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세상의 법정화

아빠와 함께 2023. 1. 22. 19:02

세상의 법정화


2023년 1월 22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13-14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6: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우주를 대표하는 세 분이 등장합니다. 한 분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다른 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역할은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이 왜 심판주이신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에서 인간들은 어디있지요?

인간들은 모두 본디오 빌라도 쪽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각자 마음 속에 본디오 빌라도가 투명하게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는 대표자로서 우리 자신들은 탈락이라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자격으로만 만나게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는냐 하며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최후의 법정,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법정에서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 유동하는 모든 의미는 바로 이 ‘하나님의 죽음’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처럼 되려는 세력에 의해서 하나님은 심판받아 죽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우주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마저 밟아버린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결과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하신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은 자꾸만 직접 신과 상대하겠다고 종교들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지속적으로 제사가 이루어져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두개인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바리새인들.

그리고 세상살이와 병행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불가능해서 하나님의 새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끼리 따로 한적한 곳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면서 장차 오실 메시야고 고대해야 한다는 쿰란 공동체, 이들은 노동과 기도와 말씀을 상고하는 일에 자신의 전체 일생을 바친 자들입니다.

이들을 일절 세상과의 교류하지 않고 끊고 사는 자들입니다. 또한 비겁하게 종교에 탐닉하거나 내세만 쳐다보고 사는 그런 사람들 되지 말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바꾸는데 현실적인 투쟁운동을 벌려야 한다는 열심당원들. 각가지 자신들의 계파대로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의 토대에서 ‘권력지향성’ 성향이 있다는 겁니다. 즉 종교라는 이름은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갖고 있는 최종 권력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입장에서 그들의 종교논쟁을 지겁고 짜증나는 짓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그 논쟁에 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가 좋아하던지 좋지 않던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종적인 단일자 역할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권력을 밟고 있기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의 중심축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결국 그 하나님에게 사형을 결정지어야 하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압니다. 아무리 종교라는 것이 세상을 초월해서 고상한 진리를 외쳐봤자 다 권력 아래 하수들이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사후에 어떤 삶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하고 호기심도 가져보지만 실제로는 배불러서 할 일없을 때는 관심 갖는겁니다.

인간들이 다급하고 다급할 때는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알고 있으면서 누구나 다 감추고 있는 본심입니다. 그 본심의 가현체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러니까 본디오 발라도는 모든 인간들을 대표해서, 대변해서 하나님만 만나는 최종점에 있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마저 재판해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요 19:4,6)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의견에 불과하고 그가 지니고 있는 권력을 하나님마저 인간 심판과 죽음에 넘겨야 합니다.

자, 사태가 이렇게 될 때, 결과는 이렇게 됩니다. “인간들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죄없는 예수님께서 ‘죄없다는 단지 그 죄’로 사형을 시켰다”가 됩니다. 이로서 하나님깨서 구성하신 ‘세상의 법정화’ 작업은 내용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즉 누구를 특별히 의롭다 할 자가 아무도 없음이 명백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의도하신 것은 이 세상을 최후의 법정으로 만들어 천국 갈 자와 지옥갈 자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살해당했음’을 근거로 구별하시고 심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살해당했습니까?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뿐만아니라 로마서 8:32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세상을 법정화로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사 그 죄인을 죄없는 자로 만들어 ‘세상의 법정화’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저주를 정당화하시는 작업에 참여된 자가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8:33-34에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 본인도 압니다. 자신에게 죄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법정 안에서’ 성도에게 일방적으로 “죄없다”는 선언을 내리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 노선으로 적용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더는 자기 인생을 자신이 쥐고 있지 않고 이제는 떠나 보내야합니다.

내 인생에 본인이 손대면 안됩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손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의로운 법정이 자기 안에서 의를 생산하기  떄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아이디어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디모데전서 6장 13-14절(세상의 법정화)23012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13-14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13-14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사도바울의 이 짧은 본문 가운데서 이 우주를 대표하는 인간 세 분이 등장합니다. 한 분은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물은 하나님 이후에 생겨난 것이 만물이다. 만물이라는 것은 왜 있는가? 그것은 좀 더 두고 봐야 돼요. 만물을 하나님이 만드신 이유가 뭐냐? 그다음에 나오는 한 사람이 있는데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본디오 빌라도가 두 번째 등장합니다. 우주를 책임지는 두 번째 인물이 본디오 빌라도, 만물 따로 만들고, 본디오 빌라도 따로 만들고.

세 번째 인물이 등장합니다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이렇게 3인이 한 조가 되어서 우주가 있어야 될, 창조가 되어야 될 목적과 의미가 이렇게 함축되어서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미는, 세상 끝이 어떻게 나도 관계없이 이것이 그대로 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일종의 인간의 모든 시간 속에서 이 원칙이 응고되었다, 굳어졌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역할은 뭐냐?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역할을 했고, 그다음에 본디오 빌라도의 역할은 뭐냐? 본디오 빌라도의 역할은 악한 역할을 해야 돼요. 악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뒤에 나오신 분 그리스도 예수의 역할이 뭐냐, ‘선한 증거’니까 선한 역할을 해야 됩니다. 만물을 만드시고 선과 악을 나누시는데 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이에요, 담당이고 악은 본디오 빌라도가 담당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인간들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전부 다 확 빨려 들어가야 돼요. 전부 다 거기에 흡입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 본디오 빌라도 있다, 그 말이지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하고 필히 반드시 만나야 되고요, 본디오 빌라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결정지으려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최종적인 그 의롭다는 것, 최종적인 선하다는 것, 거룩하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본디오 빌라도를 만나야 비로소 발췌되는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를 거치지 않고서는 최종적으로 의롭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본디오 빌라도가 투명하게 우리 안에 들어 있다 이 말이지요. 본디오 빌라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와 삶이 본디오 빌라도가 갖고 있는 권력 추구적인 의지를 쥐고 있는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의 권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종교를 개떡같이 여기는 권력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종교가 있었습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 그리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이 땅에 만드신 의미, 인간이 죽으면 어디에 가느냐,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그런 것들을 종교에서 다룬다 그 말이지요. 인간의 사후생활은 어떻게 되고, 죽고 난 뒤에 얼마나 즐거운가, 지옥은 얼마나 독하게 괴로우냐, 얼마나 서글픈 곳이냐,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종교담당이라면 그 종교가 담당하고 있는 내막과 그 진리마저도 본디오 빌라도가 갖고 있는 권력 앞에서는 그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거예요, 쓰레기 같은 것.

예를 들어서 “목사님, 우리가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게, 그게 궁금해서 목사한테 묻는다는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게 본인 내부는 권력을 탐하고 있잖아요.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그 말이지요. 제일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본성을 엄연히 본인이 떡 지니고 있으면서 좀 배불렀는가, 좀 심심한가, 심심풀이, 심심한데 천국 이야기 가지고 노닥거리는 식으로 놀아볼까, 이런 식으로 해서 “목사님,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 그게 진짜 최우선의 관심사였겠습니까? 돈이 최우선 관심사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해서 자기는 돈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고, 세상 인기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면서 뭐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고, 키가 몇 센티입니까, 라든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라든지 그렇게 하는 것은 지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에너지, 아침에 떡국이나 먹었다, 그 말이거든요. 어제 잠은 푹 잤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심각하지도 아니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몰라도 그만,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를 종교라는 그런 박스에 때려 넣어놓고 좀 사니까 여유 있다 싶으면 교회 가는 거예요. 절에 가는 겁니다. 성당에 가는 겁니다. 별로 그것은 아쉽지도 않은 이야기에요. 쓸데없는 이야기.

주님께서 본디오 빌라도를 세운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이 세상에서 일종의 블랙홀 같은 기능을 하라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좍 빨아당기는 거예요. 쫙 빨아당겨요. 심지어 본디오 빌라도 그 당시에 유대교의 종교분파가 네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파. 사두개인파는 뭐냐 하면, 성전중심으로 해야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난다.

이걸 오늘날 식으로 번역하면, 예배당 있어야 교회다. 예배당에서 예배 드려야 이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교회고, 그 예배는 진실된 예배로서 하나님이 받는다, 라는 주장을 하는 계파, 이것 사두개파입니다. 또 하나의 계파가 있는데 바리새파가 있어요. 바리새파는 뭐냐 하면, 말씀은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지식으로만은 안되고 실천에 옮겨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스러운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이다.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삶으로 이게 나와줘야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 바리새인파입니다. 바리새파가 추구하는 신학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더 인간은 좋은 쪽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게 바리새인파에요.

또 한 파는 뭐냐? 쿰란 공동체라고 해서 이것은 무슨 파냐 하면, 세상은 더럽다. 너희들은 돈만 좋아하고 권력만 좋아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하나님만 추구하는 깨끗한 삶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우리가 하나님께 보답해야 된다. 이것이 쿰란 공동체.

공동체라는 말은 자기들끼리의 완벽한 인간성을 갖춰서 세상에 대해서 “이런 인간형도 있단다. 얘들아, 너희는 추잡하고 더럽지? 우릴 봐. 우리는 세상의 돈과 권력을 멀리한다.” 하는 거예요. 요새 말로 하면 휴대폰 다 끊어버린 거예요. 인터넷도 안 하는 거예요.

인터넷 안 하고, 휴대폰 안 쓰고, 세상 모든 잡지나 방송, 케이블 TV 설치 안 하고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묵상하면서, 또 게으르면 안 되니까 거기에 세 가지가 있어요. 기도하기, 말씀 보기, 노동하기, 기도하고, 노동하고, 말씀 보기.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 아닙니까? 수도원이 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기도하고, 노동하고, 그리고 말씀 보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이것 하는 파, 이게 바로 쿰란 공동체에요. 사해 북쪽에 가면 아직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또 한 파는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성도가 되었으면 사회를 개혁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면 사회에 나가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지 자기들끼리 예배드리고 밖에 나가서는 돈 챙기고 남들이 얼마나 욕하겠느냐? 기독교 신자라면서도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이 욕은 욕대로 다 얻어먹게 만드는 그런 행동이 되겠느냐?

바르게 사는 방법은 그들에게 윤리적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 권력을 잡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국무총리가 적어도 교회 집사 정도는 되어야 되고요. 소망교회 장로가 대통령, 갑자기 이명박 생각이 나네요, 소망교회 장로쯤 되어야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전 국민의 신자화, 더 나가서 전 세계를 선교화, 전 세상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는 주장, 이것, 이것이 열심당원파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무기도 개발하는 테러집단이에요. 로마에 대해서 항거하는 거예요. 그들은 주장하기를, 앞에 있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쿰란 공동체, 그들이 하나님, 하나님, 말은 하지만 자기 목숨 하나 아까워서 자기 몸 사리는 인간들이에요. 그런 인간들, 이것은 비겁한 사람들이지요.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죽어서 영혼이나 천당 가지, 이런 식으로 자기 영과 육을 분리해서 영적으로만 이렇게 살고 천국 가려고 하는 시도, 그래서 그들을 욕하면서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데모를 일으키고, 맛사다 전쟁에 나가서 다 몰살당한 그런 계파, 이렇게 해서 네 가지의 계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네 가지 계파가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머리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종교라는 거예요. 그 네 가지 파 가운데 쿰란 공동체 제끼고, 열심당원 제끼고, 나머지 주요 계파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원수였어요. 신학적으로 달라요. 한쪽은 부활이 있다, 한쪽은 부활이 없다. 눈에 보이는 이 예배당이 전부가 아니다, 말씀으로 삶을 살아야 하나님에게 성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싸우다가 그들이 어디서 그 싸움을 멈추고 화평의 악수를 하고 손을 잡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대해서는 이것은 뭐 다른 이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서는 전부 다 한목소리를 냈어요. 정치적으로.

왜 그런가?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추구한 겁니다.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이 너무 관념이에요. 추상적이에요. 어떤 손에 잡히는 실제적인 힘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기존의 권력자가 누구냐? 본디오 빌라도예요. 본디오 빌라도 보기에는 그들이, 종교가, 신학이 어떻고, 말씀 해석은 이렇게 해야 되고, 저것은 이단이고, 우리는 정통이고, 하는 그것이 같잖은 거예요.

‘이들이 지금 배가 불렀구나. 저것들 취미 생활 하는 데 이런 취미 생활이면 어떻고 저런 취미 생활이면 어떠냐? 시간 남아 도는 것 적당히 하지.’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뭘 추구하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는 뭐냐 하면, 이 인간세계의 중심축입니다. 인간들은 힘없이는 못살아요. 이게 정답입니다.

종교니 신학이나,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는 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네가 실제적으로 권력이 있느냐, 힘이 있느냐, 그것만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팔려요. 사람 대우받는다고요. 이걸 왜 자꾸 속이려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이걸, 이걸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왜 이걸, 분명한 실감 나는 이 사실을 왜 애써 부정하는 이것은 정말 비겁한 짓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바로 그 당시에 유대 권력을 쥐고 있는 그 본디오 빌라도, 그 존재, 그 존재 밑바닥……, 본디오 빌라도 그는 권력을 쥐고 있고 그는 최고입니다. 최고고 그 최고 밑에 하수인격이 뭐냐?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열심 당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종교사회니까 종교단체 직급들이 나오는 거예요. 최고는 뭐냐? 본디오 빌라도예요.

그래서 세상을, 하나님께서 천하를 만드시고 누구를 부각시키느냐? 본디오 빌라도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 외에는 인간 같은 인간, 인간들이 추구하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성경이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자신을 속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속일 생각하지 말라.”

종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권력을 추구한다는 이 사실을 애써 우리가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발목 잡혔어요. 우리 속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한테 발목 잡혀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야기하고, 신학, 복음, 천국 이야기하는 것 다 헛소리입니다. 다 실없는 소리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앞에 설정되어 있고 그 밑에 엑세서리, 인테리어 해놓은 거예요. 하나의 장식품 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그 본디오 빌라도가 하는 역할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는 그 여호와 섬긴다는 종교조차도 자기 밑에 두는 그 역할을 권력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 본디오 빌라도가 참 고마워요. 네 해석은 글렀고 내 해석은 옳다, 이것은 잘했고 또 저것은 못했다, 하는 그 다툼이 더 윗선에 있는 권력 앞에서는 둘 다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등장은 우리가 고마워해야 돼요. 우리의 진모습, 진짜 모습을 말해주니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를 꽂아놓은 이유는, 영어를 써서 죄송합니다만, ‘once and for all’, 이번에 새로 나온 책 <새성전, 에스겔 속의 그리스도> 앞에 보면 방금 말한 그 영어가 있어요.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을 위한 단 한 번’, 모든 것을 위한 단 한 번으로 본디오 빌라도가 등장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인류를 대표해서 누구를 만나는데 누굴 만나느냐 하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 예수님과 본디오 빌라도가 만나서 뭘 일궈내는가?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을 위한 시작이 되는 단 한 번, 단 한 번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판받는 사건입니다. 창조주가 인간한테 심판받는 사건, 그 역할을 본디오 빌라도가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나님, 너 이리와. 나한테 좀 맞자.” 이 역할을 본디오 빌라도가 한 거예요. 그리고 그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 누가 있느냐? 모든 인간은 본디오 빌라도 쪽에 다 같이 있습니다. 다수가 1인에게 전부 다 응축되는 거예요. 그래서 블랙홀 같은 거예요. 블랙홀은 주위에 있는 모든 물질을 다 중력으로 빨아당기는 것이 블랙홀이거든요. 주변에 있는 모든 다수를 하나로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 다 끌어당기는 역할을, 정확히 말해서 본디오 빌라도가 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도록 본디오 빌라도를 세웠던 거예요.

그래서 이점은 뭐냐? 다수가 하나로 응축된다는 이야기는, 세상 사는 것이 힘들고, 부질없고, 허무하고, 사는 게 괴롭다고 자살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아이고, 너무 고통스러우니 자살하면 고통이 없어지겠지.’ 그것 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다수는 하나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본인 죽는다고 해서 다수와 하나의 구조가 깨지는 게 아니에요. 죽어도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 해서 내 안에 본디오 빌라도의 속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나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인생이 나를 대표하는 게 아니에요. 본디오 빌라도가 나를 대표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게 있어요.

나도, 그리고 종교마저 이기는, 그러니까 교회, 성당, 절간 이것마저, 그들이 추종하는 그 진리마저 ‘웃기지 마’라고 할 수 있는 저 높은 자리가 우리가 추구하는 자리에요. 그게 ‘목사, 너 이리와. 신부, 너 이리와. 너희들이 뭘 알아? 이게 진짜야. 이게 알맹이야. 이게 현실이야. 이 권력이, 돈의 권력이 현실이야.’라고 큰 소리를 치는 그 자리, 그 자리를 우리가 탐을 내는 거예요. 그게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요.

그 앞에서 종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있어도 그것은 장난 같은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그 십자가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법정화’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의 재판소로, 이 세상 전체를 재판소로 만들어버려요. 재판소로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재판 받아요. 재판받는데 그 재판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4절에서 6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나와 있어요. 19장 4절에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체포하기는 그들이 체포했지만 그들의 상황은,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최종 재판의 법정적인 권한은 그들에게 없어요. 그 당시 최고권력자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었으니까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는 골치 아파요. ‘왜 남의 논쟁에 나를 자꾸 끼워 넣는거야? 나 좀 빼주면 안 돼?’ 안돼요. 왜? 종교보다 권력이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요. 넘기면 본디오 빌라도가 판정을 하는데 4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 사실,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 하면요, 최고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이 판정이 남으로써 인간들의 결정적 하자가 도출되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아무 죄도 없는데 인간들은 총 합세해서, 총궐기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죄 있는 것으로 규정지어서 사형을 시켰다는 이 사실이 도출되어야 돼요.

인간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배후에 누가 있느냐? 죄가 없는 것이 죄가 되게 하는,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든 그 배후자가 누구냐를 찾는 거예요. 종교문제 아니에요. 이것은 목사 만나서 하는 게 아닙니다. 권력자 만나서 해야 돼요. 나중에 사도바울도 로마 권력자 앞에, 황제 앞에 서지요(행 27:24). 권력자 앞에 서는 거예요.

내가 어떠냐 하는 것은요, 목사가 여러분 규정하는 게 아니에요. 집사가 규정하는 게 아니고 그것은 세상의 권력자가 여러분을 최종 규정할 거예요. 예수님이 처음으로 법정에 서서 이런 판결 받습니다. “죄 없다.” 그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죄 있다고 넘긴 것을 당신이 죄 없다, 해버리면 로마 황제까지 우리를 고소할 겁니다. 재판 좀 제대로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본디오 빌라도는 “나 모르겠다. 물 가져와, 물 가져와!” 손 씻으면서 “나는 이 사람의 판결에 대해서는 손 떼련다. 너희들의 종교 교리에 관한 문제, 권력도 아니고 종교 교리에 관한 시답지 않은 문제 가지고 자꾸 나를 괴롭히지 마라. 나를 좀 빼 다오.” 이런 식으로 손을 씻어 버려요.

손 씻는다고 그 사람이 책임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역할이 그거니까요. 사형을 언도를 해야 될 역할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늘 말씀 쉽게 들으려면 이렇게 하면 돼요. 인간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최종적인 하나님이 만든 이 법정에서 누가 죄 없다고 선언하느냐, 가 여러분의 운명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느냐, 그것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이에요. 자기보다 죄를 더 지었으니까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보다 착한 일 더 했으니까 의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판정은 본인이 판정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왔을 때 네 판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해버리면 자기가 내린 판정은 잘못된 판정이거든요. 최종적인 인간, 내 속에서 판정하는 이 판정은 내가 내린 판정이 되면 이것은 항상 오류입니다. 최종적으로 내 자리는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 가 있어야 돼요.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 가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죄 없는 자를 죄 있는 것으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러한 본성’이 너 나 할 것 없이 다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한테 손해되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나한테 이익이 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잖아요. 천하에 나쁜 사람도 내 일가친척 같으면 용서해달라고 하고요.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내 차 박아서 손해나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게 우리 중심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심의 판결은 이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우리는 나라는 개인으로 머물면 안 되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한꺼번에 묶어 버리는 최종의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을 위한 단번의 사건을 만나야 돼요. 그 사건 안에서 우리의 본성은, 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왜? 네가 뭔데 죄가 없느냐?’ 그것이 죄가 되는 그 본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는 거예요. ‘네가 뭔데 왜 죄가 없어? 우리는 죄 있어야 돼. 그래야 인간다운 거야. 이게 상식이야. 네가 뭔데 특별난거야? 누구 허락으로 특별난거야?’

이 재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3장 32절부터 35절까지 나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하수인들, 헤롯이라는 그 당시 왕이 있었어요. 왕이 있었는데 분봉왕이라 해서 본디오 빌라도 이전에 헤롯이 있었습니다. 유대 지역에 세 명의 분봉 왕들(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이 있었어요. 31절에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헤롯 안디바)은 그냥 본디오 빌라도 밑에 있는 졸개로 보면 돼요.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유대의 자치지역의 왕이라 보면 돼요. 32, 33절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선지자, 하나님의 보낸 자는 반드시 이 세상에 와서 죽는 것으로 최종 진리를 다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 말입니다. 34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자, 이것은 예루살렘, 바로 예수님이 죽는 자리가 예루살렘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앞에 있는 그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도 예루살렘 근처에 있어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 그곳의 역할은 뭐냐? 바로 하나님이 보낸 자를 무덤으로 만드는 거예요. 죽여서 묻어버리는 거예요. 살해하는 곳,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죽는 겁니다.

자, 그렇게 죽게 되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 죽인 것에 대해서 전부 다 합의했다는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 합의를 했어요. 합의를 해버리면 그다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제는……, 참 이게 어려운데요, 어떤 인간도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그 심판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마저 죽이는 존재라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더이상 빠져나갈 경우는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법정을 그대로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을 위해서 단번’이니까 그 단번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그 법정을. 주님 당했던 그 법정을 계속해서 오는 세상에 되풀이, 반복을 시켜버려요. 반복을 시켜버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 보면, 31, 32절부터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모든 사람, 지금 다수는 본디오 빌라도 자리에 있지요. 생각이 똑같아요. 권력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이에요. 우선 권력이 전부고,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고, 하나님 일은 어떻게 되고, 그런 것은 지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종교보다 높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보다 더 센 존재가 되는 게 우리 인간의 목표에요. 하나님을 내려 볼 수 있는 삶, 그걸 인간들은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이 자유라고. ‘너만 하나님이냐? 나도 하나님이다.’ 그게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이에요. 어릴 때는 애들이 아빠 엄마 말 잘들어요. “아빠, 엄마 중에 누가 좋아?” “아빠가 좋아.” 혹은 “엄마가 좋아.” 이렇게 하지요.

좀 크면 그다음부터는 “아빠, 엄마! 나도 인간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내가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독자적인 인간입니다.” 이렇게 나온다 그 말이지요. 점점 자기 본성을 닮아가는 거예요.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노출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모가 힘이 없으니까, 힘이 달리니 기껏 하는 말이 “너도 나중에 장가가고 시집 가보면 알 것이다.” 알면 뭐합니까? 자기는 벌써 늙었는데요.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고 33, 34절에 법정이 나와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법정, 십자가라는 법정을 반복하시겠다는 겁니다. “죄 없는 자를 누가 정죄하겠느냐? 죄 있다고 했기에 너희들은 이제 지옥이야. 죄 없는 자를 죄 있다 했으니 그게 바로 지옥이야. 이분은 죄가 없는 거야.”라는 법정을,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그 법정을, 그 재판소를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우리는 예수를 좋아할 마음도 없어요. 우리는 예수 믿을 마음도 없어요. 우리는 권력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한테 꿇리기 싫고 남한테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요. 그게 우리 본성이에요. 본성인데 우리 안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이게 들어와요. ‘너 죄 없는데 누가 너보고 죄 있다 했어? 내가 가만두지 않을게.’ 이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너희에게 죄 있다 하리오? 너는 죄가 없어.’ ‘왜 내가 죄가 없는데요?’ ‘이 법정에서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한테 욕 얻어먹었어. 그런데 이제 꼭 나 같은 처지, 나 같은 신세로 내가 너를 택했다.’는 겁니다.

택해서 우리를 구원할 목적이 아니고요, 우리를 천당보낼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하나의 법정화,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것,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 본디오 빌라도와 창조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계속해서 여기서 반복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네 죄는 없어. 그리고 남한테 이야기해.’

“네가 죄지은 것을 내가 뻔히 아는데, 내가 지난 여름밤에 한 일을 내가 다 아는데 왜 너는 죄 없다 해? 그 근거를 대 보라.” 하면 우리가 할 말은 뭐냐? “나도 몰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나도 알아. 내가 죄많다는 것을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할 때 이 말을 붙여야 돼요. “아,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나도 네가 지적한 것 다 동의해. 내가 고등학교 때 학폭한 것 내가 다 인정해 다 인정해. <글로리아> 거기서 당하듯이 막 지지고 그렇게 한 것 다 아는데, 다 아는데, 그런데 죄가 없대. 이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미쳤다고 이야기하고. 제대로 미치세요, 여러분! 어설프게 미치지 말고 제대로 미쳐야 돼요. 하루하루 살면서 마음속으로 간음 안 할 수가 없고, 마음속으로 남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남을 정죄하는 죄까지 있고, 그리고 남을 용서하지 않는, 용서받기를 원하지만 용서할 줄 모르는 이 독하디독한, 악한 인간인 것을 누가 아느냐?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 때문에 이 복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입을 떼지 못하고 설명을 못 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서 권력 좋아하고 돈 좋아하는 이것은 남 못지 않다는 것, 경쟁적으로 남한테 지기 싫어한다는 것, 세상 시장에 나가서 괜찮은 상품으로 팔릴 것을 원하는 것, 모든 여자가 날 원하고 모든 남자가 날 원하는 그 인간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인 것을 우리는 알아요.

그런데 그것하고 별개의 문제에요. 최종적인 것은 내가 몰라요. 주님이 아시는 최종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너를 정죄해? 누가 너보고 죄인이라 해? 죄인이 아니야, 죄인이 아니야.’라고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훌륭해서도 아니고, 교회 열심히 다녀서도 아니고, 목사 섬겨서도 아니에요. 헌금, 봉사, 전도, 선교해서도 아니에요. 그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그것은 어떤 선언, 최종적인 선언이에요. 그 최종적인 선언을 뭐라고 하느냐? ‘예수 안에서 주어진 선언’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나와 예수를 바꿔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바꾸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바꿔주신 거예요. ‘네 인생 없다. 이제는 네 인생 없고 내가 네 인생 다룰 거야.’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내게 속한 일을, 내 일이라는 것을 삭제해 나가고 제거해버려요. 우리가 공부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이게 네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계속 알려주는, 삭제시켜나가는 일을 해요. 논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열심을 해도 네 일이 아니니까 네가 걱정하고 미래에 대해서 염려할 것 없어요.

왜? 미래는 끝났어요. ‘아무도 너를 정죄 못 하게 내가 변호해 줄게.’ 이미 그것은 끝난 사실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손을 대야지 내가 왜, 시건방지게 내 인생도 아닌데 내가 왜 손을 댑니까? 이것은 스트레스만 가중될 뿐이에요.

다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쿰란 공동체, 열심당원들, 자기 딴엔 하나님께 영광을 추구한다고, 바르게 산다고 종교단체 만들어서 하나님의 영광, 영광, 할 때 그들의 생각과 똑같은 공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딱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죽이는 것에서는 전부 다 한마음 한목소리를 낸 거예요.

왜 그들은 예수를 죽였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선과 악을 미리 알고, 악은 될 수 있는대로 줄이고 선을 키우게 되면 하나님께서 “야~, 너 이 세상에서 착한 일 많이 했네. 복 줄게.” 그래서 그 사람은 천국 보내고 “네가 이렇게 나쁜 일 했으니까 너는 지옥 가라.”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기본 패턴입니다. 기본 상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기본 선악 체제를 완전히 개무시하고 찢어버렸거든요. 선악 체제로 하는 최종의 판정은 이런 선악체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이 오셔서 “너 죄 없다! 끝! THE END!” 오늘 영어 막 나오네요. 끝! 이걸로 끝난다는 거예요, 이걸로. 그걸 은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로 끝난다는 거예요.

끝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잖아요. 백 년 살다 죽어버리니까 끝에 대해서는 모르지요. 끝은 아까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자가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 예수님의 자기 죽음이 끝이에요. 거기서 모든 의미는 다 개시되는 겁니다. 다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모든 의미가.

“죄 없는 자를 너희들이 합세해서 죄 있는 것으로 몰아세워서 사형을 내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죽였는데 인간들이,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해서 인간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덫에, 함정에 빠진 거예요. 하나님의 전략에 빠진 겁니다. 실제로 말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것인데 거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목 졸라 죽여라.” 이게 아니라 거기다가 인간들을 동원시켜 버렸어요.

동원시킴으로 말미암아 더이상 인간에게서 더 나올 사적인 의, 개인적인 의, 집단적인 의는 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거예요. 그래서 택한 백성,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죄인이라도 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택한 백성에게는 무엇을 적용시키느냐? 아버지가 너를 위해서 아들을 죽였다는 노선을 적용시켜 버려요, 택한 백성에게는.

그래야 그 노선 안에서 법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법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다른 노선에서는 뭐냐 하면, ‘너희들이 감히 하나님을 죽여?’ 이 원칙을 적용시키고, 택한 백성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죽인 게 아니야’ 가 되어버리면 거기서 뭐냐?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나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죽인 것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 속에 집어넣고 아버지가 친히 친히 자기 아들을 죽임으로써 그것을 너 대신 죽인 것으로, 그걸 법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둘이 아니고 1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둘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가 일방적으로 하는 게 사랑이에요.

이 세상에서 사랑해서 부부가 되잖아요. 부부의 장점은 뭐냐 하면, 내가 결코 당신이 될 수 없다는 게 장점이에요. 그걸 깨닫는 게 장점이에요. ‘우리 마음을 같이 해서 한마음으로 하자.’ 한마음 되려고 백날 애써도 결국 살아보게 되면 빠른 사람은 6개월 만에, 좀 더 가는 사람은 3년 3개월 만에 아는데, 결국은 애 낳고 나면 다 알아요. 부부는 결국 한 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하시는 그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아~, 이게 남남이구나.’ 그런데 남남이라도 결혼을 해야 되는 이유가, 그걸 알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당신은 나의 이상형’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결혼을 해보지만 결국은 이상형이 이 땅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나의 이상형,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나의 이상형이 아닌 겁니다.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은 나를 현혹한 거예요.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지금 법정이라고 보고요, 지금 최종 법정입니다. 이렇게 실천하자, 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꼼짝 말라, 하고 있어요. 법정에서 응고되어 있습니다. 굳어져 있어요.

판결하시는 분이 이렇게 합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주도권이 내가 의롭다, 가 아닙니다. 내가 의롭다, 에서 우리가 떨어져 나가야 돼요. 내가 ‘의로운 나’에서 내가 나와 이별해야 됩니다. 나는 착하게 살아야 돼, 바르게 살아야 돼, 그 내가 나하고 이제는 헤어지세요.

나는 휼륭한 사람 되겠다는 것을 여러분 속에서 빼세요. 방 빼세요. 의자 빼시기 바랍니다. 빼버리세요. 내가 훌륭한 것을 여러분 속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판정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정으로 충분합니다. 넉넉해요. 내가 나를 좋다고 꼬투리 들어가지 마세요. 우리는 나와 헤어져야 돼요. 잘나고 싶은 나와 헤어져야 됩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편지, 윤하)

나는 이제는, 여러분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돌아서야 됩니다. 돌아서게 되면 그 단수, 다수와 대비되는 하나는 우리 그 하나를 누가 가져가느냐? 그 하나를 우리 주님이 가져가요.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다수에 속합니다. 내 안에, 전에는 내 안에 단수, 하나가 본디오 빌라도가 하나였어요.

그런데 그 하나가 뭘로 바뀌느냐? 그 하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나에게 아무도 너를 정죄할 수 없고, 너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분이 나의 단수, 최종적인 내 자리에 앉아서 내대신 내가 되는 거예요. 그걸 주의 이름이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은 떨궈져 나가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나머지, 떨어져 나가는 이 육신은 뭐냐? 권력을 추구해야 되지요. 돈을 사랑해야 되지요.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해야 지요. 그걸 보면서 ‘저거 아니었잖아. 바이바이!’ 내가 나한테 바이바이, 하는 거예요. ‘잘가, 잘가!’ 하면서 내가 떠나보낸 내가, 벗어놓은 옷이 어느 쪽, 어느 방향인지 주시해 보세요. 보게 되면 본디오 빌라도에 다 가 있을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에.

믿음 좋은 애들도 세뱃돈 받으면 챙기잖아요. “이리 내. 엄마가 챙겨놓을게.” “아냐. 내가 챙길 거야. 나 주식 투자할 거야. 어릴 때부터 주식투자 하라고 했어. 학교에서 배웠어.” 이런 식으로. 내가 떠나가는 내 모습을 내가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 저거였구나. 나는 돈만 좋아하고, 나는 최고가 되기를 좋아하고, 내가 악마 편이었고, 악마와 내가 친구였구나.’ 하는 것을 떠나보내면서 그걸 발견하는 거예요. 그걸 발견하면 할수록 더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인 것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방금 우리가 한 것은 신약의 최종적인 것이고 구약에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을 떠나보내지 못할 때 어떤 오류가 발생 되는가를 구약성경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어요.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가 나오고 엘리사가 나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고 엘리야는 엘리사의 스승이에요.

그런데 엘리야, 엘리사는 둘이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하나님의 정보를 제대로 전달 다 해줬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엘리야의 제자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엘리사가 단독으로 있을 때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는데 거기에 있던 엘리야의 제자들이 스승님이 안 보이니 “스승님이 어디로 가셨느냐?” 할 때 엘리사가 “스승님은 하늘로 올라갔다. 불수레 타고 올라갔다.” 하니까 안 믿습니다.

이게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으로서는 말이 안 되지요. 본디오 빌라도가 들어앉았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어디서 감히 권력을 떠나서 올라가느냐,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사흘 동안을 찾아다녔어요. 엘리야의 시체를 찾아다닌 겁니다. 16절 끝에서 17절에 보면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똑같은 이런 오류가, 마태복음 17장에서 베드로가 그런 오류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하고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갑자기 예수님 옆에 짜짠, 하고 8백 년 전에 돌아가신 엘리야, 그리고 1400년 전에 돌아가신 모세가 예수님하고 같이 나타났어요. 3인이 한 조가 되어서 같이 나타난 겁니다. 이쪽은 한 조가 되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었고요.

그때 베드로가, 그것이 그냥 자기의 본성이지요, 본성적으로 어떤 잘못된 소리를 하느냐 하면, 4절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겁니다. 농막이지요. “농막 셋을 지어서 한분 한분 모시기를 원합니다.”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도 모시고, 엘리야도 모시고, 모세도 모시기를 원합니다.” 할 때 이게 베드로가 큰 실수를 하는 거예요. 떠나야 될 곳에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뭐가 잘못이냐 하면, 예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엘리야를 내 것으로 만들고, 모세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거예요.

영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님 앞에 떨어져 나가야 되지 왜 내 것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이 내 것이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어야지 왜 주님이 내 것이 되어야 됩니까? 우리는 떨어져 나가면 되지요. 늙어 죽으면 그래서 떨어져 나가면 되지요. 초막에 그 세 분이 들어왔습니까? 성경에 그분들이 “고맙다” 하고 “초막에서 살았다” 이렇게 됩니까?

초막은 감당 못 해요.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이 주님의 판정을 감당 못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 앞에 포위되었기 때문에 권력 속에는 주님이 안 들어옵니다. 세상의 권력과 돈의 권력 속에는 주님이 살지를 않아요. 그딴 것 필요 없습니다. 왜? 그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똑같은 그 오류를 우리 사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계속 그걸 되풀이 하고 있어요. “하나님 내일 왜 안 도와주십니까?” 하나님이 “네 일? 네가 왜 네 인생에 손대지? 내가 손대지 말라고 했지! 떨어내라 했지!”

예를 들어 봅시다. 조금 있으면 재개발이 되어서 철거됩니다. 철거되는 그 집에서 애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장난하면서 막 바닥 긁어내면 화낼 겁니까, 화 안 낼 겁니까? 어차피 철거될 것 바닥 좀 찢긴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어차피 쓰다 버릴 것, 우리 인생 좀 스크래치 난다고 그게 그렇게도 스트레스받는 거예요? 그렇게도 그게 자살할 일입니까? 그게 고민할 일이에요?

우리 안이 뭐가 되느냐? 주님의 법정이 되어야 돼요. 재판소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재판 속에서 로마서 8장 말씀이 늘 되풀이해서 일어나야 돼요. 일어나기 위해서 주께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건사건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보겠습니다. 거기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 법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자, 이 말씀 들을 때 이제 어떻습니까? 설교 들었으니까 느긋하지요. 아주 가볍게 들립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거 뭐 당연한 것. 왜?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 너 죄지었다, 하면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지요. “오케이, 오케이, 콜!”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딱 내 이야기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오케이, 콜’ 감사하지요.

25, 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전에 지은 죄를 없다 하심으로, 덮어줌으로써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너는 나와 같이 하나가 되었으니까 나도 의롭지만, 나도 죄 없지만 너도 죄없어.’라고 그렇게 실시하는 그 주님의 행위가 지금 여러분 속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 누가 태어나라 했습니까? 그냥 내던져진 존재잖아요, 내던져진 존재, 그냥 원치 않게 태어난 존재가 가는 목적도 방향도 모르고 남 흉내나 내면서 뒤따라 가면서 평생을 살겁니까? 그래서 나중에 요양병원에서 늙어 죽을 거예요? 그렇게 살 거예요? 미리 당겨서 말씀을 보셔야지요. ‘죄 없다, 하시는 주님의 죄 없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도 죄 없게 해주셨구나.’ 이게 바로 성도가 갖는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 말만 실컷 들어왔고 남의 이론만 들어왔습니다. 이제 우리 성경 보게 해 주옵소서. 그 속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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