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가벼운 경건

아빠와 함께 2022. 11. 14. 08:10

설교노트

 

가벼운 경건 

2022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4:6-11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4: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4: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사도 바울은 약속과 닿는 경건과 약속과 닿지 못하는 경건을 구분짓습니다. 약속과 닿지 못한 경건은 이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경건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주님의 경건의 특징은 인간들이 해내는 경건생활과 다릅니다. 새로움입니다. 인간들의 경건은 자체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22에 보면,“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경건생활은 새로움이 없습니다. 이미 생각해 두었던 것을 계속 반복할 뿐입니다. 새로움이 되려면 자신이 공들인 모든 시도가 다 무산되어야 합니다. 원래 인간은 살아온 세월 전부가 일거에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평생 박동이 멈추는 날이 오면 살아온 모든 것을 취소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공연히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인간 경건의 말로가 이러합니다. 반면에 주님이 주시는 경건은 주님의 삶의 체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동참은 끝은 이미 주님께서 홀로 완료시켜 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피를 마셔라”입니다.(마 26:28)

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최종적인 경건이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종결될까요? 그것은 인간들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고 여기니 이 살아있는 자신의 몸뚱아리로 뭔가 의미있는 것을 해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단어 ‘살아 있다’는 단어에 유의해봐야 합니다.

이 ‘살아있다’는 단어를 인간과 주님에게 공히 사용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도리어‘죄와 허물로 죽어있다’고 하십니다.(엡 2:1) 즉 인간이 살아 있는게 아니라 죄가 살아있고 악마가 살아 있고 귀신이 살아 있고 주장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 피를 마셔라”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하고 최종적 경건이라도 인간은 이 경건을 맞이할 때는 예수님께서 체험했던 악마와의 시험도 같이 맞이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발언을 꼭 앞에 붙입니다. “네가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악마는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자의식을 흔들려하는 겁니까? 그것은 악마는 그동안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엄연히 ‘살아 있음’을 각인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는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식으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들의 평소에 본심을 대변하는데 이런 식입니다. “살아 있는 내가 봐서 당신이 과연 하나님 아들다운 증거를 보인다면 나는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판단해서 받을 줄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살아있음에 앞서 인간 본인이 살아 있음이 기정사실화된 조건 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 있는 분이 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최종 믿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들의 경건생활을 시도하게 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더욱 증진하는 목표로 경건생활을 매진하게 되는 겁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자기 가치를 지키려는 의도와 실패했을 경우의 난처함에 대한 겁이 묻어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서 꿈을 꾸게 합니다. 꿈이란 인간들이 신체가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생체시스템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심상치 않은 꿈인 것을 알고 그 꿈의 내용과 담긴 내용을 다른 신하들에게 알아내라고 닦달냅니다.

모르면 사정없이 다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왕에게는 그 꿈이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겁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평소의 삶은 자신의 부정성을 계속 깊숙이 감추어두겠다는 의도를 발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려견을 키우다든지, 술, 담배 같은 것은 자신의 어두움이 노출되는 것을 순화하기 위한 행동들입니다.

이제 죽게 된 신하들 중에 다니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남의 꿈을 하나님께서 지혜주셔서 알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느부갓네살이 곧 ‘신상(神象)’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결코 살아있는 자가 아닌 겁니다. 그냥 우상 덩어리에 불과하고 이는 모든 인간들의 본질이 다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 주신 것은 느부갓네살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니엘의 신체를 살려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체적으로 경건생활해봤자 인간은 죽음에 몰려서 결국은 저주받아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이 인간세계에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살과 피로서 죄인 몸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하신 겁니다. 인간 자체적인 그 어떠한 의도 없다는 조건 하에 철저한 죄인의 몸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려내신 겁니다. 이러한 조건이 되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정 이 세상에서 살아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인간도 예수님의 시험할 자격이 없습니다.

도리어 악마로부터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므로서 악마는 예수님에게 속한 인간도 예수님에게 속았던 겁니다. 자신을 결코 산 자도 아니요 경건생활을 해낼 자도 아니었던 겁니다. 씨를 뿌리면 밭의 본질이 비로소 노출되는 것처럼 모든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결코 인간의 살아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방법은 인간들로 하여금 마음껏 계속하고 목표 세우고 실적 거두려고 애쓰게 만듭니다. 마치 본인들이 엄연히 살아있는 자처럼 행세하게 해놓습니다. 그리고 난 뒤, 새로운 경건, 즉 예수님의 피가 “쓱” 들어서면 졸지에 인간은 주님의 경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독사와 장난치는 원초적 세계상입니다.(사 11:8) 즉 성도에게 있어 자기 인생은 죄도 죽음도 모르고 자기 생각도 할 필요없는 장난이었던 겁니다. 이것이 가벼운 경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의 새로움만 드러나는 일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18강-디모데전서 4장 6-11절(가벼운 경건)2211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4장 6-11절입니다.

디모데전서 4:6-11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여기 경건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따로 자기를 위해서 경건생활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나온 경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는 경건은 이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벌써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뭐가 없느냐? 1절에 보면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없습니다.

약속과 와 닿지 않는, 약속에 참여될 수 없는 경건이 이미 바리새인들이 해 왔었어요. 그래서 그걸 6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고 하는 말을 한 겁니다. 인간이 육체로 되어있고, 육체로서 자기 정신을 가다듬고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것, 이것이 일상의 생활에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과는 연이 닿지 않습니다. 관계가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가 그 말 할 때 베드로가 자기 모든 인생이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지금껏 자기가 한 번도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 주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말은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그 새로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새로움의 인상을 받은 거예요. 주님을 통해서 그 새로움이 뭐냐? 경건이라 하는 거예요.

약속에서 비롯되는 새로움과, 내가 내 육신을 관리하면서 나오는 구닥다리, 옛것, 맨날 해봤자 지루하기만 하고 따분하기만 한 나의 노력, 나의 경건스러운 노력과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지요. 아무리 교회 와서 열심히 한들 그것은 새로움이 아니에요. 새로움이라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와서 나를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우리 안에서 주님이 들어와서 그것을 밝혀주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경건은 없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날 관리한다면 그것은 죽는 순간에 우리의 평생, 박자, 삶의 리듬은 끝납니다. 끝날 때 그냥 공연히 이 세상에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인생은 뭐냐? 괜히 왔다가 괜히 없어지는 게 인생입니다. 이게 인간 경건함의 말로에요. 끝이에요. 실컷 경건했는데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허무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는 의미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의미 없으니까 의미 있으려고 경건 생활을 해온 거예요. 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우리의 그 부정성, 그러니까 우리 자신 안에 어떤 부정성,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를 부정하는데 그 부정성이 우리 안에 있어요. 있는데 우리가 경건의 노력을 하겠다는 것, 경건한 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이걸 애써서 억지로 이걸 계속해서 감추려는 방식의 삶을 살아온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죽어도 저주받아 죽고요, 경건 생활해도 저주받아 죽어요. 똑같습니다. 바르게 사나 나쁘게 사나 인간은 똑같습니다. 착한 개나 성질 더러운 개나 개는 개일 뿐이지요. 개가 사람 되는 것 없습니다. 인간이, 저주받은 인간이 이래도 저주받고 저래도 저주받는 건데 저주받은 인간에게 저주가 풀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요, 결국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태어난 원칙대로 그냥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아주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치워라” “훌륭하게 살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짓이다.” 인간이 노력하는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것, 이것이 인간의 경건 말고 약속에 와 닿는 주님의 경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보고 이야기할 때 인간의 그 무의미한 반복성에 대해서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지금이 아침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가 이 말씀을 도로 넣지는 못 하겠네요.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데 여러분들은 좀 마음이 꺼림칙 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자기가 먹고, 구역질 나지요.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이게 인간이 매일매일 일기 쓰듯이 하는 삶이 이런 삶입니다. 왜냐? 새로움이 없기 때문에.

왜 새로움이 없는가? 자기 속에 부정성을 애써 감추는 식으로, 덮는 식으로, 아등바등 덮는 식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정당하다, 나는 관대하다, 나는 훌륭하다, 이걸 계속 자기가 자기한테 억지를 부리고 그 부정성을 억누르는 거예요. 부정성을 억누르는 방법중 하나가 애완견을 키운다든지, 술을 먹는다든지, 담배 피우는 것, 허세 피우는 것, 그런 식으로 내가 어디까지 착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선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인자를 베풀 수 있는가를 계속 시험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모든 것을 무효화 시키는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냥 무효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이 개같이 자기가 토한 것을 또 먹는 인간들아 저리 가라.” 이렇게 그냥 하시는 게 아니고 근거가 있어요. 예수님의 경건은,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내 피와 내 살을 마시라. 이게 경건이에요. 이게 새로움입니다. 새로움이라서 새로운 교훈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한테 새로운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거 해, 저거 해, 그것은 새로움이 아니에요. 새로움이 무슨 새로움이냐 하면,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하든 어떤 짓을 하든 일체 묻지 않는 것, 그게 새로움의 관계에요.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주님께서 자기 백성의 몸 신체를 가격을 매기는데 가격이 뭐냐? 자기 피로 가격을 정해버렸어요. 죄악 된 중고품을 예수님은 자기 생명의 값으로 구입하신 겁니다. 중고를. 조건이 있어요. 일체 나의 의는 거기에 섞이면 안 돼요. 나의 의가 일체 없는 상태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버린 겁니다. 이게 약속이에요. 금생과 이생의 약속과 연결된 그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와서, 주님의 경건이 와서 이 새로움이 우리에게 밀려오면, 밀어붙이면 우리는 매일 매일 삶에서 우리가 무의미하다는 자기 자신의 부정성을 발견하는 혜택을 입게 됩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사람이 의미가 없는데도 의미를 자꾸 만드는 이유가, 자기 개인적인 목적과 목표가 있기 때문에,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계획이 있는 사람은 그 계획을 달성했을 때 의젓해지는 자기 자신을 미리 환상적으로 그걸 사모하게 됩니다. 그게 자기 가치지요. 그 자기 가치를 지키려고 하니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겁이 무척 묻혀 있어요. 겁이, 두려움이 묻혀 있어요. 말을 해도 상대방을 밀어내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내게 지킬 게, 지킬 가치가 있다는 뜻이에요. 달리 말해서 나는 무의미한 게 아니고 나는 의미 있는 존재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목표와 목적 이런 것, 이것은 예수님의 목표와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따로 있는 것 때문에 우리가 굳이 목표와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새로움은 뭐냐? 매일같이 일상, 하루하루를 우리의 목적과 계획을 제거하고 삭제해버리는 일이 일어나요. 매일같이.

그러면 우리의 삶은 뭐냐? 장난이지요, 장난. 이사야 11장 6-8절에 이런 말씀나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잘 들어보세요.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장난하는 거예요. 장난치는 것, 이게 원초적 세계의 삶입니다. 범죄하기 이전에 뱀하고 독사 그리고 이리하고 같이 장난치는 것.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어요.

주님은 우리 인생을 한낱 장난치는 것오로 여기게 만듭니다. 왜냐? 그것이 가벼움이거든요. 내 계획과 목적이 있어버리면 거기에 몰입한다고 우리의 모든 신체가 긴장감, 스트레스를 확 받게 돼요. 그게 발생되면 우리는 졸지에 가치 있는 인생이 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되면 내가 무의미한 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그 의미라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는 남들에게 상대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공격할까 싶어서 말 한마디를 해도 자꾸 밀어내요. ‘이 선 넘지 마세요.’ 자꾸 밀어낸다고요. 밀어내니까 본인은 겁이 많고 불안한 겁니다.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의 경건이라 하는 것은 가벼운 거예요. 경건이. 인생을 장난치면서 살아가는 가벼움입니다. 겁먹지 말고 가볍게 살라는 것, 이게 원초적 삶이에요. 원초적 생활이었습니다. 최초의 생활,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의 최초의 삶, 그 최초의 삶에서 인간에게는 뭐가 없는가?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었지요, 그때는. “죽는게 뭐꼬?” 죽음을 몰랐어요. 그래서 주님께서의 경건은 뭐냐? 그때처럼 지금도 “죽음이 뭐예요?”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루하루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님 자신의 경건 생활을 우리 안에 집어넣는 겁니다. 죽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거예요.

자 여기서부터 대단히 어렵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 어려운 이야기가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경건이 찾아오게 되면 무엇도 함께 찾아오느냐 하면, 주님이 악마로부터 시험 받았던그 사실, 그 체험도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있어요.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그 체험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집어넣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무엇을 만나느냐 하면, 바로 마귀의 시험과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 마태복음 4장에도 나와 있고, 그리고 누가복음 4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평소에는 인간은 악마라는 것을 느낄 필요가 없고 열심히 자기 계획대로 자기 가치 있게 살면 돼요. 내 것 지키면 되고 내 계획 세우고 내 목표 세우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원초적 삶, 처음에 아무것도, 죽음 자체도 몰랐던 그 가벼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장난처럼 아무 의미도 챙길 필요 없는 그 삶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주면서 우리는 주님이 당했던 시험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시험에서 악마의 현존함을 우리가 직감하게 됩니다.

악마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4장 3절에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라는 이 대목,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평생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도저히 삭제되지 않는 이것, 이게 바로 악마가 평소에 우리를 이런 식으로 조정해 왔던 멘트, 문장입니다.

‘네가 만일 성도라면, 또는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이러한 태도, 이 태도가 우리가 이미 마귀에 놀아나고 있고 배후의 마귀로부터 사주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가 천 독을 해도 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가? 이 앙금이 남아 있어서 그래요.

“만일 주님이 구세주라면” 그다음 뒤에 나오는 말은 간단해요. “주님이 구원자라면 저를 구원해 주세요.” 이게 바로 지옥 간 강도가 하는 이야기에요.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를 한번 멋있게 구원해보세요. 천국 보내보세요. 당신을 믿겠나이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희한한 일은요,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경건한 게 아니고 불경스러워져요. 오만해지고 건방스러워져요.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이, 이 멘트가 성경에서는 마귀로 되어 있지만 평소에 우리가 주님보고 늘 내뱉던 고백이에요. “예수님 맞기는 맞습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보고 “오실 자가 당신이 맞습니까? 메시아가 맞습니까?” 세례요한도 그 멘트를 했다는 말이지요. 교회 수십 년 다녔다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이 자기가 검증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믿겠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아무리 몸부림치고 맘부림쳐도 주님만이 갖고 있는 새로움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게 악마가 차단시켜 놓은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예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죽었지만 살아계신다고 믿고 싶은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 보지만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나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나는 성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한 그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처럼 주님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게 잘못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게 아니에요.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는 거예요. 이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제가 친절하게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본인이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거울 봐도 알 수 있어요. 뭔가 움직인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자기 신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움직인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살아 있다는 경우에만 움직여요. 돌멩이 같은 것은 못 움직이잖아요. 그것을 무생물,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생물체기 때문에 움직이는 거예요. 숨 쉬고. 따라서 ‘나는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나처럼 살아 있다.’ 그렇게 되면 살아 있다는 그 개념 범위에 나도 포함되어 있고 주님도 같이 포함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마귀가 인간을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마귀는 본인이 살아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마귀를 보고 살아 있다고 보지 않고 죄와 허물로 죽어있다고 본 거예요.(엡 2:1)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움직이더라도 죽은 대상이라는, 저주받은 대상이라는 주님의 그 개념을 악마가 몸소 나서서 완벽 차단시켜 놓고 ‘움직이면 산 것, 안 움직이면 죽은 것, 숨끊어지면 죽는 것.’ 그런 개념을 이 세상에 유포시켜 놓은 거예요. 확산시켜놨습니다.

그래서 뭐냐? 경건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어떤 훌륭한 행동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경건 생활이겠습니까?’라는 식으로 교회에서 이야기해요. 교회에서 경건 생활하려면 일단 내가 살아 있어야 되고요, 죽은 자는 활동 못 하니까 살아 있어야 되고, 살아 있는 자가 율법, 말씀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에 옮긴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한다. 이 조건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이미 해 왔던 거예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던 이유가,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살아 있는 본인들의 살아 있음의 의미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죽여버린 거예요.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뭐라 했느냐 하면, 너는 귀신들렸다고 했어요.

왜 귀신들렸다는 말을 하느냐 하면, 본인들이 귀신들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이것을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한 겁니다. 자기 속에 있는 자기 부정성을 숨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내가 내 속에 있는 부정성, 내가 저주받은 죄, 이런 것을 살아 있는 내가 밝혀내고 끄집어내겠다는 겁니다.

내가 밝혀낸 이 죄,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이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 여호와를 믿게 되면 이게 용서받는다는 것, 이게 바로 유대 신학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주장이었어요. 살아 있는 내가 지금 죄로 말미암아 허덕이니까 죽어서 천국 가려면 이 죄가 용서되어야 되는데 죄가 용서되는 방법은 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면, 이게 약속이니까, 아브라함 약속이니까, 이것을 지키면 죄용서 받는다는, 제사에 의해서, ‘어린양이 죄를 용서해주니까 제사의 의해서 죄씻음 받으면 살아 있는 내가 산채로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시작을 항상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이것은 기정사실로 의심할 수 없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나보고 죽었다고 하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럴 일은 없어. 나는 살아 있어. 다만 내 속에 죄가 있을 뿐이야.’ 그런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냐 하면, “네 속에 네 죄가 살아 있지 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그 죄로 말미암아 너는 죄와 허물로 죽은 거야.”(엡 2:1) 이게 주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나는 살아 있다. 문제는 내가 죄가 있으니까 예수 믿고 나서 죄를 적게 지어야 돼. 이러면 나는 경건한 생활하는 거야.’ 이런 경건이데 예수님이 말한 새로움, 경건은 뭐냐?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하는 그걸로 모든 게 끝장난 경건이에요. 끝난 경건입니다. finally, 갑자기 영어를?

모든 것이 마침내,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보면 ‘마침내’가 중요해요. “마침내 그녀는 웃었다.” 이런 대사가 나와요. 마침내, 마침내! 끝내버렸어요. 인간은, 살아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었음을 ‘마침내’ 예수님의 피로써 증명하신 거예요. 확인하신 거예요. 살아 있는 자가 없었어요.

그러면 왜 살아 있는가? 죄가 살아 있지요. 마귀가 살아 있었고 귀신이 살아 있었던 거지요. 주님께 대드는 귀신, 주님께 대드는 악마가 우리 안에 살아 있었지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특히 요한복음 같은데 많이 나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바리새인들은 가만있어도 미움을 받아요.

Why do you hate me? 왜 나를 미워하느냐? 이게 저팔계 송에 나와요. “I am 저팔계, I am 저팔계, 왜 나를 미워하느냐?”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주제곡, 저팔계송.

바리새인들은 저희 아비가 악마라 했어요. “너는 악마의 새끼다. 자식이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들이 누구보다 악마성이 강해요. 강하니까 예수님을 알아본 거예요. 예수님이 뭐하러 왔는지를 알아본 겁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그런 발언들을 쏟아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우리 한국 사람같이 점잖은 사람들 같으면 예수님 안 죽입니다. 뭘 하든 말든 안 죽여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주 영적으로 예민했어요. 예민했기 때문에 자꾸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을 한 거예요. 예수님을 없앨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멍청하니 바보 같아서 복음 전해도 예수님을 죽일 생각 안 하고 복음 전하는 목사를 죽일 생각을 안 하잖아요. 목사들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의 부정성을 안 건드리려고 합니다. 그걸 가지고 생계형 목사라고 이야기해요. 이 종교와 정치가 결국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서 손을 잡는데 이게 곧 인간이 불경스러운 것, 노골적으로 불경스러운 정치와 경건스러운 종교가 손을 잡는 것은 둘 다 권력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먹히는 힘들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힘이 있어야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요, 그럴 때 그 힘을 지키는 것이 자기 의를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다니엘 2장 31절에 거기에 느부갓네살 왕이 나오는데요. 그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 날 밤 꿈을 꾸게 돼요.

자, 꿈이 뭐냐? 꿈은 신체가 자동적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방어시스템입니다. 꿈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내 신체가 온전하겠다.’는 식으로 신체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방어시스템이 바로 꿈입니다. 사람들이 꿈꾸고 난 뒤에 “휴~, 큰일날 뻔 했다.” 하잖아요. 자기 신체 보호용이에요, 꿈이라는 것은.

주로 밤에 꿈을 꾸지만 낮에도 순간순간 인간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그 메커니즘이 내부적으로 신체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좀 쉬니까 뇌만 작용하니까 자기 방어기제가 뚜렷하게 자기 스토리를 가지고 나오는 거지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꿀 때 꿈은 누구나 꾸는 거니까 평범한 꿈인데 문제는 그 꿈을 꾸고 난 뒤에 그 꿈의 내용을 잊어버렸는데 이상하게 자기의 신체를 압박하고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진 거예요. 본인이 찝찝한 거지요. 굉장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자기 신하들, 평소에 신의 계시를 안다고 주장하는 그 신하들 다 모았습니다. 평소에 월급 주던 신하들 다 불러놓고 “어젯밤에 내가 꿈꾼 것을 너희들이 기억하라. 만약에 모르면 다 죽이겠다.” 다 죽이는 그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느냐? 다니엘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다 죽이겠다 한 겁니다.

그러니까 신하들이 그동안 거짓말하다가 이제 들통나게 된 거지요. 신의 뜻은 이렇습니다, 신의 뜻은 이렇습니다, 맨날 점치면서 그 이야기하다가 “진짜 그것은 그게 아니고 임금님 꿈이 뭔지 그걸 알려주시면 우리가 해몽은 해드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 화가 더 난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사기꾼이야. 너희 사기 치고 나한테 그동안 돈 받은 거야. 월급 꼬박꼬박 받은 거야. 두 번 다시 이야기 안 한다. 어젯밤에 꾼 꿈을 너희들이 찾아내라.” 내가 어젯밤에 꾼 꿈 때문에 살 수가 없어요. “어젯밤 꾼이 보통 꿈 같으면 내가 이렇게 나오지를 않아. 정말 나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꿈, 너무나 중요한 꿈인데 내가 잊어버렸어. 찾아내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발했지요. “그것은 신이나 할 일이지 인간의 노선을 능가합니다.” 그렇게 하니 왕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그동안 신의 이름으로 많이 해 먹었잖아. 많이 해 먹었잖아!”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새로움이라는 것은요, 새로움을 받아야 새로움을 알지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입고 우리 인생을 살면서 아는 새로움은 그것은 새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지키는, 나를 사수하고 방어하는 방어시스템에 불과해요.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것, 방어시스템입니다.

행여나 보험 하나 들어놓은 거예요. ‘이렇게 예수까지 믿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나는 나를 지켜야지 누가 나를 지켜주겠어?’ 자기 지키기 위한 단도리중 하나가 교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새로움이 아니에요. 이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또 먹는 거예요. 이것은 개가 개 되는 거지요. 개가 사람 되는 모습은 아닙니다.

경건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finally, 확정된 것이 어떻게 우리 일상에 있는 착함, 혹은 나쁜 짓을 무효화시키느냐, 그런 새로움이 되어야 돼요. “일체 네 행동에 대해서 내가 묻지 않을게. 네 기억에 대해서 묻지 않을게.” 모든 것을 싸그리 다 무효화시키는 그런 새로움이에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왕이 “도저히 못 참겠다. 다 죽인다!” 하니까, “뭐 사람이 없나? 죽이고 또 뽑으면 되지.” 하는데 다니엘이 가서 왕을 말렸어요. “왕이여, 조금만 기한을 주시면 왕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하고 다니엘 본인도 몰라요.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를 줬습니다.

지혜를 주니까 그게 다니엘 2장 31, 31절입니다.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왜 이 대목이 중요하냐 하면, 인간은 하나의 죽은 금신상(金神像) 같이 살아도 산 게 아닌, 딱딱한 돌비석 같은, 돌상 같은, 동상 같은, 금상 같은, 신상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나서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 새로운 자기 인생을 알 자가 없습니다.

인간은 살아 있었던 게 아니에요. 딱딱하게 굳은 겁니다. 굳은 인간의 특징은 후패하고 세월 따라, 시간 따라 이게 허물어지고 삭아지는 거예요. 주저앉는 거예요. 나이, 연세 많으면 중력을 못 이겨서 주저앉아요. 일단 관절부터 주저앉아요. 무릎이고 허리, 어깨 관절부터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무너질 게 무너진 거예요, 무너질게! 나쁜 짓 해서 아픈 게 아니에요. 기침 나는 게 나쁜 짓 해서 나는 게 아닙니다.

무너진다는 것, 그걸 통해서 주님의 새로움이 새롭게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모든 살아온 것, 한 달 수입이 얼마냐, 직급이 어떠한지,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 전부 다 무효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경건이에요. 내가 내 생각하지 않는 것,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 것을 미리 겁내고 기대하고 계획 잡고……, 계획 잡으세요. 잡고 나면 주께서 주의 새로움이 그걸 삭제시켜 줄 겁니다.

계획 잡고 목표 잡고 해도 무의미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계획 잡은 자나 안 잡은 자나 자기 토한 것 또 삼키고, 또 토하고 삼키고, 계획 잡고 하는 그것이 주님께서 뭘 보호하려고 하는가? 주께서 보호하려고 하는 신체는 다니엘이라는 신체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체가 아니었습니다.

이 꿈을 해석 못 하면 다니엘은 죽어야 돼요. 지금 다니엘은 죽음에 몰려 있습니다. 그 죽음에 몰려 있는 이유가 뭐냐? 주님께서 느부갓네살왕에게 꿈을 꾸게 했기 때문에, 그 꿈꾼 것 때문에 다니엘을 비롯해서 모든 신하가 죽게 되어 있거든요. 그 중 한 사람도 다니엘이고 그래서 다니엘이 죽게 되었으니까 죽게 된 다니엘이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꿈의 내용이 뭐고 해몽을 어떻게 함으로써 죽었던 다니엘의 신체가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다시 보호받고 살아난 겁니다. 다니엘의 신체를 살리는 겁니다.

주님의 경건이라 하는 것은요……, 이 땅에 주님께서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마귀에게 속했을 때에 마귀가 하는 말이, 곧 마귀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의 말을 대변해 주는 거지요. 누가복음 4장의 아까 말씀한 것 3절에도 그리고 9, 10절에도 나오는데 마귀가 말할 때마다 딱딱 붙이는 게 뭐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이런 식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순서를 바꾸는 거예요. “내가 네가 누군지를 점검하자.”가 아니라 1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지금 마귀는 예수님의 자아를 보고 시험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의 답변은 뭐냐? “나한테 묻지 말고 주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봐야 된다. 네가 지금 나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주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네가 시험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불경(不敬)이에요. 경건의 반대말이 불경입니다.

주님께서 자꾸 주목하는 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 장난치면서 사는 것, 나에 대해서 내가 벌거벗었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나에 대해서 일체 생각 안 해도 살 수 있는 그것이 사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처음 조건은 뭐냐? 나에 대해서 내가 뭘 해야 됩니까, 를 일체 고려하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다고 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경우,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인간보다 말씀이, 주님의 뜻이 먼저 전제되어 있을 때나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 눈들 보니 전혀 동의하지 않는 눈치인데요, 마태복음 13장 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천국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거예요. 씨가 뭐냐? 복음의 말씀입니다. 여기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것, “예수님이 씨를 뿌릴 때”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것, 하나님이 씨를 뿌린다는 것, 여기서는 뭐냐? 인간은 완전히 배제되어 버려요. 인간은 거기에 그림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씨를, 말씀을 그냥 뿌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에 대해서 뭔가 불경스럽게 여기고, 대들고, 반항하고, 반발하고, 따지고, 점검하고,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말씀이 씨를 뿌리기 이 전에 뭔가 수상한 그 기운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미 불경스러운 게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려고 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게 아니고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가 되면 살아 있다는 개념이 ‘내가 살아 있다’는 개념하고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개념하고 이게 같이 섞여 버려요. ‘내가 살아 있는 거 그거 맞지.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주님이 하늘에 살아 계신 것 맞지. 하나님도, 삼위일체가 살아 계신 것이 맞지.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이것은 엉터리예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날마다 악마가 예수님 시험하듯이 날마다 우리는 시험하게 될 거예요.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주님이 내 기도 응답하신다면, 주께서 내 성의를, 경건을 받아주신다면 저에게 이렇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항상 그 전제가 뭐냐? 내가 살아 있다면, 내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미 그것은 마귀로부터 사로잡힌 자들이 하는 오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시험받으면서 ‘아, 인간이 그냥 예수님께 그냥 순수하게 나오는 법이 없구나.’ 자기가 예수님을 점검해보고 믿을 만 하면 믿겠다는 것,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신은 믿지 않아. 그러나 내가 점검하는 내 점검만큼은 내가 확신하고 나 그거 하나 확실하게 믿습니다. 나는 나를 믿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내가 살아 있음을 믿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정당성만큼은 내가 포기 못 하고 믿겠습니다.’ 이게 말이나 태도를 통해서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을 백 독 했습니다, 천 독했습니다, 하는데 그게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뭐 성경 천 독했다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세요. “집사님, 제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그 꿈이 무슨 내용인지 알아맞춰 보세요.” 이렇게 해보세요. 응용문제로 들어가 보세요.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알아맞춰 보세요.” 그러면 “그것은 내가 모르지.” 이러거든요.

인간은 예수님을 밀어버려요. 밀어버리고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왔는데 악마의 자식이니까 마귀에 아주 예민한 자들은 예수님을 죽여버렸거든요. 죽인 이유가, 내가 아무리 내 속에 긍정적이고, 의롭고, 착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뭘 해도 그냥 둬버리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자기 의를 그냥 갖고 있으니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뭐가 살아 있는가? 주님의 주신 말씀이 살아 있지요. 말씀 속에는 주님의 언약완성이 살아 있고 그 언약은 뭐냐? 내 피와 내 살이 살아 있어요. 우리를 부정하게 보는 그 부정성적인 안목이 살아계신 거예요. 그 안목 앞에서 우리는 졸지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비로소 날마다 주님이 찾아오는 게 아니고 주님의 죽음이 찾아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면 안 돼요. 예수님이 다 이루시고 난 뒤에 찾아와야지요. 주님이 이루셨다는 것은, 주님이 이루신 살, 주님의 찢겨진 살과 피가 찾아오는 거예요. 주님의 살과 피가 찾아오게 되면 finally, 끝났어요. 모든 것은 이미 완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의미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뭐냐? 가벼워요. 가벼우니까 사는 게 장난이죠, 장난!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성도의 길을 인도하실 때 주님의 경건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느냐?

사람이 같은 일을 되풀이해버리면 이게 뭐냐? 어느새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자기 의.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그 의를 죄로 바꾸려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인간은 실패합니다. 바꾸려는 그 자체가 인간은 의로운 행동이 되고 마니까 인간은 더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들어요. 가벼운 게 아니고 무겁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주의 방법은 뭐냐? “하지 마! 하지 마!” 그게 끝이에요.

“주님, 교회 오는 것 참 매주 오려니 힘들지만 그래도 주의 말씀대로 와야 되지요?” 주의 응답은 “오지 마!” 힘들다는 그 말은 내 인생이 무겁다는 뜻이고, 무겁다는 말은 지킬 게 있다는 뜻이고, 지킬 게 있다는 말은 내가 다른 것은 나쁜 짓 했지만 교회 와서 복음 듣는 것은 착한 일일 것이라는 그런 착각,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착각이거든요. 그것은 교회 왔다는 나를 지키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부담을 내가 떠안을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겁니다. 매일 선택하고 매일 결정하는 이 부담을 내가 왜 떠맡습니까? 떠맡을 필요 없지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주께서 씨를 뿌렸다는 것은 이미 밭은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씨를 뿌리기 전에는 밭이 어떤 내용으로 서로 차이 나는 밭인지를 아무도 몰라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잖아요.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마귀를 시험한 거예요. 악마는 인간을 속였잖아요. 악마가 인간을 속인 그 마귀를 하나님이 속여버렸습니다. 그게 욥기에 나와요. 철저하게 마귀를 속여버렸어요. 마귀의 한도 바깥으로 하는 거예요. 마귀는 날마다 우리에게 이것 하라, 저것 하라, 시킵니다. “예수 믿었으면 믿은 사람답게 빛과 소금의 일을 해야지 뭐하고 있느냐?”라고 계속해서 윽박지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하는 경건은 내 살과 내 피 그것만이 날마다 새롭게 등장하기 위해서 우리 보고 그 헛된 짓을 하게 해요. 끝까지 잘 들으셔야 돼요. 제 설교 끝까지 잘 들으셔야 됩니다. 하지 말라, 가 아닙니다. 주의 원래 뜻은 “너 자신을 압박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지 말라”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주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내 지시를 따르는 것이 죄입니다. 원래 경건이라는 것은 영어로 pious, 우리 말로 하면 독실하게 신을 받들어 모시는 그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경건일 때 경건이 돼요.

주님의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어떤 인간도 악마의 시험을 통과를 못 했지만 주님은 이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이제는 악마와 우리 자신을 속여버리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속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속이는가?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목적과 계획을 세우게 만듭니다. 이제부터 몇 분 안 남았는데 잘 들으셔야 돼요.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대해서 매진하게 만들고 애써 노력하게 만들고 ‘주여, 저건 안 들어줘도 되는데 이것만큼은 들어주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만들고 다 만들어요. 선택하고 결정하게 만들고 죽을 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어서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업적과 실적을 남기게 만들어요. 이걸 그래프로 그리는 거예요. 날마다 점점 더 내가 발전해가는 모습을 늘 머리에 그리면서 하게 됩니다.

그래놓고 밤에는 뭐냐 그것이 무너지는 꿈을 꿔요. ‘안 돼~~ 안 돼, 안돼…… 휴~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이렇게 삶을 삽니다. 사는데 성령께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쏙 들어와 버려요. 쓱, 하고 들어오거든요. 이번에 한국 시리즈 야구 우승한 팀, 쓱 팀. 신세계팀이 이겼어요.

그렇게 쑥 들어와 버리면, 주님은 죽기 위해서 살았는데, 그게 주님의 경건이었는데 아버지 앞에 경건이 죽기 위해서 산 것인데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살아 있는 나를 살려보려고 이런 짓 하고 있다는 자기 부정성, 자기가 거덜 나면서 그것이 노출되고 드러나고 발각될 때 그게 바로 가벼움입니다. 주님이 나를 속인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왜? 이미 우리는 마귀한테 속은 채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와서 이런 나를 속이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맨날 남하고 경쟁하고, 맨날 남하고 대조하고, 남하고 비교해서 네가 더 가치 있는가, 내가 더 가치 있는가, 싸울 때에 주님이 “내 피를 마셔라.” 그 한마디에 finally, 이미 끝난 거예요. “내 피를 마셔라.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묻지 않을게.” 할 때 그다음부터는 그 누구하고도 경쟁하거나 싸울 필요가 하등 없습니다. 그럴 때 그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돼요. 경쟁하고 비교하지 않고 다투지 아니하고.

그거 몇 분 안갑니다. 문제는 그게 몇 분 안 간다는 게 문제에요. 어쨌든 몇 분 안가도 finally, 마지막이 내 안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 바로 하나님께 필요한 약속과 관련된 주님의 경건이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았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속았고 마귀한테 속았습니다. 그리고 주님한테 속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에게 속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수가, 이렇게 가볍고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해도 쓸데없는 의미 없는 짓거리를 평생하는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피로써 값 주고 사신 그 값만 드러내고 증거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정체성  (1) 2022.11.28
나 없는 나  (0) 2022.11.24
오기와 감사  (0) 2022.11.06
절단면  (0) 2022.10.31
귀신의 가르침  (0) 2022.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