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집합의 요소가 뭐냐 하면 죄 된 몸을 갖고 왔어요. 그냥 몸이 아니고 죄 된 몸이에요. 육신의 연약한 몸이에요. 로마서 8장 3절에 있으니까 읽어드리겠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죄 있는 육신+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지위 또는 자리,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렇게 오신 거예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여기에 결합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뭘 보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약의 자리, 오른편에서 성령을 보냈죠.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 전에 계약한 게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드렸죠.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모든 걸 이루었다 하는 거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거예요. 하나님 자체적인 부정성.
예수님께 성령이 오셔서 성령은 추진을 시켜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다 죽기까지.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다 이룬 거예요. 완전히 이루었어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어요. 이루었기 때문에 성령이 왔던 그 주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면 죄 있는 자, 자신의 업무의 경로에 부분집합으로 참여된 그 자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는 권한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대목을 찾아보겠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이 혹시 있을까 싶어서 사도행전 2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주요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했어요. 부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가 설교하시는 대목, 2장 32-33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 받은 자가 어떤 자이어야 됩니까? 죄 있는 육신이죠. 그 죄 있는 육신이라는 입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차이가 없겠습니까? 차이가 없는 거예요.
이게 성신과 성령의 차이에요. 성신은 결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신은 구약, 옛날 언약에 해당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이 적용되고 이방인에게는 반대되게 절대로 언약이 가지 못하게 한 겁니다.
여호수아 11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호와께서 그들로 저주 받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은혜가 가지 않도록 하신 거예요. 이게 누구하고 붙어서 그런 겁니까? 그들이 그냥 그런 게 아니고 계기가 있어요.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마주쳐야 돼요. 그래야 아브라함의 언약,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방민족의 존재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제 이스라엘이 은혜 입지 못하고 진멸당하는, 그들로 하여금 강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상으로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모든 자가 죄 있는 육신이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느 인간치고 ‘구원해주세요. 은혜 주세요.’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이거에요. 그냥 내가 주는 대로 받아버려. 그 주시는 은혜 안에 내가 나에 대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나는 죄 된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는 거예요.
시편 51편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인간 죄의 작품인 것을, 내 모습을 최초로 발견한 순간이 바로 성령 받은 순간이에요. 내가 바로 주님을 핍박한 죄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저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우치게 하신 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선물 주셔서 이 세상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