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215a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말라기1장4절부터 하겠습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한 구절인데요. 한 구절에 엄청나게 이야기할 게 굉장히 많습니다. 몇 시간 짜리로 나올 수 있어요.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place. 장소. 장소 문제로 나온다고요. 악한 지역이다. 악한 지역. 장소거든요. 장소.
악한 지역인데, 장소를 통해서 운명을 결정한다. 상당히 이어지기가 곤란하겠지요. 보통 운명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두고 니가 나쁘니까, “니 미래는 끝났어!” 이리 되어야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는가 하면, 장소라는 게 빠져요. 예를 들어서 “너, 편의점에 도둑질했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악한 짓을 했으니까 교도소 가거라.” 지금 뭐를 지적하는가, 그 인간을 지적하잖아요. 인간을.
“니 편의점에서 뭐했어?”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너의 가정을 몽땅 교도소로 옮겨라. 니가 살던 집을 몽땅 교도소로 옮겨라.”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지역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인간이 잘못됐지, 지역이 무슨 잘못입니까.’ 라고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운명이라는 것. 말라기1장부터 나오는 게 운명인데, 결정된 운명인데. 이 결정된 운명은 그 사사로운 개인적인 그 사람의 팔자와 관련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치와 관련되어 있어요. 배정받은 위치. 배정받은 위치입니다. 악한 지역이잖아요. 악한 지역이 있다면 선한 지역이 있는 겁니다. 선한 지역.
악한 지역이 있다는 것은 선한 지역이 있고, 이 지역과 지역에서 인간이 있으면, 그 사람의 개개인의 행동이나 행함은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선한 지역에는 율법의 완성이 여기에 선한 지역을 형성하고 있고, 악한 지역에서는 반(反)율법적 경향을 보여주는 겁니다. 경향을 보여 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개인적인 운명을 갈굴 대상도 안 돼요. 안되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천국 장소지요. 지옥 장소지요. 천국과 지옥의 장소를 정해버리면, 이 장소는 뭐가 되느냐 하면 환경이 됩니다. 환경. 환경 우선주의지요. 환경이 결정되어버리면 그 환경에 속한 사람은 배정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어떤 짓을 하고, 어떻게 생각을 하고는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니가 어디 안에 있느냐, 그것만 주께서 보시지요. 지금 하는 게 말라기잖아요. 말라기 이후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말라기 이후로 역사가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신약시대에 종말이 되어집니다. 종말이라 하는 것은 결정된 것을 결정된 채로 그냥 덮치는 거예요. 결정된 것을 결정된 채로.
예를 들어서 그런 겁니다. 식당에서 해물탕을 하는데 주문하고 나니 해물탕이 왔어요. 해물탕이 냄비채로 왔어요. 손님이 묻습니다. “이거 얼마 끓이면 먹을 수 있습니까?”하니까 주인이 “그냥 드셔도 됩니다. 저 방에서 다 끓여서 왔으니까 그냥 드셔도 됩니다. 기다릴 필요 없이 그냥 드셔도 됩니다.” 기다릴 필요 없다는 것은 시간 요소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교회 다녔다. 그런 거 빼세요. 시간 요소를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당장 드셔도 됩니다.
앞으로 20년 동안 잘할게요. 그런 거 이야기하지 말고. 앞으로 10년 뒤에 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거 하지 말고. 자기에서 시간 요소를 빼는 거예요. 남는 것은 환경 요소밖에 안 남습니다. 이게 바로 이방민족인 우리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지요.
그것을 구약 이스라엘에게도 이미 그러한 원칙들이 계속해서 살아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원칙 제가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변화를 겪는 것이 내부에 요인에 있다.’ 내부에 요인이 있다는 틀 또는 구조 모델. 변화를 겪는 것이 내부에 요인이 있다는 거예요. 외부의 요인이 아니고 내부에 요인이 있다. 내부의 요인은 말라기에서는 뭐냐, 율법. 구체적으로는 뭐냐, 제사법. 제가 말라기1장 끝까지 읽어보라 했지요. 끝까지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중이 무언가를 여러분이 나름대로 생각해보라 했지요.
하나님의 의중이 뭐냐 하면, 내부의 요인으로 인하여 바깥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바깥의 변화로. 그러면 여기서 반대말, 내부의 요인으로 변화를 겪는 것. 이 반대말이 뭐냐 하면, 외부의 것으로 내 내부의 변화를 요청하는 게 반대가 되겠지요. 변화를 겪는 것이 내부의 요인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고, 인간들의 방식은 뭐냐, 외부의 것에 의해서 내가 좀 달라져 볼까, 하는 것이 인간들의 방식입니다.
인간들이 외부의 것을 내부로 반대말로 하는 제일 근본적인 흔히 보여주는 일상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매사에 나에게 돌아올 이득 또는 이윤. 이윤을 생각하는 거예요. 매사에. 어떤 행동을 하든지 눈 오는날 사진을 찍는다든지, 모든 행동하든지 하나 하나가 ‘이거 해서 나한테 이익이 뭐지.’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이익을 생각하느냐 하면, 매사에 나에게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이걸 나라고 이미 규정지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인간이 평생 스트레스 받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요거 하나에요. 요거 하나입니다.
그러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보게 되면 내가 은근히 노렸던 나의 이득이 돼요. 아휴, 부럽다. 아이고, 애들하고 해외여행 갔다 왔다면서. 나는 뭐 요새 살기 바빠가지고 나 옛날 처녀 때 꿈은 그건데 요즘은 뭐 나는 영 물건너갔어. 아이고, 요놈의 팔자 남자 잘못 만나가지고...., 왜 그리 생각하느냐 하면, 해외여행을 갔다 와서 행복한 모습을 보일 때, 남들이 행복하다고 해주는 그 모습에 대해서 스스로 대만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겁니다.
손해는 뭐냐, 손해는 남들이 나를 가련하게 여기고 안됐다고 측은하게 여기면서 나라면 나 같은 인생 안 산다고 그렇게 평가할 때, 그게 나한테 손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외부의 눈치 보는 인생입니다. 외부로부터 눈치 보는 인생.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뭡니까. 외부로부터 눈치 볼 거 없이 내부에 있는 원인에 의해서 니가 이미 운명이 결정됐다는 사실이에요. A(Ap)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A(Ap). A는 외부성. 괄호는 내부성. 괄호 안에 외부성이 place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place니까 p로. “내 안에 외부 있다!” 이 말이에요. 내 안에 외부 있다. 내 안에 외부 있으니까 이건 외부가 나의 긍정을 내가 허락을 맞고 나에게 검증받고 내 것으로 전환될 때에 내 것이 된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쓱~, 나의 허락도 없이 그냥 침투한 거예요. 이걸 오늘 강의 제목으로 정해도 괜찮아요. 이게 뭐냐 하면, 초과. 밤이나 쌀전에 쌀 팔 때, 인심 쓰는 척 하면서 되말에다가 넘치도록 주지요. 그 흘러넘치는 걸 뭐라고 합니까? 초과된 거예요. 초과된 것. 내 예상, 내 이익이냐, 내 손해냐를 능가하는 그 무엇. 그 썸씽. 초과하는 것. 흘러넘치는 것. 이걸 로마서5장에서 또는 로마서3장에서 초과된 그 외부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복음은 복음 안에 뭐가 있다? 의가 들어있어요. 무슨 의? 인간이 만든 율법에 의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죄사함에서 오는 거룩에서 오는 의. 외부적인 의. 외부적 의가 뭐라고요? 초과된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초과를 알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되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초과는 그거 빼고 여분의 것이니까. 이 말은 우리 인생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읽는 노력이 필요해요. 정확하게. 우리가 사는 삶이 대충 어렴풋이 아는 게 아니고 정확하게 나는 뭘 믿고, 나는 뭘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확한 규정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그건 나의 내부성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가 할 수 없는 외부성을 알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철저히 완벽하게 다 파악해야 돼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종교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열성과 열심. 바리새인이 대대로 했던 거예요. 로마서10장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지요. 열심히 믿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초과 된 게 아니고, 해내면 해낼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시험 치는데 경찰시험이라든지 시험칠 때 남자 같으면 턱걸이 한다 말이죠. 딴 건 필기시험, 면접시험은 다 됐는데 문제는 턱걸이가 안되는 거예요. 특히 경찰시험에서는 딱 범인을 잡을 때 손에 압력이 있어야 돼요. 이 압력으로 해서 어떤 사람은 세 번 떨어진 사람이 있어요. 순경되려고 삼천만원 들여서 노량진 학원에서 했었는데 맨날 떨어져요. 이 손. 열심히 노력하는 거예요. 이것만 하면 합격이니까.
그러니까 그 청년은 경찰된 자기의 모습을 보지요. 경찰이 왜 되어야 되는가, 남들보기에 남들이 나를 경찰이라고 해서 젊은이가 착실해서 자기 앞가림은 하네. 라는 평. 그게 나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그것이 그것에 내가 맞춰 살아가는 인생이거든요. 남들이 뭘 요구하는지 맞춰 살아야 그것이 남들이 나를 좋게 보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고, 보람이 되는 겁니다.
경찰 제복을 늘 그리면서 힘들게 경찰공무원 준비를 하는데 이게 딱 잡을 때 손 압력이 안되는 거예요. 턱걸이 할 때 분명히 자기는 일곱 개를 해야 되는데, 다섯 개 밖에 못했어요. 요번에 떨어졌나 싶어서 보니까 나중에 채점을 보니까 열 두 개로 되어있어요. 분명히 다섯 개 했는데. 지가 한 다섯 개 빼니까 칠이 뭡니까? 칠이 뭐예요? 초과성이지요. 초과성.
다시 묻습니다. 칠이 뭐라고요? 초과성이지요. 요한계시록에 교회가 몇 개입니까? 일곱교회. 이 교회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를 넘어선 초과성. 인간의 교회 빼고 주께서 친히 내부적인 원칙에 의해서 결정된 교회. 그 교회가 초과적 교회에요. 성도의 삶은 뭐냐 하면, 날마다 그 초과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초과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내 도리를 찾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내 도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삶이지요. 타인의 시선하는 것은 타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타인에게 칭찬받는 내가 좋은 거예요. 타인에게 칭찬받는 내가. 그걸 가지고 명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명명. 개 짖는 소리가 아니고 명명.
이름을 더 붙이는 거예요. 명명 중에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올케, 조카. 이런 것. 어릴 때부터 붙이는 거예요. 외부에서 “아버지!” 하면 외부에서 붙인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는 아버지다운 노력을 해야 돼요.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딸도 마찬가지고 아들도 마찬가지고. 조카도 마찬가지에요. “니는 내 조카야.” 제대로 해야 돼요. “니는 내 손자야.” 손자답게 해야 됩니다.
재벌집 할아버지의 아들들하고 어떤 아들의 아들하고 재벌 상속권을 가지고 투쟁을 한다면, 이건 삼촌 고모 대 조카의 치열한 투쟁. 투쟁을 하지요. <재벌집 막내아들> 온 식구가 송중기 하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드라마. 누가 외부에서 이름을 줬고, 그것이 자기한테 꽂혀서 자기는 그 이름에 걸맞는 합당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이 환경.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망상의 세계에요. 망상의 세계. 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잘 들어야 돼요.
망상의 세계. 자, 망상이라는 게 뭐냐, 망상은 둘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상상의 세계와 망상의 세계.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용어는 너무 어려워서 내가 이 용어를 안 쓰려하는데 상징의 세계 있어요. 상징의 세계. 상징계. 이 용어 너무 어려워서 상징계 자체가 영어로 symbol이거든요. 상징계라는 말을 저는 쓰고 싶지 않아요. 그냥 꾸며낸 세계. 요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상징이라는 말이 더 어려워요. 설명하기 힘드니까.
상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거하고 나하고 일치시키는 것. 나와 it 그것과 동일시하는 걸 상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계라고요? 망상이라 했지요. 망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는 아는데,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데 저쪽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만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될 때 망상이 되어버려요.
이게 볼펜이지요. 볼펜을 볼펜이라 할 때 이게 왜 망상이냐, 이건 내가 아는 지식 범위 안에서 들어온 볼펜이지만, 볼펜 공장에서 만드는 그 기술자 아는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지요. 제대로 모르는 거예요. 기술자가 보기에 모르는 거죠. 나는 ‘이게 볼펜 아닌가’ 내가 일방적으로 망상적으로 내가 필요하다고 볼펜이라고 사용한 거예요. 그런 갭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망상이 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게 망상 중에 망상이지요. “니는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아이고 친절하고 착하고..., 나를 몰라도 너무 몰라.” “니는 나를 몰라.” “몰라도 좋아.” 이렇게 하거든요. 내게 기쁨을 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이 말이에요. “그럼 내가 니 기쁨조야 뭐야?” 그러니까 상대를 볼 때에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지식만 가지고 상대를 함부로 안다고 하니까 망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망상.
망상 중에서 아주 대표적인 것이 뭐냐, 집안에 개 키우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집 개는 물지를 않습니다. 내가 너무 잘 압니다.” 모든 물었던 개는 다 물지 않은 개였어요. 저희 집에서만. 저희 집에서만 안 물었고, 바깥에서는 무는 개였어요. 주인이 몰랐지요. 왜? 물지 않는 개라는 자기의 단어적 개념과 그 개를 일방적으로 일치시켰기 때문에 그게 망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망상이 돼요.
그래서 괜찮은 옷이 있으면, 저 옷 내 옷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기가 동일시하는 이것이 상상의 세계라면, 그냥 주어진 세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쪽 세계가 망상인데, 이것도 망상이에요. 망상인데 어떤 망상이냐 하면, 나한테 압력을 주고 호명을 하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명명을 하는 그런 식으로 “니 내 안에 내 세계에 들어와서 내 시키는 대로 해!” 요구하는 세계. 그게 바로 망상의 세계 가운데서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겁니다.
상상의 세계는 자기도취적 세계에요. 소주 까먹고 저녁에 뜨슨방 해가지고 상상하는 것. 이 상상계의 대표중에 하나가 스토커. 집착하는 것. 요새 스토커 강화된 거 아시지요. 그냥 꾸며낸 세계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누구 회사에 취직하는 것. 그리고 군에서 입영통지서 내는 것. 군대 망상의 세계입니다. 국가가 부른다. 하지요. 망상의 세계에요. 왜? 가까이 하기에는 우리는 나는 국가에 대해서 모르니까. 군대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알지 못하는 망상의 세계에서 입영통지서가 날아왔어요. 대표적인 것이 유승준. 군에 가기 전에 여행 갔다 온다고 해놓고는. 군에 가는데 미국 여행 갔다 와서 가겠다고 해놓고서는 미국에서는 군에 안 가겠다고 한 거예요. 제 생각인데. 유성준이가 나이 사십이 넘었잖아요. 유성준하고 방탄소년단 진 요번에 군에 들어갔지요. 5사단에. 같이 넣었으면 좋겠어요.
입영통지서가 왜 망상이고 이게 실제가 아니냐 하면, 본인이 통지서를 그 내용이 되든 쪽지가 되든 본인이 거부할 수 있잖아요. 인간에 자유의지가 있다며. 자유의지 주장해 놓고는 군에 안 간 사람 못 봤어요. 자유의지 있다며? 거부하게 되면 망상의 세계에서 경찰이나 고소 당하겠지요. 이란 같은 경우는 고소가 아니고 사형당해서 크레인에 공개적으로 매달겠지요. 어떻게 됩니까. 이건 그 법을 내가 만들었습니까. 남자 20세 되면 군에 가야 된다. 내가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안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거부하면 돼요. 거부하게 되면 깡패가 왔던 형사들이 와서 나를 체포하겠지요.
지금 이 이야기가 까뮈의 부조리이론이에요. 까뮈의 <이방인>책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체포하겠지요. 체포해서 교수형도 그것도 망상이잖아요. 내가 교도소 터잡을 때 몇 미터 파는지 나는 모르니까. 창살을 몇 개로 할 것이냐, 관여한 적 없어요. 까뮈라는 사람이 프랑스 문학작가 <이방인>을 쓸 때에 그 창살 사이에 별이 보였던 거예요. 까뮈는 비로소 내 자체가 망상인 줄 알았던 거예요.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죽었구나! “니는 엄마 죽었는데 왜 안 울어?” 하니까 주인공이 하는 말이 “꼭 울어야 돼? 왜 울어야 돼. 엄마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야 돼?” “엄마가 죽으면 울어야 되는 거야.” 그게 바로 망상의 세계잖아요. 나한테 요구했던 겁니다.
그러니 군에 안 가가지고 나중에 사형당했지요. 죽으면 되잖아요. 쪽지 하나 거부해서 사형당하면 되잖아요. 왜 우리는 그 쪽지의 명령을 따라서 망상의 세계가 요구하는데 따라서 머리 깎고 군에를 왜 가느냐 말이지요. 그것은 니가 군에 가는 것이 니한테 이익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요. 그 이익이 뭐냐, 타인들이 남자가 군에 갔다 와야 남한테 그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인정하는 인정을 내가 내 삶의 내용으로 채워질 때 남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 그게 곧 나라고 그렇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그렇게 우리는 습득 돼 왔던 겁니다.
이게 전체 다 망상이에요. 결국. 이거 전체 다 망상이에요. 군에 갔다 오면 구원받습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지요.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군에도 명령하고, 국가의 망상이고, 나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나는 세상이 예스할 때 나는 노우라 할거야.” 백날 큰 소리 쳐봤자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죠. 뭐가 안 되느냐, 초과가 본인한테 없었던 거예요. 초과되는 것.
내 할 도리는 다 하지만, 그건 초과가 아니에요. 숫자로 하면 7이 아니라고요. 7이 아닙니다. 그럼 7이 아닌 것을 표현하면 망상 속에 있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1이냐, 아니에요. 7도 아니고 1도 아니고 제로에요. 있어도 없는 것이 돼요. 살았다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은자로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입니다.
1장4절에 에돔 나오지요. 에돔이 이 초과에 대해서 몰랐던 사람이에요. 이 초과에 대해서 모르면 남는 것은 자기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그것만 따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에돔. 에서의 후손의 나라가 에돔이잖아요. 뿌리를 쫓아가면 한 쪽은 이스라엘은 야곱이고, 에돔의 뿌리는 에서가 되는 거예요. 그냥 형제가 아니고 쌍둥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하나라면 하나님이 그걸 둘로 표현하기 위해서 야곱언약이 주어진 겁니다.
의미는 둘이 있을 때 의미지. 하나 있을 때는 의미가 없어요. 둘이 있어서 그 두 개가 대비가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화장실 하나가 있으면 남자 화장실인지 여자 화장실인지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치마 걸면 여자고, 신사복 걸면 남자고. 따지는 사람은 화장실 가는데 꼭 양복으로 갈아입고 가야 되나. 심하게 따지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자신을 심하게 안 따져서 문제에요. 대충 그냥 인생 남들처럼 남을 뒤따라가서 꽁무니 따라가서 살면 안돼요. 성경은 철저하게 에돔을 제시한 이유가 너 자신에게 철저하게 너 자신에 대해서 규명해 보라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에 나라에서 만든 표어가 있어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보통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실제로 한 번 해볼까요. 라이타있다. 종이 태웠다. 불 탄 적 있지요. 훅 부니까 라이타도 꺼졌고, 종이도 꺼졌어요. 그런데 표에 의하면 꺼진 불도 다시 보는 거예요. 아, 꺼졌구나! 되어있지요. 돌아섰습니다. 꺼졌구나 했기 때문에 또 봐야 돼요. 24546번 봐야 돼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왜 꺼진 불도 또 다시 봐야 됩니까? 나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어떤 이익? 남들이 불 안 낼 사람이라는 그러한 칭찬이 나의 자아의 이득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걸 바로 자기 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의. 그게 누구냐 에돔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돔은 누구하고 형제간이다? 야곱과 형제간이지요. 형제간이라는 것은 둘이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그 부모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상황입니다. 둘 다 리브가와 이삭의 한 가정이에요.
동그라미로 치면, 요번 수련회 때 첫째 시간에 동그라미 이야기할 거예요. 동그라미를 치게 되면 동그라미라는 말은 나만의 세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동그라미는 원이잖아요. 포함 돼 있는 거예요. 여기에 야곱 있고, 여기에 에서 있고. 위에는 이삭 있고, 어머니 리브가 있고. 이렇게 구성되어있어요. 한꺼번에 동그라미 치는 것은 똑같은 상황 속에 있는 거예요.
2절 끝에서 3절 초반까지 읽어보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했습니까? 엄마가 그렇게 했습니까? 야곱이 그렇게 했습니까? 에서가 그렇게 했습니까?
아무도 한 적이 없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초과. 초과라고 하지요. 초과. 성도는 초과로 사는 거예요. 초과된 것이 무엇인가를 그 초과 같은 걸 증거하는 걸 인간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초과를 알려면 뭐를 알아야 돼요? 자기 자신이 무엇에 굳어져서 살아가느냐를 똑똑하게 봐야 됩니다.
이 가정에 레미콘을 열 대 동원 시킨다고 봅시다. 이 가정에. 레미콘 뒤에 보면 애들이 레미콘 장난감을 좋아해요.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뒤에 엉덩이가 돌아가거든요. 그 레미콘이 계속 돌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시멘트가 액체상태 젤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돌아가지요. 고체와 액체 사이의 중간상태를 여기다 다 이삭 가정에 다 충분하게 퍼부었다 생각합시다.
하게 되면 네 명 다 레미콘에 있는 시멘트가 굳어져 가는 것처럼 그들도 굳어져 가겠지요. 제가 아까 A라 했습니다. 외부성. 굳어져 가지요. 그러면 꼼짝 마라, 가 되지요. 운명이 굳어져 가면서 덩달아 뭐도 굳어져 간다? 자신이 생각할 여지도 함께 시멘트 굳어져 가는데 같이 굳어져 가는 거죠. 조폭도 아니고 “묻어버려!” 이러잖아요. 사채업자들.
외부성이 주어진 원칙과 함께 굳어져 가는 거예요. 이게 야곱은 뭐냐 야곱은 사랑으로 굳어져 가고, 에서는 하나님의 저주, 미움으로 굳어져 가는 겁니다. 이것이. 이것이 초과에요. 초과.
세상 사람들은 뭐가 없습니까? 여분의 초과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밤 담아줄 때 대구 서미시장 같은데 보면 밤 담아줄 때, 쌀 담아줄 때, 되말에다 담아줄 때, 받침대로 쫙 자르는 거 없어요. 수~북하게 인심 쓰면서 수북하게 그런데 그냥 수북하면 안 돼요. 수북하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흘러내려 줘야 인심이 이만큼 후하다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흘러내리는 것이 이것이 초과라는 말이죠. 초과.
이게 로마서5장에 나오거든요. 죄가 더한 곳에 뭐다? 하나님의 은혜가 초과에요. 내 죄 지은 것을 다 덮고도 여분의 것이 계속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것을 한 자로 하면 뭡니까? 의. 여섯자로 하면 그리스도의 의. 다섯자로 하면 하나님의 의. 초과에요. 이 시멘트로 우리가 굳어져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알려면 누가 있어야 합니까. 이것이 초과적이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면 이 사이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에서가 있어야 돼요. 에서가. 이 에서는 뭐냐 하면, “운명아 저리 가라! 운명 내가 개척한다.” 이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게 4절에 나오지요.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다. 피동성이지요. 운명은 나에게 덮쳤으나 나는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개척해간다. 내게 이익되지 않으면 나는 거부할 자유가 있고 권한이 있다. 이게 에돔입니다. 이걸 무너짐을 거부했다는 말은 결국 초과를 거부한 것이고 초과를 거부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를 발로 차버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의는 착하게 사세요, 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거예요. 초과는 이미 결정된 거예요. 하나님의 의인 됐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까 그 공식이 안 돼요. A(Ap). 이 공식은 뭐냐 하면 외부적인 것이 내 내부 안에 이미 확정적으로 박혀버렸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다루고 자시고 어떻게 섬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내 안에 주님의 초과가 그냥 박아 놓아버린 거예요. 요지부동으로.
따라서 야곱의 주어진 것을 알기 위해서 에서가 1+1 세일하듯이 에서를 갖다 붙인 거예요. 야곱의 의미를 위해서, “에서 너는 아니야.” 라는 식으로 갖다 붙인 거예요. 에서의 그 가는 길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야곱을 붙인 겁니다. 그래서 아까 했지요. 의미란 반드시 하나가 되면 안 되고 둘이 있어야 된다고. 둘이 있어야 의미가 생겨요. 이 세상에 지옥 가는 사람이 있어줘야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맞구나!’ 라는 것이 확인되는 거예요.
아까 한 것을 다시 하면,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내부에 원인이 있는 구조 때문에 그렇다.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내부에 있는 원인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에서 어느 쪽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야곱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처음에 했던 거 다시 해봅시다. 처음에 한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위치.
위치가 우리의 운명을 확정 짓는다. 했습니다. 위치가 우리의 운명을 확정한다. 그런데 그 위치라 하는 것은 우리 좋아라고 위치한 게 아니고 위치 자체를 위하여 위치가 있는 거예요. 여기에 에돔의 위치가 있고, 야곱의 위치가 있는데, 합쳐서 위치가 되는데. 그 위치 자체의 효력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은 야곱으로, 어떤 사람은 에서로 위치에 끼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A(Ap). 외부성은 나라는 내부성 안에 외부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공식.
그럼 성도인가 아닌가는 어떻게 아는가, 어제 수요일날 기도 제목에 나와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있는 사람. 이건 초과적인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어요? 없어요. 내 내부에 있는 것이 초과적인 것. 내가 시도하는 것은 잘남인데, 그 잘남을 빼버리고 초과적인 것. 그걸 하는 겁니다.
열 개중에서 세 개를 내가 할 수 있다면 초과가 몇 개라 했습니까? 10-3이게 초과에요. 그러니까 빼기3이지요. 주께서 성도로 하여금 빼기3을 하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착실하게 성실하게 잘했습니다. 그거 빼야 돼요. 그거 빼면 돼요. 내가 십일조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했습니다. 고거 빼면 돼요. 그래서 에서, 야곱 둘 다 우리 내부에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우리 위치안에 있어야 돼요.
그래서 어떤 게 에서적 요소인지, 어떤게 야곱적 요소인지를 두 개 다가 있어야 비로소 성도라는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말라기에서 에돔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에돔이야 뭐 저주 받았으니까 우리가 신경 쓸 거 없지 않느냐, 절대로 그래서는 안돼요. 에돔 요소가 있어줘야 돼요. 그래야 이 운명이 확정된 것이 위치 때문이지, 내가 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바른 결정을 해서 바르게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어요.
이제부터 우리가 남은 것은 철저하게 내가 성경을 보면서 내가 믿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다 규명되어야 돼요. 내가 어디까지 바르게 살 수 있는가를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야 돼요. 우리가 흔들림이 없지요. 우리가 흔들릴 필요가 없지요. 왜? 우리는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어요. 내가 얼마나 스스로 잘난 체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줄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까.
빼기에 열중해야 돼요. 뺄 수밖에 없는 것에 열중해야 된다고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약에 드는 예에요. 누가복음6장6절에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지요. 이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고쳐줄 때까지 마른 손 사람은 계속 말아 있어야 돼요. 주님 앞에 나와가지고 옛날에는 내가 이리 했는데 오년전부터 이리 안되고 이리 되었습니다. 그건 손 마른 사람이 아니에요. 손 마른 사람은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손 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유지하고 있지요. 초과적인 게 뭡니까?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펴지게 한 거예요. 안식일 의미를 주는 차원에서.
손 마른 사람이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안식일은 어떤 분이 외부에서 와서 초과적인 분이 초과적인 일을 할 때 비로소 안식일은 제대로 하나님의 의로 완성이 된다는 걸 손 마른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손 마른 사람이 손을 폈잖아요. 그러면 “내가 이제 손 핀 사람이 원래 나다.” 하면 안 돼요. 손이 안 펴야 본인다운 거예요. “나는 손을 못 펴야 돼!” 해줘야 그 사람을 통해서 뿜! 뿜! 뿜! 초과가 막 나온다고요.
“나는 예수 믿고 나는 이제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 되었어!” 이러면 안 돼요. 예수 믿었기 때문에 나는 도대체 나의 죄가 어디까지 죄지을 수 있는가를 평생동안 철저히 해줘야 비로소 그 사람은 초과를 증명할 수 있는 거예요. 녹음도 제대로 못하고 꺼져가지고 10분 쉽시다.
안양20221215b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은 망상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했고요. 왜 이 세상이 망상적인가. 세상의 모든 변화에 대해서 그 세상에서 만들어진 내가 모조리 그 원칙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상하이에 있는 어느 지하실에 아저씨가 지금 요리를 하는데 라면을 끓이는지, 밥을 끓이는지 모르잖아요. 그거 모르면 망상이에요. 전부를 모르니까. 아는 것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 것만 알지요.
그러면 그 상하이 그 지하실에 있는 그 사람의 노동이 지금 나에게 환경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는 그 요소는 우리가 알 수 없으니까 빼는 거예요. 빼고 우리가 아는 것만 수집해서 나라고 우기니까 그게 바로 망상의 세계에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 모른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4절에 보면, 에돔이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짐을 당하였으나, 이리 되어있지요. 피동적입니다. 스스로 무너진 건 아니고. 환경이 에서를 무너뜨린 거예요. 무너뜨렸으나 황폐한 곳을 다시 쌓으리라. 되어있어요.
에서는 안 죽으려하는 거예요. 에서가 안 죽겠다는 말은 에서의 반대쪽은 뭡니까? 야곱이지요. 야곱은 내가 나를 죽인 세계가 영생이다. 이걸 알고 있는 거예요. 나를 죽인 세계가 영생이다.
그러니까 야곱은 벌써 죽었어요. 야곱을 벌써 죽였던 그것만이 이게 실제로 있는 세계고, 내가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내가 자꾸 망상을 배출해요. 망상을 배출한다고요. 그러면 이 야곱에서 신기한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죽인 세계잖아요. 그러면 나는 나를 죽였으니까 나는 그 세계 앞에서 나는 죽었고, 나를 죽였다는 그 사실이 유일하게 생명이 영생의 세계, 살아있는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에서는 본인이 안 죽으려고 하니까 계속 초과적인 세계가 배제당하는 거예요. 초과적인 세계를 본인이 극구 밀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 되신 세계 이외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거예요. 나는 기어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내게 쏟아진 타인의 망상을 이미 내가 되었으니까 망상의 세계를 포기 못하겠습니다. 계속 살리는 거예요.
그리고 에돔에게는 에서에게는 초과가 없어요. 여러분들도 성도의 삶이 뭐냐,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궁금했을 건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 말고, 초과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성도고, 생명에 속한 사람이고, 야곱 계열에 속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 말고.
에서의 특징은 매사가 상투적입니다. 상투적이고 상식선에 머문다. 자, 상투적이고 상식이라 하는데, 상식은 뭐냐, 여기에 에서가 있으면 에서를 동그라미 치면 에서가 동그라미 친 그 안에서 들어왔던 그 범주, 범위, 범위 내에서 집중되어있습니다. 집중되어 있는 것. 집중되어있는 거예요. 집중되는.
집중되니까 여기는 뭐가 없느냐, 초과가 없다. 내가 납득 되는 것만 다 끌어모았어요. 이해 되는 것만. 이해되려면 그 결과는 뭐냐, 나는 이해했다. 나는 믿었다. 나는 소망한다. 나는 사랑했다. 전부 다 앞에 나가 들어있으니까 초과적인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교회가 몇 개 있습니까? 일곱교회. 그 일곱교회를 누가 붙드는가, 초과적인 분이 붙들지요. 그게 요한계시록1장에 보면, 주님은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분이 아니었어요. 사도요한에게 밧모섬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전혀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초과적 인물로 등장했고, 그 초과적 인물의 오른손에 붙잡혀있는 교회가 일곱 교회입니다. 초과적인 것에 안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은 일곱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지요.
야곱의 입장에서는 벌써 죽었다는 흔적을 초과 앞에서 나의 시선, 나의 평가, 나의 의, 나의 행함, 나의 미래, 이 모든 것은 다 죽었다. 어떤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거죠. 영향력을. 초과에서 확정된 운명에 대해서 내가 흔들기가 실패하는 거예요. 이런 짓해도 나의 구원에 대해서 변함이 없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로마서8장 나오지요.
다시 합니다. 초과라 하는 것은 로마서5장처럼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흘러넘치는 거예요. 되말 옆으로 흘러넘치는 거예요. 자꾸 흘러넘쳐요. 분수 같아요. 분수. 분수 보면 물이 물방울이 분수대밖으로 마구 튀어나오잖아요. 그렇게 자기가 설정한 나라는 범주 바깥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것이 용솟음치는 것. 분출되는 것. 자연적인 원천수 우리나라에는 딱 한 군데밖에 없어요. 우리나라에는 딱 한군데 밖에 없어요. 울진에 있는 덕구 온천. 그것만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분출되는 거예요. 말려도 안돼요. 눌러도 안돼요. 계속 나와요.
그래서 내 인생을 “초과야! 나오지 마라.” 누른다고 해서 초과가 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초과는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주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하면, ‘천국은 죄인을 영입해서 백성 만드는 곳’이 천국입니다. 죄인을 영입하는 거예요. 손흥민 영입해 볼까요. 죄인을 영입해서 스카웃해서 백성을 만든다 말이죠. 그래서 누가 나보고 죄인이라고 한다면 이건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것처럼 너무 영광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죄인 하면, 이건 욕한다고 여기고 이거 뭐 공격하고 내빼고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뭐가 죄인 인데? 내가 뭐가 죄인 인데? 지금 주님의 초과라 하는 그 취지를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 거예요. 취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취지를.
본인이 안다는 한계 내에 머물러있는 거예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게 조선의 27대 왕이거든요. 질문 할께요. 임금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임금은? 최저임금이에요. 인조인가? 철종인가? 이건 인간들이 초과를 모르는 겁니다. 기껏 아는 거잖아요. 기껏 아는 것. 주께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초과를 향하여 질문을 던졌는데 인간은 뭘로 마중을 나가는가 하면 내가 이거 해드리겠습니다. 이리 나온 거예요. 아이고, 70대 늙은 개그하려니...아, 그 말도 알아듣네요.
인간이 스스로 초월하려고 애쓰는 그러한 시도가 인류의 역사 가운데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게요. 로마시대 때 유명한 두 화가가 있었어요. 한 사람은 제육볶음과 비숫한 제욱시스, 또는 파르라시오스, 둘 다 화가로 자존감이 대단했어요. 이 제욱시스가 먼저 선방 날렸지요. 내가 어느 정도로 그림을 잘그리나 보라 해가지고 포도송이를 그렸는데 그리고 딱 보니까 새들이 와서 “와! 포도다!” 하고 달려들다가 그 뽀족한 부리가 벽에 부딪혀서 이게 상했어요. 막 떨어졌거든요. 사람들이 “와! 정말 얼마나 잘 그렸으면 새들이 진짜 포도송이인줄 알고 달려들다가 몸을 상했겠는가.”
제욱시스가 자신만만해가지고 파르라시오스한테 “야, 너 한 번 그려봐. 저 커텐 제치고 니가 그린 그림 내놓아봐. 커텐 덮어서 감추지 말고 니가 뭘 그렸나 한 번 보자.” 이렇게 하니까 파르라시오스가 하는 말이 “그 커텐이 그림인데.” 커텐이 그림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욱시스는 새의 시선을 속였지만, 파르라시오스는 인간의 시선을 속인 겁니다. 이건 인간이 제욱시스의 주체를 초과한 거예요. 파르라시오스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세상은 그림이다.’ 세상은 그림이에요.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볼 때에 타일조각을 이렇게 큰 그림 하나를 할 때는 타일 조각을 여러 부분 나눠서 부분의 타일을 그려가지고 붙이잖아요. 세상은 인간이 체험하고 경험하고 감각한 그 모자이크 된 한 조각의 타일들을 임의로 지가 지 맘대로 다닥 다닥 지가 조각 붙여서 나의 월드, 나의 세계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순화하는 겁니다. 그건 초과가 아니에요. 그건 분투 노력하는 거예요. 억지로. 이걸 그들은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현실이라고.
우크라이나 청년들도 팝 좋아하고, 방탄소년단 좋아하고, 유튜브 다 보기 때문에 우리나라 드라마 다 좋아하고 그렇게 되길 다 원해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푸틴이 자기 나라를 친다는 그 조각은 생각 못한 거예요.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허점이 많아요.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자기 즐거움과 자기 쾌락이 그게 전부에요. 그러니까 아까 했잖아요. 상상계가 망상계라고요.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망상이에요. 그 인간에게 지시하는 그것도 망상이에요.
그렇다면 아까 누가복음 6장을 다시 보게 되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한가운데 서라 하시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이 손 마른 자는 주님 앞에서 자기 계획, 자기 상상계, 망상계, 자기의 상징계 전부 다 일거에 날아간 거예요. 전부 다 일거에 다 날아간 거예요. 주님이 그리는 하나의 화폭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손 마른 자에게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의 제목이 ‘안식일’이에요. 내가 안식일의 주인공이다. 주체다.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공 주체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안식일이 그 유대 백성에게 덮쳤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들을 덮쳤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들을 덮친 거예요. 이게 언약의 세계입니다. 이게 초과의 세계에요. 초과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그냥 덮쳐버리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지요. 하나는 야곱, 한쪽은 에돔. 이게 말라기1장4절.
에돔의 특징을 다시 하면, 하나님이 나를 운명의 나를 배반할지라도 내가 슬퍼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푸시킨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올 터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 한순간에 사라지나
지나간 것 모두 소중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에돔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해도 내가 다시 내 것을 키우겠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지역이라 했습니까? 그게 악한 지역이고 그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통해서 언약은 외부성이지요. 언약을 통해서 여기서 사랑과 미움. 미움은 진노,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자비를 두 요소가 다 나오는 기능이 언약적 기능이 이게 진짜 실제하는 세계. 실제하는 세계 언약의 세계입니다. 이게 초과. 초과로 등장해요. 초과.
손 마른 사람은 그냥 주님한테 당했어요. 마치 강간당하듯이. 성폭행당했어요. 그냥 당했어요. 야곱도 마찬가지고요. 에돔은 사전에 무너뜨림을 당했다 했지요. 당했지만, 그 초과를 생각 안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손상 난 흠집 난 그것에 미련이 있어가지고 다시 전에 내가 알던 나로 재구성하겠다고 설치는 거예요.
자, 이러한 언약 안에서의 에돔의 이런 짓이 우리가 잊어야 됩니까? 아니면 우리가 매 일상입니까? 우리의 일상이지요.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있어줘야 그런 죄성이 나타나 줘야 그것을 영입하여 천국을 만드시는 주님의 초과의 가치가 은혜가 더욱 더 빛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에서 두 가지 일이 상반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창조론, 내 안에 들어있는 원인이 일관되게 계속해서 바깥 변화를 일으킵니다. 창조론은 안에 들어있는 원인이 또는 원칙이 바깥에 뭘 일으킨다? 변화를 일으킨다. 이게 창조론입니다.
■창조론 반대는 뭡니까? 흔히 세상에서 창조론 반대는 진화론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진화론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퇴화론. 점차 니가 썩어빠졌다는 것을 점차 점차 드러내는 거예요. 퇴화되어 가는 이 일도 성도가 매 일상 가운데 즐겁게. 문자로 ㅎㅎ ㅋㅋ 하면서 즐기면서 우리는 이 퇴화론 대로 살아가면 되죠. ㅎㅎ 이건 초과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은 내가 퇴화되는 것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누가복음 6장에서 안식이라는 율법을 위하여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율법을 위하여. 안식일 율법이죠. 그런데 안식일 율법은 말라기에도 나오고요. 누가복음 6장 6절에 보면 제사법을 중심으로 잡아서 여기에 안식일도 나오고 하는데. 말라기2장4, 5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4절과 5절 사이에 제사법이 들어가 있습니다.
제사법이 뭐냐, 제사법은 이 한가지만 알면 다 아는 거예요. 나 상실. 제사법의 취지는 에돔의 위치에 있는 나를 늘 반복적으로 상실시키는 거예요. 상실된 게 뭐다? 나다. 이 역은 누가 잘했는가, 한예슬이가 잘했어요. <환상의 커플> 옛날에 20년 더 되는 남해에서 남자 주인공 이름은 장철수, 여자 이름은 나 상실. 재벌집 여자가 돈을 노리는 남편 때문에 당하고 물에 부딪혀가지고 기억 상실증 걸려가지고 이름도 없어서 장철수가 이름을 지었어요. 나 상실로 지은 거예요.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몰라요. 나 상실.
이게 반복해서 상실시키는 겁니다. 반복해서. 왜 내가 상실되느냐 하면, 나의 우수함과 나의 정결함을 나는 그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이게 계속 상실되어야 합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을 덧붙여서 해보겠어요.
인간은 부모 밑에서 부모의 지시와 명령 따라 산다. 그랬던 아이가 거기서 인간은 자아성이 형성되는데, 자아성, 신체와 자아는 다릅니다. 신체는 우리가 몰라요. 세포 몇 개입니까? 몰라요. 대략60개조, 100개조하는 사람이 있는데 세포 하나 하나를 모른다고요. 모르지만, 뭉뚱그려서 이걸 그만 나라고 하자. 라고 모호하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해버린 그걸 가지고 자아라고 해요.
인간은 신체에서 비롯되지만 본인 신체도 잘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망상으로 덮어씌우는 방법 외에는 자기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망상을 할 때 부모의 갖고 있는 지시가 부모가 그걸 도와줘요. 내 자아를 상실이 아니고 나를 굳히기, 형성시키는데 부모가 도와줍니다.
부모가 지시와 명령을 해서 “너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 돼!” 라고 이렇게 굳혀주지요. 그런데 이들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부모 곁에서 성장을 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 이것도 망상입니다. 그걸 흔히 뭐냐, 세상입니다. 세상.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있다 하니까 여기서 부모보다 더 많은 타인들이 있어요. 타인들이. 부모는 두 명이지만, 학급의 친구들은 삼십명이 넘잖아요. 선생님까지 합하면. 학교가면서, 교회 교인들 보면서 그 타인들이 내 자아에게 마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그렇게 되어줄 때 이걸 뭐냐 하면, 호명이라고 합니다.
호명, 이건 자아다. 이건 자아고 이걸 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주체 이야기. 주체 이야기 이렇게 됩니다. 데카르트의 좌표가 나와요. x축, y축할 때,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x좌표와 y좌표의 지점으로 보는 거예요. 여기가 A지점이라 하면 친구가 B점. 친구는 뭐냐 하면 x1, y1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x1, y1으로.
이게 나는 내 자리 확보 되어있고, 너는 니 자리 확보되어있구나. 친구 사이기 때문에 스스로 대화할 때 같이 니도 양보하고, 나도 양보해서 적당한 이 지점에서 만나자. 어떤 지점? x3,y3로 만나자. 이렇게 인생은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의 좌표의 지점. 이걸 주체라고 합니다. 내 주체와 너 주체가 양보해서 이런 주체로 형성하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결혼이지요. 결혼.
<솔로>라는 늙으스레한 총각과 늙으스레한 처녀들 만나서 맺어주는 그 프로그램이 있어요. 맺지도 못하는데 괜히 지 유튜브에 지 얼굴보이려고 하는 그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선이에요. 선. 획일화된 선의 지점만 고집한다고요. 그런데 그들이 기어이 가지 않는 지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x0, y0, 0점은 안 가요. 이게 뭐냐 하면 공백입니다. 공백. 빈자리에요. 빈자리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요.
왜? 0이니까 위치가 정해지지 않아요. 죽은 자리지요. 여기서부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출현해요. 예수님이 여기서 출현해서 사람들이 미워해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 0점으로 사라졌어요.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이 보기에 뭐냐 하면 망상의 세계라는 것을 예수님이 증명해 주시는 겁니다.
지금 그건 예수님이고, 오늘 본문의 말라기는 요 지점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하는 사건의 지점입니다. 사건의 지점. 또는 사건이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제사라는 율법. 레위인과 맺었던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는가, 야곱이 되는 이스라엘이 해야 돼요. 왜 이걸 에돔이 못하고 왜 이스라엘이 하느냐, 야곱은 벌써 죽은 자기 때문에.
야곱이 죽어야 초과만 나와요. 그 초과가 나와야 제사법이 번져요. 요 x,y의 지점이 제사법이 번져나간다고요. 번져나가니까 이들은 여기에 끌려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이 원점을 가지고 이걸 한 번 그려봅시다. 처음에 우리 인간들은 직선을 생각해요. “야, 너희 집 가는데 차로 몇 시간 걸리는데? 어느 길로 가는데?” 거리, 어떤 좌표가 되지요. 동그라미 아니고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가면 돼요. 선 따라, 직선 따라 가면 돼요.
그러나 여기는 직선이 아니고 원이에요. 원은 포함되는 겁니다. 이 직선을 가게 되면 아무리 멀리 가도 그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주체가 된다니까요. 주체는 뭐냐, 이 사회에 지도를 펴 놓고 있는 어느 지점을 확보한 나. 이게 주체가 되는 겁니다. 서산? 좋아요. 대구? 좋아요. 지점이 있어요. 끝나면 어디 갑니까? 대구간다고요. 서산간다고요. 돌아갈 곳은 있거니와 이런 것처럼. 돌아갈 곳이 있지요. 돌아갈 곳이 있는 세계는 뭐냐, 망상의 세계에요. 자기 중심의 망상의 세계에요. 타일 붙여놓은 것처럼.
그런데 이 0점은 돌아가면 내가 없어지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어져요. 그냥 포함이 된다니까요. 내가 아예 없다는 게 아니라 누구의 영역에 포함이 되지요. 그게 선한 지역이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 1장 4절에 악한 지역이 되는 겁니다. 또는 포지션. 지역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환경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나의 운명은 환경이지, 내가 이 자리에서 x, y이 지점에서 내가 얼마나 훌륭하다. 해봐야 그건 망상 속을 점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망상의 포지션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이 원을 키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된 야곱이기 때문에 야곱에서는 야곱이 죽어야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중심에 죽음의 자리가 있어요. 요 죽음의 자리가 양이나 염소나 소가 죽는 자리에요. 죽음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죽음으로 끌려온다면 죄인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죄인을 영입해서 천국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아느냐, 율법이 도와주지요. 율법이 바로 1장6절에 나오는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에 대한 테마하에 그런 주제하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리 되어있지요. 6절에. 아~ 이게, 참.
이야기할 게 많습니다. 0안에 원 안에 써클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따로 선, 획일적인 이 좌표. 데카르트가 처음 만들어서 데카르트 좌표라고 해요. 자기 지점에서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선 지점에서 인간들은 “내가 뭐 잘못되었습니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의 나됨이 타자 또는 타인과 견주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강남강의에서 했는데 전에 한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는데 그 점을 다시 하겠어요. 인간이 태어나면서 인간의 자아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타인이 들어있어요. 타인이. 가까운 부모, 형제들 들어있어요. 부모, 형제 자꾸 눈치를 보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집에 들어올 때 신발 놓을 때 신은 채로 들어오지 말고, 신발 벗었으면 한 번 뒤 돌아봐가지고 신발을 나란히 나갈 때를 생각해서 반대로 해가지고 나갈 때 바로 신고 나갈 수 있도록 그리 놓아라. 그 교육 받은 집안 애와 후닥닥 들어와서 양말 거꾸로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을 때 얼마나 이게 불편한 작업인지 모르고 그 양말을 그냥 뒤집은 채로 벗어놓고 게임하러 가는 애들. 그 두 애들의 자아는 동일해요. 주체가 달라요. 그 집안의 주체가 달라요.
엄마가 와서 “게임 또 이겼나? 잘했어. 내 아들!” 이거하고, “니 신발 어떻게 벗어놨는지 봐봐.” 귀 잡고 “이리와. 이리와. 내가 몇 번 이야기하더노. 신발 나란히 하라고. 신발 한 번 봐봐!” “나란히 했는데” “아니지. 직각으로 해야지. 니는 17.5도 빗나가고 있어. 니 이렇게 하면 니 행세는 우리집이니까 귀 잡아당기는 것으로 끝나지만 다른 집에 가면 너만 욕하는 게 아니라 느 아버지 뭐하시노? 니 엄마 가정교육 어떻게 하노?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니는 우리 집안에 아버지, 어머니 먹칠 할래? 안할래? 다음에 잡채하려고 했는데 잡채 안해준다.” 협박공갈 나오지요. “엄마, 할게” 이게 한 두 번이 아니고 계속 해보세요. 신발 나란히 한 게 마땅한 줄 알고 있어요. 이게.
이게 뭐냐 하면 내 안에 타인이 있어요. 그런데 이 0의 세계는 뭐가 없느냐 하면 타인이 없어요. 찾아볼래야 예수님 믿고 싶어도 예수님 이 땅에 없어요. 왜? 제로지점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했잖아요.
주님 부활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만지려고 했어요. 만지지 말라. 했어요. 만지지 말라하면서 그 뒤에 하는 말이 그 근처에 나오는 중요한 말이 있어요.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우리 속에 뭐로 영입하느냐, 여기에다가 죄인을 영입해버리면 너희 하나님 되어버려요. 조건이 있어요. 사라진 그 곳과 관련성을 지어줘야 돼요. 예수님이 사라진 곳. 육체로서 만지면 안되는 곳. 만지면 안돼요.
사람이 뭘 만진다는 것은 자기 세계에 포함됐다는 조건하에 만지거든요. 볼펜 만지면 “왜 남의 물건 만집니까?” 이리 된다고요. “내 볼펜인데요.” 내 볼펜이기 때문에 만지는 거예요. 누구를 파악하고 탐구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내 것 되기 위한 시도입니다.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는 관심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식사 뭐하십니까? 지난날 뭐 했어요? 자꾸 관심을 두는 것은 자기 영역 속에 끌어당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 것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것.
주님께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데, 주께서 뭐냐, 지금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니가 망상의 세계 속에 본래 너의 속한 나만의 좌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안되는 거예요. 그건 지옥에서나 가능하지요.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수요일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자들이 누굽니까? 귀신들이에요. 귀신들. 왜 귀신들이 고백하고 인간은 고백을 안 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하나님이 절대로 폭력적이지 않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폭력적이지 않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인 일 때는 덮어주고 용납하는 게 하나님이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불로서 태운다든지 저주한다든지 이런 하나님은 도저히 우리네 갖고 있는 상식에 입각해서 그건 옳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판 이야기라든지 예수님의 하는 모든, 모든 게 부정적인. 이 성전 헐어버려라. 이런 부정적인 것. 너희 애비는 악마다. 이런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그들에게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요. 요한복음8장37절. 그들에게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마귀는 단박에 알아봤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이건 뭐 인간들에게 치이고, 악마에게 들통 다 나버리고. “입 다물라. 나는 너희들과 상대 안 한다. 내가 구원할 거 같으면 너희들 속에 없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문제는 인간들이 스스로 잃어버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당했던 그 수모를 흠뻑 내용으로 담아서 그 수모를 다시 자기 백성에게 되돌려 줘버려요. 자기 백성 될 사람에게 되돌려 줘버린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야곱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야곱에게 씨름해야 될 야곱을 붙들고 야곱의 상대자가 되어줘서 야곱으로 하여금 더욱 더 야곱의 본색이 드러나는 그러한 시츄에이션을 연출을 하는데 하나님이 가담해줬던 겁니다.
“나를 물리쳐봐라. 나를 이겨봐라. 이게 니 본색이야. 너는 왜 이기고 싶어하느냐.” 이겨야 내 자리가 확보되기 때문에. 남에게 지기는 싫은 것이 야곱이었어요. 그 야곱이 제로가 되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야곱이 했던 야곱 같은 그 행세, 더러운 행세, 나밖에 모르는 행세가 그대로 다 살아나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공로, 초과적인 것을 드러내는 그 현장이 언약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중심적입니다. 뭐가 아니다? 중앙적이지 않아요. 중심적이지 중앙적이지 않아요. 중앙적이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딱 고정됐잖아요. 자, 보겠습니다. 기하학이란 이 세상을 평면으로 본다 말이죠. 내 위치를 내가 점을 찍었잖아요. 이 점 자체가 이게 뭐냐, 우리는 도형적으로 세상을 자르듯이 자르고 그것을 끼워 맞춘다. 그게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법 그것밖에 못 봐요.
세상을 자르고,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직각삼각형 잘라요. 잘라서 내가 있는 곳에 사각형 갖다 붙이고. 테트리스 알지요. 테트리스 하듯이. 삐링~ 삐링~ 해서 하나 갖다 붙이고. 이렇게 해서 나이가 들고 자아가 크면 클수록 자기게 점점 더 많아져요. 어릴 때 소녀들은 나는 백마 타고 온 왕자님과 결혼하겠다. 백마 탄 왕자 누구냐, 김정은이에요. 백두산 올라갈 때. 똥배 나와도 괜찮아. 이런 거.
백마 타다가 점점 더 자기가 아는 그 사각형짜리 이런 게, 남들이 이렇게 살았다. 이리 하면 나는 해외여행 가보고 싶어. 하다가 해외여행 보내주는 남자라면 내가 결혼하겠다. 이리 돼요. 그러니까 추가적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들을 이렇게 딱딱 쌓아놓고 하기 때문에 각 하나가 이게 뭐냐, 고정화 되어있다. 고정적인 것을 집대성하니까 자아는 뭐냐, 자아는 요지부동. 똑같아요. 변화지 않습니다. 똑같이 그대로 나다움을 고집하고,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중앙에 있어요. 기하학은 고정된 것에 중심점을 중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세계는 중앙에 있는 게 아니고, 중심에 있어요. 중심은 뭐냐, 에너지가 나오는 출처 이게 중심이에요. 중심. 그러면 그 중심은 한 군데에 있어요? 아니면 여러군데에 있습니까? 말씀이 떨어진 곳은 중심이 서울마다 열 군데 될 수 있고 대구만 해도 스무군데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새로운 초과적인 요소가 흘러나오면 그게 주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갔는데 데려간 곳이 도사님 변화산에 올라갔잖아요. 그러니 베드로는 있다가 “이게 뭐야? 갑자기 주님께서 체력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산꼭대기 변화산이 다골산이 변화산이라면 높이가 150m에서 200m 정도. 잘 모르겠어요. 차로 올라갔으니까요. 예배당이 두 군데인가 세군데가 있어요. 부동산을 먼저 선점해 놔야 돼요. 나중에 이스라엘이 내 땅이라고 차지 안 하니까.
처음에 중세 때 예루살렘의 땅 투기가 일어난 거예요. 각 교파끼리. 먼저 등기하는 것이 임자입니다. 아르메니아 교회에도. 1/4등기 해놨어요. 아르메니아 유대인. 기독교 그 다음에 아랍. 4등분 딱 되어있어요. 전부 등기 다 되어있어요. 성전 근처에 무덤도 등기 되어있어요. 주께서 오실 때 재림하실 때 빨리 부활 승천하려고 등기 다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기하학적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자기 지점을, 살아서도 자기 지점만 생각하는, 죽어서도 내가 어디 포지션하느냐, 자기 지점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 지점.
그런데 주님께서는 야곱을 갈아버렸어요. 믹서기에 콩을 집어넣으면 콩이 형태가 유지됩니까? 아니면 가루가 됩니까? 가루가 되지요. 홈쇼핑에 많이 나오잖아요. 가루가 되어버렸어요. 에너지가 와서 하나님이 야곱을 치듯이 자기 자신을 니가 하는 행색, 기하학적 힘 모으는 니 중심으로 모으는 그것에 주께서는 몸을 맡겨. “때려 봐! 때려 봐! 고집부려 봐! 내가 맞아줄 테니까 때려 봐!” 그러면 고집 부리겠지요. 에돔처럼 우리가 고집부릴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내 인생 조저도 내 인생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처분할 겁니다.” 그걸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그게 뭐냐, 허무에요. 허무. 이겼는데, 분명히 성공했는데, 분명히 가졌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었는데, 왜 그 뒤에 짙은 허무가 안개처럼 쌓이는지. 도대체 아무리 얻었는데 그거 지킨다고 초조해. 전보다도 못할까 싶어서 불안해. 나는 x좌표에서 x1, x2 이만하면 됐다고 했는데.
저 뒤에 동창생이 왔는데 x4에서 y4가 너무 잘살아.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 뭘 느껴요? 결핍을 느끼지요. 지리적 결핍을 느껴가지고 “니, 어느 미용실 갔는데?” 또 갑자기 중간에 있는 미용실까지 찾아가. ‘아, 이 동네는 이렇게 머리하고 이렇게 하는구나!’ 또 골프 모임에 간다든지 해가지고. 지형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대하려고 한다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니 원대로 해봐!” 언제까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됨의 끝판왕. 헛됨의 극치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매일같이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승리했는데, 그게 잠깐 좋았는데 한 시간 뒤에 “어머, 어머, 이거 말고 또 없어요? 월드컵보다 더 재미있는 거 없어요?” 치킨 사달라, 치킨 사달라, 자식들이 해가지고 치킨 사줬는데 치킨 연이틀 월드컵한다고 사주니까 치킨 캑! “치킨 개 주세요. 뽀삐 주세요.” 이렇고 있다 말이죠. “왜? 많이 먹었나? 맛이 별로 없네요.” “그럼 어떻게 해.” “더 맛있는 치킨 없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말하자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욕망에 허무에 있는 거예요. 허무. 그 허무라는 애굽에서 강제로 뽑아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를 원안에 집어넣는 겁니다. 니가 구성한 환경 말고, 이미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확정된 세계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거 하면서 모든 제사법의 완성은 이미 예수님을 위해서 주체로서 일방적으로 다 이룬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냐, 손 마른 자에요. 손 마른 자입니다. 손 마른 자는 손 말라진 채로 주님을 증거하는 용도기 때문에 너무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손 말라져야 돼요.
치킨 먹어야 되고,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돼요. 이것이 너무나 소중해요. 전에는 나한테 안 소중했는데, 지금은 주님의 초과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재료가 되고, 자료가 되고, 이게 원료가 돼요. 죄인을 부르러 와야 되니까. 죄인을 영입해야 되니까. 샌비 오지 말라는 거예요. 천하에 죄인 오라. 죄 많을수록 은혜가 더 넘치니까. 계속 중고, 중고를 찾는 거예요. 물론 중고 오라 하지 않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중고라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바로 내가 보는 나의 시선에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꿔버리지요. 주님의 시선으로 바꿔버리면 나는 잘났다. 나는 그림 최고 잘 그린다. 새들도 속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바로 나 자신마저 속이는 자이어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시선을 못 속인다는 점을 안심해도 좋습니다. 기뻐해도 좋습니다. 주께서는 지켜보고 계십니다.
너 같은 죄인, 내가 건졌다. 내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사는 대로 그냥 살면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가벼운지요. 고칠 필요도 없고, 수정할 필요도 없고, 계산할 필요 없고, 모든 것이 주께서 의도한 대로 죄인으로 사는 이 낙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