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갈라진 내부

아빠와 함께 2023. 1. 11. 10:18

갈라진 내부 

2023년 1월 8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9-10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인간 내부에는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는 것이 없기에 인간이 내세우는 것은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유는, 그들 안에 악이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 이외에 갈데없는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건질 게 발생되는 겁니다.

원래 인간 세계는 갇혀 있습니다. 마가복음 1:10에 보면,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동안 인간 세계는 하늘 아래 갇혀 있는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서로를 모방하면서 자기네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인간들은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게 된 겁니다. 자체적으로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교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 자체가 현 인간 세계가 원치않는 내용임을 분명히 하고서 주어지는 겁니다. 인간들이 반디시 기피할 만한 내용이 복음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뭘 원합니까? 이미 죄의 통제와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뭘 원합니까? 그들은 살고자합니다. 살기 위해서 그들을 뭘합니까? 돈을 버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에 사력을 다하고 있었고 그 방향은 돈버는 쪽이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19:22에서,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의 모습이 나옵니다. “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복음이 뭔가요? 그것은 재물을 원하는 자들을 근심케 하는 겁니다.

사람이 재물을 원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겁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우리를 죽이는 방법은 말씀의 위력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 자체가 우리 내부에 쑤시고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을 차지하는 괴물이 눈을 뜹니다. 잠복되어 있는 괴물이 일어나 분노하고 복음을 내쫓도록 힘을 씁니다. 즉 인간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악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인간 내부의 악을 끄집어내기 위해 인간을 미끼로 사용하신 겁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이런 증상은 인간 내부가 두 개로 나뉘어지는 현상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서 천국에 가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지옥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천국도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 천국 왔어요”라고 한다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지옥은 어떤 곳이었던가요?”라고 말입니다. 지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하는 곳입니다. 즉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꼭 잃어버려야 할 이유가 상실됩니다. 자신이 잃어버려야 될 이유가 상실되면 자신이 얻어야 될 이유도 없는 자가 됩니다.

천국에 가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자신의 행복도 아닙니다. 자기 구원을 챙길 수 있어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행 1:8)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깨서 해내십니다.(마 19:26) 성도의 내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과 본인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둘로 쪼개져 구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도저히 건너 올 수 없는‘불연속적인 간격’이 갈수록 넓혀집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여성이 되셔서 자신의 자식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여자의 후손’입니다. 처녀 마리아는 남자와의 관계없이 아기를 임신하게 됩니다.

여성은 남성으로 도움받으면서 생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 없음’은 곧 ‘죽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그 죽음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임신하고 해산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리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마리아를 선보였던 그 여성의 본질을 친히 자신의 자리로 삼아서 새로운 자식을 낳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6) 바로 인간 속의 눈 껌뻑이고 있는 악마가 가장 무서운 하는 소식이 이 소식입니다.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 12:4)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은 자기 내부에 하늘의 요소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 요소는 바로‘인간으로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 해내는 것과 인간으로 해내지 못하는 일은 성도 안에서 특수하게 공존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고르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 세상이 들으면 가장 무거운 말씀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국에서 하나님의 불심판의 정당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그 어떤 주장도 이 세상이 결국에는 불로 심판받는 다는 사실과 통하지 아니하면 다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구멍에 빠진 탁구공은 후벼 파내서 건지는 것이 아니라 물을 구멍에 부으면 탁구공이 가볍게 올라오듯이 무거운 심판의 말씀을 우리에게 부으면 우리는 ‘나는 더 살아야돼’ 라는 생각까지 참으로 경솔하고 가벼운 말을 들리면서 그 말씀의 위력으로 천국으로 내몰리는 식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안에 드디어, 마침내 건질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지옥과 천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를 사모하고 지옥으로 다가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디모데전서 6장 9-10절(갈라진 내부)-2301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9-10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건질 만한 본질이 있을 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건질 게 없는데 구원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할 때는 인간이 구원대상이 안됩니다. 건질 게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건질 것을 집어넣고, 집어넣고 건지지요.

뭘 건지는가?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성경에서는 선만 건지는 것이 아니고 악도 같이 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악을 건지기 위한 미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나한테 이런 악이 있었다, 하는 이것도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의 눈앞에 다 밝히 드러나야 돼요.

모든 인간, 심지어 예수 믿지 않은 사람도 죽고 난 뒤에 부활 되어야 합니다. 악은 악대로 건지고 선은 선대로 건져서, 의는 의대로 건져서 그래야 주님 앞에서 천국과 지옥은 의도적으로 친히 주님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구원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고 심판주도 되시거든요.

심판주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지옥 만들고, 구원자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천국 만드신 겁니다. 우리는 그냥 농락당한 거예요.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 악에 대해서 계속해서 파고 들어갑니다. 악이 뭐냐? 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악이에요. 인간은 악만 남았다. 인간은 악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그게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의를 집어넣어서 의를 집어넣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그 한계를 분명히 정하시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복음이 또는 성경 말씀이, 율법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은 평소에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 이 말씀도, 성경 말씀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고 뭐 백 독이고 천 독이고 열심히 Q.T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복음, 말씀이 우리 속에 오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곧 그것이 악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시범조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는데 그 이스라엘 사람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가 저주받아야 될 자로 애초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예요. 그래서 이 복음말씀도 그렇고, 율법도 그렇고 먼저 선을 행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악이라는 사실, 악이 너를 통제하고 있고 악이 너에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말씀 주신 거예요.

잠자는 악을 깨우는 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복음을 들어야 되는데……”, 여러분 복음 들으면 죽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우리는 본능상 복음은 기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살고자 하면 복음을 피하세요. 오늘 본문 말씀이 그거예요. 살고자 하면 돈을 밝히세요.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복음 앞에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한다는 것은,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앞에 뭔가 붙는 말이 있어요. ‘살고자 하기 위해서’ 뭘 한다, 가 돼요. 나는 뭘 한다. 그 앞에 뭐가 붙느냐? ‘내가 살기 위해서’ 뭐든지 한다, 에요. 살기 위해서.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인데요?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도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나는 너희에게 예수님이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한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여러분 다들 알고 있지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 예수님의 죽음만 알아야 되느냐 하면, 그 외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무의미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위에서 보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는 그런 마음도 우리가 같이 알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마가복음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세례받을 때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막혀 있다는 사실이에요. 하늘은 막혀 있어요. 막혀 있어서 예수님 오실 때만 찢어지고 그 외에는 찢어지지 않습니다. 막혀 있어요. 따라서 예수님께 성령이 오실 때 그냥 오시는 게 아니고 하늘을 찢어야 돼요. 막혀 있으니까, 봉쇄되어 있으니까, 닫혀 있으니까 이걸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찢어버리고 하늘의 것이 오게 되면 그때 우리 마음속에, 우리 마음속에 내가 하나라고 여겼던 우리 내부도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로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그때부터 분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악이며 내가 할 수 없는 것만 의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그게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데 내가 할 수 없는 일, 그러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 내가 살고자 해서 뭔들 못하리, 뭔들 하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네가 돈을 사랑한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만 할 수 있어요. 박쥐가 깜깜한 동굴 속에서도 활발하게 사태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초음파를 투사를 해서, 초음파가 부딪혀서 다시 반사되어서 나온 것을 가지고 자기의 공간개념, 지각개념을 갖거든요.

캄캄한데도 움직이면서 먹이를 잡는 이유가, 생존하는 이유가 초음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음파를 쏴서 그 대상에 대해서 저게 먹잇감인지 아닌지 민감하게 작용하듯이 인간 속에서 초음파 같은 게 나오는데 뭐냐 하면, 돈에 대한 민감함이 쏘아져 나와요. 박쥐가 쏘듯이 돈에 대한 민감함, ‘25억 줄 테니까 수련회 참석하겠습니까’ 할 때 민감하게 작용하지요. 25억? 돈으로 인하여 서로가 마음이 통해요. 뜻이 통하고요. 돈으로 생각해서. 왜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을 찾는 그 초음파를 쏘는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성경에도 그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19장 22절에 부자 청년이 등장하는데 이 부자 청년이 영생 얻고자 예수님에게 찾아왔을 때 부자 청년은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영생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영생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영생 얻는데, 할 수 있는 것으로 구원을 못 받아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건질 만한 본질이 없기 때문에. 악을 건져도 주님이 건지는 거예요.

그런데 22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와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근심하며. 돈이 많은 것이 유일하게 근심이 되는 경우는, 영생 앞에서뿐입니다. 영생 앞이 아니면 돈 많은 것은 시시덕거리기 좋은 거예요. ‘아~, 나 미치겠어. 나 왜 이렇게 성공했어?’ 이렇게 자기가 자기한테 감동 먹고 그래요. 그런데 영생 앞에서는 돈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지독한 근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근심되는 것만 챙기기에 바쁜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와도 얼마나 챙길 것이냐를 포기 못 하고 교회 나와요. 얼마나 챙길 것인가, 얼마나 소유할 것인가, 얼마나 내 영혼이 행복하고 편할 것인가?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네가 뭘 챙길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은혜받았어요, 은혜받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증인 되라고 한 거예요. 너를 떠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복하고 내가 은혜받는 것도 나의 증인 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은혜받았다, 복음 알고 기뻤어요, 나는 이제부터 마음이 안정되었어요, 그것 자랑하라고 교회 온 게 아니에요. 나 자신을 떠나라는 거예요. 구원은 반드시 지옥을 통과한 적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은혜받고 참 행복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지옥이 어떻게 생겼던가요? 몰라요. 그러면 이것은,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반칙이지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반드시 지옥을 통과해야 돼요. 이게 탕자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에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이 어떤 데던가요?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가 그 이야기해줍니다. “지옥이 어떤 덴가요?” 물으면 “지옥은 돈을 사랑하는 곳이었습니다.”라고 과거완료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돈을 사랑했는데 그 이유가,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내가 밥 먹고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게 곧 지옥이었습니다.

그때는 지옥인지 몰랐지만 주께서 나를 미끼로 사용해서 ‘이게 지옥이야’라고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님께서 작용을 해주신 거예요. 인간세계는 서로가 닮아가기 때문에, 너도 돈 좋아하고 나도 돈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단체가 되고 나중에 국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섞여 있을 때 네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섞여 있을 때는 이 악이라는 것, 절대적 악, 절대적 죄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네 생각 내 생각이 똑같은 생각이거든요.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라는 사람이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소유가 뭐냐? “소유권은 ‘자연+인간의 노동’ 그게 자기 소유가 된다.” 그렇게 말을 했어요. 나무에 주인이 없는 감나무가 있을 때 거기에 감을 따는 노동을 하게 되면 모아서 챙긴 감은 나의 소유가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면 그 소유권에 대해서 사회공동체, 인간공동체, 곧 국가가 그걸 법적으로 인정해줄 때 그게 소유권이 되는 거예요.

그랬던 그 소유 개념이 19세기 말, 180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라는 사람이 이걸 달리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소유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갖고 있던 그 사용의 가치, 소중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니고 시장에 나갔을 때 남들이 그걸 교환해줄 수 있을 때 그게 가치라 했어요. 그게 교환가치라는 거예요. 사용가치보다도, 나한테 아무리 필요하지만 시장에 나가서 그걸 남들이 찾지 아니하면 그것은 무가치한 거예요.

인간이 어떤 인간이든 내 것, 내 자식, 내 인생, 내 자존심, 다 가치 있어요. 그런데 그 가치가 노동시장에 나갔을 때 안 알아주면 어떻게 할건데요? “나 이 정도 재주 있습니다.”라고 세상에 나가서 이야기 하면 “노동환경 바뀐 줄 몰라요? 그것은 옛날 구닥다리 노동 방법이고 지금은 새로운 기술을 원합니다. 당신 채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시장의 하나의 상품으로 팔리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러면 뭐가 가치 있는가? 내가 가치 없다면 그러면 뭐가 가치 있는가? 돈이 가치 있지요. 돈이 돈을 낳는 그게 가치 있는 거예요. 직장 생활 하면서 9-5(nine to five),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서 저녁 5시에 퇴근하면서 보통 그 직장에서 컴퓨터 앞에서 주로 일하잖아요. 하지만 간간이 상사 모르게 주식도 하고 한다고요.

왜냐하면 자기가 노동해서 월급 받는 그 돈보다도 투자를 해야 더 돈이 된다는 사실, 이것은 과학적으로 통계적으로 증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1971~) <자본과 이데올로기> 또는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을 지은 사람인데 거기에 대한 서평은 ‘십자가 마을’에 올려놓았어요.

이게 뭐냐 하면, 투자가 돈 되는 거예요. 노동해서 월급 받는 것은 돈이 안 돼요. 없는 돈에 투자까지 하느냐, 하는데 어릴 때부터 해보면 돈에 눈이 뜨인다는 거예요. 지금껏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돈 사랑하지 말고 주 앞에 기도하게 되면 필요한 것 주십니다.”라고 했거든요 기도하면 필요한 것 주십니다, 할 때 그 기도하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결국 그 목적은 뭐냐? 자기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이 행복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는 것이 그게 성경이에요. 교회 와서 ‘남들은 투자했지만 나는 기도해서 돈 벌었다.’ 그거 자랑질하는 그게 하나님께 받아주는 인간이 아니에요. 왜 나는 끊임없이 살고자 하느냐, 그래서 끊임없이 돈을 좋아하느냐,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거기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생겨 먹은 것이! 그런데 그게 다인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사랑도 돈으로 사는 거예요.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스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 케서
시키났드만 집에 간다 말이고

못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드간다 못 간단 말이야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우우우 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 우우

(봉숙이, 장미여관, 2011)

남자가 여자를 꼬시려고 데킬라 사달라고 해서 데킬라 사줬어요. 그런데 비싼 술 사놨더니 이제 여자가 집에 간다는 거지요. 그래서 “집에 간다 못 간다. 이 술 어쩌고?” 그러니까 여자가 가는 게 아까운 게 아니고 비싼 술을 사준 게 아까운 거예요. 이게 ‘장미여관’이 불렀던 <봉숭아>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드간다 못 간단 말이야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우우우 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 우우

이 얼마나 인위적입니까? 그래놓고 그 노래 제일 마지막에,

사랑을 찾아서 사람을 찾아서 오늘도 헤메고 있잖아
사랑을 찾아서 사람을 찾아서 오늘도 헤메고 있잖아


왜 헤맵니까? 돈으로 사람 꼬시려고 헤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담겨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동원해서 자기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이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노래 가사가 있어요. 뭐냐 하면,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가는 바람뒤로 그리움만 남긴 채

(찬바람이 불면, 이수영, 2004)

보세요. 찬바람 돈 주고 요청해서 찬바람 불었습니까? 그냥 찬바람이 불어요. 우리는 피동적입니다.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가는 바람뒤로 그리움만 남긴 채

찬바람이 부니까 떠나가서 자기는 그리움만 남는 것, 이게 바로 뭐냐? 내가 할 수 없는 지경에 내가 놓여 있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겁니다. 어디 찬바람만 뭐 주의 뜻입니까?

낙엽이 지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떨어지는 낙엽위에 추억만이 남아있겠죠.

이 낙엽 지는 것도 내 맘대로 안 지거든요. 낙엽이 “져줘. 그러면 내가 돈 줄게.” 이런 것이 안 되잖아요.

낙엽이 지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떨어지는 낙엽 위에 추억만이 남아 있겠죠

이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인간은 피동적으로 뭔가 쫓기고 있고,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감을 잡아야 돼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뭔가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서 인간들은 당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뭐 하나님께 나오고, 그런 것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총동원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나의 행복은 내가 찾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그다음에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면 주의 일이 우리 속에 파고 들어옵니다. 파고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우리 속에서 그동안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 여기에 불연속적인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점점 더 멀어져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해낸다, 전에는 이것 하나로 뭉쳐 있습니다.

이걸 고급스럽게 이야기해서 이걸 ‘유물론적 변증법’이라 하는 거예요. 양이 늘어나면 그 양이 질로 바뀐다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겁니다. 양이 쌓이면 질로 변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이 쪼개져요. 쪼개지고 그 빈칸이 점점 더 점프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집니다.

멀어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그것 사이에, 내가 도약해도 안 되는,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건널 수 없는 갭, 점점 더 간격이 멀어져요. 그렇게 멀어지면서 구원이 물 건너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내 구원이 물 건너갔다는 것, 목사 시키는 대로, 신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다 구라였다는 사실, 내 속의 간격이 벌어지는 것, 이걸 증상이라고 해요, 증상. 증상은 뭐냐? 감기에 걸리면 증상, 콧물 나고 열나지요. 이걸 증상이라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주님이 나한테 찾아왔다’는 증상을 유발시킵니다.

증상이 유발되게 되면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신학교 가서 목사 되는 것, 이것 할 수 있어요, 철야기도나 이런 것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게 저만치 보이는데 저만치의 그 간격이 이것은 도저히 인간이 따라잡아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간격이 벌어져요. 저쪽 편에 천국이 있습니다. 있으니 뭐합니까? 갈 수가 없는데요.

바로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려줬어요. 두 번이나 알려줬습니다. 하나는, 홍해 건너갈 때 절망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라오지요.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 막혀 있지요. 거기서 그들은 할 수 없는 일에 그들이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들은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원망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를 다 총동원했는데 이게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사람이 잃어버린 기억이 없으면 얻은 기억도 없거든요. 잃어버릴 때는 잃어버린 이유가 있어야 되고 얻을 때는 얻은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냥 “잃어버렸다가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면 안 돼요. “너 왜 잃어버렸는데?” 물을 때 답변이 되어야 돼요. “홍해를 왜 못 건넜는데?” 답변이 있어야 돼요. 홍해를 왜 못 건넜습니까? 사람이 어디 물고기입니까? 바다를 건너게? “우리는 물고기 아니잖아요. 우리는 사람이잖아요.”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오는 주님의 뜻입니다. “네가 사람이냐?” 그러니까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뭐냐? 성경은, 교회는, 복음은 인간성을 파괴시켜야 돼요. 나라는 인간성, 괜찮은 인간성이 파괴되어야 됩니다.

그냥 파괴되면 안 되고 파괴되면서 하나님께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 이유가 상당히 이렇게 복잡해요. 네가 인간성이 파괴되어야 되고, 네가 구원받지 말아야 될 이유를 주께서 알려줍니다. 어떻게 알려주느냐 하면, 임신과 해산을 통해서 알려줘요.

성경에 마리아가 나오거든요.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리아가 처녀예요. 아기 낳을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마리아 몸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몸에서 아기 예수가 자라나고 나중에 해산되었습니다. 저는 아기 낳는 것을 제가 직접 못 봤어요. 우리 딸 낳을 때 나는 복음 연구한다고 다른 데 있었어요. 평생 욕얻어 먹게 생겼어요.

애를 엄마 몸에서 끄집어내서……, 저는 직접 보지를 못했는데 뉴스나 이런 데 보면 태어난 애가 숨 쉬는지 아닌지 안 울면 거꾸로 뒤집어서 엉덩이를 때린데요. 간호사가 숨 트게 해주려고 애를 울게 한다는 겁니다.

마리아에서 아기 예수님 나왔을 때 아기 예수님을 번쩍 들어서 “봐라. 이게 네 안에 있었어.”라고 주께서 끄집어내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면, 우리 안에서 괴물 악마를 끄집어내서 엉덩이를 치는 거예요. “이게 네 안에 들어 있었어. 이 덩치가.”

그래서 암을 수술하면서 의사가 자기가 수술 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의 정신이 혼절 상태에서 제대로 깨나지도 못한 환자가 있는 회복실에 가서 “이게 바로 암 덩어리인데 이게 당신 안에 들어 있었어.”라고 보여주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이게 이 덩어리가 네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 덩어리가!

‘시고니 위버(Susan Alexandra Weave, 1949~)라는 영화배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찍은 영화가 <에일리언>이에요. 여자 우주비행사가 우주를 돌아다니다 외계인에게 겁탈을 당해서 외계인 임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 몸에 외계인이 임신해 있어요.

여러분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성경에서는 그것이 유일한 실재라고 알려줘요.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했잖아요. 그런데 그때 마리아는 남자에 속한 여성이 돼요. 그러나 그 마리아가 이야기하는 것, 남자 없이 임신했다는 것 때문에 마리아는 여성의, 진짜 여자의 가상체로 사용되고 있고요, 진짜 여자는 나중에 뭐냐 하면, 여자에게서 난 예수님 자체가 진짜 여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내 애 하나 낳아줘.” 하는 식으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을 낳아버려요. 예수님이 자기 자식을 낳는 거예요. 그걸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6-8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육으로 낳은 것 따로 있고 네가 그래서는 하늘나라 갈 수 없고 영으로 낳아야 돼요. 예수님이 애를 낳아줘야 돼요. 예수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야 그게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건 <에일리언4> 정도가 아니에요.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복음 알면 죽어야 된다고요. 기피할 수밖에 없다고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분명히 이런 생각할 거예요.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이런 말씀 하실까 봐 설교 처음부터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 지으라고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게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책 마지막에 이런 소리 했어요. “여자가 우리를 구원한다.”

돈 버는 남자가 구원하는 게 아니고, 전혀 이 땅에 사는 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여자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여자가 뒤에 만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여자도 존재할 수가 없어요.

남자가 먹여 살리지 않으면 여자는 죽어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한테 철저하게 종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남자를 치워버렸어요. 남자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산다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왜? 남자가 있어야 여자가 사는데 그 여자는, 홀로 남은 여자는 살 수가 없어요.

이것은 뭐냐? 죽음이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거지요. 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게 죽음이라는 거예요. 숨 끊어질 때 그게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것은 그때부터니까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체험하지는 못하잖아요.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체험하는 방법은, 내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본인이 받아들일 때 곧 죽음을 체험하는 순간들입니다.

그 죽음 속에 있을 때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끊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끼는 성인들 부활시켜가지고 너는 천국 가, 이런 식으로 하기 전에 먼저 성도에게 나와 나 사이를 헤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살려는 나와, 내가 할 수 없는 새롭게 발생 된 나, 주님이 임신해서 낳은 나, 그 두 개의 나를 내 안에서 갈라 내요. 구분시켜 내요.

진짜 내가 말 하면서도 믿든지 말든지……, 이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찢어진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요, 여자가 남자 없이 예수님을 임신한 것도 말도 안 되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요.

그래서 교회들이 말 되는 것만 이야기하잖아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삽시다.” 이게 바로 폐쇄구조에요. 교회 50년 다니고 지옥 가고, 그 짓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이 어떤 의미에서 성경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야기 중 하나일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겁 없이 찾는 것.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기대하고 말했다면 나는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걸 한번 각색을 해볼게요.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악마의 종이다. 이 뜻이에요. 마귀 종이다. 목사가 교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설교하면 그것은 악마의 제단입니다. 집단적으로 지옥 가기 위해서 사람 모집한 단체에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교회 오는 사람도 ’주여, 이 교회에 내가 앉아 있는데 만약에 나를 기쁘게 한다면 나를 패 죽이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돼요. 앉아 있는 사람들도! 사람을 기쁘게 하면 이단입니다.

왜 이단이 생기는가? 인간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날 때부터.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이것도 못지않고, 또 대단한 말씀이 성경에 나와요. 로마서 6장 3-4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교회 와서 세례받으면 천당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성만찬 할 때 떡이나 포도주 얻어먹으면 그걸로 구원된 것으로 알고 있는,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로마서 6장 3절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네가 너를 산자로 더는 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 말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네 역량을 총동원해서 하라는 겁니다. 진짜 이것은 아멘,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잖아요. 이제는 눈치 보고, 코치보고, 주춤주춤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돈을 사랑해야 돼요. 본격적으로!

바쁜데 수련회 왜 갑니까? 돈 벌러나 가야지. 본격적으로 돈을 사랑해야 돼요. 자꾸 자기를 위장하면 안 됩니다. 속이면 안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그 방향이 이게 불연적으로 간격이 벌어졌거든요. 그러면 이쪽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면 남아 있는 이쪽은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역량껏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 돈을 사랑해야 돼요.

그래서 가 보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지옥이 보여요. 이게 <아바타2>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주인공이 바위에 떡 앉아 있어요. 인간들 피해서 인디언 부족이 앉아 있어요. 바위인 줄 알았는데 바위가 눈을 떠요. 고래였어요, 고래. 고래입니다. 눈동자가 있으면 그것은 고래고 눈동자 없으면 그것은 바위인 거예요.

거대한 고래, 인간이 할 수 있는 이 지옥 사회는 평등과 희망과 소망을 추구합니다. 희망과 평등과 소망, 이상적인 인간사회, 그게 우 영우 변호사가 좋아하던 고래에요. 혹등고래. 펄펄 튀어 날아다니는 혹등고래. 이 자본밖에 모르는 사회에서 그나마 숨을 훅훅, 혹등고래 숨 쉬듯이 숨쉬는 것은 뭐냐 하면, 그래도 평등과 인권을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숨 쉴 공간이라고 여기고 그걸 추구하는 거예요. 이 사회가.

그런데 그게 바로 괴물이에요. 그게 마귀라니까요. 그래서 잠자는 마귀를 깨우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주의 복음이 오게 되면 우리 속에 바위라고 여겼던 그것이 바위가 아니고 마귀의 눈동자를 깨우세요. 바위의 눈동자를 깨우게 되면, 비록 우리는 돈밖에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뭐냐,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봐주고, 어려운 사람 구제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게 마귀라니까요, 이게!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기껏 그것 밖에 못 해요.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 수련회, 성도의 평생이 수련회입니다. 수련회에서 벗어난 적 없어요. 수련회를 해도 바로 이 수련회를 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왜 나로 하여금 잠자는 괴물을 계속 깨우는 짓들만 하게 만드는가!

뭐 선교하러 간다고요? 선교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만 알려드릴게요. ‘주재원선교’가 있고 아예 ‘이민 가는 선교’가 있습니다. 주재원선교는 뭐냐? 우리나라의 큰 교회에서 월급 줘서 집까지 마련해주는 겁니다. 그냥 주재원, 삼성이나 엘지에서 주재원 파견해서 외국에 가 있는 주재원 있잖아요.

그 사람들 월급과 수당까지 다 나오거든요. 주재원선교사들은 이건 귀족입니다. 그 나라 가면 귀족이에요. 종들 여러 명이지요. 화초 가꾸는 종, 식사를 위한 종, 이렇게 여럿 들여요. 왜? 계속해서 정기적인 선교비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 선교사 말고 무슨 선교사가 있느냐? 이민 가는 선교사가 있어요. 이민 가는 선교사, 거지꼴 못 면합니다. 거지꼴 못 면해요. 여러 가지 요소가 다 얽혀서 아무도 안 도와줘요. 본인이 알아서 선교하는 사람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선교 목적으로 갔지만 막상 가 보면 자기 입에 풀칠하는 것부터 다급한 사태가 주어지는 겁니다. 거의 거지죠, 거지. 사는 게 거지라고 보면 돼요.

그러면 이왕 선교하는 것 큰 교회에서 파견해서 애들 교육문제라든지 이런 것도 해결되고, 넉넉하게 주택마련까지 보장받으면 되지 왜 그렇게 힘들게 가느냐? 큰 교회 선교사 가려면 심사를 받아야 됩니다. 큰 교회 공동체 취지는 알지요. 돈만 사랑하는 곳이잖아요. 그렇게 돈만 사랑하는 취지에 맞는, 그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설교만 하는 그런 선교사만이 주재원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라는 이름조차도 돈이라는 위세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선교사조차도 돈이라는 그 환경을 못 벗어난 주제에 아까 그 부자 청년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이렇게 했거든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올해 여러분의 목표는 예수님 만나서 근심할 정도로 돈이 많아지세요. 복음을 듣는 순간 근심될 정도로 부자 되세요. 그 정도로, 근심될 정도로. 지금 여러분 보니 돈도 없고, 복음도 모르고, 이렇게 오니 뭐 불편하지 않고 편하게 오지요. 진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것이 너를 찔렀도다. 너의 모든 죄는 돈에서 나온다.’ 이런 오늘 본문 말씀, ‘그게 너를 멸망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나오게 되면 도망치고 싶을 거예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회로 도망치고 싶을 거예요.

우리 교회도 만만치 않지요. 사람 안 기쁘게 하는 교회는 아니고요. 그러면 주께서, 아까 불연속적이지요, 불연속이라서 이쪽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파트, 이쪽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백날 살아봐야 동굴 속의 박쥐처럼 복음에는 둔해요. 아무 감각이, 들은 적도 있는 것 같고 안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돈에는 굉장히 촉수가 민감해요. 돈에 대한 촉수.

제가 차 갖고 계신 분들에게 “본인은 못가더라도 차 없으신 분들 위해서 가야산까지 좀 봉사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쉬는 시간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요, 갖다가 돌아오는데 한 100킬로 넘어요. 요새 기름값 얼마입니까? 리터당 1500원 넘잖아요. 시간 계산까지 해보세요. 시간 뺏기지요, 차가 기름 안 넣으면 갑니까? 또 감가상각도 생각해야 되지요. 또 가다가 미끄러지던가 하면 운전자 자기 책임이잖아요. 보험료도 생각해야 되지요.

이래저래 따질 때 그 따지는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이 고맙게도 뭐냐? 하나님께서 나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였어요, 그 기준이. 내가 돈 때문에 잃어버린 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갔다 오게 되면 ‘아, 내가 할 수 있는 게 나로 점점 더 지옥 쪽으로 가게 하는구나.’ 지옥 쪽으로 가게 하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구원이 되느냐? 그걸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구원되느냐? 탁구공이 구멍에 빠졌다면 그 탁구공을 구멍 후벼서 뽑아내려 한다면 소용없어요.

물을 부으면 돼요. 물을 부으면, 탁구공이 물이 받쳐주면 저절로 어, 어, 어, 하면서 탁구공이 구멍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튀어나오는데 그 이유가, 탁구공이 가볍기 때문에, 물 비중보다 가볍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주 무거운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돈 사랑하는 인간들 다 지옥 간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거운 말씀을 밑에 받치게 하는 겁니다. 딱 받치게 한다. 이 말씀 잘 들으셔야 돼요. 딱 받치게 하면 내가 이 땅 살면서 고민했던 이것은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주께서 마지막에 불심판을 내리는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불심판 내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합류되지 않는 주장들은 다 거짓 주장이에요.

결국 마지막에는 이 세상이 다 불심판으로 가요. 불심판으로 가는데 그 불심판과 논리적 연결이 되지 않는 주장들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뭐 휴전하자 이런 것, 다 거짓말이에요. 백날 휴전해 봤자, 행복해 봤자 불심판이니까요. 다 거짓말인 거예요. 인간에게서 내뱉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다 거짓말인데 거짓말이 아닌 진짜 불심판이 밑에 딱 받쳐버리면, 예를 들어서 아까 로마서 6장, 주와 함께 동반해서 같이 죽지 아니하면 네가 살 수 없다는 말, 이게 얼마나 무거운 말이에요. 그 무거운 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인하여 내가 소소하게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게 가볍기 짝이 없는 별 볼 일 없는 일들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거예요.

애들 교육하는 것, 돈 벌려고 아침부터 출근해서 싸대는 것, 천당 가려고 교회 오는 것, 전부 다 이게 가벼운 일이에요. 왜? 무거운 일이 있기 때문에, 주의 불심판이 밑에서 받쳐 올라오기 때문에 이게 가벼운 거예요, 가벼운 것. 모든 근심 걱정이 복음의 위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미안해. 너를 힘들게 해서.” 그런 말이 자기한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지만 복음 알고부터는요, 이게 굉장히 가벼운 말이에요. 전에는 (심각하게) “미안해.” 하고 눈물 흘리다가 복음 알고부터는 (가볍게) “미안해” 끝나는 거예요.

“당신 애 유괴해서 내가 죽여버렸다. 미안해요, 전도연.” 감옥소에 간 그 죄수가 밀양에 살러 와서 피아노 레슨을 하던 전도연 아들을 죽여버렸어요. 실의에 빠졌던 전도연이 밀양의 어떤 감리교회 가서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전도한다고 교도소에 가서 자기 아들 죽인 그 죄수한테 “네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면 당신같이 악한 독종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하니까 그 죄수가 하는 말이 “나 이미 다 아는데? 나 벌써 회개했어요.” 이러니까 전도연이 미쳐가지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하는 영화가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에요. 그다음부터 “나는 예수 안 믿는다.”

뭐가 무거운지 뭐가 가벼운지를 분간 못 하고, 뭐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지, 뭐가 인간이 못하는 것인지를 분간을 해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18장 16절에 보면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화 있다는 말은 저주가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저주가 있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아주 사치스러운 것 최고급이에요.

17절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지 공무원 해서는 돈 못 법니다.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피케티의 주장이 맞지요. 돈을 벌려면 돈 놓고 돈을 벌어야지 자기 노동해서 돈 버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밥벌이 밖에 못 하고 연금도 언제 깎일지 모르는데 역시 돈은 장사에요.

뻔히 다 아는 이야기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 없지요. 이 장사꾼들이 마지막 부자들이에요. 이 사람들, 재벌들이 19절에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근심했던 이유를 아시겠지요? 본인 마음으로 진짜 리얼리티, 진짜 현실을 접했을 때 내가 살기 위해서 돈 벌었는데 “돈 없애”라는 말은 나보고 죽으라는 이야기거든요.

복음은 뭐냐? 로마서 6장에 같이 죽는 거예요. “나 죽었잖아. 이 땅에서, 이 영토에서 죽었잖아.” 이 부자는 말하기를 “제가 재주가 있습니다. 내가 노력을 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기를 “그 재주 자랑하지 말고, 네가 노력 자랑하지 말고 네가 속해 있는 영토가 지금 네가 어느 영토에 속했는지, 네가 어느 영역인지 그걸 네가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네 맘속에 갈라졌는지.

갈라질 때 어떻게 갈라지는가? 자아와 주체로 갈라지거든요. 이 상세한 것은 오늘 저녁 1강에서 할 거예요. 자아와 주체로 갈라지는데 자아라는 것은, 인간이 허구에요. 인간의 자아라는 것이 없어요. 몸이 있지 자아는 없어요. 그러면 자아는 뭐냐? 자기의 활력소,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주께서 지금 살게 하는 그 살아 있는 활력소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없어요. 그냥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몸이 있을 뿐이에요. 밥을 먹는 나는 없어요. 밥을 먹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자아가 나중에 주체가 되는 것은 뭐냐? 타인이 왔을 때, 남이 왔을 때 ‘너 뭐하고 있노?’ ‘밥먹고 있다.’ 할 때 타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때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게. 타인이 있을 때.

그래서 남이 떠날 때 죽음을 느끼는 거예요. 남이 떠날 때, 같이 있던 엄마가 죽을 때, 같이 있던 배우자가 죽을 때 자기는 죽음을 느끼는 겁니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는 내가 나라고 할 여건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내가 누구 낯 보고 사느냐?’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참, 하나님이 함께 있다면서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데 왜 그게 말이 안 되고 거짓말이냐? 제가 어릴 때 제사가 많았어요. 할아버지는 ‘유교 보이’거든요 유교밖에 몰라요.

그런데 할머니는 또 살림꾼이에요. 제사를 지내는데 문어를 올립니다. 문어를 올려야 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문어가 굉장히 비쌌거든요. 할머니가 할아버지 몰래 문어를 다락방에 감춰놔요. 1년 뒤에 그 문어를 그대로 제사상에 올립니다. 원래 제사에는 한 번 올린 거 다시 내놓으면 안 되는데 할머니는 무엇부터 생각했느냐? 귀신보다 돈이 더 무서운 거예요.

귀신보다, 거기서 더 연장해서 하나님보다 돈이 더 무서운 거예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내 자아에요. 눈 껌벅껌벅, 하는 괴물의 응시, 괴물이 응시하는 거예요. ‘너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예’ ‘돈이 있어야 살지.’ ‘예’ ‘열심히 해라. 그래야 돈 번다.’ ‘예’ 계속해서 속에서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도라면, 정말 성도라면 그 괴물의 말을 들으세요. ‘아, 이게 바로 내가 이게 바로 지옥이구나.’ 그걸 혹독하게 경험하면서 그게 잃어버린 지옥체험입니다. 지옥을 경과 하지 아니하면 천국도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뭘 아느냐? 내가 구원받은 것은 이 자아한테는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은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고, 이것은 나에게서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을 고르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고르거든요. 골라냈던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로마서 11장 34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설명 들어갑니다. 아무도 모르지요! 태어날 때부터 망가진 인간이 무슨 주의 마음을 알겠어요?

“누가 그의 모사(지혜)가 되었느뇨” 모르지요. 눈 껌뻑껌뻑, 하는 괴물이 들어 있는데 알 수가 있겠어요?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내가 드렸기 때문에 주께서 복 준다는 이것은 삑, 이것은 주의 나라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기쁘게 하는 교회에서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십일조 하면 복 받습니다.” 이것은 마귀 교회에서나 하는 소리예요. “헌금 하면 복 받습니다.” 마귀 교회에서 하는 소리예요.

“희생하고 봉사하면 복 받습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희생하고 봉사하면 죽습니다. 빨리 속히 이 땅을 떠날 수가 있어요. 살고 싶거든 복음을 피하세요. 죽고 싶거든 복음을 받아들이세요. 이유가 뭐냐? 마지막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것이 바로 불연속성 저쪽 편에 있어요. 그리고 이쪽은 뭐냐? 모든 만물이 돈에서 나오고 돈으로 말미암아 돈으로 돌아간다. 이게 이쪽 편이에요. 그 두 가지를 다 갖고 있을 때 저와 여러분은 주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과 세상과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할 수 있는 것, 최선 다 한다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망치게 한다는 사실을 또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모든 게 이렇게 된 것은 다 주께서 주되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라는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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