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이 되신 진리
2023년 4월 30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2:14-15
개역한글
(2: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개역개정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표준새번역
14. ○신도들에게 이것을 일깨우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엄숙히 명하여,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고, 듣는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우리말성경
14. 그대는 그들에게 이것을 기억하게 하고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령하여라.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고 오히려 듣는 사람들을 해칠 뿐이다.
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라.
공동번역
14. 다음과 같은 것을 신도들에게 깨우쳐주시오. 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명령하시오. 그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서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NIV
14. Keep reminding them of these things. Warn them before God against quarreling about words; it is of no value, and only ruins those who listen.
15. Do your best to present yourself to God as one approved, a workman who does not need to be ashamed and who correctly handles the word of truth.
KJV
14. Of these things put them in remembrance, charging them before the Lord that they strive not about words to no profit, but to the subverting of the hearers.
15. Study to shew thyself approved unto God, a workman that needeth not to be ashamed,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
NASB
14. Remind [them] of these things, and solemnly charge [them] in the presence of God not to wrangle about words, which is useless, [and leads] to the ruin of the hearers.
15. Be diligent to present yourself approved to God as a workman who does not need to be ashamed, handling accurately the word of truth.
16. But avoid worldly [and] empty chatter, for it will lead to further ungodliness,
‘하나님앞에 자신을 드리라’는 말과 ‘진리’ 같은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경우에만 타당하고 진리라는 것도 확실하게 구축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탐구해도 하나님은 없고 ‘진리’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란 그냥 사는 대로 살 뿐입니다. 누구에게 자신을 드리고 싶지도 않고 진리라는 것을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삽니다.
남들이 평범하게 사는 식으로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꼭 미어캣을 닮았습니다. 미어캣 가족이 모두 한곳으로만 방향 틀어 주시하듯이 모든 인간들은 힘이 나온다는 그곳을 쳐다보면서 살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간들이 하나 둘씩 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왜 인간은 사라질까요?
그 근거는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로서 오셔서 잠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보이셨다가 사라졌습니다.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자신이 왜 사라지는 것을 모르면 왜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주변을 탐색하고 연구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내린 결론은 늘 한결같습니다. 즉 “세상은 줄곧 그대로이다. 예전부터 바뀌는 것은 없다”입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진리의 전부라는 겁니다.
벌써 진리 안에 놓여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가면 그만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럭저럭 사는 방식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4장에도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 4:11-13)
이 여인은 정기적으로 야곱의 우물에 물 길으러 오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야곱이라는 조상님의 덕을 보는 것도 평소에 감사하는 것으로 거룩한 분에 대한 기본적 예의는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정상적인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이 정기적으로 목마른 ’결핍을 갖고 있는 자‘가 비정상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상태‘와 마주했을 때나 발견되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연속적으로 어느 한 곳을 욕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 힘 추구가 진리를 가로 막는다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자는 힘을 바닥까지 빠져서 더는 신을 호출할 염치조차 없는 자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죄인들, 병든자들 이런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자입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경우 같은 겁니다. 그는 문둥병들고 난 뒤에, 엘리사에게 가면 나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고 엄청난 예물을 준비하고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그럴 만나 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하라는 지시만 내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상을 고려하지 않는 엘리사의 조치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순순히 요단강 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고 난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마음을 내어놓습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왕하 5:18)
나아만 장군 그는, 그동안 림몬이라는 신 아래서 자신이 정상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병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낫게 후에는, 림몬의 세계에서 자신이 저주받은 자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치료는 자신이 바뀌어져야 비로소 진리가 보인다는 점을 알려준 겁니다. 요단강 물이 나아만 장군의 몸을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 물은, 평소 나아만 장군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다음의 뜻으로 말합니다. “비록 내가 림몬당이 지배하는 세계를 살더라도 저는 여호와께서 지켜보시는 세계 안에서 마땅히 문둥병자가 되어야 함을 품고 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의 욕구만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욕구 결핍은 짐승들도 보여주는 사항입니다. 인간들은 특정 정신구조에 매인 삶을 삽니다. 그것은 육신의 욕구와 상관없습니다. 선악지식에 준해서 자신을 의로운 자로 간주하며 사는 성향으로 산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며는, 비록 내 육신이 비록 죽더라도 살았을 때 나의 의로움이 죽고 난 뒤에 영원히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이점이 바로 악마가 인간들은 악마가 갖고 노는 바비 인형으로 간주하는 증거입니다. 즉 인간은 육신의 욕구를 능가하는 다른 힘에 종속되어서 살아가는 구조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육신으로 오신 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요 1:14) 이스라엘에서의 율법 진리의 적용은 그동안 인간들이 악마에게 매혹당한 그 힘의 논리를 끊어버리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다. (마 19:13-15) 문둥병자를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낫게하시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마 8:4) ‘모세의 명한 예물’은 레위기 14: 4-7에 나옵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민의 육신을 희생제물의 육신으로 대역하시려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몸으로 오신 겁니다. 힘있는 악마를 신봉해서 신을 호출하려는 인간들의 구조를 차용하시되 완전히 내용을 뒤엎습니다. 차라리 그 육신을 먹고 마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 생명이요 진리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발견되게 하십니다. 이로서 성도는 예수님의 대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안에 내가 살지 않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디모데후서 2장 14-15절(육신이 된 진리)2304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4-15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14-15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여기 15절에 보면 ‘진리’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없다면 우린 드릴 것도 없겠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금 전제로 하는 것이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심 앞에서 어떻게 들릴 수 있냐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진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사도바울이 하는 이 편지의 내용은, 모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라 하는 것은 옳다, 진실되다, 그런 뜻인데 진리를 알려면 진리가 있는지를 파악을 해야 되거든요. 제가 아침에 교회 오는데 산들바람이 사악 불었어요. 산들바람이 부는 순간 60년 전에 국민학교 소풍 갈 때 산 옆을 지나가는데 거기 소나무 사이에서 산들바람이 불었어요. 그 산들바람이나 지금 내가 봤던 산들바람이나 똑같아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진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는. 왜냐면 바뀐 게 없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고, 이것은 진리 아니고’ 가 아니라 세상은 옛날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대로 되어가는 세상 속에 우리가 그대로 놓여있기 때문에 굳이 ‘진리라는 것이 그게 필요할까? 진리가 없는 게 맞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인간들은 하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방금 제가 언급한 것이 나와요. 조상들이 잔 후로, 조상이 죽을 때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까지 그냥 있다. ‘그냥 있다.’ “옛날부터 이 세상은 달라질 게 없었어. 뭐가 달라져? 달라질 게 없는데.” 이 말은, 진리는 없다는 뜻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고요, 그다음에 진리가 있다는 것도 이제 말이 되지 않죠. 그러니까 이렇게 볼 때 사도바울의 말 자체, 성경 자체가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밀어내죠.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옛날에 인간은 그렇게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사는데 그렇게 사는 대로 그렇게 살면 되죠. 굳이 진리를 찾아야 돼요? 굳이 하나님 앞에 내보일, 하나님앞에 드릴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됩니까? 우리가 평소 살아가는 것에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를 않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님 들이밀고, 진리 들이미니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 편지를 들이밀지 말고, 밀치는 것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 성경을 대하면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믿어보련다, 바르게 살아보련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성경이 어떤 내용이냐면, 거짓말 같아요. 안 믿어도, 이거 신경 안 써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1970년대에, 이미 죽었습니다만, 여자 가수 이수미가 불렀던 가사가 문득 생각이 나요. 이게 어떤 가사냐면, “거짓말 같아서, 거짓말 같아서……” 가사에 보면, “믿을 수 없어서……” 이게 제목이 뭐냐? 마지막 편지라는 노래에요.
성경 전체가 믿을 수 없고 거짓말 같아요. 사도바울은 바로 진리를 언급할 때 그렇게 세상을 보면서 진리를 언급한 거예요. 뭐라고 하냐면, 사도바울의 편지내용을 함축해서 보면, 진리는 한때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인데요.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분이 이 땅에 잠시 왔지요. 그런데 그분이 도로 자기나라 가버렸어요. 진리가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진 겁니다. 한때 있었지만 없어진 거예요.
이건 무엇을 뜻하냐면, 현재 모든 인간이 한때 이 땅에 있어요. 태어나서 삽니다. 하지만 한때 있지만, 언젠가는 없어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한 것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인간 나름대로 어떤 정신적인 구조와 삶의 패턴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을 그대로 차용해서, 그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주께서 쑥 들어왔다가 쓱 하고 빠져나와버린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진리가 없다. 왜? 내가 진리니까. 내가 왔을 때 너희는 포착하지 못했다.” 나는 왔다가 빠져나옴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진리가 한때 있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한 그 사실로 인하여 이 세상은 진리가 아니고 불의가 되고 말았던 겁니다. 비(非)진리가 되고 말았던 겁니다.
이게 로마서 1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죽이면서 내가 경고했지?’ 이런 뜻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진리에 대해서 관심 있는가, 내 아들 보내 봤는데 역시 너희들은 진리에 대해서 관심 없었어. 이제 그다음에 내가 가만둘 줄 알아?’ 그 다음 부터는 하나님의 진노가 와서 이 지구를 폭파시켜 버리다는 겁니다.
지구를 전부 다 박살 내버린다는 겁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후딱 왔다 후딱 간 진리를 왜 포착 못 해?’ 이거였습니다. 후딱 왔다 후딱 가버린 거예요.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특출한 것을 발견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까 베드로후서 3장 4절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특출한 것은 없어요.
제가 젊었을 때 우리나라 역사극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제가 20년 전에 깜짝 놀란 것이 있어요. 역사에 나오는 그 개 모습이나 오늘날 2023년도 4월에 있는 개 모습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그걸 보고 왜 제가 놀랐냐면, 사람은 뭐 유행 따라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달라졌다, 아무리 그렇게 우겨도 개를 보세요. 개는 한결같아요. 인간이 자기를 꾸미고 위장하고 변장을, 온 술수를 다 품어도 개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한결같아요.
이 말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거고, 새삼스럽게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거고, 그냥 흘러가는 거고, 따라서 그냥 살면 되지, 굳이 진리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뭐 특별한 진리가 있는 양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그게 공통적인 생각인데, 따라서 굳이 어떤 특화된 진리에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게 되면, “난 그런 거 안 믿으니까, 그런 거 거짓말 같아. 믿을 수 없어.” 내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진리 언급을 하고 그다음에 하나님께 너 자신을 바쳐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없어지는 것에 주목합니다. 있음을 보되 그 있음이 없어진다는 연결성을 가지고 보는 겁니다. ‘진리는 없어, 세상은 바뀐 게 없어, 없어, 없어. 바뀐 것이 없어. 진리는 없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거야.’ 그 ‘있다.’ 있다는 것이 결국은 없어지는 것들에 일시적인 현상이더라 이 말이죠.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남 보기에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어디 갔는지를 몰라요. 사라져버렸어요. 사라져버린 것처럼 우리 인간도 바로 예수님 오실 때 인간들의 그 미래상, 인간들의 마지막 모습을 예수님께서 미리 이 땅에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 거예요. ‘이게 진리다. 있어서 너를 판단하고 있어서 너희 세상에 대해 분석해? 이 분석하는 네가 없어질 거야. 분석하지 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분석을 하고 연구를 하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없어질 건데. 시편 37장 19절에 보면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모든 것은 다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생각해야 돼요. 왜? 왜 잘난 내가 없어지는가? 왜 없어지는가? 없어지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없어지는 게 이유를 알아야 있는 이유도 알게 되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있는 이유 모르면서 ‘있으니까 그냥 계속 있자.’ 하는 식으로 어거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거지로 살아가면, 어거지로 살아가고 잘 살면 되는데 인간들이 뭘 느끼느냐? 계속해서 자기 내부의 어떤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모자람을 느끼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여인이 우물가에서 물을 반복적으로 길러오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인데 주님 보시기는 그걸 정상으로 보지 않아요. ‘네가 맛이 갔구나.’ 이렇게 봐요.
“왜 우물에 계속 물을 길으러 오는 거야?” 아마 여인은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목마르니까 물 기르죠.”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왜 목말라? 왜 목마른데?”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왜 목마른데? 왜 밥 먹고 네 시간 지나면 배고픈데? 왜 햄버거에다가 감자튀김, 왜 그걸 먹어야 되는데? 한 번도 그걸 생각 못 한 거죠.
‘우리가 없어질 요량이구나. 없어질 팔자구나, 운명이구나.’ 없어질 게 뻔한데, 뻔하다는 말은 진리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것이 뻔한데 우리는 계속해서 살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전세 사기당했다는 거예요. 돈 다 날렸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뭐를 진리라고 하냐면, 없는 사람 도와주고 사기당한 사람 사기 안 당하게 하는 게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하냐면, 약자 코스프레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땅에 피해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네가 사기를 안 당해야 할 이유를 내봐라.’ 내가 사기를 안 당해야, 좀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살아서 뭐하는데? 그래도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것이 결핍이라는 거예요.
결핍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이 문제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에요, 결핍이라는 것. 결핍은 종속입니다. 노예에요. 결핍은 어느 누구한테 노예 된 상태, 묶인 상태에요. 결핍됐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에요. 사로잡힌 상태에요. 결핍이 되니까, 결핍을 메꿀 수 있는 것을, 사람 쪽으로 사람들은 전부 다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어캣, 이게 고양이인데 온 식구가, 패밀리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 인간은 한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특히 작은 물리학을 연구하는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렇게 봐요, 파동과 입자를 나누어서 보거든요. 파동은 연속성이에요, 파도니까. 파가 있어 연속적이지만 입자는 불연속적이에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 여기서는 너, 알갱이가, 입자가 딱딱 끊어지는 불연속적이에요.
모든 인간은 놀랍게도 입자라고 우기면서, 알갱이라고 우기면서, 나는 내 개체라고 우기면서 사는 모든 성향들은, 분위기들은 뭐냐? 파동이에요. 연속적이에요. 전부 다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한 방향이 뭐냐? 내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에요. 힘, 힘이 있는 쪽으로 미어캣처럼 전부 바라보고 있어요. 전부 다 줄 서 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사기당해서 정부보고 물어내라고 하는 그 인간들은 결핍 폭이 늘어난 거예요. 사기당하기 전부터, 전세 사기당하기 전부터 이미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 너도 나도 다 똑같이, 사람은 힘이 있어야 산다는 그 방향.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입자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아닌 것이 돼요. 본인이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창세기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악마가 인간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해서 인간의 조상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 흙이 되고 육이 됐는데, 이 육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육체의 욕망이 결핍을 느끼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의 욕망이니까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잠자고 싶을 때 잠자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어떤 경우가 생겼냐면,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은 포기 못 해.’라는 기이한 현상이 인간 개체 하나마다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게 뭐냐면 선악 지식입니다. ‘나는 비록 죽어도 나의 의는 살아있을 거야.’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 둘 사이의 연결점을 밝혀낸 바가 없습니다. 동물 같으면, 개나 짐승 같으면 먹을 거 그냥 주면 돼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존감, 자존심, 나 의로움, 나 착함, 나 희생, 이런 것이 있다고요. 그것은 육체의 결핍과는 무관한 거예요.
그냥 사료 주듯이 주는, 엄마가 자식 키울 때 사료 주듯이 먹을 것을 주게 되면 걔가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인사치레하면서 먹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면서 그 아이 자라나고 커보세요. 뭐가 커지느냐? 자기의 자존감이 점점 커져요. 그다음에는 먹을 것을 그냥 먹여주면 ‘엄마 내가 개인 줄 알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엄마 나도 자존감이 있어. 나도 나 잘난 맛에 살아간다고. 엄마는 그걸 건드렸어.’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나의 육체의 욕구와 나의 의가 어디서 연결되는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도대체 왜 나는 동물이 되지 못하고 너는 왜 자꾸 나의 의를 포기 못 하는, 사람도 아닌 게 사람 행세하려고 이렇게 나설 수밖에 없는가? 어디에서 그렇게 되는가? 그 빈자리가 뭐냐?’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에요. 파동이고 우리를 지배하는 입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우리의 입자가 되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힘을 주고 있었던 거예요. ‘나처럼 되면 돼.’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진 나처럼 되면 된다고 이렇게 계속 끌고 온 거예요. ‘결핍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고 어려운 것이 있거든 나를 불러. 나를 호출해. 나한테 기도하면 돼.’ 계속 이끄는 게 있어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의 육체의 고통이나 또는 자기의 선악 체계, 선악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이 좀 부족하다고 하고 뭐 반성하고 회개한다 하면 거기에 상대가 되는 어떤 대상자, 지금 내가 모자란, 결핍은 모자람이죠, 내가 모자란 게 있는데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뭔가 모델이 있고 그 모델을 향하여 호출하고 기도하고 빌고 하는 그 대상자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대상자가 악마예요. 마귀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는 마귀라 부르지 않아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죠. 그 하나님이 뭐냐? 진리의 대체물이에요, 진리의 대체물.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시리아의 군대 장관, 당시에는 아람이죠,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는데 그 사람이 문둥병 되어서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포로 잡혀온 이스라엘 소녀가 팁 주겠다고, 좋은 아이디어 주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뭐냐면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데 만나보시면 죽을병도 낫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반갑다고 선물을 가득 안고 엘리사 만나러 왔어요. 왔는데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만나주지도 않고 “당신 도착한 곳이 요단강인데 거기서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오시면 됩니다. 라고 했어요.” 처음에 나아만 장군이 자존심이 있어요. 방금 이야기 한 겁니다. 육체의 피부병 있어서 자기 피부가 정상이 아닌 데서 오는 결핍이 있어요.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를, 나아만 장군이 동물, 짐승 같으면 “예” 하고 들어갔을 건데 인간에게는 그 욕구 말고 달리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다른 입자 같은 존재가 있어가지고 화를 내는 거예요.
“이 요단강, 이 더러운 물, 우리 시리아 강이 더 깨끗하겠다. 가자.” 하니까 종들이 부탁해서 “그러지 말고 이왕 왔는데 한 번 들어가 보세요.”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니까 깨끗해졌어요. 그때 18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 18절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이제 돌아가는 길이에요. 기쁘게 돌아가면서, 고맙다고 여기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있는 이 아랍 나라에 림몬이라는 하나님 신이 있는데, 하나님이 있는데 내가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에서 내가 문둥병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부터는 내가 문둥병자가 잠시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나는 림몬이라는 삶의 환경 속에서 육체적으로 문둥병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아만 장군보고 엘리사 선지자가 요단강에 가라고 하는 것은 지금 치료를 할 목적이 아니에요. 치료하라고 물에 들어가라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치료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사라져야 되기 때문에. 엘리사가 원하는 것은, 인간은 사라지는 게 목적이에요. 사라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여호와가 하신 일만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엘리사 선지자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을 누가 알게 되었는가? 이 나아만 장군이 알게 되었어요. 나아만 장군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다시 본국에 돌아가면 림몬이라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안에서 살 건데, 살더라도 우리 엘리사께서는 내가 림몬당이라는 삶의 환경 속에 남들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더라도 나는 여호와 안에 사는 걸로 쳐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치료입니다. 그게 치료에요. 이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사라져야 될 존재인 것을 아는 동시에 진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한 진실은 나에게 오질 않아요. 내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냐면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파동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악마의 파동으로만 존재해요.
그러니까 결핍을 느끼고 단 한 곳, 모든 인간이 한곳을 향하여 “힘을 주세요. 오 신이시여.” 신이라고 하지만 우리 같으면 뭡니까, “오 예수님이여, 하나님이여, 성령님이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저희에게 힘을 주세요.” 왜? “살 수 있도록,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길러 오면서도, 이게 정상인 줄 알아요. 이게 환자인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목마르다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래 그 창조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지요. 옛날부터 그렇게 살아왔어요. 옛날부터 그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고 살아왔어요.
옛날에 부는 산들바람이나 지금 산들바람 똑같아요. 옛날에 보던 산이나 지금 산이나 똑같아요. 달라질 게 없습니다. 팔공산 국립공원 되나 안 되나 내가 어렸을 때 알던 팔공산 똑같아요. 마치 내가 변하지 않고 똑같은 것처럼. 다만 결핍을 느낄 뿐이죠, 매일같이 아쉬운 결핍을.
같은 예가 룻기에도 나옵니다. 거기 룻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모압 여인이죠, 남편하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졸지에 죽고 말았어요. 그리고 시아버지도 죽고 말았습니다. 룻이 나중에 알아봤어요. ‘멀쩡한 내 남편 왜 죽고, 우리 시아버지 왜 죽는가?’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죽였어요. 자기 본토 약속의 땅을 버리고 가뭄 땅에서 모압 땅으로 갔다는 이유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죽였어요.
룻은 그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던 겁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진정 살아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그 살아있는 하나님을 포기할까요? 그걸 버릴 수가 있습니까? 이미 귀에 들려왔는데요. 자기 백성이 약속의 땅을, 계약을 위반했다고, 언약 위반한다고 하나님께서 대번에 치시는, 그 치시는 하나님을 어찌 놓칠 수가 있습니까?
‘사람 살다 보면 가뭄들 수 있고, 이사할 수도 있는 문제지. 힘들면 딴 데 가고 또 여유 있으면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잖아.’ 이게 모압 여인, 모압 시절 때 알던 여인의 모든 것이었어요.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남들처럼 비슷하게 살면 되잖아?’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었지요. 하나님의 율법 어겼다고 때려죽여 버리는 그 하나님, 얼마나 간만에 알게 된 반가운 소식입니까? ‘아, 죽이시는구나.’ 죽인다, 가 아니라 아예 죽여 버렸어요. 자기 남편 죽이고, 시아버지 죽여 버리고 자기 시동생도 죽였어요.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 룻 보고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야야, 우리 팔자가 왜 이러나? 이제 그만 인연 끊자. 인연 끊고 우리 시가집 팔자 알지? 괜히 엮여서 네가 이익 볼 거 하나 없다. 아직 젊으니까 팔자 고치고 새 시집가서 좋은 남편 만나 살아라.” 룻이 1장 16절에서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 했죠. “내가 이름은 나오미, 기쁨이라 하지만 사실을 이름 바꿔야 해. 나 슬픈 여인이야. 나에게 슬픈 일만 생길 거야.” 이렇게 하니까 룻이 하는 말이 “바로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만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곧 ‘엄마는 나오미에서 마라 됐지만 내가 그 기쁨을 갖겠습니다. 제가 그 기쁨이에요.’ 율법대로 살면 주께서 지켜주신다는 거, 이 찬스를 내가 놓칠 수가 없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찬스. 이처럼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힘을 쏙 빼놓는 하나님이에요. 왜냐면 힘을 끊어놔야 악마로부터 끊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힘을 빼놓는데 주께서는 그 힘을 빼는 것에 대해서 그 힘 빼지 말라고 말리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열두 제자들입니다.
열두 제자가 소위 하나님 보디가드로 자청하면서 주변에 그 귀신들린 여인 오는 거라든지, 혈우병 걸린 여인이라든지, 또는 어린아이 안고 오는 아줌마들 전부 다 오지 말라고 말린 대목이 나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꾸짖었어요. 마태복음 19장 13절에 ‘꾸짖거늘’ “애들 데리고 여기 오는 게 아닙니다!” 꾸짖었어요.
마태복음 15장에도 어떤 가난한 이방 여인이 와서 내 딸이 귀신들렸다 하니, 제자들이 “예수님 빨리 보내야겠지요? 그렇죠?” 하고 막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 하냐면, 자기의 모자란 결핍된 힘을 마저 채워줄 수 있는 우리가 원했던 신으로 인정했어요. 왜냐하면, 본인들은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 마태복음 19장에서 하는 말이,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피터 팬은 절대로 어른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피터 팬이라고 있는데 늘 어린아이에요. 주께서는 힘을 쑥 빼버린 사람들을 원합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죄인들, 이 사람들은 힘이 다 빠진 사람들이라서 더는 자기와 자기 육체의 욕구와 자기의 의로움 사이에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에요. “나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주여, 그냥 버려도 괜찮아요.” 하는 사람들, 이제 나의 의, 자존감, 자존심, 그것과의 관계가 끊어졌어요. 선악 지식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사태가 이런 사태가 됐는데 그딴 거, 내가 남한테 참으로 사람 좋네, 착하네, 훌륭하네, 거룩하네, 의롭네, 경건하네, 그따위 이야기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 되는 사람, 충분히 망가져 버린 사람들, 그것을 구약에서는 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방인.
그중에 한 사람 예를 들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산상설교하고 마지막 다 끝나고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문둥병자를 만났어요. 문둥병자가 이렇게 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봐 달라, 할 때 내가 너의 병을 고치되 반드시 고치고 난 뒤에는, 이게 중요해요, ‘고치고 난 뒤’입니다. “고치고 난 뒤에는 너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서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마태복음 8장 4절에.
그럼 모세가 명한 예물을 봐야겠지요. 레위기 14장에 나옵니다. 레위기 14장에 문둥병에 관한 율법이 나옵니다. 그 율법은 뭐냐면, 14장 2절에서 치료가 된 후에, 진찰을 하고 난 뒤에 그 환처가 나았으면 낫고 난 뒤 그다음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 덕분에 나았습니다.’라는 뜻으로 드리는 제물이 뭐냐?
14장 4-7절까지 보면 “산 새 두 마리” 죽으면 안 돼요, 살아있는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지고 제사장들이 그걸 하나는 흐르는 물 위에 잡고 또 하나는 산 채로 취하여 백향목과 하되, 그 물 위에 잡은 새의 피를, 살아 공중에 날려 보내는, 그 새의 날갯 죽지에 해서 날려 보내라, 이 말이거든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찌며”
문둥병은 저주받은 거예요. 그런데 저주가 풀리고 저주에서 긍휼 입어서 저주가 사라지고 난 뒤의 제물입니다. 그럼 뭐냐? 문둥병자가 중첩되어 있어요. 육은 악마한테 매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벗을 수가 없어요.
자기 의라고 하는 것,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내 안에 나의 의도 함께 살아 있고,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착하게 살았다는 나의 의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영혼이 불멸의 상태로 살아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이게 바로 마귀가 인간에게 ‘선악 지식은 영원하리라.’ 선악 지식으로 인간을 옭아맨 거예요, 이게!
‘내가 죽더라도 5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하는 이 자체가 뭐냐면, 바로 악마의 생각이에요. 내가 죽더라도 교회 열심히 충성한 그 성과 같은 것에 영원히, 영구히 계속 갈 것이라는 기대, 나는 죽어도 나의 의는 죽지 않는다는 그 옹고집.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해결하는가?
중첩이니까, 순간적으로 성령을 받게 되면 순간적으로 몸이 붕 뜨는 상태가 돼요. 붕 떠서 다른 몸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이 내 몸을 보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나는 죽은 자로 발견되거든요. 죽어버린 내가 아직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식이라 이 말이죠. 이게 성령 받으면 그렇게 돼요.
요한 1서 5장 7절에 보면, ‘성령은 진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진리에요. 진리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지시가 진리에요. 아버지가 아들 예수에게 준 지시, 그게 인간한테는 깜깜하거든요. 바깥에 있으니까. 그래서 이 문둥병에게 어떻게 하냐 하면, 제물을 보이라는 거예요.
그 제물은 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이스라엘 모든 육신을 희생 제물로 대신해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육신 전체를 희생 제물의 육신이 대체해버리는 거예요. 깔끔하게 대체해버리는 겁니다. 단체로 바꿔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희생 제물, ‘나도 그 희생 제물에 참여하고 싶어요. 나도 들어가고 싶어요.’ 그런 마음 생기죠. 주께서 마태복음 8장에서 하신 말씀은 “그러려면, 네가 문둥병자 되면 되잖아?” 문둥병자는 저주로 옴팍 뒤집어 쓰여서 그 문둥병자는 치료가 없어요.
‘나는 문둥병자’가 아닙니다. ‘문둥병자가 나’가 되는 거예요. 저주가 나를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마귀가 받은 저주가 나를 뒤집어씌우니까 나는 마귀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게 문둥병자로 만드는 징후, 증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 땅에. 세리와 강도와 창기로 나타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거예요. 인간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거예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표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만든 인간세계 삶의 방식이고 그것을 주님께서는 그대로 차용하는 거예요. 빌려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를 누가 대신해?” 정말, 진짜 그 사람들은……. 누가 나를 대신하기는? 국회의원이 대신하죠. 그게 민주주의 제도 아닙니까? 의회제도.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No, 아니죠. 권력은 국회의원들한테 있어요. 일 년에 2억 처먹는 그들이 우리의 대표자예요. 대통령 욕하면서도 대통령 찾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세계에서는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대역 자를 모집하는 겁니다. 대역 자를 찾아요.
‘나 대신 누가 일해주고 내 아쉬운 것을 채워주는 관계로서 난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우리 부장님, 능력 많으신 부장님, 과장님, 열심히 아이디어, 창의성 발휘해가지고 우리 회사 발전해서 월급 올라가서, 그 월급과 더불어 신입, 그 신입인 내가 잔업 없이 좀 놀면서도 친구들한테 칭찬할 만한 막대한 연봉 챙길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우리 과장님, 부장님 되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대역을 찾고 있는 거예요.
대번에 잘라버려요. 대번 잘라버립니다. 어디서 놀고먹으려고? 그런데 놀고먹는 게 우리 심보인데 어떡합니까? 그게 우리 심보인데요.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 야곱은 하나님의 복 받는 사람이니 내가 그 우물의 덕을 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살면서 야곱의 덕을 좀 보자’ 이런 식이에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덕을 봐야 해요?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힘을 안 뺀 거예요. 못 뺀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의 아쉬운 걸 대역하기를, 신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대신 십자가 진 걸 그렇게 좋아해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의 대역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대역인 게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의 대역이에요. 왜냐면 예수님은 죄인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역의 대역이에요. 어디서 마귀를 찾으면서, 마귀한테 기도하면서 예수를 찾았다고 우기고 있어요? 그거는, 그거는 정말 사기입니다. 전세 사기부터 해서, 주식 사기부터 해서, 이 모든 사기는 왜 사기를 당한 줄 알아요? 바보 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바보 되기 싫어서.
왜 교회 나옵니까? ‘남들 다 천국 가는데 너 뭐 하고 있느냐? 너 천국 못가고 지옥 가면 쪼다 되잖아.’ 그런 주장 자체가 사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육신을 주께서는 따로 만들어 놨어요. 그리고 우리 육신과 대비시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의 고통 받는 유대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대신 갚아주기 위해서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하나님 믿습니다. 약속대로 믿습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우상 바알을 섬겨 망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제는 후회합니다. 우리는 역사 가운데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그들은 과거의 조상들이 한 죄에 대해 회개하면서 ‘우리는 이제는 말씀으로,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이 그들 보기에 스스로 참 대견해 보였지요. 그들은 아직도 결핍을 느끼고 있어요. 모자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저 채워줄 것을 원했어요.
왜 인간은 진리를 모르는가? 진리를 모르는 것은 세상만 바라면서 바뀐 게 없다, 그 산들바람이 지금과 똑같아, 바뀐 게 없다 하지만 정작 진리는 뭐냐?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진리는 무리입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5절까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영생이 없다. 육신, 육신을 먹는 것, 그 제물화된 육신을 먹는 거예요.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대역에 너도 참여를 해줘야 비로소 너희들이 이 죽은 예수님의 대역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구조가 마치 전에 네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진리가 오기 전에 너도 모르게 악마의 대역인 것과 똑같은 그런 구조, 그 구조를 주님께서 차용하신 거예요. 빌려오신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매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죠. 자, 이 진리가 기존의 육신에 의해서 얼마나 가로막혀 있는지를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셔 가지고 주님의 육신, 진리체로서의 육신이 기존의 진리를 찾고 있는 인간들의 진리한테 얼마나 핍박을 받는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 앞에서도 오해를 당했으니 뭐 다른 사람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요한복음 3장에서 그 진리에 대해서 예수님의 육신이 이미 독점을 했어요. 독점을 하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 학교 어디까지 나왔어?” 이렇게 물어요. 학교.
자, 학교라 하는 것은 사회의 싹입니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 살기 위한 체험의 장이 학교에요. 학교를 안 다니면 사회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 가서 왕따 안 당하면요, 사회에서 버텨낼 수가 없어요. 학교에서 학폭을 당하지 아니하면 사회에서 도피하기 바빠요. 환상 속에 빠져요, 환상 속에.
학교에서는 입자를 배운 것이 아니고 파동을 배우는 거예요. 너나 나나 똑같은 연속성 안에 같은 처지에 있고, 힘이라는 연속성, 누가 힘을 가진 자에 가까이 가느냐에 따라서 출세했다고 하는 겁니다. 힘에서 멀어지면 그것은 인생 망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학교에서 배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바리새인보고 “당신 어느 학교 나왔어? 신학교 어디 나왔어?” 묻는다는 말은, 본인들은 최고 대학을 나왔어요. 가말리엘 문하 출신자, 요새로 말하면 서울대학 출신자, 이름은 사울, 나중에 사도바울이 되는 사람, 율법에 정통한 사람, 율법이 나에게 힘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율법에 매진한 사람, 그 율법으로 무장된 육신, 그 육신이 마귀의 가현체라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질문에 답변하기를, 이렇게 했죠. 신학자치고 신자인 사람이 없다고. 신학자는 힘을 뺄 줄을 몰라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자, 인간이 얼마나 진리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 지 한 가지 예를 탁 던지면 알 수 있어요. 인간은 왜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가? 답변해보세요. 진리가 무엇인가, 인간이 얼마나 진리에 무지한가 보여주는 사례에요. 인간은 왜 남자와 여자로 되어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세상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은 지식을 총동원해요. 보자, 동물부터 조사해보자. 조사를 하니까 모든 것은 유성생식에 있더라. 유성생식, 21억 년 전의 단세포부터 계산하는 거예요. 그 전에 미토콘드리아부터 시작해서 연구를 막 해요.
미토콘드리아의 구성요소는 108가지의 원소의 폭발물로 되어 있고, 그 원소가 있는 것은 뭐냐? 유성부터 해서 지구 내부의 멘틀, 내핵, 외핵 그리고 저 바깥에 있는 별, 태양의 헬륨 분석까지 해서 원소가 부딪히면서 여기서 원소들을 내뿜었고, 그 원소가 유기체 속에 들어오게 되면 뼈속에 칼슘이 많고, 어쩌고저쩌고, 지각의 성분이 어떻고 해서 그 칼슘 중에서도 질소와 탄소로 구성되어 있으면 그 유기체가 DNA고, DNA가 나중에 복제가 되어버리면 이게 단세포가 되고, 단세포가 다세포로 바뀌고……, 어쩌고저쩌고 쭉 나와요, 진리를 계산해서.
그래서 인간은 생식하기 위해서 남성/여성이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로 나가죠. 다 했나? 다 했어? 성경에서의 진리는 뭐냐?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여성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남성/여성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 세계 수준에 맞추어서, 사라질 것에 맞추어서 영원한 것을 뽑아내기 위한 바탕이 남성과 여성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것,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 이게 진리에요. 진리는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모든 의미가 터져 나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 죽어 마땅함이라는 의미를 경유해야 이게 진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에요.
사람은 죽어가면서, 내가 죽어가면서 지구 역사가 몇 년이고, 우주가 몇 살이고, 뭐 양자역학 이론이 어떻고, 수학이 어떻고, 그러면서도 나중에 요양병원에 가서 죽어가면서 “양자 이론이….!” 이러면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왜 죽는데? 평생 살면서 죽는 이유를 몰라요. 죽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 뭘, 십자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반드시 죽고 부활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먼저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에 속한 모든 자손이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뭐냐? ‘네가 죽어서는 안 되지. 네가 아까운 거야. 선악 지식이 있는데 아까워서 못 죽지? 그러니까 죽더라고 새끼 낳고, 자식 낳고 너는 너의 의로움을 영원히 기억되게 하라.’ 그래서 이 땅에서 나중에 굶어 죽으면서도 ‘그래. 나는 지금껏 살면서, (뒤돌아 보면서)참, 내 방식대로 나 후회 없이 살았노라.’ 꼴까닥 죽는 거예요. My Way,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 마지막 커튼을 칠 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왔노라, 나는 후회하지 않노라.’ 뭐에요, 도대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건 어디 있습니까? ‘내 살과 내 피라.’ 그게 바로 마지막 언약입니다. 진리의 언약은 우리를 제치고 인간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악마와 이미 상대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상대하는 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너는 살아오면서 악마와 상대했듯이 이제 내가, 이 하나님이, 예수님 내가 너와 직접 상대해 주겠다.”
그래서 요한 1서 5장 7절에 성령이 바로, 진리입니다. 주께서 직접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는 속 시원하게 죽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의 바깥에 모형으로 사용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마치 불신자들이 악마의 모형으로, 바비 인형으로 살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바비 인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다시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로 그 안에서 다시 보게 하옵소서. 아무리 살펴보고, 아무리 분석하고, 아무리 탐구하고, 아무리 연구해도 진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진리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줄 이제는 발견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우리를 날마다 치워버리고 십자가 앞에 세워서 십자가를 증거 하는 천국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