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완성
2023년 4월 12일 본문: 스바냐 3:1-5
(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3: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그냥 인간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여타의 마을처럼 그냥 열심히 부지런히 살기만 하는 동네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평가를 받는다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 특이성을 결국에는 온 세상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특이성으로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루십니다. 어떤 식으로 다루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루살렘만’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고 다른 방식으로는 일절 알리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들 입장에서 특이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눈에 띄는 것들이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보이고, 자신이 열심히 농사짓는 농토도 보이고 자신이 평생 일구어낸 자신의 가정도 보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늘에는 하나님도 계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계신게 아니라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예루살렘도 귀하고 하나님의 율법도 귀하지만 세상에 몸담고 있는 자기 인생도 귀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내세우시는 것처럼 ‘예루살렘만!’이라는 점은 받아들이기 곤란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만 내세우시고 나머지는 가리시는 방식으로 특화해서 계시하십니다.
이런 기준을 내세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고 질책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현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후속 말씀을 거론하십니다. 즉 방백들(고위 공무원)이나 재판장이나 선지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을 소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훈계하고 가르치고 관리하고 실생활에 하나님의 법을 도입시키는 자들입니다.
문제는 이들로 인해 유대나라는 억울한 자들이 발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면서 자신들이 따로 살 궁리를 챙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이 모든 것을 커버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법 사이에 인간들이 융통성을 부릴 여지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게 충성과 봉사를 위한 법이 율법이기에 하나님에게 할 도리는 다하되, 법으로 다 규정하지 않는, 인간들의 자기 욕구를 충족시킬 여지를 발굴해내어서 그것을 통해서 그들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살찌울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하는 겁니다. 즉 자신들이 이 땅에 살게 되는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율법의 지적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과연 법을 아는 자들에게 그런 융통성을 허용했다면 결코 발생되지 말아야 될 현상이 유대나라에게 범람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예루살렘으로 획일화시키는 방식에 따르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될 일이 일어나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확고하신 뜻은, “나의 뜻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로 국한한다”입니다.
과연 예루살렘이 율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최종적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가복음 13:33-35에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즉 예루살렘은 놀랍게도 선지자들이 죽게 하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오직 예루살렘을 통해서만 계시한다는 것이 확인된 겁니다. 즉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현실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게만 온전히 돌리는 자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셉의 경우처럼, 사적인 꿈을 꾼 요셉이 점차 그 꿈으로 인하여 애굽의 지도자급과 접촉이 되고 결국에는 애굽 전체를 덮어버리는 꿈으로 완성이 됩니다.
이처럼 소위 유대나라의 방백들이나 재판장이나 제사장 참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의뢰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했다면 결코 예루살렘에서 선지자가 죽는 일을 없을 겁니다. 곧 이 세상은 인간들이 살기 위한 세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국정 지지율은 몇 %이었겠습니까? 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죽기를 바랍니다. 이런 요구에 누가 부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구약 선지자에게 이런 요구가 덮쳐진 자가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6:4-5에 보면,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선지자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신이 죽을 필요도 없고 살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 유대나라의 왕은 조금도 차질없이 참된 예루살렘, 곧 천국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지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이사야 심정이 된 성도는 이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자기 행위를 수시로 버립니다. 삭제해가며 삽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왕임을 인정했습니다.(요 18:33-37)
그렇다면 이제 예루살렘은 새로운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왕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겁니다. 그대로 천국은 새 예루살렘이 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참된 천국 백성은 더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믿지 않는 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전함이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게 주어짐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