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밖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레 26:15)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하며는 그래야 하나님 입에서 내뱉은 말씀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들이 상호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전쟁에 끼어들 수없이 그냥 다루어질 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꿈 안에서 살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군대 진영에 ‘꿈’이라는 무기가 이미 작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무기는, 이미 그 꿈에서 벗어날 현실로 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도구들입니다.
항아리는 깨어져야 그 안에 있는 횃불이 나옵니다. 항아리는 횃불을 가지는 기능만 할 뿐입니다. 인간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꿈의 일부로 보고 계십니다. 꿈의 세계에 잠겨있는 양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칼을 쥐고 남을 찌르고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지키겠다는 것은 여전히 꿈에서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꿈 바깥에 있고 미디안은 꿈 안에 놓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꿈 속에 있는 인간 세계를 꿈 바깥에서 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내포되어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담겨 있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께서 차이를 두십니다.
주님의 마음에 두고, 담고 있는 성도 되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교인들,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필히 망해야 합니다. 멸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내뱉었으면 말씀대로 멸망 당하는 자가 필히 생겨나야 말씀이 말씀대로 그 가치를 다 하거든요.
여기 14절에 보면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우상)들을 좇았음이라”라고 주님의 마음속에 이미 예견되어있는 것이 나왔다면 이스라엘은 필히 바알을 섬겨야 합니다. 이걸 잘못 해석해서 ‘아, 이스라엘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렇게 바알을 섬기나? 너무하네~ 너무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냐?’라고 후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욕을 하는데 ‘너는? 너는 매일의 삶이 바알 섬기는 삶이 아니야? 어디 남을 말하고 있어? 너도 마찬가지야’라고 예레미야 말씀이 오늘날 우리보고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또 불만을 터트리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왜 망하도록 조치하십니까?’라고 나오신다면 주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네게 있는 눈, 코, 입, 귀, 그것들 어디에 그동안 써먹었지?” 예수님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은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는데 다 소모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너의 눈과 코와 귀와 입은 그동안 뭘 했냐? 어디에 써먹은 거예요?
예수님의 눈, 코, 입, 이런 거 다 빼고, 하나님의 마음도 다 빼고, 그냥 우리 자신에게 우리에게 달린 코, 눈, 입, 귀, 이거 우리는 그동안 어디에 써먹었습니까? 제가 굳이 정답을 말할 필요가 없죠. 돈 모으는 데 썼지요. 그냥 돈 모으는 데 썼어요. 돈은 왜 모으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 모으죠. ‘너는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느냐?’ 혹시 주님이 이렇게 물으신다면 이런 답이 정답이 됩니다.
‘주님, 멈출 수가 없네요’ 멈출 수가 없다는 이게 정답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울산강의에서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시 언급했는데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때 놀라운 사실은 요압이 말렸습니다. ‘임금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냥 밀어붙였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그 어떤 일도 뒤에서 밀어버리면, 물론 성경 본문에서는 사단이 격동했다고 나오지만, 그렇게 밀어버리면 인간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교훈, 성경 말씀, 귀한 주님의 말씀, 그런 것들로 멈춰지겠어요? 멈춰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어도 가는 길을 되돌이키거나, 스톱하거나, 이 길이 아니니 다른 길로 가야지 하는 그것이 왜 안 되는가. 그것은 말씀을 지킬 육신이 따로 준비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의 눈과 코와 귀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실패자일 수밖에 없어요.
실패자라는 것이 기분 나쁘면 기분 안 나쁜 표현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익명성이라고 합니다. 익명성. 우리의 이름은 주님께서 익명성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익명성이라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름은 있으나 없는 존재로 주께서 간주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이 있으나 이름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오직 하나의 이름만 높입니다. 주의 이름만 높이죠. 다른 사람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담긴,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이러해야 이스라엘이라는 그 업무를 온전하게 수행한 분, 그분만 주께서는 익명성 아닌 이름으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속에 있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현재 눈, 코, 입 달린 이스라엘을 주께서 차이나게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 깔아놨습니다. 그렇게 깔아놓고
ⓑ주변에 바알이나 여러 가지 우상 섬기는 나라로 완전히 둘러싸인 나라로 포위되게 만들었어요.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뺑뺑 둘러서 포위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래도 우상 섬길 거야? 안 섬길 거야?’
ⓒ버티다가, 버티다가 결국은 우상을 더 섬깁니다. 그래놓고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배신자로 이야기해요. 그 배신자라는 이야기가 신명기 4장 26~28절에 나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섬기리라”
ⓔ그 이유가 23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라고 나옵니다. 잊어버린다고 나왔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다가가는 듯하면서도 그들에게 막혀서 언약이 언약대로 그들에게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식의 언약을 애초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신 겁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아무리 설교 듣고 말씀을 봐도,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오는 듯, 오는 듯한데, 우리 속까지 오지 못하고 튕겨 나와요.
말씀이 우리에게 먹히지를 않습니다. 그게 우리의 육신이에요. 우리 안에 대항력(對抗力)을 감추고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살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하겠다는 식이면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섞이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것을 배신했다고 표현되어있는데
레위기 26장 15~16절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찐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레위기 26장 24~25절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찌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그러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원수 취급받는 거죠), 너희가 성읍에 모일찌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예레미야 9장 16절 너희들이 아무리 도망쳐 봐야, 내가 일으킨 칼이 너희를 뒤따라가서 너희를 다 쑤셔버린다는 겁니다. 따라가서 죽여버린다는 거죠. 추적해서 다 몰살시켜버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와닿지를 않으니까 우리는 이 말씀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는데, 정말 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 와닿는다면 필히 우리는 이러한 반발을 드러내야 해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못 죽여 먹어서 환장하십니까? 왜 우리를 못 죽여 안달하신 것처럼 반드시 죽일 대상으로 그렇게 취급하고 처리하십니까?’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대들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해요. 그래야 말씀이 여러분 속에 제대로 안착한 겁니다. ‘하나님은 왜 저를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라고 이렇게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이방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성도입니다.
불연속성, 내 힘이 개입되지 않는 중간의 찢어짐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와 차이 없습니다. 다, 자기 배부르기를 원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은 동일한데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딱 하나예요. ‘Why me?’ 하나님,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 저에게 왜. 저도 잘해보려고, 하나님 섬겨보려고 애쓰고 정말 잘해보려고 하는데 왜 저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까?
바알신이라는 것이 어떤 목각신을 섬기는 것이 바알신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그런 사고방식의 연장선 끝에 우상이 있습니다. 나를 건사하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안 다치기 위해서 믿는 신은 그게 예수가 되든, 성령이 되든, 삼위일체가 되든, 하나님이 되든, 모조리 우상이에요.
여호와께서 기드온 300명 군사를 통해서 사용하신 무기가 뭐냐 하면 세 가지입니다. 항아리, 횃불, 나팔.
이 세 가지 물건의 특징은 뭐냐. 기드온의 300명아, 너의 진격을 멈춰라. 너희의 진격을 멈추고 비켜! 비켜! 내가 나가도록 너는 비켜버려.
다시 말해서 네가 아는 미디안의 적과 하나님의 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가 적이 오게 되면 적이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다움을 살리기 위해서 처리해야 할 대상이 모두 적이 되는 거예요. 그 세 가지 물건 가지고 이기려는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적이에요.
그들은 항아리를 깨는 겁니다. 깨는 거. 항아리 깨면 횃불 나오고요, 그 횃불을 횃불로 말미암아 이미 그 자체가 승리입니다. 그게 나팔이에요. 게임 끝났다고 승리의 나팔 부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면 여러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익명성이죠. 칼만 쥐었다뿐이지 너나 나나 같은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 존재는 익명성, 그냥 꿈입니다.
하나의 있다가 없어지는 꿈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꿈은 꿈일 뿐이에요. 꿈에서 인간은 환상을 좇아서 꿈인 줄도 모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라는 식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쪽에 서게 되면 그 소리조차도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죠. 꿈에서 인간은 환상을 만들고 환상 때문에 울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자살하고, 보약을 먹고,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 눈과 코와 입을 굴려야 내가 돈을 벌고 내가 산다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는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로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았다는 말은 우리 맘속에 말씀이 이미 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사사기 7장, 예레미야 9장, 레위기 26장, 이것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쏙 집어넣은 거예요.
㉮바깥의 말씀이 함몰되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자체가 말씀의 내부가 되는 겁니다. 말씀의 내부가 되면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나팔소리이고, 이미 구원받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범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 존재 자체가 환상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열심히 뭐라도 움직여야 돈을 벌고, 밥이라도 먹고 산다는 이 자체가 이미 일이 끝난 상태에서 뒤돌아보며 내가 다시 꾸는, 반복해서 매일같이 꾸는 나의 꿈의 일부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가는 성도로서,
■네가 이스라엘로 세상에 나아가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사는 것도 네가 사는 것도 꿈이라고 알려줘라.
이왕 꿈꾸는 거, 꿈 is 뭔들~, 뭔들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하고 싶은 거 다 하시되, 그것마저 꿈이라고 생각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이제는 내가 말씀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실현되고 현실로 이루어지는 그런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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