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불
2022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5:17-25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 하게 하라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5: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5: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천사를 거론하면서 그것은 인간 사회을 구성하는 한 요소를 언급한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는 반칙으로 통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는 오로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만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은 곧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능가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극한’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역사 안에 등장하는 장로들입니다. 장로들은 모세에 의해서 세워져서 모세가 받은 계시를 백성들을 전달하는 각 지역의 중간 전달자 위치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 집단을 대표한다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계시’자체의 엄중함과 절대성이 전체 이스라엘 내부에 파급되어야 함에 대해서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백성이나 장로들이 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입니다. 민수기 11:24-25에 보면,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들은 비록 장로라도 예언을 했습니다. 물론 ‘다시는 아니하였더라’가 성립되지만 어쨌든 인간의 행할 수 있는 바를 초과하는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장로입니다. 이는 장로의 제대로 된 모습은 최종적인 시절이 와야 나타남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이 계시의 위상을 가진 장로의 모습은 신명기 21:18-21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즉 장로는 하나님의 계시의 엄중함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백성들 가운데 섞여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랬던 그들이 예수님 당시에 어떠했습니까? 마가복음 15:1에 보면,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 15:1)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즉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대표자격인 장로들의 손에 의해서 죽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장로집단의 의견에 백성들은 군소리 않고 따릅니다.
왜 하나님의 계시를 충실하다는 자들이 하나님을 죽여야만 되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죄/의의 기준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기준이 최종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죄가 된다는 사실은 그들은 믿을 수가 었습니다.
죄란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들 내부에는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들은 맨날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뭐가 문제있단 말인가? 내가 왜 죄인이어야 하는가?”입니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세요. “너 왜 여기 있어?” 즉 “너는 왜 존재하는데?”
그들을 답변할 수가 없을 겁니다. 정답은 이러합니다. 악마의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면서 등장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마와 한 통속이 이미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온갖 아이디어와 사력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 의해서 끄집어낸 이론들이 대략 다음 여덟 가지입니다.
첫째. 교회를 천국병원으로 간주해서, 죽은 나도 다시 살리실 것을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교회를 발레 파킹 해주는 곳으로 여깁니다. 내 힘으로 벽 너머 세계인 천국에 이를 수 없으니 차 키를 예수님께 맡기면 예수님께서 대신 천국에다 파킹해 준다는 주장입니다.
셋째, 물리학적으로 차원으로 설명해서, 땅에 기는 개미가 하늘을 나는 새를 알지 못하니 성경공부를 통해서 새를 나는 안목을 가지고 구원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넷째, 성경적으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니 늘 말씀을 대하면 연구하면 구원된다는 겁니다.
다섯 번째, 철학적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신은 무한한 존재이니 인간쪽으로 그 무한을 따라잡을 수 없으나 무한이 유한을 돌봐주면 무한의 세계를 이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여섯 번째, 가룟 유다의 경우처럼,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일곱 번째, 올바른 지도자를 교회에 보내는데 이들이 훈련소 조교처럼 다루어서 다른 신참들을 천국백성 만들어준다는 겁니다.
여덟 번째, 약속을 말하고 선포하는 그 인간을 믿고 따르고 동거하면 같은 약속에 동의하니 자신이 구원받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다음 성경 한 구절로 박살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성도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심에게만 그 근거가 됩니다. 마치 강도 만난 자가 강도에게 맞아 마땅히 죽어갈 때에 일방적인 선한 사마리아인 덕분을 고침받는 것처럼 예수님만이 우리의 이웃이 되어 사함을 받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그러니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종입니다. (갈 1:10)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2강-디모데전서 5장 17-25절(부득불)2212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5장 17-25절입니다.
디모데전서 5:17-25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옳은, 잘 가르치고 잘 다스리는 장로에 대한 존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언급하면서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천사’라는 말이 나와요. 21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천사가 등장합니다.
천사 등장하고 그다음에 22절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심판 이야기 나오고, 24절에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이렇게 심판 이야기가 나오고 그다음에, 20절에 보면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해서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금 언급한 내용들을 같이 모아놓게 되면, 이것은 사회법에 의해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능한 세계, 세상 사람들이 가능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그 세계는 본인들의 생존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성된 겁니다. 나는 생존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주변에서 옹호되기 위해서 그 세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천사라는 말, 굳이 천사까지 동원하고 “함부로 안수하지 말며”라는 이야기, 심판 이야기, 죄 이야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너라는 그 인간, 너라는 존재, 내가 이 세상에 생존하기에 마땅하다고 증명할 그 세계에서 어서 빠져나오기를 독촉하는 거예요. 촉구하는 겁니다.
네가 있는 세계, 네가 있는 그 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서 너를 어떻게 보느냐를 네가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은요, 법망(法網)으로 완전 숲을 이뤘어요. 모든 것이 법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법망을 한번 헤쳐봅시다. 그 법망 뒤에 뭐가 있는지.
그 법망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살아 마땅하다는 것을 옹호하는데 그 법들이 동원되거든요. 사도바울처럼 천사까지 거론하고요. 함부로 안수하지 말고, 그리고 천사 앞에 물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상투적인 용어가 되어서 다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언급한다고 해서 우리가, 내가 마땅히 살아야 된다는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렇다면 천사는 뭐냐 이 말이지요.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항상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뭐냐 천사입니다. ‘천사 네가 왜 거기 끼어들어? 천사는 저 하늘나라에서 놀아. 이 인간세계에 오지 마.’ 이게 우리들의 천사에 대한 태도거든요. 그런데 이 사도바울은 천사까지 여기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지요. 천사까지 집어넣으면 이것은, 천사까지 활동하는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내가 살아 마땅하다, 나는 마땅히 살아야 돼, 나는 잘 먹고 잘 살아야 돼, 그러한 정당성과 마땅함은 천사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법으로 꽉 차 있는 세계에서 흔히 대화할 때 그 대화 바닥에는, 그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내가 뭐가 문제인데? 왜 내가 너한테 지적받아야 돼? 법? 가져와! 내가 법을 어긴 적이 없어, 내가!’ 이거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 딱 한 개만 던져보세요. “너 거기 왜 있어?” 그 질문에 답변 못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고, 신앙 좋다고 우겨도 “너 왜 거기 있는데? 너 거기 왜 존재하는데?” 한번 물어보세요. 저는 이것 답변한 사람 아직 만나본 적 없습니다.
정답은 이거예요. 악마의 일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악마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갑자기 천사가 등장해요. 악마는 나쁜 천사에요. 천사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악마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를 인간을 통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 여기에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 아담은 이미 악마와 한통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너 거기 왜 있어?” 하면 답변 못 하고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뭐 법적으로 지금까지 그다지 나쁘게 산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아파야 되고, 내가 왜 죽어야 되고, 내가 왜 가난해야 되고, 하나님이여, 제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힘들어야만 합니까? 제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거기에 답변은 뭐냐 하면, “네가 그 소리 하는 그것이 지금 악마가 그런 소리를 내뱉는 스피커로서 인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그 악마의 일이 왜 증명 되어야 되는가? 악마가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의 값의 노릇을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가 없이는 하나님이 증명이 안 돼요. 하나님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나야 하나님이 그 현장에 나타나요. 이게 바로 ‘안수’라는 겁니다. ‘함부로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말은, 지금 이 세대는 인간은 빠지고 악령과 성령의 다툼의 세대거든요. 그러면 안수할 때 뭐로 안수하느냐? 성령으로 안수해야 돼요. 그 성령의 일을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그 인간, 진짜 인간 나부랭이가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의 일을 인간이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제가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마태복음 12장 31,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 이 단어 하나에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일에 방해하는, 훼방하는 그것이 인간을 통해서 퍼지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뭐냐 하면, 사(赦)하심을 줘요. 용서하심을 줘요. 용서하심을 준다는 것은, 너는 너 자체로 인간이라는 말을 붙이지도 말라는 뜻이에요. 사하심, 용서하심이 있다는 말은, 네가 자체로 사람 행세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계속 읽어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장로가 나오는데 이 장로가 ‘최종적 장로’입니다. 이 최종적 장로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심판받고 끝나고 난 뒤의 안목을 가진 장로, 사망을 넘어선 사람으로서의 생각을, 영을 가진, 사망을 넘어선 ‘사망이 뭐지? 사망? 그거 나와 상관없잖아.’ 사망조차 넘어선 사람의 영을 가진 장로, 이걸 바른 장로라 하는 겁니다. 그걸 최종적 장로라 하는 거예요.
그 최종적 장로 이전에 뭐냐? 몰락한 장로들만 인간세계에, 이스라엘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몰락한 장로. 마가복음 15장 1절에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여기에 “새벽에 대제사장들” 나오고 그리고 “장로들과” 장로들, 백성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지요, 장로들이, 백성의 대표자들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공유된 똑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대표자들 71명, 거기다 대제사장 보태면 72명, 예수님 당시의 국회의원 숫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에 보면 예수님이 미리 예언했었어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장로들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나님의 원수의 앞잡이들이에요. 악마가 사주한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장로에요. 그 장로는 백성들이 대표해서 뽑은 거예요. 일종의 그 당시 귀족들이지요. 상원의원들입니다.
그 장로들의 마음가짐과 백성들의 마음가짐과 똑같아요. 장로가 결정한 것 백성들이 반대 안 합니다. 자기 의견을 대신해 줬으니까. 그런데 그 장로들이 하는 일이 뭐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미리 예언했었어요. 죽이는 역할.
오늘날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역할로 교회 온 겁니다. 장로들 마음이니까요. 그러면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이려고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그들의 말은 이구동성 딱 한 가지 말을 했어요.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곧 “내가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데 뭐가 잘못됐는데? 성경대로 살려고 애썼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애 키우고 살림 살고 이게 뭐가 죄냐?” 그 말이에요.
뭐가 죄냐? 디모데전서 5장 17-25절의 오늘 본문에서 죄라는 개념은 뭐냐 하면, 예수를 신뢰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는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밖에 몰라요. 그들은 천사도 알아요.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어요. 그러나 단지 그들에게 빠진 것이 있습니다. 뭐냐? 예수를 빠트린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했지 예수님이 자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그들 쪽에서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너희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이것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하나님 믿는 너희들이 나타난 하나님,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그 대표적 인사가 누구냐? 장로입니다. 대표자들이에요. 백성들의 대표자 장로들이에요.
그들은 아주 철저하게 바르게 살려는데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로는 그것들과 다르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잘 가르치는 장로, 함부로 안수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안수받은 장로는 그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왜 다른가? 최종성, 마지막에 세상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난 뒤에 새로이 성령의 안수를 받아서 나타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장로들, 이것은 최종적 장로입니다. 앞에 설명한 몰락한 장로들이 아니에요. 일단 장로들이 몰락해야 됩니다.
몰락한 장로와의 차이남을 보여주는 장로, 이게 바른 장로에요. 그래서 이 바른 장로의 역할은 뭐냐? 바로 죄와 의에 대해서 확실한 기준을 갖고 있는 증인들이에요. 죄와 의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죄라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는 대상으로여기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을 왜 신뢰할 수 없는가? 늘 한평생을 옳고 바르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사는 나 자신을 이미 신뢰의 토대로 이미 꽉 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은 잘못 없는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살아 마땅함을 증명해주는 그 세상을 빠져나갈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버린 세상이지만 나를 버리지 않는 한 이 세상을 포기 안 하겠다는 뜻이에요. 비록 세상은 예수님을 버렸어도 나만 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과 함께 끌어안고 살겠다는 거예요. 타이타닉처럼 침몰해 버려라, 차라리!
그런 인간들,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그 죄는 치워버리고 그다음에 뭐냐, 새치기하는 죄 있잖아요. 세상법, 사회법, 교회법에 위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서 위반하면 마구마구 험담하고 ‘저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나서는 것, 그것은 죄가 출발이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죄가 나와야 되는데 중간에 새치기 해서 ‘저 사람은 이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나는 나쁜 짓 안 했어요.’ 줄 서 있는데 중간에 새치기하는 거예요.
옛날 영화관이나 야구장에 들어가기 힘든데 중간에 새치기하면 진짜 나쁘지요. 중간에 새치기, “이런 죄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는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그래서 저 악독한 죄인과 같지 아니합니다.” 바리새인이 그런 기도한 게 나와요. 11절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주께서 딱 보고 난 뒤에 땡, 너는 탈락이에요. 죄의 처음부터 다가가야지 왜 중간에 새치기를 해요? 왜 중간에 새치기합니까? 자기가 잘난 것을, 나는 존재해야 마땅함을, 나는 안 아파야 되고 안 죽어야 되고 이런 것, 그것 주장한다고 새치기 한 거예요. 출발점으로 가야 되는데 갈 생각을 안 해요. 계속 자기 자신을 쥐고 붙들고 살려고 합니다.
평생을 그러니까 늘 불안하고, 염려하고, 걱정이 되고, 공포심이, 일곱 귀신이 계속 따라붙는 거예요.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또 안 흔들리려고 하는데 가장 성도의 성도다움, 바른 장로, 또는 진짜 성령 받은 바른 성도의 특징이 뭐냐? 흔들림이 없어요, 흔들림이! 시몬즈 침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림이 없어요.
벤투감독이 우리나라 축구협회에서 욕을 해도 흔들림이 없어요. 우리나라 8강에 못 들어가도, 16강에서 8강으로 가려다 떨어져도 흔들림이 없어요. 교회 불이 나도 흔들림이 없고요, 집의 가스 안 잠가서 폭발이 일어나도 흔들림이 없고요, 자기 집부터 윗집 아랫집 다 태워도 흔들림이 없어요.
그걸 가지고 최종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최종성을 넘어서서 등장하는 인물, 최종성을 넘어서서 등장하는 인물, ‘사망이 뭐지? 죽는 게 뭐예요?’ 사망을 넘어선 사람, 거기에 대해서 바른 장로는 그걸 ‘의’(義)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복음을 가르치는 거지요.
그러면 왜 명칭이 장로냐? 그냥 성도라 하면 되지 왜 장로냐? 그 이유가 구약 이스라엘에서 나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 가면 남성만 60만 되는 많은 숫자가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장로들을 뽑은 적이 있어요. 장로들을 지도자로 뽑은 적이 있어서 백성들한테 어떤 의견을 통과하기 전에, 어떤 계시를 통과하기 전에 먼저 장로부터 통과해서, 장로가 각 지역에 다 있거든요, 각 지역별로 전달하는 그런 역할, 모세와 백성들 사이에 중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르치는, 전달역할을 하는 자들이 장로였습니다.
자, 그 장로 중에 하나의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을 오늘날 우리가 들어보면 깜짝 놀랄 기능이 있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나옵니다. 18-21절까지인데 제가 한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장로가 이 정도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장로가 주동이 되어서 하는 일이 있어요. 어느 집 애가 행악질하고, 부모 말 안 듣고, 맨날 술 처먹고 돌아다니는데 이런 것은 그냥 부모가 어찌할 수 없으니까 장로한테 넘긴 거예요. 오늘날 시대는 누구한테 넘기느냐 하면, 오은영 박사한테 넘깁니다. 치료해달라고 넘기잖아요.
그런데 그 시대는 그렇지 않아요. 그 당시에는 치료가 아니고 증거하는 겁니다. 와서 그 애를, 완악한 애를 돌로 쳐서 죽여버립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이게 오늘날 감히 말 끄집어낼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있습니까? 술 먹고 이태원에 갔는데 압사당했다. “감사합니다.” 이게 돼요? “우리 아들 이태원에 가서 죽게 해서 감사합니다.” 이게 됩니까?
아까 제가 설교 처음에 천사 언급했지요. 천사가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존재입니까? 천사가 그런 존재에요? 사도는 말합니다. 천사 앞에서, 이 바른 장로가 외치는 이 말이 천사까지 먹힐 말인지를 네가 판단해 보라는 거예요. “저 사람이 가르치는 장로가 된 것이 천사가 그 설교를 듣더라도 천사가 옳다고 판정 내릴 그러한 말인 줄로 여기고 여러분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지금 이런 동네에요. 어떤 동네냐? 최종성, 심판을 끝내고 죄사함만 있는 동네, 이 세상을 넘어선 동네가 이런 동네입니다. 어디 거기에서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어요. 죄사함 받으면 끽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죄사함 받았으면!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오늘날 이런 장로가 누구냐? 베드로전서 5장 1절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나도 함께 장로 된 자요. 누구냐 하면, 사도 베드로에요, 베드로. 그러면 장로가 뭐하는 사람이냐? 장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치료자 아닙니다. 증인입니다! 그냥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요, 고난의 증인이요. 사람을 좋게 하는데 고난받을 리가 있습니까? 사람을 좋게 안 하니까 고난받는 거예요.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그 장로가 하는 일이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다시 말해서 섬김으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톤으로 이야기하면 섬김으로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그 섬김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누굴 거론하느냐 하면, 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권력자들과 강력하게 아주 날카롭게 대비시켰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26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큰 사람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장로된 자가 양들을 섬기는 그 자세가 무엇과 극히 대조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세상의 권력 있는 자가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와 정반대 되면 된다는 거예요. 정반대로.
그러면 세상의 권력자들이 국민들, 백성들을 대할 때 왜 그렇게 권세를 부리는 식으로 하느냐? 그것은 섬김의 반대가 뭐냐? 소유에요. 섬김의 반대가 소유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이 지금 연세들이 되시니까 어릴 때 많이 경험했을 거예요. 어릴 때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어떤 식으로 대하던가요? 섬김입니까, 아니면 권세 부리던가요? 가부장적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도 자식들이나 자기 부인이나 며느리들에게 명령조로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뭐냐? 이 가정에 대해서 자기소유라는 거예요. 섬김의 반대가 소유입니다. 내 거라는 거예요, 내 거. 이 교회 내 거고, 이 교회 내 거라고 생각하니까 목사가 교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거예요.
이 회사 내 거고, 내 자식은 내 거고, 아내도 내 거고, 내 거라는 것은 갖고 다루고, 갖고 지배하고, 갖고 놀고, 이게 가진 자, 소유자의 특징이에요 그러면 왜 그 옛날에, 옛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그런 사람 하나도 없고요, 다 옛날 일인데요, 요새는 남자들 매나 안 맞고 살면 그것도 다행이고요, 옛날이야기인데, 지금 말고 옛날에는 왜 그렇게 했는가? 그 가족이 자기의 자존감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존재이유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가족이 잘되는 것을 자기 존재가 기뻐하느냐? 딱 이거예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자식 잘 키워서 이만큼 되었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누구 나 지적질 하는 인간 나와보라고 해. 너는 뭐 잘났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가족을 위해서 내가 희생했는데 이것도 죄인가?’ 이런 식이에요. ‘내가 희생해서 얻은 이것이 내 거잖아, 내 거! 내거니까 내가 함부로 마음대로 다루고 지배하고, 그 가운데 내 삶의 재미를 즐기겠다는데 이게 뭐가 잘못됐는데?’
인간은 정말 때려죽여도 자기 잘못을 몰라요. 자기 잘못 모릅니다. 합천에 보면 영화세트장이 있어요. 영화세트장에 가다 오다 들러본 적이 있는데 내가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참~ 을씨년스러워요. 앞에는 옛날 50년대 60년대 극장이 있지요. 조금만 뒤로 돌아가 보세요. 앞에는 그럴듯한 모습이지만 뒤에서 보면 합판을 받침대로 다 세워놓았어요. 참~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의 큰소리가 그렇게 을씨년스러워요. 뒤돌아보면 곧 죽을 인간이에요. 그것도 늙어 죽을,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요. 개뿔도 없어요. 없으면서 앞에는 “내가 뭐 잘못됐는데?”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의와 죄에 대해서 내가 잘났다는 것을 기준해서 의와 죄를 다루는 거예요. 그런 기준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최종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장로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가, 아직 세상이 어떤 식으로 끝나고,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의와 죄가 완전히 구분된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본인들이 자칭 자기가 의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죽인 겁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렸다고 죽였던 그 죽은 분의 영이, 죽은 분의 유령이지요, 그분의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장로하라고 안수해버리면 그게 바른 장로에요. 예수님의 귀신들린 것, 그 영이 들린 거예요. 그래서 특징이 뭐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그 사람 가운데 누가 포함되느냐? 본인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거예요. ‘나보고 죽는다고? 죽음이 뭐지? 남들이 나를 정죄해? 정죄가 뭐지? 옛날에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이미 사하심을 받은 사람한테는 정죄함이 없잖아요. ‘정죄가 뭐야?’ “너 저주 받을거야.” ‘저주? 아, 간만에 듣는데 저주가 어떤 것을 저주라 하지?’ 시몬즈 침대, 흔들림이 없습니다. 도대체 흔들림이 없어요. 나라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흔들림이 없어요.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되든 말든 하등 흔들림이 없고, 석유 값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흔들림이 없어요. 오늘 제목을 아예 시몬즈 침대라고 바꿔?
이 장로, 이 장로의 위세가 대단하지요. 그리고 어떤 게 최종적 장로냐 하면, 민수기 11장 24, 25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장로 70명을 모아놨어요.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神), 요새로 하면 성령이지요, 그 당시에는 성신이니까요. 하나님의 계시를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성신이라 합니다. 최종적이 아직 오지 않더라도 최종성을 넘어선 그 안목을 미리 당겨서 받는 것을 성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이 전부 다 불바다 되어도 그게 하나님의 마땅한 조치인 것을, 그 안목을 미리 당겨서 받는 것을 성신, 신약에서는 성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이 없이는 오는 세계에 사함을 받지 못하니까요.
완전히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악령과 성령의 싸움이에요.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곧 “너는 이미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어.”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그 자체가 우리는 납득이 안돼요. 이게 뭐가 잘못됐냐, 하는 식으로 항의하면서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내가 뭐가 문제냐?’ 자기 행동을 자기가 조사해보니까 문제가 없어요. 아무리 철저히 조사해도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는 말은, 우리에게 악령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 ‘성령 받았어요’가 뭐냐 하면, ‘나 그동안 악령과 함께 살았어요.’ 그 뜻이에요. ‘이젠 알아요. 내가 악령과 함께 살았음을 난 알아요.’ 이건 서태지 이야기죠. ‘난 알아요. 내가 악령과 함께 살았음을.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소리를 하면서 평생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난 알아요.’ 성령이 오니까 이게 바로 잘못된 죄, 잘못된 의의 기준이었다는 겁니다.
죄가 뭐냐? 세 번째, 네 번째 이 말씀 드리는 거예요. 죄가 뭐냐?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는 게 죄에요. 나는 나를 신뢰하고 싶어요. 너무 강력해요. 강력해요. 이 나의 신뢰. 그래서 누굴 만나든, 교회의 누굴 만나든, 심지어 말씀을 대해도 자기 변호하고 싶어요. 자기 변명하고 싶어요.
악령 받은 사람들의 문제점은 뭐냐?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아무것도 아닌가를 몰라요. 내가 어디까지 아무것도 아닌가를! 교회 와서 목사님 말씀 듣고는 자기를 낮춰요. ‘그래 망가져야 돼. 난 아파도 마땅해. 나는 가난해도 싸지. 말씀대로 못사는데 뭐 마땅하지. 그런데 주님, 어디까지 내려갑니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는 거예요.
‘망가질 용의는 되어 있는데 좀 살살 하시고요.’ 어디까지 망가져야 될지를 모르는 거예요. 어디까지 내려가야 될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게 성령을 안 받고 교회 오고, 그냥 말씀만 공부해가지고 겸손한 거, 그냥 마음 낮추기, 낮추기, 낮추기, 그런 것만 해서 신앙인 티를 내는 사람은 다음 여덟 가지에 다 넘어갑니다. 그 여덟 가지 준비해놨어요. 제가 여덟 가지인데 처음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자, 기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자, 병원에 갈 때 여러분은 의사를 신뢰하지요? 의사를 믿어야 됩니다.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잠시 당신을 깊은 마취상태에 빠트리겠습니다. 우리가 그 마취를 풀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교회도 병원과 마찬가지로 죽은 당신을 죽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죽은 당신을 다시 살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게 첫 번째입니다. 굉장히 은혜되지요. ‘아, 죽어도 예수 믿으면 다시 부활되는구나. 아, 이거 하나 건졌네. 교회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 생각이 들지요. 두 번째가 뭐냐? “당신이 이 땅에 사는데 저 벽 뒤에는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는데 당신이 아무리 차를 몰고 가도 이 절벽 앞에 막혀서 천국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차 키를 우리 주님께 맡기시면 나중에 여러분이 죽고 나면 ‘어? 내 차가 언제 여기에 와 있네.’ 주께서 여러분의 차를 몰고 여러분이 통과할 수 없는 절벽을 통과해서 천국에 가서 여러분의 차를 계속 몰도록 해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처소를 마련하니 하늘나라 아파트에서, 펜션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두 번째입니다.
두 개 밖에 아직 안 했어요. 여섯 개가 더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 물리학차원으로 설명하는 게 있어요. “여러분이 세상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좁습니다. 개미가 들판에 기어갈 때 그냥 들판밖에 모르고 앞뒤와 양옆밖에 모르지요. 그러나 3차원에서 보면 높이가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높이까지 계산해서 차원이 다른 세계 거기에 가게 될 겁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으면 더 높은 곳까지 볼 수 있는 그러한 안목이 생깁니다.” 이거 세 번째. 아직 다섯 개 남았습니다.
네 번째 성경 가지고 설명하는 게 있어요.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교회 꼼수 다 알려줍니다. 교회 영업비밀. 2, 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걸 가지고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성경적으로 여러분, 우리는 떡으로 살 수 없고 돈으로 살수 있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해야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거 네 번째에요, 이게 네 번째.
아직 네 개 남았어요. 다섯 번째, 다섯 번째는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인간은 유약하고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다 모르고, 세상은 인간이 아는 것도 있지만 모르는 것, 미진한 것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고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무한한 존재를 알 수 있겠는가? 그때는 의지하고 맡기면 무한한 존재께서 유한한 존재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고, 그리고 존귀하게 여겨서 우리를 불연속성, 유한에서 무한으로 그 불연속성을 하나님께서는 마저 보충해서 우리를 건진다.” 이거 다섯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점점 여러분이 헷갈리지요? 이거 다 맞는 이야기 같은데……. 여섯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룟유다의 죄도, 가룟유다가 사탄에 있는 것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 미리 알고 계신 분에게 다 맡기면 미리 알고 계신 분이 알아서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게 여섯 번째.
일곱 번째입니다. 벌써 여섯 번째에 나가떨어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지요. 일곱 번째, “바른 장로를 세운 것은 교회를 위함이다. 자, 교회에서 장로가 하는 일이 뭐냐? 훈련소 조교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조교로써 잘 가르치고 우리는 잘 훈련받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게 일곱 번째에요.
마지막 여덟 번째,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 많았습니다. 여덟 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게 뭐냐 하면, 남편이 복음을 믿으면 아내는 같이 붙어서 1+1로 구원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과 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당신에게 복음이 있기에 헤어지지 않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약속을 나도 당신 따라서 같이 믿는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1, 2, 3, 4, 5, 6, 7, 8.
사람은 한계 있는 존재라서 지금까지 한 것이 기억에 없지요.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교회는 천국의 병원이다. 두 번째는, 차를 대신 파킹해준다. 세 번째는,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을 우리가 생각을 넓히면 된다. 네 번째,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다섯 번째, 인간은 유한하기에 무한한 하나님이 돌봐주심으로 인간은 구원받는다. 여섯 번째, 가룟유다의 죄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미리 다 아신다. 일곱 번째, 우리가 스스로 일어설 수 없으므로 훈련소 교관, 말씀의 지도자를 보내서 우리를 가르치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 여덟 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과 같이 동거해서 덤으로 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 또는 어떤 훌륭한 목사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
자, 이 모든 여덟 개가 어떻게 이것이 가짜냐?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을 안 건드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런 여덟 가지의 방법을 통해서라도 구원받고자 하는 그 시도 자체가 지금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런 것을 주께서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 결정타를 내려버립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여러분,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이 문제! 여덟 가지 완전히 내가 습득했는데, 이래서 내가 구원받겠다 싶었는데 주께서 당사자, 심판주 당사자가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당사자가! 남들이 “너 구원받아.” 남들이 “너 성령 받았어.” 남들이 다 인정해주고 이해해 줘요, 남들이. 칭찬도 한두 가지 아닙니다.
누가복음 13장 26, 27절에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주께서 이런 평가를 내리시면 그때는 그 순간 여러분 어떻게 할래요? 그 여덟 가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대하고 설교를 대하면서 항상 녹녹치 않게 계속해서 마저 끄집어내서 버리지 않는 게 있어요. 끝까지 꼭 쥐고 있는 게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된 입장에서 말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한 그것을 우리가 농담으로, 하나의 겸손의 일종으로 여기고 있어요. ‘아이고~ 겸손해라.’ 지금 겸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 사도바울은 같은 장로예요. 사도바울도 장로고 베드로도 장로고, 가르치는 장로예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18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아……, 바로 여기서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이 천사를 거론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뭐냐 하면, 나의 의견, 나의 의사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묵사발 만든다는 거예요. 내가 복음을 전해? 그것조차도 어떻게 하느냐?
‘부득불’(不得不)이에요, 부득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돼요.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나의 인생이 안되거든요. 내가 살아온 30, 40, 50, 60, 70 인생이 내 인생 안되는 방법은 이게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거기다가 천사를 집어넣으세요. 물론 천사 집어넣으면 거기다 예수 그리스도 집어넣고, 하나님도 다 집어넣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도 예수님, 하나님, 너무 많이 알아서 식상해서 예수님, 하나님, 빼고 천사를 강조하는 이유가, 우리 인생에 천사가 주도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매 순간 그걸 느끼면서 살아야 돼요. 그걸 느끼면서 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예요. 부득불, 어쩔 수 없이 살다 보니까 한국 축구가 16강 올라간 것을 우리가 보게 된 겁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온갖 것 다 보는 거예요. 살아생전에 우크라이나 전쟁도 보게 되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요.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토대를 천사한테 맡기고 우리를 붕 띄워버렸어요. 우리 자체를 새털로, 훅 불어가지고 가볍게 만들어버리세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건 무게가 너무 무거워요. 인생이, 아, 너무 무거워요. 납덩어리 같아요. 납덩어리 같아. ‘건드리기만 해봐라. 막……’ 이런 거요.
복음을 10년 듣고 20년 듣고 나중에는……, 복음을 처음 듣고 우리 교회 나올 때는 막 성경 이야기하고요, 목사님 붙들고도 성경 이야기하고 그래요. 벌써 10년, 20년, 노털들 다 되어버리면 성경 이야기 안 꺼냅니다. 국민의 힘 이야기 나오고요, 초짜 아니야, 뭐 이러고 있고요.
바른 장로라는 최종성을 보고 있습니다. ‘사망? 사망이 어디 있어? 사망아, 네가 쏘는 게 어디 있어?’ 이미 최종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옛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나라 하나 건지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 하나 유지하기 위해서 장로들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노력 자체가 그 이스라엘을 몰락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인생을, 내 인생을 몰락하게 한 게 누구입니까? 괜히 가만있는 하나님보고 닦달 내지 마세요. 나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내가 내 인생을 몰락시키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데 이걸 알아야지요. 성령을 받았으면 그걸 알아야지요. ‘아, 전부 다 내 자존심이구나.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구나. 이게 뭐야? 인생 시간만 허비하고 이게 뭐야?’
이게 합천에 있는 영화세트장에 불과한 건데 껍데기밖에 없어요, 껍데기 밖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없으면서 없으니까 있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의 몰락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상으로 여기시면 안 될까요? ‘주여, 내가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부득불 사는 겁니다. 부득불!’ 부득불, 하니까 옛날 봤던 드라마 사극에서 강철 검 만드는 그 사람 극 중 이름이 ‘부득불’이에요.
끝으로 주께서 원하는 말씀의 완성된 사람은 누가복음 10장에 이웃에 관한 이야기할 때 나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나와요. 강도 만난 사람의 특징이 뭐냐? 강도 만난 사람이 살고자 하거나 치료받고자 한 의욕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 강도가 죽으라고 때렸기 때문에 이제 자기는 죽을 때만 기다려요.
다만 희한하고 이상하고 신기한 일은 그 선한 사마리아인이 왜 그냥 안 지나갔느냐, 하는 문제에요. 초점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나한테 좋은 이웃이 와서 나를 건져주면 좋겠다, 그런 쪽으로 보니까 성경을 복음을 40년, 50년 들어도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그냥 가세요. 당신 볼일 보러 가세요.’ 하는데 그 선한 사마리아인이 당신 처지와 내 처지를 동일시해서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게 구원받게 된 동기가 이유가 된 겁니다. 그냥 가도 되는데 “이 사람 치료비 내가 다 대고 여관비도 대겠습니다.” 그래서 “누가 강도 만난 이 사람의 이웃이 되겠는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한 그 말씀을 지킨 것은 우리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봐서 강도 만난 자, 스스로 치료할 가치도 없고 구원할 가치도 없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자기 피로 죄사함을 줘서 모든 것을 시몬즈 침대, 흔들림이 없는, 주님이 흔들림이 없는 것 같이 성도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천국 백성으로 만든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령으로 퍼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안수, 성령으로 안수받은 그 장로가 그냥 사람들에게, 교인들에게 전하는 거예요. 이것은 천사와 관련되고 성령과 관련된, 천국과 관련된, 인간의 어떤 의도가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 부득불 하는 인생, 그들이 바로 바른 장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교회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뭘 이용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이제는 깨달아서 주께서 하게 하신 일대로, 시키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종으로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