 빠지는 거예요.
제가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감자를 지져 먹고, 볶아먹고, 튀김 해 먹고, 조림해 먹고, 감자하나 가지고 여러 가지 요리 하듯이 제자한테 얻어맞아 죽고, 학부모한테 욕 얻어먹어서 자살하고, 차에 받혀 죽고, 신림동에서 엉뚱한 칼부림에 죽고, 우리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존재고 죽을 때도 죽는데, 죽으면 되는데 문제는 지옥의 특징은 뭐냐? 안 죽는다는 데 있어요.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죽어도 안 죽어요.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안 죽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에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그 말씀도 안 들을래.” 하고 고개 돌리거든요. 그 말씀도 안 듣는 게, 그 사람도 이미 말씀 자체가 말씀화 되어서 늙어 죽어요. 요한복음 5장 28절 안 들어도, 본인이 듣든 안 듣든 상관없이 그 말씀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안 죽는 쪽으로 죽어가고 있어요.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겠죠. 대책은 대체로 간단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악마가 없는 장소를 만들면 되잖아요. 어떻습니까? 이 아이디어 괜찮죠? 이 세상 모든 곳을 악마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악마가 없는 장소를 만들면 되죠. 그 장소는 이 세상에는 없어요. 왜냐면 악마가 꽉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공간도 지옥입니다. 어떻게 살든 지옥이에요.
밑에서 죽음이 내 발목을 꽉, 꽉 쥐고 있고 나는 ’발목에서 떼라고. 나도 밥 먹고 살아야지. 이번 달 수입이 200만이 뭐야 500만은 되야지.’ 계속 이런 식으로 죽음은 잡아당기고 나는 자꾸 탈출하는 식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생, 고생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요.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틈을 만들어내요, 틈을.
㉮내 마음은 악마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 속은 말씀 피해서 도망치기, 그게 인간승리, 그게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 속에 말씀이 딱 오면서 거기에 틈을 내요. 상처를 내버려요. 없는 공간인데 말씀이 와서 거기가 갈라져 버려요. 갈라지게 되면 나와 나 사이가 갈라져요.
㉰나와 나 사이가 갈라지면서 나 자체에 없었던 공간이 내 안에 마련됩니다. 이걸 실감하려면 여러분 손에 전부 면도칼 하나씩 쥐고 손바닥 펴서 쫙 그어야 돼요. 피 나는 것은 일단 훑어 내고요, 살갗이 어떤 모습으로 찢어졌는지를 봐야해요. 그러면 같이 붙어있던 살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죠,
㉱원래 살갗밖에 없는데 오른쪽과 왼쪽으로 쫙 벌어지면서 여기서 새로운 내부가 노출이 돼요. 피부 세포 말고 살갗 밑에 있는, 그 속에 있는 것이 노출이 돼죠. 그 노출, 베니어합판이 벗겨지는 거예요. 베니어합판이 쪼개지는 겁니다. 그게 제사법이에요.
악마가 미처 점령하지 못한 공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제사법을 실어서 자기 성도 내부에 침투해서 제사법의 완성된 것을 우리에게 도달시키면 우리 마음속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너는 너를 그만 놔줘라. 네가 너와 결별해라. 너를 끌고 천국 갈 생각하지 마라.”
뒤에 악마가 배낭처럼 달라붙어요. 내가 천국 가면 악마도 같이 천국 가겠다고 달려들기 때문에 그걸 떨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배낭끈을 가위로 잘라 버려야 돼요. 이걸 잘라서, 내가 알던, 확보했던 성경 지식을 가위로 잘라서 갖다 버려야 그 성경 지식 가지고 그동안 40년 50년 교회 다녔던, 교회 다닌 내가 ‘지옥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그건 지옥에 딱입니다.’
그 말씀이 어디 나오냐면, 바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옵니다. 14절부터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자, 모든 사람이 일단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악마가 지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하나님을 내쫓은 그 세계, 죽은 세계입니다. 죽은 세계 속에 네가 그 일원이 되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 대목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본인과의 결별이에요. 본인과 빠이빠이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할 수가 없어요. 누가 하느냐? 제사법이 와야 돼요. 그 제사법이 오게 되면 거기에 누가 따라오느냐 하면, 제사장이 따라옵니다.
천국에 갔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면접을 하는데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이렇게 던질 수 있어요. “제사장이 왜 필요하냐? 너에게 제사장이 왜 필요하지?” 물으면 이렇게 답변해야 합니다. “내가 나와 결별하기 위해서요. 내가 나와 헤어지기 위해서, 제사장이 끼어들어 나와 헤어지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15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다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 자기 구원을 포기한 사람,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천국 보내겠다는 이 시도가 마귀 짓인 것을 깨닫고 그 나를 나에게서 떨쳐버리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자리를 대신한 제사장 안에, 내가 없던 나를 만드는 공간이 그 제사법 안에 마련돼 있어요. 기존의 나와 교체시켜 새롭게 천국 들어갈 나, 제사법 안에 이미 그 안에 내가 만들어진 채 바꿔치기 되는 거예요.
“새집 줄게, 옛집 버려라.” 이런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있으니까, 기존의 네가 쥐고 있던 너를 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잘 안 버려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 직사하게 돈 버는 고생을 하게 만들어요. 돈 벌게 만들어서 이 세상 자체에 진절머리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보면 세상 탓이 아니고 그 세상을 안 떠나려고 붙잡아서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지독하고 독한 나, 내가 나한테 가장 지독한 벌레에요, 거머리에요, 거머리. 나한테 나보다 더 센 거머리가 없어요. 그 거머리를 못 떼고 죽은 자가 가롯 유다, 그 거머리 떼고 죽은 자가 사도 바울.
여기서 사도 바울의 죽음과 가롯 유다의 죽음의 차이점을 우리는 극명하고 분명하게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누누이 그 점을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그런데 당사자 이스라엘 사람도 모르고, 그 이스라엘 역사를 보고 있는 우리도 눈치채지를 못했어요.
무슨 이야기냐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하니까 룰루랄라 신나게 모세 따라서, “야, 모세 말은 맞아. 믿을 만해. 모세를 믿어야 해. 우리는 모세를 따라야 돼. 모세가 하나님과의 연락책이야.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연락이 오니까 모세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연락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들은 철석같이 다짐에 다짐을 하고 따라갔는데 앞에 홍해 바다가 떡 하니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쩔 겁니까? 홍해 바다가 있는데. 그들은 원망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요. “우리를 집단으로 죽이려고, 그것도 바닷가에서 죽이려고, 공동묘지 없어서 여기를 공동묘지로 삼으려고 우리를 이끌고 왔구나, 모세야.” 자기들은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으면 모세를 믿는 게 아니에요, 대책이 없으면.
모세를 쫓아낼 생각 하고 죽일 생각 하는 거예요. 바로 이런 마음으로 그들은 애굽에서 살았고, 그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채로 모세 따라 우르르 쫓아 나온 거예요. 자기 마음을 악마가 지배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그냥 나 하나 죽어서 천당, 좋은 나라 가면 된다는 거예요. ‘고생 직사하게 했으니까 죽어서라도 호강하자.’ 이런 식으로 교회 오는 거예요, 교회 올 때. ‘숨 틜 곳은 천국밖에 없다. 복음아, 나를 살려줘.’
복음은 우리를 살려주는 게 아닙니다. 콕, 콕 찍어버립니다. 나를 살려주는 메시아는 없어요. 나를 죽이는 메시아만 있어요. 다크 메시아에요. 어두운 메시아에요. 홍해를 딱 건너는데 홍해가 구조가 어떤 구조냐면요, 하나님의 뜻이 대단해요, 바닷물이 양쪽으로 물이 되게 만들었어요, 양쪽에. 생각만 해도 기가 차요. 요단강은 한쪽에는 물이 없어요. 한쪽은 막혀 있죠. 멀리서 보면 물이 안 보여요. 바짝 마른 것으로 보이지만 홍해는 의도적으로 물속을 보여줘요.
먼저 있는 바닷물이 흘러가서 벽이 됐는데 양쪽 벽이 있어요. 순간적으로 물결이 스톱이 된 거예요, 물결이. H2O가 자기 할 일 안 하고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다 율법 속으로 들어온 겁니다, 율법 속으로. 그 율법 속이 바로 죽음의 실체에요.
인간이 지옥 가는 이유를 율법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율법 속에서 길이 나게 만드는 겁니다, 율법 속에서 생명의 길이 나는 방식으로 그들을 애굽 땅에서 광야로 내모는 그 길이 바로 홍해에요. 그러면 광야에 갔으면 그 양쪽 율법 속의 물의 벽이 사라지지 않고 율법화 되어서 계속해서 광야 때에 율법 속으로, 율법 속으로, 율법 속으로 계속 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거는 제가 어디에서 강의했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여기서는 말씀 다 못 드리겠지만 의도적으로 물 없는 곳에 가서, 그들이 원망하게 만들어서 그다음에 물을 주되 물을 주는 것이 취지가 아니고요, ‘내 윤리와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면 너 죽는다’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이끌었어요.
계속해서 주님의 관점은 뭐냐 하면, 생명의 길은 율법에 있지 네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말씀 안에 있어야 산다는 거예요. 말씀 피해서 도망치지 말고, 말씀 기피하지 말고, 말씀 지식으로 해서 훑지 말고 포장하지 말고, 말씀속에 들어가야 돼요, 말씀 속에.
제가 지난 광주 강의 때 그런 이야기 했죠. 만나를 죽여서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고 만나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만나가 일회용 말씀이거든요, 만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너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를 살리기 위해서, 말씀,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의 완성에, 거기에 말씀을 살린다는 조건 하에, 그 자리에 우리 자리가 새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말씀만! 그 말씀이 누구냐?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다 이루심만 살리기 위해서, 그 자리에 우리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어디에 보내느냐? 그 말씀이 바로 지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애굽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지 않고 이미 죽은 자로, 살아있으면서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서 성도를 그렇게 다루시면서 십자가를 통해 율법 완성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같이 결합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제사법이 함축된 것이 사도 바울이고 오늘날 우리들이에요, 성도들이에요, 제사법이.
그 제사법 안에 제사장이 계시고 그 제사장의 일은 악마가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한 인물이에요. 특수한 인물이 우리 대신 일을 다 처리한다 이 말입니다. 제사장은 처녀랑만 결혼해야 하고, 누구와 결혼해서는 안 되고, 과부랑은 안 되고……, 여러 가지 조항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으니까요, 악마로부터 오염되어 있으니까 친히 주님께서 수직적으로 말씀을 해서 지옥에다가 저주가 없는 거룩한 공원을 따로 마련하는 거예요.
마련하는데 이 마련하는 장소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의 율법이 안착하는 데서 그들이 얼마나 저항하겠어요. 그 저항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발작을 일으키듯이 저항했어요.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죠. 아주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 제사장도 말라기에 보면 결국은 오염됐어요. 제사장만큼은 거룩해야 하는데 악마가 독하기도 독해요. 악마가 “어디야? 거룩한 공간이 있다고? 손 봐야 되겠네.” 거룩한 공간마저 악마가 드디어 깃발 꽂고 흔들어 버렸어요. 일체 이 지옥에서는 완전한 거룩이 성립되지 못하도록.
악마가 용납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도록 부추긴 것이 악마, 사탄이기 때문에, 뱀이기 때문에요. 악마도 끝까지 자기 고집이 있어요. ‘한 명도,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천국 못 가게 해라.’ 우는 사자 같이 자기의 비밀경찰을 보내서 기어이 발목 잡아 다시 세상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놓는데 악마가 사력을 다하고 있어요. 악마가 좀 바빠요? 되게 바빠요. 모든 거룩한 것은 다 접수했습니다. 말라기 2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내가 저주할 때 이유가 있는데 그 저주가 이미 너의 마음은 나에게 없다는 거예요.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악마한테 접수가 되니까 제사가 형식화된 거예요.
육체가 하는 본능 중 하나가 배설 행위거든요. 더러운 것은 바깥에 내보내서 내부는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신체적 발생처럼 하나님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제사해 줘버리자. 더러워라, 헌금해 줘버리자.’ 이런 식으로 정작 자기가 하고 싫은 것은 바깥으로 후딱 내보내고 자기 안에는 자기 하고 싶은 것만 담는 거예요.
이 짓을 했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너희가 나에게 준 것, 나를 똥으로 여기는데 그 똥 너의 얼굴에 처발라 버릴 것이라는 거예요.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런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4절에 이야기합니다. ‘너희와 세운 언약, 네가 망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이거에요. 이 세상 전부는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지옥을 방문하셔서 오염되지 않는, 더러워지지 않는, 거룩이 유지되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어요. 시편 118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다시 읽어드립니다. 읽고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이 구절에서 여기 ‘나’는 누구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답변 아시고 다시 물어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그러니까 여기 어떤 분이 계신데, 그 어떤 분은 여호와 편인데 그 증거가 뭐냐?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는 것이 내가 여호와 편에 속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사람이 어찌할꼬’ 사람은 나를 버렸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내용이거든요.
여러분 누구 편이에요? 사람 편입니까, 하나님 편입니까? 이 말을 다르게 해야 해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편입니까, 하나님 편입니까? 같은 말입니다. 나와 결별을 안 했어요. 나와 헤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118편 6절의 말씀에 완전히 도발적이죠. 이 말씀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내가 주님 도와주면 안 됩니까?” “안 돼.” ‘사람이 어찌할꼬’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내 편이 될 수 없어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은 하나님만의 편이지 어떤 인간도 ‘예수님과 편 먹었습니다’ 하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어야 돼요. 아무도 주님 편 아닙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이어보면 제사장도 결국엔 악마에게 점령당했어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믿을 것 없고요, 어떤 것도 행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 제사법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면 나실인 제도가 있습니다. 아~ 이거! 그럴 줄 알았어요. 이 제사장도 망할 줄 알았습니다. 주께서 민수기 15장 6절에 나실인을 딱 준비해놨습니다.
나실인은 제사장이 망했을 때, 제사장이 믿을 만하지 않을 때 비로소 빛을 내는, 빛이 나는 제도에요.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자로 다루어지는 것이 나실인입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한다는 것은, 생명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나는 생산물의 어떠한 효력도 거부하며, 그것과 상관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 흔히 말하는 축복이라는 것도 다 거부하고 그다음 7절에,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고”
새삼스럽게 죽는 자와, 이미 주 안에서, 새 제사법 안에서 죽는 자와 차별화시키는 거예요. “아이고, 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죽었대. 안 됐다.” 이게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죽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나실인, 그 사람의 제도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살아있으나 죽은 자로 다루어지는 것. 감히 어떤 인간의 육체로도 담길 수 없는 그 제사 예물, 어린 양이나 소나 이런 것으로 해야 하고 인간은 빼거든요,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자리에 예외적으로 인간의 머리카락이 제물에 끼어 들어갈 수 있는 그 인간이 되려면 그 인간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된 인간, 죽은 자인데 머리카락이 의미 있게 자라는 거예요.
그냥 자라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포도주를 멀리하고, 모든 축복을 멀리하고, 이미 죽었다는 그런 개념조차 멀리하고, 이 인간 세상의 논리와 개념과는 구별된 새롭게 등장한 오직 생명의 법의 완성으로서의 자라나는 그 머리카락은 서원한 그때가 끝나면 잘라서 인간의 요소가 섞이지 않은 거룩한 하나님의 제물에 섞여버리는 그 제도가 나실인입니다.
그 나실인이 바로 삼손이었고 마지막에 예수님 나실인이었고 그 나실인에 의해 제도가 응축이 되면 사도 바울은 ‘나는 죽고 내 안에 나실인이 살아있다’는, 하나의 말씀 속에서 홍해 물이 벽이 되어 새롭게 죽음을 통과하는 생명의 말씀 덩어리로써 성도가 새롭게 출현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나의 등이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전등이에요. Flashlight. 주님이 우리를 쥐고, 빛이 나올 수 없는데 빛을 비추는 거예요. 무슨 빛? 복음의 빛. 이 복음의 빛은 바로 ‘내가 죽은 것 같이 너도 내 인생 함축해서 살다가 나처럼 죽어라, 인간아.’ 하고 비춰주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그것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레위 지파의 완성이 다윗 유다 지파로 바뀌면서, 히브리서 7장에 나오지요, 그렇게 바뀌면서 로마서에서는 복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자, 복음은 뭐냐? 2-4절에 복음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제사의 레위지파는 관계 끝났고, 다윗,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가 실패한 것을 혼자 다 이루시고, 그 이루심이 하나의 말씀의 덩어리로서 죽어가고 있는 우리를 이제는 우리 자신과 살지 않게 만들고 주님과 함께 살게 만드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광주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 사람을 사도 바울은 ‘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it’, ‘그’라고 이야기하고 그가 있는데 그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육체의 가시가, 사탄의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 응답받기를 “네 은혜가 족하다.” ‘됐네, 이 사람아. 네 속에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들어있어. 생명이 들어있다고. 너는 움직이는 생명나무가 되어라’ 하는 이것으로 감사했던 사도 바울, 사도 바울뿐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주께서 때, 우리 성도를 위해 준비한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미리 구원을 받게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과 어떠한 차이가 나는 것을 보여주려 삽니까, 아니면 차이 안 나려고 삽니까? 왜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왜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맞아 죽을 분으로지만 꼭 오셔야 되는 이유를 깨달아서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다시 한번 흠칫 놀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