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 것 없음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인간들 눈에는 일반 건물들처럼 어디까지나 인간 손으로 관리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객체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즉 건물이라는 인공물은 사람들 손으로 얼마든지 허물어질 수도 있고 세워질 수도 있는 대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인공물에서 굳이 만나주시는 취지에 대해서 인간들을 신약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성전을 초라하게 짓도록 조치하십니다. 이는 이 대자연의 무너짐과 성전의 무너짐이 관련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지게 만든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이고 우상을 섬겼는데 그들의 이런 자세는 달리 믿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대자연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범죄한 이후, 기본적으로 대자연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 대자연의 품 속에서 적응해왔습니다. 대자연의 안정된 질서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하에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를 만듭니다. 그 도시에서 자라나는 자기 자신의 가족과 자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살면서 만들어낸 각종 문화와 문명을 믿습니다.
즉 인간은 대자연의 보호하에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성과들을 믿습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세계란 인간이 다룰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성과들의 총합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도시 한가운데 광장을 만들고 거기서 여론을 모읍니다. 중세유럽같은 경우, 광장에는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대자연 속에서도 인간들은 초월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초월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입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도를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의 취지는 모르고서 나름대로 하늘을 향한 초월적 몸짓을 그들이 해댄겁니다. 끝과 끝이 중간에서 만나는 아이디어를 고안해낸 겁니다. 물론 이때 하늘과 땅은 그 어떤 충돌이나 갈등은 없이 사이좋게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장을 사람들은 신전으로 건립했던 겁니다. 인간들의 관심사는 부자와 행복하게 삶에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성전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몰랐던 바는, 성전이 없어지면 이 대자연도 같이 불타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든 인간들이 철석같이 믿는 이 대자연이 홀라당 불타 사라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보잘 것 없는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전에 거대하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왜 불타없어져야 했는지 그 이유를 되풀이해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신전과 다릅니다. 성전의 진정한 의미는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내부 원리가 알려졌습니다.
로마서 4:17에 보면, 아브라함의 존재 이유가 나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서 인간이 다룰 수 없고 관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사항이 나옵니다.the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things that are not as though they were.(NIV)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being that which does not exist.(NASB)
하나는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없음’입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 인간들은 손 못됩니다. 그냥 망자를 죽음의 세계로 넣어줄 뿐입니다. ‘없는 것’은 인간들이 다룰 대상 조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계열의 조상’으로 세워놓았습니다. 이것은 지상의 인간들이 구상한 초월과 전혀 다른 수직적 초월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전에 나름대로 자기 상속자라고 자부하고 이스마엘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삭이 등장하면 이 이스라엘은 없음으로 분류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옆 수풀에 하나님께서 수양을 미리 준비해두셨습니다. 그 수양이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손을 둔 아브라함은 ‘죽은 자’요 그리고 ‘없는 자’입니다.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살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곧 죽음의 권세가 발휘되는 것이 확산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등장시켜서 타인으로 하여금 ‘차라리 없거나 죽거나 하는 것보다 더 못한 존재’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출 22:24) 이는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슬그머니 나타나셔서 인간의 세계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계열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과연 인간들 가운데 ‘없음보다 못한 존재’로 자처할 자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7-28에 보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스스로 인간보다 못한 개로 취급달라고 요청하는 자가 바로 ‘보잘것 없는 성전’이 함유한 기능을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세계는 더는 태양빛이 필요없는 영광의 빛의 세계입니다.(계 22: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무너짐을 도리어 반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말씀은 학개 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칠월 곧 그 달 이십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아멘
■성전을 재건하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아야 된다는 소식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성전과 이 이스라엘의 운명과 관련지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화려한 것만 생각하고 성전 안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는 관심이 없었어요. 없고 성전이라는 건물 그런 건물이 있으면 그걸로 자신이 든든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상밖에 설마 하나님의 집인데 하나님께서 지켜 주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성전을 불타게 허락했어요. 이방민족이 와서 성전을 홀라당 다 태웠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에요. 그게 하나님이 자기집을 태운거에요. 불로서...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에요. 왜 하나님께서 성전을 불태우지? 자기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다 추방되어서 온 천지에 다 이방 민족 안으로 노예로 또는 이산가족이 되어서 다 흩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들은 그 당시에 몰랐습니다. 모르는데 나중에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알려줬습니다.
그 성전의 결과가 이런 겁니다. 요엘 2장 1절에 보면,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자 여호와의 날이 성전이 깨어지는 날로 보고요. 그때 2절에,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왜 성전이 없는데 어둡고 캄캄한 날이 되느냐. 요엘 2장 31절에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이렇게 되어있어요.
성전이 성전이라는 건물 하나 불태워졌을 뿐인데 해가 달이 핏빛같이 변하고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는 요한계시록에 별이 떨어지는, 그러한 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
실제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지진이 일어났으며 예수님 십자가 달릴 그 동안에 3시간 동안 하늘이 깜깜했어요. 해가 빛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게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성전과 자연과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또 선지자들도 이렇게 예언 했던 거예요. 근데 왜 성전이 무너지는데 대자연이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낼까? 그게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에 그 본래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 인간 본성상 사실은 다른 걸 믿었던 거예요. 인간이 성전을 지어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 예요.
하나님이 성전주신걸 감사하지만 그 성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를 인간은 모릅니다. 인간이 알게 된 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 오시고 나서 알지 구약 때는 성전 지어 놔도 성전에 포함 되어있는 뜻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선지자한테 이렇게 이야기해요. 니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성전이 파괴된다 이렇게 했어요. 우상을 섬긴다. 이 우상을 섬기는 것 하고 성전 파괴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게 요엘 선지자와 학개 선지자를 연결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믿기 전부터 인간이 벌써 믿음의 대상이 있었어요. 인간들이 믿고 있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연이었어요. 대자연이었습니다. 이게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 교회 안 나가. 교회 안 나가. 그러면 교회 안 나올 수가 있어요. 나는 하늘과 땅과 대자연을 난 인정하지 안 해. 뭐 이런 사람은 없어요.
교회는 안 나가도 교회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그거 그런 거 안 믿고 부처도 안 믿고 하나님도 안 믿지만, 안 믿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믿는 게 따로 있어. 뭐냐? 이 대자연 눈에 보이는 대자연을 나는 믿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믿음이 아주 돈독합니다. 대자연을 믿는 믿음. 대자연은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를 줄 뿐만 아니라 규칙적으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움직이니까 우리 마음속에 그 대자연을 믿는 사람들에게 안심 푹 놓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고 대자연이라는 그 담요를 덮고 살게 되면 굳이 하나님을 안 찾아도 되는 거예요. 굳이
‘나는 그 교회 나가서 주의 말씀을 듣는데. 아 지난번에 교회 못 나가서 주의 말씀 못 들으니까 나 미칠 것 같애.’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요. 거의 없어요. 교회 없어도 좋고 교회 하나님 없어도 좋은데 나는 이 포근한 대자연의 따뜻한 습도, 섭씨 16도와 기온은 16도씨 습도는 34퍼센트에서 52퍼센트 적당한 것. 이러면 컨디션 최곱니다. 콘디션 최고예요. 아주 상쾌해요. 상쾌해요.
근데 교회는 별로 상쾌하질 않아요. 막 잠이 오고. 하나님 안 믿어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이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대자연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창세기 4장에 보면 인류가 시작할 때 문명을 시작할 때 그 대자연 안에서 도시로부터 시작한 거 에요. 그럼 여기서 추가됩니다. 인간은 대자연의 질서 대자연을 든든하게 믿는다. 그 다음에 또 추가해서 인간은 믿는 구석이 있다. 뭐냐? 인간이 만든 도시를 믿습니다. 각자의 가정을 믿습니다. 근데 그 도시 한가운데 뭐가 있느냐? 아고라라는 광장이 있어요. 그걸 복합 환승 센터라고 얘기해요. 여러 가지 정보들이 다 모아지는 거예요. 그 모으는 그 성당에 꼭 있는 게 뭐냐? 대성당 그냥 성당이 아니고 대성당이 있어요. 모든 성당. 그러니까 인간은 대자연을 믿습니다. 인간은 도시를 믿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각각의 사람들의 지혜와 의견을 믿습니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하나님과 연결되고자 하는 그들이 만든 성전을 믿습니다. 성당을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그 성당. 성전이라는 것은 어디 아래에 있느냐 하면 대자연 안에 같이 놓여 있는 거에요. 대자연이라는 범위보다 작은 범위로 성전을 만든 겁니다. 이게 인간들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대자연 속에 적응되어서 살아가는 나에게 뭔가 대자연이 말썽을 일으키고 심술을 일으킨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찾는 거죠. 하나님 도와달라고. 그게 바로 진짜 이스라엘 성전을 하나님이 만든 취지하고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사고방식이에요. 하나님은 성전이 무너지면 대자연도 같이 다 붕괴하는 그러한 관련성을 가진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만든 거 에요. 근데 인간은 그렇지 않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성전을 만든 겁니다. 그 대성당을 만들고 성당에서 예배 드리고 미사 드리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자 하는 그러한 그게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성전이에요. 그러나 그게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 그것 때문에 너희들이 성전이 무너지면서 너희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대자연도 함께 성전 무너짐과 같이 동반해서 같이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성전 신전은 하나의 허브같은 겁니다. 허브라 하는 것은 수레에서 바퀴의 살들을 한데 취합하는데 허브라 하죠. 중심.
이러한 인간들의 본성을 이스라엘도 나중에 성전이 무너지고 난 뒤에 그걸 발견한 거에요.
부자가 되고 행복한 것.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던 거예요. 성전 그까지 것 불타면 어쩔 수 없지 뭐. 중요한 것은 우리 행복이 중요하지 성전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짐과 그걸 신호로 해서 온 대자연이 인간의 그토록 단단하고 영원 토록 갈 것이라고 여겼던 대자연이 함께 붕괴되어버립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준 성전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지면서 그 역할을 성전이 갖고 있는 역할을 이스라엘이 남은 백성의 그걸 충분하게 기능을 다 발휘해 줘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학개에 보면 보잘 것 없는 성전을 만들라고 한 겁니다. 성전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은 곧 인간들이 철석같이 믿는 이 대자연이 보잘것없이 성전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같이 무너질 날이 곧 들어 닥치는데 그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인공물로 다룰 수 있는 건축구조물 사람들의 노동의 성과물로 성전이라고 생각했던 성전이 자체적으로 성전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 인격체로 인물로 변해요 인물로 변하면서 이 대자연이 모조리 붕괴되고 붕괴 정도 가아니고 폭파되어버려요. 불로 타버려요 불위에서 이 모든 게 불에 타버리는 것은 건물이라고 여겼던 성전이 너희들 보기에 건물로 보이냐. 사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이름 장차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안에 계셨던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자기 장소로서 인간이 흔하게 보는 건축 구조물중의 일부로서 슬그머니 들어와버린 거예요.학개가 지은 이 성전. 그 보잘것없는 성전이 이 세상에 사람들이 믿고 있는 대자연이 와장창 다 보잘것없이 무너지는 운명이다. 그게 결말이 그렇다 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징조로 찾아온 건데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선지자의 계시를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 좀 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부자 되기를 왜 추구 하고 이 세상에서 이 땅에서 이 자연에 거기에 대해서 아무 거기에서 의심도 하지 않고 거기서 이게 사는 게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에요. 이 무엇이 문제가 된 건가?
인간들은 이 땅에 살면서 대자연의 운영하는 그 자연을 보면서 정녕 죽으리라 가 나보고 이야기한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녕 죽으리라가 무슨 취지로 한 것도 모르고 그냥 살기에 급급하고 그것도 행복하고 부자 되어서 사는데 이 대자연과 포근한 대자연 안에서 그걸로 자기 인생의 목표를 그런 식으로 정하고 살아간 거예요. 일상생활 자체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도 고집이 있어가지고 정녕 죽으리라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냥 밀어 붙여야죠. 인간들이 철딱서니 없어 그런소리하는걸 동조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까 제가 말한 인간들은 이 자연 속에서 뭐든지 다뤄요. 기계 만들고 악기 만들고 도시 만들고 목축하는 거, 다 목적이 뭡니까?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살려고 하는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특별히 집어넣은 의미가 뭐냐.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거. 핸들링 할 수 없는 것. 인간이 관리할 수 없는 것.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통해서 이 인간 세상에다가 이걸 유입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게 뭐냐. 딱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에 관한 것과 하나는 없음에 관한 것. 사람이 살다가 죽을 순 있어요. 그러나 그 죽음 자체를 인간은 다룰 수 없어요.
살아있는 사람의 가족이 죽었다. 할 수 없다. 죽음에 넘기자. 우리할 도리는 보람상조로 끝났다. 보내자. 보내고 그들은 사는 자기 사는 일상으로 돌아와요. 그러나 그들은 보내버린 그 죽음 자체를 그들이 다룰수가 없어요. 죽음 자체속에서 이 사람은 살리고 이 사람은 더죽이고 이게 없어요. 이 사람 지옥보내고 천국 보내고 이게 안돼요.
그리고 인간은 없는 것을 못 다뤄요. 뭐 있어야 다루죠. 없는데 없는데 뭘 다룹니까? 없는 것은 인간은 돌아섭니다. 인간은 블랙홀 앞에서 돌아서게 돼있어요. 이세상의 모든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 블랙홀이거든요. 붉은 구멍.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다가 성전을 통해서 뭐냐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것 죽음과 없음을 여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성전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이 그걸 가둔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스라엘 있으니까 우리 행복하게 해달라 이것만 생각한 거에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못 다루는 것을 죽음과 그리고 없음 왜 두 가지로 딱 지정해서 그건 인간이 못 다룬다고 왜 그렇게 딱 지목했는가. 그거는 로마서 4장 17절에 나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서 두 가지 나와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그럼 이게 아브라함인데요 이 아브라함을 로마서 4장에서는 뭐라 하냐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거 에요. 믿음의 조상. 자 믿음의 조상이 뭐냐 하면 계열 이 에요 계열. 믿음의 계열입니다.
인간들이 아이디어 속에도 하늘과 초월적인 게 있어요. 하늘과 땅이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중간 쯤에서. 끝과 끝이 ‘중간에서 만나자.’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 에요. 그거는 인간들이 만든 성전이에요 성전 개념이에요. 초월적인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와 원활하게 만나준다는 거 에요. 주님께서는 절대로 성전을 원활하게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보잘 것 없다는 말은 없음 보다 더 못한 처지를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다가 기능을 부여한 겁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좋을 뻔한 사람. 그걸 구약에 나옵니다. 그걸 구약을 보통 세 종류로 나눠서 이야기 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경우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넵니다. 세상 호강도 못해보고 아니 호강할 가능성이 전무한 고아와 과부와 토지가 없는 떠돌이 뜨내기 나그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을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너희들이 행복과 너희들이 이 자연 세계에 대한 돈독한 믿음 이 우상이죠. 대자연의 돈독한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든 성전의 취지가 모독을 받은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 되셔서 없음보다 더 못한 처지 다시 말해서 없으면 아예 없으면 될 탠데 ‘없다 잊어버리자’ 인데 잊어버리는 것은 소환하는 겁니다. ‘잊어버려? 안돼 누구 마음대로 잊어버려’ 소환해가지고 없음보다 더 못한 처지 보잘 것 없는 성전을 만들라고 했어요. 그 성전 나중에 다 깨집니다. 다 망가져버려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생각하면 쉬워요. 예수님 이렇게 살아 계실 때 그 똑똑한 지도자들이 ‘저 인간은 왜 사냐’ 이랬어요. 율법을 지킵니까? 이거 뭐 신사적이길 해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속에 없음이 있고 그리고 그 속에 예수님이 죽음 자체를 다룬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거 에요.
아브라함에 예수님이 아브라함 자손이거든요.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 봐야 되거든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니 자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어떤 식으로 실행했냐 하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그러면 이삭이 오기 전에 아브라함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있다가 된 거 에요. 나에게도 나의 상속자가 있다. 누구? 이스마엘 있다. 주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그 있음. 있는 아이를 제껴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은 없음을 다루는 분이기 때문에. 모든 있는 것을 없애 버리는 분이에요.
그래서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심정의 변화 같은 게 있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나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이렇게 돼요. ‘거봐 나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이렇게 돼요.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나 거봐 나 아무것도 없잖아. 내 안에 아무것도 없잖아.’ 여기서 멈추시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세요. 이삭은 이스마엘 오기 전에 오질 않습니다. 이스마엘. 있음이 있고 이삭 해서 제껴버리면 이스마엘 있음 없다. ‘없다’ 에요. 하나님께서 없음을 다루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죽음을 다루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22장에서 죽음을 다루시면서 아브라함을 죽음에다가 죽음의 기능을 하게 만들어버려요. “니 자식을 죽여라. 니 자식을 죽여라” 그래서 죽은 자가 누구냐?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삭을 잡을 때 옆에 수풀에 수양을 대신 잡게 했어요. 수양을 대신 잡게 했다는 말은 이삭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 삶의 세계에 속한 게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 속하며 이삭은 이스마엘처럼 있음의 세계에 속한 게 아니고 없음에 속한 세계에 속한 거예요. 이삭이... 그 이삭과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자손에 의해서 아버지 된 아버지도 없음의 세계에 들어갔고 이미 죽음의 세계에 합류가 되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를 로마서 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었던 일을 가지고 주께서는 로마서 4장 17절부터 25절까지 십자가에 담긴 내용을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이 대자연을 믿는 이 세계는 인간들은 한계가 뭐냐? ‘있다 있다 있다. 그럼 내가 있네. 나는 있음을 통해서 난 행복하면 된다.’ 이게 인간의 한계예요. 거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있음. 있는 하나님께 경배하기위해서 나름대로의 초월적인 신전과 성전과 교회를 짓고 있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내 있음이 계속 있기 위한 하나의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에요 이 교회라는 것도. 예배당도 천주교도. 인간이 다룰 수 있는거예요. 마치 내가 나를 다루듯이
근데 어느 인간이 자기를 다룰 수 없는 없음 보다 더 낮은 더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형편없는 지금보다 내보다 더 못한 것을 그쪽 방향으로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있겠어요? 누가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세상에요 인간보다 못한 주여 저를 제발 개로 취급해주시옵소서 주여.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상에 기도할 때 나를 제발 개로서 취급해주옵소서 주여 멍멍. 그 여자가 수로보니게 여인이에요. 이거는 도무지 인간으로는 상상도 못하죠. 그래서 주님께선 뭐라하느냐 세상에 이만한 믿음. 니 믿음이 크다 했어요. 주님 쪽에서 너를 볼 수 있는 안목을 믿음이라 하거든요. 주님 쪽이 무슨 쪽입니까? 없는 쪽이고 주님 쪽이 죽음의 쪽이에요.
정녕 죽으리라의 원리를 포기 못하는 쪽이에요. ‘니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정녕 죽으리라’를 하나님께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쪽을 충분히 납득하고 그걸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세계 그 세계에서 내가 존재했다면 개라도 좋습니다. 여기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거는 너무 과욕입니다. 인정하는 거예요. 생명은 어디 있느냐? 나 한테 있는 게 아니고 생명은 주인집 주인의 상에 생명이 굴러 떨어지죠.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는 거예요. 왜? 이쪽은 죽음이니까.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겠느냐? 그런 식으로 비아냥 거리 거든요. 한 명 죽여버려. 십자가에 처형해 죽여버려. 시답지 않아 별로 안중요해요.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행복이 중요하지요.
죽음과 그 생명을 쥐고 있는 것. 그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왜 성전 무너짐과 동시에 대자연이 무너져야 될 불타버려야 될 이유가 나옵니다. 22장 5절에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주님께서 다른 빛을 이미 준비해 두셨어요. 이 무너진 이 세상의 해와 달이 빛이 조명빨이 꺼지는 그 순간 우리는 천국에서 이 해와 달, 빛 말고 다른 빛으로 영원토록 함께사는 그 생명의 세계를 준비해 두시고 이 땅에 주님께서 있음보다 더 못한 존재로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초라하게 돌아가신 겁니다.
있음과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연장한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 받고 무시당하고 곡해 당해서 돌아가신 거 에요. 그래서 요엘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세상 무너진다. 하지만 요엘 보면 마지막때에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 성령이 임한다고 돼있어요.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우리 눈에 내대신 돌아가신 분을 발견하는 것. 수풀에 있던 어린양이 왜 어린양이 아브라함 계열에 있는 사람에게 왜 이스마엘 제끼고 이삭을 줬는지. 왜 그 이삭을 잡으라고 했는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러한 감추어진 진짜 생명. 그 생명이 바로 주께서 마련한 영원한 생명인 거예요. 그것이 바로 그 생명이 뜻이 취지가 들어있는 인격을 가지고 이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끝으로 말씀 드린 것은 여러분들 바닥에 기름 부으면 어떻게 처리하느냐. 흡착 포를 갖다 던지죠. 그 흡착 포가 떠 있는 기름을 머금고 감싸서 댕겨가잖아요. 주님께서 주님의 일하는 이 예 초라해 보이는 그분이 십자가 그 모습 언약이 흡착포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흡착 포가 우리 얼굴을 파악 덮어버려요. 우리를 덮어서 덮은 채로 우리를 시커먼 아무것도 모르는 기름 더러운 기름같은 우리를 흡착 포에 담아서 함께 대신 죽으시고 함께 데려가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백성으로 빛의 백성으로 만드신 겁니다.
바로 그 기능이 그 흡착포 기능이 바로 성전의 기능입니다. 그 기능은 사실은 이스라엘부터 했는데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마지막 때에 성령을 통해서 흡착포 기능을 우리를 덮어주게 되면 우리는 이삭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같은 그런 기능으로 지금도 우리는 남들에게 흡착포 하는 그 주의 예수님의 증인으로 기능을 우리가 하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한 말씀 말씀이 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 것을 저희들 고맙게 여기고 감사케 하 옵 소서 무슨 뜻인지를 몰랐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굳이 십자가 지시는 그 내력이 하나님의 성전의 완성과 관련돼 있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 이루는 것과 관련돼 있음을 이제는 기쁘게 감사히 고맙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 옵 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 옵 나이다 아멘.
'개념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 초과 (0) | 2023.06.17 |
---|---|
정답 (0) | 2023.06.14 |
감추인 진짜 생명=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0) | 2023.06.10 |
지옥으로 출근 (1) | 2023.06.09 |
피만 쳐다보고 사는 성도 (0) | 2023.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