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나 없는 나

아빠와 함께 2022. 11. 24. 19:24

나 없는 나 

2022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4:12-16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신앙이냐 아니냐는 그 사람 속에 주님의 예언이 들어왔느냐 여부로 정해집니다. 예언이란 인간이 손수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만 친히 이루어나가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애쓸 일이라면 굳이 예언이 들어오실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언이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 어떻게 알까요?

신앙이 여부는 놀랍게도 불신의 세계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불신의 세계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신앙인을 놀리고 모독합니다. “너 아직도 예수믿어?” 그러면 예언이 들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교회나 다니는 사람 같으면, “내가 언제 예수 믿었다고 그래. 그저 예수에 대해서 알아보겠다는 것이지. 나는 여전히 나를 믿어! 최종적으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바보 안되려고 사투를 벌립니다. 주변에 있는 자들과 비숫하게 가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은 불신의 세계에서 가려지는 신앙인 여부입니다. 이 세상은 개인을 공략하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새 냉장고 들여놓으시지요?, 새 안마기는 어때요?”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종교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원 안 받았으면 구원받아 두세요. 개인적으로 유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예언은 인간들이 달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호두껍질 안에 호두가 들어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껍질 깨트렸는데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경우도 있어 썩은 것도 나옵니다.

예언이 절대적으로 신앙이 만들어내는 이유는, 인간은 모든 것을 잃어야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 일이 성도에게 박히면 성도도 동일한 길을 반복해서 보이게 됩니다. 요한복음 12:24-25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는 불신자가 신자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은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본인의 이름을 인해 의기당당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생각은 없고 온통 자신의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세상에 나가 돈을 다 잃고 난 뒤에는 더는 자기 이름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독립성을 유발했던 그 존재의 바닥 장판은 사정없이 뜯겨나갔던 겁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킬 마음이 없게 된 겁니다. 이처럼 신앙인은 자기 마음이 다른 마음으로 교환된 겁니다.

요셉이 처음 꿈을 꿀 때는, 그것이 형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요셉이 꿈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꿈 자체를 위해 요셉을 쓰여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처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를 위하여 처리되느냐로 구분됩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모든 인간들은 ‘율법의 집’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든 방에는 율법이 작용합니다.

마치 다니엘 5장에 나오는 벨사살 왕이 파티장처럼 말입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 하나가 나타난 허락도 없도 벽에서 글을 씁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 뜻은 이러합니다. “끝났다. 끝났다. 무게 달아보니 당신은 끝났다. 그 다음 나라는 바사나라다”입니다.

즉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들로부터 초대받지 않는 말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신자냐 불신자냐 구분됩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경우에는 변명과 조작과 사기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친히 마음을 바꾸면서 기존의 목숨과 육신까지 악마에게 돌려주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인은 벌거벗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벌거벗음이 있어야 덧입음이 성립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1-3)

즉 주님은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죄를 들추어내어 보여줍니다. 더는 자신을 의롭게 만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10:12-14에 보면,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자체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 대신 베드로 안에서 작용되고 있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피 흘리심’입니다.(롬 5:8-9)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란 기존의 아담을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은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셔서 아담의 형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에 근거를 둔 새로운 피조물이 나타나게 하심입니다. 이는 곧 성도가 더는 자신을 위한 인생이 아니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신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따로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꾸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우리 육신이 뿜어내는 여전한 자기 잘남의 집착을 ‘독한 암세포 덩어리’로 취급해서 끄집어 보이시는 방식으로 주님은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능에 우리가 눈 감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디모데전서 4장 12-16절(나 없는 나)2211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4장 12-1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4:12-16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신앙의 본이라는 것은 신앙인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러면 신앙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 하나님의 언약 성취로, 주님께서 완성하신 것으로 인하여, 받은 것으로 인하여 그걸 받지 않은 사람과 차별화되는 겁니다. 그 차별화를 보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이루었던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주는 게 아니에요. 특별한 자에게만 그것을 넣어주시는 겁니다. 호두껍질 안에 호두 들었지요. 그런데 어떤 때 보면 호두껍질 안에 호두 들었다고 생각하고 깨보니 그 안에 썩은 것 들어 있고 아무것도 없고 그런 경우도 있어요.

우리의 육신이 호두껍질이라면 여러분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행했던 것 그것이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예언으로 주신 게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 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루었던 것이 들어 있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신앙이라는 개인의 가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꾸준히 사도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가치를 언급하다가 이번에는 신앙인, 신앙인이라는 것이 어떤 차별화가 되어 있느냐, 신앙이 없는 다른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모든 신앙인은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디모데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모든 신앙인에게도 공히 같이 들어 있는 것, 사도바울에게도 들어 있고, 그리고 디모데에게도 들어있고,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들어있는 거요. 이렇게 공통적인 것이 들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개인 구원은 없고 집단구원만, 단체구원만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꽃이라고 한다면 그 꽃은 죽어야 되고 꽃잎으로 다시 태어나야 되는 거지요. 하나밖에 없는 꽃을 받쳐주는 너도 꽃잎이고 나도 꽃잎이고, 꽃은 주님이 꽃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개개인을 최종적인 것으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 내가 최종적으로 ‘나는 나밖에 없어’를 주께서, 주의 예언이 꺾어 버리는 거예요. 그걸, 그걸 좌절시키는 겁니다. 나는 ‘내가 최고다.’ 여겼는데 그걸 실망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뭐가 주의 예언이에요? 그 주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내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안에서 계속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한번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 오는 사람들 보게 되면 본인이 세상에서 바보 안되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고 있어요.

바보 안되기 위해서 사투를 벌인다는 말, 바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을 것이 나밖에 없는데 왜 자기 자신을 안 믿고 엉뚱한 예수를 믿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바보라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따지고, 상식적으로 따지고, 이모저모 다 따져봐야 역시 나는 나를 위해서 내가 있다고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교회 다녀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불신자들이 대번 이야기해요. “바보야, 아직도 예수를 믿나?” 그렇게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내가 언제 예수 믿는다고 그랬어? 예수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지. 여전히 나는 나를 믿어.” 그러면서도 교회 다녀요. 그러면서도 장로고, 집사고, 목사고 그런 겁니다. 권사고요.

왜 그러냐 하면, 왜 사람들이 바보 안되려고 애를 쓰는가? 예수 믿는 게 바보처럼 인식되는 사회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주변과 비슷하게 갈려고 애를 쓴 결과에요. 주변 사람과 별반 튀려고 하지 않고 유사하게 살면 인생에 큰 말썽이 없을 거라고. 튀지 않는 인생. 그러려면 ‘그들이 안 믿는다면 나도 같이 안 믿을래.’ 하면서도 또 교회 와서는 “믿으니까 교회 나오지요.” 이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나를 신자라고 인정해주는 게 아니고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이 나를 알아보지요. 우리 자신이 신자인지 안 신자인지 알아봅니다. 요즘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이거든요. 자본주의 세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꾸 개인을 공략해요. 집에 이거 있습니까, 저거 있습니까, 공기청정기 있습니까, 집에 새로운 냉장고 있습니까, 개인을 공략해요.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구원받았습니까, 자꾸 개인을 공략합니다. 개인을 공략하는 이유가, 내가 이것저것 챙기면 나는 자립할 수 있고 독립할 수 있다는 이 마음, 이것이 나로 하여금 남들 앞에 바보 소리 안 들을 거라고 그렇게 기대들을 하고 있어요. 그만큼 우리는 세상의 분위기에 빠져도 너무 빠져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을 좀 혼내주든지 뭐 작살내든지 해야되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그 세상에 계속 살게 하시는가? 그건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신자라 하는 것은 교회에서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이야기해준다니까요! 불신자들이 이야기해줘요.

오늘 본문에 신앙의 본이 되라, 하잖아요.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불신자의 본이 뭐냐, 를 따져봐야 돼요. 불신자의 본. 불신자가 불신자답게 산다는 게 뭐냐? 그걸 챙겨야 됩니다. 그것은 자립하는 것이고, 독립하는 거예요. 불신자의 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그 말씀에 대해서 나름대로 본인 위주로 처리하는 것, 말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신자로 분류되거나 신자로 분류되는 겁니다. 말씀 자체를,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본인이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솝우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장에 가서 팔기 위해서 당나귀를 끌고 갑니다. 주변 사람들 오지랖 넓은 사람들 많겠지요. 왜 당나귀를 끌고 갑니까? 타고 가야지요. 자꾸 주변 사회에서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맞아! 팔러 가는 당나귀 그냥 가면 안 되지 뭘 태워야 되지.” 하고 아들을 태웠어요.

아들을 태우고 가는데 또 사람들이 “저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 봐라. 아버지 안 태우고 자기가 왜 타나?” 하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들 내리게 하고 아버지가 떡 탔다. 당나귀를 그렇게 타고 어떤 마을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힘든 아들은 걷게 하고 자기만 이기적으로 저렇게 타면 되나?” 또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이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부자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당나귀를 업고 끙끙거리면서 장에까지 간 거예요. 당나귀를 장에 업고 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릴 때 들은 기억이 나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처리를 못 해요. 인간들이 감당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튀겨먹을지, 삶아 먹을지, 볶아먹을지, 내가 어떻게 이 말씀을 지켜야 될지.

그렇게 감당을 못하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주변 사람에게 바보 소리 안 들으려고, 똑똑하다는 소리 들으려고. 결국 나오는 것은 뭐냐? 당나귀를 업고 가는 이 바보 같은, 낑낑거리면서 장에 팔러 가는 이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이 이솝우화는 남의 말 그만 들으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말씀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 말씀을 처리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본인이 ……, 자, 아까 말한 그 당나귀를 팔러 가는 사람은 그 이유가 뭐냐? 자기가 살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에 대해서도 인간이 어떻게 처리하느냐? 본인이 어떻게 더 멋있게 살아보겠다고, 더 단단하게 복 많이 얻어서 살아보겠다고 말씀을 다루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말씀에 대해서는 사기가 되는 겁니다. 조작이 되고, 위장이 되고, 사기 치는 거예요. 자꾸 속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말씀에 대해서. 말씀이 이걸 지적하면 다른 말씀 가지고 변명하면서 피해버리고, 그 말씀으로 지적하니까 또 다른 것으로 또 피해버리고, 끊임없이 자기가 정당하고 옳다는 것을 계속해서 적당한 말씀을 찾아가면서 이리 튀고 저리 튀고 계속 튀어 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0장 3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율법 아래 주셨다는 말은, 저주 아래 두셨다는 겁니다.

제가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추리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사회적으로 유명한 어떤 사람들, 대단한 유지들을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한 섬의 저택에 집결시켰어요. 파티 열겠다고 초청해서 모아놓은 겁니다. 각자 유명한 사람이지만 호기심에 그냥 가 본 거예요. 그런데 초청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방마다 뭔가 글들이 나오는데 똑같은 글들이 있어요.

저는 그걸 뭘로 보느냐? 그걸 ‘율법의 집’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있는 방에도 십계명 걸려 있고, 저쪽에 있는 방에도 십계명 걸려 있고, 그다음 방에도 십계명 걸려 있고, 똑같은 방에 다 해 놓고 차츰차츰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여 나가는 거예요. 무섭지요.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집단 전체를 하나님께서 율법의 집에다 집어 넣어놓고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똑같은 율법, 하나님의 율법을 주면서 차츰차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여 나가는 거예요.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해요. 그 말씀이 우리를 죽인다는 생각을 못 하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인다는 생각을 못 하고, 같은 인간이 자기를 죽인다고 생각해서 서로를 의심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겁니다.

이러한 추리 소설의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놀랍게도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다니엘 5장 5, 6절이요. 벨사살 왕이 파티를 열었는데 한창 파티가 무르익을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이 손가락은 벨사살 왕의 파티에 초청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사람들만 모인 곳이라고 여겨지는 파티장이에요. 사람들만 모인 거예요. 그런데 손가락만 달랑 있어서 허락 없이 벽에다 글씨를 씁니다. 글씨를 쓸 때 취지가 뭐냐? ‘누구든지 이 글씨의 내용을 모르는 자는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다 죽는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협박이지요.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 제가 불신자의 세계에 대해서 불신자가 어떤 곤경에 빠졌으며, 불신자는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계속 말씀드리는 겁니다. 불신자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꾸 생각하고, 교회도 나오고 하지만 실은 불신자가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율법의 집에 그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리고 거기서 그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사실도 몰라요. 매일같이 파티 열기 바쁘고, 매일같이 행복하기에 분주하지 너나 나나 똑같은 방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적용받는 동일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손가락이 벽에 쓴 글씨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거든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 뜻은 이러합니다. “끝났다. 끝났다. 무게 달아보니 당신은 끝났다. 그다음 나라는 바사나라다.”입니다. “당신 잘렸어!” 그런 뜻이에요. “당신 망했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벨사살 왕에게 그렇게 한 것은 사실은 모든 이방인, 우리를 포함해서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에게 “너 잘렸어”라는 말씀, 그래서 지금 인쇄 되어있는 이 성경책을 우리가 펴고 있습니다. “너 잘렸어! 너 잘렸단 말이야.” 신앙인이 뭐냐? 신앙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 사람에게 그대로 심어주는 게 신앙이에요. 하나님에게 일어난 사실을 특정인에게 심어줄 때 그 사람은 신앙인이 되는 겁니다. 그걸 예언으로 받은 겁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지 아니하면 자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안에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일만 가득하게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겠지요. 공통적인 것이 없어요. 자기만의 특수성을 계속 붙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바깥에 뭐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또는 양심으로, 자꾸 율법으로 ‘네가 완전하냐?’고 지적하니까, 내 것을 지키면서 내 것에 대해서 어떤 공포심을 느끼니까 자꾸 변명하면서 계속 사기를 치는 거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사기를 다른 사기로 바꾸고 또 그 사기를 다른 사기로 바꾸어서 자꾸 사기에서 사기로, 그게 일상화됩니다.

장사할 때 사기 안 치고 장사하는 방법이 없어요. 매일같이 사기 치는 거예요. 매일같이 자기 아닌 자기를 계속해서 외부에 드러내고, 이 사람 만나면 이런 나를 드러내다가 저 사람 만나면 다른 나로 변조하고, 다른데 가면 또 다른 마스크 쓰고 다른 자신으로 사기 치고, 본인도 사기를 너무 쳐서 본인이 누군지도 몰라요. 어느 내가 어떤 사기를 쳤는지도 몰라요. 하루하루의 삶이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에게 심어줄 때 세상으로 온 것을 악마에게 돌려줘 버립니다. 네가 받아온 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악마로부터 왔고 죄로부터 왔기 때문에 “가자! 손잡고 가자.” 해서 “내가 마귀 만나게 해줄 게. 그래, 마귀한테 돌려줘. 네 모든 것을, 마귀한테 받은 것을 마귀한테 되돌려줘. 네 목숨, 네 육신부터 해서 다 되돌려주란 말이야.” 이게 주께서 신앙인인 우리에게 하는 방법이에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탕자입니다, 탕자.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 집을 떠날 때는 독립적이었어요. 아버지 인생을 몰라요. 아버지가 어떠냐, 도 관심 없어요. 탕자가 관심 있는 것은 ‘내가 독자적으로 독립해서 내가 얼마나 잘되는가?’ 그것 하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아버지한테 유산 미리 당겨서, 5천만 당겨달라, 해서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 살려고 할 때 거기에 자기 이름을 거는 거예요. ‘내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 탕자가 가서 허랑방탕하고, 친구 만나고, 이웃 만나고 이고 지고 신나게 잘 나가다가 돈 떨어지니까 친구 떨어지고, 나중에는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라고 되어 있지요, 그걸 탐내다가 그것도 먹지 못한 채 쫓겨났을 때 그때 탕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신앙이라 하는 것, 신앙인이 뭐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예언으로 말미암아 어떤 변화가, 자기의 변화가 감지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그 변화가 뭐냐? 자기가 사기 치던 그 사기의 존재의 장판이요, 그 장판마저 뜯겨 나가버려야 돼요. 더 이상 사기 칠 여력도 없도록. 내가 늘 사기 치면서 남들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 변장하고 위장하는데 급급했던 인생, 거기에 밑천이 되는 그 존재의 바닥 장판까지 뜯겨 나가 버려야 돼요. 더이상 나를 꾸밀 필요가 없어요 돼요.

뜯겨 나가면 뭐가 되느냐? 바로 내 이름이라는 자체가 뜯겨 나가 버리지요. 그래서 탕자가 돌아올 때는 자기 이름은 날아가 버리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저 돌아왔어요. 저 아들로 삼지 마세요.” 저 아들이라는 그 의식 장판, 이미 내 존재를 자립적으로 키웠던 그 존재 자체가 뜯겨 나가 버렸어요. “이제는 아버지의 사람으로, 종이 되든 머슴이 되든 아버지의 집에서 빌어먹든 아버지가 원한다면 그걸로 저는 족합니다.”

자기 존재감 없어요. 아버지의 존재가 자기 존재를 대신하는 겁니다. 내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게 신앙인입니다. 지금 불신자를 통해서 우리가 신자라는 것을 다시 규명을 해봐야 되는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될 일이 적혀 있습니다.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한 알 밀이 썩지 아니하면, 썩어 죽지 아니하면 열매는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예언을 준 것은 손잡고 “네가 마귀한테 받은 목숨 갖다 줘버려라. 네 이름도 줘버리고 네가 썩어 버려라.” 그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벌거벗은 것이 되거든요. 다 빼앗기고 빼앗겼으니까 벌거벗게 되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도록 이끄는 것, 장막 집, 우리의 육신이 무너지는 것,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 이걸 다행스럽게 그걸 복이라고 여겨라, 이것들아!” 이 말이에요. “마귀한테서 왔으니 마귀한테 돌려줘 버려라, 돌려줘! 그것 안 돌려주면 마귀가 자꾸 달라고 하니 줘 버려라.” 그 말이지요.

주께서는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어서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입혀 버립니다. 인간은 누굴 닮았느냐? 아버지를 닮았지요. 그 아버지는 누굴 닮았느냐? 할아버지를 닮았겠지요. 그러면 할아버지는 누굴 닮았느냐? 올라가고 올라가게 되면 누굴 닮았느냐 하면 아담을 닮았어요. 그걸 가지고 ‘아담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은 그 아담의 형상을 닮았는데 그 아담의 형상 속에 뭐가 장악하게 되었는가? 죄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로마서 5장에. 죄가 들어와서 죄가 인간의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돌려줘. 그 죄한테 돌려 줘버려.” 뭘? 네 아담의 형상을 돌려줘 버리라는 말이지요.

아담의 형상으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걸 잃어버리라는 겁니다.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것,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기존의 눈에 보이는, 거울에 비취는 이 내 모습 가지고 깔짝깔짝거리지 마시고요.

구약의 요셉이 나오거든요. 처음에는 요셉이 자기가 꿈꿨다고 자랑질 되게 했어요. “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처음에는 꿈을 꾸던 나를 요셉이 잃어버리고 꿈 자체를 위해서 요셉이 살아있게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의 예언을, 나는 하나님의 예언을 가졌다. 그래서 신앙이다.” 이렇게 까불다가.

하나님의 예언이 뭡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이잖아요.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이잖아요.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 일이잖아요. 그 일에 우리가 거기에 끌려 들어가고 말려 들어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게 신앙입니다. 자꾸 내 것이 있으니까, 내 의(義), 내 자존심 자꾸 챙기고, 남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어하고,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가려고 “너 교회 다닌다면서?” “심심해서 가보는기라!” “예수 믿는다면서?” “내가 언제 예수 믿어?” “아, 진짜 오랜만에 솔직하게 이야기하네.” “내가 언제 예수 믿어? 교회는 다니지. 예수는 안 믿어.” “그럼 누구 믿는데?” “나를 믿지, 나. 너하고 똑같아. 맥주 한잔?” 또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요새도 예수 믿는 그런 바보가 있어요? 교회 나오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세상에서 불신자가 알아봐요. “너 바보 아니야? 믿으려면 너 자신을 믿지,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을 믿지 돌아가신 예수를 왜 아직도 믿느냐? 멀쩡하게 살아있는 너를 믿어야지. 딱 깨 놓고 우리 한번 논쟁해보자. 따져보자. 이번 월급 탄 것 네가 일했어, 예수가 일했어? 따져보자.” 이렇게 나와요.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9-5(nine-five)’, 그렇게 일해서 월급 탔잖아요. 예수님은 꿈에도 안 나타났는데요? 그런데 무슨 예수를 믿어요? 나를 믿지요. 이게 ‘율법의 집’ 안에 있는, 하루씩 계속 죽어가면서도 이게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인간에게 교회 나와서 신(神)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상상이고 하나의 비유에 불과합니다.

동요에 보면 <반달>이라는 동요가 있어요. 가사를 음미해 보세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이렇게 죽 가는데요. 달을 보는데 거기 계수나무가 있겠어요? 없지요. 토끼가 떡방아 찧겠습니까? 아니지요. 하지만 거기 토끼가 있든 없든 달은 내 마음을 그냥 반영, 비춰보는 거예요. 내 안에 저런 신비스럽고 절대적이고 뭔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 내 마음을 반영하는 그것이 신이라는 거예요, 신. 신은 내 마음의 반영체에요. 내가 만든 거예요. 신이라는 것은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그런데 실재하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내게 바쳐라.” 이게 상상입니까? 아브라함이 그 소리 듣고 “이건 꿈이야. 이건 꿈에 불과한거야.” 이랬습니까? “아빠, 어젯밤에 잠꼬대하던데? ‘하나님, 아니되옵니다. 하던데? 아빠, 무슨 일이 있어요?” “그래, 꿈에 하나님께서 나보고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고 했다.” “하이고, 아버지 또 개꿈 꾸셨네.” “그렇지? 개꿈이지 그지?”

신은 그냥 하늘에 계시면서 내 마음 받아주며 끝이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해왔다고요. 내 할 것 다 하고, 김장할 것 다 하고……, 참 오늘 제가 김장한다는 이야기 했어요? 오늘 그 광고를 안 했는데 이걸 광고로 대신합시다, 김장할 것 김장 다 하고, 그다음에 예배하고 뭐 그게 다지요. 뭐 내 자식을 내 칼로 찌른다? ‘그건 혹시 마귀의 시험 아닌가요? 설마 하나님이 그렇게 과격할 리가 없어.’ 뭐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착각 속에 빠졌으면서, 얼마나 나를 사기 치고 있었으면 하나님도 아닌데도 온순한 하나님, 내 인생에 손끝도 안 대는 하나님, 그걸 내가 자꾸 조작하고 있는 거예요. 실재하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아닌데요! 탕자 비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 아들을, 존경받아야 마땅한 자기 아들을 왜 이 땅에서 처참하게 죽게 하시는 겁니까? 치과에서 의사들이 이 뽑을 때 삼갔으면 하는 행동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빨을 뽑아놓고, 썩은 이 뽑아놓고 의사 선생님이 그런다고요. “자, 한번 보세요. 이게 당신 썩은 이빨입니다.” 그걸 왜 보여줘요, 그걸! 그거 안 보려고 뺐는데.

내과 수술 하면서 암 덩어리 제거해서는 “자, 이게 당신 속에 있는 암 덩어리입니다. 암세포입니다.” 이걸 왜 보여줘요? 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얼마나 싫어한다고요. 어떤 인간도 나의 부정적인 것을 말하지 말라. 이게 인간이 철칙이거든요.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그 썩은 이빨 왜 보여줍니까? 왜 내가 은폐하고 싶은 것을, 숨기고 싶은 것을 왜 나타냅니까? 그 암세포 덩어리를 왜 보여줍니까? 이것 때문에 당신 죽는다는 뜻이거든요, 이것 때문에. 십자가 보여주면서 ‘이것 때문에 당신 죽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사도라고 권위가 있는지요. 자기가 사도로서 첫째 사도 아닙니까?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 했을 정도니까 자존감이 대단하지요. 그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하면서 전파하는 자기 자신은 자신감이 있고, 나는 완벽하게 말씀대로 산다는 그게 일종의 사기인지도 몰랐지요. 자기가 조작한 것도 모르고 자기는 올바르게 산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려고 올라갔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거기에 율법으로 봐서 못 먹는 것만 소복이 담겼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먹으라는 거예요. “이 더러운 것 먹으라.” 사도행전 10장 12-14절에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 50년, 60년, 신학박사나 목사라고 우기고 자랑질하는 인간, 진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주여, 제가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으로서 지금까지 나쁜 짓 하나, 간음도 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교회 충성했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그건 가짜, 내가 조작한 엉터리 하나님이었어요. 진짜 하나님은 “먹어, 먹어! 그 일 해! 네가 뭐가 잘났다고! 뭐가 대단하다고? 네가 뭐 죄인이라고 회개한다, 하는 그것으로 네 죄지은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지식이지요. 누굴 속이려고요? 우린 일상이 사기 치는 거예요. 일상이 그런데 아닌 척하고 있지요. 왜 사기냐? 말씀 보면서, 율법 보면서 살려고 애를 쓰니까 이게 사기잖아요. 율법은 저주를 주는 거예요. 죽어라, 그 말이지요. 네가 받은 것 마귀한테 주라는 거예요. 아끼지 말고 잃어버리라고, 너 자신이 썩어버리라고 하는데 안 썩겠다고 버티면서 ‘이 말씀 지킬게요. 살려주옵소서. 저 말씀 지킬 테니 살려주옵소서.’ 이러고 있으니 그 자체가 사기잖아요.

“먹어라. 이 더러운 것 먹어라.” 세 번 했습니다. 베드로가 안 먹겠다고 버티는 거예요. 이 고집, 우리의 고집과 어떻게 그렇게 닮았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본인이 불신앙을 경유를 해야 돼요.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됩니다. 내가 뭘 잘했는지를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매일 같이 생각해야 돼요, 뭐가 잘못됐는지를!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복음 알았다고. “주님의 공로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아닙니다. “주님의 공로를 훼방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공로를 훼방하지 않게 하옵소서. 곧 나의 공로, 나의 신앙이 주님의 공로를 훼방하는 순간인 것을 왜 모르십니까? 뭐 잘났다고 살아야 되지요? 우리가 살 의미도 없고 권한도 없는데. 신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신앙이 있어요? 신앙은 내가 갖는 게 아닙니다. 요셉이 꿈을 갖는 게 아니에요. 꿈이 요셉을 가지지요. 반대로 아신 거예요, 반대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절, 정말 어려운 말씀이에요, 이 말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의 ‘너’가 너를 책망하면 안 되고요, 미래의 ‘너’가 너를 책망하게 하라는 그 말입니다. 미래의 ‘너’가. 왜냐? 지금의 나는 마귀가 준 거예요. 마귀의 죄가 장악하고 있는 나예요. 마귀의 죄가 장악하고 있는 내가 나를 책망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더 순수해지고 더 완벽하고 더 깨끗하냐’고 스스로 자기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어요. ‘나처럼 철저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 이런 식으로요.

참, 복음을 전하고 또는 복음과 함께 모인 그 지난 수십 년 세월 가운데서 그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 자기가 순수하기 위해서, 더 순결하기 위해서 복음 듣고 떠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름 한번 꼽아 볼까요? 뭔가 복음을 반대로 알고 있어요. ‘저거 알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지.’ 주의 뜻은요, 더러운 것을 먹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더러운 것 먹고 너 통째로 그냥 마귀한테 돌려줘. 그냥 네 몸을, 가진 모든 것 다 돌려줘. 재산이고 건강이고 네 자존감이고 다 돌려줘. 마귀한테 줘버려”

주께서 그런 길을 가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을 때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주님께서는 “기쁘냐?” “예” “죽여라!” 아,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자기의 가치를 주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매일같이 자기 자신한테 실망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실망을 하는 그 자체가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이상하게 우리는 자꾸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서면, 시간만 지나면 이게 보이는 것으로 사물화 되고 대상화되고 말았어요. ‘괜찮아진 나, 나 이것 포기 못 해.’ 계속해서 그래요, 계속해서.

“내가 신앙으로 자식을 키웠습니다.” 야, 진짜 그 멘트 무시무시한 멘트지요. “제가 신앙으로 이렇게 자식을 키웠습니다. 자식 넷 다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네 명 정도는 해야지 또 둘이라 하면 ‘나보고 하는 이야기인가?’ 할까 싶어서 넉넉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식 네 명 내가 신앙으로 다 키웠습니다. 둘은 판사 되었고 둘은 의사 되어서 지금 잘살고 있습니다.”

이것 땡, 틀렸습니다. “신앙으로 자식 잘 키웠습니다. 두 명은 지금 사형 대기 중이고 두 명은 지금 구치소에 있습니다.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이게 맞는 말이지요. 이 아담의 후손인 내가 범죄한 아담에게 내 몸을 돌려주고 떠난다는 것, 아낌없이, 그것도 아낌없이 되돌려준다는 것, “가져가! 가져가! 가져가!” 줘버리는 거예요.

탕자는 자신의 자기 이름을 세상에 허비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가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도 자기에 대해서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몰라요. 주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뭐 그거 알아서 믿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절차를 밟게 하는 거예요, 절차를. 안 잃어버린 채로 ‘지금 나 예수 믿었어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요. 예수 믿는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잃어버려야 될 거예요.

그래서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율법의 집에서 복음의 집으로, 그걸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는가?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율법의 집에는 101호에도 율법이 있고, 102호에도 율법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복음의 집에는, 예를 들면 복음의 집에는 101호에는 로마서 1장, 102호에는 로마서 2장, 103호에는 로마서 3장, 저는 단언할 수는 없고 이 시간 105호, 로마서 5장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5장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슨 일을, 먼저 새로운 존재의 근거로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보고 뭘 하라고, 나한테 뭘 바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신앙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에 미쳐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주고 뭘 줘도 자기 잘난체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벌써 망가졌어요. 될 수가 없어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절에 보면, 인간들, 불신자인 인간들이 기껏 하는 게 뭐냐 하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그러니까 인간의 의리라는 것, 인간의 정, 정 때문에 “너 대신 내가 죽을게. 내 딸아, 걱정하지 말아라. 딸, 너 대신 어미 내가 대신 죽을 게.” 이것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할 수 있다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죄가 그런 일을 행한다는 뜻이에요. 의가 행한다는 뜻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가 남들 보기에 고귀한 희생적인 행동을 해낸다는 겁니다. 희생을 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죄를 받아먹을 수 있어야 구원받는 거예요. 이것 피하고 저것 피한다고, 깨끗하게 한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로마서 5장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옛날 구닥다리 고물차는 안 돼요.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야 돼요. 장막 집, 육신이 내려앉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이 교환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 마음의 교환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마음의 할례라고 합니다. 마음이 무슨 마음으로 교환되어야 하느냐? 우리 마음이 성령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이 땅에 와서 다 이루었던 주의 마음으로 교환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거예요. 마음이 교환되는 거예요, 마음이. 기존 이 마음 말고, 이거 째고, 즉 존재의 장판이 찢어지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이런 거예요. 사람이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인간은 대비하게 됩니다. 대비할 때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본능이 뭐냐 하면, 이번 일을 통해서 나한테 욕 얻어먹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된다는 그 마음 있잖아요, 그 마음. 그 마음이 문제라니까요. 그 마음이 문제에요.

어떤 사람, 깡패가 와서 돈 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깡패 말고 어떤 사람이 눈물 찔찔 흘리면서 도와달라고 할 때 ‘그래,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나는 얼마나 힘들겠는가? 따라서 그 사람 입장이 되어서 생각할 때 내가 도와줘야 돼.’ 이게 지금 불신자들도 하고 있는 것이고 아담에 속한 죄가 우리보고 이렇게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인간은 행동할 때 그 행동이 자기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게 아니고 보다 더 조금이라도 더 나를 의롭게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이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입니다. 그게 존재의 본능인데 그 존재의 장판이 뜯겨 나가야 된다니까요, 그게! 그게 안 뜯겨 나가니까 어디에 가서라도 남한테 욕 안 얻어먹을 짓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욕 안 얻어먹을 짓을.

이거는 뭐 교회 50년, 60년, 직분 받아도 소용없어요. 그냥 최선의 방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려고 하는 겁니다. “받아먹으라”가 안 돼요. 베드로가 그대로 노골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못 먹습니다. 율법에 위반되잖아요. 자신도 모르게 본성이 튀어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그 전에 미처 ‘내가 이 정도로 자기 잘난체하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런 이야기할 때 베드로가 진짜 신앙이 뭔가를 화끈하게 보여주잖아요. 지금도 성령께서 신앙인, 성령 받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일상을 통해서 화끈하게 이런 일을 가끔 수시로 수시로 맞닥뜨리게 만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통제 못 하는 알 수 없는 분노, 내가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분노가 팍 일어나서 돌아서서 1분도 안 되어서 후회할 짓을 하게 만들어요. 나로 하여금. 그럴 때 여러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장악하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장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5장 마지막에 보면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우리는 이 대목을 너무 잘 알아요. 로마서 5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을 너무 잘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실제적인 일상사에서 뭔가 부딪힐 때는 이 죄를 나의 선함으로 해결하려고 본능으로 탁 튀어나옵니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거짓말하면서 “어쩔 수 없었어. 안 그럴려고 했는데 내가 왜 그랬지? 평소에는 안 그래.” 평소에도 그래요, 평소에도. 그런데 “평소에는 안 그래. 내가 얼마나 점잖은데. 내가 화내는 것 별로 봤어? 안 봤잖아. 그런데 네가 순간적으로 긁어버리니까 내가 확 튀어나왔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내가 나를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내가 내가 아니에요. 나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내 마음은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해요. 주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있는 거예요. 나는 텅텅 비어 있기 때문에 가끔 가다 여러분 마음을 한번 쳐보세요. 텅! 텅! 여러분 속에 여러분 이름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텅텅 비어 있어요.

그래야 신앙인입니다. 뭐 남에게 내세울 건더기도 없어요. 주께서 마귀에게 전부 다 돌려 줘가지고. 내 자랑거리 돌려줘 버렸어요. 없어요.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이 본문 자체가 너 뭐했나, 를 묻는 게 아니에요. 묻지도 않아요. “너 뭐했는데? 너 뭐 했어? 스무살 때 뭐 했고 사십에 뭐 했어?” 묻지도 않아요.

‘주님께서 뭘 하셨냐’에요, 주님께서! 주님께서 하신 것이 호두껍질같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이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했다면 너 자신은 너를 위하는 것 끝내라, 그 말이지요. ‘너를 위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뭘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너를 위해서 하지 마,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를 손대는 분은 따로 있기 때문에 네가 네 인생에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만약 내가 손대면 어떻게 되느냐? 손대면 뭐가 가려지는가? 그 뒤에 예수님의 피가 가려져요. 그게 9절에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그 피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손을 대면, 관리하면 주의 피가 가려집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원했던 바에요. 악마는 인간을 통해서 그걸 원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 전력을 다해 가려버리는 거예요.

믿음이 있는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믿음 있는 나를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나를, 그런 착각을 하는 나를 버리고 그 버리는 과정 속에서 이미,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으로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에 버리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로마서 5장의 이야기가 내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거예요. 되풀이되려면 뭐가 등장해야 되는가? 나의 악마적인, 육신적인 것이 불뚝, 성질처럼 계속 일상을 통해서 불쑥불쑥 튀어나와야 되지요. 로마서 5장 14절 보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니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비밀의 저택에 갇혀 있는 인간들, 개인이 사회에서 어떤 유명한 유지가 되었든 관계없어요. 그 방에 있는 율법의 문구가 더 중요해요, 율법의 문구가. 죄가 모든 인간을 죄가 가두어 둔 거예요. 비밀에 가두어두었고 그 죄의 결과로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 오후 5시에도 입관예배가 있지만, 계속 사람이 죽는 거예요. 그다음 누구 차례일지 모르지요. 그럴 때 불신자들은 “아이고~” 죽는 이유를 모르니까, 로마서 5장을 모르니까, 어차피 돌려줘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아이고~, 아이고~!” 이러고 있다고요. 차 렌트 했으면 렌트 한 그 집에 돌려줘야지 그 렌트 한 차 타고 자기 집에 가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받아주지도 않아요. 렌트한 차는 번호판 허……, 또는 후……, 이런 식으로 가는데 받아줍니까? 우리 이름은 후, ㅎ 자로 나가는 거기에 그 번호판이 있어요. 그냥 악마가 렌트한 겁니다. 우리는 미련 두지 마시고요, 아낌없이요, 주께서 “나랑 같이 썩자” “감사해요” 내가 썩어야 아버지를 알고 주님을 알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어서 로마서 5장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반달 아니지요? 푸른 하늘 은하수 아니지요? 우리의 죽는다는 자체가 이게 종교가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이게 실제 아닙니까? 우리가 죽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 이처럼 우리는 실제의 사회 속에, 실제의 주의 일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걸 ‘복음의 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복음의 집.

거기는 예수님의 피가, 문구로 예수님의 피가 나와 있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죄가 더한 곳에 날마다 은혜가 넘치리라. 은혜가 더하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죄라는 것이 새롭게 새롭게,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네가 ‘나 안 먹어요. 나 그런 짓 안 해요.’라는 여전히 남아 있는 자기 의를 발각당하고 노출당하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이끌어서, 이미 주께서 너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시키는 그 주님의 일하심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세상이라고 생각했고 나만 잘되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여겼는데 우리가 어디에 갇혀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집에 갇혀 있지 말고 복음의 집에 속하여서, 둘러보는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피로 다 죄사함 받았고, 용서 받았고, 하나님의 새생명 받았다는 소식만 들려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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