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말씀의 막

아빠와 함께 2023. 1. 1. 20:29

말씀의 막 

2023년 1월 1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7-8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사도가 생각하는 성도는 더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를 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족함의 차원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압니다. 즉 ‘아무 것도 없어도 있는 것으로 족하다’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족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성도의 모습은 사울에서 사도 바울로 바뀌는데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상당히 괜찮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작은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사울의 신념과 사울의 신앙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폭력적인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할 나위없이 열성적이었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충성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나타난 진리성은 이런 폭력적인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서 그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점잖고 성격좋은 상식적이고 교양있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실은 모든 인간들이 다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놓는 배설물을 보면 압니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 동일한 인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차별을 두게 되십니다. 양과 염소로 말입니다.

여기서 그 기준을 알아야 성도입니다. 성도란 이 세상에서 벌 안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벌 받는 이유까지 받아들인 자를 말합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벌은 벌대로 받으면서 벌받아야 될 이유에 대해서 극구 결사적으로 반발하는 자를 말합니다. 벌받은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 악마가 한 짓이 인간 본인이 하는 짓이 동일하다는 것이 발각될 것을 감추기 위함입니다.

성도에게는 이처럼 일반인에게는 나올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고생하다가 죽는 것은 마땅하다”는 겁니다. 반면에 종교의 세계가 목표하는 것이 신과 합일된 신비의 세계입니다. 그곳의 세계는 극한의 행복이 보장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7:13-14에 보면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어린 양의 피’로 희게 씻음받아서 이곳 천국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무시무시할 정도로 깨끗하게 된 것은 모두 어린양의 피의 효과라는 겁니다. 따라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어느 곳에 살았는가를 아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8:12에 보면, ‘바깥 어두운 곳’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마땅히 ‘바깥 어두운 곳’에 있어야 될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깥 어두운 곳’이 아닌 장소가 있을 겁니다. 사도가 된 바울은 그곳을 ‘십자가 안’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곳은 ‘내가 죽는 곳이요 그 죽은 나 안에 예수님이 사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 2:20)

성경 전체를 봐서 인간들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겠다는 신념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인간들은 조력자를 찾습니다. 조력자 찾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 겁니다. 사울왕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조력해주고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조력자로 여겼습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소득을 지켜주는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행 5:1-6).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들이지만 제단의 불이 모든 것들을 홀라당 다 태운다는 심판성이 있음을 소홀히 함으로써 죽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아버지되는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식을 더 아껴서 죽게 됩니다. (삼상 4:11)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주님을 자기만큼 귀한 분으로 생각한 적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이 계시는 그 공간 바깥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온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사람이요 십자가 달린 강도가 그런 사람입니다.

평생 돈을 챙긴 세리가 예수님에게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눅 18:13) 그리고 이 바깥 어두운 곳과 예수님 안의 세계에 중간에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사례가 구약에 나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언약 안의 인물로 선택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율법이 왕인 자신의 왕다움을 크게 키우기 위해 조력해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간음했고 상대의 남편인 우리아 장순을 살해했습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본디 모습을 알게 된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망해야 될 죄인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제사는 바로 자신이 상한심령임을 까발리는 겁니다.(시 51:17) 즉 인간이 조력자를 찾을 권한 없고 도리어 자신의 주인님을 찾아야 했던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 이 세상은 바로 이와같은 두 가지 상반된 세계상을 다 보여주는 매개의 자리에 하십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만나는 자신의 삶을 쓰레받기로 받아보면 모두다 쓰레기들 뿐이요 먼저 뿐입니다. 하지만 그속에 기이하게도 반짝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서 그 반짝임을 더욱 윤기있게 빛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도 자체가 두 가지 세계에 중간지점, 즉 ‘말씀의 막’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10에 보면,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애게 박혀있는 반짝이는 것은 무시무시한 깨끗함이요 의로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어넣었기에 인간이 아무리 빼고자하여도 뺄 수 없습니다.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악마하고 내기 하자는 겁니다. 즉 성도 본인의 열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말입니다. 성도의 존재이유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행 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야망조차 주님이 사용하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디모데전서 6장 6-8절(말씀의 막)-230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6-8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6-8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성도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도 아닌 사람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지족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만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을 사도바울은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내가 만족하면 되느냐? 그 기준이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성도의 특징은 ‘아무것도 없다’가 됩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가 되는데 그러면 왜 살았느냐? 주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살아왔다. 이렇게 돼요. 주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 말은, “주님께서 안 도와줘도 섭섭하게 여기지 말아야 될 자가 성도다.” 그렇게 됩니다. 이걸 다른 말로 정의 내리면 “이제 너로 인하여 더는 살지 말라.” 너로 인하여 살지 말라. 앞에 ‘너로 인하여’를 빼버리면 이 말입니다. ‘그만 살아라’라는 뜻이에요. 그만 살아라. 그만 살아라.

그만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 아무리 애를 써봐도
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건
결국 다 내 탓인 거겠지 뭐
혼자 기도를 해봐도
가질 수 없는 걸 바라고 있는
내 자신이 더 슬퍼 보였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너의
그 예쁜 눈동자엔 내가 이젠 없어서
우리 이제 그만하자
아프지 말라는 말도 잘 자라는 말도
우리 이제 그만하자

이 노래 가사가 로이킴이 불렀던 <우리 그만하자> 우리 그만하자. 이제 우리 그만하자. 아프지 말라는 말, 잘 자라는 말도 우리 그만하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발 그만하자, 이 말이지요. 성도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을 해서는 성도가 아니지요.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성도입니다. TV에 나오는 그런 자들이 죽었다 깨나도 못하는 말을 해야 그게 성도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 말 좀 하지 말고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 본래의……, 하나님이 도와주심, ‘왜 도와주지? 우리 힘으로 살라고 하면 되는데 왜 도와주지요?’ 그 자체 처음 자리, 그 처음 자리를 하나님께서 지금껏 양보한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자, 이제 새해가 되었으니까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올해 목표를 정해야 되겠지요. 제가 한 번 정해봤습니다. 본문을 끄집어내는데 제가 정한 본문은 말라기 1장 10절입니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이 대목이에요. “우리 그만하자. 교회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이게 올해 목표입니다.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교회라는 것 자체가 사기 집단이 될 수밖에 없지요. 주님요? 주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언제 주님을 나만큼 귀한 분으로 여긴 적이 있던가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그러니까 말라기 1장 10절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 문 닫자. 우리 그만하자.” 로이킴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야기해요. “우리 교회 그만하자.”

계속 교회 다니면서도 자기를 위해 사는데, 나는 내 힘으로 살았다고 우기고 있는데 주님께 답답할 일이 없지요. 그래서 이 말라기, 구약입니다, 이 구약에서 “성전 문 닫자. 그만하자.”라고 하시는 것은 신약에 따로 노리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있는 다른 교회의 모습이 따로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나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겁니다. 교회 문 닫자. 교회 문 닫고 어떤 교회가 되느냐 하면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그것, 내가 함께 끼어들어야 그게 교회라는 거예요.

왜 끼어드느냐? “내가 너희들 살게 해줬잖아.” 살게 해주신 분 중심으로, 그분의 진두지휘로, 그분의 진두지휘로 너희들은 내 도움으로 사는 대상자로 같이 있는 것, 이게 바로 천국의 모습이고 이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뭐냐 하면, “교회 문 닫고 교회 되자.” 교회 문 닫고 교회 되자. 이걸 응용하게 되면, “여러분의 가정을 문 닫고 가정되게 하자.” 가게 하시지요? 올해 목표는 가게 문 닫는 겁니다. “가게 문 닫고 새로 주와 함께 하는 가게 되자. 주님이 세우신 가게로 하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복음으로 인연을 다시 맺자, 다시 구성하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된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된 사람이 누구냐? 사도가 된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되기 전 사울 때의 모습을 성경이 아주 세 번씩이나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어요. 그 말은, 모든 인간이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를 위한 종교로 시작하니까 그게 하나님으로서는 우리 그만하자, 그런 사기는 나한테 안 통한다, 그만두고 출발을 뭐부터 하느냐 하면, 사울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사울로부터.

괜찮은, 건전한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나 괜찮지요?’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남이 안 하는 하나님 믿기부터 시작하는 괜찮은 존재입니다.’ 이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사울부터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저는 ‘사울의 신념’이라고 봐요. 사울에게는 나름 신념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 사울의 믿음, 사울의 신념이 뭐였습니까?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 때려죽이는 거지요. 그 사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몰랐어요. 하나님은 저기 저 신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울 세계가 추구하는 것은 뭐냐? 사울 세계가 추구하는 것은 신선의 세계에요. 종교가 추구하는 거지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더할 나위 없이 누리는 그곳을 향하여 지금부터 연속성을 가지고 돌파하자, 시도하자, 노력하자, 종교입니다.

이것 가짜지요. 실제로 가는 세계는 신선의 세계가 아니고 피 흘린 어린양이 보이는 세계입니다. 내가 멋있게 행복을 누리는 세계가 아니고요. 그것은 인간들이 조작해 만든 세계요 모든 종교의 이상향, 힌두고,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성당, 교회, 전부 다 모든 종교가 시도하는 것, 심지어 종교단체 안 다녀도 일반인들도 시도하는 것은 뭐냐 하면, 걱정근심 없는 완벽한 쥬이상스, 희열이지요, 최상의, 극상의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곳,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신적 쾌락을 말합니다,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을 마음껏 누리는 곳, 비록 지금은 마음고생 많지만 그곳이 있기 때문에 힘을 내서 가자. 그게 뭐냐? 그게 신의 세계다.

그것은 누구나 개나 소나 다 끄집어낼 수 있는 희망사항이에요. 오는 신을 기다리자.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여기서 그 고도가 신이거든요. 신을 기다리게 되면 신은 우리에게 멋진 선물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산타클로스를 차라리 기다리세요, 산타클로스를!

요한계시록 보세요. 천국은 그런 게 아닙니다. 천국은 어떤 분이 피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피 흘리는 어린양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7장 13, 14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전에 이야기했듯이 먼저 천국에 갔던 그 선배들, 선배들이 있는데 거기에 신입이 들어온 거예요. 신입이 오니까 “어? 너 어째 들어왔지?”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하얗게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을 똑같이 고백하면서 들어오고 있었던 거예요. 피 흘림을.

이 피 흘림이 어느 정도로 깨끗하게 하느냐? 무시무시할 정도로 깨끗해요. 사람이 너무 깨끗하면 무시무시해요. 그래서 이 무시무시한 깨끗함, 이것을 우리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우리 일상은 우리가 알다시피 쓰레기 같은 일상이지요. 쓰레기 같은 일상을 끌어모아 모세요. 거기에 뭔가 반짝이는 형광물질이 있을 거예요. 성도라면.

분명히 나는 더러운데 어떻게 해서 반짝반짝 반짝거리는 것들이 이 쓰레기가 방안에, 그래서 쓰레기 모으듯이 하루 일상의 조각들을 한번 모아보세요. 모아보면 거기에 성도라면 반짝이는 게 있을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빛이에요. 빛의 조각들이 내 일상, 무심코 하루를 지냈던 그 사이에 반짝거리면서 같이 섞여 들어오는 겁니다. 깨끗하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이것은 내가 한 게 아닌데요?’라는 느낌을 받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6장 6-8절을 이렇게 해석하시면 됩니다. 7, 8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 뒤에 보면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런 이야기가 죽 나오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뭐냐? 올해 목표는 “돈을 사랑하자.” 그리고 입는 것 먹는 것으로 족하지 않기로 아주 다짐을 해보는 겁니다. 올해 목표가 갑자기 굉장히 수월하게 되었지요. 무작정 돈을 사랑하고 더 끌어모으는데 진력을 다하는 하루가 되어 보세요. 그렇게 해봐야 돼요.

그렇게 해 봐야 반짝이는 것이 뭔가 눈에 들어올 거예요. 내가 하지 않았는데, 정말 내가 기대하지 않았는데 뭔가 주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 내가 기대하는 것은 올해 돈 모으는 거예요. 돈 모으는 것에 미쳐있는 한 해 2023년도.

그런데 거기에 있지 않았는데 거기에 섞여 들어오는 반짝이는 그 무엇, 그게 빛입니다. 그게 주님의 손길이에요. 그것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돈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지 않기를 마음먹을 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나는 애초부터 썩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뭔가 말씀대로 안 지키기 때문에 죄인이고 망한 게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는 망하는 데서, 죄인 데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 성경말씀을 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네가 지키면 천국 간다, 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준수하는 분은 네가 아님을, 너 자신의 노력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성경 말씀을 주신 이유에요.

교회 문을 닫아버리세요. 교회 그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아무리 교회 그만한다 할지라도 주와 함께하게 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 교회 이름은 ‘반짝이는 교회’에요.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있게 하는 거예요. 쓰레기와 그리고 반짝이는 것.

인간이 쓰레기라 하는 것은 욕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배설물을 조사를 해보세요. 따로 조사할 것도 없어요. 매일 하고 있는 거니까. 살펴보면 색깔이 똑같아요. 오줌 색도 똑같아요. 인간은 뭐냐? 똑같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만든 모든 차이와 개성은 인위적인 겁니다. 인간이 조작한 거고요.

실제로 인간은 똑같아요. 동일합니다. 동일하고 인간은 똑같은데 그 똑같은 것을 새롭게 구분하는 권위와 자격, 양과 염소를 나누는 이것은 주님 몫이에요. 문제는 뭐냐? 그 똑같은 배설물을 남김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차이를 의도적으로 유발하시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

그 기준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그걸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담에 의해서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간은 벌 받고 있어요. 인생 자체가 벌을 받습니다. 인생 벌 받기는 똑같이 벌 받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차이가 없는데 어떤 차이를 주셨느냐 하면, 벌주는 이유를 알라고 벌주신다는 것, 벌을 받는 그 이유가, 벌을 받도록 태어난 이유가 벌만 받는 게 아니고 벌을 받는 이유까지 함께 알라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게 성도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아닌 사람은 벌은 벌대로 받고 있고 죽으면서, 지옥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사력을 다하여 그 이유에 대해서는 거부해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하는 식으로 그 이유에 대해서는 거부하는데 왜 거부하느냐 하면, 악마가, 자기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을 악마가 싫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힘들고 어렵고, 인생 어느 누구도 고생해요. 고생 안 하고 사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생하면서도 그 이유를 내가 만들면 안 돼요. ‘아, 내가 나쁜 짓을 했구나.’ 이러면 안 돼요. 사울의 신념이라는 것은 뭐냐? 사울의 신념은 아까 제가 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세상, 여호와와 함께 하는 세상, 그 세계가 진리로 확정되었다고 자부했던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거예요. 종교적 욕망, 내가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욕망은 내가 절대적 세계에 들어가는 것, 그게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의 최대치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본인이 그럴 만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럴 권리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생각 못 했어요.

그럴 때 십자가 고난받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탁 찾아왔을 때 사울은 ‘바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 극한치가 인간이 뿜어낼 수 있는 죄의 극한치’라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거예요.

내가 누굴 죽이고, 누굴 살해하고, 누굴 때리고, 하는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한 이유가, 내 속에서 자생했다, 생산되어왔다는 겁니다. 날 건드리기 전에 남을 친 거예요. 내가 갖고 있는 이 신념의 순결함, 내 신앙의 온전함, 절대적인 여기에 대해서 훼손하면 나는 치겠다는 겁니다.

그 사울이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 주입된 것이,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이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이 미움받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 이유의 연장이라고 너는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끝난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기서 ‘함께’ 죽는 거예요,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울, 정작 사울에게 닥친 현실은 주님과 함께 죽어야 된다는 그 현실로 다가온 거예요. 그 고백할 때 사울은 십자가 사건의 15년 후였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 달릴 때 함께 죽지 않았어요. 십자가 옆에서 죽은 사람은 두 명의 강도밖에 없었습니다. 실증적으로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고고학적으로 추적해 보면 딱 세 명이었어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여전하다는 거예요. 계속되고,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니까 “나는 십자가에 죽어야 될 이유를 증거 하는 그러한 매개체로, 운반체로 나는 주께서 살릴 때까지 살아야 된다.”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이유에요.그 이유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구약성경을 바로 그러한 안목을 가지고 해석을 다시 내렸어요. 구원받는 권한은 나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을 다 해버리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따라서 해석을 다 해야 되는데요. 왜냐하면 그게 성령 받은 증거기 때문에요.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구약입니다, 구약 여호수아 11장 20절에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이 대목입니다.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대로 실행하게 함이라’ 이런 뜻이에요. 그 언약의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어떤 경우라도 저주받은 자 꼭 되어야 되고, 너는 어떤 경우라도 은혜받지 못하는 그런 자가 꼭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른 한쪽은 무슨 뜻이냐? ‘다른 한쪽은, 너는 어떤 경우 무슨 짓을 해도 은혜는 은혜대로 유지가 되어야 되고, 네가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너는 하나님의 저주받는 자 되지 않고 사랑받는 자 되어야 된다.’는 그 내용, 양쪽이 다 있어 줘야 이게 언약이 온전하게 돼요. 양쪽 다. 한쪽은 저주, 한쪽은 사랑, 이게 창세 전에 결정된 사실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인간들이 모여서 회의해서 된 게 아니에요. 이것은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죽었다 깨나도 알지 못하는 내용이에요. 사울의 신념, 사울의 믿음, 그것은 바로 ‘나는 괜찮다’부터 시작한 신념과 믿음이라면 사도바울의 시작은 그런 사울의 신념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에 주신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신념으로 새롭게 거듭났고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이 사도바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해석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자,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뭐가 날라가 버리는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내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 자체가 중심이 날아가 버려요. 날아가 버리면 나는 어디에 새롭게 위치하느냐? 그것은 바로 천국과 지옥을, 그 두 개를 연결하는 경계막, 말씀의, 복음의 막(膜)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기준이 되어서, 예수님의 그 피 흘림으로 하얗게, 무시무시하게 하얗게 되어버린 그 신입들, 천국 가는 신입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로 희게 되었다는 그 고백, 그 고백을 이 지상에 죽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를 통해서 그걸 실시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말씀의 막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말씀의 막, 중간의 그 말씀의 막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말씀 지킨다, 안 지킨다, 가 우리의 소관을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돈을 사랑해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네가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그랬던 너의 모습과 이제는 돈 사랑을 못 하게 만드는 그 사랑 사이에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그 중앙에 있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도가 뭐냐? 딱 하나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본인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증인 되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중간에 위치한 것처럼 성도도 거기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간에 위치해서 거기서 뭘 하느냐? 이것 하면 돼요. 구약에서 또는 신약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곧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저쪽으로 빠져나갔는가, 그 사례를 찾으면 되고 또 어떤 사람이 저 예수님 밖에 있다가 어떤 경우를 통해서 예수님 안에 들어왔는가, 그 들락거리는 그 모습을 성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증거케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 12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서 ‘바깥 어두운데’가 어디지요? 나라의 본 자손 소위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했던 그들 구약 사람들이지요. 유대인들이지요. 그들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바깥 어두운데, ‘바깥’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바깥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은 예수님에 의해서 두 쪽으로 쪼개졌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깥인데 어떤 곳인가? 밝은 곳이 아니고 어두운 곳, 바깥 어두운 곳과 그리고 여기 밝은 곳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

이것은, 인간으로 시작해서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 자체가 괜찮은데 왜 나를 일방적으로 바깥에 세우지? 이것은 하나님의 건방짐인데?’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그 말이지요. ‘내 허락도 없이 왜 나를 바깥에 한데 세워? 추운데.’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출발점을 나로부터 출발하면 이게 안 보이고요, 사울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바깥 어두운 데 있었어요. 본인이 그걸 인식을 못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바깥 어두운 데서 따뜻하고 밝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제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네.’가 아니라 그 경과함으로 통과했던 그 경계선,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도로 삼은 겁니다.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꿔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초반에 나오는 제자들, 그 제자들 입장도 우리하고 똑같은 입장이에요. 제자들이라고 뭐 더 어드벤티지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제자들 입장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2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게 무슨 말인지. “2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거 수능 국어시험에 냈으면 좋겠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왜냐하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데 없는데 뭘 빼앗길 게 있겠어요? 있으면 있는 것으로 충족되는데 그걸 뭐 더 있게 돼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중심을 네가 있는, 태어난 너 중심으로 보느냐, 너 중심으로 봐서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느냐, 아니면 너 중심을 떠나서 중간지점에 와서, 말씀의 자리에서 보고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말씀의 막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말씀의 막이 있는 자는 더욱더 말씀의 깊이를 더 받게 되고, 말씀의 막에서 떠난 자는 처음에 있었던 말씀의 막도 빼앗기게 되리라, 없어지리라, 그런 뜻이에요. 따라서 그런 것이 예수님의 제자를 뽑은 취지기 때문에 마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할 때 이렇게 전도합니다. 8-10절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완전히 제자들을 거지꼴로 만들어 버렸지요. ‘너를 위해서 네게 필요한 것은 너에게 더이상 없어도 된다.’는 뜻이에요. 나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그 있음의 개념은 이제는 바이바이, 하라는 겁니다. 이제는 그런 것은 너한테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동안 내게 필요해서 내게 있다는 그것 때문에 네가 악마한테 농락당했으니까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내게 있다는 그 생각은 너는 이별하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 나오지요. 거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30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거반 죽게 되었다는 그 말, 거반 죽게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이 예를 들면서 시작점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물이 괜찮은 사람……,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고 많이 배운 사람……,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거반 죽게 된, 그러니까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거반 죽게 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더 이상, 더는 내가 나를 살리는 모든 방식이 작살난 사람이에요. ‘내가 이런 식으로 한평생 먹고 살아야지.’ 하는 것이 완전히 허락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말씀의 시작점으로 딱 거기에 두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치료하는 사람 아니에요. 거반 죽게 된 사람이에요.

그래야, 그래야 양쪽이 다 보이지요. 바깥 어두운 쪽이 어떤 쪽이고, 밝은 쪽이 어떤 쪽인지가 다 보이는 거예요. “지금껏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게 갈비인가, 통닭인가. 안녕하세요. 수원왕갈비!” 지금껏 이런 맛은 없었다. 갈비인 듯 갈비 아니고 통닭인 듯 통닭 아니고. 양쪽 다를 보는 것. 그 가운데서. 우리가, 본인이 원하지 않았어요. 주님이 보고 있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같이 보는거요, 그 가운데서 양쪽을 보게 되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주님 보는 식으로 둘로 쪼개서 볼 수 있는 안목이 발생됩니다.

한쪽을 저는 이렇게 보겠어요. 한쪽을 조력자로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본인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교회를 가든 성당을 가든 어디에 가도 조력자를 찾아요. 조력자라 하는 것은, 내가 열심히 하는데 좀 도와줄 사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열심을 내는데 안 도와주면 진짜 하나님은 양심 없다.’ 이런 식이에요. ‘내가 농땡이 치는데 안 도와주는 것은 말을 안 하겠는데 열심히 하고자 하는데 왜 하나님은 내 청춘을 안 돌려 줍니까? 하나님 내 인생 왜 이렇게 망칩니까?’ 하는 것.

그 사람들이 구약에 나오지요. 왜 나와야 되느냐?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는 그 사례들, 경우들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뭐냐? 다윗과 함께 있었던 사울 왕이에요. 사무엘상 28장 17절에 보면 그 사울 왕을 누가 도와줘요. 이 사울 왕이 사무엘 죽고 난 뒤에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갑니다.

신접한, 신이 접한 영적 세계와 통한다고 소문난 권사 이런 거요, 뭔가 신비의 세계를 자기의 뜻대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자부해서 돈벌이하는 사람들, 기도원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기도원에서 유행되는 개념들이 있어요. 항상 언어라 하는 것은 그 공간에 통용되는 개념들을 함축하는 것이 언어기 때문에 기도원에서 통하는 개념 중 하나가 ‘골방기도’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 교회는 거의 못 들어봤지요. 골방기도. 조그맣게 토굴 같은 것 만들어놓고 혼자 기도하는 거요. 그 기도 왜 합니까? 신접한 여인 되기 위해서, 신접한 사람 되기위해서, 남이 갖지 않은 주특기를 갖는 거예요, 종교주특기를 갖는 겁니다. ‘이런 재주 없지? 나는 중보기도 하는 재주 있다. 내 기도 응답률이 70퍼센트가 넘는다.’ 뭐 이런 거요.

‘그런 남자가 교회 목사로 섬기면 올해는 교회가 부흥되겠다.’ 뭐 장로들이, 무지한 장로들이 그런 것을 원하겠지요. 그러면 연초에 목사는 말씀 상자 하나 갖다 놓고, 봉투 받고 뽑기하는 거예요. 말씀 뽑기. 말씀 뽑는데 뽑는 것마다 전부 다, 전부 다 괜찮은 긍정적인 말씀만 나오는 거예요.

다방 탁자 위에 있는 행운의 뽑기, 안 돼도 과자 나오는 것 있잖아요. 행운의 쿠키, fortune cookie 주는 것과 똑같은 거지요. 그것 하게 되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될 것이다.” 이런 것 뽑혀 나오는 것처럼. 봉투는 일단 받고.

이게 뭐냐 하면, 옛날 조선시대 때부터 해온 토정비결이에요. “당신 5월 달에 동쪽에서 오는 목씨 성을 가진 귀인을 만날 것이다.” 목씨 성은 뭐냐? 이(李)가에요, 이가. “동쪽에서 오는 이가 성씨를 만날 때 당신의 행운이 와서 당신 쨍, 하고 비로소 해 뜬다. 인생 만회할 수 있다. 7대 0 인생, 9회 말에 8:7로 역전된다.” 뭐 이런 식으로.

그거 하나 보고 포항까지 사람들이 가잖아요. 차 몰고 포항까지 가요. 간절곶은 울산에 있습니까? 해 뜨는 것 보려고. 조력자를 원해요. 교회에서. 교회 오는 이유가 조력자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접한 여인 불러냈잖아요.

그런데 누가 도와주는가? 사무엘상 28장 22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지옥 가는 길 편히 모시겠습니다. ‘나에게 도움을 원했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확정된 운명에 대해서 제가 말은 못 하겠고 그냥 힘이나 돋우소서.’ 하고 떡을 주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돕는 세상, 이게 바로 인간의 국가의 제도의 기준 원칙입니다. 공동체에요. 공동체 의식. ‘인간이 돕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냐.’ 이게 인간국가의 설립취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초월자 되게 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 대접하면 당신도 나 대접해야 돼.’ 이런 거요.

또 있습니다. 또 누가 있느냐 하면,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 믿은 게 뭐냐? 자기의 일,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조력자 하라고 예수님을 믿은 거예요. 도와주기를 기대하다가 튕겨 나간 것이 가룟유다입니다. 이런 게 왜 성경에 나오느냐 하면, 바깥 어두운데 가는 자들이 뭘 노리느냐를 보게 하는 거예요.

또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헌금할 마음이 생겨서 헌금하는데 반을 냈어요. 반, 생각했던 것의 반을 냈어요. 땅을 팔고 그 값이 15억인데 7억 5천 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7억 5천 엄청나잖아요. 다른 사람들 보면 기절할 거예요. ‘야~, 믿음 좋구나.’

그런데 그 부부가 사이좋게 하루에 먼저 남자 죽고 뒤따라 여자 죽고 다 죽었습니다. 왜 죽였느냐? 속였다는 겁니다. 애초에 네 것이 없는데 내 것 있다, 그것부터 출발 자체가 사울부터 출발한 게 아니고 나 괜찮아, 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환한 빛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사례로서 그런 경우를 발생시킨 겁니다.(행 5:1-6) “어딜 감히 여길 들어와?” 이런 식으로요.

또 있었어요. 사무엘상 4장 11절에 홉니와 비느하스, 왜 이렇게 사이좋게 짝을 이루는지 몰라요, 홉니와 비느하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한테 교육을 잘못 받았어요. 아버지가 하나님 믿는 목사인데, 요새 같으면 목사지요, 아버지가 제사장이지만 차마 자식이 하나님 법 어겼을 때는 자식이 귀하기 때문에 별 제지를 못 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 자식이 횡포를 부리는 것과 똑같아요. 자기 아버지 백 믿고 설쳐대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 국회의원이라고 자기 맘대로 돌아다니는 애 있지요. 그것과 비슷한 경우에요.

또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이것도 뭐 완전히 듀엣이에요, 듀엣.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레위기 10장에 보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제단 불을 들고 성소에 들어가야 돼요. 이 사람들은 제사장인데요, 제단 불을 들고가야 되는 이유가, 그 제단이 무슨 제단이냐?

여러분이 철판구이 알지요, 철판구이. 철판구이 위에 오징어나 여러 가지 해산물 올려놓잖아요. 그 밑에 불을 지를 때 가스 불로 하잖아요. 제단 불은 뭐냐 하면, 제단 위에 놓인 것을 몽땅 다 불로 태워야 돼요. 진노로 다 태웁니다.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듯이 새까맣게 숯이 되도록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 태운 불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태운 불은, 그대로 태웠다, 어떤 존재도 이 불 위를 감당 못 한다, 불 위에 가면 다 타 죽어야 마땅하다, 마땅하다, 마땅하다, 그 ‘마땅하다’를 연결, 연결시켜야 되는데 그 불을 운반하는 그 당사자가 “형님, 오늘 우리 이거 빨리하고 퇴근합시다.” “그래, 그래.”

갑자기 생각을……, 제단 불, 감당할 수 없는 그 불, 고이 그 취지를 유지를 해줘야 되는데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때 제단 불 말고 다른 불로 한 이유가 뭐냐? 술을 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술 먹고 본인이 본인의 모습이 아닌 환상적인 자아상을 따로 챙겼기 때문에 이런 변이 일어난 거예요.

제가 술 먹지 말라는 이유가, 가짜 자아를 유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허풍스럽고, 허세 부리고 큰 소리, 평소에 남보고 끽소리도 못하다가 술 먹고 큰소리치고, 술 먹고 뭐 집안의 가장 노릇 하는 그런 것, 그게 허세고 가짜거든요. 술과 담배를 피우면 그게 가짜가 돼요. 속이는 행위에요, 그게. “스트레스 받아서 한잔 먹었다.” 그거 한잔 먹고 가짜 자아를 그렇게 거론하는 겁니까?

가짜 자아를 가지고 들어오니까 그 불태우는 불이 얼굴을 덮쳐서 그 자리에서 홀라당 다 타서 죽었습니다. 그 소리 듣고 백성들이 얼마나 놀랐는지요? 놀랄 필요 없습니다. 원래 주의 도움으로 그만큼 살아왔으면 됐지 자기가 더 살 이유가 없거든요.

이런 조력자를 원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본인이 거짓되고 독종이에요. 하여튼 독종, 인간은 독종이에요. 인간을 독종으로 만든 사회, 이 사회를 무슨 사회라고 하느냐 하면, ‘피로사회’ 탈진하는 사회,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벌이가 만만치 않으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계속 탈진하듯이 돈벌이에 내몰리는 기계, 기계보다 더 못한 존재, 오늘날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독종이니까 악착같이 괜찮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언젠가는 잘 ~될 거야’ 언젠가는 잘 될 거야, 계속해서 시도하는 거예요. 자기가 거짓인데. 그러니까 인간과 돈은, 여기 오늘 본문은 “있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너는 아무것도 없어도 원래부터 너는 그렇게 시작했잖아.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이 현실은 그게 아니에요.

돈과 인간이 일(心)동체가 아니라, 일신(身)동체, 몸과 하나가 되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버드(bird,1988)>라는 영화에 보면 재즈밴드가 나와요. 그 밴드의 색소폰 주자가 주인공인데 이 사람이 어설퍼요. 그래서 드럼 치는 사람이 짜증이 나서 심벌즈 풀어서 던져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밴드 하려면 하지 말자.”

그래서 정신이 번쩍 난 이 사람이 혼자서 연습합니다. 색소폰의 달인이 되어서 다시 왔어요. 그동안 연주 잘 못 한다고 놀리던 라이벌 색소폰 주자가 보니 자기보다 더 뛰어난 거예요. 자기보다 너무 잘 불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의 표현이 이거예요. 자기 몸과 하나였던 그 색소폰, 자기가 평생 불었던 생계수단이었던 색소폰을 강물에 집어 던져버립니다.

자기 자존심이었던 겁니다. 돈은 뭐냐? 몸에 붙어 있는 악기입니다. 나를 표현하는 악기, 돈 벌면 좋다고 템포 빠른 기쁜 노래가 나오고, 돈 없으면 단조로 해서 슬픈 음악이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이 몸이 악기인데 그 악기의 재질은 뭐냐? 돈입니다. 돈으로 만든 악기, 이게 현대인입니다.

이제 나이 들어서, 요새는 뭐 40대도 퇴직 강요받는다는데 50대에 퇴직하게 되면 이게 소리가 안 나요. 픽, 픽, 소리가 안 나요. 왜? 돈이 없기 때문에. 삑, 삑, 제대로 소리가 안 나요. 왜? 자기를 표현할 길이 없어요. 허세 떨 그게 없습니다.

예수 믿다가 예수님이 자기의 원대로 안 해주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이쪽 어두운 데서 밝은데로 온 사람은 어떻게 왔느냐? 이 사람은 예를 들어서 강도,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어갔던 여자에요.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가 이쪽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 돈만 챙기던 세리.

제가 올해 목표를 “돈만 사랑하자” 한 이유를, 이제 그 깊은 취지를 아시겠지요. “돈만 사랑하자” 이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탈진하도록 살아보세요.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 실습을 하면서. 그 실습을 굳이 올해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껏 평생 해왔으니 뭐 잘 하실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천당 간다고 여겼던 그 제자들, 주께서 요한복음 13장 끝에서 “오지 마라.” 베드로가 “제가 목숨 바쳐 가겠습니다.” “네 목숨 그게 가치 있다고 네가 지금 착각하지 마. 오지 마. 네가 목숨 바쳐도 못 올 곳이야. 천국은 네 생명 바쳐도 가지 못할 곳이야. 네 생명 갖고 들어올 생각 하등 하지 마라.” 그게 요한복음 13장 끝에 나와요.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그거 하지 마. 정성과 목숨 바치지 마.” 그런 것은 교회 목사한테나 바쳐라.

그런 것 하지 마. 다시 말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버티지 말라는 거예요. 버텨도 소용없기 때문에 버티지 말라는 겁니다. 철야 하고, 뭐 금식하고. “너 하던 것 있잖아. 돈 버는 것, 그거 해! 그거 하라고!” 그렇게 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쓰레기같이 산 하루 일과를 한번 빗자루질해서 긁어모아 보라고요.

이것도 쓰레기, 저것도 쓰레기인데 ‘어? 저게 왜 있지? 반짝, 반짝, 반짝, 빛나는 게 있을 거예요. 그게 죄 용서입니다. ’아~, 죄 용서가 되기 위해서 짝이 있어야 되는구나. 내가, 쓰레기 같은 내가 짝이 되어야 죄 용서가 빛이 나는데 어느 정도 깨끗하냐?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지막지할 정도로 깨끗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하면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이 사실 오늘 설교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절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무지무지하게 깨끗한 거예요. 갑자기 의가 훅 들어와요. 의가 훅 들어와요. 반짝반짝, 훅 들어 온다고요. 그러니 이것은 뭐냐? 내가 벌어들인 돈이 아닌데 돈이 아닌데 돈보다 귀한 것이 훅 들어온 거예요.

이게 주께서 그냥 주시는 겁니다. 바깥 어두운 데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확정 짓는 거예요. 바깥 어두운데 돈에 미쳐서 살아가는, 그래서 핍절한데 그야말로 탈진하면서까지 돈 벌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인간을, 그 바깥 어두운 세계를, 악마가 자기가 한 짓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훔쳐서 갖고 놀던 그 어두운 세계를 주께서 훅 들어오듯이 “주의 십자가 피로 의롭다고 확정하셨느니라.” 주님의 자신감입니다. 주님의 자신감이에요.

주님이 자신만만할 때 내기를 해요. 욥기에 나와요. “마귀야, 나하고 내기할까?” 마귀가 하는 말이 “욥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게 있기 때문에 주께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 내기 한 번 할까? 욥에게 다가간 그것이 욥의 것인지 내가 집어넣은 것인지 한번 내기해 봐.” 주님의 자신감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제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어떤 교회 가니까 ‘올해는 믿음이 커져야 됩니다. 믿음이 커져야, 여러분이 성화 되어야 천당 갑니다.’ 하는데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라고 질문을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했어요. “마포대교가 커지는 것 봤습니까?”

마포대교야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그러면 커집니까? 믿음은 관계에요. 그냥 공공기관에서 설치한 대교가 마포대교에요. 그냥 설치한 거예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내 안에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 시킨 대교가 바로 마포대교고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 9절에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뒤 구절에 실어놨어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 말이지요. 마포대교에요. 그냥 꽂아 넣은 거예요. 이게 왜 커집니까? 이상한 거지요.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중간의 사례들, 강도, 세리 이런 사람들, 중간에 어떤 위치가 있는데 그게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에 속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왕이 될 때 율법, 내가 더욱 선한 왕으로, 칭찬받는 완전한 왕으로 율법이 나를 조력해 줄줄 알았어요. 율법이!

그런데 하나님께서 뒤태가 아름다운 밧세바라는 부하의 아내를 간음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것을 미필적 고의로 조장해서 남편까지 살해했잖아요. 다윗이! 그럴 때 다윗이 알았던 것은, 내가 누구의 조력자를 찾을 위치에 있지 않고 나의 주인님을 찾아야 된다는, 내 주인님이 나에게 찾아와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그분이 주신 말씀이 어떤 내용이냐, 그 언약이 어떤 내용이고, 장차 십자가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지속 되느냐를 보여줄 하나의 종으로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거예요. 그 왕을 왕 답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간음하게 하셨고, 살인까지 저지른 겁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올해 목표는 왕이 되세요. 이제 목표하나 더 생겼다. 돈 사랑에다가 여러분이 최고의 왕이 되세요. 솔로몬도 자기 아버지가 다윗이니까 자기도 진짜 왕인지 알았어요. 그런데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아내들과 그 아내들이 낳은 자식들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외교정책을 펼치다 보니까 혼인관계에 의한 전략을 많이 취한 거예요. 일종의 인질로 잡아둔 거예요.

그렇게 하다가 우상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지요. 아내를 위한 그 나라 친정종교를 위해서 성전까지 세워준 사람이 솔로몬이에요. 그랬던 솔로몬이 다시 밝은 곳으로 왔어요. 그게 전도서 1장 1-2절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솔로몬이지요)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도 같으면 이 문자에 뒤에 “ㅎㅎ, ㅋㅋ” 안 그러면 “^^” 이런 것 쓸 것이고, 성도가 아니라면 ‘아이고, 아이고, 헛되고 헛되구나. 나는 자연인이나 할래. 지리산이나 들어갈까?’ 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왜 목표가 왕이 되는 것, 그리고 돈을 사랑하기로, 올해는 부자 되세요, 부자 되기로 왜 계획을 못 세웁니까? 왜 그럴 자유를 못 누려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벌써 하고 있는데 괜히 지금 강조하고 있네요.

돈을 사랑하시고, 최고가 되시고, 남한테 지지 마시고, 자존심 세우시고, 여러분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펀드도 두세 개 포트폴리오 잘 하시고, 일단 교회 문은 닫읍시다. 문은 닫고,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아멘, 닫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합시다.

그리고 봉사 좀 했다고, 그거 다 지난 일이에요. 지난 것 다 쓰레기 된 거예요. 쓰레기인데, 봉사하는 사람 올해는 반짝반짝 빛나게 봉사하시고, 아무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걸 통해서 본인이 죄인 된 것을 ‘야~, 이게 내 자존심이구나.’ 그걸 발견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획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고 싶은 욕망 다 펼치게 해주시고, 그걸 통해서 애당초 우리가 망해야 되고 죽어야 될 존재인 것을, 기쁨으로 쓰레기로 받아들이는 귀한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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