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환자들

아빠와 함께 2023. 1. 30. 08:23

환자들  

2023년 1월 29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15-16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마귀는 인간들을 환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도 정신병 환자들입니다. 자신의 병든 것을 모르는 환자말입니다. 그들은 폐쇄적인 마음 구조를 갖고 있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상 전부를 설명하려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과학자들입니다. 우주의 생성부터 발달, 그리고 인간의 뇌의 구조와 의식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인간의 지혜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타이아에서 모든 공기를 다 빼내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공기가 있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섭렵하고 다 해명하기에 비로소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게 있음을 노출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모든 행복의 조건은 다 갖추었는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제사 새삼 나오는 게 불행의 씨앗이 보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왔듯이“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인간들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오시겠답니다. 왜 오시는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세계에 남겨주신 게 있습니다. 그것을 회수하려 오시는 겁니다. 마치 폐건전지 회수해서 새생명 집어넣는 식입니다.

애초부터 인간들은 내부에서 절망의 외침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자기 내부가 온전히 봉합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러 자기 내부의 균열을 애써 닫아놓으려 하니 모든 게 위선적입니다. 하는 말이나 행동이 작위(作爲)적입니다. 인위적이지요. 자연스럽지를 못합니다. 그 원인은 오는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보아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3에 보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나타난 것들을 아무리 주워와서 분석하고 탐구하고 그 공통점을 모아봤자 거기에는 숨겨진 진짜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원인은 말씀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에서 나와서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5:39에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말씀은 오직 예수님 한 분쪽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율법을 가지고 영생을 얻을 줄 있으리라고 여겨서 그 율법의 시킨대로 다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바로 예수님을 살해하므로서 그들은 몽땅 말씀 자체를 잃어버린 자가 된 겁니다. B.C 3세기 경, 아르키메데스라는 과학자는 임금으로부터 금왕관이 100% 순금으로만 되었는지 알아보라고 의뢰를 받습니다. 고민 중에 있는 그 과학자는 어느날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다가  자기 몸으로 인하여 몸이 탕 밖으로 넘치는 것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무게가 같다고 해서 부피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게의 차이로 검증되지 않는 것을 부피의 차이로 검증한 겁니다. 중요한 것을 이 과학자가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서 벌거벗은 채로 목욕탕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집으로 갔다는 점입니다. “우레카” 즉 “나는 찾았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바는, 인간의 그 어떤 시도로 도달되지 못한 진리가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뜻합니다. 즉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알게 된 겁니다. 즉 인간은 본인이 태어나면서부터 환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면, 그것이 ‘유레카’입니다. 모든 창피를 이기게 된 겁니다.

순수 악이란 굳이 악을 저지르지도 않았음에도 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순수 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그동안 인간은 무능했고 실패한 겁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우받고 사람처럼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타인의 눈에 창피스러운 존재로 보일까봐 늘 조마조마하며 삽니다.

온 세상을 수평적으로 다녀서 인생의 해답을 얻고자하지만 실제로 인생의 해답은 수평적이라는 수직적인 이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중첩된 존재’가 될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즉 1,2,3 다음에 4가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3과 4 사이에 실체적 대상을 가지고 있는 (정수)로서의 4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눈에 띄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사실, 그것이 곧 주님의 다시 오심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에는 이 내용은 ‘도둑같이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도둑이란 초대받지 않는 손님을 말합니다. 쳐들어오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런 식으로 올 때, 성도는 어떠한 자를 말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4-5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곧 주님을 성도는 자기와 한 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 보기에 도둑같은 존재라면 그점에 대해서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미리 파견된 도둑 선발대같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18-20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세상이 어떤 자들인지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성도는 이 세상에서 막장존재로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과 복음과 의로 핍박을 받으면 도리어 복된 자들입니다. 횡재한 겁니다.(마 5:10-12) 이는 성도 안에 하나님께서 넣으주신게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 안에서는 절망의 절규가 나오는 것이 아니하 환희의 기쁨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만 증거하면 그 어떤 것도 다 용납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곳애도 성도는 주님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성도를 정죄하는 그 율법 자체를 찢는데 그 찢는 도구가 십자가입니다.(골 2:14)

이게 성도 마음의 틈새에서 마구 생명이 분출됩니다. 주체 못할 지경입니다. 유레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몸이나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지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디모데전서 6장 15-16절(환자들)23012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15-1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하나님을 사람들은 초청하지 않습니다. 초청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그냥 땅에 있고, 이렇게 평화롭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땅에 찾아오게 되면 인간의 세계는 그다음부터는 혼란이고 위기가 찾아오지요.

누가 그 엄중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 곁에 앉아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서 관리하시고 땅의 일은 인간 자기에게 그냥 맡겨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인간들이 갖고 있습니다. 시가집은 촌에 살고 결혼한 우리는 서울에 아파트에 살고, 그게 평화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굳이 김장김치 담가서 서울에 올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부담되니까요.

왜 그러냐 하면, 서울에 사는 그 가정이 밤이나 낮이나 매일같이 촌에 있는 시가집 생각하면서 안 살았거든요.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았다 그 말이지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일상이었는데 그 일상을 누군가 집안 어른이 와서 침투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모든 질서가, 패턴이 다 깨져버립니다. 어느 정도까지 어른을 대접해야 될 지 바짝 긴장상태에 돌입되지요.

“한 달만 있다 갈게.” 이건 상당히 난감한 겁니다. “어머니, 여기 한 달이나 계시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한 이틀 계시다 가시기 바랍니다.” 어른 보내고 난 뒤에 그때부터 이 며느리는 사흘 동안 몸살 나고 링거 맞고 난리도 아니지요. 난리도 아닙니다. ‘자기 일상이 있는데, 내 일상에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 일상에 끼어들어서 내 인생 자체를 엉망으로 만드느냐?’ 참 불쾌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6장 15절에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왜 굳이 오시려는 거예요? 이 땅에 왜 굳이? 굳이 오시겠다는 그 저의가 뭐냐? 이게 오늘 본문 핵심이에요. 그냥 인간들끼리 곱게 살면 되는데 왜 굳이 오시겠다는 것이냐? 그 이유가 16절에 나옵니다.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보지 못하는 분이 이제는 보이는 분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본다는 것이 두 종류가 생기지요. 인간들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인간의 세계에요. 그러면 인간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저쪽 다른 세계, 그 다른 세계가 하나님이 계시는 세계.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굳이 오겠다는 그 뜻이 뭐냐? “네가 육신으로 보고 있는 그 ‘바라보임’의 그 한계를 넘어서서 이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나라까지 볼 수 있는 새로운 육신으로 바꿔줄 게, 변화시켜줄게.” 이게 오시는 목적입니다.

현재 이 썩어가는, 이 죽음을 실어나르는 우리 이 육신 가지고는 더러워서 하나님을 못 봐요. 이 육신이 더러워서 못 봐요. 인간이 본다는 것, ‘지금 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면 되지 않느냐?’ 거기에 대해서 16절에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네가 함부로 같이 끼어들 그러한 자리가 아니야. 네가 지금 더러워서 못 보는 거지요. 가까이 가지 못할 육신을 지녔다는 것을 네가 사전에 캐치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 같이 넣어주고 같이 살게 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남편이 어디서 사고당했다는 소식, 그래서 죽은 줄만 알았는데 10년 만에 나타났다. 그래서 “여보!” 하면서 방에 들어오려고 할 때 “보고 싶었어. 난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할 때 조건이 하나 있어요. 그 방에 들어오려고 할 때 아내가 요구하는 조건은 뭐냐? “샤워하고 들어와. 몸 씻고 들어와.” 10년 만에 만나도 더러운 것은 안 받아 줘요. 발은 씻어야 될 것 아닙니까? 머리도 감고. 10년만인데 냄새가 얼마나 나겠어요.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더러우면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육신의 그 눈으로서는 볼 수 없는 곳에 계신 분이면서도 이제는 같이 볼 수 있는 빛의 세계에 들어오려면 우리 쪽 육신 자체가 바뀌어져야 돼요. 그러면 이 바뀌어야 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바뀌어야 되는구나. 주님께서 죄를 씻어주시면, 그래서 깨끗하게 되면 같이 영원히 살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죄를 지었다, 범죄자, 이런 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게 성경에서 맞는 말인데 단어를 좀 바꿔봅시다. ‘범죄자’라고 하지 말고 정확한 표현은 환자입니다. 범죄자보다 더 심한 지경이 환자예요. 범죄자는 반성해서 개과천선하면 됩니다. 석방이 가능해요. 그런데 환자는, 특히 정신병 환자는 본인이 못 고칩니다. 본인이 정신병 환자인데 어떻게 본인이 정신병을 고칩니까? 고칠 수 있다면 정신병 환자도 아니지요.

정신병 환자의 특징은 뭐냐? 내가 정신병 환자가 아니라고 우기는 게 정신병 환자거든요. 고칠 방법이 없어요. 환자이면서도 환자라는 자각을 못 하는 것, 그것을 어떻게 환자 본인에게 맞기겠습니까? 자기 증상인데요.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너를 만드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는데 그게 정상이냐? 그게 환자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때가 되면 네가 원치 않더라도 내가 갈게.” 이것을 통해서 마귀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를 아예 환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도 모르도록,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관심이 없도록, 인생의 끝은, 세상 끝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조차 모르도록 마귀가 그렇게 전부 다 차단시켜 놓은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인간은 자신에 대한 객관화할 수 있는 작업이 안된다는 거예요. 객관화 할 수 있는 작업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환자를 고치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불신자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끝까지 추궁합니다. 이 세상 상황을 통해서 끝까지 소위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을 가지고 주께서는 계속 성령 가지고 추궁하지요. “이래도 네가 신자야? 네가 신앙인이야?” “그래도 신앙인입니다.” “이래도?” 결국 “저 신자 아니고 환자입니다.” 그 말 나올 때까지 “제가 의사가 아니고 의사가 따로 있어야 됩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몰아붙이지요. “나는 그 의사분 앞에, 나를 몰아세우는 그 의사분 앞에 비로소 처음으로 내가 환자인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몰아붙이지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안에 성령 있는가, 여부를 추궁할 때까지 찾아오시는 거예요. 주께서 굳이 이 땅에 오겠다는 것은, 자기와 자기 백성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 환자의 관계가 아니고 친히 예수님이 만든 그 관계를 회수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집어 넣어준 성령, 그 성령을 회수해야 되는데 그 성령이 뭐냐? 만날 수 없는 둘 사이를 만나게 해주는 게 성령입니다.

그 성령을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처소’라 해서 새로운 자리, 새로운 장소에요. 그 자리가 인간을 만드는 거예요. 베드로보고 오지 말라고 한 이유는, “내가 자리를 만들면, 너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그때 내가 다시 와서 자리 들고 너에게 찾아올 게. 그 자리 안에서, 그 성령 안에서 너는 하나님과 영영히 같이 살 수 있는 내 백성 만들어줄 게.”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처소라는 개념의 성령입니다. 성령은 소유개념이 아니고 처소개념이에요. 내가 갖는 게 아니고 함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림자를 갖는다고 이야기합니까, 그림자가 나하고 같이 머물러 있다고 해요? 그림자는 해가 뜨는 그 그림자 있는 곳이 바로 나의 자리에요. 이 그림자의 의미는 나를 비추는 어떤 발광체가 있다는 것, 빛의 발광체가 있다는 것을 그림자가 증명해 주고 있지요. 태양이 없는 밤에는 그림자가 없잖아요. 나는 그림자를 의식 못 하지만 태양이 뜰 때, 빛이 뜰 때 나에게 그림자가 생깁니다.

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주님이라는, 예수님이라는 빛이 떴을 때 내가 환자라는 그림자가 내 자리에 펼쳐지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마태복음 9장의 말씀이 우리에게 확인될 수 있어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환자라는, 죄인이라는 그림자를 보고 찾아오는 거예요.

“나의 진실은, 나의 본질은 나라고 여기는 내가 진실이 아니고, 그 빛에 의해서 비춰지는, 바닥에 깔린, 내 자리에 깔린 그 어두운 모습, 그게 도드라진 나의 모습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니면 나의 본질은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이스케이크 먹을 때 알맹이하고 바깥의 얼음하고 딱딱하게 하나로 얼어붙은 채로 그냥 같이 먹지요.

아이스케이크 속을 언제 알 수 있는가? 40도 열에 아이스케이크가 녹아버리면 내장이 쏟아지듯이 주르르 흘러나오지요. 나오게 되면 겉만 빨아먹던 아이스케이크에 속이 들어 있다는 것이 밝혀져 나오듯이 주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화한다고, 내가 이렇다고 우기던 그것을 전부 다 파내요. 파내고, 파내고, 그래도 남아 있는 그 무엇, 그게 우리 주님의 찾아오심입니다.

타이어에서 공기를 빼는 거예요. 타이어에서 공기를 빼면 다 뺐다고 진공이라고 여기는데, 다 뺐는데 그래도 남아 있는 그 무엇, 그 여분의 것 그게 뭐냐? 인간의 힘으로 다 빼지 못하는 그것, 그게 뭐냐? 주께서 이 땅에 오심, 나타나심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되는 이유를 이제야 아는 거예요. ‘아, 세상은 주님 맘대로지 내 맘대로 안되는구나. 나는 내 맘대로 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는 다 했지만 그래도 마저 손댈 수 없는 것, 내가 관리할 수 없는 것,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이 도리어 스스로 내가 잘난 내가 되기 위해서 시도한 모든 것을 무산시키는 그러한 작용을 해왔던’ 거예요.

인간의 과학, 종교, 철학이라는 것이 그게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자연을 섭렵하는 거예요. 모든 자연의 변화를 인간의 이성으로서, 지혜로서 전부 다 설명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 거기에 인간의 아주 독한 면이 있어요. 집요함이 있어요. 우주는 어떻게 만들었고, 온갖 것, 인간의 생물은, 그 두뇌는 어떻게 되고, 이런 식으로 계속 관찰하고 측정해서 철저히 갈 때까지 끝까지 캐내는 거예요.

끝까지 캐내서 더이상 인간의 힘으로 모른다 하는 게 남아 있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그들은 지금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구하고, 탐색하고, 진리다운 것만 따로 뽑아놓고 그 진리에 진리를 더 얹어서 추가적인 진리, ‘진리×진리’ ‘진리²’의 진리, 알짜배기 진리만 모아놓으면 이것은 분명히 진리일 것이다, 라고 여기는 것,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해왔던 성경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할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전통적으로 진리라고 여겼던 인간의 이성으로,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는 것만 골라서, 엑기스만 골라서 진리라고 여겼던 거예요. 지난주에 했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이 있었는데 그 진리를 어디에 써먹었느냐?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살해하는 데 써먹었습니다. 그들은 타이어에서 공기를 다 빼냈다고 여겼는데 결국 인간의 능력으로 빼내지 못하는 게 있었어요.

BC300년 경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철학자고, 과학자고, 기술자고, 모든 것을 다 했던 사람입니다. 왕이 이 사람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습니다. 왕이 금관 제작자에게 금관제작을 하게 했는데 왕에게 어떤 감이 왔거든요. 진짜 순수한 금관인지 아닌지 혹시 금 함량을 속이고 다른 금속을 집어넣고 돈은 돈 대로 빼먹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겁니다.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지요. 그래서 아르키메데스를 불러서 “네가 확실하게 증명해라. 이게 순수한 금관인지 다른 금속이 섞였는지 알아내라.” 하니까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아르키메데스도 뭐 아는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하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확실하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야 되는데.

하루는 목욕탕에 갔는데 자기 몸이 탕에 들어가니까 몸의 부피만큼 물이 탕 너머로 넘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유레카!” 우리 말로 번역하면 맞다 개보린, 이 정도 돼요. 나는 이제 알았다, 하고 너무 좋아서 옷도 안 입고 거리로 뛰쳐나가서 그길로 집에 가서 수식을 써가면서 증명을 해낸 거예요.

똑같은 무게의 금속이라도 부피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걸 감안한 거예요. 무게만 생각하면서 부피를 생각 못 했는데 목욕탕에 가서 자기 몸이 탕에 들어갔을 때 그만큼의 물이 빠져나왔다 이 말이지요. 똑같은 무게의 금이라면 그 부피가 잠겼을 때 빠져나오는 물의 양과, 순수한 금이 아니고 다른 금속이 섞였을 때 빠져나오는 물의 양이 차이가 있을 것이니 그 차이를 대조해보면 이게 눈에 안 보여도 순수한 금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불순물이 섞였는지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사건의 해결은 그 금관 제작자가 은을 섞어 넣었어요. 죽었어요 그 사람. 아르키메데스 때문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딴 게 아니고 부력 이야기 그 이야기가 아니라 아르키메데스가 벌거벗고 튀어나왔다는 이야기에요. 벌거벗고! 이건 뭐냐 하면, 자기가 몰랐던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을 때, 세상 전부를 인간이 빼내도 몰랐던 그것, 다 빼냈다고 여겼지만 또 남아 있는 그것, 어떻게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기 예상밖에 뭔가에 도달했을 때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자기가 창피스럽다는 그것마저 극복되어야 돼요. “이거야. 진짜 이거였어!” 이거, 내 목숨과 맞바꿔도 괜찮은 그 무엇, 그것, 내가 인생을 얼마나 지저분하게 살았고, 죄만 짓고 살았고, 남 앞에 별로 내세울 것 없고, 그게 창피스럽고, 그래서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겠다, 하는 자기 폐쇄적인 자기 삶을 일거에 그걸 찢어버리고 ‘이딴 게 그게 뭔데? 내가 뭔데?’ 하고 뛰쳐나올 수 있는 그 진리, “유레카!” 하는 그 진리,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알았다, 그것, 그것은 천국의 함량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러분, 천국의 함량이 순수한 백 퍼센트입니까, 아니면 지옥 섞어 놨습니까? 어떻습니까? 공황장애, 내가 보기에는 창피장애에요. 남 앞에 나서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안으로 자꾸 가두기 때문에 그래요. 남한테 들키고 싶은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은밀하게 감추고 싶은 수술 자국 같은 것, 남에게 보이기 싫은 어떤 상처 같은 것, 이런 것을 주께서는 겨냥해서 찾아오십니다.

“네 안에 십자가 있다.” 네 안에 네가 환자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줄 그 신호가 발신하는 발신기 같은 것, 삐삐삐~ 어디가도 삐삐삐~ 시그널이 나오는 신호발신기, 송출기 같은 것, 주님께서는 그것 찾으러 오십니다. 내 안에 그게 있는 줄 몰랐지요. 하나의 보통 가정에 속한 자식으로 태어나서 공부 열심히 해야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벌고, 사람 대우받는다는 그것을 늘 들어오면서 그저 남 모방해야 되고, 남 따라가야 되고, 남들처럼 되어야 사람대우받는 이 세상에서 진리가 뭔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헉헉거리면서 저 높은 곳, 출세의 길로 끊임없이 달려가기 바빴지요.

그러다 세월 다 보내고, 머리는 희끗희끗, 허리 아프고, 갱년기 찾아오고. 뭐했어요, 지금까지? 유레카 한번 못 외치고 뭐 했어요? 맨날 히딩크처럼 아직도 배고프다, 밥 먹어도 배고프고, 4강 들어가도 배고프고, 손흥민 두 골 넣어도 또 배고파요. ‘손흥민이 세 골 넣어야 돼.’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누가 나를 이런 공황장애 같은 환자로 만들었느냐 그 말입니다.

남한테 들키기 싫은 것, 혹시 들통날까 꼬깃꼬깃 숨기는 그 스트레스, 그 스트레스 어쩔 거예요, 그 스트레스를? 멋있는 척하고, 돈 있는 척하고, 뭐 아는 척하고, 신앙인 척해야 속이 시원하다는 그 자체가 정신병 환자예요. 그냥 불신자로 살아가면 안 되겠어요? 안 되겠니 정말? 안 되는게 어딨어요? 다 되지요. 그냥 불신자로 살아가면 안 됩니까?

주님께서 ‘우리 신자다’ 그 소리 들으려고 오시는 게 아니에요. 왜? 환자인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 벌써 환자기 때문에. 그 환자 DNA를 물려받았는데 거기서 무슨 새로운 변수가 나오겠어요? 신자도 아닌 게 신자행세하고, 목사부터 신자도 아닌 게 신자 행세하고, 그것 따라서 장로, 집사, 교인들 전부 다 불신자가 신자 행세하고, 도대체 뭘 작당하는 교회인지 전부 다 자기 속이는 그 스킬, 그걸 어려운 말로 작위(作爲)적이라 하거든요.

쉬운 말로 인위적이라 그 말이지요. 계속해서 교회 가나 집에 가나 자기 꾸미는데 누구 댓글대로 ‘메이크업’ 하기 바빠요, ‘메이크업’ 화장하기 바빠요. 매일같이 작위적이면서 거기에 숙달되니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있는데 주님께서 “좀 내추럴(natural) 해라, 좀 자연스러워라, 작위적이고 인위적으로 살지 말고.”

인간이 작위적이고, 인위적이고, 위선적이고, 매일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매일 허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매일 내가 이대로 끝나면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이 이렇게 허접스럽게 이렇게 죽으려고 태어났나?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이건 뭐 멜 무도 없고 자기 몸 베려 하니 자기 몸은 이미 뼈만 남아서 별 가치도 없고 인생 이거 하려고 살아왔나?’라고 할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래요.

전에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인간은 늙어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을 실어나른다고. 인간은 죽음을 실어나르는 수레에요. 자꾸 안 죽으려고 바득바득 애쓸 게 아니라 실어나르는 화물 자체가 죽음이에요. 그래서 생명은 어디 있느냐? 그렇게 가게 되면 주께서 그렇게 몰아붙이는 그것이 나의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나의 일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유레카’입니다.

‘아,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우겼던 이것이 나의 평생의 오류였고, 실수였고, 이게 나의 질병이었구나. 고질병이었구나.’ 그저 남 부럽고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말씀으로 다루거든요. 말씀으로 다뤄버리면 주께서 성도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불신자에게도 다 찾아오거든요.

그래서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간에게 공히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집어넣은 틈새, 다 메울 수 없는 어떤 틈새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여러분이 속으로 한번 알아맞춰 보세요. 1, 2, 3, 4, 5, 6, 7……, 이걸 자연수라 하거든요. 3과 4 사이에 있는 정수 하나 생각해 보세요. 카운트 1, 2, 3, 4, 5, 할 때 3과 4 사이에 있는 정수가 어떤 정수겠습니까?

없지요. 1 다음에 2고, 2 다음에 3이고, 3 다음에 4가 되는데 3과 4 사이에 3도 아니고 4도 아닌 다른 어떤 자연수나 정수가 있을 수 있느냐 그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그걸 틈새라 했어요. 그게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지혜로 3과 4 사이에 있는 새로운 4를 찾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로 찾아낼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그 틈새에서, 찾을 수 없는 틈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거든요. 인간이 남 모방하고 따라가는 것은, 남 모방하고 ‘나 출세했어. 성공했지 그지? 나 사람으로 대우해줘.’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원인이 오늘 본문 말씀처럼 보이는 것에서 나온 거예요.

보이는 것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볼 수 없는 분이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본인 자체가 거울에 비취니까 모든 시작을 나 본다, 나 보인다, 보이는 우리끼리 잘해보자, 이게 인간 세계의 전부에요. 이걸 사람들은 현실의 전부로 간주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

왜? 보이지 않는 것 3과 4 사이에 새로운 보이지 않는 숫자 4, 기존의 4도 아니고 3.5도 아니고요, 정수니까, 정수라 하는 것은 그 대비되는 실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3과 4 사이에 정수라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는 않고,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자연수 모든 세상을 친히 지배하고 통제하고 관리하고, 세상의 운명은 그 보이지 않는 것의 손에 달렸고, 지금 그 이야기를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하고 있잖아요.

아~,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지고 성경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제가 이 이야기했다면 철학 이야기했다고 또 욕할 거예요.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니라는 부정어를 집어넣었어요. 부정어를 집어넣은 이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한계 넘어서자, 그런 뜻이거든요. 나타난 것을 수집해봐야 절대로 보이는 것으로는 알 수가 없고 감춰졌다는 그 이야기에요. 나타난 것을 아무리 끌어모아서 거기서 공통점을 찾아보고 통일성을 얻어내 봤자 거기서는 어떤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인간으로 개인으로 되어 있잖아요. 개체로 되어 있잖아요. 개체와 개체 모아서 우리 인간이 뭔가를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같이 공통점 끄집어내자, 이런다고 해서 인간이 뭔가를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뭔가를 모르면 그 인간이라는 보편성 속에 들어 있는 나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평생을 살아도, 백 살까지 살아도, 송 해는 96세까지 살았지만 백 살 살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맨날 곁눈질하고 있어요.

그 사람 어떻게 사나, 맨날 곁눈질했지 그 사람 불러다 같이 24시간 의논해봐야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죽어도 왜 죽는지도 모르고, 도대체 뭐예요? 그러면, 그렇다면 그냥 꾸역꾸역이지요. 그냥 꾸역꾸역.

어떤 사람이 이런 옳은 소리 했어요. 인간에게서 식욕, 성욕, 성욕이 있고 식욕이 있어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인간은 식욕이나 성욕이나 욕심 그 자체가 이미 형벌이라 했어요, 형벌. 성욕이 있어서 성폭행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고 인간이 이미 범죄자기 때문에, 이미 환자기 때문에 자기가 자제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성욕이 이것은 일종의 형벌로서 주어진 거예요, 형벌로서.

형벌은 받는 거예요.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걸 고치는 게 아닙니다. “평생 욕심만 부리면서 살다 죽어” 이 말은 뭐냐? 욕심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너 끝났어, 그런 뜻이에요. “너 끝났어.” 너 끝났어, 를 아는 게 유레카에요. ‘교회와도 안돼. 너 천당 못가.’ 이걸 눈치채고 알아채야 돼요. ‘예수 믿어도 지옥 가.’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데요.

그 틈새에서 나오는 것은 말씀이 나온다 했어요.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 모든 말씀은 인간들 어떻게 잘되라고, 천당 가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은 일단 어디에 오느냐? 일단 예수님에게 오는 말씀이에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인간들이 또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천당 가려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너희들이 아니라! 너희들이 아니라!)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너희들이 결국 없애버릴 내게 대하여, 내게 대하여 집결하는 것이 말씀이에요.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눈에 보이는 식으로 왔지만 그들은 결국 말씀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버리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입이 있어가지고 뭐 찬양하면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찬양 많이 했다고요, 정기적으로 찬양하니 뭐합니까?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오니 죽여버렸는데요.

그러니 우리 맘속에 하나님을 안다는 이 하나님이 결국 강력하게 우리에게 우상이 되고 말았어요. 목사가 세례식 할 때, 우리 교회는 세례식 안 한 지 오래됐습니다만, 세례식 할 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렇게 묻고 세례를 줘야 되는데 일반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세례 줘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다 믿었어요. 그걸 조물주라 합니다, 조물주. 내가 해석하다 해석하다, 설명하다 해명하다, 논리적으로 가다가다 안 되면 ‘이건 뭐냐, 조물주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건 알라신, 그 알라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다 알라의 뜻이다.’ 그러면 그쪽 문화에서는 그게 해답이에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제가 핍박한 분입니다.” 왜 말을 못 해요, 그걸? “기껏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고, 그걸 전부라고 여기는 내가 핍박한 분입니다.” 왜 그걸 말을 못 해요? “예수 믿는다는 내가 핍박한 분입니다.” 왜 말을 못 해요? 귀신이 들려서 그런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중첩으로, 3과 4 사이, 즉 하나의 4가 중첩되어 있다는 거예요. 3과 4 사이에 4가 중첩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중첩이 되어서 여기서 틈새가 갈라지게 되면 이 틈새에서, 모든 인간은 틈새가 있는데,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 틈새가 있는데 이 틈새가 있는 것은 모르지만 그 틈새에서 나오는 마음의 상처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있다는 겁니다.

한쪽의 틈새, 불신자의 틈새는 뭐냐? 그 틈새를 통해서 절망의 외침이 매일같이 나옵니다. 절망의 외침. 차마 누굴 보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스트레스받아서 암 걸릴 정도로, 튀어나오지 말라고 밟고, 밟고, 눌러서 그렇지 매일같이 나오는 게 절망적인 외침이에요.

뭉크(Edvard Munch, 1863-1944)라는 사람이 그렸던 그림이 있어요. <절규> 그걸 패러디한 것이 <나 홀로 집에(영화Home Alone)> 그 영화에서 그 주인공 애가 면도하다가 소리 지르는 것 있지요. 절규, 인간은 매일같이 절규해요. 그 절규가 터져 나올 때가 보통 직장 마치고 술 먹을 때지요. 술집에서만 하면 되는데 술 먹고 집에 가서 밥상 엎으면서 자기 부인보고 자식보고 절규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똑같은 틈새에서 다른 뭐가 나오느냐? 환희의, 기쁨이 나오는 기쁨의 소리가 있어요. 이건 성도입니다. 이게 바로 유레카에요. ‘내가 왜 내가 원하는 신자가 되고자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가? 내가 남들 앞에 신앙인 것을 작위적, 인위적으로 비취려고 하는 그 헛짓, 하나님 앞에 저 신앙인 맞지요, 하고 보여주는 삶이고자 했던 그 헛짓, 그게 바로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의 악마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기쁨으로 외칩니다.

지난 낮설교에서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 개의 기능을 만들었어요.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자아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기억의 뭉치니까, 어떤 기능을 하도록 자아, 나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거든요. 주께서 그걸 이용해서 과거의 나, 잘난 맛에 살던 나와 그리고 주께서 새롭게 만들어놓은 나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환희의 기쁨은 더욱더 진실하게 나와요.

환희의 기쁨, ‘야~, 도대체 건너갈 수 없는 걸 건너게 해주시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간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 감격을 채우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잖아요. 주님의 성령의 오심이고 십자가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안 되는데 되게 했다는 말이지요, 안 되는데!

그런데 불신자는 저쪽이 없어요.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를 안 붙들면 붙들 게 없어요. 마지막 붙들게 나밖에 없어요. 그러니 나 붙들고 남한테 안 들키는 쪽으로, 내가 이렇게 매일같이 절망한다는 자기의 본심을 어쨌든간에 들키지 않고 나는 항상 하하하, 웃으면서 산다, 나는 항상 감사해, 오늘도 감사해, 뒤통수 한번 쳐야 정신 차리지, 계속 자기를 조작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 기능이, 히브리서 11장 7절에서는 그 기능이 이렇게 나타나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세상을 정죄한다.

이제부터 좀 어려우니까 여러분이 좀 참아내야 돼요.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오늘 본문에 “내가 다시 갈게. 초대받지 않더라도 내가 갈게. 내가 갈 거야. 나타나심이라, 나타날게.” 하는 그것을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에서는 도적같이 온다는 겁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거예요.

누가 도적을 초대해요? 도적은 몰래 가는 게 도적답지요. 광고하고 가는 것은 도적이 아니잖아요. 몰래 가는 거예요. 도적같이 오신다는 겁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도적같이 이를 줄을 안다는 사실, 몰래 오는 게 도적인데 그 도적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을 알아버리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도적과 일당이에요.

그걸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 미리 파견된 도적과 한패, 도적과 한패에요. 미리 알아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존재 자체가 중첩된 4니까, 카운트 1, 2, 3, 4, 중첩된 4니까. 우리는 남들 보기에는 그냥 보통 인간 맞아요. 인간인데 여기서 성령이 와버리니까 주님께서 미리 파견한 거예요. 자신의 영을 우리 속에 파견해서 딴사람은 몰라도 우리 성도는 주께서 도적같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알고 있고 그 도적같이 오심에 대해서 환희의 기쁨의 시그널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어요. 우리의 틈새 속에서.

그게 데살로니가 전서 5장 4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형제들아, 이 형제들한테 주께서는 “내가 찾아가는 것을 너희가 다 알았지? 반갑지, 그지?”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 안에 주님과, 도적과 한패고 미리 파견된 이 땅의 도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남들은 성도를 이해 못 해요. 미쳤으니까. 인간들 사이에서 이것은 미친 거예요.

주께서 오신다는 게 얼마나 이게 미친 소리입니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요. ‘그냥 하늘에 가만 계시겠지.’ 계시는 게 아니고 쳐들어온다는 거예요. 왜? 자기 것 회수하기 위해서. 폐건전지 건져서 거기에 새로운 밧데리 집어넣기 위해서, 새 생명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새로운 관계를 회수하러 오는 겁니다.

네가 원치 않고 내가 원했던 관계, 주님이 자기가 원한 사랑하는 자로 인식시키고 데려가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예요? 이게 앞뒤도 없고 다 끊어져 버리고.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여러분,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환희의 기쁨을 쏟아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주님과 한패라는 것을 세상은 은연중에 그걸 눈치챈 거예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10절에 나오는 팔 복중 하나입니다.

가만있어도 세상이 우리를 미워함으로써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고 하지 마. 너희 속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나보고 세상이 미워하는 거야. 왜? 그게 세상 생리야. 그게 세상 속성이야.”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히브리서 7장 8절에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가 방주 타고 천국 가려고, 구원받으려고 방주 만든 게 아니고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아보고 방주를 만들라고 한 거예요.

세상은 모르는데 노아는 유레카, 알았어요. 이 세상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 그게 이 세상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객관성이라는 사실을. 세상은 개과천선하고 고칠 필요 없어요. 그냥 세상대로 가도록 그냥 놔두세요. 왜냐? 그래야 심판이 정당화되니까요. 주님이 심판받기 위해서 세상을 줬고,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사람으로 살아왔어요.

그리고 노아방주에 또 한가지가 있어요.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방주를 만들고, 또 하나 믿는 사람에게 뭘 했느냐? 세상 정죄하는 그것도 있고 그다음에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장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줬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5, 16절에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걸 저는 중첩이라 보는 거예요. 하늘의 관계가 적당해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그 관계가 이게 내려앉은 거예요. 성도에게 그냥 내려앉은 거예요.

내려앉으니까 성도는 눈치챘지요. 내가 내 행함으로, 내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내려앉으니까 자기가 애초부터 태어날 때부터 환자로 태어났고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유레카, 이제는 그걸 발견한 거예요. 내가 나를 치료할 이유도 없고, 남이 믿음 있으라 해서 믿는 척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아, 저 사람 기도도 잘한다.’ 남처럼 기도 잘 할 이유도 없습니다. 뭐 잘해봤자 여러분, 우리교회 기도 많이 들어봤잖아요. 잘해봤자 그게 기도였었어요? 었었었어요? 제가 여러 번 집어 넣었습니다. 기도였었었었습니까? 앞으로도 기도할 때 기도다운 기도를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런 기도하고서 유레카, ‘정말 기도 못 합니다.’ 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감사하게도요, 우리가 주의 증인 노릇 하면 그 어떤 것도 용납 다 해줘요. 이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해도 용납 다 해줘요. 주의 증인 된다면. 노래방에 가도 괜찮아요. 노래방에 가는 게 뭐 큰 타락인 줄 알고. 왜냐? 노래방에 가든 나이트클럽에 가든, 나이트클럽은 좀 곤란하다마는, 나이트클럽에 가도 괜찮은데 뭐냐?

그 현장에서 주님의 마음과 연결되거든요. 성도가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러면 뭐하느냐? 누가 마약 거래하는지 살피는 거예요. 신고하려고. 그러니 그게 주의 마음이잖아요, 주의 마음. 어느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장소에 주의 마음과 블록으로 딱 연결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구약에 등장합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나오는 기생 라합. 기생 라합이 좀 특이해요. 왜 특이하냐 하면, 기생 라합이 있던 여리고 성, 하나의 작은 종족이고 일종의 작은 나라거든요. 나라인데 저 바깥에서 어떤 소문이 들리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막강한 나라를 뚫고 홍해 건너와서 만나는 민족 족족 다 멸망시키고 진멸하면서 치고 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 기생 라합이 여군으로 자진 입대해서 싸울 생각을 안하고, ‘우리 민족 망해도 마땅한데 제대로 망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인간의 모든 권력을 뛰어넘는,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그런 어떤 절대자가 제발 우리 민족을 패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게 기생 라합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 누구도 당해요? 본인도 있는 거예요. 본인이 망하는 것을 너무나 지당한 일로, 마땅한 일로 여긴 게 기생 라합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이 맞이한 것은 뭐냐? 미리 파견한 정탐꾼을 만났거든요. 그 찬스를 놓칠 리가 있습니까? “아저씨, 나 봐주세요. 아저씨, 약속합시다.”

그게 바로 성령의 약속이에요. 보지 않고 믿는 거예요. 보지 않고, 그 최후의 순간을 보지 않고 그 소식 전하는 정탐꾼하고 약속을 해버린 거예요. “저는 우리 민족이 망해야 싸다고 여깁니다.” 그 증거를 우리에게 찾아온, 미리 도적같이 몰래 온 스파이, 그 스파이를 숨겨주고 보호해주고 살려준 겁니다. 그게 기생라합의 신앙적 태도라고 야고보서 2장에 나오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뭐로 만드는가? 이 땅에 도적놈으로, 도적으로 만들었어요. 어떤 도적이냐? 이 세상은 지금 망해도, 지금 불사른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고 마땅한 것으로 그렇게 확정지어 버렸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성도에게는 성령이 임했다 이 말이지요. 아까 히브리서 11장처럼 세상 사람들은, 특히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남자나 여자나 직장생활 하는데 모든 스케줄이 자기 소원대로 안 돌아가잖아요. 위에서 계속해서 일을 맡기니까, 자기는 자립적이고 독선적이고 독단적인데 직장에서는 스케줄따라 하니까 그게 짜증이 나는 거예요.

‘내가 돈보다 내 자아 찾는 것이 더 우선이지.’ 하고 대기업이고 뭐고 사표 내고 나는 내 자아 찾기 위해서 배낭 메고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어디로 이민 갈까, 호주 갈까, 뉴질랜드 갈까, 캐나다 갈까, 그래서 망하고 백수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은 좌표가요, 수평적 좌표에요. 어디로 갈까, 어디 갈까, 호주 갈까, 저 스웨덴 갈까, 카타르 갈까, 거긴 더워서 못가고, 뉴질랜드는 여자가 통치한다고 못가고, 어쩌고저쩌고하는데 주님은 뭐냐 하면, 주님 가신 코스를 밟아 올라가요. 두레박이에요. 퍼지는 것이 아니고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것도 죽어서 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빨리 죽는 거예요. 빨리 올라가게. 두레박 타고. 허영심 이런 것 용납 안 됩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게 진짜 말이 안 되는 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게 바랄 수 없는데 왜 바라지요? 내가 나를 구성하기 위해서 기대하고 계획했던 그것은 그게 다 헛방인 것을 알게 된 유레카, ‘아, 이거였구나. 모든 출발점이 나부터 출발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잘못이구나.’ 이걸 깨닫는 겁니다.

만약 어떤 가정의 엄마가 남편은 무능하니 힘들게 재래시장에서 방티(다라, 큰대야)장사 하면서 그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기대하는 게 많지요. 왜? 고생을 본인이 했으니까. 물론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없고 신앙인이 아니라면 그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 자식들 보고 하는 말이 ‘얘들아, 계속 나를 착취해다오.’ 그겁니다.

왜? 인간의 모든 출발점은 ‘자기의’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에요. 환자거든요. ‘나는 희생 그 자체만 빼놓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 마음이에요. ‘내가 희생한다는 그 자체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야 내가 계속해서 자식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엄마기 때문에.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해도 인간은 자기에게서 자기를 뽑아낼 수 없는 환자입니다. 정신병자예요. 자기가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성도에게는 율법을 줘버리지요. 율법이 오게 되면 인간은 율법 앞에 수동적으로 굴복합니다. 안에 마귀가 들어 있으니까 자기 의로, 희생자로 전락해버리지요. 고결한 자기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순교자로 자처합니다. 남은 욕하고, 자기는 순결하고 고결한 영혼이라고.

이걸 뭐라 하는가? 이걸 순수악이라 해요. 자, 순수악이라 하는 것은 일부러 죄를 짓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악이 되고 죄는 상태, 이 순수악을 구현한 것이, 순수악의 구현체가 바로 나 자신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 유레카입니다. 이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것은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 했던 그 모든 율법을 주고, 내가 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놓고 그 악을 그 율법을 찢어버리지요.

골로새서 2장 14절 이 말씀 보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도말(塗抹)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 도말의 원뜻이 뭐냐? 찢어버리는 거예요. 보여주는 거예요. “자 봐! 봐! 봤지? 내가 찢어줄게.” 뭘로? 찢을 때 가위로 찢습니까? 칼로? 아니에요. 십자가로! “십자가로 너를 고소했던, 너를 정죄했던 모든 것을 내가 찢어줄게. 됐냐!”

이게 유레카에요. 환희와 기쁨이 쏟아져 나옵니다. 여러분의 모든 기쁨 속에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생명이 분출되기를 바랍니다. 절망이 분출되지 말고, ‘이 세상 인간답게 어찌 사나’ 이것 때문에 절망하지 마시고, ‘사람답게 어떻게 사는가’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마시고, 인간도 아닌걸 주께서 영원히 함께 살게 만든, 그 관계로 만드신, 이 땅에 도둑놈으로 같은 한패, 같은 한 일당, 도적 패의 일당으로 우리를 선발대로 보내신 것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타나시겠다 할 때 두 가지 반응, 짜증 내는 반응이 있을 수 있고 ‘정말 고대했습니다.’ 하는 반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진정 우리 맘속에 죄인을 찾으러 오신, 자기 것을 회수하러 오신 주님의 일관된 일에 늘 감사하고 찬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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