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오기와 감사

아빠와 함께 2022. 11. 6. 17:45

오기와 감사

 
2022년 11월 6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4:4-5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내셨는데 그 나타내셨음이 ‘계약(=언약’이며 그 계약이 온전히 유지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만 거룩이 있기를 원했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열매를 먹었기에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망했다고 보시는 겁니다. 선악지식을 유지하려는 것이 망해버린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등장되는 거룩개념은 언약에 담겨있는 거룩개념과 충돌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과의 만남에서 인간들에게 튕겨져 나왔을 때, 진가가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배격당하고 멸시를 받는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이 피어납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거룩, 곧 언약에 의한 거룩은 필히 저주와 심판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거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에 말씀과 기도의 전담반을 다로 뽑아서 운영하셨습니다.

그들이 레위지파입니다. 민수기 3:12-13에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13지파로 만드시고, 그 중에 레위지파만을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나머지 12지파가 그 레위지파의 위상에 종속되게 하셨는데 이 종속은 곧 ‘거룩에 종속’입니다. 레위지파의 중심에는 제사장이 있습니다. 아론 이후의 대제사장은 세습제로 이어집니다. 

아론에게 내 아들이 있는데 그 중의 두 아들이 성막에서 일하다가 죽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현장이 죽음의 현장이며 이 죽음을 관장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거룩한 하나님에 의해서 늘 죽어야 될 자들을 거룩 자체의 구원과 생성을 위해 이스라엘을 활용하고 계신 겁니다.

이들 레위지파들을 하나님께서는 땅을 분배하면서 48개 성읍에 분산 거주케 합니다. 그렇게 되면 12지파는 거룩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거룩한 율법과 인물의 만남, 이것이 제사장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들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희생물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인간 구원을 기대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이 아니라 거룩의 구원입니다. 죄인을 통해서 생성된 거룩을 건져내시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죄인으로 쳐박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13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는 자신이 ‘불신자’라는 사실을 성령받고 난 뒤에도 계속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전에 예상도 못한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받지 않는 자들에게 쉬지 않고 무엇이 나올까요? ‘오기’가 나옵니다. 열왕기하 5:10-11에는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조치에 분노하고 격분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의 무엇을 건드린 겁니까? 그것은 나아만 장군의 기억을 건드린 겁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자기 노동의 가치에 꽂혀 삽니다. 자신이 일함이 이 세상에서 정당한 보상과 대우를 받을 것을 기대하며 삽니다. 만약에 그 누구라도 자신의 애씀을 비난하고 훼손한다면 용서치 않고 복수에 나설겁니다.

인간이 자기 노동의 가치를 지키는 방법은 타인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기에게 엄마가 되고 아들이 됩니다. 아들이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엄마는 ‘자기 자식’이니 모든 것을 용인합니다. 이런 자기 가치 지킬려는 태도는 소위 교회에서 말하는 이론에 대해서도 그대로 실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리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죄를 전가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것’도 자신의 장한 노동이 되는 겁니다. 그 어떤 방법이라도 죄인이 내가 의인으로 변신이 가능하다면 뭐든 할려고 합니다.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룩은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10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즉 인간이 시도하는 거룩과 예수님께서 만들어낸 거룩은 인간 내부에서 흡수되어 하나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버립니다.

따라서 주님의 거룩이 인간 내부에 심겨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악체계로 만들어낸 거룩은 철저하게 와해되어야 합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은 극심하게 분노합니다. 열왕기하 6:31에 보면,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이 다음과 같이 분노합니다.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왕은 자기 백성이 아람군대에 의해 완전 포위에서 양식이 떨어져 살지 못하는 광경을 보고 하나님에게 격분합니다. 그 분풀이를 하나님의 사자 엘리사를 퍼부어 죽여버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들의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말씀보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호신용을 갖고 있는 권총에 늘 총알 채워놓는 일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오기만 나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에게 내일 츰 풍성한 양식이 마련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왕하 7:1) 그 실무진이 있었으니 사람 대우 못받는 네 명의 문둥병자들입니다. 이들은 꽉찬 적진 속으로 갑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 네 명의 문둥병자에게는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막상 가보니 적진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통해 거룩을 부여받는 성도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텅 빈 세상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들이니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거룩만 보이는 말씀과 기도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디모데전서 4장 4-5절(오기와 감사)22110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4장 4-5절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 감사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이게 전부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그 하나님은 전부터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 나라에 먼저 나타난 그 하나님을 말합니다. 여기 나오는 감사, 그리고 말씀, 기도, 이것은 이방인들이 나설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은 이 감사를 어떻게 했고, 이스라엘은 말씀을 어떻게 했고, 이스라엘은 기도를 어떻게 했느냐, 그걸 파악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뭐냐? 이방인은 말씀 볼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고, 기도할 권한과 자격도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기도와 말씀은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말씀과 기도를 당부할 때 그 전제조건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계약이었습니다.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맺으시고, 또는 달리해서 계약을 맺으시고, 또 달리 말하면 약속을 맺으시고 그 약속이 약속되게 계약이 계약대로 성사되도록 그들은 말씀을 해석해야 되고 그리고 기도내용도 계약이 계약대로 성사되기 위해서 기도한 거예요.

이방인들이 그냥 해나 달이나 보면서 하는 기도, 포항에 해 뜰 때나 달들 때 산에 가서 빌고 기도하는 그런 기도, 그런 기도는 기도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왜? 계약이 없잖아요.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도는 이것은 무용지물이에요. 소용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뜻은 이거예요. 계약안에 들어온 자만 거룩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거룩은 계약이 없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이는 인간이 알고 있는 계약과 섞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이 거룩과 선함은 이것은 체계가 달라요. 이건 선악체계거든요. 네가 알아서는 안 될, 갖춰서는 안 될 선과 악의 체계, 선악 지식에 의한 말씀과 기도와 거룩은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일체 거부하십니다. 체계부터 바꿔야 돼요. 선악체계에서 이스라엘에게 준 언약체제 체제로 바뀌어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뭐냐? 전쟁역사인데 계약이 있는, 계약이 체결된 이스라엘과 계약이 없는 민족, 우상이지요, 우상과의 전쟁터에 자기 이스라엘을 보낸 겁니다. 따라서 이 전쟁승리,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전쟁의 승리는 뭐냐? 하나님의 계약의 승리에요. 하나님의 약속의 승리입니다.

그 약속은 어디서 왔는가? 그 약속은 이 세상 만들기 전부터, 창세 전부터 준비된 거였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은 뭐냐? 창세 전부터 준비된 겁니다. 그러면 거룩은 어떻게 생기는가? 주시는 거지요. 그냥 거룩은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거룩은 선물입니다. 따내는 게 아니에요.

거룩은 계약안에서 거룩이기 때문에 그냥 주실 때 어떻게 주시는가? 계약의 이름으로 주시고 언약의 이름으로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이나 기도의 해석에 대해서는 계약에 준해서, 계약에 토대를 해서 주어져야 돼요.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거룩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간단해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선물이거든요.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신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심으로서 거룩함을 얻게 된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스도가 뭐냐 하면, 계약 성사자거든요. 계약을 유일하게 달성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만, ‘자에게만’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그 ‘안에서만’이에요, 그 안에서만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선악체계에 있기 때문에 선악체계에서 나름의 거룩 개념을 갖고 있어요. 인간들이, 거룩이 뭐고, 의로움이 뭐고, 선함이 뭐고, 그리고 하나님이 뭐냐, 를 선악체계 안에서 조작해 내는 겁니다.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 맘이 비어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난 시간인가, 귀신들렸다 했지요. 귀신이 부추겨서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지요. 울산강의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이 배고파서 따먹은 것이 아니라고요. 배고프지도 않은데.

인간이 배고플 때는 먹을 것을 원하지요. 그러나 배부르고 난 뒤에는 또 무엇을 원하지요. 그게 여분의 것이거든요. 인간이 배부르고 난 뒤에 또 찾는 게 있어요. 그 또 찾는 것, 그것은 자기를 완전한 자, 선악에 의해서 완전히 선과 악을 통제할 수 있는 자, 악마가 그걸 시도합니다.

악마가 시도하는 것을 인간이 같이 시도하고 있는 것을 인간이 배부른 상태에서 원했던 겁니다. ‘신만 신인가? 나도 신좀 되자. 하나님 되자.’ 이게 악마의 마음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악마에 대해서 저주하기로 작심을 했어요.

작심을 하고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내에 이 세상에 내려보냈습니다. 말라기 1장 2,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여기에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만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맞은편에 미움을 동반해서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은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사랑받았습니까, 사랑의 대상입니까?”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에요. “사랑의 대상입니까, 여러분은 복의 대상입니까?” 잘못된 질문이에요. “복의 대상입니까, 저주의 대상입니까?” 반드시 저주와 같이 동반해서 질문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세계를 둘로 나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이 둘로 나누어진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둘로 나눠져요. 저주받을 이스라엘과 복 받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언약을 통해서 구분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다, 그 거룩한 백성을 따로 뽑아낼 때는 필히 거룩할 수가 없는, 도저히 거룩하지 말아야 될 그 사람들도 작업을 통해서, 언약작업을 통해서 현장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 생겨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룩을 이 땅에서, 하늘에서 생각하는 거룩이 이 땅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들에 의해서 튕겨져 나가면 튕겨져 나간 그 분이 바로 거룩한 분이에요. 인간들은 이미 선악체계가 있어가지고 나름대로의 거룩 개념, 선한 개념, 의로운 개념이 있어요. 신이 되려면 이 정도 착해야 신이 된다는 그 개념이 있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율법을 준 거 가지고 ‘하나님, 내가 이 율법을 가지고 지킴으로서 내가 거룩하게 되겠다.’ 하는 그 심보가 인간 속에 있어요. 그런데 그 거룩은 거룩이 아닙니다. 그 거룩 때문에 진짜 거룩이 튕겨져 나갈 때 튕겨져 나가는 그쪽이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한 진짜 거룩, 하나님이 원한 진짜 거룩이 인간들에게 튕겨져 나와서 생기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내가 고수하고 싶은, 내가 간직하고 싶은 나의 거룩에 튕겨져 나간 그 거룩이 진짜 거룩이에요. 그래서 거룩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에만 주어지지 나의 몸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거룩을 부여받는 것이지, 선물로 받는 것이지 내가 거룩의 생산자가 되지를 못해요.

여러분 무엇 때문에 말씀 봅니까? 무엇 때문에 기도합니까? 거룩해지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가짜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거룩할 자격도 없고, 말씀 볼 권한도 없고, 기도할 자격도 안 돼요. 애초부터 썩었어요. 인간의 마음이 선악적으로 썩어버린 상태에서 그 썩었음을, 이미 쓰레기인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냈는데 우리는 주의 말씀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때문에 내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신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교회에서 그 짓 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 짓을 해야 될 이유가 뭐냐? 진짜 거룩은 바로 나로 인하여 튕겨져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스스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우리는 선악 체계에 의해서 훌륭한 사람 되고 싶은 거예요. 착한 사람 되고 싶은 거예요. 착하면 뭘 얻는다? 복을 얻을 거니까. 이 유혹에서 우리가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나의 거룩에서 구출되야 돼요. 그게 거룩이에요. 나의 착함에서 구출되어야 돼요.

울산강의 하러 가게 되면 울산역에서 강의 장소인 교회까지 차에 태워주시는 권사님이 계신 데 권사님이 차 타고 가면서 지난날에 있었던 자기 고백을 해요. 내가 참 그동안 나쁜 짓도 많이 했는데, 약간 치매기가 있는 자기 친구가 있는데 보험 하는 친구를 통해서 내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치매기가 있으니까 내가 보험금을 가로챌 수도 있지 않겠느냐?’

“역시 나는 이제 복음 알고 돈은 멀리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돈이 생길 수 있다 싶으니까 탐욕이 나더라. 친구 속여서 돈이나 좀 받아낼까, 그런 생각을 한때 했습니다. 참, 목사님, 제가 이렇게 죄인입니다.” 하길래 제가 했어요.

“권사님, 지금 죄 근처도 안 갔습니다. 내가 그렇게 회개함으로 나의 건전함을 유지하려는 그것이 더 큰 죄입니다. 지금 권사님은 본인관리하고 있어요. 본인 거룩관리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성도답게 빛과 소금으로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성경 말씀을 지금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짜 죄를 감추는 바리새인적인 방식입니다.”

거룩이라 하는 것은 나로 인하여 튕겨져나간 그분이 말씀과 기도, 말씀에 열심이고 기도에 열심인 나한테 튕겨져 나간 그 분이 진짜 말씀, 진짜 기도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왔을 때 우리는 격분하고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뭘 건드려서 격분하고 분노하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인간은 인간의 거룩, 인간의 착함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노동의 가치를 기반하고 있어요. 인간은 뭘 행합니다. 행할 때 그냥 행하지 않고 그 행함에 대한 그 가치를 같이 거기서 얻고자 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독자적인 자기 노동에 꽂혀서 삽니다. 그래서 자기 거룩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도 자기 노동의 일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보내신 거룩은 왜 인간에게서 튕겨져 나가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노동의 가치로 만들어진 거룩이 이미 안에 버티고 있는 거예요. 버티고 있는데 이 가치를 외부에서 온 주님의 십자가가 건드려버린 거예요. 모독했다 그 말이지요. 내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려는 나의 가치를 십자가가 모독해 버린 거예요. 모독하니까 우리는 내 의가 건드려진 것에 대해서 격분하고 분노하게 된 겁니다. 이게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의 특징이에요.

열왕기하 5장 10, 11절에 보면 거기 나아만 장군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문둥병자입니다. 오늘 문둥병자 여러 명 나올 거예요. 그 문둥병자가 이스라엘에 용한 치료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엘리사 찾으러 이스라엘에 왔을 때에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벌써 나아만 장군의 성질을 건드렸어요.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문둥병으로 생긴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여기서 나아만 장군이 격분하고 있습니다. 내 방식대로 왜 나를 안 고쳐 주냐, 그 말이지요, 내 방식대로. 주님의 방식은 우리의 성질을 건드리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돼요. 왜냐하면, 튕겨져 나간다는 그 차이성이 발생되어야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거룩을 위해서 살지 외부의 거룩에 빌붙어 사는 그런 비겁한 사람이 되기 싫어하는 게 인간이에요. 인간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이 비겁한 자라는 것, 얍삽한 자라는 것, 그것이 제일 듣기 싫은 거예요. 주님은 제일 듣기 싫어하는 그것, 얍삽한 것, 비겁한 것, 그 경로를 거치지 아니하면 우리에게는 거룩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여기 감사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거룩을 받았다는 그 증거가 뭐냐? 감사예요. 감사인데 인간은 감사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오기로 삽니다. 자기 오기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 것 아직 건재하다는 뜻이에요.

내 것, 내가 지키려는 내 것이 건재할 때는 뭐든지 나오는 것이 전부 다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것이 전부 다 오기로 나와요, 오기로. 그러니까 항상 긴장되어 있지요. 누가 내 노동의 가치를 건드릴까 싶어서. 노동의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이 돼요.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가치 있다 하는 것은 얼마나 나한테 수입으로 전환되었느냐, 그걸로 측정이 가능해요.

이것은 돈이 있다는 것은, 내 생존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따져서 나의 나 됨의 가치를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내 노동의 가치를. 그런데 사람이 격분하고 분노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가치에 방해가 되고 나의 가치에 흠집 나는 경우에 인간은 격분하게 됩니다. 평소에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게 되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인생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이래요. 인간은 평생을 복수하는 일념으로 사는 존재, 그게 인간입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죽여버린다.’ 복수하는 일념이 인간의 내부에 좍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냐? 나는 너를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살릴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뭘 살리느냐? 쓰레기를 건드려서 나오는, 튕겨 나오는 그 거룩을 살리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죄인을 경유해서 나오는 그 거룩이에요. 그 거룩을 살리겠다는 거예요. 거룩은 죄인에게서 튕겨져 나오는 그 공정이 필요해요. 죄인에게 밉상받지 않으면 거룩이 거룩이 아닙니다.

인간의 거룩은 순수함이지요. 하나님의 거룩은 순수함이 아니고 언약이 언약대로 성취된 그 결과물이 거룩이에요. 기도와 말씀은 거기에 투입된 겁니다. 다릅니다. 인간의 거룩은 순결하고, 순수하고, 온전하고, 그런 것이 거룩이지요. 하나님의 거룩은 죄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그게 거룩이에요. 희생당한 게 거룩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애초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한 자체가 없습니다. 화학시간에 실험을 하게 되는데 수소를 발생시키는 실험은 이렇게 진행돼요. 삼각플라스크에 마그네슘 조각을 넣습니다. 그다음에 유리관을 꼽고요. 고무마개를 끼우고 유리관을 뽑아내지요. 그 유리관에다 깔대기에 링 장치를 해서 클램프라는 것, 딱 집거나 풀어서 떼거나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그걸 끼우고 고무관을 연결해서 물 채운 수조에 연결시킵니다. 그 유리관을.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유리관에 집기병, 발생된 수소를 모을 집기병에 물을 채우고 여기서 중요한 게 거꾸로 뒤집어서 넣어요. 거꾸로 뒤집어서 물속에 넣어요. 거꾸로 뒤집어서. 그리고 클램프를 열어서 묽은 염산을 깔때기를 통해서 떨어뜨리게 되면 그게 마그네슘 조각과 만나 가지고 수소가 생성되거든요.

그러면 그 수조 안에서 수소가 보글보글 올라올 때 그걸 집기에 담아 모을 때 그 집기병이 거꾸로 처박혀 있으니까 나중에 꽉 차면 유리판으로 해서 입구를 닫고 고이 끄집어내야 돼요. 그 집기병을 우리라고 보게 되면 하나님의 그 생산된 거룩을 모을 때는 집기병이 거꾸로 처박혀야 돼요. 죄 속에.

그러면 그 집기병을 우리라고 할 때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캑캑! 이러겠지요. 캑캑! 거꾸로 처박혔으니까. 우리의 가진 모든 것, 우리 죄를 다 토해 내야되니까. 원래 죄가 가득 차 있던 그 현장을 하나님의 거룩으로 채우는 방식이 하나님의 거룩이에요. 너 있는 것 다 토해 내라는 거예요. 있는 죄를, 선악체계에 의해서 생긴 그 개념들 다 토해내라는 거예요.

거룩의 개념이 두 개예요. 선악체계에서 나온 개념이 있고 언약에 주어진 개념이 있는데 언약에 주어진 개념은 선악체계가 없으면 생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하다, 선하다, 하는 그것, 성경 말씀대로 산다, 이 모든 것을 다 그대로 처박혀서 뽑아내야 돼요. 다 끄집어내야 돼요.

왜? 그게 우리의 노동의 가치니까요. 노동의 가치니까 내가 나답게, 훌륭하게 되기 위한 모든 노동의 가치를 다 쏟아내야 돼요. 그걸,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말씀 보는 것 다 쏟아내야 돼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흠모하고 자기의 가치를 사수하기 때문에 복수심으로 살아갑니다. 이 복수심은 어디서 등장하느냐? 항상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하거든요.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엄마와 아들이 있는데 실제로 <마더>라는 영화도 나왔지만,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어요. 아들이 집에 있을 때 형사가 와서 아들을 수갑 채워서 데려가니까 그 현장에 있던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착한데! 우리 아들은 결코 사람 죽일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발악을 하면서 아들이 경찰서에 잡혀가는 것을 엄마가 저지합니다.

그 엄마가 나예요. 나를 누가 지키느냐? 엄마같은 나가 나를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사가 하는 말이 기가 차서는, “그러면 자세한 것은 경찰서에서 알아보세요. 같이 가시든지.” “우리 애는 절대로 나쁜 짓 할 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옆에 있는 내가 더 잘 압니다. 우리 애는 사람 죽일 사람이 아닙니다.” “경찰서에 같이 가서 한번 조사 해 봅시다.”

경찰서 가 보니까 자기 아들이 다 자백하고 내가 사람 죽였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다음에 엄마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애걸을 합니다. “형사님, 얘 교도소 보내지 말고 이 늙은 나, 나는 살대로 다 살았기 때문에 늙은 내가 감옥살이 할 테니까 나를 집어넣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애의 주인은 바로 그 엄마예요. 내가 나의 주인이에요. 내 노동으로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내 노동으로, 선한 노동으로. 기도하는 노동과 말씀을 배우는 노동으로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경찰서에 그런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그리고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경찰서에서 형사가 “이 아들의 죄는 우리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다 담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를 담당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엄마가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을 상대로 주님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입니다. 뭐냐 하면 내 아들의 죄를 전가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요. 이거 사기 아닙니까? 이 사기가 2천 년 되었어요. 2천 년 넘었습니다. 교회라는 이 사기가. 내 죄를 전가하기 위해서예수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왜? 죄인을 의인으로 변신하고 싶어서. 이것도 노동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노동이에요. 믿음이라는 노동입니다.

사람이 공범끼리 나중에 잡히면 배신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자기 죄를 저쪽 같은 공범에게 덤터기 씌우기 위해서, 자기는 빠지기 위해서 전가하는 거예요. 왜? 나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으나 평소에 바르게 살려고 하는 시도를 하나 전부 다 뭐냐 하면, 내 것 건드리면 누구든지 죽여버린다는 이 일념의 연장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교회 와서 말씀 지키고, 실천에 옮기려 하고 기도한다는 이것이 뭐냐 하면, 내 것 건드리면 죽여버리기 위해서 권총에다 총알 하나씩 채우는 행위나 똑같은 행위에요. ‘하나님, 보이지요? 말씀 또 지켰습니다. 보시지요. 기도 또 두 시간 했습니다. 이런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총으로 쏵 죽일 거야.’ 계속 총알 채우는 거예요. 호신용 권총, 나를 지키는 호신용 권총, 내 뜻과 내 가족과 내 재산을 지키는 호신용 권총으로 교회 나오는 겁니다. 이래도 거룩 아니냐고, 이래도 나보고 죄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고.

여러분,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자기 생각을 하되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을 알고 자기 생각을 합니다. 분노하거나 격분할 요소가 성령이 오게 되면 그게 날아가 버려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디모데전서 1장 13, 14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 디모데전서 4장 하는데 1장 벌써 지나갔지만 여러분이 아마 잊었다고 여기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13절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믿지 아니할 때. 사도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자기가 뭘 이야기하느냐? 내가 바로 불신자였다는 겁니다. 내가 불신자의 요소를 가지고 캑캑거리면서 이 죄로 처박히는 거예요.

내 자세가 ‘오라. 내가 지키리라.’가 아니라 아예 처박히게 만들어요. ‘불신자로서 불신자에게 행할 어떤 것도 저는 거기에 대해서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불신자이기에 받을 모든 처벌과 저주를 마땅한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래서 처박히는 거예요. 캑캑거리면서. ‘내가 불신자 맞다.’ 토하면서 거꾸로 처박혀서 토해지는 게 다 불신의 것만 나왔으니까. 착하면 착할수록 복 더 받을 거고, 못되면 저주받을 거라는 이 불신의 생각, 선악체계의 생각, 이거 하나님을 상대로 사기행각 벌이는 거잖아요.

거룩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줄 때 생기는 것이고 우리 내부에서는 거룩은 없습니다. 우리 자체가 거룩을 생산치 못해요. 우리 자신이 마귀와 한통속이 되기 때문에 거룩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내가 의인 된다고 고마워하는 감사는 거짓 감사예요. 감사는 그렇게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의 남은 것은 오기, 오직 오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박 오기, 최 오기, 김 오기, 오기입니다. 오기 하나로 버티는 겁니다. 각자 호신용 권총 하나씩 갖고 있지요? 다 총알 꽉꽉 채우고 있지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그냥 쏴버린다. 내가 왜 거룩 아닌데? 내가 어딜 봐서 죄인인데?’

그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은 ‘어딜 봐서 내가 죄인이냐?’라고 큰소리치고 교인들은 ‘나 죄인이라고 주장하잖아.’ 이것 가지고 큰소리 쳐요. 반대되는 것 같지만 똑같은 의식입니다.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내 인정하잖아. 죄인이라고, 천하의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인정하잖아. 됐잖아. 뭐! 뭐!’ 이러고 있어요.

이 성경에 이스라엘 역사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의 거룩이라는 것은 계약에서 오는데 그 계약이 레위계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을 아론, 모세의 형되는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선택을 했어요. 선택을 해버리면 레위계약인데 이게 모세계약이거든요, 레위계약, 같은 말로 모세계약인데, 모세계약에 의하면 ‘계약+인물’ 이렇게 결합돼요. 하나님의 율법, 계약이 율법입니다, 거룩한 율법과 인물이 결합이 되면서 레위지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이스라엘 내부적인 요소, 거룩의 요소를 따로 상정하기 위해서 열 세 지파를 만들어요. 열 세 지파 만들어서 따로 한 지파 레위지파를 따로 떼 냅니다. 따로 떼 내게 되면 나머지 열두 지파는 따로 떼 낸 한 지파, 레위지파에 종속되는 조건 하에 거룩한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민수기 3장 11,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대신한다는 것은 대표한다는 뜻입니다. 레위지파 한 지파 안에 열두 지파, 나머지 지파가 다 들어 있는 양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성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어떤 관계냐? 레위지파는 거룩한 지파가 되는 겁니다. 따로 구별된 거룩한 지파가 되고 그다음에 열두 지파는 뭐냐? 그 레위지파와 더불어 사느냐, 안 사느냐에 따라서 거룩의 혜택을 입느냐 안 입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여호수아 21장 4-6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레위지파한테는 땅이 없어요. 땅이 없어서 땅을 어디에 두느냐? 각 지파, 열두 지파 전체에다가 다 삽입을 시켜놔요. 파견근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열두 지파가 뭐냐? 열세 지파 중에서 레위지파는 따로 있고 나머지 열두 지파는 뭐냐? 그 레위지파가 갖고 있는 열두 개……, 여러분, 열두 토막 살인사건 알지요.

레위인의 첩을 열두 토막으로 내서 모든 열두 지파에게 각각 나눠줌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부정당하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 열두 지파는 레위지파를 담는 하나의 그릇으로서만 활동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찐빵에서 열두 지파는 밀가루 부분이고 앙꼬 부분이 레위지파가 파견근무하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가 나오는데 유다하고 베냐민 지파에서 레위지파가 13성읍을 얻게 되고,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 지파에서는 10개, 잇사갈, 아셀, 납달리에서는 13성읍이 레위지파에게 할당되고요, 스불론, 르우벤, 갓 지파에서 12개, 총 48개의 성읍을 레위지파가 분산 할당받는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열두 지파 지역 전체가 거룩이 삽입되지 않는 지역은 없고 다 거룩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형태에요. 그러면 ‘이 레위지파 네가 뭔데 거룩을 이렇게 독점하고 있느냐?’ 민수기 3장 4절에 보면, 레위지파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운 것이 제사장이거든요. 제사장 가족에게 일이 터집니다. 어떤 일이 터지느냐? 죽음사건이 터집니다.

아론의 아들이 네 명인데요. 네 명 중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고 무자하였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 아비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네 명 아들 가운데 두 명이 죽습니다. 죽는데 어디서 죽는가? 하나님의 성막에서 하나님과 직접 일을 하다가 죽어버려요.

그러면 이것이 뜻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심판을 전제로 한 인간을 죽여버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죽은 자를 어떻게 언약이, 계약이 거룩한 자로 살려내느냐에 관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거룩은 착하라, 가 아니라 ‘너는 이미 죽었고 이 거룩이 없으면 나는 너를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 하나님의 계약안에 있습니다.

죽은 자를 외부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이 들어감으로써 그 거룩을 살린다는 취지에 합해서 죽은 자가 같이 합세해서 같이 덩달아서 살게 되는 혜택을 입는 거예요. 거룩의 혜택이지요. 물밖에 없던 곳이 수소로 변하는 집기병처럼, 수소 집기병처럼 거꾸로 처박혀서 다 나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어요. 사도바울이 성령 받기 전에는 사울이었거든요. 사울이 평소에 하는 일이 뭐냐?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오직 거룩이었습니다. 오직 거룩밖에 몰라요. 거룩한 삶, 율법대로 사는 사람, 잘 살기 위해서, 바르게 율법대로 살기 위해서 율법을 더 연구하는 삶, 그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에, 주님 찾아오고 난 뒤에 그게 바로 불신자의 정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라는 그 요소를 자기가 버리지 않아요. 왜? 감사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노동으로 해내거나 나의 행함으로 해낼 수 없는 게 바로 감사고, 그 감사가 나온다는 말은 ‘내 안에 주님주신 거룩 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것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님 주신 거룩이 있는 거예요. 감사가 되는데 이 감사가 되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주께서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살고자 하는 나의 기억은 말소당하고요, 무산되고 주께서 너를 죽여서 거룩만 살게 하는 그 주님의 기억만 계속해서 우리 안에,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해서 계속해서 그게 되풀이되고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거룩에 의하면, 감사되는 상태에 의하면, 언약에 의하면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의 계약이 거저 주어지듯이 그냥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말씀과 기도는. 기도 어떻게 합니까, 늘 물음의 내용이 되고 관심사가 되는 질문이에요. 마태복음 6장 5,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 은밀한 거예요. 예수님은 은밀하다고 이야기했지요. 구약에서는 기도를 누가 하느냐? 레위지파만 기도하고 제사장만 기도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기도 못 합니다. 제물을 처리하는 자가 기도하는 자에요. 구약에서 모세계약에 의하면, 레위계약에 의하면.

그 레위계약을 영원히 하겠다는 게 말라기 2장 1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말라기에서 “네가 제물을 엉터리같이 바쳐놓고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느냐, 이 레위인들아!”라고 이야기한 게 말라기의 레위기 내용이에요. 기도는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기도할 자격이 없어요.

그 당시에 누가 입이 없습니까, 눈이 없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왜 요구하는 게 없겠어요?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이방인들이 기도한 것처럼 뭐 막 희한하게 생긴 느티나무만 봐도 빌잖아요. 평소에 자동기계 같아요. 비는 게요. 우리한테는 말씀을 볼 자격도 없고요, 기도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기분 나빠 하지 않는 이유는, 평소에 ‘내가 하겠다는데 자격이 무슨 소용 있나? 내가 성경 보겠다는데!’ 자기 노동에 도취되어 가지고 ‘내가 성경 보고 내가 기도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이런 오기지요. 이런 오기가 있기 때문에 그 딴소리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기도할 자격도 없는 게 기도하고 말이지요. 말씀 봐야 보아도 깨닫지도 못하는 게 무슨 말씀 보겠다고 덤비고요. 이스라엘 그들도 기도했고 말씀 봤습니다. 다 엉터리였습니다. 하는 족족 다 엉터리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느냐? 이스라엘을 비겁하게 만들어서 구원하십니다. 그게 여호수아에 나와요.

여호수아 8장 7-9절에 보게 되면 여리고성 함락하고 난 뒤에 까불면서 아이성 치다가 졸지에 사람만 죽고 쫓겨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아간의 죄를 색출하지요. 그들이 돌로 아간을 시체로 만들고, 돌무더기 만들고 난 뒤에 아이성을 재차 공격을 할 때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너희가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였느니라 하고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복병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서 잤더라.”

여기 매복이 나오지요. 매복이란 뭐냐? 비겁하게 싸우는 거예요. 도망치는 것처럼 상대방을 속이는 겁니다. 나는 나하고 동업자거든요. 내 노동에 대해서 내가 나서서 변호합니다. 일종이 <마더>지요. 내가 나의 어머니고 나의 그 어머니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이 공범자들이 틀어져야 돼요.

누구 하나 배신해야 됩니다. 누가 하나 비겁한 자가 되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비겁하게 전쟁에서 승리케 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내가 했습니다.”라는 말을 못 하게 만드는 것, 그걸 감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감사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나는 거지입니다. 주시는 대로 족족 감사할 밖에 없습니다. 나의 노동 그딴 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나를 지키는 거 그게 바로 불신자였더랬습니다.’ 그게 불신자였어요. 이 정도 하면 거룩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신앙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말씀 보면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불신자였어요.

그 불신자,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습니까? 그 불신자를 배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살아온 평생을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을 배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기억을 말소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 기억으로 바뀌어야 돼요.

왜? 주님은 바로 나로 인하여 튕겨져 나갔기 때문에, 내가 권총으로 쐈기 때문에, 내가 쫓아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나를 분노케 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어요. 주님 보고. ‘나는 내 식대로 살련다. 아무리 주님이지만 내 자존심과 내 가치를 훼손하면 나는 용서하지 않는 이게 정말 나의 나다움입니다. 나가세요!’ 격분하는 거예요.

그 격분의 이야기가 열왕기하 6장 31절에도 나옵니다. 여호람이라는 되지도 않는 아주 엉터리, 우상 섬기는 왕이 이스라엘 왕이었는데 아람 나라가 그 때 이스라엘을 완전 포위했습니다. 모든 보급로가 다 차단 되어서 굶어 죽을 판이에요.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던지 콩고공화국, 아프리카 그 나라 못지 않습니다. 지금 콩고공화국이 물이 없어서 죽을 지경이지요.

열왕기하 6장 28절에 보면 왕이 몰래 보는데 두 여인이 싸웁니다. “우리 분명히 약속했잖아. 오늘 우리 애 삶아 먹으면 내일은 네 애 내놓는다고.” 그런데 자기 애만 삶아 먹고 하루 연명하더니 그다음 날 네 애 내놓으라 하니까 안 내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약속대로 하지 않느냐고 싸우는 그 모습을 보고서 왕이 분노했는데 그 분노의 탓을 누구에게 하느냐? 하나님의 사자 엘리사 탓을 합니다.

6장 31절에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내가 엘리사 만나면 죽여버린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을 못 죽이잖아요. 하나님은 영이니까 못 죽이잖아요. 하나님의 사자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왕의 소신 의지를 그대로 감추지 않고 드러낸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이 여호람이라는 이스라엘 왕의 뭘 건드린 거예요? 도대체 뭘 건드려서 그렇게 격분하고 분노한 겁니까? 이 백성들 내 소유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람 군대로 완전포위해서 내 백성이 지금 먹을 게 없어서 자기 자식을 먹을 이 처참한 지경까지 왔으니, 참혹한 지경까지 왔으니 하나님이 책임지라는 거예요. ‘우리가 뭐 그리 잘못됐습니까?’ 그때 권총 없었으니 천만다행이지 권총 있었으면 엘리사 죽었습니다.

열왕기하 7장에 엘리사가 나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에요. 그 사마리아가 포위되어 있는 겁니다. 1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풍부하게 먹을게 넘치게 된다. 언제? 내일 이맘때쯤에. 그때 한 군대 장관이 웃으면서 “진짜 네가 미쳤구나. 하늘에서 창을 낸 들, 창문을 열어서 쏟아낸들 이것은 신이 와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네가 구라를 떨어도 어느 정도 껏 해라.” 그런 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실무진이 있어요. 주의 일의 실무진이 누구냐? 지금 아람 군대 적들이 가득 차 있잖아요. 꽉 차 있는 적진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네 명이 몰래 성을 탈출해서 적들이 꽉 차 있는 그곳에 갔어요. 그들이 누구냐? 마음이 텅 빈 사람들이었습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에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스라엘 왕은 자기 것이 있는데 네 명의 문둥병자는 자기라는 게 없어요. 자기 것의 자기가 없어요. 거꾸로 처박힌 집기병이에요. 그냥 이 땅에 저주받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네 명의 문둥병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문둥병을 줬거든요.

꽉 찬 게 아니라 텅 빈 마음을 가지고 그냥 꽉 찬 적진에 갔습니다. 가니까 적진이 텅 비어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의 거룩이 있는 사람 앞에서 세상이 수십만이 이태원에 모여도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겁니다. 거룩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까. 거룩이 있는 사람은 천명을 만나든 만 명을 만나든 전부 다 쓰레기만 만나는 거예요. 자기가 쓰레기니까 기대할 것도 없고요. 그들에게 얻고자 하는 마음도 필요 없어요.

텅 빈 마음으로 가니까 적들이 다 버리고 갔어요. 전쟁 물자 다 놔두고 도망치고 말았어요. 무슨 소문이 돌아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네 명이 실컷 먹고 난 뒤에 9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아름다운 소식. 두 자로 줄이면 이게 복음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이 복음을 우리만 나눌 게 아니고 성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자.” 복음은, 이 거룩한 복음, 감사가 되는 거룩은 이렇게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이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을 때, 성령께서 그걸 다 게워내게 할 때, 캑캑, 토하게 만드는 그 작업, 감사 안할 게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나는 믿지 않는 자였다, 나는 믿지 않는 자였다. 거룩, 그리스도 몸으로 거저 주는 거다.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게 바로 계약에 준한,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 노동으로 얻는 게 아니라 계약에 준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거룩입니다. 감사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그런 차원에서 주의 기도로 거룩을 얻었고 주의 말씀해석으로 우리에게 거룩이 선물로 왔으니 매사에 감사함으로 숱한 사람들 속에 가시기 바랍니다. 이태원에도 한번 가 보고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숨기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이 행한 노동의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불신자, 이 불신자를 거꾸로 뒤집어서 다 토하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이 다 이루심만, 그 안을 가득 채우시는 이 거룩만 자랑하면서 감사하면서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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