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117a말1장2절(선지자의 이중성)-이 근호 목사
오늘부터 말라기합니다. 지난 동안에 스가랴 하신다고 많이들 고생했지요. 고생하면 뭐합니까. 지나가면 무슨 뜻인지, 뭐 했지? 뭐? 스가랴 누구세요? 이리되면 곤란한데요. 스가랴가 누구냐 하면 선지자입니다. 스가랴는 선지자지요. 선지자인데 이중성을 갖고 있어요. 선지자 이중성.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중성은 지금 그 시대와 오는 시대의 이중성입니다. 시간이 서로 그냥 하나의 열차 궤도처럼 연결되어있으면 이중성이라는 말이 필요치 않지요.
가다가 이 선하고 오는 세대하고 가는 위치가 다릅니다. 오는 세대가 이렇게 간다면 오는 세대는 특징이 마주 보고 충돌하는 식으로 온다. 이게 충돌하는 식으로 오는 게 이중성입니다. 그 이유가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기억 중심으로 해석되는 시간이거든요. 이 세상이.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내 기억 중심으로 해석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역사를 만드는 용도로 시간을 이해하는 겁니다. 지나간 시간의 앨범들을 주욱 보세요. 그 사진에 보면 여고시절의 사진에 내가 이렇게 중간에 있잖아요. 애들하고 있지만. 나의 중심의 세계는 반드시 누구를 필요로 하느냐 하면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남들에 둘러싸여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안 나오는 시간을 간직할 이유가 없어요. 친구들은 다 나왔는데 나만 빠졌다. 그 사진 왜 갖고 있지요? 안 갖고 있지요. 내가 빠져버리면 내가 누구하고 찍었던 안 찍었던, 같이 찍었던 사진이라도 이제는 그 찍었던 친구들과 무관하게 빠져버리면 그 사진들은 전부다 가스레인지 위에 다 태워버려요. 아니면 가위가지고 막 오려버려요. 가위로 오리던지 다 태우던지.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던지 간에 그게 의미 있는 것은 거기에 내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거예요. 내가 빠지면 그건 의미 없는 시간이 돼요. 의미 없는 시간은 내가 기억할 이유가 없지요. 내가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은 내 중심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면 마주 보고 충돌하는 오는 세대는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이 끼어들지 않으면 이 세대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내 중심으로 살더라도, ‘오는 세대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오는 세대는 이런 세대일 거라고 이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예수님하고 인간 사이가 좋을 거 같으면 해석이 돼요. “오, 나 그리웠어. 내가 보고 싶었어.” 이리 되는데 충돌이라는 말은 아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 분을 거부했거든요. “제발 좀 없어줘. 나가 줘.”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이 뭐 원한 져서 싫은 게 아니고,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귀신이 악마가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덩달아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악마가 우리에게 준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니까, 자기 의가 많이 들었지요. 식상하면 이거 바꾸면 돼요. 나의 정의. 나의 정의로움.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나에게 아주 정의로운 일이고, 이건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못나고 남한테 해꼬지해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정의로움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내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이것만큼은 옳았다. 정의로웠다. 참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기 의, 자기 정의로움.
그러니 충돌한다는 것은 어디를 충돌하겠어요? 나의 의를 가지고 충돌하는 거예요. 주님이 “너는 의롭지 않아.” 의롭지 않다는 말은 의롭지 않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의롭지 않기 때문에 너는 제거대상이다. 없어질 대상이에요. 없어진다는 것은 소실되는 것이 아니고, 영어로 thing 사물이 되는 거예요. 사물이라 하는 것은, 사물하고 대상하고 구분해야 돼요. 사물이라 하는 것은 물체 thing이고, 대상이라 하는 것은 object, 하나의 객체가 되는 건데, 대상이 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저걸 통해서 내가 suject 주체가 되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어떻게 다룰까, 할 때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면서 결혼식 날 저 여자를 내가 어떻게 다룰까, 할 때 여자는 thing이 되는 게 아니고 대상이 돼요. object가 돼요. 누구를 빛내기 위해서? sbject. 나를 빛내기 위한 용도로서 보조적 역할이 되어버리지요. 그거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저 남자를 내가 어떻게 다룰까, 어떻게 다루면 나는 처녀 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마음껏 쇼핑하는 돈을 저 남자에게서 빼낼 수 있을까, 일단 경제권을 내가 장악해야 되겠지. 이런 식으로 그런 계산을 한다면 나는 뭐냐, 남편은 나의 object 객체가 되고, 나는 그 가정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연애할 때는 전략을 서로 숨기기 때문에 “자기 사랑해” 라는 입에 거짓말을 발린, 사랑의 뜻도 모르고 하여튼 해가지고 서로 ‘저 남자 같으면 내 안의 object 대상이 되겠다. 나를 내 주체를 빛낼 수 있는 누구 앞에 내세워도 나는 이런 남자하고 살아. 라고 자랑질 할 수 있는 나의 계산이 되겠다고 하다가, 그 모든 계획들이 여자도 마찬가지고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계획이 일거에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건 예상 못한 새로운 thing이 등장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자슥. 자슥이 등장해요.
자식 같으면 말을 안해요. 자슥이 등장해요. 이건 무대포에요. 무대포. 엄마, 아빠 10시에 들어가서 잠자는데 지는 새벽 2시반에 깨. 그리고 언제까지 노느냐 하면 새벽6시 출근할 때까지 놀다가 그 때 잠 안온다고 찡얼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야 되는데 밤샘했어요. 애하고 놀아주고 달랜다고. 그 때는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거든요. 이게 뭐야? 이게 내가 꿈꾸던 내 가정이었어? 내가 이게 뭐야? 이게. 나는 이런 걸 원했는데 왜 찡얼대고 하는 거야?
인간의 자기 역사, 자기 시간의 예외적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그럼 어떠느냐, 빨리 키워가지고 딸 같으면 시집보내고 아들 같으면 장가 보내고. 훅! 내 쪽에서 빨리 내쫓아야 되겠지요. 빨리 교육시켜 내쫓아야 돼요. 또 교육 잘 안되면 또 와가지고 안된다고 찡얼대니까 과외를 많이 시켜가지고 스스로 자립하도록 그냥 내쫓아야 돼요. 교육시키는 것은 전부 다 내쫓기 위함입니다. 저리 가! 빨리 좀 꺼져줄래. 이런 식으로. 제가 이 말은 인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주체였음을 포기한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포기한 적이 없는 거예요.
꺼져줄래? 할 때 누구도 같이 꺼져주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도 같이 꺼져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잘되려면 예수님이 꺼져줘야 교회가 잘돼요. 교회가 나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내가 권사다. 내가 장로다. 이게 교회가 있어 줘야 빛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현장에서 빨리 없어 줘야 돼요. 예수님도 하나의 나를 위한 대상 object가 되는 조건하의 예수는 가끔 거론하고, 기도할 때는 모든 일에 예수님 자리에 교회가 들어서 버립니다. 교회만. 우리 교회 영광스럽고, 우리 교회 역사, 우리 교회 다녀간 당회장 목사들의 다녀간 역사들의 사진들, 진열된 사진, 전부 다 자기의 의와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의 의를 이루어주고 일반적으로 흔히 아는 이야기는 자기 자존감이라 하는 거예요. 자존감.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자존감대 자존감의 만남이에요.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지 자존감대 자존감의 만남이에요. 자존감은 어떻게 되느냐, 혼자 있으면 자존감이 안 생겨요. 반드시 누가 만만한 것을 내 곁에 둬야 되고 불러내야 돼요. 그래서 사진도 같이 찍어야 되고 놀러도 카페도 같이 가야 돼요.
혼자 카페에 앉아있으면 청승스럽고 분명히 차인 여자에요. 희미한 갈색 추억이나 그걸 논하면서 창 넓은 창가에 앉아가지고 남 다가는 혼자 해가지고 청승스럽게 앉아서 커피는 다 식었는데 리필 안 돼요? 하면서 앉아가지고, 빈자리. 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 꽉 채워야 되는데 그 꽉채운 자리가 허하니까 비어있으니까 자존감은 그대로고 그 자리에 충족되지 못한 것이 있으니까 공터지요. 공백, 빈 칸.
빈 칸에 내 자존감이 유지되려면 그 떠나는 것만큼 다른 레벨 쯤 되는 것으로 채워야 되겠지요. 채워야 돼요. 주식이 빵구 났으면 다른 것으로 채워야 돼요. 이 남자 없으면 다른 남자를 얻든지. 뭔가 채워야 돼요. 왜 자존감의 범위는 이미 넓어졌으니까. 여기서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 사적 복수심. 이것을 노리고 산상설교에서는 뭐냐, 예수님께서 살인죄를 적용시킵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 이런 산상설교의 이야기가 로마서10장3절에 보면 이미 사도바울에 의해서 하나로 규정되어있어요.
자기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배척하는 너희 유대인들아! 이리 되어있어요. 이런 자들은 무엇이 안 됐다? 마음의 할례가 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마음이 거덜 나야 되는데 마음이 거덜 나지 않은 거예요. 자기중심의 시간성, 자기 의로움, 자기 정의로움, 이걸로 차있으니까 이것은 누굴 거부하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 대가로서 계속 그들은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병이어에 물고기 두 마리에 보리떡 다섯 개 해가지고 주께서 해줬을 때에 그들을 오천명되는 예수님이 자기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행위인줄 알았어요. 존경해마지 않았습니다. 임금 삼으려 했고, 저 분만 있으면 우리의 자존감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자존감을 일단은 주께서는 자극을 해서 그들의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다 일으켜 내놓고 뒤에다가 뒤통수를 쳐버리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영생할 수 없다고 하니까 싹 하나도 예외 없이 왔던 사람 그대로 다 가버렸어요. 한두 명 남아있는 것도 아니에요. 싹 다 갔어요. 싹 다. 다 가버렸습니다.
다 갔다는 말은 애초부터, 지금 우리가 말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하는 게 아닙니다. 말라기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요한복음 하는 게 아닙니다. 말라기에 연관되어있어요. 애초부터 그들은 혼자였다. 이 말라기의 주제, 스가랴가 이중성인데 말라기도 이중성을 갖고 있는데요. 말라기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붙입니다. “너희들 이스라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극단으로 몰아붙여요.
이런 이야기 들으면 예수님의 하신 일이 인간의 그 어떤 활동의 영역도 예외로 두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활동성이 어떤 것도 안 보고 지나가는 게 없고 모든 분야에 심지어 김장하는데까지 모든 분야에 속속들이 다 개입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 그래서 자기 자신이 망가짐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어제 수요일에 예를 들었는데. 쩍쩍 갈라졌지요. 가뭄에 저수지 바닥이 갈라졌잖아요. 갈라졌으니까 뾰족하고 틈이 있잖아요. 이 저수지 바닥에 단비가 내리면 이게 찰랑 찰랑 전부 다 차버려요. 안에 모양이 세모가 됐던 네모가 됐던 날카로운 직각선이 됐던 간에 물 안에서는 요 틈새 비어있는 틈새 하나 없이 전부 다 생명의 영으로 다 채워주시는 거예요. 많이 비어있는 사람은 많이 사랑하겠지요. 용서 받은 게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겠지요.
자기가 너무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늘을 찌르겠지요. 내세울 게 없는 사람한테는. 예를 들어서 강도 같은 경우에 내세울게 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최고지요. 어느 정도로 최고냐, 자기의 살았던 인생을 아낌없이 그냥 다 버리지요. 주님을 위해 다 버리는 겁니다. 이걸 세속적으로 말하면 뭐냐, ‘통 큰 기부’ 이게 바로 두 과부의 두 렙돈 통 큰 기부에요. 내가 얼마를 하는 게 아니고 내 자체를 그냥 헌금통 안에다가 자체를 머리 박고 그 안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듯이.
통 큰 기부가 되지 아니하면 자기가 자기의 자존심을 유지할, 자기 몸이 동그라미라면 일부를 아직도 포기를 못하고 있는 경우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거 나머지 드릴 테니까 요거 키워 달라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의사를 갖고 있는 거예요. “이만큼 십일조하고 다 드릴 테니까 요거 내 마지막 소원인데 요것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요거 내 소원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요게 왜냐하면 자기의 마지막 자존감이고, 마지막 자기의 정의로움을 증명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 간다는 것은 자기 잘난 맛에 가요. 내가 얼마나 신앙이 좋고, 기도 잘하고, 하나님 덕분에 내 인생을 잘 먹고 잘산다 하잖아요. 이 말이 하나님의 덕분이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나의 소유와 나의 갖고 있는 것은 정당하게 갖고 있다고 자기 정당함을 주장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교회 가고 그래서 교회가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회라는 게 교회나 성당이 천국과 끊어진 이유가 교회가 성당이 이 세상, 이 세대를 그대로 대변해 주기 때문에 이 세대는 오는 세대와 연결이 안 되잖아요. 왜 연결이 안 되는가, 예수님을 미워하니까. 예수님보고 저리 꺼져라! 했기 때문에 이건 인간 쪽에서 이미 차버렸기 때문에 연결이 될 리가 없지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 안 듣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한 그들의 세대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그걸 인정해주는 자기의 의를 칭찬해주는 그런 메시아를 고대했기 때문에 엉뚱한 메시아가 왔으니까 그거 차버리고 환상적인 있지도 않은 메시아. 마귀가 만든 메시아를 사모했던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러면 말라기가 예언서지요. 선지자가 예언자잖아요. 말라기가 신약에 와서 성취가 된다는 말은 무슨 요소도 같이 성취가 되겠어요. 유대인의 갖고 있던 가장 지워버릴 수 없는 자기 위주의 자존감과 자기 잘남 이것도 신약시대에 그대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나타나게 되어있지요.
선지자의 말씀을 신약에서 완성된다, 라는 말을 할 때에 자꾸 뭔가 빼는 게 있어요. 그 말씀이 왜곡되는 겁니다. 뭘 빼느냐 하면 선지자들이 그 당시에 니 모습들은 이 정도밖에 안 돼! 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주님의 계획을 거기에 담았다 말이지요. 과일을 그냥 던져주지 않잖아요. 쟁반에 담잖아요. 그 쟁반이 뭐냐, 추잡고 더러운데다가 하나님의 과일을 담는 거예요. 따라서 신약을 해석할 때는 선지자가 그렇게 했던 그 성취성을 그대로 가져오게 되면 인간이라는 자체가 추잡하고 더럽다라는 것을 계속 살려야 돼요. 유지가 되어야 된다고요.
별이 아름다운 것은 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별이 아름다운 것은 밤이거든요. 그래서 시편136편9절에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지배하신 이에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어두움을 지켜보는, 그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지켜보는 피조체. 달과 별. 그 달과 별이 어두움을 지켜보면서 어두움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단번에 심판하지 않고 지켜본다는 것은 달과 별 아래 반짝이는 달, 반짝이는 별 안에 주의 인자하심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달을 보고 별을 보고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별을 주관하는 자에게 대조적으로 달처럼, 별처럼, 비치지요.
빛이 빛 되기 위해서 어두움은 짙은 어두움이어야 하는 것예요. 이 세상이. 예수님이 빛이거든요. 에베소서5장에. 그러면 우리는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된다 할지라도, 그걸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것처럼 이것조차도 너무나 영광스럽지요. 왜? 어두우니까. 자기 어두움을 주체로 간주하지 않고, 그걸 지켜보는 달과 별 같은 빛을 나의 주체로 통큰 기여를 한 거예요. 동참을 해버린 거예요.
이러한 혜택이 어디서 왔는가, 오는 세대의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는 세대가 오게 되면 오는 세대가 작용한다면 이 세상에 무서움과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가 오는 세대를 느낄 때에 그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가져가! 통큰 기부. 다 가져가! 그냥 요건 남기고 가! 이런 게 없어요. 다 가져가! 내 인생 다 가져가!
그게 바로 에스더가 이야기한 4장 4절, 죽으면 죽으리라. 가져가세요. 다 가져가세요. 나는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생명 아닌 것은 아낌없이 가져가! 이리 되는 거예요. 생명 아닌 것은. 그래서 이 스가랴도 선지자의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이중성이 상당히 중요하지요. 들어보니까.
이 이중성을 생각하지 않고, 선지자가 그 시대에 막 책망했다. 오실 메시아가 오게 되면 선지자의 역할은 오실 메시아가 오게 되면, ‘아, 오실 메시아가 우리가 하질 못한 걸 하시는구나! 아이고, 선지자 그동안 고생했네.’ 끝나버려요. 이중성이 안 돼버리니까. “아이고, 그 당시 이스라엘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 선지자를 못 알아봤을까. 우리는 예수님을 담방에 알아봤는데.” 지금 이중성이 날아가버리니까 마치 자기는 예수님을 알아봐서 믿는 것처럼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사라질 때 모든 것을 안다.’ 사라질 때 모든 것을 아는 거예요. 여기 사라질 때 누가 사라지는가,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 되어서 이 공부, 저 공부해서 아는 것. 그거 해도 그건 세상 전부를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내가 사라지게 되면 주님이 알아서 모든 걸 알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벤츠 구입하라하면 벤츠 구입하면 되고, 앞으로 니는 골프치라 하면 골프치면 되는 거예요. 안 치겠다 하면 이건 또 무슨 자기 의에요. 하면 돼요. 모든 것이 중요한 것은 누가 시키느냐가 중요해요. 누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시키는 대로. 왜? 나는 모르니까. 나는 무지하니까. 무지가 주는 자유함이 있어요.
어리석음이 오는 자유. 고린도전서1장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됨으로서 십자가와 어리석음에 나의 똑똑함을 버리고 십자가가 어리석다면 그 어리석음에 모든 것을 그 안에 투신하겠습니다. 어리석음에 내가 뛰어들지요. 어리석음에 뛰어들었다는 말은 자기 의가 나한테는 이제는 내 의가 나한테 큰 짐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선지자부터 오면 그래요. 이중성이니까. 선지자가 이중성이거든요. 이중성은 바로 내가 잡고 있는 주님에서 주님에 의해 잡힌 나가 돼요. 내가 잡고 있느냐, 아니면 주님이 잡고 있느냐, 디모데후서2장26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기 이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디의 함정, 어디의 올무, 어디의 덫에 빠졌었습니까? 마귀의 덫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마귀라는 말,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말을 그건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너무나 그 현실 자체로 여겨서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냥 이 단어를 써버리는 거예요. 너 마귀 들렸어. 귀신 들렸어. 귀신에 지금 빠졌어. 왜? 자기 의가 있지. 자기 자존감에 미쳐있으니까요. 자기가 주인공이니까요. 자기가 주체가 되니까 예수님마저 하나님마저 자기의 객체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이용할 대상이 되어버렸어요. 대상. object.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어떤 꽃이라는 것은 thing이에요. 그냥 사물이에요. 그러나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꽃은 내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고요. 나한테 내 역사를 빛내게 하는 의미로서 꽃이 꽃이라 부르는 거예요. 김춘추라는 사람이 출판사에 직원으로 있으면서 자기 책상에 꽃이 하나 있었던 겁니다. 그 꽃을 보고 시를 지은 게 그 시에요. 내가 너를 꽃이라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그냥 하나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를 때 너는 나의 의미가 되었다. 얼마나 마귀 짓입니까.
그 마귀적인 시를 들어보니 평소에 하던 모든 행위가 그 안에 집약되어있어요. 우리는 그런 행동이외에는 다른 행동을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건 진리지만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진리가 뭐냐 하면, ‘우리는 계속 뭔가를 한다.’ 우리는 계속 뭔가를 해요. 하는데, 뭐라고 핑계를 대느냐 하면, 내가 하고자 할 때만 행동한다. 이렇게 거짓말 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뭘 하고자 할 때 행동하는 게 아니고, 생각 없을 때도 뭔가 계속 해요. 계속하고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괜찮아 보이면, ‘그게 내가 나한테 지시를 내려서 내가 명령을 내려서 내가 옳은 결정을 해서 이런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 라고 자기한테 의미를 모으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우리는 자기를 주인공 삼기 위한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왜?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남한테 보여주고, 보여주면서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은 나의 object 객체가 되고, 내 말을 들어주면 객체가 되고, 들어줄 때 비로소 나는 외롭지 않는 내가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즐거운 순간이 되겠지요. 그래서 누구 친구를 계속 만나야 되고, 계속해서 불러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서 마귀의 올무에 푹 빠진 거예요. 마귀의 올무에. 마귀에 사로잡힌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는 그 친구 만나서 수다를 2시간 반동안 수다를 떨게 하시는데 그게 주님께 사로잡혀서 하는 거예요. 이중성이니까. 그러니까 뭘 안 할 이유가 없지요. 왜? 오늘날 성령 받은 자는 선지자니까. 선지자는 이중성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주께서 원했던 바를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등장했음을 최종 의미로 나를 경유해서 주님께 드려버리는 겁니다. 통 큰 기부를 하는 거예요. 주님께 드리지요. 이 선지자는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 받았잖아요. 그 광야 시험받는 그 일에 핵심 모티브가 뭐냐, 말씀이 모든 정황을 다 만들었다. 주님께서 내가 너한테 악마 너한테 시험받는 것도 내가 원해서 이걸 이김으로서 나는 내세워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건 말씀이 말씀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보고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니가 말씀 지키라 하는 거예요.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냥 들어오는 거죠. 공기가 그냥 우리 몸에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말씀이 들어와서 말씀대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뭐냐, “니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노력하잖아. 그럼 말씀을 지켜야지.” 라는 그 속삭임. 요청. 마귀가 계속해서 그동안 인간들을 그런 식으로 농락해 온 겁니다. 올무를 줘가지고.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그게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말씀을 요리하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여기에 보면 뭐냐, 말씀이 우리를 말씀대로 말씀이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니가 건드리지 말라. 시험하지 말라. 모든 것은 말씀대로 되어가니까. 예수 나는 그게 되는데, 말씀이 나보다 앞섰다 되는데, 마귀 니는 니가 니한테 앞서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붙여가지고 악마를 시험한 거예요. 악마는 거기에 속아 넘어갔고 악마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올무에 빠진 게 돼요. 인간도 거기에 같이 빠져 있지만. 돈에 속고, 사랑에 속고, 마귀에 속고.
광야에서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예수님 시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말씀과 싸운다.’ 말씀과 싸움으로서, 말씀과 싸우게 되면,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삶은 뭐냐, 서울이든 어디가 됐던 뭐냐 하면 광야가 됩니다. 광야. 아무리 신도시가 들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그 신도시가 광야에요. 그 신도시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풍족한 음료와 고급 양식을 먹어도 생명의 떡은 없다는 점에서 광야에요. 먹고 죽을 양식들은 많은데 먹고 죽어도 생명이 되는 양식은 하나도 없어요. 죽을래야 복음이 안 들려오니까. 그럼 복음을 들려주면 되지 않겠느냐. 들려줘도 그들은 차버리는데요.
그러면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 뭐냐, ‘인간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어디로? 각기 제 갈 길을 찾아가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은 아무리 멈춰서 생각하고 내가 어디로 가느냐 해도 그 순간도 멈추지 않아요. 그게 뭐냐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운동장. 당구공을 기울어진 운동장에 놔두면 자기가 알아서 자기 구멍으로 가게 되어있어요. 한쪽 구명은 지옥, 한쪽 구멍은 천국. 이게 말씀이 그렇게 하게 만들어버려요. 마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아무리 복음 공부를 하고 천국 가려고 애를 써도 그렇게 하는 자기가 애쓰고 노력하는 그 일이 그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자기가 하는 그 일이.
남편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하잖아요. 그 열심히 하는 일이 자기 인생을 망치는 거예요. 그러면 집에 앉아서 복음만 연구하잖아요. 집에서 복음을 연구한 게 지옥으로 보내요. 그러니까 말씀으로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떤 결심과 노력과 결단으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예수님이 악마한테 시험받는 그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요.
시험을 이긴 그러니까 마귀는 우리 인간을 속였잖아요. 마귀가 인간을 속였다 말이지요.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래서 그 두 개를 합치면 이리돼요. 어떤 사람이 천국 가는가, 본인한테 매일같이 속는 사람이 천국 가요. “우리가 옳게 살아야 천국 간다.” 라는 나한테 내가 그게 속임수라는 걸 알아야 돼요. 내가 나를 속이는 속임수를 알아야 돼요. 내가 반듯하게 살아야 되고, 주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대로 살아야 된다는 이것이 나에게 속삭이는 악마의 속임수라는 것을 이걸 눈치 채시면 되는 겁니다. 오늘 공부 여기서 끝내고 싶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행동을 할 때, 항상 대상을, 타인을 의식하면서 행동하거든요. 하나님, 저 어때요? 저 어때요?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런 짓을 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서 더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주님께서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만들어버려요. 이미 죽은 자로 만들어요. 죽은 자의 장점은 뭐냐 하면, 뭘 하고 싶어도 죽었기 때문에 할 게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위 눌리기’에요. 뻔한데 잠은 다 깼는데 잠에서 깨어날 방법이 없네. 미치겠지요. 잠에서 깨어 옆에서 무슨 소리 하는 거 다 듣는데 나한테 눌려가지고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내 잠에 눌려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깨어라, 깨어라한다고 깨는 게 아니거든요. 옆에서 누가 발로 차주면 버떡 깨는 거죠.
성령께서 우리를 이렇게 가위눌린 우리를 매일같이 때려줘요. 때려주게 되면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되지, 주님 앞에서 내가 주님을 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때릴 때마다 새롭게 새롭게 새로이 느껴지는 거예요. 새롭게 느껴지는 거예요. 새로운 지식을 아는 게 새로운 게 아니고. 자기에 대해서 새로운 자각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아! 내가 안 속으려고 했구나! 내가 나로서 버티려고 나 자체로서 대단한 존재로 버티려고 했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실패하면서 자기를 압니다. 예수님에게 떡 얻어먹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고 그들만의 미래가 있었고, 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거 실패로 끝났어요. 예수님 말씀 한방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 했지요. 이 말은 뭡니까? 니 지금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니는 영생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영생이 없으면 뭐냐, 저주가 있지요. 죽어있는 거예요. “죽었어!” 하는 그 말 한마디에 삐져가지고 다 가버린 거예요. 교회가 복음이 없는지를 이제는 아시겠지요. 교회가 유지되려면 극단적인 부정적인 멘트를 해서는 안 되지요. 한 달 전인가, 더 됐는가, 제가 ‘집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제목이 그냥 집사에요. 집사가 어떤 게 집사냐, 교회를 부정하는 게 집사다. 교회를 부정하는 게. 이사야 말씀에 순종해서 교회를 위해서 충성, 봉사하는 집사가 아니라 교회 자체를 없다고 여기는 게 집사에요.
왜? 교회가 사라질 때 말씀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뭐야? 그럼 무엇이 구원하지?’가 복음이 구원하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있어버리면 뭐가 가로막히지요? 복음이 가로막히지요. 악마가 교회를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복음을 가로막기 위해서 교회를 만든 거예요. 처음부터 교회를 안 다니면 어떻게 되느냐, 교회 안 다니면 실패가 없잖아요. 교회를 다녀서 뭐라도 해야 구원 받을 때 상급이라도 콩고물이라도 받아야 내세우니까. 교회 다니면서 교회 자체를 부정하시면서 교회 다니면 되는 거예요.
자, 말라기는 뭐냐 하면,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이 마지막 선지자라는 말도 그 당신 사람들은 오해했지요. 왜냐하면 선지자가 오게 되면, 마지막 선지자라는 말은 이제는 메시아만 올 날만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선지자가 인간이잖아요. 인간이 인간에게 교훈하고 잔소리하고 훈계하고 어떤 율법을 가르칠 때에 마지막 선지자잖아요. 그러면 마지막 선지자가 하는 잔소리를 안 듣게 되면 그걸로 인간의 세대는 드디어 폭파해 끝나버렸어요.
더 이상 희망 가질 자격과 권한조차도 인간에게는 더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뭐를 거쳐 와야 돼요? 말라기를 거쳐 와야 돼요. 말라기. 말라기를 거쳐 와야 돼요. 말라기 안 거치고 중간에 새치기하면 안돼요. 말라기를 거쳐야 인간이 어떤 것을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자기 구원에 보탬 되는 행동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말라기를 통해서 정리가 되어야 돼요. 우리가 이 말라기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간은 마치면서 열왕기상16장34절, 세상은 말씀이 지배하는데 이 말라기 설명은 시간이 지배하는 것 같아. 말라기와 관련된 핵심 성경 구절입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을 통해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지요. 말씀.
벧엘사람 히엘이 건축하는데, 건축업자 같아요.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잃었잖아요. ‘이건 뭐 재수 없어서 그렇지.’ 하고 성문 세우는데 진도 나갔는데 스굽을 잃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여리고성 세우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고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을 했거든요. 말씀대로 된 거예요.
그러면 이 본문을 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느냐 하면 말라기1장을 한 번 봅시다. 1장4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한 곳, 그 다음에 뭡니까? 다시 쌓으리라. 인간의 집념이지요. 집념. 집착. 그런데 에돔이라는 게 야곱의 형이잖아요. 에돔이 뭐가 되느냐 하면 3절에 보면 에서는 미워했으며, 아까 기울어진 운동장했지요.
인간이 지옥을 저주를 받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어떤 행위도 저주받게 하는데 가속을 주는 행위가 돼요. 지옥 가는 사람이 교회 나와서 복음 연구하면 복음 연구한 것이 더욱 더 지옥가게 만든다 이 말입니다. 하여튼 어떻게 행동을 수정해서 천국 가는 법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니 이렇게 하면 천국 가.” 라는 것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어요. 왜? 그 정당성이 뭐냐, 말라기로 선지서가 끝나기 때문에 그래요. 말라기는 잔소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잔소리해서 잔소리 들을 인간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말라기고 선지서에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백날 이야기해봐야 그들이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시 쌓는 것은 누구 몫이냐, 하나님의 몫이에요.
그래서 첫 번째 선지자 누굽니까? 엘리야. 엘리야를 다시 보내는 거예요. 말라기4장에서. “내가 마지막에 엘리야 보낼 거야.” 다시 쌓아도 주님이 엘리야를 보내야 돼요. 우리가 요청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말라기가 상당히 내용이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이제는 짐작을 해야 될 거예요. 10분 쉽시다.
안양20221117b말1장2절(선지자의 이중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인간들은 지옥 가는데 굉장히 성실해요. 그리고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해오고 있었어요. 뭘 새삼스럽게,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나를 타인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여전히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이라는 것을 행색깨나 하고 있는 거예요. 잔소리 하신다면 잔소리대로 한 번 해볼게요. 선지자가 잔소리가 한 두 마디가 아닙니다.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종말이 와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있어요.
그래서 선지자에게 대든다. 말라기는 선지자에게 대들었어요. 대든 이유가 이건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종말과 싸우기 때문에. 나는 나의 종말을 내가 내쪽에서 강력하게 나는 거부합니다. 반대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었어요. 하나님은 니가 종말을 맞이하지 아니하면 메시아와 연결이 안 된다 하는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내가 산채로 있으면서 메시아를 내가 모시고 싶습니다. 이게 인간의 종교성이에요. 뭐가 모자르고 뭐가 죄인이라서? 내가 뭐가 잘못되어서 내가 눈 뜬 산채로 메시아를 못 맞이합니까. 내가 뭐 어때서? 이런 식으로 대드는 거예요. 그 반발하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예를 들면요, 사사기11장에 입다라는 사사가 등장하지요. 입다 사사가 자기가 압몬이라는 나라와 전쟁해서 승리해요. 승리를 자가가 살아있는 채로 목격하고 싶었던 겁니다. 살아있고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승리로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승리했습니다,를 표현하는 방법이 희생물을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번 승리하게 되면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을, 튀어나오는 짐승이지요. 짐승. “짐승을 하나님께 이 전쟁은 하나님이 그냥 은혜로 승리하게 한 표현으로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아낌없이 내 희생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입다가 이야기하지요.
그렇게 이야기할 때 입다 마음속에는 내가 엄연히 살아있다는 조건을, 나는 그걸 포기 못하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게 뭐냐 하면 자기 죽음보다 더 싫어버린 죽음. 자기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의 죽음. 사랑하는 그것도 시집도 안 간 딸이 뛰어 나올 때, ‘아, 하나님은 하나님의 승리에 내가 산채로 거기에 구경하거나 가담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일부 죄 지은 게 아니고,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내 의가 없다는 조건하에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가 완전히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탕자라는 조건하에 하나님은 합격 반지를 끼워주는 거예요. 앞으로 천국 가서 니가 두 번 다시 내가 잘했다. 소리 안 나오니까. 나올 수가 없지요. 아버지 재산 다 날렸으니까요. 허랑방탕 날렸으니까. 귀한 반지를 끼워주고 귀한 한우고기로 잔치를 베풀고 동네방네 제대로 된 내 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돌아왔다는 거예요.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간 거예요. 도저히 갈 수 없는데, 갈 수 없는데 왔다는 거예요. 돌아온 거예요.
터미네이터 그 사람이 마지막 손가락을 보였잖아요. I will come back! 아직도 나에게 배 12척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했던 것처럼. 그 12척 없애버린 거예요. 그 손가락마저 없애버린 거예요. 그래야 내가 생각해둔 다른 자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예수님 나무에만 맺히는 열매로서의 나. 그걸 로마서에서는 뭐냐, 기존에 아담에 속한 아담의 일부로서의 나가 아니라 새로운 아담. 아담에서 배척받은, 아담에서 죽음을 당한 그래서 아담세계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담. 그 아담의 열매로서의 포함된 새로운 나가 준비돼 있습니다. 새로운 나만이 천국에 합류할 수 있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 가지에 열매가 없으면 잘리는 거지요. 그 이야기가 말라기1장에 초반에 그게 나와요.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그 다음에 뭐예요? 경고. 벌써 말씀 자체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경고. 너희들 이미 잘못되어있다는 거죠. 경고라는 말은 잘못되어있다는 말을 주께서 돌아오라, 또는 제대로 하라.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는 것도 그것도 마지막 선지자에게 그렇게 마지막 선지자가 한다는 말은, 그들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게 말라기 마지막에 나오니까요. 엘리야를 보낼 때에 엘리야가 하는 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도, 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그 역할 전부를 누가 하는가, 엘리야 혼자 해요. 엘리야 혼자. 그래서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아니지요. 이 세대의 엘리야지요. 오는 세대, 이 세대 다 갖고 있는 엘리야는 주님밖에 없지요.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그냥 소리. 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앞서 소리부터 먼저 나오지요. 옛날에 조선시대 때 관료들이 가마 타고 행차하게 되면 사거리에 물렀거라! 하지요. 그거 누가 이야기합니까. 관료가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그 밑에 있는 하인들이 이야기해요? 하인들이 이야기하지요. 하인들은 그 오실 관료의 소리. 광야의 소리. 물렀거라! 거기 키 큰 거 엎드려! 고개 숙여! 그럼 허험! 해가지고 흔들 흔들 멀리나겠어. 가마가 그렇게 멀리 난답니다. 속도도 느리고. 폼 잡는데 그만큼 애를 써야 폼을 잡지.
가마를 타는 이유가 다리가 아프다던지, 걷기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지위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너는 백성이고, 나는 너희를 통치하는 자야.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법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각자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하는 법이에요. 말라기에서도 경고하신 거예요. 말라기의 경고는 뭐냐, 너희들은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너희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이렇게 경고하는 이유는 뭐를 살리기 위함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끝났어요. 이스라엘은 이미 끝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레위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이스라엘 죽이고 레위언약 살리고.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의 언약으로 우리가 산다 하는데, 우리가 사는 게 아니에요. 레위언약이 살아요. 레위언약 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멸망시켜야 되는 겁니다. 나를 멸망시켜야 내가 구원 받아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어야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나요. 나사로가 예수님한테 나 죽여 달라고 요청한 적 있습니까. 나사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평소에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시험 삼아서 일단 저를 한 번 죽여주시고 다시 살려주세요.” 나사로가 그렇게 요청했습니까. 그렇게 안 했지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온 집안이 난리도 아니었어요. 끝났어! 끝났어! 예수고 뭐고 이게 뭐고? 예수 믿은 효과 없어. 이젠 효과 없고 예수님이 나를 배신했어. 예수님은 우리 집안을 배신했고 우리에게 맛있는 탕수육, 잡채, 다 시켜 먹고 이제 와서 우리 뒤통수 쳐가지고 이용할 때로 이용해 먹고 이제 와서 우리를 버렸어. 그렇게 해놓고 그럴싸한 말,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부활하리라. 이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데. 마지막 재림 때 다시 살 줄로 믿습니다. 믿씁니다. 하고 말에 막 마르다가 힘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 거 내가 다 백번 천번 들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그거고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주는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우리 오빠 기둥인데. 우리 오빠 왜 죽이느냐고? 그건 그거고 내가 노트 정리 다 했잖아요. 시키는대로 노트에 다 적어놨는데. 그건 그건데 왜 우리 집안을 거덜 내느냐, 우리 집안을. 그 착실하게 다 했는데. 집안을 왜 거덜 냈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니가 안 믿는다는 것을 내가 니 오빠를 죽여서 너희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까발린 거예요. 말라기가 그 원칙입니다. 언약이 성취하려면 인간이 언약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같이 수반해서 그게 들통 나야 돼요. 매일 우리가 불신자가 되는 게 매일 우리를 백성으로서 확인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매일같이 불신자로 들추어주는 것. 또 지가 알아서 불신자라고 우기지 말고요. 그건 타자를 의식해서 지 믿음 좋은 걸 자랑질하는데 그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세요. 여러분, 불신자로 만들어냅니다. 빈틈없이 불신자로 만들어줘요.
불신자가 뭐냐 하면 우리가 행했는데 주께서 돌아오는 그것이 내 행한 것하고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거예요. 저울질이 안 된다는 거죠. 바나나 오천원치 달라고 했는데 바나나 달랑 하나만 달랑 줬을 때 이게 멱살 쥘 만하잖아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내가 주님한테 속았어요. 주님은 니가 가상해서 만든 예수한테 니가 속았다. 진짜 예수님은 말로 거래하는 분이 아니에요. 말로 주고 받는 분이 아니고 우리를 사로잡는 분이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모든 일을 유발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오늘도 김장할 때 어떤 죄가 유발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이스라엘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 버림받은 자가 언약과 유일하게 만남의 장소에요. 만남의 장소. 국도에 만남의 장소 있잖아요. 고속도로 휴게소에 쓰레기 비우는 게 아니고 만남의 장소. 만남의 장소를 할 때 만남의 장소의 혜택은 누구한테 돌아오는가, 야곱에게 돌아갑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따지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 당시에 바사, 파르사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갔어요. 바사나라가 전쟁하기 좋아하니까 그 전쟁 비용이 있을 게 아닙니까. 전쟁비용을 어떻게 각출해요? 자기한테 통치 받는 나라한테 강제로 다 뜯어가는 겁니다. 말이 세금이지 도둑질이지요. 도둑질해가는 거예요.
일제시대 때 도둑질해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일제시대 하지 말고 일제 강점기라고 바꾼 지가 언제인데 일제시대라고 하느냐 하는데. 일제강점기를 바꾼 이유는 우리 한국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일제시대 때는 그 때는 한국이 없었고 조선시대 구한말이에요. 구한말 때는 구한말의 그 치욕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해주는 용어가 필요해요. 일제시대. 일제통치할 때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당해도 싸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는 조선은 개판이었다. 그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그걸 인정하고.
지금 입장에서 과거를 하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전에 했지요. 그건 가설이라고. 가설. 엉터리 이론이에요. 가설에 불과해요. 지금 내가 어릴 때 생각하면, 어릴 때 그 마음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서 내세운 가설에 불과해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그런 허점이 있어요. 우리는 그 때 그 시절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그 식언덩어리 그것밖에 안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식언이 있어서 내가 그런 남자 같으면 그런 남자 만나지 않겠지만, 그 당시 그 식언이 없었잖아요. 같이 까불고 깐족대고 논다고 정신없이 놀았잖아요. 그저 신났지 뭐. 할로인데이 돌아다니고.
주님께서는 이 언약을 위해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없앱니다. 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없애요. 그게 주의 복이에요. 내가 없는 세상은 없는 세상이다. 이게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이야기인지 몰라요. 내가 가지 않는 길은 나에게 없는 길이에요. 그런 길이 있는 줄 몰라요. 내가 안 갔으니까. 안 갔어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가 가는 길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나의 길을 없애주는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이에요.
내가 자꾸 꾸역 꾸역 끄집어내는 나만의 길을 계속 삭제시켜주는 그 작업을 주님이 동행하기 때문에 벌어진 희한한 현상입니다. 주님 제가 과거에 주일학교했고, 성가대 봉사 다했습니다.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지금 니 주머니에 얼마있노?” 지금 이리 물어요. 과거에 뭘했느냐를 묻는게 아니고 지금 니 주머니에 돈 오만원있고, 오늘 저녁 반찬은 뭐야? 그거 생각하지 말고 지금 생각해. 지금. 지금 내가 준 거 생각해. 자꾸 과거의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그거 따지지 말고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거예요. 나름대로의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지만 의미가 없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everybody.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미를 두는 것은 지금의 내세운 가설이에요. 엉터리이론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의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과거를 지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고 지금 조작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없는 세계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일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마음 휘둘 일 이유 없습니다. 내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주께서 세상에 휘둘일 필요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휘둘리게 하게 만들어요. 어서오이소. 어서오이소. 시장에 앉아가지고 하나라도 팔려고. 오늘 수능 잘쳤지요. 바지 하나 더 팔려고. 왜냐하면 우리를 없애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아직도 우리가 복음 생각하게 되면, 덜 뻔뻔스럽구나! 더 뻔뻔하게. 채찍질해요. 더 뻔뻔하게. 오직 복음뿐이야. 알았지. 정신 차려! 돈 이외에는 아무 의미 없는 거야. 그래야 우리가 탕자가 될 게 아니겠습니까. 떠난 우리가 우리의 막장을 우리가 값을 해줘야 돼요. 나의 막장을. 막장 아직 멀었어요. 한참 더 들어가야 돼요.
나의 마지막 모습을 독촉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마지막이 안 된 이유가 아직도 반발을 덜해요. 반발을 더 심하게 할 때가 있어야 돼요. 어느 정도로? 말라기1장2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런 말이 하나님 앞에서 서슴없이 튀어 나와야 돼요. 그 자리에. 말라기 말씀이 우리한테 다시 재탕되고 반복해서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말라기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활동하게 되지요. 말라기를 한 번 읽고 치우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접해야 될 말씀으로 다가오지요.
여기에 대해서 2절 끝과 3절에 사람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나오지요. 바로 선택설. 예정론이 나와요. 예정하사 선택. 선택할 때 선택과 예정선택이 달라요. 선택을 해버리면 이 순간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 이리 되는 거죠. 예정선택은 이 선택은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결과뿐이다. 이게 예정선택이고. 예정선택입니다. 여기서 그냥 너를 선택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를 본인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소유하려고 하는데 나중에 나이 좀 들어가지고 치매 걸리면 이 소유성이 날아가버려요.
선택을 내가 소유하는 조건하에 선택되어버리면 치매에 걸려버리면 예수님이 누군지 나중에 뭐 치매 걸리고 나니까 예수 찾다가 부처 찾고 난리가 아니지요. 정신 있을 때는 예수님하다가 나중에는 오락가락할 때는 가까운 자식들이 “어머니, 우리 집안이 다 불교에다가 다했는데 어머니 혼자 천당가고 자식버리고 혼자 천당가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렇게 천국가도.” 합리적 의심을 하면서 논리를 내세워가지고.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가족이기 때문에 종교를 하나로 모읍시다. 그동안 부처 떠난 거 회개하고 부처 믿읍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반성하고 회개한다. 이렇게 됐잖아요. 말씀에 나오지요. 사실은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집착성을 까발리는 이야기에요. 반성하고 회개하고 특히 이 점. 제발 남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사과하게 되게 되면 자신의 의가 그만큼 사과한 만큼 증감해요. 타인에게 이용해서 내 의로움을 챙기는 방법은 남에게 두 번 세 번 사과하는 방법이에요. 사과는 지나간 거예요. 사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때는 미안했는데, 지금은 안 미안해.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 사과하라하면 사과하지요. 자기의 의로움은 점점 더 하늘같이 높아지는 거예요. ‘아, 내가 남한테 사과할 정도로 겸손하구나!’ 이리 되어버린다고요.
누가 와서 “사과해. 미안하다고 해.” 해줘버리세요. 그거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왜 진심은 없어.” “진심을 다해서 미안합니다.” 까짓거 원하는 대로 다해줘. 다해줘요. 인간은 누구하고 싸우기 때문에. 자기의 종말과 싸우거든요. 내가 의로워야 아직까지는 종말까지는 내가 이를 때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리 되거든요.
그러니까 사과를 하게 되면 종말을 자꾸 지연시키게 돼가지고 힘들어요. “니 같이 사과하는 건 지금 당장 죽어버려!” “내가 바로 원했던 바야. 내가 원했던 거야. 그게.”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산만큼 사람이 힘들어요. 살아있는 만큼. 살아있는 만큼 이것 저것 챙길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김장 더 해야 되고.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요. 살아있는 게. 굴을 넣는가, 갈치를 넣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게 왜 그런 고민을 하느냐 하면 내가 안 죽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는 거예요.
왜 살게 하시는가, 바닥을 드러내야 죽이지요. 우리의 바닥을. 아직 바닥이 덜 나왔어요. 매일 돌아서면 주께 감사고 영광돌리는데 그게 바닥입니까? 인간은 사과하고 반성하고 주님께 회개하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어떤 뭐가 있느냐, 인간은 오직 그것밖에 없어요. 가능성. 인간 가능성이에요. 인간의 존재는 가능성이에요. 존재=가능성. 가능성의 덩어리가 존재에요. 아직도 나에게 배 열두척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전에는 20척인데 12척이 남아있는 것.
그래서 자기의 가능성을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지가 잘 할 수 있는 거 취미생활을 합니다. 취미생활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감을, 존재감은 가능성이니까. 나는 돈은 못 벌어도 팔씨름 하나는 잘한다. 팔씨름. 팔씨름할 때 보면 상대방의 팔을 잡고 같이 힘을 겨루는 거잖아요. 팔씨름 하는 것이 손이 미끄러워서 힘주다 빠졌다. 그러면 끈으로 묶어요. 그걸 스트랩 매치이라 합니다. 요 근래 TV보고 처음 알았어요. 1억걸고 팔씨름하거든요. 스트랩 매치해가지고 끈으로 묶어가지고 공동운명체에요. 빼도 빠지지를 못해요. 그 시합에 둘이 강제로 빠져버렸어요. 시합에 사로잡힌 바 된 거예요. 거기서 나오던지, 풀던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이게 뭐냐, 이게 선택이고, 이게 예정선택이고, 이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니는 니하고 나하고 스트랩 매치. 끈으로 묶어가지고 사랑으로 야곱을 사랑으로 진짜 이스라엘을 꽁꽁 묶었다는 것이 레위언약입니다. 레위언약으로 꽁꽁 묶었어요. 레위언약으로. 사랑이에요. 인간은 범죄한 인간의 본심은 뭐냐,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사는 거예요.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사는 거예요. 이게 느브갓네살이에요. 모든 것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거죠. 자기중심. 이게 뭐냐 하면 자칭 신으로 사는 거예요. 자기가 신이 될 때까지 자기 욕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만족이라 하는 것은 향유, 희열 또는 자기가 신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미흡함을 느껴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뭡니까? 끈으로 언약으로 자기를 묶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의 밧줄로 나를 꽁꽁 묶어라, 하는 노래에요.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범죄 했으니까 뭘 느끼느냐 하면 답답함. 내 존재의 답답함으로 느껴질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본성이 모든 선지자를 다 거부하잖아요. 그 선지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서기 때문에 선지자 앞에 서 있는 모든 인간은 선지자를 필히 배척할 수밖에 없어요.
미가야 선지자는 400:1로 붙었고, 엘리야 선지자는 850:1로 붙었어요. 숫자는 간단하게 써요. 850:1 숫자는 간단하잖아요. 그걸 점으로 찍어봅시다. 학교 운동장해가지고 여기에 850개 점을 찍어가지고 포위시켜볼게요. 시간관계상 다 못하지만 하나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고 이건 무시대상이지요. 850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확률이 몇퍼센트에요? 0.0011%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세상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어요. 우리가. 수요일도 이야기했지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묵시를 최고로 해봐야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새벽에 지 혼자 지껄이고 있는 버스 정류장 안내양, 401번 버스가 전 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뭐 듣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냥 외치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외친다는 것은 말로 하는 것도 있지만 모든 행위가 외침이에요. 복음의 외침으로서 행동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어서 오세요. 이렇게 하는 모든 행위가, 설거지하는 모든 행위가, 복음의 외침으로서 설거지나 행동 또는 애들 세탁하는 행동 모든 행위가 주께서 외치게 만드는 거예요. 백날 해봐야 소용없는 이 세대 속에 하나의 롯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욥처럼 살아가고, 룻처럼 살아가고. 아무도 이해 못해요. 이걸 제목으로 삼고 싶어요. 좀 길지만. 제목으로 삼을 건 아니지만. 기니까. ‘점점 미쳐간다.’ 거기에 문자 하나 넣으세요. ㅎㅎ 내가 생각해도 점점 미쳐간다. 그런데 신난다. 이중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의 경험했던 체험을 본의 아니게 그걸 같이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예정론. 예정했다는 것은 시선이 오는 세대에 오는 분이 선택한 거예요. 이 세대에서 내가 미리 생각했던 선택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면 구원받고 고맙겠습니다. 저를 선택해주세요.” 그 선택은 오는 세대하고는 인간들이 고안해 낸 신이 자비로 우리를 선택할 때 선택이 그건 가짜 선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진짜 선택은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숨이 막히는 그것을 아가서에 보면 그걸 사랑으로 했어요.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남자가 오른손에다가 여자를 이렇게 안았거든요. 헤드락에 들어가보세요. 락. 꽉 조는 것. 옛날에 허재라는 감독이 블록이라는 말을 못해가지고 불낙이라 해가지고 유명하거든요. “이게 불낙이야?” 블록이라는 말을 불낙이라고. 락. 조는 거예요. 오른손으로 조을 때는 빠져나오지 말라고 꽉 조는 거예요. 그이가 나를 오른손으로 꽉 조였다. 나는 거기서 못 빠져나오게 된 이 상태를 너무 감사하다.
이건 세상에서는 뭡니까. 점점 더 멀어져가네. 미쳐가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내가 미쳤는데 무엇에 미쳤는가, 주님의 사랑에 미쳐버렸다. 어느 정도냐,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미쳐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자랑을 못해가지고 환장하거든요. 신은 자랑거리중에 최고의 자랑거리가 신인데, 그쪽 방향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나로 하여금 천국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내가 아무리 중력을 거스려 지옥가려고 애써도 운동장 자체가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체가 기울졌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천국가는 방향으로 쏟아지게 만드는 행위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어떤 짓을 해도. 이재명이 욕해도 천국가는 거고, 윤석열 욕해도 그게 천국가는 길이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바로 사랑은 “나를 사랑해줘” 이게 아니고, 꽉 조여버리는 거예요. 못 빠져나오는 것. 내가 에서는 지 마음대로 하도록 사랑안에 안 들어갔으니까. 그냥 내버려 뒀지만, 나는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꽉 조였다. 2절에 봅시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 자, 이것이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레위언약을 살리는 것. 레위언약을 완성하는 것이 말라기 선지자의 주제입니다. 할 때, 언약은 한 쪽 축복만 이야기 하는 언약이 아니고, 반드시 뭐를 대동하느냐, 저주를 대동하는 거예요. 저주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버려야 돼요. 모든 아담에 속한 자를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한 분만 건지는 거예요. 버림받을 때, 주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이름을 가져온다고요. 이름이 뭡니까? 예수지요. 이름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은 평범한 모든 인간의 이름들과 동등한 이름이에요. 이름 중에서 누구 이름만 높였다? 예수님 이름만 택해서 사랑해 버리면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로 올려버리면 자동적으로 나머지 이름 가진 모든 자들은 버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 선택에 시발점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내 이름을 선택하는 게 선택의 시작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내 이름은 선택됩니까? 안 됩니까? 내 이름은 선택되지 않았어요. 저주받아요. 반드시 축복은 저주를 동반하니까 저주받아요. 저주받는 내 이름을 축복받는 예수 이름으로 살게 만드는 게 이것이 예정 선택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기도할 때만 주의 이름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잠자든지 아니면 뭐 화장실에서 변을 보는 것까지 모든 것이 다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배가 꾸르륵 아프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입이 텁텁할 때는 사탕을 잡숩도록 주의 이름께서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니가 너를 선택하지 말라. 범사에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게 하나도 없느니라.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버릴 게 없다는 말은 니 인생 니가 꾸려나가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안 만나고 결정할 그건 없고, 하나님께서 계획은 우리가 할지라도 잠언서16장1절,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숙하게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거 있잖아요. 하나님은 목자시니 우리는 그의 양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23편1절에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거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찾아봅시다. 시편23편. 사실인가.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자기 이름. 우리 이름이 아니고 이 말은 뭐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이름을 폐기처분시키기 위해서 인도한다.
내 이름이 폐기 됐다는 말은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나의 저축해놓은 의. 나의 자존감도 같이 폐기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품성을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상태에서 자진해서 자기 이름과 자기 의를 포기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건 불가능성인 거예요.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치매에 걸리나 안 걸리나 이건 불가능한 거예요. 이건. 치매에 걸려서부터 난 딴소리해서 지옥 간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애초부터 치매 안 걸린 부터도 이미 우리를 치매 걸린 걸로 간주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줘버리거든요. 치매 걸리나 안 걸리나 이미 환자에요. 차이 별로 안 나요.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준 것은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버리기 위함입니다. 버릴 때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버리는 이유를 낱낱이 끄집어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멈추지 말라. 니가 버림 받는 것 니가 멈추지 말라. 너의 종말은 이미 정해졌어요. 그건 말씀이 우리보다 발걸음이 빨라요. 어떤 사람은 같이 가는데 성질이 급해서 빨리 가는 사람이 있지요. 여러분 가까이 가는 사람은 알아요. 혼자 바쁘게 지 생각만 해가지고 앞에 죽 죽 가는 사람이 있어요. 로케트처럼 가는 사람. 수근둥해가지고 땀 뻘뻘 흘리며 가는 사람 있잖아요. 가봤자 나중에 같이 만나잖아요.
우리는 어떤 것도 우리의 본성의 행위를 강제해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멈추는 존재가 아닙니다. 뭐라도 해요. 뭐라도. 백수가 돼서 누워 있어도 그 누워있는 것도 일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또 뭐하며 떼울까. 이것만 생각하거든요. 그것마저 주께서 우리의 종말을 우리가 느끼도록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우리가 질책을 당하고, 사과 회개 반성마저 주께서는 하지 마라, 나 안 들을란다. 해버립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말씀 안에 계신 분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로 등장합니다. 이 언약을 완성하시는 분이 진정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버려지면서 그 이스라엘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레위기4장에서는 선지자니까 엘리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장차 엘리야가 올 터이다. 왜 엘리야로 했을까요? 엘리야가 죽을 때 시체로 이 세상에 누워있는 상태였어요? 아니면 이 땅에 시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시체가 없지요.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할 때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잖아요. 더 제대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를 깊이 있게 내용을 제공해 줄 수 있어요. 빈 무덤이다. 빈 무덤으로 해야 죽었다는 것이 분명해지지요. 무덤은 죽은 거지요. 죽은 자만 가지요. 죽었는데 비어있다. 뭐냐, 죽었는데 비어있으니까 빈 무덤을 주께서는 계속 부활의 표현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는 죽음과는 질이 다른 죽음이 계속 살아있어요. 죽음이 살아있어야 그 죽을 때 나온 피, 그 살점, 피살점이 살아있어 줘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에로 가는 죄사함의 능력이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죽음에서 죄사함이 나와요. 주님의 죽음이 모든 언약의 레위언약이든, 다윗언약이든, 모든 죽음에 완성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새언약이라 해요.
예수님이 살아서 설치는 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꼭 죽으셔야 돼요. 이 잔을 마시고 죽어야 돼요. 그건 독약입니다. 독약 마시고 죽어야 돼요. 우리가 지은 죄가 독이에요. 우리는 독가지고 살려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독은 위험한 것이라고 몸소 시범을 보인 겁니다. “봐! 내가 너희들이 하는 그 귀한 그것을 내가 마시니까 봐! 아버지가 나를 버렸잖아. 너희들도 이렇게 나처럼 버림받는 거야.” 그걸 십자가 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확인해야 되지요. ‘아, 내가 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행위구나!’ 그런데 우리가 그 행위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어요.
내가 죽는 거 외에는 이 땅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에 전부다 취업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애부터 이미 취직한 거예요. 별 수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 죽는 일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어요. 9.5까지 아침 9시부터 저녁5시까지 퇴근 시간까지 나를 죽이는 일에 열심히 종사합니다. 죽기 위해서 그렇게 골머리를 앓지요. 실적 올리고.
그러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을 뭐로 봅니까? 에돔으로 보고, 지금 에돔이야기를 끄집어낸 거예요. 너희들은 말은 이스라엘이지만, 사실은 에돔이 하는 짓거리를 한다. 에돔이 무슨 짓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헐었던 것을 다시 쌓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방법으로. 쌓으려고 하는 그것이 뭐냐, 8절에 보면, 희생제물을 드리는데 그럼 어떻게 하는가, 흠 있는 것, 흉한 것, 병든 것, 1장13절. 이런 것을 드리는 거예요. 구색 맞추는 겁니다. 이 심보를 한 번 보세요.
레위언약이 뭐냐 하면 제사 드리는 거예요. 제사 드리는 것. 제사드릴 때, 지금 일반 불신자들이 제삿날 있잖아요. 제삿날. 제삿날 무슨 음식 드릴까요? 물어보고 드립니까? 아니면 저희들이 알아서 드리는 거예요. 제사를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귀신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잘난 본인에게 절하는 게 제삿날이에요. 평소에 술 먹고 온갖 짓 다해놓고는 그 날만큼은 술 반짝하고 동네 목욕탕 갔다와서 12시에 갔다와가지고 그 날 만큼은 한복 두루마기 떡 해가지고 온 폼은 다 내세우고요, 평소에는 깐쪽거리다가 그날만은 점잖게 목소리 깔아앉아가지고 댕~ 댕~ 12시까지 못 자게 만들고, 못 자게 하는 것은 12시까지 텔레비켜놓고 그날만큼 제사장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호기심 많은, 뭔가 호기심 많은 어느 아는 뒤에 뭐가 있는가 싶어서 가보고 조상님이 있다 하니까 진짜 조상님이 있는가하여 눈으로 목격하려고 들어가 보고, 노골적으로 제사드리고 있는데, 없네! 눈치코치도 없이. 여자는 저 서있고, 장손 이리 와! 장손은 벌써 백수된지 5년됐는데 그 때는 또 장손이 옷입고 와가지고 술해가지고 돌리고. 음복해라. 오늘 만큼은 술 허용한다. 마시고. 향피우고. 향 피워놓고 앉아서 평소에 듣도 못한 기도도 못하면서 중얼중얼... 중얼중얼하면서 다 들리게 하는 거예요.
우리자식하고 그저 말 잘 듣고 다 취직하고 우리 딸래미 35살인데 보내시고..., 아버지 기도 끝나면 잔 올리려하는데. 조용히 해라! 내가 지금 기도하는데. 쓸데없이 어디 여편네가 잔소리하느냐. 치워. 다른 아들은 저 배 깍은 거 누가 먼저 먹나. 저 밤 깍아놓은 거 좋아하는데. 제사를 지금 누구한테 폼내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폼 다 내는 거예요.
숨겨진 자기의 심성을 다 제사라는 그 찬스를 해가지고 드러내는. 권위를 유지하는 방법이 일년에 제사8번 드리는 거예요. 3대까지, 4대까지 다 끄집어내가지고. 맏이는 별로 수입도 없는 맏이는 그날 만큼은 둘째, 셋째한테 봉투 가져오라고 전화해가지고 참석 안하거든 돈이라도 빨리 계좌번호 다 불러내서 목돈 챙겨가지고 남은 제사까지 용돈 쓰고. 아버지 내가 모신다. 아버지 없는데. 아버지 소원이었다. 지 소원이었겠지. 지 소원. 보험금 지가 다 뺏어가지고. 보람상조까지 다 걷어내고요. 보람상조 한오십만원하는데 백만원 받아서 오십만원 지가 쓰고.
뭐냐, 내가 이렇게 행했지않습니까. 주님. 바쁜대도 이렇게 믿어주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부정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괜찮은 자기 의로운 행위만 자기가 기억해요. 자기 자존감 때문에. 인간은 말라기를 통해서 왜 우리가 이미 멸망했어야 되는가를 확인하는 책이 말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동시에 우리가 왜 예수님이 될 수 없고, 메시아가 될 수 없고 우리 행함으로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면서 낱낱이 밝혀지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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