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류의 구원
2023년 3월 29일 본문: 스바냐 2:8-11
(2:8)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2:10)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
(2:11)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모압과 암몬이 이스라엘에게 붙여있어 수시로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는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 세 민족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해서 생겨난 민족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사건이 아니면 생겨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모압과 암몬도 소돔과 고모라 땅의 불심판이 없었으면 생겨날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창 19:35-38)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실제성을 남기기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즉 온전한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죄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언약의 실제성이 아브라함과 연결해서 주어지는데 아브라함과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동거 중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땅 심판 사실을 미리 알고 조카를 걱정해서 심판을 보류 내지는 철회를 위한 기도를 드리면서 흥정에 나서게 됩니다. 의인 50명만 있어도 그 의인을 향하여 의로운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것을 하나님의 옳으심과 배치된다는 논리를 아브라함이 제시합니다.
이 의인 숫자를 차츰 줄여나가서 최종 10명의 의인만 있어도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의로운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의인도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단 한 사람은 조카 롯을 불심판에서 건져내시는 이유는 ‘아브라함 언약’을 후대까지 이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필히 의인에 대한 구원의 요소와 죄인에 대한 가차없는 심판의 요소, 둘 다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롯과 그 가족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는 구원받았지만 그 후손은 영원히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저주받고 심판받는 요소 기능을 담당해야 합니다.소돔과 고모라 불심판 와중에서 심판받는 이유가 롯의 처를 통해서 보여집니다.
이 롯의 처의 태도는 나중에 모압이나 암몬이나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현재 자기가 자기로 사는 것에 대한 내부적 근거가 다 과거의 것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의 ‘나’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련없이는 형성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불심판 일어났을 때,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롯의 가족 속에 ‘과거의 자기 것에 대한 미련’이 심판의 요소가 된다는 그 사실을 내용에 포함시킨 그런 아브라함 언약을 계속 이어가기 위함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떠나 온 롯의 가족은 아내의 자리에 두 딸에 들어서서 후손을 잇게 됩니다. 비록 롯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구원되었지만(창 19:29) 그것은 아브라함이 언약이 갖는 심판성이 후대 이스라엘 나라 의 내용이 되어 계속 마지막 때에 퍼지기 위한 조치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을 험담해야 합니다. 이 두 민족은 저주받기 위해 아브라함 언약(=이스라엘)과 관여하게 되지만,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구원되기 위해 망해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망하므로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내부에 들어있는 내용이 이방요소가 아닌 다른 요소가 담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완성입니다. 새언약의 달성입니다, 망하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겪여온 과거사가 자리잡아 자신을 계속 유지, 보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의 존재방식과 동일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삿 10:6-7)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으로 공격케 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대처방법은 잡류의 대장인 입다를 통해서 암몬 자손의 공격에서 구원코자 했습니다. 그런데 입다 본인 자체도 그 당시의 이스라엘 정서에 푹 젖은 자라서 전쟁 승리 후의 허세에 미리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하신다면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희생물로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승리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무남독녀였습니다. 입다는 그 잔인한 낭패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를 가장 환하게 축하하고 싶은 날에 자기에게 가장 잔인한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주저없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라고 말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의 내부는 잘난 척하는 인간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에서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즉 구원이란 모든 인간을 제거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없나니 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죄도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약에 의한 구원 상대자는 언약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언약에 의한 심판은 하나님의 의에 조금이라도 흠이 들어가게 되면 사정없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유일한 의인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받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이 예수님의 이름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당연히 이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매일같이 자신의 의가 삭제당하면서 주님의 의만 자랑하는 자가 됩니다.
이들만이 약속의 땅, 곧 천국을 차지하게 됩니다. 롯의 처처럼 자기 것에 미련갖고 주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지 않는 자들은 결국에는 언약에 의한 심판 대상으로서 이스라엘들이 가는 그곳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장차 마지막 때(신약 시대)에는 제대로 새언약을 알고 주님을 아는 자들만 하나님의 일관된 활동을 알고 경배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허세를 앞장세우며 사는 불량배에 지나지 않는 저들이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 내부를 채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스바냐 2장 8-11절(잡류의 구원)2303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2장 8-11절까지입니다.
스바냐 2:8-11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주요 세 민족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모압, 또 하나는 암몬, 마지막 하나는 바로 ‘내 백성’이라 하는데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내 백성, 이렇게 세 부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심판사건, 불 심판 사건으로 인하여 세 민족으로 나눌 것이 아니고 모압과 암몬을 하나의 민족으로 뭉쳐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압과 암몬이라는 민족이 어떤 일이 없었으면 등장하지 않는 민족이에요. 출애굽 없었으면 이스라엘이 등장하지 않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으면 등장하지 않을 민족이 모암과 암몬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일어났던 이야기는 창세기 19장에 나오고 모암과 암몬은 언제 등장하느냐? 그 전에는 그 원조가 없어요. 뿌리가 없습니다. 원래 시조가 없어요.
창세기 19장 35-38절까지 후딱 제가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유월절이 없으면 이스라엘 나라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상개입,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난 민족이 모압과 암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압과 암몬과 비교되는, 대척, 대조되는 자리에 있는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유월절 사건, 곧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하나님이 이 땅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과 암몬, 모압, 세민족의 공통점은 그 시초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있는데 차이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시작은 유월절로 인하여 구원받는 민족의 시작이라면 모압과 암몬은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으로 인하여 발생된, 심판받기 위한, 저주받기 위한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더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어떻게 아느냐?” “모압과 암몬 보면 되잖아.” “하나님은 구원하는 하나님이다.” “어떻게 아느냐?” “이스라엘 보면 되지요.” 하나님이 시작한, 출발점이 되는 하나님의 그 언약 안에는 구원도 있고 심판도 있고 둘 다의 처음, 스타트,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한꺼번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암몬과 모압, 이스라엘, 세 나라는 모두 그 시작점이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민족,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그 언약인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언약을 무슨 언약이라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한 적이 있었거든요. 바로 소돔과 고모라 심판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아주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이겁니다.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에 의로운 백성이 있는 도성은 절대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그 원칙을 아브라함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 원칙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보내서 ‘소돔과 고모라에 죄가 심해서 내가 그 도성을 심판하겠다.’라고 창세기 18장 20절에 나와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이렇게 나오니까 아브라함이 생각해 봤어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복된 사람이고 자기 가족들, 후손들도 복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될, 복을 받아야 될 민족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소돔과 고모라에 누가 가있느냐 하면, 자기 조카 롯이 거기 가 있어요. 둘 다 가축 떼가 많아서 어떤 지역을 선택할 때 목초지가 있는 곳, 지금의 요르단입니다, 그쪽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 자기도 그쪽을 갖고 싶었지만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으니까, ‘가축 키울 목초지가 있는 낮은 지역이냐, 아니면 그 지역 말고 높은 산지냐?’ 둘 중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선방 날렸지요. 먼저 선택했습니다. “나 목초지 할래요, 삼춘!” 삼촌도 아니고 “삼춘, 내가 저 목초지 할래요.”
“그래? 그렇다면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게.” 그래서 산지, 지금의 예루살렘인데 그쪽은 산지입니다. 높은 산들이 있어요. 지금의 예루살렘 주변 그 동네, 벧엘 이런 데가 다 높은 산이에요. 그쪽에 아브라함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에 떨어지느냐? 자기 조카가 살고 있는 그 목초지, 그 목초지가 너무나 토질이 좋아서 아홉 민족이 오글오글 모여 있었던 거예요. 대구 같으면 동성로쯤 되는 곳이에요 서울 같으면 강남쯤 되는 곳, 땅값이 제일 비싼 그 동네, 좋은 것을 어떻게 알아서 거기가 다 서로 좋다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이 심판 내리겠다,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 된 입장, 그리고 같은 언약의 가족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심판을 취소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설마 아무리 나쁘다, 나쁘다, 하지만 죄 많다, 많다, 하지만 의인 50명은 있을게 아니냐?’ 이렇게 기도해서 처음부터 의인 50명으로 심판 스톱, 해 달라 했어요.
경매 들어가는 겁니다, 경매. “자, 50이면 되었습니까? 50!” 하나님은 “50 없다.” “45! 되었습니까?” “45, 없다.” 단가 낮췄습니다. “의인 40명! 있다면 멈춰주세요.” “없다.” “30명만 있으면 스톱해주시겠습니까?” “없다”
아브라함이 자꾸 기도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의로운 분인데 의로운 자가 있다면 아브라함 자기같이 복된 자가 있다면 심판 대상이 아닌 자가 있다면 심판 받지 말아야 될 자도 같이 심판 받는 이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과는 틀린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성이 깨진다는 이 말입니다. 일관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만 골라서 치지 의인은 심판하지 않는다, 는 이 명쾌하고 확고한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거기서 내 조카가 있는 동네는 심판이 스톱되지 않겠는가?’ 싶어서 20명으로 줄였습니다. 하나님은 ‘20명도 없다’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브라함도 양심은 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하겠습니다. 열 명 있다면 심판을 멈추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10명도 없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어려운 거예요. 단 한명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이 단 한명도 없을 경우에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이 원칙은 요지부동 일관되게 계속되고 있었어요. 이걸 신약시대에 와서, 이 복음시대에 와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을만한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 가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이스라엘이 구약을 통과하면서 멸망당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는가? 하나님의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일관성, 의가 없는 죄인은 반드시 심판하고 멸망한다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 보기에 의인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롯은 구원받았잖아.’라고 여러분은 생각할거예요. 여러분, 롯이 구원받았다, 라는 생각은 뒤로 미루시고 하나님은 한명이라도 의인이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그 뜻에 의해서 소돔과 고모라, 다시 말해서 롯이 살고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가 기필코 심판, 그것도 강렬한 불 심판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먼저 생각해야 돼요.
어떤 결과를 미리 보는 것, 드라마 같은 것 먼저 끝을 미리 보면 재미없잖아요, 그렇게 결과 먼저 보지 마시고, ‘롯은 건졌잖아.’ 하지 마시고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 안에는 롯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단 한명도 의인은 없는 게 분명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그렇게 심판이 내려진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은 ‘의인 아니면 다 저주하고 멸망한다.’ 그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그러면 ‘롯은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전에 피했으니까 그것이 롯의 믿음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하겠지만 창세기 19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롯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한 거예요. 롯의 자리는 빠지고 거기에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줬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공유하고 있는 대표적 인간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언약을 존속시키는 취지에서 하나님께서는 롯을 건지는 겁니다. 롯이 건짐 받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언약은 하나님의 심판가운데서도 유지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취지를 이어가는 차원에서 롯을 건진 거예요.
더 어렵게 아주 단축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언약은 누굴 구원하느냐? 언약을 구원해요. 하나님은 언약을 구원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해서 삭제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은 자기를 구원해요. 이걸 신약의 다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은 누굴 구원하느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구원해요. 하나님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름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 안에 들어 있는 사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이름 되시는 예수님을 구원할 때 그 구원하는 이름 안에 그 백성이, 성도가 들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자기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해요. 주의 이름 앞에 인간의 이름은 삭제되어야 됩니다. 아담으로 흘러온 이름이기 때문에 삭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제거되어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된 자만 건지기 위해서 언약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 작업에 의해서 필히 동반되는 작업은 심판입니다. 구원되지 못해야 될 것을 다 털어내는 작업, 그게 심판이에요.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이 없었으면 모압과 암몬이라는 민족은 생겨나지 않았다고요.
아까 보셨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없었으면요, 어떻게 아버지가 딸하고 동침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 둘과 동침했고 딸들 각자에게서 태어난 그 민족이 모압이고 암몬이에요. 마치 이스라엘을 닮았어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언약속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이스라엘은 구원의 대상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의 대상이 되려면 이스라엘은 모압과 암몬과 더불어서 멸망해야 돼요. 이스라엘은 그 모압과 암몬을 통해서 그것을 배워야 됩니다. 왜 암몬과 모압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배워야 돼요.
모압과 암몬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 그것은 자기 엄마를 닮아서 그렇습니다. 롯의 두 딸의 엄마가 누구냐? 롯의 아내입니다. 롯의 아내가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올 때 같이 빠져나왔어요. 빠져나왔는데 그 때 몇 사람 빠져나왔느냐 하면, 네 사람 빠져나왔습니다.
사위 둘 있었어요. 원래 남자 셋, 여자 셋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벌써 두 명의 남자들, 롯의 딸들과 정혼했던 사위 둘은 벌써 빠졌어요. “장인어른 농담하지 마소.” 이래서 빠졌어요.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겼던 겁니다.(창 19:14) 오늘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다 그렇게 배우잖아요. 노벨상 탄 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요. 이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슬기롭고 지혜 있는 어른들을 다 피해 버리지요. 그들은 심판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어린애들한테 나타난다(마 11:25) 했잖아요. 그것도 택한 어린애들.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올 때 남자 셋인데 둘 빠졌으니까 한명 남았지요. 여자 세 명 따라 나왔어요. 그 셋 중에 하나, 롯의 처가 따라오기는 따라왔는데 뒤돌아보지 말라고 주님께서 당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도망하되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것은 의도적으로 롯의 처를 없애버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전 예언이었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한 그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악마와 결부해서 계산한 그 계산에 의해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심판기능 때문에 심판되어야 될 자가 누구냐를 찾아가는 언약입니다. “너 이러면 심판받는 줄 알지?”라고 하면서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들어버려요. 심판될 자를 심판되게 하기 위해서는 심판의 이런저런 조항을 걸어놓고 그 조항에 대해서 심판될 자는 그 조항의 권역,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롯과 롯의 처와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모압과 암몬의 그 모든 자손들, 그리고 이 땅 어떤 인류도 아브라함의 언약의 권역, 그 boundary(경계) 밖으로 벗어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언약 밖으로 아무도 못 벗어납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언약 밖으로 못 벗어났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놀러온 게 아닙니다. 할 일이 있었어요. 뭐냐? 언약을 다 지키는 거예요. 언약의 권역 바깥으로 벗어나지를 못해요. 언약 안에서 언약을 다 지켜내는 거예요. 언약은 뭐냐? 창세전에,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의논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그 때 있었던 언약, 창세전에 있었던 언약, 그 언약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 땅에 실현됩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고 현실이에요. 그 인류의 역사가운데서 롯의 처는 필히 뒤돌아 봐야 돼요. 롯의 처가 뒤돌아 봐버리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심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후대로→후대로 이전하는데 어떤 이전을 하느냐?
롯의 처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심판되는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롯의 처는 언약으로 말미암아, 언약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다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와 놓고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심판받는 자가 되어야 ‘언약 안에는 심판도 있고 구원도 있다’는 것을 언약이 전개되면서, 계속 그 취지가 유지되면서 그 후손들에까지, 마지막 때까지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 롯의 처의 취지를 누가 인계받는가? 바로 두 딸이 인계받는 거예요. 롯이 자기 아내와 동침해야 되는데 두 딸과 동침하게 됩니다.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술은 좀 끊지. 진즉 끊었으면……. 그래서 롯의 후손은 확정되었어요. 모압과 암몬 둘 다 저주받는 민족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확정되려면 그 모압과 암몬은 누구와 결부되어야 되는가? 하나님의 구원되기로 작정한 나라가 있어요. 처음에 이야기한 그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깔짝깔짝 늘 붙어 다녀야 돼요. 붙어 다녀야 언약 안의 두 가지 요소, 상반되는 요소가 함께 있음이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는 겁니다.
그러면 모압과 암몬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느냐? 망해버려야 되지요. 망해버려야 됩니다. 그게 열왕기하 3장 4절에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의 십팔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치리하니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이스라엘이 바알 신을 섬기게 됩니다. 솔로몬 이후에 그렇습니다. 남쪽도 그렇고 북쪽도 그렇고 마찬가지지요.
바알 신을 섬기게 되는데 4-6절에 보면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그 때에 여호람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서 온 이스라엘을 점고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당시에 이미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남쪽은 여호사밧 왕, 북쪽에는 여호람 왕인데 그 전 다윗시대 때는 모압이 조공을 바쳤어요. 다윗시대, 다윗언약 시대에 있어서 아브라함언약이 계속 계승이 되거든요. 전달, 전달, 되면서 다윗시대 때는 뭐가 우세하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받은 민족이 있잖아.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했잖아.’
그리고 언약이기 때문에 한쪽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승리하게 되면 그러면 이 약속의 땅에서 승리하는 이스라엘로 인하여 누가 저주받는 종이 되느냐? 보니까 모압과 암몬이에요. 뚜렷하게 언약 안에 있는 자기 역할이 이어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체가 되는 이스라엘이 주위에 있는 이방민족하고 다를 바 없이 바알 우상을 섬긴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겁니다. 여기서 좀 더 어렵게 하겠어요. 지금까지 여러분이 너무 쉽다, 하는 것 같은데 어렵게 가겠습니다. 왜 롯의 처는 뒤돌아봤는가, 하는 문제에요.
롯의 처가 뒤돌아본 것은, 인간에게는 자기 내부에 자기의 체험만 들어있게 되어 있어요. 왜 뒤돌아봤느냐, 라고 묻는 질문자체가 잘못됐어요. 인간은 자기의 것을 항상 기억해요.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왔지만 자기 과거의 기억은 소복이 어디 있느냐? 소돔과 고모라, 그쪽에 자기의 것이 다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어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결국은 자기 과거에 자기가 체험한 것과 닮아 있는 것들을 찾아서, 그 과거에다 붙여서 자기 인생을 꾸역꾸역 꾸려나가는 것, 이거 모든 인간이 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롯의 처가 뒤돌아본 것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고 뒤돌아보지 않는 그 롯이 신기해야 돼요. 롯은 자기가 빠져나올 때 자기 힘으로, 신앙으로 빠져나온 게 아닙니다. 천사가 질질 끌고 나왔어요. 안 나오려고 하는 거예요. 왜? 자기터전이 있고, 자기추억이 있고, 자기과거가 있고, 자기가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전부가 그곳에 있는데 그곳을 떠나면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했을 때 롯의 가정 다 같이 심판받았다.’ 이렇게 보시면 정답입니다. 롯을 건져낸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하기 위해서 뽑혀 나왔지 롯이 무슨 장래 계획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불난데서 하나도 못 건지고 몸만 다 나온 거예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 드리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왜 바알을 섬기느냐? 바알 섬기는 모압과 암몬, 이 이방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새로운 게 없어요. 늘 과거에 대한 집착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쌓아오고 노력했던 것에 대해서 그걸 잘 보호하고 지켜주는 하나님이 바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었어요.
이스라엘도 어느새 물들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역사가 얼마고, 우리 전통이 대단한데 하나님, 이 이스라엘 지켜 달라.’ 이스라엘 지켜달라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 지켜주면 뭐할 건데? 바알 지켜주면 뭐할 건데? 내 것이 남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멸망시키고, 모압 멸망시키고, 암몬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네 속에 네 것을 두면 그것은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아브라함언약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대전강의해서 ‘투명성’이라 했는데 예수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자꾸 예수님한테 뭐 달라고 부탁하는데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다 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줬다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피로써 나타난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줬다는 것은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은 다 줬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피를. 그래서 예수님은 맹탕이에요. 없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뭐가 있어야 주지요, 다 줬는데요. 제가 어렵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서 출애굽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내산에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 10, 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옷을 빨라고 했습니다. 내가 시내산에 등장할 때 입던 옷 그냥 입지 말고 옷 빨고 목욕재계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출애굽기 19장 22절에도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깨끗하게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으라. 이게 뭐냐 하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완벽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아요. 죄는 무조건 심판해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하는 자세가 의로워야 되고 깨끗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깨끗한 것을 건져요. 깨끗하지 않으면 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깨끗하냐? 깨끗하지 않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깨끗하지 않은데 왜 구원받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오시는데 그 언약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모든 자기 것을 다 없애버리지요. 아브라함의 자식 낳는 생식력도 없애버리고, 소위 축복이라는 것도 없애버리고, 아브라함 자신을 죽여 버려요.
그 이름 아브람을 죽여 버리고 아브라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지요. 아브라함 태어날 때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내용을 다음 언약, 아브라함언약의 준비된 다음 계승자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내부, 거기에 다 집어넣어 버려요. 이삭 때문에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요. 그게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다는 원칙입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에 나와요. 계속 후손, 후손, 이삭은 야곱을 통해서 복 받고, 야곱은 요셉을 통해서 복 받아요. 요셉이 국무총리 안 되었으면 전부 다 굶어죽었습니다. 요셉은 장차 오실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아요. 그 내용이, 내가 갖고 있는 그것을 심판해 버리고 심판하는 그 근거도 아브라함 언약안의 심판기능 때문에 우리를 폭파시키는 거예요.
왜? 우리는 의인이 없으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까 언약 안에 있는 심판 기능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해서 우리내부를 폭파시키고 폭파시키는 그 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온전한 의가 들어 있어서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의인되어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받지 못할 사람 모압과 암몬의 특징이 뭐냐? 우상섬기는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자기 것을 본인이 못 버리지요. 그걸 왜 못 버릴까, 하는데 인간치고 버릴 위인이 없어요. 주님의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내 것을 포기 못합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신약에 보면 나오지만 인간은요, 죄에 대해서 못 벗어나고, 율법에 대해서 못 벗어나고, 죽음에 대해서 못 벗어나고, 마귀의 힘에서 못 벗어나요.
그런데 성도는 한 가지 더 알아요. 그 어떤 인간도 아브라함 언약에서 못 벗어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못 벗어나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언약에 의해서 구원될 언약의 대상자입니다. 언약의 대상자, 하나님 아들이잖아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과 계약했어요. 다른 사람은 계약 안 했습니다.
계약방법은 “내 피를 마셔라, 내 살을 먹어라.” 이게 언약입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마태복음 26장의 마지막 언약, 언약은 그걸로 끝났어요.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언약은 우리가 언약상대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언약 상대자입니다. 성령은 ‘네가 언약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언약했다’는 사실, 예수님의 영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구경도 못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이 된 거예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언약 완성되었음’이 최종내용물로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잘릴 일만 남아 있어요. 죽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즐겁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롯의 처가 왜 미련을 못 버리는가?’ 자기의 과거를 못 버리지요. 그래서 누굴 만났는데,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만났는데 여자가 떠났을 때 남자가 하는 고백이 노래 가사에 나와 있어요.
상처만 남겨두고 떠나 갈 길을
무엇하러 왔는가
자꾸만 바라보면 미워지겠지
믿어왔던 당신이기에
난 당신만 믿었는데 당신이 떠나갈 줄이야!
2절 가사에
사랑했던 기억들이
갈길을 막아서지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있을 때
미련없이 가야지
미련없이 가야지
떠나더라도 당신과 사랑했던 추억만큼은 건지고 가겠다. 이게 <무정 부르스> 그 유명한 무정 부르스. 이 노래 들어보면 눈물이 좍……, 남자라면, 그것도 술 한 잔 먹고서, 많이 부르셨지요? 자기한테 미쳐 있는 거예요. 자기한테 집착하는 겁니다. 자기한테 미련 두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거 누가 여기서 자기 능력으로 여기서 탈출할 수 있습니까? 일본말로 ‘요시!(좋아) 내가 얼마나 성공하는가, 다 지켜봐! 지켜봐!’
롯의 처가 뒤돌아본다. 당연하지요. 미련은 지금 자기 쪽에는 없어요. 전부다 자기라고 느끼는 모든 추억, 기억은 저쪽에 있어요. 어디에?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요. 그걸 어떻게 떠납니까? 미련이 있는데요. 어쩔 수 없이 떠날 때가 있어요. 전쟁이 일어났다든지. 전쟁이 일어나서 온가족 다, 가족이 몇 명인지 일곱인지, 열 명인지 다 데리고 떠날 때 새로운 땅으로 떠나요, 새로운 땅.
성도한테는 새로운 땅이 없어요, 새로운 땅. 현재 이스라엘, 이단이지요. 이미 세상이 끝났어요.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데 아직도 이스라엘 땅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현 유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지방에서 팔레스타인과 맨날 싸우고 있는 그 나라, 그 나라처럼 자꾸 어떤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는 거예요. 새로운 땅을 위해서. 새로운 땅은 하늘나라가 땅이지 지금은 땅 없습니다. 그런데 열 명이나 되는 가족 죽 데리고 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모든 산을 오르며 높고 낮은 곳을 해매고
여러 길을 걸어도 알 수 있어요
모든 산을 오르며 여러 강줄기를 따라
무지개를 좆아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너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네가 사는 모든 삶 속에 있어요
네가 살아갈 동안 모든 산을 오르며
강줄기를 따라 무지개를 좆아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Climb every mountain
Search high and low
Follow every highway
Every path you know
Ooh, yeah
Climb every mountain
Ford every stream
Follow every rainbow
Till you find your dream
A dream that will need
All the love you can give
Every day of your life
For as long as you live
Climb every mountain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9)>에서 마지막 독일의 점령을 피해서 트랩대령이 온 식구 다 끌고, 나중에 이들이 합창단이지요, 다 끌고 오스트리아 산을 넘으면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가 이 노래에요. ‘Climb every mountain(모든 산을 넘으며)’ 모든 산을 넘으며.
오늘 여러분 들을 노래 두 개 드렸어요. <무정 부르스>하고 <사운드 오브 뮤직>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모든 산을 넘으며’ 너의 꿈을 찾으러 어디로? 그래서 그 가족이 미국 가서 합창해서 밥 먹고 살았어요. 탈출에 성공해서.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건너와서 다시 미국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가지고 그들은 먹고 살았습니다. 실화에요.
그러나 그러면 의인됩니까? 아니지요. 오늘 본문에서 스바냐 2장 11절에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그리고 모압과 암몬의 자손이 있었던 그곳은 9절에 보면 그들이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유다가 차지한다.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모압과 암몬 자손은 뭐가 되느냐? 그들은 9절에 보면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자, 그러면 모압은 그렇다 치고 끝으로 암몬은 어떻게 되는가? 암몬은 사사기 10장 8, 9절에 보면 암몬자손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그럴 때 공격하는 이유도 나와 있어요.
사사기 10장 6, 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여호와께서 진노하는 이유가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똑같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주변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공격하니까 이스라엘을 지킬만한 사람들이 적당하게 없어서 사사기 11장 1절에 보면 양아치, 조폭이지요, 조폭대장을 하나 떡 세웠는데 이름이 입다에요. 그는 맨날 잡류하고 같이 사는 불량배에요. 조직폭력배 대장을 왕으로 내세웠던 겁니다. 이게 대장이라고 얼마나 허세 쩝니까?
그래서 “이번전쟁에 이기게 하시면 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원래 길르앗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잘 안 섬겼어요. 이게 길르앗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본토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제가 전쟁 마치고 돌아올 때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희생제물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허세를 떨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의 공격에서 이겨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 하되 이스라엘을 다른 이스라엘로 구원해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그 내용물은, 입다라는 힘장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입다의 딸, 아무것도 모르고, 남자도 모르고 처녀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입다의 딸이 하나님의 이번 구원의 내용물로 들어갑니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큰소리치는 자들, 그 살아남은 자들의 집합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히려 또 잘못된 이스라엘을 꿈꾸고 자기 구원, 자기 존재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는 그 나, 과거에 이방민족 이겼다는 그러한 추억마저 부끄럽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희생자,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요, 조금이라도 손상나면 심판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어요. 마치 핵융합이론과 비슷한데요. 수소원자핵들이 서로 결합할 때, 핵입니다, 그때 생기는 질량결손이 바로 무서운 에너지로 나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오히려 의와의,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계약이어야지 거기에 잡류 같은 것, 티끌 같은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의 에너지로 제거하고 빼지요. 제거하고 심판해버립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이 세상의 잡류들한테 뒤섞여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멸망하는 것,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과 똑같은 심성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의, 나의 의, 나의 자랑거리, 나의 뽐냄을 성령께서, 이미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이니까, 그 언약께서, 그 심판의 언약께서 날마다 우리를 제거하고 삭제하는 방식으로, 내 것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내 구원자체를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주님과 하나님과 만나는 그러한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냐? 주의 이름으로 구원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식으로 구원을 이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언약 안에 심판요소가 들었던 암몬과 모압, 그리고 이스라엘, 하지만 이스라엘은 멸망당함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방식처럼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제거하면서 주의 몸으로 구원한다는 이 원칙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