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죽음 떠 안음
2022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3:14-16
(3: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나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천국 개념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속에서 자신의 집을 새롭게 지어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집’은 인간들의 안목으로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 뿐입니다.
육신으로 나타난 바, 그 육신이 곧 하나님의 집이요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하나님의 집’이 인간에게 비밀로 따로 분류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그 집을 붙잡거나 관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자신이 관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천국도 자기 관리하에 두려고 합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확 달라진 눈부신 광경을 보고서 그 정경을 자기 관리에 두고자 초막을 세 채 지어드리겠다는 제안을 하는 마음과 같은 겁니다. 멋진 풍경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먼저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놔두고 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대와 상반된 행동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 일생을 걸고 투자한 일이 파탄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에게만 성실하게 최후까지 의리를 지킵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주님께서 함께 할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즉 천국에는 제자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던 겁니다.
천국은 숫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로 말합니다. 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친히 하신 말씀과 거기에 합당한 성과로서 마련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2:31) 그렇다면 그 방법은요? 까마귀와 백합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까마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면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합화는 실을 만들지도 아니하고 짜지도 아니합니다.(눅 12:24-27) 사람들은 자기들이 평소에 했던 바에 의해서 까마귀나 백합화도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까마귀나 백합화는 “아무 것도 안 했음”입니다.
인간들이 무엇일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 나라’를 방해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그 나라에 적절치 않는 적대적 태도가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런 인간 세계를 공격하는 와중에 드러나게 됩니다.
천국은 침략하고 침노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제일 단단하다고 자부하는 그 지점을 공략해서 돌파합니다. 두 번 다시 자신을 재건할 수 없게끔 말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일에 허무를 느끼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만 사람들이 최종 남겨서 그것만을 믿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배신으로 갚아주십니다.
㉯이는 그 나라와 의가 이스라엘 역사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심판 전쟁의 결과로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 전쟁에 성도는 참여하게 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난감한 사태를 밀려오게 만듭니다. 허겁지겁 인간은 수습하기 바쁩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은 사정없이 들이닥칩니다. 자신을 자기의 최종 믿음 대상이 되는 것을 용인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자기를 위한 심판인 것을 인간은 눈치채야 합니다.
자력으로 인간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의 염려에서 풀려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전쟁에 참전되어야 합니다. 즉 주님은 나를 위한 나의 사적인 복수를 하지 않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원수는 따로 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돈을 받고 매수당해서 이스라엘을 유혹하는데 바알이라는 우상 신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 인생의 장래는 내가 관리하기 나름이다’는 정신을 옹호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유한한 존재가 유한성을 관리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유한한 성도 안에 무한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터뜨리십니다. 무한이란 곧 인간에게는 소실점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 지점이 그림의 원근법에서 나타난 무한의 개념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최후에 소실하는 바로 그 지점에 무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을 죽음이 심킨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시형제 혼인법’이 있습니다. 이는 형이 죽으면 아랫 남동생이 형들의 남은 식구를 돌바주는 제도입니다.
즉 동생은 형의 식솔들을 책임지면서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그 나라와 의란 예수님의 죽음을 지금 자기 생애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모든 것을 소실시키는 그 죽음을 말입니다. 이러한 인생 체험은 굳이 처참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35-37에서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도는 평소에 행동하면서 전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닌 것으로 판정받습니다. 왜냐하면 난데없이 외부에서 자꾸 자신을 일방적으로 도와주고 있음을 감지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이 본인을 관리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성도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성도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몰라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결코 자신이 책임지는 인생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한이 박혀있는 하나님의 집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변절당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14강-디모데전서 3장 14-16절(죽음 떠안음)22101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 14-1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3:14-16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14. These things write I unto thee, hoping to come unto thee shortly:
15. But if I tarry long, that thou mayest know how thou oughtest to behave thyself in the house of God, which is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the pillar and ground of the truth.
16. 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justified in the Spirit, seen of angels, preached unto the Gentiles, believed on in the world, received up into glory.(KJV)
14. I am writing these things to you, hoping to come to you before long;
15. but in case I am delayed, [I write] so that you may know how one ought to conduct himself in the household of God, which is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the pillar and support of the truth.
16. And by common confession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He who was revealed in the flesh, Was vindicated(justified) in the Spirit, Beheld by angels, Proclaimed among the nations, Believed on in the world, Taken up in glory.(NASB)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집’ 나오지요. ‘하나님의 집’이 하늘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도는 그 ‘하나님의 집’이 땅에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은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알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 16절에 나옵니다 “크도다 경건의” 그다음에 “비밀”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집이 이 땅에 만들어지기는 졌는데 이게 비밀스러운 곳이다. 비밀스러운 곳이라는 말은, 누구나 인간이라면 알아먹게 되는, 발견하게 되는 곳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왜 비밀인가? 그것이 16절에 죽 나옵니다. 집이 경건의 집인데 그 집을 묘사할 때 예수님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방금 여기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그 평수가 몇 평이고, 몇 층으로 되어 있고, 부동산 가격이 얼마인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분에 대해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분은.
그러니까 이게 예배당 건물, 고딕 건물로, 빨간 벽돌로 지었으면 이것은 비밀 아니에요. 누구나 그 안에 들어와서 등록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왜? 누구의 눈에나 띄고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학습, 세례받으면 되니까 그것은 일단 하나님의 집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떤 가건물, 건축물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나셨다.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육신으로 나타났는데, 육신으로 나타났으면 우리 눈에 띄겠는데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육신 속에서 그분이 영적으로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그것을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파악할 길이 없다 그 말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우리와 다른 하나님 그 자체라면, 진짜 그렇다면, 그 비밀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바꿔치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나의 목숨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분을 만났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자기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 없고, 그분이 어떻게 나타났다가 무슨 일을 하시고 어디로 가셨느냐에 관심이 있지요.
그래서 16절에 보면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올라가실 때 천사 두 명이 나타났잖아요.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비밀이에요. 전혀 이것은 일반인들이 수용할 수 없고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비밀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비밀이구나.’ 아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은 예수님의 세계에 같이 휩쓸린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 바 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 자신보다 예수님을 우선시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떠났다는 거지요. 떠났고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성도만 남아 있고 남아 있는 게 교회인데 교회의 특징은 자꾸 내가 모르는 분에 의해서,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꾸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모른다는 말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같은 사람들이에요. 같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서로 협조하고 아쉬울 때 찾아가고, 이게 우리가 아는 것인데 그 사람들의 도움 말고 도움이 다른 곳에서 온다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 오기 때문에, 사람들의 도움 같으면 내가 이렇게 아부 떨고, 베풀어주고 사전공작 해가지고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까 당신도 해달라.’ 이렇게 하면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수긍을 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도움을 줬다면 나한테 도움 준 그분을 내가 붙잡을 수가 없어요. 붙잡을 수 없는 그분, 내 권한 밖에 있는, 내 관리대상이 안되는 그분에게 자꾸 도움이 와요.
이게 경건의 비밀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내 인생인데 왜 내가 알지 못하는 식으로 내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이게 내 인생인데! 책임져도 내가 책임져야 되는데 전혀 내가 책임 못 지도록 손을 그냥 묶었다 할까, 손을 놔버렸다 할까, 그래도 상관없는, 내 손을 묶어놔도 상관없이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도록 그렇게 만드는 그 작업, 이 작업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뭔가를 했는데
■그 뭔가가 이 땅에서 아직도 그 영향력이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겁니다.
‘주님 떠났으니 끝났네. 이제 우리 인생 우리가 알아서 해야 되겠네.’가 아니라 주님이 뭔가 남기고 간 건데 그 남긴 결과물이 계속해서 죄인을 성도 되게 하는 힘으로써 이 땅에 여전히 아주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흔적이 내가 모르는 데서 나한테 도움이 계속 오면서 동시에 나는 내 인생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거예요. 내 인생에서 내 손을 뗀다는 말은 곧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배신 해야 된다는 것,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배신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제자들을 배신했거든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붙잡으려고 했어요. 저분 이용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을 만하다고 제자들은 생각했어요. 저분과 함께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자기 미래가 확장되고 좋은 천국으로 가서 함께 살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천국에서 누가 높으냐, 그거 미리 여기서 정하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것저것 인간 생각 주께서 다 아시고 그것 다 떠나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실망에 잠겼지요. 자기 인생 3년간 나름대로 확실한 믿음 가지고 투자를 했고, 믿음 가지고 모든 것을 헌신했고 바쳤는데 내가 목숨 바치고 정성 바친 그분이 그분 쪽에서 배신 때리고 가버렸어요.
보통 이런 이야기 하잖아요. 일찍 가장이 죽었던 가정에서 엄마가 이런 이야기 해요.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이런 말 하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주님 날 버리고 떠났다.” 주님이 날 버리고 떠난 거예요. 40년, 50년 교회 장로로 목사로 충성을 했는데 누가 변절자냐? 내가 믿었던 예수님이 배신 때리고 가버린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배신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교회 안 돼요. 교회는 철저하게 주님한테 배신당하는 그때부터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요. 교회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교회냐? 잘해라. 너희끼리 잘 해봐. 나는 너희들 교회라고 한 적이 없다.”
내가 너희들과 떠난다는 그 사실을, 결국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가 모르는 상태에서는 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건 네가 생각하는 네 교회지 너한테 이익이 되고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계산하에 모이고 협력하고 노력하고 그렇게 한 그 교회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지요.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왜 하시느냐 하면, 배신이 먼저 있고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떠나야 그다음에 이 말씀이 유효한 거예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는 이 말씀은 ‘너를 이미 고아로 내가 만들고 말겠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이 왕따 당해 버리도록, 세상은 세상대로 왕따 당하고 주님은 주님대로 왕따 당하고 천하에 의지할 곳 하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렇게 주님께서는 제자들 내버리고 혼자 하늘로 가버린 겁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허무를 느끼지요. 허무를 느껴야지요.
왜 허무를 느껴야 되는가? 인간은 왜 허무를 느껴야 되느냐 하면, 자기가 하는 것을 자기가 인간은 믿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해낸 것, 내가 열심히 한 것을 본인이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주님을 믿은 적이 없어요. 자기가 한 것을 믿었지,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미련 갖고 집착을 했지요.
그런 인간, 그런 사람들, 사람의 본성이 그렇거든요. 자기 머릿속 기억에 남는 것은 자기가 행한 것 외에는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따라서 이 ‘하나님이 집’이라는 게 아, 인간들이 붙잡을 수 있는 인간들이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아같이 다 버리고, 허전하게 되어버리고 허무하게 되어버린 이 제자들에게 그러면 하나님의 그다음 조치는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한테 이런 질문 많이 했어요? “우리가 예수 믿고 뭘 해야 됩니까?” 얼마나 그 유사한 질문을 많이 했겠어요? “제가 예수 믿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내가 뭐하면 됩니까?” 그 질문을 많이 받지요. 저도 많이 받고 여러분도 받았을 거예요.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12장 3절에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전에 먼저 뭘 해야 되느냐? 그냥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되지 않겠는가?
계명대학교 교훈이 뭔지 알아요?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에요. 건물 벽에 딱 새겨놨어요. 그 나라 의는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분명하게 이것에, 거기에 푹 젖어 있어야 돼요.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차이 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방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그것 때문에 염려하는 그것이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질문 자체가 뭐냐? 내가 예수 믿고 뭐하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주님의 답변은 이거에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을 하지 말라.” 이렇게 답변하시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하는 게 뭐냐?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그것 가지고 염려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2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어요. 24절에도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 까마귀하고 너하고 비교해 보라. 차이점을 발견해 보라.” 이런 말씀이거든요. 까마귀하고 나하고 차이점이 뭘까? 둘 다 파닥거리고, 뭔가 생동하고,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까마귀 그들에게는 염려가 없다는 거예요. 파닥거리는 것은 맞아요. 움직이는 것은 맞는데 까마귀가 자기 생존에 대해서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까마귀를 보고 ‘아이고, 먹고 살려고 열심히 한다.’ 이 말은 까마귀 입장에서 까마귀를 생각 못 하고 본인 입장에서 ‘까마귀도 뭐 별것 없겠지. 내가 나 살려고 열심히 애쓰는 것처럼 까마귀도 별것 없네. 저것도 노력하는구나.’라고 자기 입장에서 엉터리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 그 의를 모르는 인간들이 까마귀 하나도 제대로 해석을 못 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누가복음 12장 27절에 보면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백합 생각하라, 까마귀 생각하라, 새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뭐냐, 뭐도 아니하고, 뭐도 아니하고, 뭐도 아니하고, 거기서 ‘아니하고’라는 성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까마귀를 생각하고, 새 생각하고, 백합 생각하라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하지 마!” 그게 정답이에요. 하지 마. 이 말은, 그 나라의 의에 네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뭘 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천국에 네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천국에 너의 자리가 없다. ‘천국에 네가 없다’가 아니라 ‘너의 자리가 없’어요.
천국은 누구누구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천국은 없는 자리 새로 만드는 곳이 천국이거든요. 사람 모였다고 천국이 아니라, 천국은 아무리 수천만 명이 모여도 거기에 자리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특정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돼요. 자리는 없는데 사람은 수억 명 모여봤자 한 사람도 거기 못 가잖아요. “내가 가서 자리 마련해줄 게. 처소 마련할 게.”
이게 요한복음 14장이거든요. “그동안 너는 고아같이 놀아라. 이 땅에서 고아 같은 대우를 받아라.” 이게 지금 제자들에게 하는 거예요. “네가 그동안 나를 의지하고 부모를 의지하고 네가 그동안 같은 동료와 형제들 의지한 것은 그들을 원해서가 아니라 너 하나 챙기고자 하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나만 잘되면 된다는 그 의식 가지고 그동안 나 예수를 이용했잖아. 그러니까 네 자리가 없는 거야.” 그런 자리, 천국에는, 어디 그런 인간이 턱 앉을 자리는 천국에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경건의 비밀이지요. 경건은 여기서 예수님을 두고 경건이라 해요. 비밀, 그냥 예수님의 비밀이에요. 예수님하고 너하고 다른데 너는 자꾸 예수님을 네 입장에서 같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호수아 13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발람선지자에요. 발람도 칼날로 죽였다. 민수기 25장에 보게 되면, 발람선지자가 모압왕의 뇌물을 받고 ‘어떻게 하면 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는가, 저주받게 하는가?’ 그것을 계속 궁리하다가 결국 발람선지자가 유혹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도한 것이 주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민수기 25장 9절에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2만 4천 명이 죽었어요.
그런데 발람이 이스라엘을 꾈 때 뭐라고 꾀었느냐 하면, 이렇게 꾀었어요. 발람선지자, 그 자리죠, 발람선지자, 이 나하고 너희하고 같은 동류라는 겁니다. 특별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그들을 꾀인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것 너도 좋아하잖아.” 발람선지자가 돈을 밝혔으니까 좋아하는 것이 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것 좋아하는 거예요. 그것 좋아하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서로 긍정하자. 인간이 너 좋고 나 좋고 그러면 되었지. 그 좋은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신이 있다. 그 신이 무슨 신이냐? 그게 바로 바알신이다. 인간들 편에 서서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이 원하는 것은 빌면, 기도하면, 제사하면 다 주는 신, 그 신을 같은 마음으로 공감해서 드리자.” 이래서 이스라엘이 2만 4천 명 죽었습니다.
그 점을 나중에 알고 여호수아가 발람 선지자를 칼로 죽여버렸지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두에 두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없어요.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 한 만날 수 없는 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달라지려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는데 어느 자리로 달라져야 되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는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자기만 생각하는 그 인간이지요. 그 인간에서 무엇으로 달라지는가?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 없는 인간으로 달라지면 구원입니다. 구원 참 쉽죠. 자기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말아야 될 인간으로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사태, 이런 일이 인간의 힘으로서는 여러분 불가능한 것을 아시겠지요. 사람이 뭔가 고민이 된다는 것은 외부공격이 없을 경우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거예요. 뭔가 사태가 평온하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겁니다. 갑자기 뭔가 들이닥치면 고민할 시간이 없지요.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했는데 구하는 재주나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나라 의를 구하느냐?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나님의 천국이라는 것은 인간의 천국 생각 따로 있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천국 따로 있어서 서로 틀리니까 천국이 어느 천국이 맞느냐를 한판 붙자는 거예요. 침노당하고 침략하고 빼앗는 그 과정속에서, 전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비밀스러운 천국이 제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전쟁이 일어나야 돼요. 무슨 전쟁?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가 누굴 공격하느냐?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공격하면 돼요. 그러면 그 나라 그 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 나라를 공격하는 겁니다. 그 공격하는 빌미가 뭐냐? 인간 나라 쪽에서 하나님 나라를 그동안 공격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는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인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슬쩍 인간세계 속에 보냅니다. 전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슬쩍, 진짜 몰래 보내요, 요란스럽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슬쩍 보냅니다. 그 슬쩍 보내는 대목이 출애굽기 5장 21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히브리인들입니다. 그 당시에 죽도록 고생하면서 노예 생활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자부하는 모세와 아론이 오니까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주려고 선지자들 보냈구나. 그 선지자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있었는데 그 하나님의 핍박받는 백성, 언약 백성을 대표하고 대변해서 그 당시의 권세자 바로와 회담하고 나오는데 회담 내용을 가만 들어보니 이것은 사태가 전보다 더 악화되었어요.
그 악화된 이야기는 지난번 수요일 설교(10월 5일)에서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냥 말만 했어요. “우리 여호와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내 백성 내보내라.” 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바로가 하는 말이 “너희가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몽땅 너희들 식구까지 이 땅을 떠나려 하느냐? 너희들은 너희들의 자리, 너희들의 신분을 망각했다. 너희들은 우리 애굽나라의 노예야. 노예가 노예 값을 하고 노예의 모습의 모습을 보여야지 어디서 큰소리치고 있어. 여봐라! 앞으로 짚을 주지 않으면서 벽돌 목표량 다 채워라.”(출 5:6-9)
이렇게 하니까 분명히 회담이 좋게 이뤄지리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리라 생각했는데 백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더 험한 꼴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선 것을 보고 이제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어요. “네가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드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좋게 하는 하나님인데, 네가 중간에 나서서, 우리가 하나님도 믿고 세상에서 사는데 이 두 가지 일을 네가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너희 둘을 처단하기를 바란다.” 이런 욕을 얻어먹었어요.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은 뭐냐 백성들에게 변절자, 배신자 소리를 들은 겁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의 이 고백은요, 정말 아주 유용한 고백이에요. 이들이 이런 고백을 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진정으로 신앙인인지 진짜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건성건성 대충대충 예수님께 걸쳐놓는 사람인지를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고백 같은 겁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시는데 결국 지금 설교한 것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냥 구경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 뭔가 일을 벌일 때는 반드시 하나님 믿는 우리까지 거기에다 집어넣어요.
집어넣음으로써 우리가 당최 그동안 하나님의 그 나라 의에 대해서 뭔가 곡해하고 있었고 몰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중 한 가지 예가 신약에서 나오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갔어요. 그냥 산이에요. 앞산 같은 산이라는 말이지요. 저도 거기 올라가 봤어요. 차로 올라가 봤는데 그냥 꽤 높은 산이거든요.
산에 올라갔을 때 갑자기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해같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천국은 봐라, 이런 곳이다.’ 하고 그 풍경이 좋은 풍경, 아름다운 풍경을 천국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베드로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른 거예요. 이게 베드로 마음에만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 안에 이것이 깊숙하게 들어있는 거예요.
좋은 환경 누가 마다합니까? 멋진 환경 누가 싫어하겠어요? “야~! 참 좋다. 참 영광스럽다.” 그래서 헨델의 메시아라든지 모든 찬송가, 칸타타, 미사 음악, 이런 것 보면 고상하고 거룩하기 짝이 없어요. 우리 인간의 눈에, 인간의 귀에는. 그게 다 거짓된 찬양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왜 이런 사달이 났는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썩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좋은 환경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 폴짝 들어가려고 해요. 좋은 환경. 여러분, 경치 좋을 때 뭐라고 합니까? 경치 좋은 환경, “야~! 여기는 천국 같다.”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사고방식인가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주님을 생각할 때 먼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전제되어 있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이해되는 그것을, 주님도 나를 이해해 주세요, 라는 그 감정이 먼저 우리에게 들어있어요. 주님이여, 저를 이해해 달라는 거예요. 내가 천국 가고 싶은 그 심정을 주께서 이해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천국은 어떻게 되느냐? 전쟁이고 그 전쟁은 뭐냐? 하나님의 심판을 앞장세운 그 전쟁에 네가 함께 동행해서 전쟁을 같이 하는 사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 누굴 위한 전쟁, 무엇에서 무엇으로 전환되는 변환되는 전쟁인가, 거기에 네가 같이 동참해서 체험해 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전쟁하면서 마지막이 예수님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그 전쟁, 너는 거기서 왜 발을 빼려고 하느냐? 그 전쟁에 네가 몸을 한번 담가봐라.” 대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주님을 없애는 쪽으로 나가는 그런 성질이 있는 세상인지를 네가 거기서 몸소 체험해 봐야 되지요. 그 심판 전쟁에 함께 해야 돼요.
경치 좋고 살기 좋은데 안 갈 사람 누가 있어요? 다 가요, 다, 불신자든, 불교 신자든, 천주교든, 이슬람교든 다 갑니다. 무신론자도 가요. 그 좋은데는. 그러니까 당연히 그 나라 의는 아니지요. 그 천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나라 의는 아니지요.
천국은 뭔가 표적이 있는데 그 표적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킬 때 가장 단단한 지점 있잖아요, 그 지점을 주님께서는 돌파해버립니다. 그걸 노리고 깨버려요. 내가 괜찮은 나로 지킬 수 있는 내 나름대로 가장 단단한 곳, 그 안에 내 마음껏 숨을 수 있는 그 아지트, 그걸 표적으로 미사일 공격 들어갑니다. 깨버려요. 부숴버립니다.
예를 들면 신학생이나 신학교 출신들, 목사들이지요, 신학생이나 신학교 출신들의 가장 단단한 지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자기 밥벌이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지점이 뭐냐? 신학입니다. 주님은 뭘 공격하겠습니까? 그 신학 자체를 깨버리지요. 목사가 자기의 신학을 했고 교인들은 모르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너희들 모르는 신학을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교인들은 졸지에 아마추어 되어서 ‘야~, 저런 신학이 있었구나. 역시 목사님은 주의 종이다. 주의 사자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게 바로 목사가 자기 마음 하나 챙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방탄소년단한테 잡채 한번 만들어보라 하지요. 잡채 만들 수 있는지. 방탄소년단 잡채 만들어서 한 달 수입 수십억 얻을 수 있는지. 못하잖아요. 춤추고 노래하는 것밖에 없지요.
인간은 자기 주특기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최후의 마지노선입니다. 그것을 주께서는 공격하는 거지요. 네가 너를 지키는 이상 그것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해당된다는 말이지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하나님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뭘 알아줘! 그것이 심판의 대상인데 뭘 알아줘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이 허무해지고 고민이 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을 자기가 믿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뭔가 행한 것을 자기가 그것을 소급해서 믿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뭐냐? 자기에 대한 성실한 의리에요, 의리. 의리 알지요, 의리. 나에 대한 성실한 의리.
이것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그것, 내가 좋아하는 그 안에 나의 정체가 거기서 밝혀지는 겁니다. 네가 뭘 좋아하느냐를 통해서 그 사람의 정체가 발각돼요. 따라서 이 작용, 이런 전쟁을 폭격해서 그걸 파쇄시키고 돌파하고 박멸하는 그 방법은 바로 이스라엘과 합류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이방인들, 이방 민족과 전쟁하는 여정과 과정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때문에 이 이스라엘 백성, 이 사람들은 마냥 그들이 신나고 즐거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생각한 전쟁방식이 너무나 아니라서.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만 신났지 백성들은 심장이 쫄깃쫄깃해져요. 주눅이 들판입니다.
이걸 이렇게 쉽게 하면 돼요. 유한(有限)안에 무한(無限)을 꽂아 넣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유한 안에, 한계 있는 유한 안에 한계 없는 무한을 꽂아 넣은 거예요. 꽂아 놓으면 이 꽂아 놓은 이유가 무한, 한계 없는 무한이 유한을 그 자체적으로 폭파시켜 버립니다. 무한한 주님이 유한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결국 노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폭파시켜 버리는 거예요. 네가 그 나라와 의의 훼방꾼이고 방해꾼이라는 것을 너를 산산조각내면서 밝혀주시는 겁니다.
밝혀주실 때 상당히 폭력적으로 나온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게 마냥 폭력적인 것이 아니고 순하기 짝이 없어요. 마태복음 25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유명한 말씀이에요. 들어보면 다 압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의인들입니다. 천국 가는 백성들,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되묻습니다. 도리어. 이게 우리 자신을 폭파하는 방법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집사님이, 지난 낮 설교 이후에 ‘집사’라는 말 상당히 무서운 말이지요, 어떤 집사님이 교회 봉사를 했어요. 걸레질하고 제자리에 걸쳐놨는데 2.5초 뒤에 어떤 집사님이 “아이고, 집사님! 교회 봉사도 하시고 참 귀하십니다.” “제가 언제 봉사했습니까? 내가 언제 봉사했지? 봉사한 적도 없는데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봉사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언제 했습니까?”
봉사를 통해서 봉사한 주인이 내가 아님을 폭파시키는 방법이 어떤 때는 그렇게 공격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칭찬 같은 것으로 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24장 36절에도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이 구절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모르는 거예요. 모르면 그다음 문제가 뭐냐?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나를 건사해서 살 수 있느냐, 그 고민이 오는 거예요. 성경에는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성경 말씀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 몰라도 되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내가 개코도 뭐도 모르고 어떻게 이 땅에서 밥 먹고 삽니까?’ 이래 나온다니까. ‘뭐 알려줘야 살지.’ “너는 몰라도 돼.” “모르면 내가 어떻게 내 몸 하나 건사합니까? 답답해 미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너는 전혀 그 나라 의를 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전쟁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으로 이미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4-28절, 약간 긴데 후딱 제가 읽어드리겠어요.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율법이에요. 이 제도는 성경의 예도 들을 수 있지만, 옛날 몽골 지역에 풍습이 뭐냐 하면 하나의 가족이 있는데 형이 죽었어요. 형이 죽으면 둘째, 시동생이지요, 형의 동생이 형수하고 자식들을 전부 다 건사할 책임이 있어요. 성경에서는 아들이 없을 경우에 그렇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류의 문화에서는 아들이 없는 경우만이 아닙니다.
아들이 있고 자식이 있다 하더라도 여자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어요. 토지명의가 남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는 재산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없기 때문에 일가친척에서 누가 돌봐줘야 돼요. 돌봐주려면 시동생이 형수의 가족들 다 떠안고 밥 먹여 살려야 돼요.
그러니까 시동생이 그걸 다 거부하는 거예요. 자기 몸 하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형의 식솔들, 조카들까지 다 살리려고 하니까 힘들잖아요. 그런데 국가적으로 과부나 고아들 국가가 책임지려면 부담이 너무 크니까 국가가 다 책임질 수가 없고 ‘일가친척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시집왔으면 그 집 귀신이다. 시가에서 알아서 다 해 줘.’ 하는 제도가 인류사에 나오는 ‘시형제결혼법’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그 아들 언약의 아들 뽑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지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떠 맡으라.’ 그 말입니다. 율법적으로. 살아 있는 자를 떠맡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의 그 결과물을 산자가 떠맡아야, 그래야 이게 율법안의 세계, 그 나라 의에 들어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 인생만 챙기면 끝입니다. 자기한테 성실하고 자기한테 의리 있으니까요. 최후의 의리는 나 하나 내가 지켜주겠다는 그 의리 외에는 없어요. 다른 의리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유한한 것을 압니다. 하지만 유한 안에 무한이 들어있지를 않아요. 유한에서 유한으로 끝나고 싶어요.
무한이라는 것을 누가 발견했느냐 하면, 르네상스 시대 때 서양 14, 15세기에 화가들이 먼저 발견했습니다. 화가들이 그림 그릴 때 원근법이라는 것을 썼는데 가로수 길 그릴 때 큰 나무 앞에 있고 그다음 나무, 그다음 나무, 그렇게 작아지면서 죽 있거든요. 어디를 겨냥하느냐? 나중에 소실점, 새까만 점, 가느다란 길을 따라서 한 점에 모이는 그 점을 무한으로 본 겁니다. 르네상스 때 처음으로 그런 그림을 그렸어요.
그 전까지는 무한개념을 예수님 얼굴을 커다랗게 그려서 표현했어요. 예수님이 뒤에 있더라도 마리아 얼굴은 작게 그리고 예수님 얼굴을 커다랗게 그렸어요. 삼위일체를 크게 그려요. 중요한 것은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를 그리기 위해서 거룩한 그림을 그린 거예요.
삼위일체 그림 크게 그리고, 천사도 크게 그리고. 거리가 얼마나 짧으냐 기냐, 현실적이냐 사실적이냐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위한, 인간이 즐기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을 묘사해서 글자, 문자 모르는 민중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라고 유리 위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성당에서 성경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때는 문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그림으로 교훈하기 위해서, 성경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중세 미술이나 음악도 그렇고 조각도 그렇고 다 그래요.
그런데 인간 중심으로, 하나님 믿다가 십자군 전쟁에서 깨지고 ‘하나님도 소용없구나. 우리가 나서야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는 게 아니구나.’ 하고 인간 나름대로 철이 든 거지요. 인간 나름대로 철이 든 거예요.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가 확실하게 더 중요하게 체득이 되는 순간이 온 거예요.
40년, 50년 교회 다니면서 백날 다녀봤자 하나님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 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이 60, 70 넘어서 이제 깨닫는 거예요. 아멘, 나와야 돼요. 그동안 뭐였어요, 그러면? 사기 친 거지요. 안 들킬 줄 알았지요.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주님이!
“너도 나처럼 혼자 한번 살아 봐라. 네가 제대로 고민해봐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그게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아프냐?” “아픕니다.” “진짜 아파? 돈 잘 버는 네 몸뚱이 있잖아. 그래도 아파?” 가만 생각해 보니 “내 몸 있으면 됐네요.” “그렇지? 이제 본색 나오는구먼! 뭐 하나님 없어서 아프다고? 예수님 떠나서 섭섭하다고? 그 들통날 거짓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몇 번이나!”
교회는 취미고 생업은 이건 필수잖아요.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살잖아요. 돈도 없는데 그게 무슨 인간입니까, 돈도 없는데! 그게 무슨 인간이에요? 그러나 로마서 8장 9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없으면 인간 취급 안 해요. 성령 없으면 죽은 자에요. 성경에서는 성령 없으면 죽은 자고 인간세계는 돈 없으면 죽은 자고. 뭐 그게 갈등거리나 됩니까? 그거 뭐. 죽음을 떠안고 가는 것, 이것은 바로 소실점 까만 점으로 꺼져버리는 곳, 바로 그곳으로 누구든지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유한이, 내가 유한된 나를 살리려고 해도 우리는 무한이 와버리면 주인이 바뀌었어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무한이 나의 주인이 되어버렸어요.
그 무한은 어떤 무한이냐? 이 땅에서 설움 받고 결국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똑같은 세상에서 처참하게 사형수로 낙인 찍여서 사라진 그분, 그분이 무한이고 ‘하나님의 집’이요, ‘경건의 비밀’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장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 이르게 합니다. 여호수아 7장 25-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괴로움의 골짜기. 이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전쟁하는데 이스라엘 중에서 아간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리고성 싸움에서 크게 한몫 봤거든요. 그게 하나님께 바칠 건데 본인이 그걸 챙긴 거예요. 자기가 힘들어서 전쟁해서 수고했다고 자기 것으로 하나 챙긴 겁니다. 그 챙긴 일 때문에 아이성 함락하는데, 조그만 성 함락하는 데 그게 실패로 끝나버렸어요.
그러면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느냐?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의 전쟁인데, 그 나라 의를 위한 전쟁인데 그중에 누가 있었는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딱 한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아간이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아간은 전쟁하면서 왜 그 귀한 금덩어리 그런 것을 왜 챙겼는가?
하나님이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서 적들을 빙자해서 나를 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나는 하나님 편이니까 저 불교신자 치고, 이슬람신자 치고, 저쪽 불신자들 저주한다고, 막 친다고 생각했지 여기 하나님하고 한패 먹었다는 나를 치는 일을 벌인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 중의 아간은 그걸 몰랐던 겁니다.
사람이 평생 살면서 신나는 일 중 하나가 남 못 되는 거예요. 남 못될 때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러요. 내가 미워하는 자를 복수해줄 때. 그러나 ‘십 리 못가서 발병 나버려라, 인간아!’ 이럴 때 로마서 12장에 보면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곧 “네 원수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나의 원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원수라는 게 없습니다. 이 땅에 원수는 주님의 원수밖에 없지 나의 사적인 원수는 이 땅에 존재해 본 적이 없어요. 사적으로 원수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예요. 그 사람 자체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내 원수가 있어야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너자신을 버릴 때 비로소 원수가 누군지가 보인다는 거예요. 나의 원수가 애초에, 애당초에 없고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주의 원수인 것이 생각될 때 비로소 원수 같은 나를 이렇게 구원하신 주님의 피에 대해서, 희생에 대해서 감사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한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그 나라 의의 공격입니다. 이게 아름다운 공격이에요. 사랑의 공격입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은 필수예요. 우리의 뜻대로 기도할 때 응답 안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맘속에 원하는 것을 다 피해 가는 것은, 이것은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나의 십자가의 죽음을 네가 떠맡으라.” 하는 거예요. 네가 이 세상에 아직까지 목숨 붙여주는 이유가, 내가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서러움 당하고 수모당했는지 네가 같이 거기서 체험해 보라는 겁니다.
아까 우리 교독문 읽었잖아요. 교독문 42번 그 끝부분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나를 인하여, 나를 인함입니다. 우리는 개인 없어요. 우리 안에 우리를 폭파시키고 예수님만 남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계시는 집이,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거예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 너희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 뒤엣 말은 안 읽어도 돼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게 가능합니까? 욕 얻어먹고 핍박받았는데 이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일까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라고요. 정말 예수 이름으로 핍박받고 욕 얻어먹을 때 이게 나의 즐거움입니까? 이게 나의 희망이에요? 자식들한테 “너도 예수 이름으로 핍박받아. 십자가 복음으로 핍박받아. 이게 아빠 엄마의 소원이야.”라고 자식들에게 이야기해본 적 있습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 안 하면 너 밥 못 먹고 살아. 이게 거지 되려 하나? 누구 닮아서 이렇게 농땡이야? 취직시험에서 떨어지고 거지꼴 나 봐야 네가 정신 차리지. 공부 잘하고 돈 벌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란 말이야.” 내가 갖고 있던 내 본심이 자식 낳아 봐야, 아……, 자식한테 그대로 물려준다는 사실, 자식의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나의 분신인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것을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긴 그런 종족이에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늘입니다. 땅에서의 상은 없습니다. 땅의 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뭘 믿었는지, 무슨 생각하고 살았는지. 주님 한편 되어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던 엄청난 착각, 주님이 배신자고 우리에게서 변절자처럼 활동하시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제야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과 같이 세상을 심판하는 군사로써, 병기로써 뽑혀 나온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