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
2022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5:1-2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5: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사람의 몸짓 하나 말 하나가 자기 딴에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가치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별 볼일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허비하는 중입니다. 때로는 웃었다고 때는 울기도 합니다. 참으로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이나 마음을 둘 곳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벌받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벌받는 자가 감히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탐욕입니다. 비록 본성이기는 하지만 탐욕은 탐욕입니다. 즉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무의미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특징은 자신의 육체만으로 ‘나’라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두 육체를 가지고 ‘한 몸’으로 여겼던 시절이었습니다. 즉 자기만을 따로 자기라고 우길 필요가 없던 시절입니다. 상대가 곧 나요 내가 곧 상대입니다.
한 몸을 두고 두 자아가 공유했던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지요. 지금의 ‘나’는 나를 출생 시킨 집안의 권력을 대변합니다. 우리 집안이 가진 권력 위에서 나의 정체성은 시작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자아로 독립해서 세상에 나타내어도 그 자아 안에는 우리 집안에 대한 명예와 가치가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 기억으로 인하여 나의 정체성은 확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오늘 본문은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육신이 시작된 나의 기억 속에 ‘내 집안’과 ‘천국의 집안’끼리의 차이가 확연해집니다. 새로운 식구는 십자가로부터 나온 가족입니다.
새로운 식구는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한 몸’이 됩니다. 한 가족이 됩니다. 이는 곧 육신의 가족에서 비롯된 정체성을 붕괴시켜버리는 작업이 십자가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2:29-30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가려면 중간 전이 상태를 통과해야 합니다. 천사와 같이 중성적인 성격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나’를 죽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구원받은 나’는 곧 집단적인 부활체 속의 일부로서의 ‘나’가 됩니다.
에스겔 37:12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나’는 부활을 만나기 전에 먼저 육신에 의한 ‘나’가 죽어야 합니다.
육신적 나는 결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 같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라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사도가 되면 비로소 그들은 하나가 되는데 그들만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미 ‘자기 위주의 하나’를 염두에 둔 인간들은 ‘우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 ‘하나’죽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14:20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 17:21-22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즉 성령이 오므로서 비로소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권력으로 통해서 결국 솔로몬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두 조각으로 깨어집니다. 그 내부에 성전이 들어있습니다. 성전이란 곧 진정한 아버지께서 지상에 자기 이름을 두신 겁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성전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로 나뉘어집니다.
그렇다면 참된 성전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19-22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에 대해서 제자들도 만지지를 못했습니다. (요 20:17) 그것은 육신은 철저하게 부활의 세계와 단절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평가를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노력 →결과→평가→보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이 순서를 다음과 같이 반대로 가져갑니다. ‘보상→평가→결과→노력’즉 “왜 나는 참으로 무의미한 존재이고 무의미한 일만 하는데 천국 백성이 되었는가?”를 돌아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사적이고 개인적인 가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접할 때는 천국에 다수의 성도가 있음을 보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육신에서 시작된 자기 정체성과 결별한 새로운 하늘나라의 가족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는 자기가 자기를 치료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증거인으로 살게 됩니다.
성도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육신의 정욕과 성령의 요구가 계속 해서 대치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일을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것을 근거로 주님 한 분의 공로만 증거입니다. 희생제물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요청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께서는 아예 성도 자체를 이 세상에서 희생물로 삼게 하므로서 ‘우리’라는 공동체 정체성을 갖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보면서 늘 새롭게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디모데전서 5장 1-2절(나의 정체성)2211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5장 1-2절입니다.
디모데전서 5:1-2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새로운 가정이 생겼다는 겁니다. 새로운 가정이 생겨버리면 나 중심으로 살기가 힘들게 되지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형제라는 이름으로, 자매라는 이름, 새로운 아비, 새로운 어미를 하나님께서 만들어줘서 같이 인생을, 이 세상을 살도록, 그 시대를 살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심히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거예요. 교회에도 형제가 있고, 아비도 있고, 집에 가도 아비가 있다면 그 차이점이 뭐냐? 동일하게 대할 것이냐, 아니면 다르게 대할 것인가? 그런 문제가 성립됩니다.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말은 그냥 잘해주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나라는 정체성, 내가 과연 누구냐, 그 정체성에 대해서 어떤 변화가 있어 줘야된다는 겁니다. 천국을 갈 사람 같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른 자아, 내가 알던 자아가 아니고 다른 자아로 바뀌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은 처음부터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고, 나 있기 전에 가정이 먼저 있었고 그 가정에서 우리가 출생했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이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는 내가 속해 있는 가정에서 이미 세뇌받은 거예요. 정신적으로 양육 받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맘속에 나보다 먼저 있었던 가족, 부모로부터 또는 형들 그리고 누나들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우리가 지배를 당하고 있는 그런 자아, 그런 자아 가지고 천사들이 있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어불성설, 말도 안 되지요.
그 동네가 어떤 동네인데 이 동네하고 비교가 됩니까? 안되지요. 바뀌어야 되지요.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는가? 기존에 출생했던 가정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되지요. 기존의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넘겨진 것, 기존의 부모님이 준 것은 육신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가족은 뭐냐? 육신의 가족이에요.
육신의 가족에서 우리는 ‘나’라는 것이 정립되어서 이 사회에 나가서 살지요. 그동안 여러 가지 그야말로 사랑으로 양육 받으면서 또는 교육받으면서 우리가 출생했던 그 가정의 명예, 가문의 이념을 위해서, 그걸 가지고 ‘아버지의 이름’이라 하는데 그 아버지의 이름, 부모님의 이름에 욕 들어가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는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벌써 나는 나뿐이라고 우겨도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 집안과 관련되어 있어요. 행동 함부로 했다가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한테 물어야지 왜 우리 아버지를 갑자기 묻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이 가족에서 뭔가 바꿔야 되는데 바꿔서 새로운 천국 가족으로 새롭게 구축된 정체성, 나라는 것은 새로운, 천국 가는 가정에서의 하나의 식구로서의 정체성을 정립을 해야 되는데 그러면 기존의 가정에서 나오는 이 생각은 어떻게 털어버릴 수 있는가?
이것은, 기존의 가정에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자아라는 것 속에 기억으로서 저장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장된 이 기억은 과거로부터 온 겁니다. 나의 과거로부터 나온 가족에서 뭘 바꿔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가족의 정체성으로 이걸 이동시켜야 돼요.
그러면 이동시키는 방법은 뭐냐? 이동시키는 방법은, ‘우리가 갖고 있던 이 육신, 또는 몸, 육신적 생각, 이것이 천국을 만드시고 지옥을 만드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 어떻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걸 발견하면 되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육신적인 이런 생각들은 천국에서 안 받는다는 겁니다. 거부당하는 거지요.
마태복음 12장 46절 끝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뒤에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 있었어요. 그럴 때 제자들이 말하기를 47절에,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하시는 말씀이 도리어 되묻습니다. 48절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듣는 동생, 듣는 모친 굉장히 섭섭하게 말씀하시지요. “누가 내 모친인데? 누가 내 동생들인데? 누가 내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건데? 여기 내 가족들을 보라. 내 말씀 듣는 이들이 바로 내 가족이다.” 49, 50절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현장에 우리가 앉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마냥 신난다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 듣고 집에 가면 또 우리 가족이 있잖아요. 그 가족들에게 예수님 하신 말씀을 똑같이 할 수 있느냐 그 말이에요. 우리가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디 갔다 왔는데?” “예수님 말씀 들으러 다녀 왔습니다.” “빨리 손 씻고 밥이나 먹어라.” “예!” 이렇게 곱게 수그리고 들어가지요.
마태복음 8장 21, 22절에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일입니다.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침 따르고자 할 때 그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모양이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그 육신적인 정체성에 의해서 “자식이 되었으면 마땅히 아버지 장례를 치러줘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아주 이 섭섭한, 사람으로서는 듣기 거북스러운, 상당히 당황스럽고 거북스러운 그 말을 합니다. ‘뭐, 뭐지 이게?’ 그리고 교회 와서 예수님 말씀 듣고 있는 그 나와 우리 가정, 나라는 정체성은 우리 가정에서 나온 정체성이에요. “나와 우리 가정에 보탬이 되고 이익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아주 사전에 싹을 잘라라.” 그 말이거든요. ‘느그 집구석 잘되라고 내가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여기 교회에 앉아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우리 가정의 어떤 책임자, 우리 가정의 어떤 구성원으로서 행여 하나님의 복을 더 따내서, 입찰해서 빨리 따내서 빨리 우리 가정의 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중간 매개체로 내가 작동하기를 바라는 그런 심정으로 앉아 있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니까 어떤 이익을 봐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이익이 뭐냐? 그 이익이 누구한테 돌아가고 최종적으로 그 이익이 어디로 갑니까?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했던, 나에게 그때까지 보탬이 되었던 내 가정, 그리고 내가 돌봐야 될 내 자식과 내 손자 손녀한테 하나님 믿는 이 공로의 보상이 그들에게 가기를 바란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종교단체한테 사기당한 거지요. 이것은 종교한테 사기당한 거예요. 인간의 세계라 하는 것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인간은 일단 노력합니다. 인간은 쉬지를 않아요. 뭔가 해요. 노력하지요. 노력하고 그 결과가 나와요. 그 결과에 대해서 세상에 나가서 평가를 받아요. 평가를 받으면 돈이든 뭐든 간에, 칭찬이든 뭐든 간에 보상을 줍니다.
순서가 뭐냐 하면 노력하고, 그다음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고, 그 결과에 대해서 세상이 좋은 평가를 내려주면 그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잘했다고 거기서 보상 주는 이 프로세스, ‘노력 →결과→평가→보상’으로 이어지는 과정, 이 메카니즘 이것이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교회 와서 써먹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 봉사, 선교, 교회 목사 섬기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교회 청소하고, 밥 당번 하고, 이 모든 것을 하는 것, 이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CCTV로 다 지켜보시면서 ‘잘 하는구나. 잘했다. 내 충성 된 종아!’ 이래가지고 그다음에 좋은 평가가 주어지게 되면 그 보상은 내가 은밀하게 원했던 우리 집안 잘되고, 나로 인하여 우리 집안이 융성하게 되고, 내 미래가 활짝 열리고 내 꿈이 실현되는 것 그걸 노린다면, 그게 노림수라면 세상하고 교회 하고 다른 점이……, 뭐 똑같지요. 지옥에서 살다가 교회라는 지옥에 와서 죽고 나서 지옥으로 가는 것, 이게 이딴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간에 뭐 바뀐 적이 없어요. 그러면 바뀔 때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가? 이렇게 바뀝니다. 성경에서는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미 보상을 줬어요. 이미 보상을 줬고 그 보상에 대해서 평가에 대해서는 이미 내렸습니다. 너는 의롭다고. 너는 의롭기 때문에 저주가 없어요. 그다음에 어떻게 해서 이런 저주가 없이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거룩한 의인이 되는 거냐, 그 결과, 그 결과를 따라서 주께서 일을 시키는 겁니다. 이미 합격증 쥐고 일 시키는 거예요. 합격증 쥐고.
인간 세계에서는 ‘노력 →결과→평가→보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면 하늘나라에서는 이 순서를 다음과 같이 반대로 가져가는 겁니다. ‘보상→평가→결과→노력’ 그러니까 이미 보상을 받아 챙겼어요. 생명의 면류관 받아 챙기고 ‘내가 잘한 적이 없는데 왜 이게 왔지? 천국에 합격했지?’ 보니까 평가가 주어졌고, 이 평가는 내가 봐도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평가에요. 백지 냈는데 백 점 맞았다? 이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이 평가 어디서 왔지?’ 그 결과를 내 육신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떤 행동의 결과가 있을 것이고, 결과를 볼 때 내가 평가하는 것은 내 가정의 정체성 가지고 평가하는 반면에 주님께서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한 것은 주님의 가족이라는 것, 천국의 패밀리입장에서 그 결과를 보고 그 결과를 낳게 되는 한순간 한순간, 한 타이밍 한 타이밍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내가 계획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 상황 속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이것은 내 일이라고 여겼는데 돌아보는 순간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농사를 지어도 주께서 맡기신 일이고, 내가 고기를 잡아도 주께서 맡기신 일이고, 내가 회사를 다녀도 주께서 맡기신 일이 되는 이유는, 최종 보상이 보상답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미리 그 일을 이 땅에 어느어느 가정, 이씨 집안, 박씨 집안에서 주께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걸 시간의 역순이라 하지요. 논리의 역순, 거꾸로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는 인간의 심보하고 전혀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일을 하면서, 결과를 보면서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내가 한평생 4십, 5십 살면서 더욱더 가슴에 심화되고 확인되는 것은, 내가 인생 살면서 ‘깨끗하다. 너는 천사와 같구나. 너는 어떻게 흠이 없냐? 너는 완벽해. 천국을 가도 네가 가야지 다른 사람이 가면 안 돼.’라는 평가를 들을 구석이 없다는 사실, 계속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느끼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을 부여하신 거예요. 뭘 해도 내가 보기에도 온전치 않아요. 내가 보기에도 이기주의에요. 지난 수요일에도 설교했지만 어떤 사람은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 사이트 인사말에 써 놨어요. “나는 초심으로 하겠습니다.” 초심이 뭐냐? 초심이 이기주의죠 뭐. 그게 초심이에요, 초심.
그러니까 이기주의자는 지옥가야 돼요. 그런데 이미 확정된 나의 운명은 뭐냐? 천국입니다. 이게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이게 맞을 리가 없거든요.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께 감사한 것은, 매사가 감사한 것은 내 뜻대로 안 해주셔서 감사한 거예요, 내 뜻대로. 어느 한순간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게 해주시는 그걸 오히려 감사히 여기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예를 들었지만 또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목사 말을 들었지요. 설교를 듣고 목사에게서 이것이 복음이고 성경의 핵심이다, 뭐 이렇게 듣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여러분은 다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대신 희생하셨기 때문에 그 희생하신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손들고 나오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그거 거짓말입니다. 뭐 알고 아멘, 하십니까? 성경에서는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은 없어요. 나를 천국 보내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없애는 하나님만 계셔요. 나를 제거하는 주님만 계셔요. 나를 제거하고 없애버리고, 지금의 나 아닌 다른 나를 부활시키고 구원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디를 넘봐요? ‘야, 나 괜찮은 미래에 가고 싶어. 천국 가고 싶어.’ 교회가 어디 보험회사입니까? 보람상조에요? 어디 뭐 생명보험 하나 믿으면 죽으면 보험금 타는 거예요? 그런 것은 인간들이, 종교인들이 지어낸 거예요. 완전히 구라입니다. 물론 2천 년 동안 속였지만.
인간을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왜? 인간 자체가 육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육신은 저주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육신은, 아담은 쫓겨났어요. 생명나무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게 육신이에요. 이 육신의 정체를 육신 된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어요.
말씀조차, 말씀이 이 땅에 온 그 육신조차 십자가에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그게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일까요? 예수님이 대신,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우리의 진짜 찐, 진짜 모습을 주님이 대신해서 보여준 겁니다. 너의 그 꼴의 끝은, 너의 그 자아정체성의 끝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거예요.
버림받는 주제에 천국을 넘봐요? 이것은 우리 주제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욕심내고 있는 겁니다. 영생을 찾는 것, 천국 가겠다는 것이 전부 다 이게, 종교를 갖고 싶은 자체가 욕심이에요. 그 자체가, 교회 다니겠다는 자체가 욕심이에요. 그게 탐욕이라는 말이지요.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가세요. 지옥으로! 그게 우리에 딱 맞아요. 그게 우리의 운명에 맞다고요.
사람이 뭔가 꿈을 갖는다는 것, 기대를 한다는 그것은 욕심에서 안 나오는 게 없어요. 그게 왜 욕심이냐? 우리 자아가 환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상은 이게 뭐냐 하면, 의미 없음, 무의미라 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이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새벽 1시라도 좋고 2시라도 좋으니까 집에서 잠 안 오거든요, 가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축구 이겼다, 졌다, 또는 뭘 했다, 그게 뭐 의미 있습니까?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대표팀한테 사우디 왕세자가 롤스로이스 15억짜리 차 한 대씩 준답니다. 아르헨티나에게 이겼다고. 받아놓고는 폴란드한테는 2대 0으로 졌지만. 자, 롤스로이스 그거 받아서 탔다고 칩시다. 오래 탔다 칩시다. 남는 것은 피곤함밖에 남는 것이 없어요.
그게 뭐 의미 있습니까, 그게!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 그걸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왜 모른 척 하고 있습니까? 96세까지 살면서 “전국 노래자랑!” 사회 보면서 살아도 죽으면 죽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죽은 거예요. 96년 다 날아갔습니다.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뭘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못나게 살았는지 잘나게 살았는지 아무 의미 없어요. 삼성 회사를 세우고 뭘 해도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이 세상은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의미 없다는 말은 내 가족도 의미 없습니다.
촌에 있는 시누이가 부모님 바람 쐬어 준다고 서울에 모시고 오게 되면 그 시누이를 올케가 몰래 불러요. 아침에 왔다 치면 오후에 불러요. “아가씨(시누이)! 며칠 있다가 갈 건데? 며칠씩 자고 갈건 아니지? 얼른 내려가(대충 눈치 봐서).” 인간은 자기 나와바리, 영역에 누구 들어오면 다 귀찮습니다. 가족이고 뭐고 다 귀찮아요.
왜 이걸 자꾸 감추고 있습니까? 사랑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진짜 인간에게 무슨 사랑이 있습니까? 이용할 뿐이지요. 당신 아직 이용가치 있다, 그렇게 이용할 뿐이지 무슨 사랑? 사랑은 뭘 알고 사랑이지 인간은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에요. 사랑의 대상이 자기밖에 없는데 무슨 그게, 자기만 사랑하는데 남들은 이용대상이지 무슨 사랑을 해요.
촌에서 올라온 시누이 보고 “며칠 있다가 갈 거야?(김치 가져온 거나 거기 두고 그냥 좀 내려가 줘. 나 지금 스케줄 꽉 짜여 있어. 내일 아침부터 요가 학원가야 돼. 바쁘다고)” 네가 뭔데 내 스케줄을 완전히 망치느냐, 그 말이거든요. 가족끼리 결혼하고 나서는 잘 안 만나져요. 만나는 게 언제냐 하면, 결혼식 때 사진 찍으러 한 번 만나고요, 장례식 때 누구 죽었다 하면 부조하러 한번 가고요, 그다음에 누구 선거에 출마할 때 연락 오는 것, 그 외에는 가족이 연락 안 합니다. 대구 시내에 같이 있어도 만나지도 않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편해요.
그런 인간이 어딜, 천국에를 가요? 아이고, 참 욕심도 참 하늘 같아요, 욕심이. 천국은 아무나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천국 들어갈 사람은, 인간이십니까,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활 되는 나, 나는 죽고 부활 된다, 할 때 그 부활 되는 나가 정체성이, 그 출생이 달라요. 잉태치 못한 자가 부활 됩니다. 부활 되고 영생 얻어요. 출생지를 바꿔버려요. 주님께서! 아담으로 태어난 인간들을 싸그리 버리고요, 마지막 아담, 예수님에게서 새로 태어난 인간들, 그들만 천국 갑니다.
이건 뭐 성경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이야기,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육으로 낳은 것은 천국, 하늘나라 못 본다고, 오직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이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영이 뭐냐? 영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버림받았어요. 끝났어요.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버림받는 겁니다.
지금 제가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있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꿈도 꾸지 마세요. 이것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육신이에요. 그런데 그중에서 단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 인간에게는 없었던 현상을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은 뭐냐?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님만을 단독으로 살려내요.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가 되고 단 한 분만이 죽음에서 영생으로 연속성을 갖춘 자아를 주님이 갖게 돼요. 끊어진 정체성이 아니고 연결된 자아, 그걸 영이라 하는데 주께서는 육신으로 죽고 영으로 다시 부활하셨거든요.
영으로 부활하실 때 그 부활의 육신은 우리가 아는 아담의 육신하고 달라요. 변화산에서 주의 육신은 해같이 빛나는, 태양같이 빛나는 육신이에요. 영광된 육신, 그게 부활의 육신이에요. 제자들이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 너희들은 내 부활한 육신을 만질 자격이 안 된다.” 끊어져 있으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그러니까 주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너희들은 이 땅에서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완벽하고, 얼마나 순수한지 나는 그딴 것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 몽땅 다 의미 없고 버림받아야 될, 배척 받아야 될 그러한 존재기 때문에 네가 어떠한 종교적인 헌신과 희생과 순교를 했더라도 나는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거부한다는 겁니다. 환상,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꿈꾸던 환상을 현실로 안 받지요. 주께서 받아주는 현실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부활의 천국 가서 맘 놓고 사는 나는 어디서 찾느냐? 그 나는 어디서 생긴 나냐? 여기서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이 새로운 가족이 등장하는데 이 가족을 편의상 ‘우리’라 합시다, ‘우리’ 그러니까 나는 죽어야 돼요. 이 육신에 속한 나는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처럼 죽어야 되는데 다시 부활할 때 그 나는요, 어떤 나냐 하면 죽은 내가 부활하는 게 아니고 부활 된 집합체 중 하나가 나가 되어버려요. 부활 된 집합체!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중간과정이 나옵니다. 중간과정에 보면 어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논쟁을 한 거예요. 여러분이 아다시피 형제 일곱이 있었는데 형이 죽고 시동생이 홀로 된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형수와 결혼한 그 시동생도 죽고, 또 죽고, 그런 식으로 해서 일곱째 막내 시동생과 형수가 결혼을 해서 나중에는 다 죽었을 때 “부활 때는 남편이 졸지에 일곱이 생겼는데 그중 누가 남편이 되겠습니까?” 라고 예수님에게 시비조로 그렇게 한 거예요.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하나님의 능력을 누락한 채 인간의 능력만 생각했다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 권력은 어디서 생기는가?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가족 권력의 영향력 속에 있으면서 그 가족의 권력을 하나의 마중물로 해서 ‘나는 엄마처럼 될래’ 또 ‘나는 아빠처럼 될래.’라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권력의 시작이에요.
그러니까 특히 재벌 집에 그런게 많은데, 아버지의 숙원사업에 아들이 훼방을 놓고, 형이 밥상을 차려 놓으면 동생이 재를 뿌리는 이게 재벌 집의 패밀리쉽이라고 드라마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재벌집 막내아들>인가 거기 나오는 대사입니다. 한도제철 인수하는 그 이야기 나오는 드라마.
그러니까 가족을 가족 되게 묶는 것은 돈의 권력이에요. 우리 교인들같이 변변치 않은 경우는 잘 못 느끼지만, 우리 교인들은 권세가 없어서 제가 맘대로 이야기하는데 우리 교인들 중에 만약 부동산 150억 부자가 왔다. 그거 뭐 집구석 보나마나지요. 그 집 애가 넷이다. 대판 싸움 납니다. 인간이 있으면 그 주변에 권력이 휘둘러져 있어요. 아버지 회사 누가 차지할 것인가? 애 하나 있으면 제일 편하지요. 그런데 둘 이상 될 때는 문제가 생겨요. 1/N로 나눌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아플 때 기여한 언니한테 줄 것인가, 그런 문제들이 또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정에서 자아, 이 몸이 생겼잖아요, 가정에서 몸이 생겼으니까 주님께서 이 몸을 없애는 방법은 가정을 해체시키는 거예요. 가정을 붕괴시키는 거예요. 가정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네가 고유하게 갖고 있던 그 가정에서 물려받은 정체성이 천국 가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환상을 유발하고 잘못된 이미지로 자기 자신의 고집만 계속 굳히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뭐냐 하면, 왕의 가정의 권력이 붕괴되면서 나라가 하나에서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중간 이후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요소입니다. 마태복음 22장 설명하고 계속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권력, 그러니까 가정이 갖고 있는 유산의 능력, 돈의 권력, 그런 것밖에 너희가 모르는, 바로 그것에만 치중하는 정체성으로 너희들이 장착되어 있는데 너희들은 그것 때문에 뭘 모르느냐? 하나님의 능력이 가리워졌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성경에서 오지요. 마태복음 22장 29, 30절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여기서 인간에서 남성 여성이 날아가 버리고 중간지역, 천사를 거쳐서 구원받는 계기를 주께서 제시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남성이나 여성은 애초에 처음에 인간 만들었을 때 남성, 여성 자체의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 그때는 가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 몸이 있었어요. 창세기 2장에 그 몸 나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23, 24절에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남성, 여성으로 머물지 않고 남성, 여성이 결합해서 한 몸으로 완성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한 몸으로. 그러니 이미 혼인한 이상은 남자, 여자, 하지 말라. 네가 나고 네가 나가 되는 거지요. 그게 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뒤부터는 남성은 여자한테 책임을 미루고, 여자는 뱀한테 책임을 미룸으로써 여기서부터 이 가정의 균열이 일어나고 와해되는 겁니다.
그 가정이 와해 되면서 그다음에 그 와해된 가정에서 남성이 권력을 쥐게 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모든 자손들은, 가인의 후손들은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남성 위주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이미, 하나님께서 그걸 저주의 요소로써 이미 예언을 해버린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쉬운 말로 “너 인간이냐? 그러면 평생 벌 받아라.” 이겁니다. 이게 뭐 어렵지 않아요. “저 남자인데요?” “남자로서 벌 받아라.” “저 여자인데요?” “여자로서 벌 받고 저주받아라.”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면 이 가정은? 가정은 깨져야 되지요. 가정의 정체성은 이미 저주받은 정체성이니까. 그러면 생명나무에 어떤 식으로, 천국의 백성은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를 새로운 아버지로 바꿔치기 해야지요.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물으면 성도 같으면 이렇게 해야지요.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우리 아부지 성전인데요?” 이렇게 해야지요.
왜 성전이냐? 성전에서 부활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주께서 성전 이야기할 때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있었잖아요.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그 짓는 것이 뭐냐?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어요.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것은 당연하거든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육신에 속합니다. 제자들은 구원받지를 못 해요. 육신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는 구원을 받아요.
왜 그러냐? 그들에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버립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질 수도 없어요. 만질 자격이 안 되니까. 육신이니까. 철저하게, 육신의 영역과 철저하게 천사가 사는 영역과 주께서 분간하는 겁니다. 천사가 사는 영역은 남성, 여성이라는 기존의 육신적인 가정 자체를 주께서는 의미 있게 보지를 않습니다. 거기서 빠져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빠져 나올 수가 없지요.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모든 인간은 성전을 거쳐야 되지요. 성전을 통해서 뭐냐?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해야 됩니다. 에스겔 37장 12절에 거기 많은 뼈들이 나오는데요.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뼈는 개인적 뼈가 아니고 ‘우리’입니다. 이게 ‘나’라는 그 나, 개인적 의식에서 개인적인 ‘나’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나중에 천국 가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에요.
야곱에게……, 이런 게 성경에서 어려운 부분인데 야곱에게 나올 때, 또는 아브라함에게 나올 때 천국에서 홀로 어떤 분이 마중 나온 것이 아니에요. 일 대 일로 마중 나온 것이 아니고 마중 나온 쪽은 복수에요, 다수에요. 아브라함을 찾아올 그때 세분의 천사가 왔어요. 물론 그중 한 분은 하나님이지만 세 분의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왔어요, 우리! ‘나’가 온 게 아니고 ‘우리’가 왔어요.
그리고 야곱에게도 찾아올 때 많은 숫자의 천군 천사가 창세기 32장의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말은 “야곱아! 어서 ‘우리’의 일원이 되어라.” 단독적으로 개인적 자격이나 개인적 의미로써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일부로써 형성되어 있고 그 ‘우리’를 형성시키는 것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의 몸을 유지하는 ‘우리’가 되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가, 지난주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꽃은 주님이라면 우리는 같은 꽃이 아니에요. 우리는 꽃잎이지요. 꽃을 받쳐주는 꽃잎으로 되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을 주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성령 받은 사람이다. 성령이 오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가 없다는 이 말은 ‘나’에서 주님으로 정체성이 이동한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나 위주로 날 위해서 살다가 이제는 주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가 된 것을, 그 관계성을 인정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하여.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했다. 그러니까 그것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성경의 복음이 아니고, 희생을 받으라, 가 아니라 네가 희생물이 되어라, 는 거예요. 왜 너나 예수님이나 다 같이 ‘우리’ 안에 이미 편입된 상태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은 대표적인 것이 여러분 잘 아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기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왜 인정하지 않느냐? 나의 기도가 인정되어 버리면 나라는 그 정체성이 어디 출신이냐? 우리 집안, 우리 이씨 집안, 내 가족, 가족 중심에서 거기서 삐져나온 나거든요.
내가 기도하는 모든 내용은 내 가족 잘되기 위해서 하는 기도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만약 우리가 우리 교회 나왔다면 우리 교회 잘되기, 부흥되는 것, 그 기도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거 주님께서 받을 리 없지요. 안 받습니다. 왜 받습니까? 자기 이기주의인데요. 자기 초심이잖아요. 아담의 초심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맨날 들리는 소리가 “목사님, 그러면 목사님 때문에 기도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가 끊어졌습니다.” 이러고 불평해요. 기도 끊어주니 뭐 많이 힘들어요? 기도 좀 해야 종교인으로 꽤나 티 났던 거예요? 기도는 해서 응답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내게 주어진 보상이 뭐며 왜 이런 난데없는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그 갭을 줄이는 것이 기도예요. ‘내가 천국 갈 이런 인간이 안 되는데 왜 보내십니까?’ 하고 따지는 식으로 하는 게 이게 기도에요. 그럴 때 공로가 내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광주강의 때 이야기했어요. “교회는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증거하는 곳이다.” 내 몸 치료하려고 내 정신 치료하려고 오면 안 되고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모은 거예요. “너 얼마나 치료받았어? 너 얼마나 복 받았어? 너 복 받은 거 얼마치 받았어?” 이거 서로 비교하고 대결하는 데가 교회가 아니에요. 똑같은 것을 받은 거예요. 천국의 영생, 면류관, 똑같은 것을 받은 겁니다. 강도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세리가 되었든, 도둑놈이 되었든, 정치꾼이 되었든.
정치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임해야 되지만, 국회의원이 되었든 구원받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본인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망치게 했다는 거예요. 내가 교수로 일한다. 교수로 일해야 내가 망쳤다는 사실을 발견하거든요. 어떤 사람은 목사다. 목사가 되어야 그 인간이 천하의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사업한다. 사업하면서 내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사업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가 망해야 마땅함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아까 거꾸로 보상받고 나오는 새로운 ‘우리’라는 정체성에서 비로소 나가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부활은 내가 부활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부활 되었지요. 새로운 백성들 우리. 그 우리는 누가 만드는가? 그 우리는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이 땅에 인간의 정체성은요, 자기가 타고난 그 가정의 권력, 이 권력의 맛을 보면 그 권력 가지고 거기서 제 2의 자아를 만들려고 시작을 해요. 인간은 어떤 주어진 환경이 있으면 거기부터, 자기 정체성을 거기서부터 새로 조립하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일이 안 되면 이렇게 해요. “하나님, 회개하겠습니다. 제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제가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전향적으로 주님 앞에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전향이 소용없습니다. 인간이 개과천선하는 것 전혀 주께서는 안 받습니다. 여러분 개과천선하지 마세요. 진짜 개과천선해서 자기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고 다 망하는 거예요. 회개했다고 나서 가지고 인간 안 망하는 인간이 없습니다.
인간이 회개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반성해서 새 인간 되는 인간이 없습니다. 술 끊고 담배 끊는다고 새 인간 아니에요. 예수 믿고 나온다고 새 인간 아닙니다. 전향적인 것, 인간으로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제자들, 제자들 구원 못 받습니다. 그걸 혹독하게 그들은 경험했던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금 제자들은 열둘이 하나가 되지를 못했어요. 의도적으로 가룟유다를 집어넣어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다 모래알처럼 뿔뿔이 헤어지게 만들었어요. 뭐가 안 되는가? 천국에서의 삶이 안 돼요. 천국에서의 삶은 뭐냐? ‘나’ 위주의 삶이 아니고 ‘우리’ 위주의 삶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게 우리가 돼요. ‘우리’라는 것은 요한복음 17장 21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의, 이 땅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나부터예요, 나. 나한테 도움 될 때만 우리예요. 친구예요. 나를 제거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제거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출생 자체가 그래요. 출생 자체가, 본질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고 해도 이건 안됩니다. 도 닦아도 안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우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성령이 내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주님 안에 내가, 전부 다 하나가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천국을 못가는 거예요. 왜? 나만, 최종적으로 제키고, 제키고, 남는 것은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어요. 자기 몸 힘들면요, 자식도 찾아오지 마라, 다 귀찮고 귀찮아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우리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천국에 간다? 이것은 중간에 나밖에 모르는 인간, 그 나를 품에 안고 저주받고 살해되어야 돼요.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됩니다. 부활이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죽어야 돼요. 그리고 자살하면 안 돼요. 주님이 알아서 죽여줘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나밖에 모르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편해요. ‘이처럼, 나처럼 나밖에 모르는 인간은 천국에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나를 치울 수가 없어요. 유아(有我)가 무아(無我)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시간에 예를 들었지요. 뉴올리언스를 떠난 비행기가 고장이 있어서 어떤 골프장에 불시착했는데 사람들은 의당 그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나올 줄 알았지요. 개 53마리가 나왔어요. 개 53마리.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개가 왜 거기서 나와? 개들 53마리가 비행기에서 나왔거든요.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그게.
그 비행기가 입양할 개를 실어나르는 화물 비행기였던 거예요. 비행 중에 고장이 나서 불시착한 거예요. 개들이 알아서 기어 나왔다고요. 천국에 사람들이 나온 것이 아니고 개가 튀어나온다면 천국은 우리가 상상 못 한, 전혀 예상 못 한 천국입니다. ‘왜 거기서 개들이 나와?’ 하는 것처럼 ‘저 인간이 천국에서 살지?’
그것은 중간에 뭘 하나 경유해서 그래요. 주님의 성전을 경유한 겁니다. 주와 함께 죽어버린 자, 그리고 주의 영, 주님의 영이지요, 주님의 마음, 성령이 주님의 마음이니까, 주의 마음이 그 사람 속에 미리 들어왔던 사람, 그 사람 직업이 뭔지, 평생 동안 무슨 짓 하고 살았는지, 몸이 아픈지 건강한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 성경 말씀을 다 온전히 이루어서 그 결과로 생긴 그 능력, ‘다 이루었다’의 능력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니까 그 사람 속에는 ‘다 이루었다’가 가득 차 있었던 거예요. “네가 하는 일을 일체 묻지 않겠다.” 그분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에 귀신들린 청년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 했지요. 무덤가에 있던 귀신들린 청년 속에 귀신이 얼마나 많던지 군대 수 만큼 많았던 그 귀신들린 청년.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을 쫓아내고 그것들이 돼지 떼 속에 다 들어가서 바다로 내리달아서 몰사했다는 이야기가 거기 있지요.
그 뒤에 33, 34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육신이 성령 받은 사람을 떠나시기를 간구함으로써 육신에 품어진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표현하게 되었어요. 노출한 겁니다.
육신은 가만있지 않습니다. 영을 알아보고 “제발 떠나주세요. 제발 내 곁에 오지 마세요.” 밀어내는 그런 경향으로 육신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갈라디아서 5장 16, 17절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여,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교회 나와야 돼요. 제가 어떤 소원이 있고, 내 자식에게 내 손자에게 어떤 소원이 있든 간에 “제가 이런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소원 제발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마옵소서. 그래서 내가 육신인 것을 까발려 주옵소서.”
왜 기도할 게 없습니까! 왜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집어넣고 왜 기도를 안 해요? “좁은 문으로 가라.” 왜 이 기도가 안 들어갑니까? 기도할 게 없다는 말은 성경 말씀을 자기가 다 제켰어요. 이건 싫고, 이것도 싫고, 나 이것 되기 싫어, 나 겁나, 이거 광신도도 아니고 내가 미쳤어, 내가 이걸 왜 해, 전부다 제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는 주의 능력이 임해야 기도합니다. 기도가 돼요, 주의 능력이 임해야. 내 능력은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는 게 내 능력이고요, 주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의 말씀대로 되기를 기도하는 경우가 있어요. 여러분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할 때 “주여,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으면 기도해놓고 나중에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놀라요. ‘내가 미쳤지. 이런 기도를, 이런 기도를? 진짜 응답받으면 큰일 나는데. 미쳤어. 내가 왜 나를 위한 일이 이뤄지지 않기를 기도하다니! 내 말이 내 말 아니고 성령의 말인 것 같아.’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사는 것이요, 성령 받은 사람은 매사 뭘 느끼게 되느냐 하면, 내가 뭘 원하든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그냥 몰아세우고 밀어붙인다는 것,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네가 희생물 받은 것을 좋아하지 말고 네가 희생물이 되어라. 세상에서 나는 버림받았다. 귀신 쫓아냈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나가 달래. 이 동네에서 나가 달래. ‘떠나소서’ 너도 똑같이 그러한 경험을 당해봐라. 다른 식구들이 너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평생 너 자신이 너를 쫓아낼 거야. 너 자신이 네 인생에 대해서 심드렁할 거야. 불만스러울 거야.”
한평생 그렇게 꿈도 많고 뜻도 많았는데 “한평생 나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러거든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로, 영생의 길이 보일거예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평생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신 것.
바로 이 가정에서 이 권력이 쪼개지는데 그중 하나 예가 바로 사사기 9장에 보면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사사지요. 민족을 해방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아들이 70명인데 그중에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이 나머지 아들을 다 죽였어요. 권력의 맛을 본 거예요. 세겜사람들에게 찾아가서 하는 말이 “여러분, 70명 섬길래, 한 사람 섬길래?” 하니 “그거야 한 사람 섬기지요.” “내가 그 한사람인데 내가 여러분에게 잘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바알 섬기는 제단에 가서, 돈 들고 가서 “우리의 왕이시여!” 하고 아비멜렉에게 갖다 바쳤거든요. 그가 동생들 다 죽였어요. 그중에 요담이라는 동생만 살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끄는가? 사사기 9장 2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나중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이 저희끼리 오해를 해서 정치적인 싸움을 벌이고 난리도 아니에요. “너 나 섬긴다고 해놓고는 왜 이제야 배반하느냐?” 가알이라는 사람이 배신을 했거든요. 세겜사람들에게 “내가 지도자 될게. 아비멜렉을 버리라.” 이 소리가 아비멜렉 귀에 들어가니까 “너희는 다 죽었어!” 해서 아비멜렉이 자기편끼리 싸워서 천명이나 죽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그 아비멜렉은 어떻게 되었는가? 데베스라는 동네에서 여자 하나가 맷돌로 때려서 깐족대는 아비멜렉을 죽여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가 인간의 정체성, 육신적 정체성으로 인하여 왕 다운 왕이 없다는 거예요. 솔로몬이 있지만 솔로몬이 성전 딱 만들고 난 뒤에 나라가 둘로 쪼개져 버립니다. 그러면 뭐냐? 내부에 있는 진짜 아버지를 찾아가는, 진짜 가족, ‘우리’라는 가족은 어떻게 되느냐?
끝으로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2-4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다시 가족이 되었습니다. 다시 재회했지요. 그러면 그 재회하는 과정속에서 예수님의 성령, 예수님의 영이, 성결의 영이 만들어졌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새로운 예수님의 패밀리가 되고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가족들, 그게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인간은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랑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은 인간의 능력 바깥에서 오는 일방적인 사랑이 사랑이에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사랑인 사랑,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 임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다 이루었다’고 임할 때 그 제자들, 철딱서니 없는 제자들이 나중에 사도가 돼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나를 치료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증인 되게 되면 우리가 한평생 사는 것, 어떻게 살아도 주의 영이 증인 되게 하고 천국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다, 집합체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가 1장 4절에 보면 그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서 인도해주는 이것이 아가의 내용이에요.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요거는 <명동 콜링>이라는 노래 가사에요. ‘카더가든’이 부른 노래 가사에 나와요. 그거 보고 ‘이거 아가서 베낀 것 아닌가?’ “나의 궁전”이지요. 나의 궁전으로 올 때 여기에 ‘우리’가 있어요. ‘나’가 있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같은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고, 나중에 보니 베드로도 있고 같이 있어요.
혼자 밖에 모르는 이 정체성이 함께 산다는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바로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이미 이 땅에서 교회 다니면서도 이 기적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실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다 같이 그런 식으로 주의 증인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도 제대로 모르면서 예수 믿고 나 천당 가려고 보험 들듯이 욕심부렸던 저희들, 주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시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새로운 ‘우리’ 중 하나로, 식구들로 만들어주시니 이것 외에 다른 사랑이 없음을 감사하면서 남은 인생을 주님의 이 사랑을 증거 하는 증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