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정리

정답

아빠와 함께 2023. 6. 14. 23:45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땅에 포로 잡혀갔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뭐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한 곳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한 곳이 성립될까? 마태복음에는 그렇게 되어있질 않아요. 마태복음 18장 20절에는 그렇게 되어있질 않아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나와 있거든요. 19절에도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건 인간들이 인식하고 있는 평면구조에서는 용납 안 됩니다. 용납될 수가 없죠.
그럼 이 말은 주께서 일하실 때 인간이 납득될 수 있는 구조에 주께서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걸 피해 가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은 자기 뜻을 펼쳐냈다는 그런 뜻이에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네가(너) 문제 있다는 겁니다.

구약을 지나고 신약을 오면서 하나님의 조치는 이겁니다. 치료. 너 병들었으니까 내가 낫게 해줘야 한다. 네가 나아야 비로소 이 하늘나라 계시가 네가 이해 간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느 인간 할 거 없이 모든 인간 이 상식적으로 편하게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 구조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한 제자의 입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21~22절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게 바로 네가 나음을 입어야 할 이유다”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는 상식은 평면적인데 주님께서는 중첩되어 계신단 말이죠. 다른 세계가 엎드러져 있어요. 포개져 있는 거죠.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도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 기도를 일체 듣지 않습니다. 참 감사하죠. 왜냐 하면 우리의 기도는 나의 노동이 그 안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안 받아요. 그러면 주기도문은 왜 하라고 하느냐. 주기도문은 제자들이나 우리들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기도문의 내용인 “하늘에 계시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부터 마지막까지는 예수님 자기의 노동이에요. 본인만이 해내시는 겁니다.

더 극단적으로 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나음을 입었다”라는 그 결과, 이 사람은 나음을 입을 대상인데 과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치료가 되었다는 그 이후의 상태가 어떤 상태이냐.  
치료란 예수님 빼놓고서는 가짜임을 일상 속에서 확인하는 삶을 두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꾸 유사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본인이 예수님을 따라잡고 흉내 낼 수 있다고 시도하는 이것이 병든 거예요. 치료대상이에요. 이건 그냥 미친 거죠. 될 수도 없는데 이건 그냥 미친 인간이에요.

평면적 구조는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먼저 분명히 느껴야 해요. 인간은 한 번도 자기를 본 적이 없어요. 왜냐 하면 거울을 보면 오른쪽 왼쪽 반대로 바뀌기 때문에 내 모습 아니에요. 거울 보면서 평생 속는 거예요. 그냥 유사성이죠. 그걸 거울 단계라고 합니다. 인간은 내 모습도 모르면서 유사성으로 그게 자아라고 굳히기 들어가는 거예요. 거울 단계를 상상계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꾸 자기에 대해서 다른 자기를 상상하는데 그 상상에 대해서 그다음부터는 수집에 들어가죠. 남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모으는데 그것도 온전치 않아요. 왜냐 하면 내 쪽에서 편집 들어갑니다. 바른 소리 해도 듣지 않아요. 나에게 기분 좋은 소리만 딱딱 들어서 그걸 나라고 우기는 겁니다.

치료방법은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치료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답을 내려요. 답을 내리면 사람들은 그걸 답이라고 좋다고 넙죽 받습니다. ‘하여튼, 성경 말씀은 너무너무 좋아. 내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이 있어’라고 그 답을 자기에게 해당한다고 손대면 주님께서 “그 손 떼라. 네가 그걸 답이라고 할 그런 입장이 안 돼. 너는 너 자신도 모르면서 무슨 그것을 답이라고 보느냐?”라고 하시죠.

주님께서 주신 정답은 그 출발점이 유일한 인간인 예수님부터 출발했던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맹세에, 자기 정답을, 자기가 회수하는 경로가 성경책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치료해줄게”라고 하시면 ‘나는 아픈 데가 없는데’라고 하면 “아니야, 무조건 치료해줄게”라고 하시죠.
에베소서 3장 18~19절에서 제가 미리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넓이, 길이, 높이, 깊이, 이 네 가지를 합쳐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입체적인 공간이 됩니다. 그 입체적인 공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요. 구약은 얕아도 너무 얕아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늘나라에 와서는 천국의 어린아이라도 세례요한보다 낫다고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수평에서 입체로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입체적으로 주님이 만든 공간 안에, 일종의 캡슐이죠, 거대한 돔인 캡슐 안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는 그 상태가 치료된 상태예요. 입체 안에서 치료된 상태예요.

그러면 이 수평에서 입체까지 어떤 경로가 주입되었기에 이것이 치료될 수 있는가. 인간들은 그걸 요청한 적이 없죠.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무슨 치료가 되겠습니까. 알 수 없죠. 그 경로가 어떤 경로로 실시되는지, 그 경로에 대해서 말라기에 나오는데 그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공지능으로 발달한 의학 기구로 일어난 치료는 치료가 아닙니다. 입체적인 치료가 아니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공간 자체가,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치료인데 이건 자기가 불편하다가 자신이 건강하게 된 것이 치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편 94편 11~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징벌대상이 되고 망하는 대상으로 이것을 잡았을 때, 너희들은 이미 복 받은 줄 알라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네가 허무하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너는 새로운 입체적 공간에 들어갈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말라기 4장 2~3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악한 인간들을 징벌할 거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도 악하고, 세상 나라도 악하고, 모조리 다 악하니까 주께서 모조리 다 짓밟아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치료 과정 속에 들어갑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의사가 직접 환자가 되어서 뛰어들게 되어있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정작 나음을 입었다는 어떤 변화가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주님 쪽에서 소식이 오기를 네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고 나는 나음이 뭔지를 모르고 있고 이건 통신이 두절 되었거나 뭔가 잘못되었잖아요.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고린도전서 7장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이게 성도라는 자에게 주어지는 충격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그것도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옵니까? “네가 수평적인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 없이, 마음 놓고 너의 사는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다”라는 이것이 치료입니다.
그러면 치료된 모습의 전형적인 모델이 뭐냐. 바로 예수님이 곧 자유자 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인 입체적 공간 속에 계셨습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산출되고 생산된 답 자체로, 주님의 답변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던진 질문을 주님이 만든 그 답이 ‘바로 여기 있네’라는 그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해요. 너는 주님께서 생산한 하나의 정답으로 이 땅에 남겨두신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만든 그 충만한 속에서, 주님의 그 충만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구애받지 않고 그 충만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총체적으로 속아가는 거예요. 총체적으로 속아요. 정답을 모르는 인간들이 벌이고 있고 나불대고 있는 사기입니다. 그게 속이는 거예요.
정답은 입체적이에요. 치료된 성도라는 ’답‘ 주님의 치료성이 담겨 있는 존재   예수님처럼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거. 이게 정답입니다. 이미 치료가 된 상태예요. 

이 치료는 우리가 지금 설교하고 듣고 있을 때는 기분 좋아하지만, 다시 집에 돌아가면 또 마찬가지고 제발 누가 좀 속여달라고 환장한 자가 우리들이거든요. 나 좀 기쁘게 해달라고. 우리나라 4강 올라가야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그 속임수가 있어 줘야 우리는 징벌을 받고, 왜 주님께서는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그 채찍이 왜 중요한지를 앞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 가운데서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반복적으로 기뻐하시고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이 아닌 세상일이 없고, 세상 자체가 정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행복해지려고, 기뻐 보려고 노력하는 그 세계 속에서 십자가를 알아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십자가 속에서, 다 이루심이 뭔가를 아는 상태에서 주님의 주신 은혜를 만끽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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