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종과 상전
2022년 12월 18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1-2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모든 인간은 상전이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상전은 힘의 서열로 매겨지는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고 강한 자라는 인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서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흠모의 대상이 상전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현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한 노예에 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도 힘을 가진 상전을 염원합니다.
잠재적 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나 할 것없이 상전이 되려는 동일한 방향성을 두고 치열한 경쟁마당이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을 세상을 당연하고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우기지만 실은 최고의 세상은 이런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신 것으로 누리는 질서로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나서서 인간에게 ‘앎이 곧 힘’이 됨을 인식시키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지식에서 나오는 힘의 질서만이 통하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힘을 가진 자는 상전이 되고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자는 종(노예)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에 노예제도가 없다고 하지만 돈없으면 곧 노예 취급받게 됩니다.
상전이 우대를 받고, 종은 하대를 받는 세상에서 자라온 모든 인간들은 그들을 둘러싼 정신 세계가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를 떠안고 있으면서 그 자리에게 구원과 천국을 고대하게 됩니다. 힘으로 누르는 이 현실 세계를 적응하면서 그들은 언젠가는 자신도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을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끼어들면서 새로운 구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인간의 범죄하기 이전의 구조를 지니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것은 기존의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뒤집기를 시도하면서 생겨나는 세계가 원래의 세계입니다. 처음부터 인간 세계는 상전과 종으로 구성된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려는 분이 상전이고 얻어받는 쪽이 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실제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었던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보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곧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뼈 속에 말씀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상전이고 싶어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가 기피하는 종이 되신 겁니다. 도와주지 아니하면 못사는 분이 되신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기존의 ‘상전 중심의 질서’를 처음 질서로 파괴하시기 위함입니다. ‘종 중심의 질서’로 바꾸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전의 자리도 공석이어야 하고 종의 자리도 공석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 땅에 ‘상전이면서 종으로’ 오신 것은 상전과 종의 자리를 자신으로부터 새로이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0:24-25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들은 그 누구도 상전되고 싶어 환장한 상태에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기존에 있는 힘의 체계를 사용하여 기존 죄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전환시키십니다. 그 방식은 바로 그들의 세계를 힘의 구조로서 눌려서 비틀어버리는 겁니다.
즉 사회의 계층과 국가와 법과 지식은 인간들로 하여금 주눅들게 만들어버립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이 상전이 되겠다는 의지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 지식과 법이 내리누리는 힘에 인간은 불안과 초조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무조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식으로 대처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자아가 깨어지면서 여기서 새로움이 나오는데 그 새로움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찾는 행위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사랑하므로서 자신을 잊게 됩니다. 종이나 상전이나 모두 같은 주님을 믿는다면 이들의 할 일은 서로가 그 직장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일입니다.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찾는 그 방식에 눈을 뜨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 기존의 힘의 질서와 다른 질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는 방식’입니다.(마 20:16) 이 세상은 힘의 세계이기에 인간들은 그 힘을 헤아리고 세는 식으로 사고가 뭉쳐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천국은 바로 자신의 노동 값을 헤아리는 자에게 천국은 거꾸로 작용함을 말씀하십니다. 두 개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릴 때, 예수님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은데 그 때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9) 예수님에게 아버지가 둘 있듯이 오늘날 우리들 자신도 둘입니다. 기존 파괴될 인간 질서에서 우리는 힘을 원하는 ‘나’가 있는 반면에, 처음 질서 속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 ‘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상전으로 혹은 종으로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이는 상전 파트에서 일하고 어떤 이는 말단 종으로 일합니다. 어디에서 일하든지 간에 성도끼리는 오직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질서애 속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에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실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디모데전서 6장 1-2절(종과 상전)2212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 1-2절입니다.
디모데전서 6:1-2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찌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여기 종이 나오지요. 그리고 상전이 나옵니다. 세상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전이고 하나는 종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은 종노릇 하면 되고 상전은 상전노릇 하면 되는데 사도바울이 종의 상전에 대해서 훈계를, 본문에 교훈으로 되어 있지만, 훈계를 하는 이유가 뭐냐?
2절에 보면 이 상전이 나하고 같이 예수 믿는 상전이기 때문에 형제라고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훈계를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어느 인간치고 자진해서 나 종 될래, 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세상을 상전과 종으로 나눈다면 모든 사람들도 다 상전이 되고 싶지 자진해서 종 되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러면 뭐가 깨어지느냐 하면, 상전과 종으로 된 이 구조 자체가 깨어진다는 거예요. 세상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것은 인간들 생각이고요, 사실은 평등하고 싶어해요.
인간은 평등하고 싶어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리고 이 세상 자체가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고 말았습니다. 지시하는 쪽과 지시받는 쪽, 상전과 종, 주인과 노예, 이렇게 나누는 거예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노예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노예 상전은 이 인류가 있는 이상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좀 노골적이었지요. 지금은 민주주의라 해가지고 전부 다 인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노예 아닌 것처럼, 그렇게 잘 대우하는 것처럼 해도 사실은 노예로 대우해요.
그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그 원인, 인간들은 두 계급으로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각자 서로 아는 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난 뒤에 마귀가 인간을 찾아와서 부추겼는데 그 부추긴 핵심은 뭐냐? 네가 아는 만큼 네가 신이 될 수 있다는 그 원리였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 선악을 아는 지식이 너로 단독적으로 신처럼 행세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따먹어라. 그러면 너는 선악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이 알고 있는 것을 같이 공유해서 알게 되고 너는 신처럼 살 수 있다.” 하고 마귀가 뒤에서 부추겼습니다. 아니까 아는 만큼 인간은 자기가 종이 아니라고 여기고, 아는 만큼 자기가 신처럼 상전이라고 우기게 되는 거예요. 아는 만큼.
그래서 이 세상은 종이 있고, 계급이 있고, 상전이 있다면 그것은 많이 아는 자가 상전이요 상대적으로 무식한 자는 종이 되는 이 구조, 이 구조는 인류역사상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서열화, 아는 것이 힘으로 작동하는 세계, 이게 바로 인류의 세계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자진해서 아는 사람에게 굴복하게 되어 있어요. 살려만 주이소, 뭐 그런 식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 인간들은 악마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폐쇄되어 있어요. 닫힌 세계에요. 가로막혀 있어요. 아는 자가 돛대질 하고, 아는 자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이성적으로 합당하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그런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아는 것이 힘인데 힘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구조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구조, 처음 있는 구조가 나중에 끝까지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악마에 의해서 처음 구조가 가려졌어요. 그 뒤에 인간들에 의해서, 힘 있는 자에 의해서 새롭게 정립한 구조, 이것이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지요. 인간들에게 숨어 있는 애초의 처음 구조에 의해서 나중에 인간들에 의해서 나왔던 그 배치공간은 나중에 파괴될 표징에 해당되는 겁니다. 처음 구조, 숨어 있는 처음 구조가 인간들이 세웠던 힘의 구조를 파괴할 그러한 권한을 가진 구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떤 구조, ■힘 있는 자로 서열화되는 구조를 철폐하고 애초부터 ■희생하는 자가 상전이 되는 애초의 처음 구조로 돌아가는 거예요. 주려는 쪽이, 주려고 하는 쪽이 상전이라는 겁니다. 받는 쪽이 종이고. 인간세계에서는 이것은 성립이 안 되지요. 성립될 수가 없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최후의 심판할 때 양과 염소로 나누는데 그 양(羊)쪽에, 구원받는 쪽에, 천국 가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합니다. 여기 여섯 가지가 나와요. 35, 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첫 번째, 두 번째가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세 번째입니다.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네 번째입니다.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다섯 번째입니다.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여섯 번째입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뼛속에 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서 일어난 실질적인 인간 대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처음 구조가, 이것이 담겨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종으로 오셨거든요. 종은 얻어먹는 쪽이에요. 주는 쪽이 상전이고요. 종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프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하고, 헐벗었고, 옥에 갇혔고, 병들고, 배고프고.
주님 쪽에서 처음 구조가 주님은 왕입니다. 상전입니다. 상전인데 이 땅에 오면서 이 땅의 구조 자체, 주께서 처음 구조가 후에 생긴 파괴될 구조에, 이 땅에 들어오시게 되면 인간구조는 처음 구조에 의해서 비틀리게 되어 있어요. 비틀린다는 것은 행주를 짠다는 거예요. 행주를 짜버리면 힘의 구조에 적합한 자아상, 주체상, 내가 많이 알아서 내가 주인 노릇 해야지, 하는 이 자기 자아상이 같이 비틀리게 되고 이게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틀어지면서 여기에 우리 기존의 인간질서에서 알지 못했던 새로움이 나옵니다. 새로움이!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그 질서, 원칙 말고 다른 원칙이 나와요. 사람이 엿가락처럼 틀어져 버리면 인간이 구조가 와해 되어버립니다. 내가 부서져요. 내가 부서지면서 내가 구상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가, 그러한 기대와 계획도 같이 다 틀어지게 되어 있어요. 다 부서지게 되어 있어요.
빌립보서 2장에 예수님이 종으로 온 그 내용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2장 6-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종의 형체를 가졌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만큼 종으로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런 거예요. 모든 인간이 제일 하기 싫은 것, 바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그 종의 위치가 인간들은 제일 기피 대상입니다. 종이라 하는 특징은 뭐냐? 이 세상에서 종은 뭐냐? 힘의 서열화, 힘의 구조화된 세계에서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힘이 없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얻어먹는, 그냥 얻어먹는 고난을 가진 자가 종이에요. 이 말이 참 어려워요. 얻어먹으면 우리가 얻어먹을 때 고맙다, 해야 되잖아요.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얻어먹는 자에게는 고난이 있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거지가 되는 이것이 제대로 너희들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라는 겁니다.
내가 거지 되는 것, 내가 아픈 것은, 내가 배고픈 것은, 내가 옥에 갇힌 것은, 너희들이 너희의 본래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내가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로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이 처음 만든 인간이 아니고 악마로부터 사주받는 그 이후의 조직에서는 힘 가진 자의 서열화로 굳어진 그런 구조 안에서 그들은 폐쇄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6장 2절 보게 되면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이 말은 ‘우리 형제니까 우리 서로 쉽게 대합시다.’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1절 끝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 하나님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이게 성경이니 그렇고 그럴 것이다, 대충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따져봅시다. 상전과 종의 관계잖아요. 상전과 종의 관계, 요새 같으면 기업입니다, 회사에요, 상전과 종, 사용자, 사장과 직원 사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그렇게 조직된 회사에서 하나님이 왜 끼어듭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사장은 실존합니다. 직원도 실존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실존하는 것과 실존하지 않는 조합이 과연 인간입장에서 용납이 될까요? 하나님이 거기서 왜 나오지요? 회사인데 입사할 때 “너 영어 토플 몇 점이야?” 이렇게 물으면 “저 하나님 믿는데요?” 이게 통합니까? 공무원 시험 치는데 객관식 시험 치잖아요. 정답체크 안 하고 벌건 십자가 그려서 내면 5급 공무원 합격 됩니까? 7급 공무원 합격 돼요? 안 되잖아요.
도대체 비실존하는 존재, 하나님이라는 실존하지 않는 비실존을 이 인간사회에 집어넣을 때 어느 회사에서, 어느 단체에서, 어느 조직체에서 그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내치지요. 이런 경우는 돼요. “너 우리 회사에 왜 입사원서 냈지?” “이 회사가, 믿는 제가 보기에 정말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기업이라 생각해서 제가 회사입사 축하로 30억을 투자하기로 하나님 이름으로 했습니다.” 하면 대번 합격이에요. 대번 합격입니다. 아예 이참에 이사로 등재 해버려요, 이사로.
하나님 뒤에 뭐가 나와야 돼요. 힘이 나와야 돼요. 힘 없는 하나님은 이건 비실존적 존재로 간주해요. 하나님이 고귀한 게 아니에요. 뒤에 붙어 있는 돈이 고귀한 거예요. 돈이! 그 직원이 하나님 믿는다고 채용하지 않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라서 채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용자와 노동자, 직원, 그리고 사장, 곧 주인과 직원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철저하게 바로 힘의 관계로 조직된 단체입니다. 회사라는 게! 그래서 회사는 어떤 사람을 뽑을 때는 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해야 돼요. 월급 준 만큼 배나 더 수익이, 생산성이 있어 줘야 이게 그 직원을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자기가 월급 주는 만큼의 곱빼기가 되지 아니하면 회사에서는 용단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너 아니라도 사람 많다. 너 아니라도 사람 많다. 기업이라는 것, 조직이라는 것은 힘을 계속해서 키워야 돼요. 커 나가야 되는 겁니다.
사장 입장에서는 그래요. “우리 회사가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회사의 직원이라면 우리는 하나의 식구니까 사장 잘되면, 회사 잘 되면 당신들도 당신네 식구 잘되니까, 서로 윈윈하니까 회사에 좀 충성해 주세요. 일 할 시간에 딴짓하지 말고, 주식 같은 것 하지 말고 잘 해주세요.” 거기에 이미 동의가 된 상태에서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끼어들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안 되지요. 그래서 직원들보고 이야기해요. “당신들도 열심히 하면 나처럼 사장될 수 있습니다. 그게 당신들 소원이잖아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이 힘의 구조 안에서는 내가 사장되려는 그러한 의식으로 꽉 차 있어요.
그래서 사장님이 새로 오셨는데 교회 다니더라, 하니까 밑의 직원들이 ‘휴~, 이제 종을 편안히 쉬게 해주는군요. 믿는 사람이니까 대충 일해도 봐주겠지. 믿는 사람이 어떻게 믿는 사람을 강제로 퇴직시키겠어?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함부로 까불다가는 퇴직당한다 그 말이에요.
직원들이 왜 안일하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내가 지금은 월급쟁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저 저리에 갈 수 있다, 나 저 자리가 탐난다, 저 자리가 인생의 희망이야, 그 희망 없는 인간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언제까지 내가 종으로 빌어먹고 사는 것, 나 이 짓 그만하련다.’ 모든 인간이 마귀로부터 벌써 사주받고 있는 입장에서는 힘이 모자란 자기 처지를 서러워할 뿐이지요.
진즉 공부할 걸, 진즉 농땡이 안 하고 좀 좋은 대학 갈 걸, 맨날 지나간 과거 생각하면서 그렇다 이 말이지요. ‘진즉 공부하고 좀 잘했으면,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수모 안 당하지.’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이 세상은 종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언제든 잠재적 상전이에요. 전부 다 잠재적 주인공들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네가 더욱더 알고 똑똑하게 되면 언젠가 네가 이 세상에서 주인이 될 수 있고 상전 될 수 있다.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이 종아! 종 생활을 청산해라.’ 그걸 출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인생 성공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좀 수월하게 상전 되고, 수월하게 내 자유공간을 많이 넓히고 있는데 마침 그 윗사람이 같은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면 ‘이제 맨날 회사 농땡이 쳐도 같은 형제니까 봐주겠지, 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생각 자체가 네가 예수님이 누구고 하나님 이름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살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거기서 진짜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뼛속에서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 공부하고 성경 달달 외운다고 그게 진리가 아닙니다. 실제로 한번 체험해 보라 이 말이지요. 예수님도 실제로 체험했듯이 너도 예수님이 가는 길을 가려면 실제로 체험해야 돼요. “이 세상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세 떠는지, 평생토록 네가 혹독하게 절절하게 네가 체험을 해봐라. 힘없는 존재가 얼마나 사람 취급 못 받고 노예 취급받는지 네가 알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기 사람들을 어떤 사람은 상전 되게 하고 어떤 사람은 종 되게 배정을 하신 거예요. 자리를 할당을 하신 거예요. 여기 비슷한 이야기가 에베소서 6장 5-9절에도 나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상전이나 종이나 둘 다 배정을, 배치를 했어요. 자리를 배급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캐스팅해서 집어넣은 겁니다. 왜 집어넣었는가? ‘이 세상이 왜 지옥이냐? 인간들 마음속에 아직도 악마가 들어있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그 집어넣은 게 뭐냐? 처음 구조입니다. 처음 구조란 뭐냐 하면, 처음 구조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이 세상에서는 상전도 없고 노예도 없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후에 힘으로 조정하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예요. 그거 완전히 무효입니다. 노예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천국 가고 그런 것 없어요. 사장이라고, 부자라고 지옥 가고 그런 것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 구조 자체를 전부 다 주님께서는 뒤엎어 버리고 파괴하는 거예요.
시작을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가? 주인이 이 땅에 오실 때 종으로 와서 그 주인 되시는 신분으로 종으로 오셨기 때문에 주인이 무엇이며 종이 무엇이냐 하는 그것을 이 땅 안에서 확장 시키는 작업을 예수님이 시작을 하신 거예요. 없는 주인 새롭게 만들고 없는 종을 새롭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그 둘 사이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직장생활하면서 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직원이나 노예나 뭘 해야 되느냐? 하나님 찾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그거 배정하려고 예수 믿는 사장이나 예수 믿는 말단 직원이나 둘 다 우리 조직, 기업이라는 것, 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같이 찾아보자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2절에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요, 사랑. 자, 해답은 나왔어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너는 사장 역할로 캐스팅되었고, 나는 말단 직원으로 캐스팅된 거예요.
믿는 사람끼리는 그것이 서로 동의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나는 너의 상전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의 상전이고, 너는 나의 노예가 아니라, 나의 직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원이다. 우리 둘 다 오케이?’ ‘오케이’ 역할은 같은 역할 아니에요. 하나는 사장 역할, 하나는 말단 직원 역할, 역할은 달라도 하나님의 사랑 찾기에 나서는 것은 공동적입니다. 사랑은 뭐냐? 사랑은 찾기입니다. 계속 찾는 거예요.
누굴 찾는가? 자기 찾는 것을 포기한 채 찾는 것, 나에게 사랑 준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가서 3장 1-3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이게 지금 우리의 상전 되신 주님께서 우리보고 하고 있는 일이에요. 2022년 12월 18일 날, 지금 이 일 하고 있어요. 주님은 쉬지 않고 찾아요. 사랑으로. 아가서 6장 1-3절에 보면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하나님이 목자로서, 하나님이 상전으로서 하나님의 종 우리를 찾는 이유는 바로 상전의 확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노예가 없으면 상전이 없고, 상전이 없으면 노예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하나님 자신이 상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자기의 노예 되게 만들어놓고 그 노예를 상전의 입장에서 찾아 나서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상전은 주는 쪽이고 노예는 받는 쪽이에요. 여러분 둘 중 어느 것 할래요? 이 세상은 끌어모아야 인간 대우 받는 세상이에요. 주는 게 아닙니다. 끌어모으는 거예요. 빼앗는 거예요. 뺏는 거예요. 뺏는 자가 승자입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할 때에 이미 모든 인간 속에 마귀 들었다는 것을 다 감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들이 말 뭐 몇 가지 한다고 그들이 알아먹는, 사랑을 아는 자들이 아니에요. 진짜 닭 모가지 비틀 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상 힘의 질서에다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는데 이 세상에 쏟아지는 그 힘 있잖아요, 그 권력, 권력이 비같이 쏟아져요. 모든 순간, 심지어 교회와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밖에 나가도 그렇고 모든 조직에 모든 세상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늘 권력의 비가 소낙비처럼 계속해서 쏟아집니다. 좍좍, 주륵주륵 쏟아져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출세는 해야 되겠는데 주어지는 힘에 대해서 그때그때 감당을 못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자기 생각의 변신을 획책합니다. 변신을 획책하면서 내가 출세해야지, 하다가 잠시 내가 보류해야 되겠다, 일단 소낙비는 지나가게 하고 피하는 게 상책이다, 자기 몸을 스스로 자기자해 하듯이 자기구조를 비틀어 짜버립니다.
본인이 ‘예, 옳습니다. 제가 잘못됐지요.’ 밥 먹고 살려고 하면 굽신거려야 되지요. 자기의 자아가 자기 스스로 비틀게 만들어요. 찢어지게 만들고. ‘참 더러워라.’ 이런 것, “방금 사장 앞에서 무슨 소리했어요?” “아무 소리 안 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중얼중얼……” “방금 무슨 소리 했는데?” “아, 아무 소리도 안 했습니다.” 사표 써 가지고 회사 나왔는데 둘째 임신했다는 소리 듣고는 쑥 들어가 버립니다. 살아야지요. 힘없으면 못사는데.
그 힘의 네 가지가 뭐냐 하면, 계급과 국가와 법과 지식이에요. 이게 매일같이 법으로 쏟아집니다. 계급과 국가와 법과 지식. 재래시장이나 이런 데 가면요, 아줌마들이 길가는 남자들은 다 사장님이라고 불러요. “사장님! 사장님! 오세요, 오세요!” “고등어 이거 얼마입니까?” 얼마입니다, 라고 하면 “비싼데요?” “아니 사장님이 알아요? 요새 물가 비싼 거 압니까?” 갑자기 훅 지식이 팍 들어와요, 지식이! 지식이 확 들어온다고요. “사장님은 고등어 동해, 남해, 서해 가운데 어디서 잡히는지 압니까?”
옛날 국민학교때는 서해에서 잡히는 고기 다 외워야 했어요. 그것도 새우, 갈치, 넙치, 이런 것 다 외워야 되었어요. 왜? 그거 아는 게 힘이니까, 아는 게 힘이니까. ‘고등어에 대해서 잘 모르지요? 모르니까 내가 부르는 값 그냥 돈 내소.’ 이게 맞아요. 사장님이라 했다가 갑자기 고등어 파는 아줌마 앞에서 노예가 되어버렸어요. 왜? 무식하니까, 지식이 없으니까.
지식이 없으면 대화가 안 돼요. 그리고 법 모든 법, 급행 1번 탔다, 벌써 방송 나옵니다. “휴대폰을 너무 오래 사용하면서 남에게 피해 주지 맙시다.” 휴대폰 사용하다가도 방송 그렇게 나오면 그게 법이니까 통화 짧게 끝내요.
그다음에 계급, 아, 이거, 계급 이거 무섭지요. 계급이라는 말을 한국에서는 잘 사용 안 해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계층. 계층이나 계급이나 둘 다 똑같은 거예요. 계층은 한번 직장 들어가면 그때부터 계층싸움, 계급, 진급 때문에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받아요. 진급 때문에. “그 나이에 아직도 경사냐?” 뭐 이런 거요.
순경, 경장, 그다음에 경사, 그다음에 경위, 그다음에 경감, 그다음에 경정, 그다음에 총경, 경찰 내부에 계급이 있어요. 계층이 있잖아요. 같은 동기로 시작했는데 남은 다 경사 되었는데 자기만 아직 경장으로 있다. 이거 뭐 나보고 사표 내라는 이야기인지, 그다음부터는 잘릴 수가 있어요.
‘내가 더러워서 경찰 사표 낸다.’ 사표 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사표 내고 내가 더러워서 딴 직장 하지.’ 경찰 경사 출신이 할 거 뭐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 사회는 악마의 사회기 때문에 지식이 힘이에요. 그래서 취직하려면 일단 교육 받아야 돼요. 교육받고 그다음에 자격증 취득해야 돼요. 자격증 취득해서 초짜로 취직해야 돼요. 취업해야 된다고요. 취업하고 난 뒤에는 경력을 쌓아야 돼요. 경력을 쌓으면 중장기계획이 수립됩니다.
그런데 지금 40대 50대가 경위로 퇴직했다. 어디에 취직하려 하는데 취직 그냥 해줍니까? 폴리텍대학이 있잖아요. 거기 가서 미장일을 배우든지, 타일을 배우든지, 시커먼 안경 쓰고 용접을 하든지, 새로운 기술 배워서 자격증 취득해야 되지요.
자격증 취득한다고 바로 취업 안 시켜줍니다. 경력이 있어야 되거든요. “자격증 있습니다.” “경력 있나요?” “경력 없으면 우리 회사 안됩니다.” “일 시켜줘야 경력이 있지요.” ‘네가 알아서 경력 쌓아라.’ 조수로 3년간 일해야 돼요. 바리스타도 3년간 일해야 되고, 문방구를 해도 3년간 일해야 돼요. 아르바이트로 3년간 일 해야 돼요.
3년간 일해서 그것도 하다 보니 ‘내가 상전 되고 싶지 노예 되려고 이 세상 산 게 아니다.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이게 무슨 짓인고? 남 좋은 일이나 시키고 있고. 월급도 안 오르고 나도 이제부터 자영업 한다.’
자영업이 그게 쉽습니까? 일단 내 적성에 맞아야 되지요. 그다음에 문제는 시장이 포화상태에요. 그다음에 세 번째가 제일 중요해요. 이미 체력이 다 닳았아요. 이미 힘이 빠져서 안 되요. 관절이 벌써 나갔어요. 남의 회사 일 한다고 이 나이에. 퇴직금 받은 것은 산에 놀러 다닌다고 다 까먹고 재취업 안 되지요.
드디어 구조에서, 힘의 구조에서 자동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은 빈곤층으로 내려가는 것, 주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인간들이 가기 싫은 제일 낮은 장소에 주께서 거기서 “이제 왔나? 욕봤다. 그동안 이 세상에서 대장질하고 싶어서 헛된 악마의 꿈을 꾸었던 너희들 어서 들어와, 들어와! 어서 들어와! 네 자리가 이 자리야. 네가 얻어먹는 자리야, 네 자리가! 나도 얻어먹었잖아. 너도 얻어먹어야 될 자리야. 그게 너의 존재에 딱 적합해, 딱 맞아.”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는 이유를 알겠지요? 자체 자아를, 자기가 주인공임을 포기하기 때문에. 이것은 본인이 알아서 포기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로 악마가 들어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구조적으로 틀어버리니까, 비틀어버리니까 더 이상 나한테 일체 희망과 일체의 기대가 날아가 버린 그런 복을 받은 거예요.
아, 상전도 공석이었고 종도 공석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종의 자리에 이렇게 왔으니까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 찾기가 드디어 성공을 본 거예요. 사랑 찾기가! ‘아, 이게 사랑이구나.’ 이게 뼈 안에서 말씀이 나오도록, 설움 받는 가운데서 말씀이 새롭게 새롭게 해석되도록, 체험되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구약성경부터 계속 나옵니다. 성경 전체가 뭐냐? 상전은 따로 있어요. 하나님이 상전이고 그다음에 나머지 인간세계에서는 악마로부터 범죄한 이상 전부 다 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한테 시험 들어서 모두 다 힘을 가져서 왕이 되려고 하는 그것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진해서 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종의 자리는 아무도, 아무도 찾지 않는 종의 자리를 주께서 먼저 선점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16절에 나옵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 땅에 상전으로 왔지만, 상전이지만 종의 모습으로 오니까 그런 주님의 신분변화로 인하여 세상전체가 상전되려고 환장한 그런 지옥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4, 25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 세상에 주인으로 오신 우리의 주님으로 오신 그 주님을 사람들은 마귀 들렸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예수를 믿게 된 너희들은 네 앞길을, 네 앞가림을 네가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걱정하지 말고 주인님이 가신 그쪽에 주인님이 갖고 계신 취지의 확장역할이 바로 성도의 역할이에요.
따라서 세상에서 욕 얻어먹는 것, 무식하고 힘없다고 놀리면서 훅 들어오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나도 그런 대우를 받고 그러한 입장에 있다, 나와 같이 있으면 너는 내 식구다, 라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이런 말씀 안다고 우리가 선뜻 ‘나 이제부터 거지 될래.’ 이렇게 나올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모든 인간이 주인 되고자 하는 이 판에 이걸 강제로 바꾸어줍니다. 인간들은 이 상황, 이 기존의 질서가 훅 들어오면요, 첫 번째 현상은 불안하고 초조해요. ‘야, 이러다 망하겠다.’ 두 번째 대처방법이 뭐냐? 그 힘 있는 자에게 무조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은 숨은 쉬고 보자. 그것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서 세 번째 뭐냐 하면, 주인 자체가, 주체 자리가 바뀌게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자,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 여러분 참아내셔야 돼요. 일단 제가 어렵게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천국 백성 만드는가? 최초에 있던 질서 속에 어떻게 편입시키는가? 그 방법이 뭐냐? 이 땅에서 하는 방식이 뭐냐? 그걸 제가 말씀드립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하고 그 부모가 축제 날에, 유월절 날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압사 지경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왔는데 어떤데 보면 100만 명 왔다고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왔을 때 예수님의 부모가 아이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43-45절에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아이 예수에요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예수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헤어졌어요. 헤어졌다가 나중에 사흘 만에 찾았는데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그때 하시는 말씀입니다. 48절에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그 부모가 예수님 보고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자, 세상의 질서가, 힘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그 힘에 의해서 인간은 기존의 내가 기대했던 목표와 그것이 와해 되고 무너질까 하는 불안과 초조가 먼저 발생되고, 그다음에 그걸 대처하는 방법은, 일단 힘에게 맹목적으로 무조건 ‘예, 잘못됐습니다.’ 복종하는 식으로 되지요.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다예요. 그러니까 아이 예수님, 젊은 청소년기의 예수님도 부모한테 그렇게 복종할 줄 알았지요.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은 뭐냐? “아버지여, 어떤 예수를 찾았어요? 어떤 예수를 찾았습니까?” 이 말은 “아버지여, 예수가 두 종류인 줄 몰랐습니까?” 이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말은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두 종류인 것을 몰랐습니까?” 기존의 힘의 질서 속에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여러분이 있어요. 그것 말고 애초의 처음 질서 속에, 구조 속에 있는 여러분이 따로 있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여러분이 따로 있어요. 그동안 조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있으면서 그동안 우리가 그걸 잃어버린 거예요.
그저 무너지면 안 된다, 불안하고 근심하고, 이게 나의 전부인 줄 착각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주님과 한 가족이 된다는 그 자아를 우리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저 힘이 있어야 교회 다니고, 힘이 있어야 헌금도 하고 천당 간다, 우리는 기존의 인간세계에서 말하는, 심지어 교회에서 말하는 그게 천국이고 그게 다인 줄 알았지요. 천국이 뒤집기 하는 줄 몰랐습니다. 뒤집기 하는지를 몰랐어요.
두 종류의 ‘우리’가 있어요. 두 종류의 아버지가 있었고, 두 종류의 아들이 있었고, 두 종류의 예수가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가 아기 예수한테 힘주려 하다가 도대체 반대로 뒤집기 당했어요. 역전당해 버렸어요. 오히려 꾸짖음을 당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 갑자기 아버지가 두 종류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천국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 포도원에서 놀고 섰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일군으로 모집했습니다. 일군으로 모집한 거예요.
그 일군들은 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일이 없어요. 놀고 있는 사람들 뽑았어요. 그래서 약속을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 남성 하루 일당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데려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여섯 시인데 어떤 사람은 오후 5시에 불러서 일을 시킨 겁니다.
임금님이 일당을 주는데 오후 5시에 온 일군부터 먼저 줬어요. 주는데 하루 치 일당을 줬습니다. 그걸 보고 나중 온 사람은 은근히 기대를 했어요. ‘야, 한 시간 일했는데 하루 치 일당 줬다? 그러면 내가 오늘 몇 시간 일한 거야. 10시간, 와, 10배?’ 이렇게 기대했는데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전부 다 주기로 했던 일당만 줬어요.
왜 주인이 그렇게 했을까요? 지금 예수님이, 천국이 무엇이냐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이야기를 했어요. 도대체 천국이 뭡니까? 천국은 지옥이 없으면 천국이 설명이 안 돼요. 지옥은 뭐냐? 셈하고 헤아리는 세계에요. 따지는 세계에요. 거저 줌이 없습니다. 내가 노동한 만큼 계산해서 내 것 만드는 것, 성공되는 내 것 만드는 것이 가능한 세계, 이게 우리가 몸에 익히 익혀온, 기존의 구조, 질서에서 익혀온 우리들의 제2의 천성이고 제2의 자아상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길들여져 있어요. 몸에 그게 스펀지처럼 배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충성했으니까 천국 넣어달라는 게 이게 오늘날 교회들이 하는 운영방침이에요. ‘놀면서 천국을 가? 이런 시건방지게!’ 이렇게 나온다고요. ‘아는 만큼 네가 힘이 된다.’ 이게 우리의 본질로 자리잡았습니다. 그게 회사가 되고 국가가 되고, 그게 계급이 되고, 그게 바로 법이 되고, 그게 질서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근대국가는요,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한 인간들의 사회적규약이라고 되어 있어요. 말이 사회적규약이지 언제 우리가 사인한 적 있습니까? 이것은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힘. 기존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지난 1909년부터 1945년 일제 치하의 36년, 이 일을 몇십 년 전부터 이름을 뭐로 바꿨느냐 하면, ‘일제강점기’로 바꿨어요. 강점기. 왜 바꿨지요? 자존감 상해서 부끄럽다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했지요. 일제시대 때 그 전 조선 시대 때보다 10배, 20배, 조선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어요. 왜 그 역사를 다 왜곡합니까? 누가 역사를 다 왜곡한 거예요? 일본사람 때문에 개화되었다는 그 덕을 생각해야지 일제강점기, 일제 치하, 그것은 전부 다 조작된 겁니다. 왜 조작하느냐? 현재 지금의 국가가 있으니까 이 국가가 과거의 역사를 전부 다 조작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역사란 이름의 진리에요.
우리는 빌어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걸 아는 자가 천국을 아는 자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비유 이야기하면서 “네가 그렇게 계산에 밝아? 그렇다면 천국은 무엇이냐? 천국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것, 이게 천국이다.” 그게 천국이라는 거예요.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없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질서구조가 와서, 처음 구조가 와서 예수님이 몰고 온 거지요, 그 처음 구조의 원리인 사랑, 내 백성 내가 알아서 찾는다는 그 사랑, 기어이 찾아낸다 그 사랑, 그 사랑으로 사랑을 몰랐고, 힘을 가지는 것 그것이 전부였고, 사랑은 뒷전이고 힘이 전부라는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모가지 비틀 듯이 비틀어버렸어요.
비틀어버린 거예요. 찢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찢어버릴 때 우리 안에서 예상 못한 주님의 사랑이 거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사랑은 늘 새로운 거예요. 사랑은 회사에서 가기 힘들다, 힘들다, 월요일 되면 죽을 맛인데 또 가야 되고, ‘이거 아니면 내가 밥 못 먹고 사나? 아, 내 인생 이렇게 더럽게 꼬이냐?’ 지금 그만두지는 못하겠지, 희망은 없지, 내 인생은 대책도 없고 어쩌면 좋으냐, 라고 했는데 그 회사에서 새로운 여자 직원이 왔는데 예뻐, 그때부터 룰루랄라 면도하고 옷 입고 일찌감치 회사 가잖아요. 왜? 사랑이 있으니까.
교회 억지로 다니면서 ‘남 노는데 왜 나는 교회 가야 돼?’ 하다가 교회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새로 등록했을 때 죽어라고 새벽 네 시 기도회부터 밤 10시까지 청년회 봉사 다 합니다. 왜? 그녀가 있기에. 그녀 만나기 백 미터 전, 교회가 100미터 앞에 있다면 그녀 만나기 100미터 전이에요.
내가 찾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그 순간만큼은 모든 힘든 자아를 잊어버려요. 고민과 걱정 근심 다 잊어버립니다. ‘나 대신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부모가 나중에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생각이 문득 들어요. ‘내가 너 때문에 그전에 날씬했던 몸매가 뚱뚱해져도 괜찮아. 너만 잘되면 지금보다 더 뚱뚱해져도, 너 살쪘네, 너 돼지네, 소리 들어도 너만 출세한다면 나 아무 걱정 없다. 이게 엄마의 마음이다.’ 그게 이상하게 부담이 더 되네요. 그게 더 부담되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최초에 있는 구조였습니다. 아버지가 상전이고 종은 예수님이 되면서 상전은 종을 종답게 부리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의 세계에 집어넣는 들여보내게 한다는 그 사례, 그 샘플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줬거든요.
그 다음 차례는 뭐냐? 하나님께서 바로 자기 백성을 그런 식으로 이끄십니다. 그게 구약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 2-5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모세가 양무리를 쳤습니다. 양을 쳤어요. 양치는 모세, 하나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하나님의 계시, 선지자 된 모세지요, ■모세가 하나에서 둘로 바뀝니다.
바뀌면서 모세는 조건이 있어요. 너는 철저하게 나의 종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뒤에 떨기나무가 있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어요. 모세가 그것을 보고 양치다가, 그는 계속 양치는 사람이었어요, 양치다가 떨기나무 불꽃을 보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가 신기했지요. ‘어떻게 불은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를 않네?’ 그렇게 할 때 떨기나무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4절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5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발을 벗겼어요. 신발 빼앗겼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없는 길로 가게 된 거예요. 상전이 없는 종은 없습니다. 드디어 모세에게 상전이 생긴 거예요. 신발은 누가 갖고 있는가? 신발은 상전이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범죄한 외국인들에게서 제일 먼저 빼앗는 것이 뭐냐 여권 빼앗아 버리지요. 여권 빼앗기면 저는 빠져나가지를 못 하잖아요.
주님은 우리의 여권을 뺏어버려요. 우리의 주민등록을 뺏어갔어요. 우리의 목숨줄을 뺏어갔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이제부터 주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회사에 말단직원으로 가든, 또 무슨 일이 잘못되어서 내가 어느 회사의 사장직을 맡든, 어떤 기업체의 주인공을 맡든, 기업체의 주인공이라는 이름의 종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 보니 예수 믿는 사람, 복음을 아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면 둘 다 둘 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 기업활동을 통해서 한번 찾아보자는 거예요. 사랑을 찾아보자는 거예요. 이것은 기업활동이 아니라 사랑 찾기 활동이에요.
퇴직을 하든 다시 재취업을 하든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공간이든 주께서 종으로 사셨던 그 공간을 뒤따라가는 그러한 이미 구원받은 종으로서의 삶을 사는 거예요. 모세보고 “신발 벗어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모세는 신발 빼앗겼습니다. 자기의 선택권이 없습니다. 내가 주인을 선택할 권한 없습니다. ‘나는 이제 부처 안 믿고 예수 믿을래.’ 그런 권한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나 천당 보낼래요.’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예수 믿고 천당 갈 권리 없습니다. 주께서 구원받게 했고, 주께서 예수님 자신을 알린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아는 예수, 이것은 거짓된 예수에요. 말 속에 뼈가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 체험 속에서 뼛속에서 진짜 예수님이, 사랑이 거기서 우리에게 체험케 하는, 그렇게 해서 지금도 주님이 우리의 상전이고, 지금도 우리가 주의 종으로서 이 땅에서 예수님의 것만 예수님의 뜻만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양이 되는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크게 보게 하옵소서. 나 위주로 보지 않게 하옵소서. 내 출세하는 위주로, 성공하는 위주로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종이 된 것도, 남들 보기에 사장이 된 것도 주님의 사랑 찾기의 일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