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왕 노릇

아빠와 함께 2023. 4. 23. 18:01

왕 노릇

2023년 4월 23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2:12-13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보고 ‘나를 부인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예수님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시인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속으로 “예수님 부인하면 어쩔건데?”라는 태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살기 바빠서 주님에게 신경 좀 못 쓰더라도 라는 투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을 보고 “너희들은 지금 악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각자 개별적인 삶을 추구하는 바로 그것이 모두 동일한 공간에 갇혀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 공간이 곧 왕제도로 통합되어 있다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해집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개별자들이 고이 간직한 모든 것들은 다 작살납니다. 귀한 자식, 재산, 나의 자존감, 체면, 명예, 등등 모든 것들이 최고 권력기관이나 인물에 의하여 모조리 공출당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개인은 세상 권력의 노예들입니다. 모두 하나같은 동일한 곳으로 흡입당합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의 흡입력을 먼저들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권력 중심에 믹서기 같은 기능이 작용합니다. 칼날들이 춤을 추면서 개인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갈아버리고 잘라버립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세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 경제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시인하면 ‘종노릇’이 아니라 ‘왕노릇’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 전쟁을 벌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 세상에서 벗어나야겠지요. 벽 속에 갇혀 있는 벌레가 벽 밖으로 무슨 수로 나옵니까? 못 나오지요.

요한복음 11:43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 갇히게 해놓고서는 다음과 같이 외치십니다. “나사로나 나오너라!” 나사로는 자기 죽음의 품은 채 걸어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3:43에서는 예수님께서 옆에 같이 십자가 달려 있는 강도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벽에서 나와야 합니다. 2차원 벽지의 납작한 무늬같은 우리가 우리의 세계 밖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나온 세계는 ‘왕같은 제사장’ 세계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하지만 이 제사장 나라에 신약이 되면 ‘왕’이 덧붙여집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왕, 곧 하나로 통일된 권력 체계가 이 인간나라 말고 따로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셨습니다. 이 두  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건지는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도와주어서 아브라함쪽이 승리케 하십니다. 이 와중에 아부라함에게 마중나와 복을 빌어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살렘왕 멜기세덱’입니다. 비록 지상의 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늘의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 분의 본질은 히브리서 7:3에 나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멜기세덱은 지상과 천상의 요소를 다 구비하고 있는 분입니다. 왕과 제사장직이 겸직되어 있는 겁니다. 이 겸직되어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에 복을 내리시므로 복은 이제 대를 이어 멜기세덱이 품고 있는 본질에 역사를 통해 펼쳐집니다.

이것은 왕과 제사장의 분리와 다시 합리되는 절차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 절차는 이스라엘 내부의 지파의 구별을 통해 증거됩니다. 우선 제사장직을 위해 레위지파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습니다. ‘허리’에 있다는 말은 마치 트로이 목마 안에 트로이 군사들이 들어가 있는 상황과 같습니다.

레위지파가 들어있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이미 복, 곧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입장에서 복을 내려주신 멜기세덱에서 십일조를 드린 상황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재현하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사이에 있는 상황을 반이스라엘에서 반복하는 기능입니다. 즉 이미 하늘의 왕께서 지상에서는 제사장 형태를 띤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제사장은 이 지상에서 시원, 곧 원래 인간 원형을 제시하는 역할을 보여줍니다. 일체 인간의 것이 들어오기 전의 상황을 표현하는 겁니다. 제사장이 결혼하자면 오로지 처녀와 해야 합니다.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지니 과부나 이혼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레 21:13-15)

이는 제사장이 처녀와 동격이라는 말입니다. 일체 사람 손 떼가 묻지 않는 상황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손 떼묻은 인간들은 죽음의 자리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이는 세상 왕제도처럼 이스라엘 내부에서 율법에 의해 작동하는 새로운 진공청소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제사장은 ‘깨끗한 죽음’을 생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을 율법을 가동시켜 그들로 죄인되게 해서 희생 제물의 깨끗한 죽음에 합류시키는 겁니다. 이 세상 산 모든 인간들은 세상 왕의 종으로서 충실하게 복종하고 굴복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과연 진정한 최초의 인간형상을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걸친 모든 것들은 부서지고, 무너지고, 떨어져나가고, 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 안에 진정 인간의 원형이 들어 있는지 보게 하십니다. 인간의 원형이란 곧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원형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삶의 목표는 패배요 실패 자체입니다. 누가 나를 함부로 해도 상관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겁니다.

제사장으로 이어지게 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이제 그 율법의 기능이 역할이 마감되고 멜기세덱, 곧 율법이 이전에 있는 맹세에 의한 새로운 반열(족보)에 따라 유다지파에서 하늘의 왕이 제사장 중심 집단에 마중에 나옵니다. 맹세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맹세한 맹세를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시도는 맹세 안에 낄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울왕이 ‘왕’이고자 한 사람이요 다윗은 ‘왕노릇’한 사람입니다. 왜나하면 다윗은 자신의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시 51:5) 더는 나의 왕됨의 시도에 놀아날 필요가 없는 자, 바로 이런 자가 예수님의 제사장 믹서기 안으로 빠져들어가 있는 복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을 헤집고 예수님의 하신 일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디모데후서 2장 12-13절(왕노릇)2304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2-13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12-13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여기 12절에 보면,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는 일을 우리에게 윽박지르는 느낌이 강렬하죠? 뭔가 강요하는 느낌을 줍니다. ‘나를 부인하면 너를 부인한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은 지나가는 세대에 사셨고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인생을 살면 그만인데.’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를 향하여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신다.’ 협박성 같은 느낌이 확 오죠.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33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그럼 우리 생각은 뭐냐? ‘부인 좀 하면 어쩔 건데? 어쩔 건데?’ 이렇게 나오죠. ‘나도 내 인생 살기 바쁜데 예수님까지 챙기면서 살 그런 여력 없다. 바쁘다. 사는 것도 바쁜데 누구 인정 안 해주면 어쩔 건데?’ 이렇게 나올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이런 모든,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왕 노릇’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변화라고 하면 늙고 죽는 변화, 젊은 사람이 늙고 죽는 변화, 그 변화뿐인 줄 알고 생각하는데 그 변화 말고 소속이 달라지는 변화가 있어야 된다, 전에는 마귀에 소속되어서 마귀의 종노릇 하지만, 지금은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참으면 또한 왕 노릇 할 것이고’ 즉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 노릇을 하는 어떤 그 변화가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 부인하게 되면 여전히 마귀의 종이 되고, 시인하게 되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 28, 29절은 열 한 제자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너희들도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거예요. 앉아서 열두지파를 심판하고 통치한다, 그렇게 약속을 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새로운 변화를 하나님께서 모색했고 준비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변화를 하려면, 지금은 우리가 생각한 우리의 생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거든요.

지금 현재 형편 자체가 예수님이 왕노릇하는 심판의 대상이 돼 있는 형편이다, 이 말이죠. 네가 지옥 가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을 촉구하고 있는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이. “너 언제까지 마귀 종 할래? 빨리 빠져나와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예수님 자신만 시인하게 되면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예수님 시인하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그 점이 예수님의 생에를 통해서 몇 군데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에 보면 나사로를 주님께서는 무덤에다가 그냥 가둬놨어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 오셨다는 말은, 나사로를 아예 무덤에다가 집어넣어놨어요. 의도했죠.

그렇게 해놓고 죽은 지 나흘 되는 그 나사로에게 주님께서 바깥에서 뭐라고 하냐면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어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살아 옆에 있는 마리아나 마르다 보고, “마리아, 마르다야, 걸어봐!” 이러면 걸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오빠는 누가 봐도 이미 시신이 되었고 그것도 두 시간 네 시간 지난 게 아니고 죽은 지 사흘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요.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옛날에는 무덤을 동굴 안 벽 같은 데 두거든요. 결국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는 것은 ‘네가 처한 벽에서 네가 탈출하라.’ 이런 이야기에요.

옆에서 지켜보는 유대인들은 기가 찼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저분은 왜 존재하느냐?’ 이 말이죠. 뭐 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나타났느냐, 하는 식이죠.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고. ‘누구십니까 너?’ 이런 식이에요. ‘뭐 하자는 이야기에요?’ 사람들의 뜻은 이거예요. ‘주님 시켜만 주이소.’라는 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도 살아있지만 나도 살아있다고 주장할 때 가능하고, 나사로는 죽었는데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들어요, 사람 말을.

시체안치소에서 한 번 시험해 보세요. 죽은 자 보고 “거기 눕지 말고 일어나라.” 하면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일어나 나오너라.” 이렇게 하니까 그 나사로가 일어나서 나오는데 그 베옷, 염할 때 쓰는 천에 감겨서 제대로 못 걸으니까, 삐뚤삐뚤 걸으니까 “풀어줘라.” 풀어주니까 걸어서 나왔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2차원의 벽 속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을 주님은 납작하게 봐요. 납작하게 보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의 얇은 벽지가 돼요. 벽지가 되고 거기서 태어나고, 즉 출생하고, 살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일하고, 뭐 아파트 사고, 노동하고, 결혼하고, 이 모든 것은 그 벽지를 장식하는 얼룩덜룩한 무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벽 속에 있는 인간이 벽 바깥으로 탈출이 될까요? 하나의 꽃무늬에 불과한데. 인간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몰라요. 인간의 변화라고 하는 건 늙고 죽는 변화가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세계, 이 세계는 거기서는 완전히 깜깜해요. 전혀 몰라요.

주님의 명령 한 마디,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나사로가 자기가 기거했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겁니다. 주님이 마련한, 장만한 세계가 따로 있어요. 그 세계가 바로 오늘 본문의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뿐만 아니고,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보면 강도가 나오죠, 유명한 강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나란히 달려 죽었던 그 살인강도, 사형 집행장에서 함께 있었던 그 강도, 강도에게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가 뭐했다고요? 강도가 뭐했어요?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천국에 있을 것이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이 바깥에, 인간이 생각하는 벽에, 얇은 2차원 평면 같은 인간세계, 납작한 인간세계의 그 바깥 세계에는 일체 인간의 일이 거기에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일밖에 없어요. 인간의 일이 개입될 수 없는 세계. 네가 강도가 되든, 세리가 되든, 네가 창기가 되든 전혀 그 바깥에 나오는 거 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바깥의 일은, 주께서 바깥의 일에 대해서 완전히 구비하시고, 다 이루시고, 그냥 말씀으로 호출하면 돼요. “거기서 나오너라.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을 것이라.”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렇게 바깥에 가게 되면, 소속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의 소속에서 소속이 뭐로 바뀌는가? 예수님 소속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러한 신분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런 말씀 하십니다.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룩한 나라요” 그가 불러내서, 아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는 것처럼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그런데 어디서 나오는가?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 보시기에 어둡다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깜깜하니까요. 왜 어두우냐? 하늘에 빛이 없으니까 어두운 거예요. 인간이 만든 전기에너지, 에디슨이 만든 전구, 그 전구를 밝히는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여전히 어두워요.

빛 되신 주님께서 빛으로 나오는 말씀 가지고 나오너라, 할 때, 우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백성이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되어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오늘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이 왕이라는 것은 주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를 보고 뭐냐, ‘네가 왕 노릇한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만이 왕인 것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우리가 왕 노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에 첨부, 어떤 과정이 필요한데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왕 노릇 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하늘나라의 어떤 요소가 성도에게 주어졌기에 그저 죄인인 주제, 살인자나 강도 같은 사람들,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 있지요,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그거 강도거든요, 강도,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마찬가지고요, 그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의 자리에, 왕 노릇하는 자리에 함께 앉힐 수가 있느냐 이 말이죠.

무엇을 경유하느냐? 그 경유하는 것을 우리가 추적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 보게 되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2장 6절에서 하늘에 앉혔다는, 이미 앉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앉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 성도도 함께 앉아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죄인이거든요. 죄인인데 어떻게 신분이 달라져서 왕적 조치가 됐는지 그 절차를 한 번 살펴봐야 돼요. 베드로전서 아까 보았던 2장 9절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으니까. 오늘 본문에는 ‘왕 노릇’이라 되어 있고요, ‘왕 같은……’ 그 뒤에 붙는 게 있어요. ‘제사장’이 붙어요.

출애굽기 19장에 보게 되면, 찾든 안 찾든 모르겠어요, 난 그냥 나갈 거예요. 출애굽기 19장 5절에서 6절에 보게 되면,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절에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사장 나라가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는 ‘왕 같은’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그냥 ‘제사장 나라’가 돼요. 제사장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신약의 성도는 제사장 나라인 동시에 신약에서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백성들’이 되는 겁니다. 왕의 지위가 부여되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그러면 어떻게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왕 같은 세상으로 어떤 변천이 일어나는가? 어떤 변화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전쟁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특정 전쟁에서 인간으로서의 하늘나라의 위상을 보여준 사람이 왕과 제사장 두 개를 겸임하고 있는, 두 개 다 품고 있는 존재가 아브라함의 전쟁에서 일어납니다.

창세기 14장 17-19절에 보게 되면, 4대 5로, 5대 4로 소돔과 고모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 살기 좋은 땅이었어요. 하늘나라로부터 유황불 받기 전에 최고, 가장 땅값이 오른 지역이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거기는 물도 좋았고요, 목초지도 있고, 살기 좋은 덴데 그걸 어느 인간인 들 탐을 내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다섯 종족과 그리고 네 종족, 총 아홉 부족이 동원되어서 5대 4로 편 갈라서 대판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 싸움에 누가 휘말렸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휘말렸습니다. 조카가 사로잡혔어요. 왜 휘말렸는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조카와 같이 오면서 조카와 헤어질 때 “너 어느 땅 할래?” 하니까 조카가 보니까 좋은 땅이 있거든요. “나 소돔과 고모라 할래.” “그래? 나 그러면 반대편 내가 할게.” 그래서 반대쪽이 뭐냐? 현재 이스라엘이고 저쪽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거예요.

그때는 소돔과 고모라가 어느 정도로 좋으냐면 마치 에덴동산과 같았어요. 에덴동산만큼 좋았던 땅이었습니다. 거기서 휘말렸는데 창세기 14장 14절에 조카가 사로잡힘을 아브라함이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그리고 다른 민족, 동맹한 민족도 있어요, 13절에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이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싸움 해가지고 드디어 조카를 빼냈습니다.

조카 빼내서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적들의 탈취물과 함께 올 때입니다. 17절에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전리품) 십 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멜기세덱이 누구냐 하면, 왕이에요. 살렘왕이니까 예루살렘의 왕이에요. 왕인 동시에 제사장입니다. 겸직하고 있는 거예요. 왕이면서도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멜기세덱이라는 존재가 왜 갑자기 여기서 등장하느냐? 그것은 이번 아브라함의 전쟁이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배후에서 도와줘서 이기게 한 전쟁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쪽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저쪽은 인간들끼리의 집단들인 거예요. 하나님, 하늘과 인간의 집단,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에 아브라함이 그 경계 지점에 놓여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전쟁터에 아브라함이 불쑥 거기에 말려들고, 끼어들고, 나타나게 된 겁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기존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그 신분이 어떻게 왕 노릇하는 신분으로 전환되는가, 그 절차를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 절차를 살펴볼 때 이 땅에서는 뭐냐면 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제사장이 되었다가 그다음에 하늘나라의 왕으로 전환 되거든요.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받은 사람이 이 땅의 제사장 노릇을 하고 하늘나라의 왕 노릇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노릇하고 왕노릇한다는 그런 인간,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한다는 어떤 증거라도 있느냐?

있습니다. 누구? 멜기세덱. 막 결혼한 새댁 말고 멜기세댁이에요. 멜기세덱이 그 증거가 되는 거예요. 멜기세덱이라는 존재, 그 사람이 하늘과 같이 중첩됐다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납득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나옵니다.

7장 3절에 보면, 7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절에 보면, 3절에 보면 나와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시작도 없고 끝이 없습니다. 이걸 불멸이라고 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건 뭐냐 하면, 이 땅의 모든 세상은 창세기의 시작한 게 있고 마지막 종말의 끝이 있습니다. 이 땅의 시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반면에 하늘에 속한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시간에 속해 있는 인물, 멜기세덱이에요.

그 인물이 이 지상에 속한 아브라함과 만납니다. 만났을 때 먼저 하늘에 계신 멜기세덱 쪽에서 하늘의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형, 인간형은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조건에 합당해야 하늘나라에 소속이 될 수 있어요. 그 하늘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그쪽에서 먼저 지상에 소속되어 있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요. 제사장 역할이 그거니까 복을 빌어요.

복을 빌게 되면 그걸 복 받았다는 증거로서 아브라함이 뭘 보여주게 되느냐 하면, 자기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이건 소득의 십일조가 아니고 전쟁터에서 적을 이겼던, 그래서 획득한 그 전리품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모든 전쟁은 하늘로부터 시작해서 하늘의 승리로 마감되었다는 거죠. 하늘의 전쟁이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해서 지상의 전쟁으로 번졌다, 이 말입니다.

그런 지상의 구조는 뭐냐? 왕 대 왕, 왕과 왕으로 전쟁하는 구조로 하나님께서는 지상을 그렇게 편성시켜 놓은 거예요. 이 지상의 모든 것은. 지상의 인간들은 본인 개인으로 산다고 생각하죠. 인간은 개인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나 혼자 착실하고, 나 혼자 부지런하고, 나한테 착하게 살면 되잖아.’ 그게 너무나 세상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은 하나로 통합돼 있어요. 뭐냐 하면, 왕으로 통합돼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최고 권력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을 찾으러 왔다가 중간에 누구한테 걸렸어요. 누구에게 걸렸냐 하면, 지상의 헤롯 왕에게 걸렸거든요.

거기서 동방박사가 경험한 것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왕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하나님의 왕 되심과 또 하나는 지상은 그 왕 체제 안에 모든 개인이, 개체가 이미 갇혀 있는 그런 꼴이 된 거예요. 동방박사는 하늘의 왕,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를 만나러 오면서 그걸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왕이 서로 좋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고 전쟁, 대적하는 관계에요. 동방박사가 헤롯왕에게 걸리고 난 뒤에 동방박사는 이미 죽은 존재였어요. 왜? 헤롯이 지시했거든요. “죽여라. 동방박사 죽여라.” 그런데 이 동방박사가 헤롯이 자기들 죽이려고 하는 줄도 몰랐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다른 길로 가거라.” 이래서 빠져나왔거든요.

동방박사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느냐? 동방박사는 누구하고 연계된 사람이냐 하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태어난 그 유대인의 왕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빠져나온 거예요. 화가 난 헤롯왕이 예수님이 태어났던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였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켰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왕의 횡포를 벗어날 위인이 없어요. 왜? 두 살 밑의 애들의 부모들이 애 키울 때 이 애는 왕의 아기라는 생각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부부가 낳은 내 자식이죠. 내 거에요. 내 자식이에요. 내 자식인데 내 자식을 내가 잘 키우고 싶어요.

그런데 누가 죽였습니까? 유대 나라의 왕이 죽였어요. 유대 나라의 왕이! 태어날 때부터 나라에서 죽이면 죽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 처지, 그런 관계에 놓여있어요. 나이 스무 살 되면 또 누가 죽이는가? 나라에서 그냥 논산 훈련소 보내서 죽여 버리죠. ‘아이고, 이거 스무 살까지는 내가 키웠습니다.’ ‘안 돼, 저리 가.’ 강제로 논산 훈련소 가게 되면 머리 확 깎아버리죠.

논산 훈련소 왜 갑니까? 전쟁하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전쟁하기 위해서. 전쟁 내 뜻입니까? 개체인, 개인인 내가 전쟁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까? 국제 정세가 그렇게 바뀌면 전쟁할 수밖에 없고, 전쟁에 귀한 내 자식, 돈 강제로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좋다고요? 천만의 말씀, 모든 걸 다 빼앗기죠.

인간의 역사에서 왕이라 하는 것은 지상의 아버지예요. 어릴 때 아버지 있지만 커서도 아버지예요. 이 말은, 왕과 운명을 함께 해야 되는 것이 개인의 운명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어요. 국가에 소속돼야 하고 국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왕이 와서 나의 모든 것을 죽이고 다 뺏어가요.

어쨌든 소속돼야 해요. 어떤 이 세상이라는 왕국에 소속되어서 구차 없이, 어쩔 수 없이 왕이 전쟁하면 같이 울며 겨자 먹기로 전쟁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왕 패배하면 우리는 같이 다 노예가 돼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보여줍니다. 바로 왕과 모세의 대결. 애굽 나라 백성들 각각 가정의 맏이들이 있어요. 무슨 죄가 있습니까? 바로 왕이 모세 건드려 버리니까 어느 날 귀하게 키웠던 우리 장자, 맏이, 맏아들이 어느 날 밤에 자고 일어나니까 이미 죽었어요. 누구 때문에? 바로 왕이 모세에게 깝죽거리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애굽의 모든, 많은 가정이 있지만 그 장자의 운명은 바로 왕이 하나님 쪽에서 보낸 자에게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결정 나버리는 겁니다. 그게 지금 이 구조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구조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에 세례 요한 등장해서 하나님 하는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세례 요한과 누가 대결하느냐? 헤롯왕과 대결했습니다. 헤롯왕은 세례 요한의 모가지를 쳐버렸어요. “너는 너의 나라로 가. 이 나라는 내 거야.” 거기에 대해서 누가 감히 반박합니까? 권력은 헤롯왕이 쥐고 있는데요. 우리는 잘못 생각했어요. 내 인생은 나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신이 있고, 악마가 있고, 이 세상에 왕이 있어요. 우리는 구차 없이 그 왕의 종으로 살아온 거예요. 우리는 좋든 싫든 이 세상이 잡아당기는 그 흡입력에 우리는 빨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통령 말고 왕이 어디 있느냐?’ 왕이 왜 없어요? 있지요. 건축왕, 빌라 왕. 경제 상황에서 가진 자가 왕입니다. 못 가지면 노비예요. 69시간 일해야 해요, 한 주간. 애 키우는 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아요. 경제 왕들이, 재벌들이 어떻게 하고 돈 많은 나라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정 경제가 파탄 나느냐, 일어서느냐가 완전히 결판납니다.

멕시코는 43%가 극빈자고요, 아르헨티나는 38.4%가 극빈자예요. 한 달에 십만 원 가지고 살아요. 왜 그런가? 재벌들이 국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 때문에 그래요, 부자들이. 나라에 돈이 없어요. 이게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악마의 이 세상은 돈이라는 어떤 흡입력이 있어요, 진공청소기 같아요.

가정에서 동화책만 보면서, 백설 공주만 들으면서 살아왔던 걔들이 세상에 나가면 위이잉~! 하는 세상의 경제, 자본주의가 당기는 그 흡입력에 쭉 빨려 들어갑니다. 빨려 들어가면 거기 는 믹서기 안이에요. 믹서기 안에 보면 날카로운 칼날이 춤을 춥니다. 그 흡입구 중심으로 안 빨려가려고 버틴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세상은 잡아당기면 거기에 와서 우리의, 나의 체면과 위신과 자존심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리고 말아요, 가루가. 손모가지 다 날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자본이 춤을 추고, 돈이 춤을 추는 그 돈의 칼날에 우리의 모든 게 다 날아가요.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왜 이렇게 됐는지, 나는 행복 하고 싶고, 나는 잘 살고 싶고, 나는 안 아프고 싶은데 왜 이렇게 됐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우리는 벽 안에 갇힌 채 살아오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빼내 주겠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주께서 준비한 것은 왕 노릇이에요. 그런데 탈출할 능력이 없네, 우리가. 벽에 갇힌, 콘크리트 벽 안에 있는 빈대가 빠져나옵니까? 걸쭉한 페인트 안에 있는 벌레가, 그 페인트 통 안에 있는 끈끈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요. 몸부림치면 더 꼬이는데요?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썼는가, 멜기세덱 안에 있는 신분을 둘로 분리시키는 거예요. 왕과 제사장직으로 분리시키는 겁니다. 분리시켜 놓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을 알게 만들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 너희는 제사장 나라에요. 제사장 나라의 핵심 지파가 뭐냐? 레위지파가 돼요. 레위지파만 제사장이 돼요. 레위지파가 제사장이 되는데 그것은 언제까지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안에서 그들은 제사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7장 4절부터 보게 되면, 여러분은 지금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절에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여기서 가장 어려운 말은 ‘허리’에요, 허리. 레위지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허리 안에 들었다는 겁니다. 마치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 안에 들어있는 군사들처럼. 아브라함이 있을 때 이미 거기에 뭐가 들어있었는가? 장차 태어날 레위 지파도 아브라함 안에 이미 잠복 돼 있었다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토해내도록, 앞으로 아브라함의 후 역사 가운데서 레위 지파가 나오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 이후에 나오는 그 역사가 어디로 원천, 통합되느냐면, 아브라함과 하늘에 속한 인물, 멜기세덱과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상황 안으로 모든 것을 거기에서 다 빨아 당기는 거예요.

이거는 하늘나라에서 작동하는 진공청소기에요. 이 세상에서는 악마가 결정하는 그 운명, 이 세상의 왕이 결정된 운명 안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전부 다 빨아 당겨져서 매이듯이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강력한 흡입력이 있는 청소기, 믹서기라 해도 되고, 그 청소기를 준비했는데 그게 멜기세덱 청소기에요.

멜기세덱은 이중직책을 가지고 있어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고 제사장인 동시에 왕입니다. 왕은 하늘의 최종적인 것을 이야기한다면 제사장은 이 지상에 멜기세덱이 가지고 있는 직분 중에 분리되어서, 왕인 동시에 제사장으로 이 땅을 사시던 분의 등장이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서, 그 후손을 따라서 이 땅에 누군가가 오신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 때 멜기세덱에 붙은 아브라함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것이 길게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있냐면, ‘제사장-제사장-제사장-제사장……’이 연속되는 겁니다. 어디까지? 율법이 주어진 데까지 계속 엿가락처럼 늘이다가 율법에 따라서 레위 지파는 ‘제사장-제사장……’ 하다가 지파가 레위 지파에서 뭐로 바뀌냐 하면, 유다 지파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율법의 기능은 스톱, 여기서 다 끝났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히브리서 7장 11절에 나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얻을 수 없다는 뜻이거든요,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라고 물어요.

하나의 지파, 레위 지파로 시작했지만 다른 지파로 이게 바뀐다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바뀌지 왜 레위 지파가 있느냐? 레위 지파를 통해서 ‘누가 십일조를 주고 누가 십일조를 받는다’를 위해서는 레위 지파가 필요했던 거예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났다는 증거가 뭐냐? 한쪽은 복을 이미 주었고, 아브라함은 승리했고 아브라함이 승리했다는 표시로서 십일조를 드렸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십일조를 받는 쪽이 있을 거고, 하늘 측이죠, 십일조를 드리는 측은 지상 쪽이에요. 십일조 받는 것과 십일조 드림으로서 그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하늘나라의 요소가 지상에 있는 악마의 세계에서부터 이미 나와버린 상황을 그렇게 조성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니까요.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니까. ‘이스라엘’의 뜻은 싸운다는 뜻이에요. 다른 민족과 싸우는 민족이거든요. 이 세상의 인간들 세계 속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싸우되 한 인간은 하늘나라에 속해야 되고 한 인간은 지옥 가야 될 이 세상을, 이스라엘 민족의 실존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겠어요? 성경이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제고 실재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부를 보자는 겁니다. 내부에 열두지파 가운데 유독 튀는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 왜 두 개 있느냐? 레위 지파의 특징은 나머지 열한 지파한테 전부 십일조를 받아먹는 지파에요. 땅이 없는 대신 땅을 가진 것에서 다 받아먹어요.

받아먹는데 이 레위 지파가 받아먹는 십일조는 레위 지파가 받는 게 아니고, 이미 레위 지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속했다 이 말이죠. 허리에 속했다는 그 안에 통하는 입장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그 상황이 레위 지파를 통해서 끊어지지 않고 이스라엘에 이어지는데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제사장까지만 이어져요.

그러나 제사장에서 머물면 안 되겠죠? 왕으로 전환되는데 여기는 뭐냐? 레위 지파 율법에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을 했다면 “여기까지 너는 그 지파로 그걸로 그만, 이제 됐어. 그만 됐어.” 그다음 지파가 뭐냐? 멜기세덱 반차, 여기서 반차라 하는 것은 반열, 계통, 멜기세덱 반열 통해서 지파가 레위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전환된다는 겁니다.

13절에, 히브리서 7장 13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 하도다” 주님이 등장해요. 주님은 의도적으로 레위 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에서 온 거예요. 유다 지파는 왕 지파에요. 다윗처럼.

왕이 뭘 만나러 가느냐? 제사장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그동안 수고했다고. 수고했지만 제사장 지파의 역할은 그것에 네가 온전치는 않다. 왜? 이유가 뭐냐?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키거든요, 율법에 속해있다는 이유때문에 온전치 않은 거예요.

그러면 율법에 속하지 않는 당신은 뭐냐? 율법보다 더 윗선에 속하죠. 그 윗선에 속하는 게 뭐냐? 히브리서 6장 14절 15절 16절 17절에 나오는 게 그게 바로 맹세입니다. 약속입니다. 쉽게 간추려 말씀드리면, 복음은 인간을 빼고 율법과 만납니다. 인간은 빠져요. 맹세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맹세하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6장 13절에서 17절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면서 그 맹세한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에서 그 맹세를 아브라함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맹세의 성취물로,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6장 13절에서 17절까지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그래서 이 맹세하신 분의 맹세를 아브라함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지키기 때문에 맹세는 변하지 않는다, 고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맹세했다는 증거가 히브리서 6장 20절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하는 이 대목입니다. 이게 6장 마지막에 나와요.

성경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줄 몰랐죠?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습니까? 우리는 지금 돈의 노예가 돼 있기 때문에 정신이 벽 속에 있는 상황에만 정신이 팔려서 우리의 벽 바깥, 우리가 탈출할 수 없는 벽 저쪽 세계의 사정을 전혀, 깜깜히 몰랐던 거예요. 전혀 몰랐던 겁니다.

토요일 날 집에 있는데 딩동! 하고 누가 눌러요. 나가보니까 “절에서 왔는데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해요. 복 이야기하면 통하는 줄 알고. 성경에서의 복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한 성과가 있는가, 그게 복이에요. 그게 원형이거든요.

그래서 성도한테 복은 뭐냐? 성도를 헤쳐보는 거예요. 해부하고 수술해서 네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맹세한 덩어리가 너한테 들어있는지를 헤쳐보는 거예요. 해쳐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제가 지어냈습니다마는, 좀 억지 가설로 지어내 봤습니다만, ‘부.무.떨.깨.’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부.무.떨.깨.’. 제가 지어냈으니까 여러분은 모르는 게 당연하고요. ‘부서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깨지는 것.’ 이게 복이에요.

인생, 우리 인생. 주님이 와서 부서지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들고, 떨어지게 만들고, 깨어지게 만들어요. 왜? 그래야 헤쳐지니까. 이게 호빵인지 호만두인지 알려면 밀가루를 헤쳐봐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안을 다 분석해서 다 뜯어내는 거예요, 일일이.

그래서 성도의 삶은 뭐냐? 누가 함부로 해도 상관없는 나, 어떤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는 나. 이걸 한 자로 이게 복입니다. 그런데 딩동~! “복 받으세요.” 절에서 와 가지고.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어요, 이 땅에. 제사장들이 율법을 통해서 제사장이라는 특수한 직책을 하나님께서 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사장들의 특징이 뭐냐? 제사장들의 특징은 처녀와 결혼한다는 거예요. 레위기 21장 13절에 보면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지라.” 14절 “과부나 이혼 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제사장이 처녀와 동격이라는 뜻이에요. 처녀의 특징은 뭐냐? 일체 인위적인 요소가 아직 도달되지 않은 그런 사람이 처녀입니다. 처녀는 기원적이고, 시원적이고, 영어로 하면 ‘오리지널(original)’이에요. 처음 있는 그대로, 처음 자리.

그래서 제사장의 역할은 뭐냐면 인간으로 하여금 처음 자리로 데려가는 역할이 제사장 역할입니다. 처음 자리를 조성하는 역할이에요. 하늘나라가 처음 시작하는 그 처음 자리가 제사장입니다. 그럼 제사장이 하는 일은 뭐냐? 죽음을 조성하는, 죽음을 생산하는, 깨끗한 죽음을 생산하는 자들이 제사장들이에요, 그 당시에. 깨끗한 죽음.

죽음이 이스라엘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진공청소기 역할을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깨끗한 죽음으로 빨아당기는 흡입력 역할이 제사장의 성소 일, 성전의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죽여줄게.” 죽여주는데 그냥 죽는 것은 더러워서, 더러운 죽음이니까 인정 안 해요.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죽여주십니다.

‘부.무.떨.깨.’ 부서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이 걸친 것 다 떨어지고요, 깨어지고. 명품 걸친 거, 가방, 샤넬, 전부 다 떨어지고 그리고 무너지고. 와장창 다 무너지고. 성도의 목표는 패배하는 데 있습니다. 실패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목표에요. 그런 성도보고 딩동, 복을 받으시라니까,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나와가지고 그 사람이 총회장 됐습니까, 부자 됐습니까? 비리비리한 건 또 마찬가지예요. 아무 뭐 세상 것으로 호강한 적이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뿐이에요. 벽 속에 갇혀 있다가 벽 밖으로 탈출된 것,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그 신분이 뭐냐? 제사장, 거룩한, 자신의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참여한 제사장으로서 참여된 자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그 나사로가. 그다음 차례는 저와 여러분 차례입니다. 탈출이에요. 어떤 사람은 묻지요,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뭘 요구합니까?” 뭘 요구해요, 그냥 예수 믿는 거죠. 예수 믿으면 영생 얻잖아요. 예수 믿는 거예요. 그럼 역할은? 역할은 성도 역할이 아니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16절부터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거예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데 그게 요한계시록에 5장 10절에 보면 그냥 영접했으니 가만있는 게 아니라 지상을 왕으로 통치하는 겁니다. 저희로 나라와 제사장 삼으시고 하늘나라 보좌에서 세상을 주님과 더불어 통치하는 왕 노릇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밖에 없어요. 왜? 마귀가 그걸 시키니까요. 많이 가져야 되고, 많이 알아야 되고, 권력 쥐어야 되고, 모든 것이 이 세상 악마는 악마가 있는 자리로 잡아 당겨요. ‘더, 더, 더, 더, 열심히 해!’ 잡아당깁니다. 이건 뭐 믹서기에요. 잡아당기면서 빨아 당겨요. 인간은 거기서 안 빨리고 못 견딥니다.

그 중 하나가 이스라엘에 나타난 사람이 누구냐? 사울 왕이에요. 사울 왕은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이에요. 왕이 되고 싶어 환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 노릇하는 사람이에요. 왕이 아니고 왕 노릇하는 사람이에요. 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죄인 중에 태어난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왕이고 자시고 그건 내 소관 아니고 나는 그냥 죄인일 뿐이죠. 죄인은 율법에 의해서 제사장과 만나야 돼요. 제사장과 만나서 나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끝나면 안 돼요. 나의 죽음이 제사장으로 하여금 제사장 역할을 하도록 재료로 거기에 흡입돼야 돼요. 빨려 들어가야 돼요. 너는 죄인이라는 그 말에 빨려 들어가야 돼요.

세상 사람들이 지옥 가는 이유는, 자기가 죄를 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성도는 율법이 와서 계속 죄를 발굴하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겁니다. 죄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말씀이 와서, 말씀과 연계해서 죄라고 할 때 ‘말씀이 나도 어느 구석으로 당기고 있구나. 나는 흡입되고 있구나.’ 어디로? 제사장으로.

그 제사장이 누구냐? 십자가죠. 주님의 영원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강도가 되어서, 세리가 되어서, 창기가 되어서. 부자를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전부다. 그걸 우리가 눈이 감겨서, 악마 때문에 눈을 못 떠서 우리가 이 벽 속에 갇혔기 때문에 자기만 착한 줄 알고, 자기만 성실하고 자기만 이 땅에서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 자신이 주님 만나서 모든 걸 파괴 되도 마땅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에 보면, 사무엘이 와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6절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 이다.” 지금 사울 왕은요, 자기가 왕 안 된 이유를 몰라요. 왜? 비밀이기 때문에 몰라요.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는 이유를 알아요. 왜? 자기가 모체의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주님의 왕 노릇을 죄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해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나님이 다 이룬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제사장 일도 주님이 주님하고,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완성된 거고, 내가 왕 노릇하는 것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결과물로 내놓은 것이 우리가 왕이 됨을, 그래서 우리는 오직 왕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있음을, 주님은 왕인 것을 알려주는 그것이 이 땅에서 성도의 왕 노릇이에요.

거룩한 그분의 도를 선전하게 함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너는 내 소유된 백성이니까 그분의 복음을 전하게 함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에요. 우리가 부지런히 매일 같이 죄를 짓는 그 외에는 없습니다. 원 없이 실패하시고 원 없이 무너지시고, 나중에 천국 가서 ‘아, 나 무너질 거야.’ 하지 마세요. 지금 기회 줄 때 무너지고, 깨어지고, 떨어지고, 부서지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 갇혀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나만 착실하면 만사 복 받은 줄 알았습니다. 이게 지옥에 갇혀 있는 것도 모르고 남에게 칭찬 들으면 성공한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주여, 말씀으로 ‘나오너라.’ 하는 그것이 실효성 있게 탈출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탈출되고 보니 왕이고 제사장 나라인 것을 이제는 눈을 떠서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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