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만 나옴
2022년 12월 25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3-6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사도는‘그리스도의 말씀’과 ‘세상 교훈’을 구분합니다. ‘세상 교훈’마음을 부패케하고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악한 생각을 하게 하며 진리가 아니고 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 교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인간들에게 다 공히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이점은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 16:4). 즉 인간들이 무심코 태어난 이 모든 세상이 주님 보시기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인간들의 교훈들과 기성관념 안에서 인간의 정신은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에서 추방된 예수님께서 남기신 교훈은, 이 세대말고 오는 세대, 즉 새로운 세대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대는 오로지 ‘잃어버린 양’만 찾습니다.(마 10:6) 목자가 인간 세대에서 잃어버린 목자인 것처럼 양도 잃어버린 양이 됩니다. 본인들이 주님의 양이 되고 싶어서 손든다고 해서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도나 예수님께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지어 말씀해도 사람들이 안 듣는 이유는,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안 빼앗기기 위해 꽉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안 놔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성경 보면서 천국갈 계획과 체비를 챙깁니다.
이미 마치 폭포 앞에서 폭로 구경만 하지 결코 폭포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관광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언급하면서 예수님 죽음 밖에서 겉돕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들어서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붙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A.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자신을 이용해서 그 위에 올라타서 더 높이 오를 수 없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신을 독촉하고 독려하는 식으로 자기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을 닦달한다고 해서 발전된 자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만족의 조건을 그때마다 수정할 뿐입니다.
B. 멈춰 있는 나를 내가 운동시킬 수 없고, 운동하고 있는 나를 내가 멈춰 세울 수 없다.
인간 주변에 있는 햇빛, 습도, 바람 등등의 모든 조건들이 내 마음에 리듬을 부어넣습니다. 흔히 ‘기분’이라고 하지요. 내가 자유롭다고 우기는 바는 실은 주위 조건들이 만든 운옹이요 멈춤입니다.
C. 행복, 불행, 희극, 비극, 성공, 실패 이 모든 것은 내가 규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쉬지 않고 현재의 입장에서서 과거를 조작하고 스토리도 현재에 맞게 창작해냅니다.
D. 우리는 사라짐의 대상입니다.
죽는 것, 아픈 것, 늙는 것,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따로 계십니다. 늙은 것은 우리가 원한바가 아닙니다.
E 기차 안에서 자건거 탄다고 해서 기차 도착지점에 남보다 일찍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F. 내가 친 시험을 내가 채점할 수 없다.
인생을 시험이라면 그 평을 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G.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흔적이 있다.
“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H 우리보다 우리 허락도 받지 않고 먼저 있는 것들이 있다.
해, 달, 별, 바다, 산, 부모님. 즉 세상 관계란 내가 시작해서 맺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I 교도소의 스케줄은 죄수들이 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인간들은 이 땅에서 죄인들이라는 내 인생 설계를 내가 짤 권한은 없습니다.
J 전쟁터에 나가서 마주하는 적을 내가 지휘할 수 없다.
악마나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내말 들어야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K ‘숫자 3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는다고 해서 숫자 3이 뇌리에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7:7-9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L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게 천국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청함을 받은 이유는, 최종 선택이 나의 요구에 별개임을 알기 위함입니다.
M 재판정에서 우리는 방청석에 앉은 것이 아니라 피고석에 앉아 있다. 그리고 나의 두 손목은 내 손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나 철학은 인간은 자아찾기, 자아회복을 위함이지만 복음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오시는 현상입니다. 마치 우리 안에 있던 내장이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두 선지자는 각기 북쪽과 남쪽 선지자였습니다. 북쪽은 성전이 없지만 남쪽에서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쪽 선지자는 고향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죄뿐인 북쪽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묘실에 묻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를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죄없는 곳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 죄만 있는 것에 오시는 것을, 자신의 죽음에 자기 백성을 같이 묻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말씀의 기능입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쓰레기를 생산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더는 자신의 의롭게 굴지 마세요. 주님의 가치만을 남기고 자기 가치가 삭제되는 자가 천국사람입니다. 반대로, 자기 가치를 쥐고 가는 자가 지옥가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날마다 우리 안에서 친히 일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디모데전서 6장 3-6절(예수님만 나옴)-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3-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3-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본문 가운데 두 개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또 하나는 ‘다른 교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 그 다른 교훈은 어떤 현상을 나타내느냐? 4절에 보면 교만을 유발하고, 변론과 언쟁, 그리고 투기와 분쟁, 훼방, 악한 생각, 그리고 또 5절에 보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또 그들끼리의 다툼,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무관한 그러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언급하는 이 두 대조되는 경향을 예수님께서는 시대성, 세대성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4절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세대, 인간들이 사는 이 세대를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는 세대와 구분 짓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대 말고 새로운 세대를 만드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말씀으로 그렇게 만드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서는 이것을 둘로 나눴어요. 하나는 뭐냐? 지금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나누고 있습니다. 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오는 세대’라고 새로운 세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대에 속했다는 그 세대 언급을 왜 하느냐? 인간은 이 세대에서 현재 우리의 인간세계에서 몸부림쳐도 뼈져 나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네가 태어난 이 세대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교훈이라는 것은, 내가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이 세대 말고 오는 세대가 따로 있으며, 이 세대 말고 다른 세대가 따로 있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는 세대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며,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말은, 누구는 악한 세대이고 누구는 잘못된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다는 겁니다.
왜? 그 세대 출신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대에 태어나면서 기성세대 사고방식, 기존의 사고방식 자체가 그리스도 교훈이 빠져버린 사고방식에 하나의 공처럼 구처럼 둘러싸여 있기에 듣고, 보고, 배우고, 양육 받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이 빠져 있는 상태로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 가운데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세대 자체가 악한 세대인데 아무리 거기서 옳은 것을 한다 할지라도 오는 세대에 속하지 않잖아요. 오는 세대, 오는 세대는 예수님이 친히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 세대가 오는 세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이 오는 세대를 만들 수가 없어요. 우리가 주님의 세대를 만들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나를 구원하는 그 계시를 내가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도리어 우리는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부담이 적기 때문에 그래요.
어차피 이 땅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 망해가는 것 똑같이 전혀 다를 바 없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정말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몸부림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교훈은 내용이 뭐냐? 그리스도의 교훈은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죽이는 것 죽이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의 교훈이에요.
그러면 이 인간세대의 공통점은 뭐냐? 본인이 나를, 내가 나를 나에게서 안 빼앗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놔주지를 않아요. 끝까지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고 어느 정도로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본인을 가지고 본인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끝까지.
그래서 인간이 상당히 아이러니한 사태가 뭐냐 하면, 그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본인이 이단인 줄을 몰라요. 입만 떼면 복음이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그게 이단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것도 내가 나를 건져보려는 하나의 시도 또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캐나다 쪽에서의 나이아가라 폭포의 풍경이 더 좋대요. 미국 쪽에서 보는 것보다 캐나다 쪽에서 보는 폭포 풍경이 좋다는 겁니다. 캐나다 쪽에서는 뭘 뚫어 놨는가? 폭포 뒤쪽으로, 폭포 안쪽으로 가는 터널을 뚫어 놨어요. 그러면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로 폭포로 가서 겉으로 구경은 할 수 있어요. 구경할 수는 있지만 폭포 속으로는 못 들어가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크리스마스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 죽으셨다. 그게 동물원 원숭이 재롱 보듯이 그냥 관람이 됩니다. 쳐다볼 수는 있어요. ‘아, 예수님 이렇게 훌륭하시구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랑이 많구나.’
그런데 그것은 이 세대가, 그동안 유대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대했던 거예요. 율법 속으로, 말씀 속으로 안 들어가고 그 말씀을 딱 떼와서 자기가 지키려고 애를 썼던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라 하는 것은, 내가 말씀 지켜서 바르게 사는 게 새로운 세대가 아니라 그 주님의 죽음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폭포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폭포 속으로.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 폭포 높이가 53미터랍니다. 미국 쪽은 대략 28미터고. 캐나다 폭포 그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속에 들어가면 그 강력한 폭포수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흔적을 본인이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물에 휩싸여 가지고.
자꾸 사람들은 교회 와서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한다,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죽음 언저리를 빙빙 겉돌고 있어요. “이것이 예수님 죽으심이고요,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입니다. 잘 알았지요? 이제 케익이나 먹읍시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게 제가 보기에는 백프로 가짜입니다. 입만 떼면 복음인데 백프로 가짜에요. 죽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말씀 가지고 순교하고 자살하면 되느냐? 그래도 안 돼요. 그것은 자기 죽음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경에 나와 있는 성도들의 특징이 있어요. 말씀이 와서 자기를 으깨버립니다. 부숴버립니다. 예를 들면 앞에 작은 1톤 트럭 한 대 세워놓고 그 뒤에는 승용차가 한 대 있어요.
그런데 뒤에서 속도도 줄이지 않고 15톤 덤프트럭이 돌진해서 아예 으깨지라고 박아버려요. 완전히 숭 중기 죽은 것처럼. 재벌 집 막내아들 이야기에요. 박살 나 버리지요. 빼도 박도 못해요. 샌드위치처럼 완전히 으깨졌으니까. 말씀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말씀이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새세대의 구원방법은 옛 세대에서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구원해 버려요.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는 방식.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이 모든 시도를 전부 다 트럭이 뒤로 와서 그냥 박아버려요.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 좀 제발 하지 마. 그것은 네 욕심이야.”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 이유가 마태복음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양을 구분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6절에 보면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양만 찾아요. 잃어버린 양인데 스스로 손들고 “저 잃어버렸습니다.” 하면 주께서는 “손 내려!” 그건 인정 안 해줘요.
잃어버린 양, 이걸 찾는 이유가 예수님 스스로 목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당시 목자가 많아요. 그러나 그런 목자는 말고 본인이 이 땅 인간들에게 잃어버린 목자, 그 목자 자신의 운명과 동일하게 가게 만드는 양을 잃어버린 양이라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은 잃어버린 목자가 “이것은 내 양이다.” 하고 채택을 해줘야 비로소 잃어버린 양이 돼요. 그 양만 건져요.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사람 주께서는 전혀 생각도 안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그리스도 교훈이 없는 자라고 사도바울이 이렇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옛 세대, 새세대로 나눴거든요. 그러면 왜 인간들이 복음 이야기하고, 성경 이야기하고, 말씀 이야기하고, 다 이야기했는데 그게 왜 이단이며 그게 왜 새세대로 나가지 못하고 옛 세대에 그냥 제자리 뛰기 할 수밖에 없는가? 그래서 제가 이런 것을 채택해 봤어요. 해보니까 13가지 나와요. 인간들이 왜 구원되지 못하는지? 13가지니까 그냥 천천히 들으시면 됩니다.
첫째는,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본인이, 본인이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그 나를 내가 올라타서 계속 사다리 타고 올라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사다리를 타는데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그 걸 내 앞사람이라고 여겨서 이만큼 올라갔으니 그 어깨 위에 또 올라갈 수는 없어요, 인간은.
이 말과 비슷한 말이 뭐냐? 물에 빠진 나를 물에 빠진 내가 잡아서 물에서 나를 건져낼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교회에서 노력하는 게 다 헛수고다, 다 아무 부질없는 거예요. 소용없는 짓이에요. 모든 노력이 노력하는 나를 더욱더 채찍질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다리 올라탄 나를 다시 올라타 버리면 더 내려가지요. 사다리에서 아래쪽으로, 중력에 의해서 내려가게 되어있지 올라가지는 않아요. 나를 더 올릴 수는 없어요.
두 번째, 첫 번째 무슨 말을 한지 모르겠지요, 하여튼 계속 갑니다. 두 번째, 멈춰 있는 나를 운동시킬 수 없고, 운동하는 나를 멈춰 세울 수가 없어요, 인간은. 왜냐하면 햇빛, 습도, 바람, 모든 것이 내 신체에 리듬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은 자유로운 게 아니고 내 주변의 조건들이 지금의 나를 운동하게 하든지 멈추게 하든지, 그것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서 생긴 결과물이에요.
내가 활동하고 싶다고 활동되는 게 아닙니다. 뭐 허리 아프고 몸 아프면 못 움직이잖아요.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과 인간의 몸은 리듬에 맞춰줘야 그때 움직이든지 멈추든지 해요. 내가 단독적으로 내가 생각한 대로,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 인간세계에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주변 환경이 받쳐줘야 돼요.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환경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는 이런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첫 번째는 사다리, 두 번째는 운동, 내가 시킬 수 없다는 것.
세 번째, 행복, 불행, 희극, 비극, 성공, 실패, 나는 잘났다, 못났다, 이것 내가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과거에 이런 경험 했다는 것, 그것 현재의 본인이 조작한 거예요. 현재 인간은 과거를 현재 입장에서 계속 조작해서 만들어내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 내가 한때, 그런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지금 네 생각이 과거라는 그러한 말을빌려서 옛날에 이랬다는 것을 네가 지금 편집하고 지금 소설 쓰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요, 거울이라는 풍경은, 내가 그 거울 앞에서 떠나는 순간 거울이라는 풍경은 일거에 다 날아가요. 과거라는 것은 지금 현재 내가 있는 한 과거는 벌써 날아갔어요.
그런데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 두뇌 속에 있는 해마에 있는 이 기억이 지금의 기억, 현재 내 머릿속의 시냅스가 작동하는 그 기억, 내가 기억하는 그것을 가지고 과거라는 것을 지금 내가 조작해 낸 거라니까요. 쉽게 말해서 입만 떼면 구라다 그런 뜻이에요.
네 번째, 이상하게 지난주 설교부터 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되는데 이제 네 번째, 인간은 사라짐이 있습니다. 죽음. 늙음. 아픔. 이 모든 것은 내가 좋아서 죽고, 내가 기뻐서 늙는 게 아니에요. 누가 나를 늙게 하고, 누가 나를 죽이시는 분이 있어요.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다 부질없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네가 누구 맘대로 구원을 받아? 그러면 나는 뭔데? 내가 너를 늙게 하고,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데!” 너는 그냥 수동적이고 피동적이에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어떤 분이 나를 죽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 다섯 번째,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기대도 안 해요. 다섯 번째, 기차 안에 자전거 있잖아요, 기차 안에서 자전거 탄다고 기차가 빨리 도착하는 것 아닙니다. 기차 안에서 자전거 타면요, 객차 1번부터 마지막 객차까지 자기 혼자 왔다 갔다 하지요. 땀만 줄줄 흘리지 자기 도착지점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기차 안에서 가만히 있어도 서울가요. 자기가 기차 안에서 무슨 분산을 떨고 노력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 기차 안에서 노력하는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없으니까 뭐 성경공부고 뭐고, 전도고, 헌금이고, 예배고, 크리스마스, “참 반가운 성도여~” 노래 부르고, 노래 그거 부른다고 서울에 빨리 가는 것도 아니에요.
여섯 번째, 내가 시험 친 문제를 내가 채점하지 않습니다. 채점 못 합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해서 내가 채점할 자격이 없어요. 잘했다, 못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채점자가 따로 있는데! 그게 여섯 번째입니다. 쓸데없이 양심의 가책이 어떠니, 내가 죄를 지었느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채점을 왜 네가 하는데? 잘했다, 못 했다를 왜 우리가 합니까? 우리가 평가합니까? 우리는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일곱 번째, 우리 각자 인간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어요. 그 흔적이 시편 94편 9절에 나옵니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여기 보세요. 귀 있잖아요. 눈 있잖아요. 이것은 나에게 있는 하나님 창조주의 흔적입니다. 귀를 내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들면 눈을 뒤에 만들지요. 눈을 왜 뒤에 안 만들고 앞에 만들었습니까? 내가 나를 안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면 내 인생도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잖아요.
귀, 코, 눈을 내가 박아넣은 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내가 박아넣지도 않았는데 내가 내 신체에 대해서 내가 왜 책임져야 됩니까? 그럴 필요 없지요. 뭐 코를 잠시 없애고 목 뒤에다 붙이고, 이러지 못하잖아요. 우리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일곱 가지를 했는데, 그런데 이 세대는 이런 사실을 몰라요. 다 잊어버렸으니 일곱 가지만 일단 중간고사 보듯이 다시 해볼게요.
1.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나를 내가 격려하고 독촉해서 올릴 수는 없다는 것.
2. 멈춰 있는 운동을 내가 운동시킬 수 없고, 운동하고 있는 나를 멈춰 세울 수도 없어요. 왜? 주변 조건이 영하 50도인데 무슨 밖에 나갑니까? 밖에 나가 놀고 싶어도 영하 50도에 못 나가잖아요. 주변 조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요.
3. 행복, 불행, 이런 것 내가 규정하는 것 아닙니다. 천하에 불행하다고 하는데 천하에 행복한 사람이에요.
4. 내가 원치 않는데 사라져요. 죽는다든지, 아프다든지.
5. 기차 안의 자전거는 백날 타고 운동만 할 뿐이지 그거 탄다고 해서 기차 안에서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6. 내가 본 시험은 내가 채점하는 것 안 됩니다.
7. 나에게는 귀 코 눈이 있어요. 주님의 창조주의 흔적을 우리가 달고 다닙니다.
그다음 여덟 번째, 우리에게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이 말은, 나보다 먼저 있는 해, 달, 별, 산, 바다가 있다는 뜻이에요. 어제 누구 결혼식에 참석을 했어요. 결혼식 신부가 이름이 원래 ‘은경’인데 ‘유진’으로 바꿨어요. 그래서 ‘은경이라는 이름도 예쁜데 왜 바꿨지?’ 하고 혼주인 신부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따님 이름을 왜 바꿨어요?” 하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바꿨답니다.” 나도 모르게 바꿨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버지고 내가 내 이름 바꾸는데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론 주례 없는 결혼식을 했겠지요.
해와 달이 별이 왜 내 허락도 없이, 해 왜 뜹니까? 내 허락도 없이 별이 왜 박혀 있어요? 내 허락도 없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 뜻과 무관하게, 내 계획과 무관하게 달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다, 무지하다는 말은 그것만 무지한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달은 왜 있는가가 그 지식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모른다는 게 돼요.
세상 우주 전체 자체가 같이 움직이는데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차 떼고 포 떼고 이것만 안다? 그것은 아는 게 아니지요. 다른 것과의 연관성, 영향력, 이것 고려하지 않고 그걸 어떻게 안다 할 수 있습니까? 시험 쳐서 회사 취직했다고 좋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전쟁이 일어나서 회사에서 잘려 버리면, 희망 퇴직당하면 이건 뭐예요? ‘푸틴은 왜 내 허락도 없이 전쟁을 일으켰어?’ 이렇게 따질 겁니까?
아홉 번째, 교도소에 갇힌 죄수는요, 하루 생활계획표를 본인이 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옛 세대에 갇혀 있어요. 옛 세대에 갇혀 있다고요. 옛 세대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추방시킨 세대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옛 세대에서 죽음으로 빠져나와서 빠져나온 그 취지를 가지고 새세대를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새세대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빠져나오고 다른 사람은 못 빠져나왔으니 옛 세대는 뭐냐? 교도소입니다. 교도소 하루 일과는 누가 짜느냐? 그것은 교도소장, 법부무장관이 짜는 거지요. 우리 하루일과는 남들 것을 cheating, 컨닝해서 따라가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한다? 독자적인 것이 없습니다. 전부 다 모방이에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에 있어요. 전부 다 모방입니다. 내게 어디 있어요, 내게? 뒤따라가고 흉내 내기지요. 무슨 자율성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자율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열 번째, 전쟁터에서 마주하는 적을 내가 지휘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전쟁터에 나갔는데 적장이 나왔다. “어이, 적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러면 적장이 “예. 알았습니다.” 하고 무기를 버립니까? 우리에게는 악마라는 적이 있어요. 이 악마는 내 말을 안 듣습니다. 왜? 적이기 때문에. 적의 지휘권은 내가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아무리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려고 해도 마귀가 설쳐 버리면 마귀 적장은 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런 뜻이에요.
열한 번째, 열한 번째가 정말 중요합니다. 숫자 3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는 순간 우리 머리에서 숫자 3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거 사라지는 사람 나와보라고 해요. “숫자 3을 머릿속에서 없애세요.” 없애라는 명령을 듣는 순간 숫자 3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생생하게 살아나지요.
그게 로마서 7장 7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탐내지 말라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그다음부터 우리는 탐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 자신이 몰랐던 나의 본모습이에요. 나의 본모습은, 율법이 와서 우리 자체 속에 애로(隘路)가 있다는 것, 애로, 오류가 발생되고 있다는 것은 율법이 와서 맞닥뜨릴 때 비로소 우리는 발견되는 겁니다. ‘내가 어떤 말씀도 지킬 수 없는 조건 하에 이 땅에 태어났구나.’
그게 부모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대에서 태어난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성공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생산되지 않게 하는 게 이 세대예요.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 그런 주제에 어디 천국을 넘봐요? 자기 분수도 모르고 무슨 천국을 가요? 말씀 하나도 못 지키면서.
그러면 도대체 나를 율법 못 지키게 만든 그 웬수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기는요? 네 안에 들어 있지요. 내 안에 어떻게 들었는데? 8절에 보니까 “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잠자고 있다가 뭐가 탐내지 말라, 하는 그 순간에 죄가 준비된 탐냄을 그다음부터 나를 통해서 확연하게 다발산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말해서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고 되어있으니까 이제는 탐내지 말아야 돼.’ 이게 탐심입니다. 그게 탐심이에요. 인간은 이걸 못 고쳐요. 못 고치기 때문에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못 고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곤고한 사람이다. 무능력한 사람이다.
남하고 비교하면 좀 나은지 모르지만 지금 남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주신 말씀 앞에, 거룩한 말씀 앞에서 나는 비로소 죄인 아니라 할 수가 없음을 발견한 겁니다. 남하고 모방하고 비교할 필요 없어요.
열두 번째,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이미 직원들이 퇴근한 백화점의 문을 열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천국 가고 싶다고 문 열어주는 데가 천국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것은 어디 나오느냐? 마태복음 22장 14절에 나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게 굉장히 무서운 말인데요. 천국에 넣어주지 않았으면 아예 청하지도 말았어야 돼요. 청하지도 말아야 되는데 청해놓고 탈락시켜요. 왜 그러냐 하면, 택함이라는 것은 청함을 먼저 전제로 해서 택함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초청해놓고 그제야 택함이라는 것을 실시하는 이유가, 주께서 초청할 때 너희들이 초청받을 자질이 없고 대상이 안 된다는 것을 초청받을 때 감을 잡았어야 돼요.
초청받았으니까 선택받는 그것은 서류에 불과하다,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초청받는다는 것은, 선택권은 나에게 없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초청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쉽게 말해서 초청은 구원받으라고 초청받은 게 아니고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초청한 거예요. 교회로. 그래서 교회는 구원받지 못함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신 겁니다. 교회 나왔다고 선택받는 게 아니거든요. 선택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열세 번째, 재판장의 피고는 방청석에 앉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까 본 로마서 7장의 말씀대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피고석에 서야 되지요. 우리는 법원 재판정의 방청석에서 남 피고 된 것 ‘재판에서 몇 년 형 받나’ 그것 구경하려고 오는 거예요. 본인이 피고석에 있어요, 본인이! 본인이 피고석에 있다고요!
성경이 우리 자신 보고 이야기해요. 저 사람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보고 이야기한다고요. 네 자리가 피고석 자리에요. 다른 자리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왜? 이 세대가 다 그래요, 이 세대가. 같은 말로 나의 손으로 내 양손을 묶을 수 없다. 내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지 내가 내 손을 묶을 수 없어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나한테 벌 내리고 처벌하지 마세요. 처벌할 자격이 없습니다. 좀 뻔뻔스러울 필요가 있어요.
8번부터 복습 들어가면, 8. 해와 달과 별 이것은 내 허락도 없이 있었던 겁니다.
9. 교도소에 있는 사람은 하루 생활계획표는 자기가 짜는 게 아니라 이미 짜여 있는 것 모방하는 거예요.
10 전쟁터에서 마주하는 우리의 적은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세상 왜 이렇게 내 맘대로 안되노?’ 적인데요? 적인데 내 맘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11. 숫자 3은 없애라는 명령을 듣는 순간 숫자 3은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율법이 박혀 버렸어요.
12. 내가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해서 백화점이 문 열지 않습니다. 가게 문 안 엽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천국 문이 열리지 않아요. 오직 가게 문은 가게 주인을 위해서만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나한테 필요해서 천국 문이 열리는 게 아닙니다. 주님에게 필요해서 천국 문이 열리는 거지요.
13. 내 양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형사가 와서 채우겠지요. 우리는 재판정에서 피고석에 있습니다. 방청석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복음을 알고, 십자가가 뭡니까, 선택론이 뭡니까, 그렇게 물었던 것, 그것 알고 싶어서, 구원받고 싶어서 교회 온 것, 그동안 교회 와서 뭐 했습니까? 여러분 지금 뭘 기대하고 왔어요? 교회 왜 다니시는 겁니까?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지식으로 채우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예수님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것은 종교입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천주교, 이것은 잃어버린 나를 찾는 거예요.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고 자아를 건지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를 가르고, 내 안에 이미 그리스도가 있어서 그 그리스도가 창조주요, 심판주요, 구원자라는 것을 내 내장 끄집어내듯이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그게 복음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말씀 스스로 자신을 이뤄요.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내보낼 수가 없지요. 뭐 들어와야 나가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뭘 내보냅니까? 그러면 우리는 뭔데요? 여기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인간이 보통 꿈을 꾸잖아요. 성경에서는 인간이 꿈을 꾸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꿈이에요.
인간 자체가 꿈이라서 야고보서 4장 14절에 인간은 뭐냐? 그냥 안개에요. 안개의 특징은 멀리서 보면 있는 듯해 보여요. 그런데 현장에 가면 안개는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없는데 왜 있느냐? 그것은 이사야 40장 6-8절에 나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이게 뭐냐? 이 앞에 더 붙인다면 “모든 육체는 곧 있다가 사라질 풀이요.” 그냥 풀이 아니고 사라질 풀이요. 그러면 인간의 그 영광스럽고 문명의 아름다움은 뭐냐? 그것은 그 사라질 풀에서 피어난 꽃이요, 사라질 꽃이지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말씀이 우리 안에서 나와야 돼요, 말씀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구냐? 크리스마스 아닙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우리는 그냥 껍데기에요. 그냥 껍질이지요. 껍질이라도 얼마나 이게 영광스러운 껍질인지 예수님을 끄집어내는 껍질, 그걸 가지고 상속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다른 말로 하면 상속자예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상속자) 곧 하나님의 후사(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받는 고난은 내가 정신 차려서, 내가 스스로 때려서 천당 가려고 받는 고난이 아니고 예수님의 고난이 스펀지에 스며들어 있으니까 고난받는 거예요. 이 고난은 뭐냐 하면, 인간의 교훈 말고 그리스도의 교훈이 들어와서 소속이, 그 소속, 포지션이 이 인간세대, 우리가 태어난 그 세대의 소속이냐 아니면 오는 세대에 소속되었느냐, 그 소속이 주님의 소속이라면 우리도, 그 껍데기 되는, 껍질 되는 우리도 주님의 오는 세대에 소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받는 거예요. 말씀으로.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천당을 가느냐?” 우리는 이야기 하지요. “뭘 아무것도 안 해? 맨날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지.” 성도의 즐거움은 뭐냐 하면, 내가 일하는 즐거움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가지고 이 땅에서 일하시는 그걸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러면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매일같이 12월 23일, 12월 24일, 12월 25일, 매일같이 우리는 갖다 버릴 쓰레기가 계속 나오는 계기로서 우리를 사용하지요. 매일같이 쓰레기 나오고 또 나와요. 쓰레기가 육신이 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나와요.
쓰레기 나오면 주께서 어떻게 일하느냐? 그걸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고, 죄사함으로 바꾸고, 또 죄사함으로 바꾸고, 죄 끄집어내면 죄사함으로 바꾸고, 죄 끄집어내면 죄사함으로 바꾸고, 그 죄사함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의 주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거예요. 율법을 주셔서 죄 끄집어내고, 그 쓰레기 같은 죄를 주께서 죄사함으로 바꿔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내보이는 거예요. 이 우주에 꽉 차 있으면서 내려오는 은혜를 성도가 아니면 보여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매일같이 내가 의롭지 않은 행동을 해야 돼요. 내가 의롭게 되지 않는 행동을! 그래서 예수 복음만 전한다, 하는 사람들, 가만 설교 들어보세요. 마지막에 “그러니 바르게 삽시다.” 나오면 백프로 이단입니다. 백프로 이단이에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예수 믿고 바르게 살자. 그것은 아예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어요. 그것은 백퍼입니다, 백퍼. 성도는 매일같이 내가 왜 옳지 않은가만 보여줘야 돼요. 내가 왜 옳은 인간이 아니고 왜 인간 덜되었는지만 보여주면 돼요. 여러분, 그거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에 그거 하고 있는데요 뭐. 그저 쉬쉬해서 그렇지 평소에 늘 하고 있는 거잖아요.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가볍고 기쁜 것은 매일같이, 매일같이 내 인생이 삭제된다는 사실이에요. 과거는, 아까 과거 이야기 했지요, 지금 내가 이 현실에서 잘난 체한다고 과거를 자꾸 소설로 쓰고 스토리 만드는데, 내러티브 만들고 각본 쓰는데 실은요, 우리는 매일같이 삭제당해요. 매일같이 삭제되니까 뭐도 삭제되느냐 하면, 매일같이 근심 걱정도 같이 삭제돼요. 심지어 구원의 욕망도 삭제돼요. 왜? 한낱 꿈이니까요. 내 안에 말씀만 살아 있으면 되지 불뚝불뚝 내가 왜 살아 있어요? 내가 광어도 아니고.
세상 모든 범죄는 바로 예수님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발생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자꾸 거론하면서 최고의 가치를 따로 챙기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교회에요. “주님 만! 주님만 영광을!” 하면서 가만 들여다보면 교회의 영광입니다. 교회 장사하고 있어요. 나의 가치를 계속 붙들고 있다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치만 계속 나온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뭐 별로 어려운 것 없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교훈으로만 네가 바르게 참된 경건이라 하는데 도대체 그리스도 교훈,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 성도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주님 자신이 자기의 새세대를 위해서 그 성도를, 또 선지자를 어떤 식으로 일을 시켜서 자기 자신만 뽑아내는지를 그 예를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3장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옛 세대에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구원하면 안 됩니다. 이 옛 세대와 성도는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 계속 달라붙는 게 이 세대의 생활이에요. 하루하루 일과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게.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옛 세대에서 예수님 자신의 일을 뽑아내고, 예수님 자신을 뽑아내고 거기서 새세대, 천국이지요, 천국 생활을 뽑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예가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데 제가 이전에 유튜브 강의에서 앞부분을 언급을 했었어요.
이스라엘이 남쪽과 북쪽 둘로 쪼개졌습니다. 북쪽에는 뭐가 없는가? 성전이 없어요. 남쪽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는 쪽의 선지자가 북쪽에 가서 예언을 합니다. 북쪽 여로보암왕이 8월 15일에 벧엘, 북이스라엘에 속해요, 우리나라 같으면 북한에 속하는 거지요, 북한의 원산쯤 되는 지역, 휴전선 가까운 지역인데 거기서 8월 15일에 유사축제를 만들어서 여로보암왕이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남쪽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남쪽 선지자가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가요. 북쪽 나라에 가서 그 나라에 대한 아주 불길한 징조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은 제단에서 제사 드렸기 때문에……, 여기 2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다윗의 집은 남쪽입니다. 유다니까 남쪽이에요. 북쪽은 다윗의 지파가 없어요.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여기 요시아가 나오는데 요시아는 몇 년 뒤에나 나올 인물이냐 하면, 약 3백 년 뒤의 사람이에요.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활동한 게 1592년이라 하고 300년 더해보세요. 1892년이잖아요.
하여튼 “약 3백 년 뒤의 사람, 어떤 남쪽 왕이 이 엉뚱한 제단에 제사하는 이 제사장들을 이 벧엘이라는 곳에서 다 불태워버릴 것이다. 제단도 불태우고 제사장도 불태워버릴 것이다.” 라고 예언을 했어요. 그러니 여로보암 왕은 자존감이 상할거 아니겠습니까? “어디서 이놈이 북쪽 나라 남의 동네까지 와서!” 하고 “저놈 잡아라!” 하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 내민 손이 다시 원상복귀가 안 되네요.
그러니까 자기가 욕을 했던 선지자한테 부탁하고 빌었어요. 제발 내 손 좀 원상복귀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원래대로 해주니까 그 때 왕이 “아, 네가 진짜 선지자다.” 해서 “내가 너를 후하게 대접해주마.” 할 때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 앞에지시 받을 때 물이나 어떤 떡도 먹지 말고 오던 길로도 오지 말고 다른 길로 빠져서 오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나라의 반을 줘도 내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하고 나왔어요. 청렴한 선지자 같아요, 청렴한 선지자.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소리를 듣고 난 뒤에 북쪽 벧엘에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는 구라를 쳤어요. 자기는 하나님의 계시 받은 적도 없는데 그 용한 선지자 만났으니까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말하기를, 당신 대접하라고 하더라. 그러니 성의를 봐서라도 우리 집에 가서 떡도 먹고 합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남쪽 선지자가 순진했던지 ‘천사의 계시를 받았어? 계시받았다면 나와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인데. 같은 계시 받았으니 나도 계시받고 움직이는데 저 사람도 계시받고 움직인다면 아, 주의 뜻인 모양이다.’ 해서 그게 거짓말하는 줄도 모르고 그 집에 가서 떡도 먹고 대접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때, 바로 그때 북쪽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성전이 남쪽에 있잖아요. 지금 북쪽에는 성전이 없어요. 그야말로 지옥이고 죄 밖에 없습니다. 죄밖에 없는 그 동네에서 남쪽의 성전이 있는 그쪽 선지자가 움직인다, 운동하는 것, 움직여서 그 죄만 있는 곳에 갔을 때 그 선지자가 죄만 있는 이 인간세대, 죄밖에 없는 이 세대에서 참된 선지자가 어떤 말씀의 표현을 자기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겠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을 버린 이 세상에서 진짜 메시아, 구원자가 이 땅에 등장했다는 시그널, 그 시그널은 뭐냐?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에요. 크리스마스트리도 아니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아닙니다. 그냥 죽음이에요.
그 북쪽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합니다. 졸지에 생뚱맞게 계시받은 그 선지자가 남쪽 선지자에게 대언해서 이야기를 해요. “네가 내 말을 어겼으니 너는 고향 남쪽에 있는 네 무덤에 못갈 것이다.” 하고 그 계시를 전합니다. ‘미안합니다. 집에 가세요. 내가 구라를 쳤습니다.’ 하고 난 뒤에 보냈는데 그 남쪽의 선지자가 가다가 길가의 사자(lion)가 등장해서 그 사람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가 그 죽은 선지자를 뜯어먹거나 하진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시신 자체가 움직이는 성전이기 때문에 필요해요. 그 시신이 필요하기에 훼손하지 않은 거예요. 정말로 선지자는 죽어 있고 사자는 멀뚱히 쳐다보고 있고, 그래서 그 시신을 수습해서 어디에 묻었느냐 하면, 거짓말을 했던 북쪽 선지자의 자기 묘실에 묻습니다. 묻고 북쪽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내가 죽으면 당신 옆에 같이 묻힐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왕상 18:31)
선지자 둘을 통해서 예수님 한 분의 행함을, 2가 예수님 한 분인 1을 두 명이 짝을 이뤄서, 한 분이 하신 일이 이 땅에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구약 열왕기상 13장에서 보여줍니다. 내 죄 때문에 죽은 그분 곁에 내가 묻히겠다.
이게 뭐냐? 트럭이 와서 송중기를 밀어치듯이 주의 말씀이 이 세대의 나를 죽여버리고, 내가, 이 세대에 속한 내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열심히 교회 오고, 이런 방식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이 세대에서는 죽고, 예수님 세대에서 다시 부활의 능력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열왕기상 13장을 통해서 두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지자 둘을 장기알같이 다루고 있는 거예요. 선지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다뤄요. 매일같이 이 세대에 살면서 “이 세대 사람과 똑같이 살아라.”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의롭게 되는 남보다 더 뛰어난 짓을 하지 마세요. 왜? 그래야 매일같이 everyday, 매일우유 알지요, 매일우유, 매일같이 나에게 내가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성공해야 돼, 하는 쓰레기가 계속 나올 수 있기때문에, 그 쓰레기가!
우리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쓰레기가 나오는 그걸 지켜보는 그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아~, 쓰레기만 되니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네.” 하는 말을 매일같이 하게 만들어요. 내가 삭제되는 가벼움, 무의미한 내가 지금 없어져도 괜찮다는 그 존재의 가벼움, 이게 바로 폭포 안에, 주님의 죽음 안에, 말씀 안에서 복음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여기는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는군요, 잘 적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부활하십니다, 여기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성경 알았지요?” 이런 식이 아닙니다. 종교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게 종교고, 복음은 내 안에 계신, 우리는 껍질이니까 껍질은 버리고, 땅콩껍질은 버리잖아요,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주님 자기가 새롭게 만든,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지배하는 그 새 세대가 이제 네 속에서 이렇게 내장처럼, 창자처럼 늘 튀어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소스, 빌미를, 그 계기를 제공하라고 우리는 평생 죽을 때까지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것, 이 이기주의의 가벼움과 즐거움이 우리의 성도의 삶의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서 오신 주께서 이제 우리 안에서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죄인중에 괴수인 우리를 죄인 중에 괴수라, 지적해주는 이 고마움, 비로소 내 분수를 알고 말씀으로, 복음으로 지적질 당할 때 이게 슬픔이 아니라, 당황이 아니라 오히려 찬미와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