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9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4

갈라디아서 제 9강 (이근호목사, 2006년 11월 11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3장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고, 율법이라는 말이 나오고, 약속이라는 말이 연달아 나옵니다.  
세 가지가 다 다른데 어떻게 다른가? 제일 먼저 언약을 먼저 주시고(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그 언약입니다), 이것이 1번, 그 다음에 율법을 주시고, 이것이 2번, 그 다음에 이것을 주었더니만 거기서 약속이 톡 튀어 나오더라는 것이 3번. 언약과 율법이 만나지 아니하면 약속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 셈이에요.  

이 순서대로 언약 주고, 율법 주는 식으로 해야 비로소 약속이 나온다는 겁니다. 언약과 율법과 약속, 이 세 가지의 특징은 세 가지 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준비하시고 쏘세요’ 하는 식으로, 언약도, 율법도, 약속도 쏘아 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언약도 쏘시고, 율법도 쏘시고, 약속도 쏘아서 주시는 것이라면 사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사람이 있고, 율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있고,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 없고, 율법 없고, 약속 없으면 사람 없는 겁니까? 없는 겁니다. 지금 여기 분명히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있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보다 먼저 언약이 있고, 율법이 있고, 약속이 있어서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냥 달랑 사람만 있으라고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도 없고, 율법도 없고, 약속도 없고, 이런 것이 없다면 사람은 없는 겁니다.

언약과 율법과 약속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태어날 필요도 없고 창조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사람만 있어요. 죄짓고 난 인간의 눈에는 자기만 보여요. 오늘 오후에 안산에서 강의를 했는데 요한복음 21장을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툭툭 털어 버리면 역시 남는 것은 나만 남아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나만 달랑 남아요. ‘참, 의존교회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 공부할 때, 그때가 좋았지. 다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나만 달랑 남았구나.’ 아무리 성경지식을 큰 그릇으로 퍼다 부어줘도 항상 툭툭 털어 버리면 나만 남는 겁니다. ‘그때 의존교회에서 신앙생활 한 20년 했는데 목사님 이민 가버리고. 이민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해라. 결국은 나만 남는 것인데. 나만 남으면 되었지, 뭐.’ 나만 달랑 남아요.

뭔가가 아무리 덮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개한테 물을 뿌리면 가만히 있던가요, 털어 버립니까? 개만 그런 게 아니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개하고 비슷해서 예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싫을 때는 마구 몸을 흔들어 버리면, 아비도 어미도 없고 그저 자기밖에 없는 거죠. 평소에 아무리 엄마 아빠가 잘해줘도 화가 날 때는 몸을 막 털어 버리죠. ‘나만 최고다’ 이말 이거든요. 어른이 되어도 자기가 최고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오래 해도 개의 몸에 붙어 있는 물처럼 튕겨 버리면 다 튕겨 나가 버린다는 거죠. ‘그때 11월 초에 의존교회에서 언약을 배우고, 율법을 배우고, 약속을 배웠는데 에라! 털어 버리자’ 하고 털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만 남습니까? 나만 남지요. ‘ 음부터 나는 나밖에 없었고, 영원토록 나는 나밖에 없다.’

그런데 저는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없어요. 우리는 언약과 율법과 약속 때문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단독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제가 면회가 하루에 한번만 허용되는 병원의 중환자실에 다녀왔습니다. 황달에 걸려서 기계만 빼면 돌아가시는 혼수상태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 전에 제가 그분의 누렇게 뜬 몸을 만지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저씨! 이 몸이 어디서 왔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교회에 간적은 있지만 교회라는 것에 별 관심도 없고,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80되고 90될 때까지 살려고 했던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제가 물었어요. “이 몸이 어디서 왔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지금 이 몸 주인이 몸을 회수하려고 합니다. ‘나’가 최고라고 여겼지요? 진짜 선생님이 최고라면 이 병든 몸 한번 붙들어 보시지요. 계속 붙들 수 있는가?”

결국 그 몸은 죽으면 화장터에 가서 태워져서 한줌 흙으로, 재로 변합니다. 내가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완전히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몸이 내 것이 아닙니다. 누구 것입니까? 언약을 주신 분의 것이고, 율법을 주신 분의 것이고, 약속을 보여줄 몸입니다. 언약에도 몸이 필요하고, 율법에도 몸이 필요하고, 약속에도 몸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사용하는 언약, 율법, 약속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신 그분의 연세가 올해 42세입니다. 한창 잘나갈 시절 아닙니까? 42살 먹고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42살에 돌아가야 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이 아니고 언약의 뜻이고 율법의 뜻이고 약속의 뜻입니다. 아무리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우겨도 거기에 대해서 신경도 안 쓰고, 그것보다 더 큰 뜻이 내 뜻을 꺽어 버리고, 그 뜻이 우리 속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침투해 들어오면 내가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 되고, 내가 태어나고 싶지 않더라도 이 땅에 태어나야 합니다. 어떤 어린이는 하는 말이 “엄마! 나는 왜 내 동생이 없는 거야?”라고 이렇게 욕심을 부립니다. 만약에 동생을 낳아 보세요. 그러면 그 동생이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엄마! 왜 내 동생은 없는데?” 그래서 또 하나 낳아 줘 봐야 소용이 없어요. 막내가 또 묻습니다.

“엄마! 내 동생은 왜 없는데?”
“네가 동생이 없는 이유는 제일 막내 동생이니까 그 밑에 동생이 없는 거야.”
“내가 왜 마지막인데?”
“그것은 네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너를 막내로 결정한 다른 어르신네, 윗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왜 나는 남자가 아니냐?”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남자는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날 수 없는가?” 이렇게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것은 다 언약과 율법과 약속 때문에 거기에 딱딱 맞추기 위해서 거기에 해당되라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이 시간에 강의를 할 텐데, 우선 제일 쉽다고 여기는 율법부터 해 봅시다.

율법이라는 것은 제일 쉬운 것이 십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것이 제 1 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것이 제 2 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이 제 3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것이 제 4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제 5 계명.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제 6계명. “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제 7계명. “도적질을 하지 말라.” 이것은 제 8계명. “거짓증거하지 말라.” 제 9 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제 10계명까지 이렇게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죠. 아무리 십계명을 들여다봐도, 율법을 주면서 “네가 이 십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줬다”는 말이 없어요. 십계명을 백번 천 번 읽어 봐도, “내가 이 십계명을 준다만 너는 못 지킬 걸?” 이라는 이런 느낌조차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갑니다. “만약에 십계명을 안 지키다가는 너는 저주 받는다.” 오히려 그쪽입니다.

율법이란 “내가 이것을 줘 봐야 네가 못 지키지만 걱정하지 마라. 나중에 오실 예수님이 계시잖아. 못 지켜도 걱정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의 뜻이 이런 거구나’ 하는 이정도만 생각해라.” 이런 느낌을 가지도록 십계명을 준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받는 당사자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걸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고, 이걸 지켜야 복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정성을 다해서 지키면 지킬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준 것이지 ‘아예 못 지킨다고 여기고 준 것은 아닐 거야’라고 여기면서 주셨다고 생각한 겁니다.

십계명을 받을 때 사람들은 자신만만해 하는 겁니다. 어린이들에게 선생님이 숙제를 내줄 때 “여러분은 25쪽에 있는 문제 두 개를 푸세요”라는 말을 하면서 “여러분은 아마 못 풀거예요. 못 풀어도 내가 나무라지 않을 거니까 못 풀면 못 푼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이런 식으로 숙제를 내면 어느 학생인들 제대로 숙제를 하겠습니까? “숙제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저, 못 풀어요. 저 잘했지요? 못 푼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잖아요.” 다들 그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아! 착하구나. 자기가 숙제를 못한다고 정직하게 이야기를 하는구나. 정직한 어린이니까 이 금도끼 은도끼 다 가져가세요” 라고 아마 이야기를 할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숙제를 해라. 숙제를 했는지 조사하겠다.” 조사를 해보고는 “못했구나. 약속대로 지옥에 가야지.” 이렇게 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 율법을 지키라는 숙제를 받은 사람은 모두 뭘 받아야만 되느냐 하면, 다 저주를 받아야 됩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되니까 당연히 저주 받아야 되겠지요.

처음부터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왜 있습니까? 언약과 율법과 약속 때문에 사람이 있다고 했지요? 언약, 약속은 일단 빼놓고 이야기 해 보면, 사람은 왜 있습니까? 율법 때문에 있지요. 그런데 율법 때문에 사람이 저주를 받지요. 그러면 사람은 왜 있습니까? 사람은 저주받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은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구원받으면 안돼요. 왜? 저주 받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저주의 길로 가면 주님께서 흐뭇해하시는 겁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만일에 율법을 없앤다면 사람도 없는 겁니다. 율법이 없는 이상은 저주 받을 사람이 없지요. 저주 받을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예 만들지를 않겠지요. 저주를 보여줄 피조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을 만들겠습니까?

저도 어릴 때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린이인데 어린이로 태어나지 말고 어른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요. 혹시 여러분도 그런 생각 해 본적 있습니까? ‘어른이 되는 이 귀찮은 과정을 다 생략하고 곧 바로 어른이 되어서 어른과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저주 받아야 됩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떤 분은 ‘사람을 저주 받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저주 안 받는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나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상상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목사님! 저주 받는 사람 말고요. 처음부터 축복받는 사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은 ‘일단 이 세상에 사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런 것도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은혜고 율법이고 약속이고 뭐건 간에, 개가 몸에 묻는 물을 털어 버리듯이 털어 버리면 뭐만 남는다고요? ‘나’만 남잖아요. 한 때 배웠고 들었던 ‘율법? 약속? 언약? 에라 모르겠다. 다 털어 버려라.’ 훌훌 털면 달랑 나만 남잖아요. 나만 남는 입장에서 ‘내가 왜 저주받아야 해?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이시니 저주 없지요? 그렇죠? 어쨌든 나를 건져 주시려고 애를 쓰시죠?’ 라고 자기가 율법 없이, 율법을 털어 버리고 율법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준다는 약속을 바라 볼 때 이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것은 옳지 않아요. 반칙입니다. 자기 생각입니다. 저주 받는 인간이 있어줘야 예수님만이 참 아들이라는 것이 빛이 나요. 참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분명히 율법을 통해서 알고 있어야 ‘정말 예수님만이 참 아들이구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구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에게서 직접 칭찬 받은 분은 예수님만 될 때 예수님이 빛이 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까?” “빙고! 딩동댕! 맞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을 생각하기를 세계 4대성인중의 한분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면 온 세상이 다 예수님 위주로 돌아갑니까?”
“빙고! 맞습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입니다. 보시죠.”  
“안 봅니다.”

왜 안보냐 하면 기분 나빠서 안 보는 겁니다. 왜 훌륭하고 존경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만 하고, 날 보여주는 사람은 허락이 안 되는가? 그 이유는 ‘율법에 따라서 저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어디서 까불거리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것이다. 이제 예수 안에서 산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자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한다”(고후 5:14)

여기서 한 대목을 적어 보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이 대목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진짜 사도 맞습니까, 틀립니까?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악마도 인정해주는 사도입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어디서 나를 신앙인이라고 속이려고 하느냐?”(행 19:15) 하고 악마가 혼을 냅니다. 그 악마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무덤가에 미친 사람이 나옵니다. 미친 사람 본인의 힘이 아니고 본인 안에 있는 엄청난 다른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서 힘이 세진 거예요. 마귀한테 사로잡혀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까 그렇게 힘이 세요. 헐크 연상하면 쉬울 겁니다. 런닝 셔츠도 다 찢어지고.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이 오시니까 “예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벌써 오시면 안 되지요. 지금 때도 안 되었는데 벌써 오셔서 우리를 멸망하려고 하십니까?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 알아 봐도 악마는 누구를 알아봅니까? 예수님을 알아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보는 그 악마가 사도바울이 진짜 사도라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진짜 사도인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모든 인간은 죽었고, 그때부터 죽은 인간가운데서 산자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고후 5:15)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난 사람은 공통점이 뭐냐?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특징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기적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이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서 살까? 국가를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살까?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지금 여기 계신다는 말입니까, 안 계신다는 말입니까? 계신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사흘전에 죽었던 분이 여기 앉아 계신다면 “아저씨! 반갑습니다. 아저씨는 사흘 전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 아저씨가 하는 말이 “예! 사흘전에 죽었는데 사흘만에 살아 났습니다.” “반갑습니다. 잘 앉아 계시고 강의 잘 들어 주세요”라고 할 것이 아니냐 말이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 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이니까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면,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걱정한다는 것이 수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무지 수상한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데 왜 우리가 세상 일로 인하여 염려 하느냐 이말 입니다. ‘예수님이 안계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내 힘으로 버텨야 되겠다’는 것은 이해는 가는데, 지금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 나신분이 계시다면 지금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재미있고 즐겁지 왜 우리가 쓸데없이 염려하고 끙끙 앓습니까?

그 말씀을 하면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합니다. 사랑이 뭐냐? 어린이들도 사랑에 대해서는 알 것인데, ‘사랑은 보고 싶습니다’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놓고 안보고 싶으면 거짓말 하는 겁니다. 어른들 보면 그런 사람들이 흔히 있어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각방 쓰는 경우. 안보고 싶은 모양이죠. 안보고 싶은데 미안스러워서 거짓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거죠.

사랑하면 보고 싶어야 합니다. 보고 싶어 미쳐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랑에 미쳤다고 합니다. 보고 싶어 미쳐야 되고, 만나고 싶어서 미쳐야 됩니다. 얼마나 보고 싶은지, 자기 바로 앞에 있는 문제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자기한테 돌이 날아오는 것도 개의치 않았어요. “주여! 주님을 만나는데 저 돌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들은 지금 하는 일이 뭔지 모르니까 주여 용서해 주세요. 이 철없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살아 있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랑이라는 것이 오게 되면 보고 싶다고 한 겁니다. 보고 싶다는 말은, 같은 말로 그립다는 말입니다.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마주 볼 것이다.”(고전 13:12) 지금부터 그리워하는 거죠. 믿음 소망 사랑 그 셋 중에 제일은 그리워하는 겁니다. 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악마도 인정하는 사도바울이 빨리 죽고 싶은 겁니다. 예를 들면 다락에 맛있는 게 있는데 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게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그래서 키가 안자라서 팔짝 팔짝 뛰는 겁니다.

조금만 더 팔짝 팔짝 뛰어서 그 다락에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듯이, 사도바울은 이땅을 떠나고 싶어요. 두 발을 땅에서 떼어버리고. 어서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어 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 사랑은 사도바울에게는 해당되지만 우리에게도 해당 되겠습니까?”라고 하는데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든지 주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찌어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든지 주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찌어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든지 아비나 어미나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마 10:37) 왜 처나 자식보다 예수님을 더 그리워해야 합니까? 언약, 율법, 약속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해당되기 때문입니까? 약속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 때문에 내가 성령을 받아야만 되는 겁니다. 약속이 보고 싶고 약속이 그리워지고 약속과 만나는 그것이 축복인 것을 이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그 약속 안에 있는 사랑이 특별히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겁니다. 이런 주님에 대한 그리움, 그 보고 싶음의 내용은 찬송가가 아닌 대중가요의 가사에 아주 깊게 깊게 잘 나와 있어요. 대중가요의 뜻이 주님과 관련이 없으니까 그런 노래를 부를 필요는 없지만.

가사내용을 주님을 향하여 썼다고 가정해서 보면, 내용이 너무 좋아요. 특히 ‘화장을 고치며’ 그 노래.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데 나같은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그 가사를 볼때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하는 로마서 4장을 보는 기분입니다. “일하지 않을찌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심의 복”이 얼마나 놀라운가! 신앙이라는 것이 뭡니까? ‘아무것도 안했는데 구원시켜주더라.’ 이게 신앙입니다.

약속이 그러하다고, 약속이 그만큼 좋다고 남에게 알려 주라고, 특별히 약속이 나한테 임한 겁니다. 약속이 뭐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천국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일한 것이 없이 은혜를 주셔서 구원시켜 주더라.” 제가 이것이 복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속으로 근심이 되어서 ‘혹시 교인들이 그 이야기를 곧이듣고 진짜로 교회에서 헌금도 안내고 아무것도 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되기는요? 교회가 남지요.”
“아니, 목사님! 교회가 안 되잖아요. 아무도 헌금 안하고, 청소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하면 교회가 안 되잖아요.”  
“어허이, 답답네. 그게 바로 교회잖아요. 교회!”

여기 교회가 있잖아요. 있는 교회를 안 믿고 새로 교회를 만들려고 하니까 인간들이 만든 교회가 있는 교회를 핍박하죠. 이런 소리를 하니까 목사님들이 기분이 나빠서 하는 말이 “그러면 지금 있는 교회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목사님! 무엇을 그리워하십니까? 교회 하나 붙잡고 평생토록 생계비 뽑아내는 그런 계획 세웠습니까? 무슨 교회를 생각하십니까? 지금 정신이 어디가 있습니까?”

이상해요. 사도바울이 그리워하는 것은 주님인데, 목사들이 엉뚱한 것(소유지요. 소요)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니까, 마귀가 봤으면 대번에 가짜라고 들통을 낼 것을. 마귀들은 지금도 다 알고 있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무엇이 두려우냐? 사랑 안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다.”(요일 4:19) 만일 여러분이 좋아하는 여자나 남자를 만났다고 칩시다. 사랑하는 여자나 남자를 만날 때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벌벌 떱니까?

“이리와.”
“무서워.”
“오라니까”
“무섭다니까! 저리가! 무서워.”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제 아내의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나는 내 남편이 너무나 무서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제 아내가, “뭐가 무서운데?” 무섭다는 것은 여전히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무서운 거예요. 사랑이 없는 상태인데 억지로 뭔가 사랑 비슷한 흉내를 내려고 하니까 그것이 들통 날 까봐서 무서운 거예요.

제가 지난 토요일에 주례를 했습니다. 안 믿는 가족이 와서 “제발 하나님 이야기 마시고, 예수님 이야기도 마시”라는 조건을 다 걸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하객들로 있을때 참 주례하기 힘들어요. 대부분 듣는 일에 관심 없고 밥 먹으로 가는데 신경을 쓰고 있거든요. 빨리 끝내라는 요구의 분위기가 가득 차 있죠. 남녀 간의 일반적인 사랑이라도 사랑하는 순간은 ‘내가 어떠냐’ 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당신을 인하여 내가 어떤 어려움이 오고 어떤 욕을 얻어먹는다 할지라도 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 전혀 생각 안 나고, 그저 상대방이 좋다면 ‘내가 어떻게 되어도 나는 상관없어. 당신만 행복하다면 그것이 나의 행복이야’라고 진짜 사랑은 자기 자아를 잃어버립니다.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엄마가 애기를 안을 때, 할머니가 애기를 안을 때, 애기가 너무 사랑스러울 때는 애기가 자기 옷에 오줌을 싸도 개의치 않습니다. 미운 사람이 자기 옷에 오줌튀기면 경찰에 신고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한 6개월 갑니까? 사랑이 없어질 때 현상이 뭐냐? 자아가 등장합니다. ‘내가 저 사람 만나서 이익 봤을까, 손해 봤을까?’ ‘나’라는 것이 의식이 되면서 그때부터 사랑은 날아가 버립니다. 사랑은 없어요. 모기약 뿌린 것 날아가듯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 다음부터 계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대부분 다 손해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익 봤다는 사람 거의 없어요. 다 손해 본 겁니다. 손해 봤다고 여길 때 그 다음에는 보상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상대방에게 과도하게 나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보상이 안 되잖아요. 보상이 안 되니까 사랑이 결국 미움으로 찢어지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첫사랑을 잊지 말라”(계 2:4)고 합니다.

약속은 사랑입니다. 약속이 사랑이 되려면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저주 받아야 된다’는 것이 있어야 돼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 세 가지 용어가 나옵니다. 언약이 나오고, 율법이 나오고, 약속이 나오지요? 이 세 가지가 같다면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구분하잖아요. 어떻게 다른지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약이 있고, 율법이 있고 그래야 약속이 나와요. 그런데 율법을 빼버리면 약속은 사기가 되어 버립니다.

그냥 언약만 줘버리면,
“아브라함의 복을 너희에게 준단다.”
“야, 신난다. 복이다.”
“복이 뭔데요?”
“예수 그리스도란다.”
“야! 신난다. 영생 얻었구나.”

중간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율법이 빠졌어요. 그러니까 그 예수는 누구를 위한 예수입니까? 나를 위한 예수입니다. 나를 없애는 예수가 아니라, 지금보다 나를 더욱더 살리고 더욱더 나를 뚜렷하게 건져내는 ‘나’입니다. 나를 포기 못하게 만드는 나. 내가 건재하면 상대방이 남편이 되었든, 아내가 되었든, 예수님이 되었든 다 뭐가 됩니까? 나의 소유, 나를 위해서 개처럼 부려 먹을 수 있는 나의 소유가 되지요.

그런데 진짜 사랑 안에서는 뭐가 없어진다고 했습니까? ‘나’가 있기는 있는데 생각이 안나지요. 그런데 성경은 율법을 줌으로써 생각 안 나는 정도가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했는지,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했는지’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왁스’가 불렀던 그 노래(‘화장을 지우며’)하고 정 반대되는 노래 가사가 김광석이라는 사람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삼십즈음에”라는 노래입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서른 살 때에 꽃이 피었는데 꽃이 점점 지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풀이 꽃을 피울 때가 진짜 풀다운 것인가요, 꽃이 져야 풀다운 겁니까? 꽃이 져야 됩니다. 꽃이 져야 그 때 비로소 ‘아하! 나는 쇠해야 되는 풀이구나’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사야 4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무엇은 영원하리라? 무엇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6,7)

우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과 약속은 영원하리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언약과 율법과 약속을 위해서 있는 것이 인간이지, 나를 위하여 언약과 율법과 약속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사고방식이 낳은 되도 않는 엉터리입니다. 사랑이 없이 ‘나’만 있으면, 예수도 가짜 예수요, 천국도 가짜 천국이요, 성령도 가짜 성령이요, 교회도 가짜 교회요, 성부도 가짜 성부입니다.

율법으로 나를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살려주는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들이 죄짓고 난 뒤에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아까 중환자실에 있다는 그 환자가 지금 돌아가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도하는 중에(제가 잘 안 우는데) 제가 눈물을 찔끔 흘렸습니다. 왜 울었느냐 하면, 그 42세의 환자를 살려내고자 하는 것은 저를 포함한 그 가족 모두의 희망사항이지만 그 희망사항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꺽을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지금 열심히 일한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감격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세상일이 되어 간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내 뜻을 죽죽 꺽어 버린다는 것이 너무 신나고 고맙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까본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보면 풀에 꽃이 피었지만, 꽃이 짐으로 말미암아 “너희들도 이 꽃처럼 져야만 한다는 것이 너희의 운명이다. 하지만 너희를 지도록 한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영원히 지지 않는 말씀의 힘에 의해서 너희들은 해체되어야 하고, 무너져야 하고 부서져야만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만큼 말씀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너희들에게 기쁨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너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죽고 말씀이 산다는 것이 기쁨이 된다’는 것이 보통 사랑이 아니잖아요. 보통 보고 싶은 게 아닙니다. 처음 신혼 때는 결혼하고 나서 서로 좋아서 난리지요. “자기만 잘된다면 나는 어떤 고생을 해도 좋고 내가 당신을 위해서 살거야. 당신이 직장에서 수모를 당한다 해도, 행여 직장에서 쫒겨 난다고 해도 내가 어떤 고생을 하든지 당신 뒷바라지 다 하고 당신이 못한 공부 다 하도록 해줄게. 걱정하지 마. 시부모님도 내가 다 모실게.”

그런 생각을 착각이었지만 한 번쯤은 할 수도 있거든요. 할 수도 있지만 본인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에 조건이 붙는다는 것을. 남편이 나를 사랑해 준다는 조건 하에 남편을 그렇게 사랑한다는 조건이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지. 일종의 거래고 흥정이 아니겠어?” 본인은 그냥 순수한 사랑만 보여주면, 남자 쪽도 순수한 사랑으로 나올줄 알았지요.

이 이야기는 남자만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다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착각속에 있었던 거죠. 저의 결혼 주례 마지막 대목은 이것이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착각하는 두 남녀가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내면서 ‘둘 다 못난 인간끼리 헤딩하라고 만났구나’ 하고 서로 헤딩하면서 둘 다 못났기에 서로 “당신은 나에게 과분한 여(남)자다”라는 순수한 고백을 하라고 결혼하게 한 겁니다.

이미 결혼하신 여러분! 고민 되지요? 그런 고백 안 나오면 어떻게 할까요? 사랑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의 이득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너무 보고 싶고 너무 그리웠기에.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쳤는지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은 ‘네 안에 나 있고 내 안에 너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보고싶은지 !!! 실례가 되지만 좀 질문해 볼까요? 여러분! 보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아무 생각이 없다고요?

약속이 사랑으로만 관계하기에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 자기 과실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를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한다는 것은 “나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입니다. “이만큼 충성되게 했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이만큼 했는데 왜 복을 안주십니까?”

이것은 “너, 지금 나, 사랑 안하지? 너, 지금 나, 보고 싶다고 말 못하지? 이 세상 떠나서 날 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펄쩍 펄쩍 뛴다는 소리 못하니까 대신 그런 이야기로 때우려고 하는 거지? 왜 사랑한다고 말을 못해. 이분은 나의 애인이다. 이분은 나의 남(여)자다. 왜 말을 못해!!!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의 대사)---”(*여기서 약 1분정도 남겨놓고 녹음이 끊어짐)

왜 자신감 있게 이는 내 사랑하는 남(여)자다.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해 !!!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안 계시는 줄 알고 있어요.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안 보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면 우리도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의 구세주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것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이 사랑보다 더 큰 은사 없습니다. 병고침 은사 가르치는 은사 등등 무슨 소리를 해도

보고 싶어요 주님 - 이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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