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정리

네 속에 나 있다

아빠와 함께 2023. 7. 13. 21:51

 



이방민족의 특징을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께서 강제로 이끌어요. 어디를 가느냐? 이방나라 속을 앞장서서 주님께서 뚫고 지나갑니다.  

그 질문을 네가 내뱉으면서 질문과 더불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을 살아봐라. 그 안에 답이 있다는 거예요.  차이를 발견합니까?  차이가 안 나도 괜찮아요. 물어나 봐야 될 것 아닙니까. 뭔가 나한테 하자 있다는 그걸 느껴야 되지 않습니까? 적어도 성도라면.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죽기를 원하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느냐? 죽기를 각오하는 것 뒤에 생략된 게 있어요. 기어이 살아보자. 죽기를 각오하고 기어이 살겠다는 걸 포기하지 않은 채 죽기 살기로 살아보자. 죽기를 원하는 것은 그냥 죽는 거예요.
자, 물어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기를 각오하고 설교했습니까, 죽기를 원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냥 죽기를 원한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한 게 아니고 성령이 그렇게 했지요. 이것 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수모를 당할지 계산을 한 게 아니고 성령에 충만해서 그런 게 보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누구보고 했느냐 하면 주님보고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에게는 앞에 돌 던지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그거는 폐차고요, 죽은 자들이고. 스데반 집사는 말할 수 있는 대화상대는 오직 자기와 함께 자기를 고대하고 있는 주님만 진정 살아 있는 존재에요. 자기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은 죽어있는 존재에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죽기 전에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스데반 집사의 살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말씀과 복음과 성령이 살아 있지요. 스데반 집사는 껍데기고.

나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와 경우를 찾으세요

심각함의 심각함 가장 심각함이 뭐냐를 물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이미 십자가 앞에 끌려 나와서 죽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면서도 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검댕이 떼듯이 떼고 또 돈 버는데 어디고, 뭘 하면 몇 푼이라도 더 벌까? 여기에 돈 버는 게 나쁜 게 아니고 돈 벌지 않으면 내가 나답지 못하다는 어떤 불안감과 두려움이 발생된다는 이 사실.

고라 자손은 다 망했어요. 그런데 그 시를 남겨두었어요.  

 

생명이 어디로 들어온다? 선악과 지식 속으로 드디어 침투해 들어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의 송곳으로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바깥에 계셔야 될 도와주실 주님이 막상 우리한테 근접해서 우리 속까지 들어오니까 우린 그때부터 어떠한 전환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님의 혜택을 입는 쪽에서 주님이 당하는 수난과 함께 당해야 될 그래서 한 패밀리, 한 자족이 되고 같이 희생당해야 될 민족으로 주님의 일에 합류되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나는 놀고 희생은 주님만 하시면 고맙다 이야기해주겠습니다, 라는 그렇게 꼼수를 부리던 우리가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시44편17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주님 언약을 배반한 적이 없는데 왜 결과는 마치 주님을 배반한 것처럼 왜 이런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답변은 간단하지요. 네가 아니라 네 속에 들어온 주님이 언약을 위반한 자에 대한 지옥의 처벌을 받고 있다 이 말이죠.
신약에서는 그냥 불신자가 덮고 있다. 지옥 백성들이 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없어요. 없는 우리를 주께서 다시 이 땅에 구원시켜놓고, 아까 방향이 위에서 뚫고 올라가잖아요. 이건 내려가는 거예요. 내려가면서 어제도 다 이뤘고 오늘도 다 이뤘고, 내가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다 이뤘음을 확인 차에서 지옥 백성 뚫고 지나가면서 여기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불신자와 차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 아니요 주의 은혜입니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를 우리 육신의 미래로 만들어내요. 우리가 내년의 삶이 우리 육신이 지니고 있던 우리의 과거 삶이에요. 내가 살았다 치고 행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인생 98세까지 겪어보시렵니까? 98세까지, 너무 욕보여 미안합니다. 또 72세 하면 얼마 안 남았네, 해서 겁나고. 95세로 우리 정리합시다.
나의 과거를 내 선에서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기억이에요. 주께서는 거쳐 왔고 우리는 안 살았기 때문에 못 거친 것을 주님의 기억 안에 담긴 게 뭐냐를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해답은 끝났어요. 다 이루었다. 네가 무슨 욕을 먹고 뭘 당해도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어제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2절 본문에 보면 나와요. 네가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디모데후서 4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거쳤던 이 지옥세계에서 네가 어떠한 모욕과 수모를 감수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감수해야 돼요. 너 죽고 나 살자, 이래 나오지 마시고 하여튼 죽은 인간이 별짓을 다하고 있군,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고요.

타인을 죽은 자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가 타인에게 주눅들 일은 없습니다. “딩동, 계십니까? 가스검침 왔습니다.” 가스검침은 산 사람이 오지 말고 죽은 귀신이 가스검침 왔다고 보면 돼요. 죽은 자가 이 동네를 설치고, 죽은 자가 US오픈 마지막 라운드 치고, 모든 게 죽은 자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죽은 자들의 대통령하고 있고, 죽은 자들이 오염수 태평양에 방류하고 있고. 모든 것이 죽은 자들이 서울~양평 고속도로 취소시키고 있고요.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들의 게임 판에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걸 겪게 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얼마나 고생 더 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가를 보게 합니다. 아아, 참 주님께서 심각하게 고생하셨구나, 발견케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25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참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는 데요. 우리 자신을 이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다. 이게 바로 나에요. 나는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어요. 죄 값으로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다고요.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터무니없어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요. 자신의 말씀 성취를 다 드러내는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뭘 했고, 뭘 했고, 뭘 했고 이것을 온전히 공개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6장 39절, 40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궤휼을 아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고 어떤 성질이고 어떤 인간인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주께서 모르는 게 없기 때문에 나보고 기도하라 하신 거예요. 네 애로사항 다 겪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거는 모를 거야,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왜? 겪었으니까 바닥부터 했으니까. 사람의 종으로 시작해서 죽기까지 종으로 해서 나중에 만유의 주가 되셨잖아요.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의 언약이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까지 어떤 경로가 있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위한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그냥 채택한 거예요. 나무 둥치를 자르면 이게 있지요. 이걸 나이가 드는 테, 나이테가 있지요. 나이테 제일 바깥이 뭡니까? 이걸 표피라 해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이 나이테 특징이 나와 너와 이게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표피는 어떻게 됩니까? 표피는 외부로 자꾸 밀려나가죠. 나가 있고 네가 있는 게 아니고 같이 나와 너 구분이 안 되고 나라고 여긴 곳에 타자, 너라고 하는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나는 바깥에서 계속 밀리고 내 안에 부풀어져요. 처음에 할 때는 나, 너가 있어요.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은 나고 하나님은 너가 되셔서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오해였던 겁니다. 주의 이름이 바깥에서 도와준다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바깥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고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이 살아 있는 우리를 도와준 게 오른손의 능력이라 본 거죠.
그러나 주님이 되면 능력이 뭐냐 하면 마귀와 죽음과, 마귀나 사탄과 죄와 율법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능력이 주의 능력이에요. 이것은 나, 너를 붕괴시키는 능력이에요. 나, 너 따로 있다는 것에서부터 끄집어내주는 능력이 오른손의 능력이고 주의 능력입니다. 하나 됨을 너는 왜 자꾸 주님을 너와 나 둘로 나누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은 창세전부터 하나였는데 너는 왜 자꾸 주님이 날 도와준다고 나를 왜 자꾸 그걸 지키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하나인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버지와 나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들도 나와 하나가 된다. 아가서에 나오잖아요. 솔로몬의 아가서. 처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다가갈 때 술람미 여인이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너는 내 스타일 아니라고. 나 당신 안 좋아해. 왜 자꾸 오는 거야. 나, 흑인 여자야. 볼품없어. 오빠 농장에서 일했거든요. 오빠 농장에서 일해서 햇빛에 얼굴 시커매. 당신은 왕이잖아. 신분 차이가 나는데 너, 나 갖고 놀라고 했지? 당신과 나 어떤 사이인데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처음에는 술람미 여인이 기피했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내가 너한테 다가가고 싶어 다가가는 게 아니야. 네 속에 나 있다.” 네 속에 나 있다,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다, 정말. “네 속에 나 있다. 나는 나를 찾아가는 거야. 너 찾아가는 게 아니야. 너는 표피야.” 네 안에 들어온 나를 찾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뭘 이겼다? 아가서 8장에 죽음을 이긴 뭐다? 사랑. 사랑은 율법을 이겨요.
율법을 줌으로써 우리 형편이 네가 처한 형편이 율법에 갇혔다는 거예요. 죄에 갇혀있는 거예요. 저주에 갇혀있는 거예요. 율법 줘가면서 사랑이 율법보다 세다는 것을 계속해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그냥 찾아다니는 거예요. 놓치지 않아요. 세상에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는 없습니다. 집안에 옷 벗고 있는데 찾아가요. 그러니까 여자가 말하기를, 옷 벗었으니까 오지 말라 하는 기라.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게 네가 문을 못 열어준다면 이거나 먹어라 해서 몰약을 줘요. 사람이 아프고 늙어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예쁘다, 낫다 하지만 주님 십자가와 비교해보세요. 우린 십자가 생각 없습니다. 숯검정처럼 다 떼고 싶어요. 복음이고 십자가 복음 다 떼고 싶어요. 나는 나이고 싶어. 남한테 멀쩡한 내가 되고 싶어. 이거 병든 거예요. 병든 자에게 뭐가 필요하지요? 의사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의사가 갑질을 안 해. 전혀 우릴 고칠 그런 믿음이 안 가요. 그 정도로 우리는 독하게 선악체제에 갇혀있습니다. 마귀에 갇혀있어요. 그런데 주께서 찾아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러나 이제는’ 내게 문제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왜 주님께서 저를 떠나지 않는 겁니까? 십자가 다 이루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걸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이루고 싶은 것을 나를 재질로 사용해서 죄인으로 사용해서 주의 다 이루심이 얼마나 놀라운 작품이 되는가를 주께선 우리를 자기의 신부로 맞이해서 혼인잔치까지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시편 44편에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다음에 뭡니까? “우리를 구원하소서” 처음에는 주의 이름으로 하다가 마지막에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결국 제시될 건 뭐냐? 주님의 사랑, 끈질긴 사랑, 그 사랑이 아가서 8장의 말씀처럼 죽음보다 더 센 사랑, 더 이상 우리가 죽음에 기죽지 맙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과의 차이가 뭔지를 보이게 하옵소서. 우리가 보이는 게 아니고 우리 안의 주께서 늘 보여주면서 우리의 지나온 주님의 과거가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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