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혁명
2022년 12월 4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5:3-16
(5:3)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5: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5: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5: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5: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5: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5: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눈에 보이는 계시’로 하나님께서 과부를 생산해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부란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된 과부를 말하고 자녀가 있는 과부를 말합니다. 이들은 그 사회 내에서 경제적 재립도가 현저하게 낮은 자를 말합니다. 남편이 멀쩡하게 있을 때에는 주부들이나 자식들이 든든한 남편과 아버지를 믿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졸지가 경제적 주체가 되는 그 가장이 죽게 되면 그 가정은 아무런 대책이 없게 됩니다. 살아남은 부인이나 자식은 앞으로 살길이 막막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 박살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과부 앞에 ‘불쌍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입니다. ‘불쌍한 과부’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나는 그 어떤 경우라도 그렇지 되지 말아야 해’라는 다짐 같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즉 절대로 내가 되고 싶지 않는 사태가 일어난 자들이 주변에서 등장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주십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과부 안에 하나님의 본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출현은 하나님의 본심이 실증적으로 드러난 일입니다. ‘홀로 된 과부’는 외로울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고아와 과부요 나그네이요 레위인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은 같은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엮습니다.
신명기 14:28-29에 보면,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레위지파 이외의 나머지 12지파 사람들은 그들의 생존여부가 땅없는 레위지파의 활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원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땅 없는’민족입니다. ‘땅 없는 민족’을 통해서 기존의 땅 위에 사는 민족들이 땅의 본래의 취지를 모르는채 살아가는 저주받을 민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시려는 겁니다.
세상 민족들은 땅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노동력을 그 땅에 집약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수확물로서 그들은 생존이 마땅히 가능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애굽 땅에서 건져주심’이라는 출애굽의 취지는 그들에게는 소용없는 바가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런 성향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초기에 애굽 땅에서 종이었고 과부신세였고 나그네 신세였음을 잊지 않나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존재 가치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사에 종사하는 레위지파에게는 소유성을 가질만한 땅을 갖지 않게 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장을 죽여서 졸지에 과부가 되고 나그네된 신세가 된 자들이 생기는 현상을 유발하셨습니다.
가진 게 없고 방어할 능력 없고 무지하다는 이유 때문에 소위 힘세고 가진 자들에게 대책없이 노출된 겁니다. 사람이 가진게 없으면 아부하고 의존하고 복종하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하니까요. 그럴 때 과부들은 가진 자들의 밥이 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건드린 바가 됩니다.
그들은 과부 속에서 ‘희생’을 발견해야 합니다. 희생을 모르는 자는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혼인은 각자 독립성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만남입니다. 국가적으로 이들 가정을 보호하는 이유는 국가 발전에 있어 자녀 생산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가정을 보호합니다. 결혼은 쉽지만 이혼을 어렵게 합니다. 하지만 이 법 속에서 힘의 소유와 번창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희생의 취지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명기 24:19-22의 정신은 들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즉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 것으로 인해 도리어 내가 살림을 당한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깨서는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레위, 고아, 나그네, 과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부부는 독립자라고 자처하기에 끝까지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2자(者)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적 차원에서 부부는 2자관계가 아니라 3자관계입니다.“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눈에 보이는 두 남녀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선한 사이가 부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부부에 관계에서, 전쟁이나 혹은 질병에 의해서 가장되는 자를 중도에 죽이게 하면 비로소 보이지 않는 분의 자신의 뜻과 취지를 위하여 자신의 가정을 사용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과부는 천국이라는 영화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캐스팅 된 연기자이고 천국을 건설하는 노동자가 됩니다.
비록 그들의 생애가 힘들고 아파도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미리 마련되어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오늘날의 모든 성도가 다 과부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극히 주님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부의 혁명입니다.
“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9-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추구는 애초부터 믿음을 배신한 것이고 살았으나 실은 죽은 자의 고백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디모데전서 5장 3-16절(과부의 혁명)22120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5장 3-1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5:3-16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과부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나와 있는 것은 인간의 본래 표준, 표준적인 성도의 삶이 과부, 참과부……, 과부도 두 종류가 있는데 거짓 과부가 있고 참과부가 있어요. 참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그게 제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과부에 대한 세상적인 평가는 뭐냐? 인생 작살났다는 거지요. 인생 망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짜지? 어떡하나?’ 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분 째지고 아주 기분 되게 좋지요. ‘주여, 감사합니다. 나는 과부되지 않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 과부와 같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손가락질하고 그렇게 하는 대상이 이 과부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라는 사태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과부된 자들,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이스라엘 내에 또 신약에도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생산케 했습니다. 애가 없는 과부가 아니라 애가 있는 채로, 가정의 기둥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는데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터에 나가서 하나님께서 전사케 해버려요.
전사케 해버리면 죽은 자는 이미 죽었으니 그것으로 자기 인생은 끝난 것이고, 그런데 남아 있는 가족은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애까지 있는데. 아버지의 노동력으로 키워왔던 가정에서 그 노동력의 중심이 되는 분이 빠져버리면 나머지는 가사노동만 하다가 남편의 힘에 의존하던 의존적인 가족만 달랑 남은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 땅에 있는 계시의 현장이 되겠습니다. 가장의 상실, 그 뿌리, 그 가정의 존재의 뿌리가 빠져버렸지요. 뿌리가 빠져버리면 그 삶의 한가운데 빈공간이 생기고요, 그 빈공간이 형성된 거지요.
이런 과부 가정, 완전히 박살 난 가정, 이 가정들을 왜 하나님께서 계시 차원으로 계속해서 군데군데 일으키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의 바탕이 근원적으로 교체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대표적인 구약의 이야기가 바로 룻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끝나고 룻기가 나오는데 룻기 1장 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1절에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흉년든 유다에서 흉년 없는 모압 땅으로 이주를 했다가 3절에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런데 4절 끝부분부터 5절에 보면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졸지에 세 사람의 과부가 달랑 남은 거예요. 이 세 명의 과부는 서로 하나의 가족입니다. 가족이라서 아무런 대책이 없지요.
하나님이 일으킨 과부의 특징이 뭐냐?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대책 없다는 이것이, 원래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든지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이 땅에서 대책 없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게 합당한 거예요. 스스로 자기 인생을 일궈나갈 대책이 있다면 이것은 가짜 인생입니다. 거짓된 인생이에요.
왜냐하면 더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탕을 자기의 능력으로 덮어버렸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해봐야 전부 다 거짓된 거고요, 거짓된 하나님이고, 진짜 그대로, 하나님 자체를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전부 박탈된 상태, 그것은 내 힘으로 내 인생 살아갈 수 있는 여력 있는 사람들, 그런 가정, 이것은 진짜 참 과부가 아니고, 참과부가 아닌 것은 참 인간도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룻기의 이 나오미 가정은 나중에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나라의 노선을 근원적으로 변경시킵니다. 레위 지파 중심에서 유다 지파 중심으로 노선을 변경시킵니다. 내비게이션에 의해서 노선 바꾸는 거지요. 노선을 바꾸어야 그 이스라엘은 하늘나라와 연관성 있는 나라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대책이 없고 이 땅에 의지할 것 없다는 그 요소가 하늘나라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장차 이 땅에 하늘나라를 짊어지고 오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뭐가 되느냐 하면,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레위 지파가 되는 겁니다. 신명기 14장 28, 29절에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기업 없는 레위인이 나오고, 그다음에 나오는 나그네, 나그네가 객(客)이지요, 객, 고아, 과부, 이렇게 언급할 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벌인 전쟁의 여파의 소산물이라는 것을 미리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기 땅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일으킨 의도적인 전쟁에 의해서 자기 아버지가, 자기 남편이 전사했어요. 전사하고 난 뒤에 땅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서 땅이 날아가 버렸어요.
물론 땅 빼앗기는 것도 있지만 땅이 있어도 노동력을 제공 못 하니까 빚이 증가했고, 자기 남편 땅을 팔아서라도 자식은 먹여 살려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땅은 남의 이름으로 넘어가게 되도록 사회가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땅이 있어도 땅이 없이 되고 결국은 다른 동네에 가면 그것은 나그네 취급 받고 그리고 그 신세가 어떤 신세와 동일하냐 하면, 레위인의 특징과 같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한다는 조건하에 밥 먹고 살게 되어 있는 것이 레위인입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늘어나면서 이만한 소유 같으면 굳이 하나님 찾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자만감이 있어서 그다음부터는 각 지파들이 레위 지파 하나 살리기 위한 십일조를 내지를 않았어요. 십일조 거의 낸 적이 없습니다.
자기 새끼 있고 자기 가족이 있는데 그 돈을, 그 막대한 돈을 남 살라고 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도 어려울 때 하나님이지 지금 여유만만인데 하나님을 악착같이 찾을 이유가 없지 아니하냐’ 이게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그러니까 신세가 동일한 신세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있고 율법은 있는데 거기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도외시해버리니까 거기에 대한 그 결과의 부정적인 부산물로 나온 게 뭐냐? 레위인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모세에게 당부한 게 있습니다. “내가 너희들 애굽에서 나오게 할 때 너희들이 땅 없는 민족인 줄 알잖아. 너희는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었어. 따라서 그 출애굽이라는 취지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의도적으로 너희 주변에 고아와 과부와 객을 그리고 땅없는 사람을 만들어낼”(출 22:21-24) 거라는 거예요.
그 방법이 뭐냐? 전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전사케 해버리는 거예요. 아무 죄도 없는데 전쟁하다 죽었어요.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에 있어서 칼 맞고 창 맞아 죽은 겁니다. 그럴 때 그 나머지 가족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출애굽 하게 했던 그 취지를 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 주변에, 넉넉한 그들 주변에 이렇게 땅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그러한 가족들을 배당을 하고 배치를 한 겁니다.
그래놓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만약에 주변에 있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를 해롭게 한다면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서 옛날 너희가 출애굽 당시에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심이다.” 이렇게 합니다.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그 말이에요 시편에 한두 군데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고아와 과부를 어떻게 하느냐? 빌어먹게 하는 거예요. 레위인들을. 빌어먹게 하는 그게 뭐냐? 십일조라는 겁니다. 10분의 1,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그들이 십일조를 내다는 것이 아니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하나님의 약속 앞에 있는 전형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진짜 필연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인정을 하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그들을 부러워하고 본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이 좀 여유 좀 있어? 집에 돈푼이나 있어? 그것은 레위인들이 제사한 것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네가 빌어먹은 것이고 네가 얻어먹고 산 거라.”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일조는, 하나님이 주신 10 전체가 나를 경유할 때 “이것은 내 노동의 덕분이 아니고 내 실력의 성과가 아닙니다. 나도 그들 고아와 과부처럼 빌어먹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10을 줬기에 1 정도는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내놓는데 그 내놓은 몫이 뭐냐? 하나님의 율법을 압축하고 응축한 실제 생활상들을 실감 있게 보여주는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들에게 주는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 취지가 살아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빌어먹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면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이것은 너희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로마서 4장에 그 내용이 나오지요. 15절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3장에도 그 이야기가 나오고요. 19,20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네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우리가 펴는 성경책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오늘 본문 데모데전서 5장 6절에도 같은 뜻으로 나와 있지요.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그래서 “참과부와 다른 과부와 달리 인생 즐기기 좋아하는 그런 과부는 너희들 눈에 보기에 살아 있어 보이지? 사실은 그건 죽은 것이야. 특히 자기 새끼를 버린 그런 과부는 자기 즐기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새끼 버린 자식은 이것은 불신자보다 더 못하다.” 했어요.
8절에 그리고 11, 12절에 보면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시집가는 것이 믿음을 저버린 짓이 되고 이것은 심판받는다. 이것은 내가 내 인생 박살 난 것이 하나님의 계시 차원이라면 그렇게 박살 난 인생을 귀하게 여기라 그 말이거든요.
아, 인간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네 박살 난 인생 자체가 계시인데 만약에 그 계시를 버린 자는 12절에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이것은 믿음을 저버렸다, 저주받았다, 지옥 갈 날만 남아 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젊은 과부는 몇 살까지가 젊은 과부냐? 9절에 보니 그것도 나와 있어요.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50대까지는 아직도 젊은 과부에 속합니다. 기분이 갑자기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자꾸 초대교회 때 과부의 명부라는 것이 필요하냐?
사도행전 6장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이렇게 해서 사회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남편을 상실한 여자를 계시 차원에서 살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성은 약하잖아요. 약한데 대책은 없어요. 옛날에는 산업구조가 농경시대였어요. 땅 없으면 그것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땅 이름이 남성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이 죽으면 사실은 그 땅이 여성이 갖고 있을 수도 없어요. 사기꾼 한 백 명이 달려들지요. 키워줄 게, 이자 많이 받게 해줄 게, 이래서 다 날아가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 입장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된 과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시 차원에서 보호를 해줬는데 이게 또 헬라파, 히브리파, 해가지고 분쟁이 일어나네요. 히브리파 과부들은 보조금 주면서 헬라파 과부들에게는 보조금을 잘 안 준 겁니다. 그것 때문에 불평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런 것 때문에 행정적 절차가 골치 아파서 “이것은 집사들이 해라.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지 이런 일까지 하나님의 계시 전하는 제자가 해야겠느냐?” 그래서 생긴 것이 일곱 집사였던 겁니다. 그런데 일곱 집사를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자중에서 일곱 집사에요.
그 일곱 집사 중 유명한 하나가 뭐냐 하면, 스데반 집사고 또 하나의 집사는 바로 빌립집사에요. 화천대유인가 뭐 그런 것과 상관없어요. 회사나 재벌 집 집사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차원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과부는 뭐냐 하면, 천국을 보여주는 연기자들이고 천국 건설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을 손댄다?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다? 그들을 탐낸다? 이런 것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이것이 홀아비가 아니고 과부냐?
그것은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서 제가 말씀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성을 통해서, 구원의 계시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을 통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어떤 여성이냐? 남편 없는, 남자가 없는 여성이에요.
남자가 없는 여성이라는 것은 이미 뱀이 장악한 이 세상에서는 이것은 죽은 거예요. 여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남성에게 종속되고 의존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그 남성을 제거해 버리니까 존재의 뿌리가 완전히 박탈당한 거지요. 결여된 것,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산 게 아니고 이 땅에서는 완전히 죽은 목숨입니다. 죽은 목숨을 하나님께서 계시가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뭐냐? 그중 하나가 남자 있을 때 아기를 낳아버린 거예요. 여자가 아기를 낳고부터는 뭘 느끼느냐? 희생이라는 것, 아기를 가지고 낳는 고통 속에서 희생,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는 방법은 바로 핵심은 희생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여자 쪽에서 먼저 캐치를 하게 된 거예요.
귀한 집 자식이 타인의 희생에 의해서만 살다 보면 희생을 받는 데만 익숙해졌고 본인이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이것은 근원적으로 생각을 못 해요. 맘씨가 나빠서가 아니라 몸에 채워져 있는 본성 자체가 외부에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성이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특히 아기를 낳는 여성의 입장에서 그걸 미리 캐치를 할 수 있는 그것은 여성이 이 땅에서, 이 저주받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종속적이고 의존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생각해야 돼요. 여자의 후손이 바로 악마와 싸운다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 남성, 빠졌습니다. 남성에 의지할 필요 없는 여성이 뱀을 발견한다는 겁니다. 여성 안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투과되어 나오고 그 여성, 하찮게 보이는 여성, 불쌍한 여성, 가진 것 없는 여성, 인생 박살 난 여성의 그 시선 안에서 주님의 시선이 거기서 방사되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남성들은 모르는 겁니다. 손흥민이가……, 월드컵 축구 이야기 안 하려다가, 손흥민이 포르투갈하고 축구하면서 마스크를 썼잖아요. 손흥민이 마스크를 썼다는 것은 남들 보기에는 그 마스크에 의해서 손흥민 시야가 좁아져서 제 기능을 발휘 못 한다, 도 되지만 그것은 뭘 모르고 있느냐? 상대방 수비수들이 손흥민의 시선을 읽을 수가 없다는 뜻도 돼요.
시선 하나 만들기 위해서 온 안면 근육이 다 관여하고 있는데 그 위쪽의 반이 가려졌어요. 수비수 일곱 명이 손흥민을 포위했을 때 손흥민 시선을 캐치를 못하기 때문에 손흥민이 저쪽 보는 듯이 하면서 다리 사이로 볼을 패스해서 황희찬이 슛 골인이 되었어요.
과부의 시선, 나는 그런 인생 안되어서 너무 족합니다, 한 그것이, 그것이 바로 인간 본인이 본인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인간에게 주님은 내가 절대로 원치 않는 인생인 거예요. 그 모습이. 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희생 모릅니다. 어떻게 희생을 하든 나는 그건 모르겠고, 모르겠고, 나는 나의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거예요. 행복 추구하기에 힘만 모으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5장과 유사한 이야기를 이미 고린도전서에서도 했었어요. 고린도전서 7장 34절에 보게 되면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여자로서 시집간 게 불행의 늪에 빠졌다는 겁니다. 7장 38절에 보면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딸 시집 보내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다. 말씀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인간은 지킬 수가 없어요. 지킬 수 없는 말만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은 손흥민이거든요. 마스크로 가려서 주님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는지 이쪽 주님처럼 되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주님의 시선을 캐치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게! 주님은 알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율법을 보내신 것은, 율법이 인간을 죽게 만들어요. 죽음의 율법이지요.
죽음의 율법이 인간세계 전부를 덮었다는 것은 마치 미처 마르지 않은 시멘트로서 이 세상을 위에서 그냥 한꺼번에 와르르, 레미콘을 총동원해서 퍼부은 거예요. 퍼부으니까 아직 마르지 않은 액체 같은 시멘트 안에서 인간은 살아보려고 몸부림치지요. 몸부림치는데 이 시멘트가 점점 굳어져 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저주 아래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그런 처지에 있지요. 인간은 거기서 허우적대봐야 말짱 소용없습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실존, 박살 난 처지, 망가진 인생, 이게 과부에요. 이게 하나님의 의도한 과부입니다. 그 계시를 놓치면 안 되지요.
사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께서도 그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5,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나님이 율법적으로 원하는 몸은 이것이 헤어지지를 못해요.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몸이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결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언약적으로 성립하는 이런 몸은요, 이 세상에 그런 몸이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결혼법은 뭐냐? 그것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운 법에 의한 결혼이에요. 국가라 하는 것은 영토, 주권, 국민, 3요소로 되어 있는데 특히 국민, 영토보다 주권보다 국민이 더 중요하지요. 국민이 되려면 가정을 지켜줘야 되니까 국가의 법은 강제로 가정을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을 보호하는 이유는 이게 억지로 둘이 붙어 살게 만드는 거예요, 억지로. 무슨 뜻이냐 하면, 현대국가에 있어서 국가성립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인 배경이 먼저 자리잡고 있어요. 그 배경이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자본주의국가에서는 돈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선택권도 없어요.
누구 여자를 고른다든지 누구 남자를 고를 자격조차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돈 없는 주제에 결혼을 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 보거든 위험한 사람이라 보시면 됩니다. 경제적인 자립이 되지 아니하면 결혼이 불가합니다. 결혼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은 뭐냐?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두 사람이 계속 같이 동거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이것은 어불성설이에요. 그것은 말도 안 돼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두 독자적인 사람이 독자적인 자기 고집을 피우면서 같이 한집에 사는 거예요.
언제까지? 경제적인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를 간 볼 때까지. 그때까지만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언제든지 헤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강제로 비용을 지불하는 거예요. 비용을 지불해서 가정이 못 헤어지도록 해야 돼요.
왜냐하면 가정이 헤어져 버리면 자녀가 생산이 안 됩니다. 자녀 생산이 안 되면 국민 숫자가 줄어요. 국민 숫자가 줄면 영토, 주권, 국민, 이게 깨지면 나라가 망해요. 국가는 국가 자체를 위해서 법을 만들고, 국가법을 위해서 가정을 보호할 필요가 있고, 돈 못 번다고 여자를 학대하고 쫓아내 버리면 계속해서 자녀 생산과 및 양육이 안 되니까 그 비용을 국가가 대면 국가가 남의 가정 유지에 돈 대는데 복지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수출드라이브, 수출로 먹고 사는 국가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국가도 하나의 기업이니까 타 국가라는 기업과 경쟁해서 이윤을 창출하지 않으면 그 나라가 망합니다. 그래서 국민을 다른 말로 하면 산업의 역군이라고 해요. 산업의 역군, 노동자들이에요. 국가라는 회사를 일으키기 위한 노동자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자는 바깥에서 일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도와주고, 그렇게 해서 회사 하나 잘 꾸려나가야 우리가 밥 먹을 게 있다. 이게 현대국가의 구성이고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못 만들고 먹고 노는 백수들은 결혼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방지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국가가 놓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국가가 법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그겁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합리나 논리를 초과하는 게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내용물을 쪼개보면 그 안에 희생이 들어있어요.
여자가 자기 좋아하는 남자 붙들고 “결혼하자” 남자가 하는 말이 “나 백수인 것 알잖아.” 여자가 하는 말이 “내가 먹여줄게” 결혼 되는 거예요. 결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그 말 믿고 자기는 계속 노는 거예요. 나중에 여자가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여자가 스스로 자기에게 속아버렸어요.
어디에 속았느냐 하면, 아까 본 마태복음 19장 6절에 속은 거예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이걸 왜 너한테 적용을 시키느냐는 말이지요. 너는 그게 안 되는데! 이 말씀은 사람을 죽이는 말씀이에요. 이 말씀대로 행복한 가정 이루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이것은 어떤 인간도 이 땅에 살 권리나 가치가 없다는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으로 자기의 본래 의도하는 것, 행복한 가정, 이것에 자기가 일방적으로 잡아당긴 겁니다. 본인이 본인한테 속은 거지요. 교인들이 신천지에 속는 게 아니에요. 신천지에 간 사람들의 특징은 가든 안 가든 마찬가지지만 그 특징은 본인이 본인한테 속은 거예요.
그래서 이 유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국가가 법을 세울 때 어떻게 세웠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그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31, 32절에 보면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자기 순수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짝 지운 것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남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 남성들이 테스토스테론인가, 그 호르몬 때문에 들고 일어난 겁니다.
‘자식을 낳는데 한 여자하고는 더 이상 자식 못 낳겠다. 그러면 어떻게 낳느냐? 다른 여자하고 자식 낳겠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서 국가의 백성들이 많아져야 유대 나라가 힘을 키우고, 힘을 키워야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느냐?’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세 율법에 보니까 이혼하려면 이혼 증서 써주면 된다는 모세 율법이 있으니까 그 율법을 가지고 들어오는 거예요.
다시 제가 말씀드립니다. 율법이라 하는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네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율법이에요. 가짜가 손흥민 마스크 쓴 것도 모르고 자기가 수비하려고 하는 거예요. 포르투갈 수비수가 손흥민 본뜻을 자기가 알아? 모르잖아요.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파악이 안 돼.
인간은 희생 없는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과부는 천국 건설의 노동자들이거든요. 천국 건설은 희생 없이 되는 적이 없어요. 그래서 과부의 그 인생을 망가뜨린 거예요. 그러면 과부가 ‘스스로 과부 될래’ 스스로 과부 되는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간섭해서 박살 낸 거예요.
인생 더 이상 내 인생 아예 그런 생각은……, 내 인생이 어디 있어요? 내 인생, 망가진 인생도 내 인생입니까? 내 인생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안에 나의 행복을 보장해줘야 내 인생이에요. 사람이 일기 쓰는 이유는 아직도 행복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일기를 쓰는 겁니다. 미련 때문에.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는, 완전한 것이 자기 안에, 내부에 없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아직 최종적인 것이 내 안에 없기 때문에 늘 불안불안한 거예요. 불안불안한데 누가 건드리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진짜 내가 완료된, 완벽하게 다 마무리된 게 없기 때문에 누가 그걸 들통낼까봐 조마조마하다가 어떤 사태가 일어나니까 들통나버린 거예요. ‘네가 뭔데 내 흠집을 노출 시켜?’ 이것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네가 뭔데 내 흠집을 노출 시켜?’ 부부싸움도 그거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걸 뭘 로 이해하느냐? 하나님이 연출한 영화 하나 찍는데 그 영화 찍는 게 힘들어요. 영화배우들이 놀면서 찍는 게 아닙니다. 힘듭니다. 과부는 천국이라는 영화 한 편,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예수님이 연출하시고, 예수님이 완성시킨 천국이라는 그 작품 만드는데 연기자로서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외인과, 나그네, 종, 과부, 한마디로 말해서 대책 없는 인간들이에요. 그들이 천국 영화 찍는데 딱 적합하게 캐스팅 된 연기자들이에요.
사실은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출애굽 할 때 그런 취지가 유지가 되어줘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의 그런 취지를 유지를 못 하고 각자도생했어요. ‘내 것 내가 내 마음대로 쓰는데 네가 왜?’ 이런 조로 나갔던 겁니다. 그래서 레위인들도 십일조가 날아가 버렸지요. 없지요. 헌금을 안 해요. 헌금을 안 하니까 밥 먹을 길이 없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 19장에 보면 레위인들은 고집이 있어서, 비록 내 땅은 없어도 없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레위지파 중심, 우리 지파 중심으로서 너희들이 마땅히 우리에게 수입의 10분의 1을 우리에게 줘야 되는데 안주는 거예요. 하지만 레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라면 레위 지파 중심으로 재구성 되어야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9장 27절에서 3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레위인에게 첩이 있는데 그 첩이 어떤 지역에 갔다가 그 지역 불량자들에게 붙잡혔어요. 기브아라는 지역이죠. 그 지역에 유숙을 한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그네인 레위인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는데 그 동네 깡패들이 와서 행패를 부립니다.
그때 그 집주인이 우리 딸을 대신 내놓겠다, 하니까 거부하고 레위인이 자기 첩을 내주게 되는데 그 첩을 밤새도록 욕을 보였어요. 25절에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그렇게 해서 그 첩이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27, 28절에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레위인이 그 아내 보고 “여보! 갑시다.” 하니까 죽었어요. 그 동네 깡패들이 욕을 보인 그 여자가.
그래서 28, 29절에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베들레헴)에 돌아가서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다 택배로 보냈습니다. 이게 열두 토막 살인사건이에요.
이게 뭐냐? 레위 지파에게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재결합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묶는 하나의 본드가 되어야 돼요. 그 전체를. ‘레위인이 땅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바로 가진 것 없고 땅도 없는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을 보여주는 계시의 역할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 계시에 대해서 어떻게 대들었느냐?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무력하다는 것, 텃세지요, 이쪽 사람이 아니고 무력하다는, 홀로 있어서 아무 저항할 힘이 없다는 그 틈을 노려서 너희들이 가진 소유의 힘으로 내 인생을 박살 냈다.’는 거예요. ‘그 박살 낸 것에 대해서 진짜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너희들은 마땅히 저주받아야 마땅함,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너희들 열두 지파 골고루 다 할당받아라.’ 하고 보낸 겁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가 나중에 내전이 벌어지고요. 11대 1로 붙어서 처음에는 11이 져요. 정의가 불의한테 진다고요. 결국 달려들던 베냐민 지파가 날아가고,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전쟁이 끝났어요. 그러나 열두 지파가 되어야 할 이 나라가 열 한 지파가 되고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거든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뜻이고, 하나님과 무관하면 그들은 율법의 축복에서부터 혜택을 더 이상 입지 못한다.’라는, 하나님께 저주받고 버림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자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바로 그 시대가 사사시대에요.
이방여인 룻이 그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율법에 의해서 다시 율법을 살리는 하나의 계시의 움직임으로, 그 당시 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연기자로서 그 모압 여인 룻이 거기 개입하게 되는 겁니다.
모압 여인이 거기서 얻어먹고 사는데요, 얻어먹고 살면서 그들은 신명기 24장 19-21절 이 말씀을 사람들이 지키지를 않아요, 지키지를 않는데 하나님이 그 여자들, 세 명의 남편들 다 죽게 만들어서 이 신명기의 말씀이 확실하게, 그 현실 속에서 지키지도 않지만 말씀은 말씀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용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식으로 이끌고 있는 겁니다.
신명기 24장 19-22절에 보면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농사지을 때 야무지게 싹싹 다 긁어서 이것은 내 밭이니 다 내 거다, 하지 말고 십일조 주듯이 ‘아, 이것은 내 거 아니다. 내 소유 아니다.’라는 그 부분을 만들어라, 그 말입니다. 내 거 아닌 것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내 것 아닌 것 그것이 나머지 내 거라고 우겼던 그 과오를, 죄과를 용서하고 사해주는 희생물로 작용한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참 어렵지요.
자, 부부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부부는 마태복음 19장 6절에서 헤어지지 못 합니다. 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언약세계에서 그래요. 하나님의 약속세계에서 그러합니다. 약속세계가 그러하다는 말은, 어떤 인간의 결혼에도, 어떤 부부에도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명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과부를 통해서 이 땅에는 진정한 남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기 가진 과부, 해산함으로써 아기 가진 과부가 아기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오늘 본문 5장으로 돌아와 보면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그게 길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엄마 혼자 자식 키우거든 자식은 엄마에게 효도를 다 하게 하라는 그 대목이 나오잖아요. 이 말은 뭔 뜻이냐? 어제도 제가 누구 결혼식에 참석을 했습니다만, 또 까불고 촐랑대고 주례 없는 결혼식, 아, 주례도 없는 결혼식에서 까불어도 왜 저렇게 까부냐 그 말이지요. 저희끼리 파티하는데 부모들 초청한 것 밖에 안 돼요.
속으로 ‘너희는 가정이라는 늪에 빠졌어, 인간아! 둘 다!’ 가정이 늪입니다, 가정이! 말이 돼요? 자기 혼자 노는 즐거움에 빠진 인간이 가정을 꾸리고 결혼을 한다? 바랄 걸 바라야지, 그게 여러분 성립됩니까? 성립이 안 되지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구라를 쳐요. 가정을 위하여? 그 입을 매우 쳐라!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밖에 몰라요.
남 등쳐먹는 것으로 자기 행복을 취득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아내를 위해 살았다? 그 입을 매우 쳐라! 남자는 매우 쳐라! 여자가 ‘나는 남편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 입은 그냥 쳐라! 둘 다 거짓말쟁이! 이게 왜 거짓말로 들통나느냐 하면, 자식을 낳게 되면 끝납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부부가 2자(者) 관계에서 부부가 2자 관계가 아니고 3자 관계가 돼요. 하나님께서 한 몸 될 때는 반드시 3자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 가운데 누가 관여하느냐? 하나님이 관여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두 사람은 헤어지지 못한다. 왜 그들은 짝지어진 것,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위한 그들은 연기자로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못 헤어지는 거예요. 헤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결혼한다면 전부 다 3자 관계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2자 관계를 생각하는 거예요. 둘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건 뭐 믿음을 저버린 자요, 불신자지요. 여기 11절에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그 뒤에 제가 일부러 넣는다면 ‘시집가고자 환장해서’ 시집가고자 환장해서 다시 처음에 나의 행복을 되찾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계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완성 아니에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가다가 계속 나로 가겠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는 희생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진짜 과부의 처참하고 비참한 이런 인생을 왜 살게 하는가? 구원은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가운데서 구원받아요. 이 세상을 살면서 축하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 생기면서 남한테 축하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 자체가 예수님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축하받지 않았어요. 그러면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도 어느 누구로부터도 축하받지 못합니다. 인정받지 못해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우리 인생 왜 이리 힘듭니까?” 할 때 제가 그런 예를 들었어요.
학생이 선생님한테 벌 받으면서 의자 들고 있을 때 “선생님, 왜 팔이 이렇게 아픕니까?” “인간아, 그걸 벌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 인생은 벌 받는 중이에요. 부러워할 사람, 부러워할 인생이 없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여러분 자신에게 속습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처럼.
제가 몇 번을 봤어요. 손흥민 선수 시선이 가려져서 안 보이는 거예요. 그 전에 가나전에서는 심판도 속았어요. 김영권 수비수가 심판에게 “아직 안 끝났는데 왜 끝냅니까?” 하고 달려드는데 뒤에서 감독이 보니까 심판이 빨간 카드를 슥 내미는 거예요. 그걸 벤투 감독이 미리 알고 자기가 먼저 뛰어들어서 심판에게 달려들어 버리니까 선수한테 내밀 카드를 벤투 감독에게 내밀면서 너 퇴장이다, 해서 퇴장했지요.
그래서 포르투갈전에서 벤투 감독이 벤치에 있었거든요.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요. 이 땅을, 감독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라는 감독이 지켜보고 있어요. 내가 희생해서 한 연출, 이 축구에 너희들은 나의 희생을 생각해서 너희도 희생하라, 그 말이에요. 아예 망해버리라는 겁니다.
이미 성공이 보장된 자는 실패를 즐길 수가 있어요.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속 안에 완료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믿음 없습니다~, 나는 마귀에 속했습니다~, 하는 그 티를 내는 거예요. 화낸다는 그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캐스팅된 연기자라면 더 이상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지킬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 아내를 열두 토막 낸 레위인처럼, 그 레위인의 계시성이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갖고 있는 계시성이에요. 똑같아요. 왜? 예수님이 레위인이고, 예수님이 고아고, 과부고, 나그네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의 건설 노동자입니다. 품삯은 누가 주느냐? 감독 되신 주님이 다 품삯을 줘버려요. 왜? 대신 레드카드 다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저주를 레드카드를 다 받았어요. 우리가 자기를 지킬 사수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2자 관계에서 하나님의 3자 관계,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전이성(轉移性), 2자 관계에서, 2자 관계 되어도 역시 육신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괜찮은 남편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 계시성으로서 그 인생을 몰고 가면 남는 것은 아까 제가 읽어드렸던 고린도전서 7장의 말씀입니다.
29절에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결혼했습니까? 안 했다고 치고 사세요. 아직 그 결혼은 결혼이 아니고, 진정한 한 몸도 아니고, 다만 전이성, 바뀌는 상태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말씀이 있는 이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과부들의 혁명’이라고, 과부들이 혁명.
과부들의 혁명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마태복음 23장 9, 10절에 보면 진정한 혁명이 나오지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자, 이러한 참 냉혹하고 차가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궁극적인, 확정적인 위로를 해주십니다.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생 많이 했습니까?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아니라 성경 갈라디아서의 편지는 우리 성도 전체를 이 땅의 고아와 과부로 그리고 객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너를 힘들게 하거든 심판을 받으리라. 너를 건드린 자가 지옥 간다.
왜? 네 안에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평가받을 필요 없습니다. 조로(Zorro)처럼 가면 쓰시고 패스할 곳만 찾으시면 되는 겁니다. 계시의 패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되기 싫어하는 인생을 살던 자들이 있을 때에 그들을 얼마나 조롱하고,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비난했던 저희들, 그것이 우리가 우리한테,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결과이고 모습인 것을 이제는 발견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