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성
2023년 4월 16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2:10-13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믿음이 없을지라도’ 이는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한시도 대칭성을 놓치지 않음을 반영해주는 표현입니다. 복음은 대칭성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본인이 본인의 운명을 최종 판단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대칭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단독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무슨 결론이던지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신이 정당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놓고서도, 그 어떤 하나님의 일도 인간 자신에게 유리한 일인 것처럼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아예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의 대칭성은 인간하고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대칭성입니다. 아드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이 세상에서 죽게 되십니다. 그리고 부활로서 다시 살게 되십니다. 아들 자체에 남겨진 대칭성, 즉 죽음과 삶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질서는 이 대칭성으로 종결됩니다. 지옥과 천국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의 대칭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육에 속한 인간’과 ‘영에 속한 인간’으로 대칭되어 등장됩니다. 육에 속한 인간은 자체적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문(門)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물론 영에 속한 자도 자체적으로 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은 예수님에 의해서 박살나버렸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따라서 성도는 강제로 하나님께서 들어선 자입니다.
반면에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쪽에서 하나님에게 다가서려는 자입니다. 하나님쪽에서 들어서는 것을 위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은 인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들어오십니다. 다음과 같은 앞장 세워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베드로는 자신이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은 2중 금지를 통해서 인간이 알고 있는 개념의 왜곡됨과 뒤틀어짐을 분명히 하십니다. 처음에 “선악과 과일을 따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중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도록 금지하셨습니다.
이로서 죽음과 생명에 관한 본 내용은 인간들에게 있어 금지당한 내용이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을 때,(마 16:21) 베드로는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해주겠다고 나선 겁니다. 여기에 금지의 요건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이처럼 금지쪽에 있는, 악마와 같이 있는 인간의 형편을 절차로 겪어서 완성되시는 겁니다.
엉뚱한 다른 죽음과 삶을 생각하는데 이는 베드로 본인은, 본인이 살아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본명인 시몬에서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주신 것은, 예수님의 자신의 이름을 그에게 집어넣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지 못하고 바깥에 놓여 있습니다.
‘금지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하실 일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이 일이 아버지와 아들의 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시몬)에다 예수님의 자신의 해내신 일로 대체시키려 하십니다. 즉 ‘죽었다고 살아나는 일’이 예수님에게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제자들(교회)에도 같이 일어날 일이 되게 하십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부정적 이름을 가진 이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밀쳐서 죽임을 당하도록 하나님께 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 그 죽었다가 살아난 바로 그 아들의 이름을 밀쳤던 자에게 집어넣게 되면 그때부터 성도(교회)는 예수님이 당하셨던 핍박과 고난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
예수님의 기도 내용의 흐름은, 처음에는 자신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기도, 세 번째 기도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알아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상 보호가 아니라 잔 자체의 귀함을 부각하는 식으로 기도내용이 첨가됩니다. 즉 그 어떤 식으로 ‘잔’의 의미가 손상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로서 금지 안에 갇혀 있던 베드로 및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이루어내신 성과에 의해서 성령이 오시기부터는 ‘주의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성도는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죽고 함께 산 자가 됩니다. 마치 이 땅에서 귀신과 같은 존재라서 못할 일이 없고 못 갈 곳도 없습니다.
성도의 인생이란 마치 연습과 같습니다. 끝까지 연습입니다. 굳이 성공할 필요가 없는 낙서같은 겁니다. 그것은 ‘쓴 잔’ 덕분입니다. ‘쓴 잔’ 하나만 충분합니다. 성도는 함께 “죽었기에”에 성도의 신앙이나 소망이나 사랑이나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이 의미있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신앙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 주님의 것으로 주입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은 현상은 이미 이 땅에서 살아간 선배 신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따라서 그 어떤 인간에게도 ‘죽음’은 없습니다. 그저 ‘호출’입니다. 주님 앞으로 호출입니다.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의 쓴 잔만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디모데후서 2장 10-13절(대칭성)2304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0-13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10-13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말은 믿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데 그 우리라는 것은, 10절에 보면, ‘내가 택하신 자’라고 되어 있어요. 택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지 않습니다. 택하신 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쁘시게 일하시는 것은 택하신 자의 그 믿음을 뽑아내기 위해서,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신앙이 없다는 것, 우리가 신앙이 없다는 것이 택하신 자의 특징이 된다, 그 말이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자기 안에 어떤 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 문은 내가 나를 지키는 문이고, 빼꼼히 바깥을 내다봐서 내게 필요한 것만 거둬들이고 나머지는 배출하는 그런 문이 있는데, 그 문에 주님께서 찾아오죠, 택하신 백성에게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내가 문밖에서 두드린다’ 이 말은 우리 안에 문이 있다는 겁니다. 그 문은 우리 안의 내 것을 지키는 문이에요. 함부로 열어주지 않죠. 내 것 안에 뭐가 들었냐 하면,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내 것 가지고 하늘나라 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밀어붙이는 거예요. 다가오시는 거예요. 인간에게 있는 믿음, 내 것을 내가 지키는 믿음이 위기를 맞이한 겁니다. 우리는 바깥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분이 오게 되면 문을 단단히 닫아 둡니다. 함부로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를 지키는 문을 부숴버렸어요. 박살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문이 박살 날 때 뭐도 박살 나느냐 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나의 믿음도 같이 박살 나버리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도 같이 박살 나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에게 자기를 지킬 문이 있으면 자기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문을 빼꼼히 열어서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밀어 들어오지 않도록 항상 막아서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는 걸 아시고 마태복음 13장에서 뭐라고 하시냐?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오늘날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다 같이 들어야 되는 말씀입니다. 13장 28절의 말씀인데요,
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27.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29.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가라지 이야깁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 가라지를 뽑겠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뭐냐 하면, 단독적인 나 위주로 살겠다는 그 의지가 강해서 내게 귀찮은 것, 내게 해가 되는 것, 주변에서 다 없애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가라지를 자꾸 뽑으려 해요. 가라지 때문에 신경 쓰이고 가라지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편해요.
에스더에 보면 하만이 궁궐을 왔다 갔다 하는데 거기에 모르드개, 에스더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엎드리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귀찮아하는 거예요. ‘저거 저 인간, 저거 언제 죽이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만이라는 그 간신배한테는 그 모르드개가 가라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든지 가라지 같은 존재가 있어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뽑지 마라. 가라지 없으면 너도 없다.”는 거예요. 가라지 없으면 우리도 가라지라는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라지라는 사실을 생각을 못 하고 있잖아요.
그 이유에 대해서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가라지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 이유가 여기 본문 11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 함께 살 것이요.” 라고 되어 있죠.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라고 되어 있어요. 주와 함께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주님 죽을 때 함께 죽는 자가 천국 백성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죽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같이 죽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 문에 똑똑 두드렸고 우리의 그 문이 부서졌고, 주님이 쳐들어왔고, 이제는 함께 죽는데 너는 못 빠져나간다고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지금부터 좀 어렵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대칭성을 이야기하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대칭성을 가지고 일해요. 빛과 어둠, 그리고 죄 와 의, 그리고 여기 나오는 것, 죽음과 삶, 죽음과 다시 삶, 대칭성으로 일하는 이유가, 인간들이 범죄해 놓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유일한 단독성으로 살아가요. 나 하나 단독성을 유지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 한 가라지, 나한테 정신적으로 거슬리고 불편하면 가라지로 간주하는 이유가 나의 단독성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대칭성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질서를 대칭성에 두고 대칭성으로 모든 것을, 일을 마감시키는 거예요. 죽음과 삶, 죽는 쪽은 지옥, 산 쪽은 천국, 이렇게 두 대칭성으로 모든 일을 귀결시키고 종결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모두 나 자신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본인이 하나님의 대칭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본인 단독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요, 내가 여기에 살아있으니까 ‘있다’가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죽었으니까 없는 거고 살았을 경우에만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걸 바꾸는데 ‘죽었으니까 없고 부활했으니까 없이 되는 것이라’라고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네가 살아있는 중심이기 때문에.
이게 왜 잘못된 연결이 되느냐? ‘있으니까 살아있고 없으니까 죽어있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있으니까 살아있고 없으니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에게 선배가 있다는 겁니다. 선배들이 죽었으니까 없다고 너희들이 하겠지만 사실은 죽었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있는 게 돼요, 선배들이. 그리고 선배들이 우리를 후배로 보고 오라는 거예요. 너는 계속 살아있으니까 안 죽었다고 하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죽었으니까, 주와 함께 죽었으니까 주와 함께 살아 있다’는 그것, 그게 너희들이 생각하는 살아있다가 아니라 제대로 있는 살아있다가 되는 거예요.
이걸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개의 금지를 줬어요. 하나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금지를 줬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생명 나무 따 먹지 못하도록 금지를 준 거예요. 두 개의 금지를 준 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있는 것과 연관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 하나님께서는 “No! 아니야!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고, 예수님이 살아있음이 살아있음이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는 금지된 바깥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두 개의 금지, “선악과 따먹지 마라, 따먹었어? 그러면 생명 나무 따먹지 마.” 네가 아무리 금지를 넘어서서 금지대상이 안 되려고 애써도 나는 기어이 너를 금지대상으로 삼아 버렸다 이 말이에요. 경계를 쳐버린 거예요. 넘지 못할 선을 쳐버린 거예요.
쳐버리니까 주님이 계신 곳의 생각과, 주님이 계시는 경계선 바깥에의 생각이 정 반대가 된 겁니다. 이게 왜곡이에요. 왜곡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우리를 구원한다.’ 아닙니다. 죽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해요. 죽었다가 살았다는 그 대칭성. 우리는 그 대칭성 치워버리고 ‘나 살아있으니까 살려주세요. 교회 잘 나갈게요.’ 이거는 단독성이에요.
‘교회 잘 나가서 하나님 잘 믿어서 구원받겠습니다.’라고 할 때 너는 지금 두 가지 금지를 빼먹고 있다는 겁니다. 두 가지 금지, 금지를! 하나님께서 제시한 금지를, 두 가지 다 그걸 빼먹고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일방적 주장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 있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 해요. “아니야. 너 살아있는 그것이 죽은 것이야.” “왜요?” 하면 바로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그 살아남이 진짜 하나님이 인정한 살아남이지 네가 죽기 전에 있는 그것은 살아났다고 보지 않아. 네가 지금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게 바로 죽은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대하는 태도, 성경을 이해한 전체가 다 거짓말이 돼버리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디모데후서 중요한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12절에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한다는 이 말씀을 누가 하느냐 하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언급을 한 것이 아니고 이 본문은, 죽어서 인간 세계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생각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 살아있고, 내 옆에 주님이 주무시는데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살아있고 주님도 같이 살아있고, 내가 식사할 때 주님도 같이 식사하는데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걸 긍정하는 그 노선을 확장시켜 보면 내가 살아있던 그 살아있다는 개념 안에 주님도 같이 살아있으니까 이거는 주님을 부인할 수가 없지요. 그러면 이 말씀은 뭐냐? 주님이 만약에 죽어서 없다고 생각했을 때 과연 주님을 시인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걸 문제 삼는 거예요.
주님이 죽어서 인간 세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주님 저 안 살아있어요, 저 귀신이에요.’라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은 도리어 주님을 죽게 만든 곡해, 악마적 생각이었습니다.’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 그게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심을 시인하는 방법이에요.
‘지금 주님 죽었지만 뭐 부활해서 하늘나라 계시지.’ 이게 시인하는 방법이 아니고, ‘네 입으로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네가 어떤 자세로서 나를 시인하는가? 네가 죽은 자로서 시인 하는가,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시인하는가?’를, 그 시인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거예요.
지난 강남강의, 누가복음 16장을 이야기한 그 강남강의 시작하기 전에 그 성도님들에게 제가 농담 삼아 이야기했어요.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는 그 말씀 나오지요? 오늘 그 수능 문제 못 풀면 이러면 안 됩니다.” 했어요. 아직 강의 전이니까. ‘불의한 재물로’ 그냥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 아니고, ‘불의한 재물로, 더러운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래야 너희는 구원받는다는 뜻이거든요.
“‘더러운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 문제. 수능 문제 마지막 한 문제 남았는데 한번 푸시지요. 모르면 백지 내시든지.” 이렇게 제가 장난삼아 이야기했는데, 똑같은 장난을 한번 쳐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마태복음 16장 23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반석이라고 하면서 네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먼저 이야기했거든요.
그 뒤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능 마지막 문제라고 생각하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사탄아 물러가라.’ 누구보고? 베드로보고 “악마야, 물러가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3초 드립니다. 1, 2, 3초.
베드로는 자기가 악마인 줄 몰랐어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인간에게 두 개의 금지가 달려있다는 것을 인간은 잊어버렸습니다. 자기가 멀쩡한 줄 알아요. 그 금지를 통과해서 멀쩡하게 되는 방법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들었냐? 베드로가 교회 반석이 되기 위해서는 ‘이 사탄아’라는 말을 굳이 꼭 들었어야 돼요. 꼭 들어야 됩니다.
“이 사탄아, 너는 나를 방해하는 자야. 너란 존재 자체가 나를 방해하는 자야. 너는 나를 방해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어.”라는 말을 우리가 꼭 들었어야 돼요. 우리는 살아있는 내가, ‘하나님 저기 살아계시죠? 저기 살아있지요? 나중에 죽어서 만납시다.’ 둘 다 살아있다, 하는 단독성 가지고 모든 걸 이해하려 합니다. 주님은 대칭성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난 대칭성 가지고 있는데, 대칭성은 인간에겐 없고 단독성을 주장합니다. 열심히 바르게 살게요, 교회 열심히 충성할게요, 단독성으로 밀어 붙이는 거예요. 금지의 그 금지를 빼버리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었다가 살아남’이라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인간을 둘로 분류를 시키려고 합니다. 그 둘로 분류가 될 때 분류된 결과로 남는 것이 두 종류의 인간인데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옵니다. 14-16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받았던 ‘단독성’ 내 중심,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것, 나한테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빼꼼히 열고 나한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고, 불리한 건 내치는, 내가 매일같이 나를 선택하는 그 삶이에요. 매일 같이 나를 선택하는 삶.
그런데 디모데후서 오늘 본문 2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들이 밀어가지고 하나님께서 너를 선택했다고 들어온 거예요. 주님이 선택해버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은 완전히 쪼개집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게 없어요. 주께서 치고 들어올 때 죽은 자로 치고 들어와요, 죽은 자로.
사람 손에 의해서, 인간들 손에 죽은 자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것은, 내가 너한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는 그 절차에 의해서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는 이야깁니다, 베드로야! 네가 사탄 짓을 안 하면 내가 십자가 죽을 이유가 없지요. 성립되지 않아요.
고아원이 있는데 어떤 아이가 그냥 고아원에 들어왔어요. 이름도 없어요. 이름도 없는데 이름 없는 아이와 이름 있는 애가 둘이 놀다가 이름 없는 애가 턱 밀쳐져서 돌에 넘어져 걔가 죽었어요. 죽으니까 원장 신부님이 쉬쉬하고 ‘이번 사건 덮자.’ 직원들보고 “덮읍시다. 우리 고아원에서 이런 문제 밖으로 나가면 큰일이니까 덮읍시다.”
그래서 덮고 죽은 애 이름을 밀쳐서 죽게 한 그 아이, 이름 없는 아이에게 이름을 줬어요. 이름을 붙였다고요. 제가 뭐 아무것으로나 이름을 붙인다면 ‘온 하준’입니다. 아무렇게나 붙인 거예요. 온 하준. 그때부터 걔는 이름 없는데 ‘온 하준’ 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고아원에서 있었던 그 사건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11, 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성도는, 성도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때문에 발생되는 삶을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밀쳐서 죽어버린, 죽었다 살아난, 죽어버린 예수님의 이름이 이게 내 이름이 되어서 주님에게 주어진 핍박을 자기에게 있는 그 주의 이름 때문에 본인이 옴팍 다 뒤집어쓰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주와 함께, 함께 죽었고 함께 살아난 사람의 특징이에요. ‘온 하준’ 온 하준 알려면 ‘모범택시 2’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입장에서는요, ‘아니, 내 인생 따로 있는데?’ 네 인생 따로 있는 거 아는데 그거는 시몬 때고, 그것은 시몬 그때고 이제는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뀌어요. 베드로라고. 자기 단독성, ‘나는 신이다’라는 그 단독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금지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들이밀어서 그 금지, 두 단계의 금지를 주께서 뛰어넘게 만들어버렸어요.
뛰어넘어서 영에 속한 사람들 특징이 뭐냐? ‘나는 나 자신이 왜곡되었다. 나는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보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연습에 불과한 겁니다, 연습하는 것. 연습은 뭐냐 하면, 성공할 필요가 없어요. 뭘 해도, 떡볶이 장사해도 연습이고, 커피 카페 열어도 연습이고, 백수 돼도 연습이고, 교사해도 연습이고, 농사지어도 연습이고, 고기 잡아도 연습이고, 어차피 인생은 성공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죽여서 주님을 귀신 만들었다면 이건 반대로 귀신이 찾아와서 나를 귀신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죽은 귀신, 죽은 귀신은 귀신다워야죠. 귀신이 못 할 일이 뭐가 있으며 귀신이 어디를 못갑니까? 이러나저러나 귀신 신분 달라질 것 없고, 굳이 내가 성공할 필요 없거든요.
내 인생 내가 성공할 필요 없다는 그 근거는 마태복음 26장 42절에 나와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 하나하나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2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합니다. 42절에,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에 두 번째 나와서 기도하는 내용이 이렇게 나와 있어요. 다시 한번 제가 읽어봅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첫 번째, 첫 번째 기도할 때 내용이 뭐냐? 39절에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정어가 한 개 들어가요. 그런데 두 번째 42절에 부정어가 두 번 들어갑니다. 두 개 들어가는 이유가,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가 더 구체적이 된다는 말이에요. 구체적으로 십자가 의미가 나오는데 ‘내가 어떻게 아버지께 구원받느냐, 구원받겠습니까?’ 하는 것이 강렬했던 게 첫 번째 기도였다면, 두 번째는 뭐냐? ‘내가 아니라 이 잔에 담긴 의미를 잔에 담긴 의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옵소서.’ 드러나게 하는데 예수님이 죄인 된 인간의 입장에서 부정어를 두 개를 쓰는 겁니다.
42절 다시 보면,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여기에 ‘마시지 않고는’ ‘않고는’이라는 부정어가 들어가죠. 그리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부정어 두 개 들어가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잔’에 대해서 강조하는 거예요. 이 ’잔‘에 대해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잔, 아버지와 아들과 창세 전에 의논한 그 잔, 진짜 죽음, 인간들 우리가 아는 죽음 말고요, 진짜 죽음, 인간들은 아무도 모르는 죽음, 인간은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죽음, 그 죽음을 죽음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 바로 그 죽음과 그리고 다시 난 삶, 이 대칭성, 이 대칭성 가지고 하나님은 모든 질서를 전부 다 종결시켜 버린 거예요.
인간은 거기에 같이 놀아났고, 활용당하고 있고요.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잔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거예요. ‘이 잔을 안 마시고도 어떻게 구원될 수 없겠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잔이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은 알았어요. 예수님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잔이 중요하다는 것,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잔을 주께서는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으니까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성공할 필요 없는, 그냥 연습장에 낙서나 하면 돼요. 95세 될 때까지.
애 키우는 낙서, 딸 시집보내는 낙서, 손녀 둘 키우는 낙서, 그냥 모든 것이 연습이에요, 연습. 연습인데 실패하면 좀 어때요, 어차피 연습인데! 가라지 있으면 어때요? 내 집 앞에 보살 살면 어때요, 연습인데! ‘저 가라지 죽어버려라.’ 그러면 불편해서 못 살아요.
마태복음 13장 가라지 이야기할 때 주께서 무서운 이야기 했습니다. 가라지 뽑으면, 너도 뽑힌다는 거, 가라지 뽑다가 알곡 뽑힌다는 이야기. “네가 주제넘게 가라지를 뽑아? 네가 가라지를 알기는 알아? 네가 가라지인 것을 모르는 채로 어떻게 가라지를 뽑아? 너도 가라지라면 어떡할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가라지 뽑다가 알곡 다 뽑히는 거예요. 가라지고 알곡이고 그건 네가 관여할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에요. 이미 우리가 주와 함께 죽은 귀신이니까요. 귀신이란 말이 듣기 싫으면요, 앞선 선배하고 똑같이 되었다 보시면 돼요. 그 선배, 그 후배라 보면 돼요.
영의 인간, 고린도전서 2장 15절, 16절에서 영에 속한 자, 또는 신령한 자에 대해 소개를 하면서 신령한 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16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는가? 신령한 자의 특징은 주의 마음을 아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되어 있어요. 자, 주의 마음을 아는 자, 주의 마음이 뭐냐? 주의 마음을 아는 자,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넓은 풀밭에서 중국산 라이터로 불을 켜서 그 풀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주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완전히 싸그리 불바다 되겠지요?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베드로후서 3장 6, 7절에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이 마음을 여러분들이 속 시원~하게 평소에 갖고 계시다면 주의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에요. 어차피 가짜들, 가짜인데 불 질러야 되지요, 가짜니까. 어차피 멀쩡한 인간은 없잖아요. 그러면 불 질러야지요. 구원받은 자의 기쁨은 뭡니까? 심판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다 싹, 싸그리 불 질러버려요, 싸그리.
성경은 싸그리 불 질러도 마땅한 그 과정들을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제가 무슨 말은 하는 거냐면, 악인, 그 가라지 있잖아요, 악인은 악인끼리 서로 싸워죽여요. 요한계시록 9장 3절에 보면 황충이 나와요. 황충, 악한 귀신들이죠,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와 가지고 자기 사람들을 잡아 죽여요, 자기 사람들을.
우크라이나하고 러시아하고 전쟁하면 누구 편들어야 합니까? 이 세상은, 악은 악의 멱살을 잡고 자기들끼리 싸워요. 자기들끼리 망한다고요. 요한계시록 17장 16절에 보면, 그 짐승이 누구를 괴롭히느냐 하면, 음녀를, 이 세상의 음녀를 미워해서 망하게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16절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 세상은 굳이, 굳이 3차대전 안 일어나도, 매일같이, 매일같이 멀쩡하다고 우기는 이 망해야 될 인간들이 서로가 멀쩡하다고 싸우고 있는 중이에요. 이 세상은, 서로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말씀 드렸는데, 여러분에게도 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윤석열 지지도가 20%인데 예수님이 대통령 되면 지지율이 얼마가 나오겠습니까?” 제가 물었지요. 0%입니다. 왜냐면 주께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히면 싸그리 불로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어떤 정책을 하든 함께 죽게 만드는 정책을 해버려요. 너는 나와 함께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 마귀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니까요. 주의 일을 방해하니까요. 그러면 지금 우리 인간들 문제가 뭡니까? 문제는 뭐가 문제냐 하면, 살고자 하는 게 문제지요. 살아있는 게 살아있다고 여기면 살고자 하는 건 문제가 안 돼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두 개의 금지에 의해서 이미 죽어있어요. 죽어있는데 살겠다는 것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싸그리 불로 싸질러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거지를 피우는 거예요, 어거지를,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 대칭성이죠, 이 대칭성을 내용으로 담아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봅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상대방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뭔데 내 신앙을 작살 내?” 당신이 뭔데 내 신앙을 작살 내느냐.
방금 그 사람 말 속에서 무엇과 무엇이 결합 됐느냐 하면, ‘내’ 그리고 ‘신앙’이에요. ‘내 신앙’, ‘내 신앙’을 풀이하면, 난 멀쩡한데 멀쩡한 내가 더욱더 멀쩡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 믿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4장에 보니까 행함으로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내 믿음으로 예수를 믿었어요. 아~, 이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멀쩡함이 더욱더 깨끗한 멀쩡한 자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단독성이죠. 대칭성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죽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죽었다, 하면 “참 불행한 일이 일어났군요.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이러고 있는 거죠. 주님은 ‘죽었다 살아남’으로 그게 계속 가는데 “지금은 부활됐으니까 뭐 주님 죽은 것도 잊어버려야지요 뭐. 사실 털고 가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런 식이라.
대칭성이 아니고 자꾸 단독성으로 가는 거예요. 죽었다, 살았다, 이것은 여러분, 주님만 결정하는 거예요, 주님만! 놀라운 사실은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은 없고 호출만 있어요. 요한복음 5장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게 호출 아닙니까? 이게 호출 아니면 뭐에요? “아이고, 죽었어요.” 누구 마음대로 죽어? 안 죽어! 인간은 장례식장 관속에 박혀도 안 죽어요. 인간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엉터리기 때문에, 엉터리 개념, 생각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은 숨 끊어지면 죽는 거고, 숨 쉬면 사는 거다.’ 이것은 본인의 이런 주장 자체가 얼마나 엉터리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인간은 안 죽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결정하고 있어요. 그 개념 자체, 그 정의, 그 진실은. 우리는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요, 그냥. 주님의 죽으심과 주님의 삶에 대한 그 개념들을 드러내는 그냥 재료일 뿐이에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 하고 방송에 나오는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강의하는 거, 그들의 주장이 전부 다 뭐가 잘못됐냐 하면,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해서 그 강의하고 있어요, 멀쩡하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주님께는 두 가지 금지로서 멀쩡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죽는 건 네가 자살했다고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예수님이 드리신 바 되신다는 그 사실을 현실에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이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어 나갔고, 죽어 나간 가운데서 하나님이 거기에 삽입된 거예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진짜 죽음과 진짜 영생을 위해서 계획한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징조로서, 증상으로서 나타난 거예요, 인간의 삶이.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리신 바 되어 죽었고, 드리신 바 됐다는 것은 죽었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러니까 예수님만 활동한 거예요. 우리는 뭐하고? 연습만 하고요. 해답도 모르는 연습.
당신이 뭔데 내 신앙, ‘나’와 ‘신앙’을 연결시켰습니다. 이거는 연결 안 돼요. 아브라함의 신앙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것은 ‘아브라함’ 신앙이지 ‘아브람’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겐 신앙이 있잖아’ 이러는데, 아브라함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했어요.
온 하준. 아브라함이고 모세고 간에 그 이름은 모세, 아브라함, 달라도 동일한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그들은 구원받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쳐 죽임 받은 그분의 이름을 본인이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선지자들이에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목사님, 사실이냐고 묻지 마세요.
왜냐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사실이에요. “당신이 감히 나의 신앙을 모독하냐?” 할 때 이렇게 답변하세요. “당신이 뭔데 감히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냐?”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또 이렇게 복음 전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당신이 뭔데 내 목회 생활 20년을 모독하느냐?”
그때는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Maybe, 갑자기 영어가 막 나오는데요, 아마도, “나는 아마도 당신이 신자인 줄 알았지. 난 당신이 신자인 줄 알았어. 혹시나 했지만 역시 신자가 아니었구먼.” 내 목회 생활, ‘나 + 목회 생활’ 그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목사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내 인생. 내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있었던 시절. 아니요. 우리는, 저나 여러분이나 살아있었던 시절은 없습니다. 살아있었던 시절 없어요. 죽음으로 끌려가는, 아직도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계속 죽음으로 끌려가면서 무슨 짓을 했는가?
내가 문을 만들어 놓고 문 안에 내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하는 거예요, 필요한 것만. 필요한 게 어떤 게 필요하냐 하면, 내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루하루 목숨 줄이 이어질 수 있는 것들만 끌어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내 안에.
그러니까 현실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아는 현실이라는 것은 나의 욕망의 표상이라고 보면 돼요.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이라는 것은, 내 욕망이 보고 싶은 것만 모아놓고 이게 내 일방적 현실이에요. 그리고 그 욕망의 허락 없이는 보고 싶은 현실도 안 보여요, 내 욕망의 허락 없이는.
스페인 놀러 가서 마드리드나 그런 “유적지 봤나” 하면, “유적지 봤어.” “그러면 축구장에서 메시, 축구선수 메시 봤나?” “안 봤는데?” “왜?” “축구에 관심이 없으니까.” 내 욕망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내가 볼 수가 없어요, 내가. 인간은 이 정도로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어요.
그걸 간단히 말해서 뭐냐?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육에 속한 사람은 악마와 함께 있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나가는 겁니다. 자신의 문에 스스로 갇혀 있는 사람, 내가 살아있듯이……,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하나님 잘 살아계시지요. 하나님 뭐 죽었는데 아이고 뭐 그런 불상사야 있었지만 부활되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 잘 살아계시지요? 그러면 곧 만납시다.”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 내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뭔가 준비해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 자신이 장차 주님을 만나려면 어떤 걸 준비해야 되는가? 미국에 가면 종말을 대비한 펜션을 팔아요. 지하 벙커를 팔아요, 지하 벙커를. 3차 대전 일어났다 치고, 러시아하고 미국이 서로 핵폭탄을 써서 온 천지가 황폐화 되었다 치고, 그럴 때 살아남는, 한 십년 간은 멀쩡하게 우리 식구 살아남을 수 있는 벙커를 팝니다.
주문이 쇄도했어요. 광고하는데 그 안의 내용까지 다 보여줘요. 놀라운 사실은 그 핵폭탄이 터져도 멀쩡한 벙커 안에 수영장까지 마련해놨습니다. 물은 지하수로 다 공급되게 되어있고, 한 십 년 동안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게임판들이 준비되어 있어요, 게임들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 하는 거예요. 뭐 돈은 얼마 안 해요. 보니까 한 60억 정도, 고 정도. 세상 적으론 그렇게 하죠.
그러면 종교적으론 어떻게 하는가? 멀쩡한 내가 멀쩡하게 하나님 만나기 위해 뭘 준비해야 되느냐 하면, 3차 대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성경에서 찾는 거예요. 일단 트럼프는 억울한 대통령, 억울하게 탈락했다는 그거, 그 동영상 찾아야 해요. 백신은 제약 회사들이 장난쳐서 코로나를 유발했다, 그거 찾아야 해요.
그다음엔 전광훈 목사 찾아가야 됩니다. 전광훈 목사 찾아가서 결코 그 교회 옮겨서는 안 된다는 거, 600억보다 더 받아내야 돼요. 왜 이런데, 관심을 왜 이런데 두느냐? 살려고, 살려고 하는 겁니다, 살려고. 그리고 어떤 정보, 성경만 하지 말고 외경(外經), 외경이라는 게 있어요. 천주교에서 외경, 성경 바깥의 외경, 교회가, 이것은 성경 아니라고 했던 그런 것들 조사해보면, 예를 들어 ‘도마복음’ 그런 거 보면 신비로운 것이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 성경만 알아 가지고 너무 생각이 좁았다는 거예요. 그것도 봐야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책은 전부 악마 책이나 믿지 마라, 이렇게 하는데 사도 바울도 그걸 어떻게 알았던지, ‘나와 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어요. 사도바울도 이미 그 대책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배운 것이다.’
그런데 그쪽 말로는 ‘사도바울은 사기꾼이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아니 신학자도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사도 바울 말 다 믿지 마라. 하나의 사견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두 사람 다 대질해서 “피고, 원고 앞으로 다 나오세요.” 솔로몬 재판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쪽이 뭐다? 이쪽은 “인간은 더욱더 성경 말고 다른 외적 정보까지 확보해야 살아계신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 말을 다 믿지 말고요, 사도바울은 구라입니다.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그 말 자체가 사기예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사도바울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된 사도기 때문에 지금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받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직접 배웠습니다.” 둘 다 다 나오세요. 둘 다 다 나오세요. 자, 솔로몬 재판, 어떻게 재판해야 할까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어느 인간이 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은 어떻게 갔느냐’가 표준입니다. 사람들은 뭘 모르냐 하면, 표준을 몰라요. 이것은 남들이 마실 수 있는 잔이 아니고 예수님이 마셔서 잔을 주시고, 우리가 마신 잔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시는 잔, 그게 바로 환란이고 그게 핍박이에요.
아까 그 이야기, 정보를 많이 확보해서 구원받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이 자체가 뭐냐 하면, 나 멀쩡하다는 뜻이거든요. 멀쩡한 내가 굳이 고생해서 갈 필요 없지 않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내 이름을, 내 이름을 유지하면서, 그러니까 베드로로 가는 게 아니라 시몬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그 이름을 유지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 만나겠다는 거예요. 왜? 나 살아있으니까. 이것은 나의 선택으로 내가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자기에 대한 집착이 지독한지, 거의 뭐 어느 정도가 아니라 마귀 적이라 해야 적당할 정도로 지독한지, 장례식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자기가 병들어 곧 죽게 되는 것을 앞두고 그 인간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걸 생각해요. ‘내가 조금 있으면 죽는데 죽고 난 뒤에 내 장례식에서 가장 나를 위해서 애석하게 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요?’ 자기 장례식까지 생각해요.
그러한 생각이 왜 드느냐 하면, 평소에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사람들이 말을 하잖아요, 인간이 말을 할 때 자기 문이 있으니까 빼꼼히 열고 말을 할 때는 일단 내 말에 대해서 내가 믿어요. 나는 멀쩡하다, 나는 틀어지지 않았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가짜 아니야, 나는 진짜야, 라는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 말을 믿지 마라,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말은 사람보고 하면서, 하나님 믿는다고 하니까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이제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걸 정면으로 눈으로 베드로를 보고 이야기 한 거예요.
뭘 봤느냐? 모든 인간은 지금 자기가 자기 말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악마의 말을 예수님 앞에서 내뱉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대칭성을 이야기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산다.” 이 대칭성 이야기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그럴 일은 제가 있는 한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대칭성이 없어요, 베드로는. 단일성입니다.
“나 살아있고, 멀쩡하게 살아있고, 주님 살아있으니까 그냥 갑시다. 하나님이여, 제가 땅에 있으니까 제가 성경을 통해서, 외경이나 다른 그런 성경들 추가되는 성경들을 많이 연구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과학도 연구하고, 인문학도 철학도 공부해서, 많이 확보해서 제가 지금은 조금 부족하지만 점차점차, 점점 더 내가 온전하게 되어서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그렇게 만납시데이!” 또 죽고 난 뒤에는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노래 불러주고, 장례식에서 찬송 불러주고, 관속에 있는 사람이 마귀인 줄도 모르고 찬송가 불러주고.
온 세상이 공부하고 노력하면 더, 좀 더, 더, 더, 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거, 이렇게 주장하는 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고 공부를 하게 한 것은, 네가 어느 정도로 실패자요, 가짜고, 왜곡되고, 얼마나 너 자신이 너를 속이는지 우리의 가면을 벗게 하기 위함이에요, 가면을.
영에 속한 사람만이 압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그 주인공 여자를 그렇게 사모하는 사람, 사건이 자꾸 일어나는데 보니까 지하에 어떤 특정 인간이 살고 있는데 가면을 쓰고 있어요. 완전히 가면을 벗겨버렸죠. 보니까 흉측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등장했습니다.
남의 가면, 남의 가라지 벗길 생각하지 마시고 마귀로부터 덮어 쓰인 오페라 유령의 마스크, 날마다날마다 세 겹 네 겹 계속해서 덮어 쓴 이 마스크를 성령이 와서 말씀으로 벗겨주지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방해하는 자다.”
그 소리를 여러분, 기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면 어차피 연습인데, 어차피 선배 만나러 가거든요. 선배도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받았으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천국 가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쓴 가면을, 매일 쓰는 가면을 주께서 매일 같이 벗겨줘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핍박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멋진, 귀한 신분인 것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천국 가려고 멀쩡한, 더욱더 멀쩡한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이 시도가 금지를 빼먹은, 외면한, 외면시킨 악마의 짓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이제는 악마보고 악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