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책임 없는 삶
2023년 1월 15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11-12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사도가 ‘피하라’하는 것은 ‘돈 사랑’입니다. 그리고 ‘취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입니다. 하지만 영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못 따먹는 것으로 따로 확고하게 언질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그런데 왜 이제와서 생명(=영생)을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조건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에게는 영생이 허락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로 간주해야 하는 근거를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내지 못하는 것, 주님이 오셔서 해내십니다. 모든 인간을 실패자로 만드는 작업은 주님의 몫입니다. 즉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확정되었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쪽에서 새로 만드신 인간이 있습니다.
그 새로 만들어진 인간은, 기존 인간의 책임 자리에 결합하게 됩니다. 그 일을 예수님 홀로 해내십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찾아가는 인간들을 죄인으로 해체시켜 버립니다. 이 해체과정에서 인간 내부에 어떤 괴물이 있는 지를 발견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 시험은 평소에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어떤 성향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떡으로 살고, 인기로 살고, 세상 권력으로 삽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먼저 찾아내십니다.
왜 이 작업이 필요한가 하면, 예수님은 생명이고, 그래서 인간들은 도대체 무엇과 둘러싸여서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되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과 돈, 생명과 인기, 생명과 세상 권력은 결코 상호 연결될 수 없는 성질임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돈이나 인기나 세상 권력으로 히히덕거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곧 생명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영생을 얻은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누가복음 2장에서 두 명의 선지자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요 다른 한 사람은 안나입니다. 이들은 결코 홀로 살 생각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고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주선으로 그들이 만난 자는 ‘아기 예수’였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9-32) 이들은 이 아기 예수께서 하실 일에 세상 것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만으로 충분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출산했습니다. 산모는 결코 자기 아기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산모가 어떤 아기에 대해서 내몰라라 하면 분명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닐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이를 찾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다나엘입니다. 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발언을 하실 수 있는 근거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이스라엘임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그러니까 나다나엘 안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 안에 나다나엘이 계신 겁니다. 이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찾으시는 것은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찾아내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고, 가는 모든 일이 예수님의 일이 됩니다. 요한복음 21:18에서, 베드로의 대미를 장식할 인생을 예수님께서 친히 시도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처참하게 망가진 인생에 실망했는지 근처에 있던 요한이라는 제자의 거처에 대해서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변 취지는 이와 같습니다. 각자 그 어떤 인생을 살고 마감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 자신이 개입한 여정이라서 예수님의 하신 일만 드러내면 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장차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베드로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현장에서 사도 요한은 마치 ‘죽은 자 같이’됩니다.(계 1:17) 이 ‘∼같이’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반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공히 다 적용되는 모습입니다. 즉 신앙이 이미 된 자는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생명과 죄인을 가지고 벌리신 ‘구원 구조’가 통째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반면에 신앙이 없는 자들은 자꾸만 자신이 신앙이라고 우깁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신앙이 없고 성령이 없음이 들킬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즉 홀로 사는 것이 티날까봐 주님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신앙인 자들은 자신 속에 신앙이 생긴 것을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이미 실패자됨을 감사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이 아니기에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주님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7강-디모데전서 6장 11-12절(책임없는 삶)23011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11-12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좆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이것들을 피하라 했는데 이것들이 뭐냐 하면,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과 올무에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 그러면 이것들을 피하게 되면 있는 게 뭐냐? 어떤 것을 취해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 보면 “영생을 취하라” 했습니다.
영생의 뿌리는 생명 나무, 영생의 나무가 에덴동산에 인간 만들 때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이 생명 나무 따먹을 수 없고 쫓겨난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 말은 아담뿐만 아니고 아담에 속해 있는 모든 후손들도 생명과 대치 관계에 있다, 생명을 따먹을 수 없는 요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11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이 말씀을 사도바울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사람의 사람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사람아, 너희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어 있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생과 아담을 분리시켰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서 영생이 주어진다면 필히 그 영생은 우리가 선뜻 손 내밀 수 없는 그런 조건들을 발휘하는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야~ 영생이다! 생명이다. 좋겠다.’ 얼른 손이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본성이, 내가 모르는 나의 본성이 영생과는 반대가 되는 성향을 보이고 있는 거예요.
보이고 있기 때문에 영생에 손이 가지를 않습니다. 영생에 손이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느냐? 돈을 사랑하는데 가겠지요. 이미 성경에서는 그걸 다 파악하고 있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지만 너희 하나님의 사람아. 너희들은 그런 것을 취득하면 안 돼.’ 뭐냐? ‘너희는 영생을 취해야 돼.’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 같으면 영생을 취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러면 돈과 영생을 놓고 볼 때 돈을 취하겠습니까, 영생을 취하겠습니까? 그것은 묻는 내가 잘못이지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조상부터 영생하고는 거리가 먼 나는 ‘나는 나로 인하여 살래.’ 하는 그런 사람으로 출발했잖아요.
그러면 내 속을 다시 들여다 보게 되면, 영생을 원하지 않는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람아”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어왔을 때 나와 싸우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나와 싸우는 겁니다. 나는 돈이 좋은데 ‘너는 영생을 취해야 될 사람으로서 내가 너에게 찾아왔다.’ 이 둘 사이에서 치열한 대결이 진행되는 겁니다.
아담이 생명 나무 있는 곳에 근처도 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차단시켜 가지고 ‘네가 생명 없이 사는 꼴을 한 번 봐야 된다.’ 하고 보냈던 거예요. 그러면 생명 없이 사는 꼴이 뭐냐? 생명같은 것, 영생, 이런 것 보다도 더 우선되는 것으로 사는 것이 지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 모습이 뭐냐? 우리 자신은 그 모습을 알 수가 없었는데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악마와 만나게 해 줬지요. 악마와 만나서 세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돌이 떡 되게 해라, 높은데서 뛰어 내려라, 사람들이 너를 메시아로 따를 것이다. 그러면 너한테 유리하잖아.” 세 번째가 뭐냐? “세상 권력을 다 줄 테니 너 나하고 같이 협조하자.” 이 세가지거든요.
그런데 이 세가지는 뭐냐? 돈과 인기와 세상권력, 이것은 결코 영생과 같이 플러스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돈 그리고 인기, 세상에 대한 출세와 성공, 이것은 영생과 나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0장 끝에 보게 되면 32, 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 앞에서 “나 저분 모른다.” 베드로가 한 것처럼 “나 저분 저주한다. 나 저분하고 상관없다.”라고 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이 세상에서, 마귀가 지배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예수님을 부끄러운 존재라 간주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타고 났어요. 이것은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타고난 거예요.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고, 부인하고, “예수님, 저에게 가까이 오지 마세요.” 밀쳐내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괴물의 속성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처음에 하나님의 조치, 영생이 있는 그곳과 네가 사는 그것과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그것을 확인시키고 강조하는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 때문에 그래요. 네 힘으로 영생을 따먹을 재주는 너에게 없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봐야 시인하고 말고 하지 예수님이 눈에 보였냐, 이 말이지요. ‘보이지도 않았잖아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주님 앞에 반발할 수 있는데 로마서 1장에 보면 그 반발이 허사입니다. 그 반말이 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면 눈에 보이는 예수님 앞에 “아이고, 예수님 잘못되었습니다. 시인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 구세주요.” 라고 깜박 죽어서 겸손한척을 해요.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는 입장에서 내가 예수님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존재인지, 안그러면 예수님을 부인할 존재인지 내가 파악이 안된다, 그 말이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이야기한 거예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고,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자는 예수님 만나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할 사람이기 때문에 미리 주어진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 다만 그 의미와 내용으로 주어진 그 복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말은 모든 인간에게 부끄러워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복음은 우리의 실패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돈 없어, 인기 없어, 세상권력 없어, 이것만큼 완벽한 실패가 또 어디 있습니까? 누가 함부로 복음을 받아 들여요? 수치스러워서 못받아 들여요. ‘내가 남들처럼 되는 게 그게 왜 부끄러운 일인가?’ 오히려 우리는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오이디푸스라는 신화가 있는데 그 신화는 예언을 통해서 예언이 어떻게 구성되고 성취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한테 예언이 주어졌는데 “아들이 너를 공격할 것이다.” 왕이거든요, 아버지가 왕인데 왕에게 어떤 예언자가 말하기를 “아들이 당신의 왕의 자리를 탈취하고 당신을 죽일 겁니다.” 예언하니까 그 예언을 듣고 판단해서 예언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쫓아냈는데 그 피하는 방식이 예언을 성취시키는 방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도 성취고 지켜도 성취에요.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말씀의 위반이고 그것을 안지키는것도 말씀의 위반이에요. 우리의 처지가 이런 처지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뭐냐? 아담과 영생의 생명 나무를 차단시키는 그 창세기 3장의 이야기에서, 다시 여기서 영생, 생명 나무, 영생을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마치 율법적 기능과 마찬가지에요. “너 영생 원치 않았잖아.” 그거예요. “아니 무슨 말입니까? 저 영생 좋아요. 영원히 천국가고 싶어요.” “그러면 네가 이 땅에 실패자일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의가 되어 있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생명 나무는 인간과 격리된 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생명 나무 있는 곳과 인간이 있는 곳을 떼놓았습니다. 그 떼놓았던 그 구조 있잖아요. 그 구조가 살아나야 생명도 같이 살아나고 영생도 살아나는 거예요. 그 구조가 자기는 멀쩡하다고 여기면 그것은 생명 나무도 없어요. 영생도 없습니다. 생명 나무가 생명나무답게 되는 것은 일종의 인간이 범죄했다는 사실과 엮여서 생명 나무가, 생명 나무 가치가 유효한 거예요. 그 가치가 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성경에서 생명 나무와 만난 사람이 있지 않느냐? 있지요. 생명 나무와 만난 사람이 있을 때 그 생명 나무, 주의 영생을 만날 때 그걸 보고 기뻐한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생명을 어떻게 만났느냐? 아기 예수로 만났습니다. 그게 누가복음 2장에 나와요. 누가복음 2장에 아기 예수를 안고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 갔을 때 두 사람의 의미 있는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는 시므온인데 누가복음 2장 28-31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그 시므온이라는 성령 받은 사람, 이분이 성령 받았어요.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 그 아기 예수를 보고서 뭘 발견했습니까? 우리는 왜 아기 예수에 대해서 뭘 발견 못 하고 있는 겁니까? 성령을 받은 시므온은 말하기를, 아기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인간의 시작을 발견한 거예요. 나 말고, 나 말고 새로운 인간의 시작을 하나님 쪽에서 실시했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스스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실패로 확정된 ㉮나를 실패한 자로 없애버리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아기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나를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일, 주의 작업은 뭐냐?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작업이 우리를 죄인으로 들춰서 우리가 우리식대로 구원받을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 와서 어떤 초월을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초월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고 실패를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인간은 실패를 함으로써, 구원에 실패를 함으로써 자기가 할 도리는 실패로 끝났음을 확정 짓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생이 하는 정죄용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생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누누이 새기고 또 새기고, 말씀을 통해서 또 새겨주는 거예요.
그것은 베드로가 나를 배신했고, 가룟유다가 나를 팔아먹었고, 사람들의 그 대다수의 의견일치로 이 하나님을, 아기 예수가 자란 어른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그걸 통해서 인간 본인이 모르는 그 실체를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하시는 거예요. “안 돼!” 되지를 않는 거예요. 교회 세워봤자 소용없는 거예요. 안되는 사람들 모아서 뭐할 건데요? 영생을 추구한다고요? 돈 좋아하면서요? 권력좋아하면서요? 인기 좋아하면서요? 이게 플러스가 안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러한 원칙을 구약 때부터 해 왔었습니다. 구약 때 유월절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장자의 모가지를 치는 것이 유월절이에요. 그 당시 애굽의 장자들을 다 쳤고요, “히브리인들의 장자는 안 쳤잖아요.” 쳤어요. 히브리인의 장자, 이스라엘이 될 장자도 쳐버렸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3장 1,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느그 집안에 장자 있지? 그 장자 내게 돌리라.” 돌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집안, 히브리 집안의 장자 없어요. 장자를 왜 문제 삼는가? 인간세계에서 장자는 책임자입니다. 책임자를 모가지 쳐버리는 거예요. 책임자를 모가지 치고 그 빈자리에 아기 예수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모가지 침’이 있어 줘야 접합이 가능해요. 재벌집 막내아들은 책임자가 아니에요. 그러나 가난한 집 아들은 책임자예요. 물론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만.
드라마 보면 가난한 집 장자 ‘내가 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된다’는 그 책임감, 그 책임감 으로 인간은 자기의 의로움과 책임에 어떤 목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세상의 부귀영화와 성공이다, 그 말이지요. 시므온과 안나라는 이 두 사람, 누가복음 2장에서 아기 예수를 알아요. 누가복음 2장에서 안나 이야기를 아직 안 했는데 안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안나라는 사람은 37, 38절에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아기. 막 갓난아기예요. 갓난아기란 무슨 뜻이냐 하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맞지만 이스라엘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산모는 아기 예수를 버리면 안 돼요. 그것은 나쁜 여자예요.
여러분 유월절 날 여자는 안 쳤습니다. 남자를 친 이유가, 남자하고 여자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달리 만들었습니다. 우선 여자부터 보게 되면,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나와요.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받는다.
이게 뭐냐 하면, 여자는 이겁니다. 내 몸에서 아기를 만들 수 있는, 만들고 키울 수 있는 책임자라면 나는 언제든지 허물어질 용의가 되어 있는 게 여자에요.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와 내 자식을 키우고 양육하는 데 모든 보탬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남자라면 나는 언제든지 나 자체를 해체할 용의가 되어 있는겁니다. 그게 여자에요.
그래서 남자가 여자하고 노는 것은 괜찮은데 아내로 맞이할 때는 남자는 감정 당해요. 주춤하는 거예요. 이거 잘못 건드렸다가 물리면, 도사견한테 물리면 내 인생 조진다는 생각, 거기다 애까지 낳으면 내 인생 끝났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게 뭐냐? 남자가 갖고 있는 책임감이에요, 책임감. 그 책임감을 모가지 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네 인생 왜 네가 책임져? 네가 네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네가 책임지려 하는 거야.” 네가 해체되어야 되고 붕괴 되어야 되는 거예요. 물론 여자가 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자가 나중에 나이 들어도 자기 아버지 자랑해요.
왜냐하면 “우리 남편이 이런 남편이다. 네 남편만 잘났나? 내 남편은 이렇다.” 콜, 그건 됐고 그다음 추가해서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울아부지 우리나라 두 번째 경제학박사고, 거실이 2백 평이고, 정원이 9백 평이다. 울아부지가 초대 재무장관 했다.” 김혜자 이야기입니다. 영화배우 김혜자. 아버지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그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 그 아버지가 바로 그 여자한테는 자기의 책임자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렇게 인간을 허물 필요가 있어요. 다 허물어질 필요가 있어요. 멜깁슨(Mel Gibson, 1956~)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나온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가 뉴욕의 마약단속반 형사 이야기에요.
프랑스에서 뉴욕까지 마약을 운송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운반하는 그 자동차를 검거했어요. 경찰서에 그 차를 가져와 해체합니다. 분명히 여기에 마약 들었다. 전문가가 다 와서 조사했는데 마약이 안 나왔어요. 위에서 사표 내라, 그만 둬라, 수사는 종결해라, 이렇게 압력이 들어왔는데 멜 깁슨이 찾아도 찾아도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차 바퀴부터 해서 샅샅이 뒤져도 안 나와서 차량의 무게를 달았어요. 처음에 차 나올 때 신고한 무게가 몇 킬로인지 그리고 나중에 조사할 때 무게를 보니 차이가 나요. 끝까지 파자 조사하니까 마약이 나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인간의 모가지를 딴다는 말은 고추 따서 고추 배 가르듯이 그 내부를 파헤치는 거예요. 뭐가 나올 때까지? 괴물이 나올 때까지, 악마가 나올 때까지 다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속에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인형 속에 인형 들어 있고, 인형 속에 또 인형 들어 있는 것처럼 마지막 마약 나올때까지 인간으로 하여금 돈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는 그 괴물이 누구에게나 다 들어 있으니까 그 들어 있는 것을 다 파헤치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구약때부터 그걸 했지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했거든요. 이삭에게 그렇게 했고요. 야곱에게 그렇게 했고요.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했어요. 그들은 전부 다 하나님이 옴으로서 다 실패자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애가 장차 많은 숫자를 이룬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아들로 자기 아내 사래의 아들을 낳으라 했는데 사래가 나이 90 넘어 임신을 못 하는 것을 알고 임신이 가능한 하갈을 통해서 아기를 낳았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실패의 여정입니다. 그렇게 실패를 해야 뜯어내요. 이게 마약 나올 때까지 차를 해체하듯이 주께서는 우리를 뜯어내는 거예요. 고마운줄 아셔야 됩니다.
우리 자체를 전부 다 뜯어냅니다. 내가 발견 못한 마귀가 내 안에 들어 있는 것, 내가 발견 못 해요. 왜 교회에서 발견 못 하는가? 교회는 나 자체의 균열을 덮는 데 급급해요. 덮는데 급급해서 교회의 활동이 그렇게도 많아요. 덮어씌우는데, 실패를 덮어주고 위로하는데 급급해요. 파헤치는데 급급한게 아니고 ‘잘~ 될거야’ 이런식으로 계속 나가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이스라엘, 그리고 그 다음에 모세도 마찬가지도,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실패하는가의 변천을 보여주는 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모든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서 본인의 힘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넘볼 생각하지 말라고, 천국은 생각하지도 말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거에요.
그러면 그중에 파헤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47-50절에 보면, 거기에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홀로 혼자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먼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네가 이스라엘사람이라’ 하는 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운가 아셔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보통 사람이 10명 있으면 카운트할 때 1, 2, 3, 5, 6……10, 이렇게 카운트가 되거든요. 1은 2가 아니고, 2는 3이 아니니까 세 사람이 있으니까 3이고, 네 사람이 있으면 4가 된다 그 말이지요.
이게 인간이 자기를 1로 쳤을 때 나오는 카운트 방식이에요. 나 1, 너 2, 그 다음에 3, 이렇게 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다니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주님께서 카운트 하면 1, 2, 3, 4가 아니라 1, 1, 1, 1, 1, 1, 1이 돼요. 내가 카운트 하면 나는 1이고 너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2가 되고, 너는 저 사람과 다르니 3이 되고, 각각 구별해서 숫자를 카운트 해서 헤아리지만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네 안에 있는 것이 나기 때문에 1이고, 저 사람 안에 있는것도 나기 때문에 1이 되고, 전부 다 1이 되는 거예요.
그 1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카운트 하시는 그예수님은 누구냐?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카운트 할 수 있는 1이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 47절에서 계속 보게 되면 나다나엘이 “어떻게 압니까?”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니까,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하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그러니까 너도 이스라엘이냐, 그러면 나도 이스라엘 될 때 너도 1이고, 나도 1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아기 예수를 임신한 예수님의 엄마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엄마는 아기 예수하고 헤어지면 안 돼요.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영생을 임신해야 되고, 잉태해야 되고 영생이 없으면 새로운 나도 없어지는 거예요. 함께 하는 거예요, 함께 하는 것, 천국은 내가 가는게 아니고 지금 내가 함께 하는게 천국입니다. 자꾸 홀로 살게 되면 나1 나부터 출발해서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50,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천사가 사다리를 통해서 내려오는 것은 누구한테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이름이 변한 야곱에게 있었던 일이에요. 창세기 28장 11, 12절에서 야곱이 잠을 자는데 사다리가 내려왔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러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지점에 있는게 누구냐 하면, 그것은 야곱이에요. 야곱이 이스라엘과 동일인이고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니까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이, “내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다나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이스라엘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나다나엘도 이스라엘이고 예수님도 이스라엘이고 둘이 2가 아니고 1이 된 겁니다. 생명과 영생, 생명 나무와 함께 있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 아담은 생명 나무 있는 데서 추방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추방된 것인데추방 되지 않고 함께 묶여 살아가는 그러한 새로운 존재를 예수님을 통해서 발생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발생시키는가? 그것은 요한복음 1장을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그게 또 나옵니다. 마지막에.
이런 말씀 나와요. 이것도 참 어려운 말씀인데요. 요한복음 21장 18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함께해서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 주께서 함께 하셔서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내가 몰아세울거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 듣는 베드로 기분 굉장히 안 좋았어요. ‘예수님 믿는 것도 실패했고, 예수 믿고 난 뒤에도 또 실패하고, 이래도 실패, 저래도 실패니까 그러면 나의 성공은 어디서 찾습니까?’ 뭐 이런 마음이 들겠지요.
그래서 그 말은 차마 못 하고 옆에 딱 보니 사도 요한이 있는 거에요. “나는 이렇게 처참하게 죽는데 그러면 저 사도요한도 나처럼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면서 죽습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아니! 그건 아니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21절에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베드로가 말하는 이 사람은 사도요한인데요,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하나의 이스라엘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도 예수님 안에 들어 있고,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베드로의 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 살았는가를 모자이크 타일의 하나의 일부를 보여준다면, 사도 요한은 너 같은 똑같은 타일의 그 무늬로는 필요 없어요. 사도 요한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떻게 해서 자기 사람을 건지는 데 성공했는가를 보여주는 기능을 보여주면 돼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뭐냐? 예수님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를 보여주면 되고, 저쪽 베드로는 그런 영광되기 이전에 인간은 어떻게 죄인인 주제에 철저하게 망가져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게 베드로의 역할이고, 이렇게 각자 역할이 다른데 ‘사도 요한, 너는 좋겠다.’ 이런 생각 하는 것은 카운트를 나하고 너하고 달리 생각하니까 그런 카운트가 되는 거예요. 1, 2, 나는 1, 너는 2, 예수님 3,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나다나엘 1, 베드로 1, 사도 요한 1, 여러분 1, 저도 1, 다 1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주 안에서 모두. 그러니까 뭐냐 하면, 더하기가 형성되지 않는 공동체, ‘1+2가 3’이 되는 것이 아니고 ‘1+1’ 해봤자 ‘1’이 되는 것, 물방울 하나에 물방울 하나면 하나의 물방울이 되는 사회 공동체, 그게 하나님의 성도의 몸입니다. 그걸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고 하는 거지요.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에요.
그런데 찐득하게 우리 자신 내부에서 나를 안 놔주잖아요. 나를 놔주지를 않아요. 끝까지 나를 붙잡고 있지요.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 나를 붙잡고 ‘성공해야 돼. 너는 실패하면 안 돼. 너는 사람들에게 대우받아야 돼.’라고 하는 그것을 주께서 오셔서 박살내 버려요. 죽이지요.
여러분이 펌프로 되어 있는 바디워시, 그것 다 썼다 할 때는……, 이것은 생활의 팁인데요. 마개를 여닫는 식으로 되어 있다면 거꾸로 세워서 쓰면 되는데 이게 펌프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잘 안 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뚜껑 자체를 열고 물을 조금 부어요. 그러면 약간은 희석은 되지만 펌프질하면 물 섞인 채로 비누의 질이 그대로 있어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끝났거든요. 끝난데다 예수님의 피를 섞어서 펌프질을 하면 우리의 죄와, 이미 망해버린 우리의 죄와 그 망했던 것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피가 같이 섞여서 나오는 그 마당, 오늘날 그걸 위해서 우리로 이 지옥 같은 세상 현실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실패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피가 점점 더 고마워지고 감사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태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면 이 현실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알아야 되겠지요. 자,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21장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무슨 상관이냐” 할 때 과연 사도 요한이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그냥 살아 있는가? 사람들은 그걸 궁금해하는데 그 궁금증을 요한계시록 1장이 풀어줍니다.
사도 요한이 과연 예수님 재림 때까지 그만큼 오래 살았는가? 오래 살았어요. 물론 재림 때까지는 아니지만 오래 살기는 했어요. 오래 살았는데 사도 요한이 만났던 ‘그 날’이 있어요. 그 날이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은 일요일 아닙니다. 일요일은 교회가 자기 맘대로 정한 거고요, 주의 날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난 그 날이 주의 날이에요.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거기에 인자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사도요한이 그분이 인자인 줄 알았어요. 인자인 줄 아는데 그 인자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세요. 13-16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이것은 사도 요한이 주님과 같이 3년 동안 있으면서 상상도, 생각도 못 했던 인자의 모습이었어요. 영광스런 모습이었어요. 그 모습 앞에서 사도 요한은 엎드려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17절에 나옵니다.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게 뭐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 분명히 자기가 사도에요. 사도인데 주님께서 그 사도성은 남기고 사도라고 여기는 사도 요한의 자아를 없애버린 거예요. 죽은 자 같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나오는 요한계시록 내용은 뭐냐? 창조했던 그 역순입니다. 창조를 7일만에 창조했잖아요.
그것을 부수는데, 그걸 해체하고 붕괴하는데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 7 의 숫자로 거꾸로 뒤집어서 펌프질 해서 다 뭉개버려요. 마지막 남은 것은 바로 혼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그 혼돈, 어두움이 있는 그 혼돈, 그걸로 되돌려 버려요. 모든 것이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와르르 다 무너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개발지역 재건축할 때, 봉천동이나 사당동 언덕에 옛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 피난민들의 허름한 판자촌이 있었거든요. 그걸 시의 정책에 의해서 다 허물어버립니다. 허물면 그 현장에 가보세요. 포크레인이 작업했을 때 집이 다 부서지지 않고 벽체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을 때 보면 애들이 키 잴 때 그어놓은 줄이 그대로 있어요. 벽지에 낙서한게 그대로 있다고요.
그 방 구석구석에 그들의 추억들이 담겨 있어요. 그런 것들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나의 추억이, 사정없이. 왜? 그것은 허락받지 않은 창조의 바탕위에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스스로 인생에 책임지려고 애썼던 모든 흔적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은 안 받습니다. 인간이 진짜 이땅에서 탈출해서 구원받으려면 그들은 밀수해야 돼요, 밀수.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밀수꾼은 문익점입니다. 목화씨를 몰래 들여왔잖아요. 그러면 중국 검문소에서 뭘 찾겠습니까? “문익점 인물 안 좋으니 죽여.” 그럽니까? “네가 키가 왜 작아?” 그래서 죽입니까? 검문소에서 뭘 찾느냐? 혹시나 목화 씨앗을 갖고 있는가 싶어서 그것 찾는 거예요. 그것 찾는 겁니다.
하늘나라, 이미 생명 나무는 그 어떤 인간도 “인간이냐? 그러면 못 먹어.” 이미 하나님의 취지는 확정되었어요. 생명 나무와 인간사는 동네를 격리시켜 놨습니다. 그러면 생명 나무가 있는 그곳에 가려면 그 검문소에서 뭘 찾겠습니까? 마귀가 같이 오는가, 그것 검문하겠지요. 우리는 마귀를 못 찾아내요. 마귀가 완벽하게 인간을 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귀 있는 자리에서 나온 게 뭐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입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의 능력으로 그 책임지는 그것을 빈자리로 만들어 거덜내지요. “책임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는 죽어 마땅한 게 더 살려고 책임져? 죽어 마땅해!” 그 빈자리를 만들고 거기다가 예수님, 아기 예수를 거기다 담아버려요. 안나와 시므온처럼 고백하듯이 아기 예수를 담아버려요.
왜 성인 예수가 아니냐? 아기 예수로 해야 아기 예수가 저절로 커가면서 우리가 하지 못한 것 다 하시기 때문에 아기 예수는 이미 시작된 것으로 종결났어요. 십자가까지 다 지실거니까요. 아기 예수가 있으면 하늘나라에서 이번에 뭘 찾는가? 우리 속에 아기 예수 있는가 찾습니다. 인물이 얼마나 좋으냐, 교회 몇 년 봉사했느냐, 그거 찾지 않아요.
네가 평소에 이 땅에 살면서,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 아기 예수 때문에 함께 감사하고 기뻐했는가를 찾아요. 그러면 그 아기 예수의 구조, 특히 아기 예수가 나중에 십자가 지시잖아요, 그 십자가를 찾는 거예요. 복음은 십자가니까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게 있는가를 찾는겁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들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주께서 손댄 사람, 하나님의 사람, 영생을 이미 취득한 사람, 그 영생을 이미 취득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이고 그게 믿음인데요, 그게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고 그것이 영생을 취한 사람이고 그게 인내와 온유거든요.
내가 책임질 게 없어요. 내 안에 함께 계신 분이 책임져서 주님 가신 그 길을 가게 하시는거예요. 나는 모가지 날아 갔고 새로운 분이 내 목 윗부분이 되어서 그분이 나다나엘아, 베드로야, 사도 요한아, 아무개야, 네 안에 나 있다, 네 안에 이스라엘 들어 있어, 나도 이스라엘 너도 이스라엘, 우리는 같이 하나가 된 거야, 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끄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온유고, 인내고, 경건이고, 그게 영생을 취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영생을 취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나옵니다. 7장 29-31절, 졸지 마세요, 습기차고 이럴 때 졸기 쉬운데요, 실내가 따뜻하고 하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여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그 단어가 있어요. 뭐뭐하는 것처럼, 영어로는 ‘as if’ 뭐뭐 하는것처럼 하라. 그러니까 성도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도는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신자기 때문에 ‘불신자처럼’이 돼요, 신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불신자처럼’이 안 돼요.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신자는 ‘불신자처럼’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나는 영생, 생명을 못 따먹는 그런 모습이고, 아기 예수가 나 대신 모든 것을 다 해 주셨다는 그 구조 자체가 살아 있어야 돼요.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신자 아닌 것처럼’ 이라는 기능으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가 천국 가기 얼마나 힘든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딱 한 문제에요, 응용문제가. 그러면 부자는 어떻게 천국 가느냐, 그 문제에요. 부자는 ‘부자 아닌 것처럼’ 해서 천국 가는 거예요. 부자는 자기가, 내가 부자인 경우에는 절대로 부자인 척을 못해요. 김혜자 아버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김혜자 아버지가 돈이 많아요. 김혜자 아버지가 돈이 많은데 이 사람이 죽을 때 일부러 8평짜리 하꼬방에서 죽었어요.
그래서 딸이 되는 김혜자, 대스타 김혜자가, <전원일기>에 나온 그 김혜자가 자기 얼굴이 있잖아요. ‘아버지를 저렇게 하꼬방에 넣어놓고 딸내미 노릇도 안하나?’ 막 이렇게 욕하면 자기 평판이 안 좋잖아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파트 사드리겠다고 권해도 아버지는 그걸 끝까지 거부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공직의 물을 먹은 사람인데,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어렵게 사는데 내가 귀족도 아니고 내가 모범을 보이면서 하꼬방에 산다.’ 이게 뭐냐 하면,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이미 힘이 있는 자만 남을 배려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는 거예요. 배려하는 자의 그 위신과 체면이에요. 당연히 위선이지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 거예요, 김혜자 아버지는.
여러분, 남을 말로써 행동으로 변화시킬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처럼 시건방진 짓이 없어요. 너나 잘하세요, 너나! 구원받고 안 받고는 주님 손에 달렸지, 목사가 되어서 모범을 보이고, 집사가 되어서 모범을 보이고, 제발 그런 짓 STOP! 영어가 나왔다, 방언, 스톱! 그만두세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신앙 없는 자들은 본인이 신앙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악을 쓰고 신앙 있는 것,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잘못된 게 뭐냐? 자기가 불신앙이라는 것을 계속 누르고 누르는 환경을 조성해 준다는 게 이게 교회의 치명적인 악마성이에요. 신앙 없는 것을, 성령 안 받은 것을 계속 들킬까 싶어서 계속 그런 짓하는 거예요. 분명히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영생, 아기 예수를 대신할 것은 없어요. 십자가를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천사가 딴 것 안 봐요. 네 옷을 희게 한다는 그 피, 그 피에 대해서 평소에 얼마나 네가 고마워하고 감사했느냐, 그것을 찾는 거예요.
그런데 그 피에 대해서, 죄사함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될 우리가 뭘 로 감사하느냐 하면, 가정, 교회, 국가, 자기가 또 백 년 이상 오래 산 것, 이런 것으로 영생의 기쁨을 대체하고 있는 거예요. 나 건강하다, 나는 잘살았다, 우리 가정 화목하다, 이걸로 감사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너 믿음 없다, 고 욕하잖아요. 욕하니까 그것도 감안해서 ‘나 이런 믿음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영생하고, 그리고 세상에서 돈 자랑하고, 인기 자랑하고, 권력 자랑하고, 이게 플러스가 안 되고 결합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이 세상 교회에서는 이게 결합이 돼요. 누굴 속이려고? 이게 마귀가 속아 넘어갑니까? 천사를 속이겠어요?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갑니다, 거기에. 기쁨의 대상이 따로 있는데 남 앞에서는 복음으로 기뻐한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거예요.
1930년도 후반, 1935년도부터 1939년도까지 독일 국민들이 일상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은 이렇게 살았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잔 하고, 이웃 만나면 눈인사 기쁘게 하고, 주말에는 간단한 음식 준비해서 이웃과 모여서 화목하게 하고, 집에서는 애 키우고, 고양이나 개나 산책시키고, 애 공부 시키고, 그야말로 그게 일상이었어요. 아주 평온하고, 소박하고, 행복하고, 다복한 일상이 독일 국민들 일생생활이었습니다.
그들 속에 ‘유대인 죽여라’ 이런 것 없어요. ‘유대인은 나쁘다’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 민족 게르만 남고 나머지 민족 다 죽여야 돼.’ 그런 것 없어요. 1930년도 그들의 일상, 자기 가정 다독거리고 화목하는 그것이 그 시대의 독일 정치가들에게 공모자 역할을 한 거예요. 공모자 역할, 협조자가 된 겁니다. 이념이고 이데올로기 그런 것 몰라요. 그냥 자기 소박한 삶을 살 뿐이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내일 그냥 할 뿐인데 이게 악마가 하는 모든 일에 협조하고 공모자가 된 거예요. ‘난 내 인생 살고 주일마다 교회 다닌다. 그게 뭐가 나쁘냐? 애 키운다고 돈 번다.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뭡니까? 오늘 본문에 싸우라는 말 분명히 나오지요. 싸우라는 말, “선한 싸움을 싸우라.” 나오지요.
그런데 안 싸웁니다. 우리는 싸우면 내 일상의 행복이 깨지잖아요. 긴장 되잖아요. 싫은 거잖아요. 나는 나만 착실하고, 나만 성실하며, 그걸로 하나님 앞에서도 나는 당당하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인간들이에요. 그러나 이 세상 자체가, 그 생각 갖고 있는 사람이 뭘 빠트렸냐 하면, 그게 바로 주님, 아기 예수를 모독하는 실패자, 지옥 불에 갈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내가 세상에 대해서 뭐 아나? 나는 내가 하는 일만 알고 내 전공이 우리 가정 살피는 것이고 살림살이 하는거야. 주부로서 더이상 나 못해.’ 이게 바로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주님, 내 속에 있는 악마 끄집어내지 마세요.’라고 강력하게 결사적으로 막아서는 거예요, 주의 일을. ‘나는 나로 인하여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테니까 나한테 접근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거지요. ‘내 모가지 치지 마세요. 내 인생 내가 소박하나마 주여, 나 욕심 없는 것 알지요? 소박하나마 그 정도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책임 이야기가, 책임감이 또 올라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독일 나쁘다, 나찌 나쁘다, 그러면 독일 국민들은 안 나빠요? 동조했고 공조했는데요? ‘북한 주민들이 뭐가 나빠? 김정은이가 나쁘지.’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은연중에 다 협조하고 있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 예언의 진리는 실패를 조건으로 해서 진리가 나오기 때문에, 진리는.
이 진리는, 예수님이 누구냐는, 나의 실패를 경유하지 않고는 예수님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되는지를 알 길이 없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지요. 그래서 교회 50년 다니고 있다고요? 60년 다니고 있고? 나 편하면 최고라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그래서 ‘as lf’ ‘마치 ……아닌 것처럼’ 고린도전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6절, 27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우리는 이 말 들으면 굉장히 이상해요. 누구나 지혜롭고 싶어요. 우리는 문벌 있고 싶어요. 여기 보면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작업에 끼어들기 싫어요. 나는 천한 자 자체가 되기 싫고, 멸시받는 자 자체가 되기 싫고, 나는 없는 사람 되기는 죽기보다 더 싫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실패했음을 받아들여야 돼요. 이걸 가지고 세자로 ‘신앙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너무나 압축해서 잘 묘사한……, 항상 마지막에 유행가 가사 나오는 시점 아닙니까, 그 유행가 가사에 보면 이 세상을 압축해서 보여준 가사가 있어요.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나, 나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지는 노을을 바라다 본다.” 요 구절, 야~, 세상을 이렇게 잘 묘사하다니, 성경에 보니 “나는 한 죄인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누워 나는 저 멀리 초월을 노리면서 생명 나무를 바라다 본다.” 바라 보니 뭐합니까? 가지도 못할 것을.
그래서 가사를 계속 보게 되면,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 본다
자기로부터 해서 자기로 마감되는 거예요. 그 다음 가사가,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이게 자기 소원이에요. 세상 다 귀찮다 그 말이거든요. 여기서 노래할 때 “저 바다에 누워” 하면 안 돼요. 발음을 세게 해야 돼요. “저 ‘빳따’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아무도 안 알아주고, 안 알아준다고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안 알아줘도 돼. 나는 나로 그냥 살래.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래.’ 그거 러시아 인형 제일 안쪽에 있는 악마입니다.
‘나 책임질래.’ 이거 여러분이 발견했으면 여러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생명 나무 가는 길 통과입니다. 천사가, 바로 주께서, 이건 주께서 알려줘야만 아는 거예요. 내가 왜 모가지 날아가야 되고, 왜 내가 나를 나라고 지칭할 자격이 없는가를, 왜 주께서 “나다나엘아, 너 이스라엘이야.” 라고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를 실패자로 만드시는것도 주의 십자가와 연계되어 있는, 주께서만 하실 일인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책임 못해서 환장해서, 남들 앞에 들킬까 봐 꼬깃꼬깃 숨어 기어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 그 모습 속에서 비로소 몰랐던 십자가에 피 흘린 이유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