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정리

이레

아빠와 함께 2023. 6. 23. 13:37

 왜 하필이면 이레냐 이 말이죠, 언약에서는. 이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끄집어낸 거예요. 규칙성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언약적 규칙성을 부여했는데 그게 시간적 표현이었다. 이레라는 시간적 표현을 가지고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주께서 이레를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 자체를 이레로 또 거기다 처발라버리죠. 이레로. 그러면 이레의 핵심부분을 보자는 거예요. 그건 아까 우리 봤어요.

70이레로 시작해놓고, 원이 커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있는 거예요. 70이레 가운데서 조그만 원, 이 원이 1이레가 되겠죠. 1이레가 반으로 쪼개지는 거예요. 이미 쪼개졌다 할 때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시간적 개념은 더 이상 접근 불가에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도저히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시간이 쪼개져요. 시간은 변화되는 것이지, 쪼개지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은 쪼개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영숙’이라고 부르니까, 사람들이 ‘영’은 어디가고 ‘숙’은 어디 갔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영숙이가 한 사람 이름인데 아니야, 영이라는 사람이 있고 숙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신이라 하는 것은 전부다 통합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다른 신 안 찾아요. 신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나를 못 알아본다, 그러니까. 쪼개지는 거? 내가 쪼개진 모습으로 올게. 내가. 너희들이 아는 신과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내가 알려줄게.” 그게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시작이죠, 언약의 시작.
그렇다면 이 이레에서 인간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시간의 원천이 여기서 시작될 때 ½+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½에 뭘 했는가? 보면 알겠죠. 다니엘 9장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자, 언약의 핵심이 한 이레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인간의 모든 제사와 예물은 금지됐죠. 그럼 이건 뭡니까? 율법으로 의롭다 할 자는 없다, 가 되죠. 율법으로 의롭다 할 자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체제 인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죠. 제가 묻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중요합니까, 의로움이 중요합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뭐가 중요해요? 의로움이죠. 의로움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거죠.

인간은 이미 신을 믿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겐 인간을 종 부리듯 하는 신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수학이고 그게 예술이었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뭐냐? 자기 가문, 족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자기 족보에요. 우리 집안이에요. 우리 집안을 빛내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집안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가정.
A공간에서 인간은 복수하는 겁니다. 내가 이미 신봉하는 신이 따로 있어요. 성경에서는 그게 마귀죠.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마귀지만 인간은 마귀는 모르고 나는 나의 이상형이 있어요. 내가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신이 나를 인도하고 믿게 하는 거예요. A공간에서도 종교는 똑같아요. 그게 마귀 종교이지만 어쨌든 간에 종교는 종교에요. 신봉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헌신하는 재미로.

B공간에서는 주님 공간에서는 그 신과 싸웁니다. 싸워서 져요. 패배해버려요. 그 패배한 자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새로운 모퉁이 돌로 시작되는 겁니다. (행 4:11) 따라서 성령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절차를 똑같이 그걸 밟게 만들어요. 다시 다니엘 9장 27절을 보면,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1이레이니까 쪼개면 뭐가 돼요? 0.5되죠. 0.5이레니까 3.5년이죠. 3.5년 동안은 철저하게 율법이고 뭐고 모든 것이 주의 율법이 유린돼요. 유린되고 나머지 3.5는 비어있습니다. 3.5는 박살나고 박살난 3.5와 또 플러스 3.5가 있는 것이 아니고 3.5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기 겹쳐져 있는 3.5가 있어요.

이미 천국, B공간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A공간은 B공간의 영광을 위해서 철저하게 모든 것이 유린되어야 되고 파괴되어야 돼요. 지옥다워야 돼요. 그것도 아주 철두철미하게 지옥다워야 돼요.
이 반 이레(3.5년) 기간의 실선이 있다면 뒷배경으로 반 이레(3.5년)가 점선으로 겹쳐있겠죠. B공간에 의해서 A공간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B공간이 B공간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켜서 이 땅에서 고난을 겪는다고 B공간 넣어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B공간에 들어간 사람은 뭐냐? 바로 A공간에 유린당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기상해서 출근하는 사람. 이걸 성경에서 ‘소자’라 합니다. “제가 언제 주님을 섬겼습니까?”하고 되묻는 사람들.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했습니까, 하고 되묻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없죠. 나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 두 겹친 공간을 주니까요. 그때 소자는, 소자가 성도죠, 성도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레를 경험합니다. π를 경험하고 오일러 수 ℯ를 경험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똑같은 법칙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법칙으로.

 

그러니까 주님의 똑같은, 언약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확고한 원칙을 위해서 수시로 나에게 변화를 유발시키는데 변화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이 소자, 성도한테 있는 겁니다.
만약에 성도의 일상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자기가 동일한 게 곧 언약이 동일한 걸로 착각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까불었다가 때로는 은혜 받았다가 때로는 분노하다가 날마다 매일같이 천장에 달린 등잔처럼 흔들리는 가운데서 변화하는 가운데서, 붙들어주는 변하지 않는 그 축과 우리 사이의 비례관계, 이레라는 비례관계, 그 관계 속에 언약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이레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렇게 규칙이 되는지를 한번 봅시다. 확인해보면 되죠.

■전체 흘러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가운데 하나님께서 땅을 안식하기 위해서 70년을 끄집어냈다 했죠. 70년인데 갑자기 다니엘 9장에 와서 70년이 뭐 됐어요? 70년이 아니고 70이레가 돼버렸죠.

■70이레가 됨으로써 70년 지나면 71년, 72년, 73년 이렇게 우리는 다시 본국에 돌아간다는 희망은 이제 끝입니다. 없습니다. 만약에 70년 지나고 70년 후에 돌아가면 이것은 장독을 물로 씻은 거예요. 인간은 율법의 연속성 안에서 구원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율법의 연속성은, 전에는 율법을 못 지켰지만 지금은 우리가 70년 동안 벌 받았기 때문에 벌섰기 때문에 반성했기 때문에 후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소유의 인간이 계속 살아있죠.

■그러나 주님은  율법을 끝내버려요. 율법의 연장선이 아니고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어버려요. 그러면 70년뿐만 아니고 그전에 있던 시간, 후에 있던 시간, 이 모든 시간은 하나님 언약적 시간으로서 탈락입니다. 탈락이에요. 인간은 기존의 시간 속에 A공간 속에 자기 몸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갈색추억>입니다.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커피 잔 두고 앉아있다 보니까 갑자기 자기가 옛날에 사랑했던 남자가 생각난 거예요. 시간 속에서 계속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이레 속에 집어넣습니까, 시간 속에 집어넣습니까? 0:2로 시작돼요, 0:2로. 그래야 주님이 함께 있는, 주님이 하시는 언약적 규칙성이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주께서 하게 하심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시간 속에 살아서 축축한 과거에 늘 잠기게 해요. 특히 비오는 날이라든지 날씨 흐린 날, 시간이 정지됩니다. 흘러간 팝송이나 들으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죠. 눈물도 찔끔 나고.
그럴 때 복음 들었는데 ‘A공간! 가라, 지옥으로!’ 하면 ‘주님은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이런 고백이 막 튀어나올 때, 그 사람은 겹쳐진 거예요.

A공간, B공간이 하나의 육신을 중간에 두고 둘이 비어있는 거예요. 내가 몰랐던 나를 B공간 안목에서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 육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다니엘이 아직도 고생해야 될 이유고요. 그러나 다니엘은 70년이 아니고 70이레를 알았죠.
우리가 육신으로 있는 이 시간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깨어져야 되고 우리 성도는 깨어질 때 같이 깨어지면서… ‘이 육신은 복음의 이름으로 온갖 핍박을 고난을 받아야 될 그 시간 속에 육신을 집어넣어놨구나.’ 하지만 우리는 저녁에는 천국으로 퇴근하고 아침에는 지옥으로 출근해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채우기 위해서 아직도 육신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 속에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희들, 알아듣지 못하는 육신과 예수님 영에 의해서 알아듣는 두 가지가 겸비되어 있는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고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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