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귀신의 가르침

아빠와 함께 2022. 10. 24. 19:02

귀신의 가르침

2022년 10월 23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4:1-2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귀신을 빼놓고 인간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을 언급하므로서 세상 이해 범주를 확장합니다. 인간들은 귀신이 더럽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생각입니다. 인간들에게는 귀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친구가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들의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롬 6:17)‘본래’부터가 그런 것이고 본성 자체가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뭔가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 귀신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라 출생하면서 귀신의 종, 악마의 종이 된 겁니다. 종이란 시킨대로 하고 주인의 의도에만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주인이 된 것을 당연시합니다.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덜 나쁘고’가 아닙니다. 현 인간세계에서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마태복음 12:43-45에서 이 사실을 우리 주님은 밝히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즉 제멋대로 들락달락 거리는 존재가 따로 있습니다.

이점을 알지 못하는 인간세계는 그저 인간들 끼리 지혜를 모으고 의견을 모으면 사태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아 중심으로 버티게 하는 배후에는 악마의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그 약속에 인간들이 눈 돌아가지 않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배후의 악마의 부추김을 받고서 늘 타인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요청하고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 귀신들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인간들은 자아를 견고하게 가져가기 위한 신을 향하여 권한 달라고 합니다. 보다 자랑스럽게 훌륭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고 흠없는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율적 권한을 달라고 합니다.

담배 피울 수 있는 권한, 술 마실 수 있는 권한, 밥 먹을 수 있는 권한, 생존하고 생계유지 할 수 있는 권한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알던 나를 나로서 규정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귀신의 특징은 요구하는데 반면에 성령님의 특징은 거저 주시는데 있습니다.

이는 자아의 자율권을 뺏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타자화’입니다. 나를 남으로 여기게 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약속의 땅을 앞두고 갈렙과 여호수아가 보여준 태도가 이런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들은 종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에 대해서 타인처럼 임합니다. 자신이 자기를 관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앞일이 본인으로서는 전혀 예상 못할 일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소멸되어야 될 대상자일 뿐입니다. 내가 나에게 타인이 되는 조건을 만족되면서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신들은 ‘아무나’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요.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님의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원래 초청할 자들이 자아의 일을 핑계로 임금님의 잔치에 참석치 않고 임금님은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하십니다.(마 22:10) 이들은 결코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아무나’일 뿐임을 유지해야 합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임금님이 주신 예복만 중요할 뿐입니다.(마 22:12-13) 이처럼 인간은 외부에서 불러주심과 찾아주심이 중요합니다. 이는 곧 자아의 무용지물을 뜻합니다. 더는 자아를 지킬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에 와서 귀신은 재물을 매개로 하여 인간들의 자아지킴에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의 반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돈입니다. 재물입니다. 소유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 인간세상은 돈이 통치하고 돈이 의미를 주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은 가격으로 매겨집니다. 심지어 귀신마저 상품과 되어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집니다. 귀신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노리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종 종교사업이나 영화사업에도 귀신퇴치를 주제로 하여 영업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철이 들었다’는 말은 ‘돈 귀한 줄’아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현대 국가 자본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자본이 흘러 넘치는 곳에는 전 세계의 모든 인력들이나 노동자들이 몰려듭니다. 국가와 민족도 자본의 위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 세계 장터에서 상품화됩니다. (계 18:10-13) 이렇게 해서 귀신은 보편화됩니다. 이것이 인간들에게 ‘평범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나간 사람의 특징은 뭔가요? 그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벌어지든지 간에 전혀 예상 못한다는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즉 “제가 언제 주님께서 목마을 때에 마시게 하였고 언제 주님에게 배고파했을 때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라고 반문입니다. (마 25:35-40)

즉 자신이 알던 자기를 예수님편으로 조망하는 눈을 갖게 된 겁니다. 이는 그동안 자신이 귀신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자체를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돈에서 안식으로 이어집니다. 그 중간에 창조가 있습니다. 이 창조는 주님만 하시기에 주님만 홀로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란 1일부터 6일까지의 요일이 지난 그 다음날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바면에 귀신에 매여 사는 인간들은 자아의 가치를 뽐내기 위해 시간성이 주어집니다. 언제 태어났으며 언제 결혼했으며 과거는 이렇게 살았고 앞으로 미래는 이렇게 원없이 살계다는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단선적 시간의식입니다. 이 시간의식에서는 “다 이루었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저 미흡하고 아쉽고 또 갈급함으로 인해 채워야 할 겁니다. 이런 귀신에 붙잡힌 삶과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성과 사이에는 성도는 늘 가벼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의 일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귀신에 의해서 자기 밖에 몰랐던 자기 종교인임을 늘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디모데전서 4장 1-2절(귀신의 가르침)22102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4장 1-2절입니다.

디모데전서 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사도바울이 귀신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가, 인간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에 귀신 요소를 빠트리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 인간들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 귀신의 전략이라는 거지요. 이 땅에서는 귀신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데 인간들은 귀신은 없고 인간들만 같이 산다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렇게 인간들을 부추겼던 겁니다.

그러면, 귀신이 빠져버리면, 귀신 생각하지 아니하게 되면 그 종교라는 것, 국가라는 것도 순전히 인간들의 지혜와 아이디어에서만 나오게 되어있지요. 인간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끼리만 같이 살자.’ 그런 의도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의도가 있다는 자체가 배후에 있는 알 수 없는 영이 뒤에서 부추긴 겁니다. ‘그냥 인간들만 살면 돼.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거 몰라도 돼. 그냥 잘 살면 되는 거야. 아마 하나님이 잘 살도록 복 주실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모든 학교 교육이나 사회교육에서 그게 형식으로 통하고 말았어요.

뭐가 빠졌는가? 귀신이 빠져버린 거예요. 귀신이 빠져버리면 뭐가 빠지느냐? 귀신이 누구의 하수인입니다, 종입니다. 누구의 종이냐 하면, 악마의 종이에요. 인간세계에서는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령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령하고 귀신하고 달라요. 귀신은 악마 쪽에 속합니다. 악마가 부리는 자기 부하들이에요.

악마가 인간을 지배했기 때문에 귀신들에게도 어떤 권한 같은 것이 있는데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43-45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일곱 귀신을 가지고 주께서 설명을 하실 때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귀신들린 사람 따로 있다.’가 아니라 이 악한 세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현세대, 현세대 전부가 다 귀신의 세계라는 겁니다. 귀신 천지라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만 모르고 있어요. 주님은 알고 있는데 인간들만 모르고 있어요.

원룸에 혼자 살 때 인간은 자기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지요. 자기만 아는 비밀번호 가지고 스마트 키 딱 장착하면 그 안에는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비밀번호 삐삐삐삐삐~, 비밀번호 몰라도 그냥 그냥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같이 산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에 대해서 앞에 형용사를 붙여요. 뭐라고 형용사를 붙이느냐 하면, 바로 ‘더러운 귀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3절에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귀신 앞에 더럽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안목이고 우리 인간들에게는 귀신은 전혀 더럽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살고 있어요. 더럽다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 생각이고 우리는 날마다 귀신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귀신과 더불어 살지요. 인간의 모든 마음은 귀신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에서는 ‘세상 신이 장악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서 2장 1, 2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요, 로마서 6장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17절에,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죄의 종이다.

죄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악마의 종이었더니, 또는 귀신의 종이었다. 여권 사진 찍잖아요. 한 만5천 원에서 2만 원 주면 사진 열댓 장 줍니다. 귀신의 종 얼굴이 거기 다 나온 거예요. 우리 여권에 사진 붙이고 일본이나 괌에 놀러 가지요. 그 사진의 모습이 귀신의 종의 모습을 찍은 거예요. 왜? 우리가 본래 본디, 본디 죄의 종이었더니. 본래 죄의 종이었더니.

뭐 나쁜 짓 해서 갑자기 악마 들린 게 아니고, 일곱 귀신 갑자기 들어온 것이 아니고 처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난 장소가 이 세대에서 태어났으면 이 세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우리는 귀신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팔자로써 살 수밖에 없어요. 당연한 겁니다. 우리 인간만 모르지요. 주님은 알고 마귀도 알고 있는데 인간만 모르고 있다고요.

그래놓고 교회 간다고, 귀신의 종들이 교회에 모여서 교회 자체가 귀신의 종들의 집합체에요. 거기 가서 뭐합니까? 거기서 자꾸 달라는 겁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이 나오고, 그리고 귀신이 나옵니다. 성령과 귀신의 차이점이 뭐냐? 귀신의 특징은 자꾸 어떤 요구를 한다는 데 있어요. 자꾸 요구를 해요.

왜 요구를 하느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요구를 할 권한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귀신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든지 뭘 할 때에 자꾸 어떤 권한을 요구해요. 성령은 요구하면 들어주는 게 아니고 성령을 그냥 줘요. 성령은 그냥 주시는데 귀신은 우리를 앞장 세워 가지고 달래야 준다는 거예요. 빌어야 준다는 겁니다. 간절히 애써야 얻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행함으로.

우리가 담배 피울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은 술 먹을 권한 없어요. 인간은 밥 먹을 권한 없습니다. 인간은 생존할 권한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권한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의 내 모습으로 나는 더 살아 있어야 된다는 그 주장을 우기기 때문에 권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살아 있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은 배후에 있는 악마가 자꾸 ‘너는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부추기고 있으니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그냥 이유도 모르고 내력도 모르고 그냥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이익이다, 그런 본성으로 평생 가는 거예요, 평생을.

6살 먹은 애뿐만이 아니고, 16세 애도 마찬가지고, 26, 36, 46, 56, 66, 76, 86, 팔십 여섯까지는 안가겠다만 하여간 인간이 아무리 86, 96이 되어도 맨 그 인간, 사는 게 남는 것이라는 그 의식에서 인간은 한치도 벗어난 적 없습니다. 왜? 세월이 가 봤자 귀신 아래서 지나간 세월이거든요.

제가 평소에 안 하는 행동을, 강의시간도 아니지만 이 설교시간에 그림 하나 보여드리겠어요. 이 그림(유튜브 오전 설교 23분), 제가 주일학교 설교하는데요, 이 나이에도 주일학교 설교 계속해요,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제일 좋은 그림이 있어서 잊을 수가 없어요. 이게 카메라에 보이도록 얼굴 앞에 들어야 돼요.

이 그림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갈 때에 바다의 높이가 사람들 키보다 크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크지요. 이게 뭐냐 하면, 홍해를 건너갈 때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벽이 되었어요. 벽이 되었는데 깊은 바다를 사람들이 통과하고 있어요.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처지입니다,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 속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집어넣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온통, 옴팍, 이 벽들이 뭐냐? 바다에요. 죽음입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양쪽 벽부터 해서 앞뒤 전체가 귀신입니다. 우리는 귀신 나라를 통과하고 있어요. 죄의 종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짓 전부 다 귀신 짓입니다.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환경, 인간은 자기가 뭘 원하든지 그것은 주변에 있는 환경이 압박을 하는 거예요. 환경이 주는 중압감 대단합니다. 성경에서 귀신 나올 때 여러분이 이런 것을 궁금해 해야돼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귀신 잘도 쫓아내고, 왜 그리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는지.

그런데 요즘은 귀신들린 사람이 없는 이유가 뭐지요? 귀신 다 어디 갔어요? 과학이 무서워서 도망갔습니까? 귀신 믿으면 미신이라는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자기가 참고 있는 거예요? 그 귀신들 다 어디 갔습니까? 귀신이 어디 간 게 아니고 귀신의 세계가 더욱더 노골화되어 있고, 전체화 되어 있고, 이게 보편화 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악의 평범성, 귀신의 평범성. 이 세상에 악이 어딘가 자리를 잡고 있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악이, 악 속에 악이 덮고 있어요. 그래서 다 악인데 우리는 다 악이 아니고 그중 나름대로 뭔가 악과 선을 나누려고 하는 선악체계의 지식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유리한 것은 선이고 불리한 것은 악이라고 자기가 어설프게 구분 짓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는 옴팍 악으로 다 덮여 있기에 악이라는 것이 의외로 평범하고요, 의외로 전부 퍼져 있어요. 보편화로 전부 다 퍼져 있는 겁니다.

나쁜 짓 하는 사람이 뭐 눈길 막 사납고 그렇지 않아요.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그냥 보통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보통귀신이에요. 좀 심한 귀신이 있고 덜 심한 귀신이 있지만 덜 심한 귀신은 잠재력이 있어가지고 언제든지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곧장 귀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세상은 전부 다 말씀으로 되어 있다고 되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주께서 일하시는데 귀신이 버티고 버티는 것은, 인간을 앞장세워서 버티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약속에 눈 돌리지 않게, 약속에 관심 없게,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 없게 만들어요. 이스라엘 에게만 준 약속에 관심 두지 않도록 다른 데로 눈 돌려버리게 하는 거예요. 요새 말로 하면 복음에 관심 없고 그냥 자기 밥 먹고 사는데 관심두게 만드는 것이 오늘도 귀신작전의 회의주제가 그겁니다.

“어쨌든 간에 복음 못 듣게 해라.” “알겠습니다. 예, 대장님!” 주님께서 이 귀신에 대한 언급을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다 이루었던 일……,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일이 다 마감이 될 때 성령이 와요. 뭐 미진하게 아직 남아 있고, 몇 가지는 덜했고, 이런 게 없어요. 온전히 예수님이 홀로 모든 일을 다 완성을 했기 때문에 완성했다는 그 증거로써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뭐냐?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우리가 추가해서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도, 헌금, 전도, 예배, 어떤 것도 더 추가할 필요가 없어요. 착한 일, 이런 걸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이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나는 뭐가 되는가?

나는 바로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게 되면 죄의 종에서부터 자유함을 얻는 자립자가 되는 게 아니고! ‘아니고’가 중요해요, 아니고, 의의 종이 되는 거예요, 의의 종. 전에는 죄의 종이었더니 지금은 의의 종이 된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것은, 그것은 악마의 아이디어기 때문에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미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만 챙기면 이익이라는 이런 입장, 악마가 그런 식으로 또 귀신을 보내서 우리에게 작동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주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타자화, 타자, 남, 내가 나를 볼 때 남으로 여기게 만들어줘야 우리가 더는 내가 나에게 주인공행세를 안 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남이에요. 내 일생이 남의 일생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돼요.

내가 타인이 되는 조건 하에, 나마저 나에게 타인이 되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소멸됩니다. 이것을 구약의 갈렙과 여호수아가 잘 보여주고 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약속의 땅에 가면서 그 두 사람은 알았어요. 이 이스라엘이 우리의 나라가 아니고 주님의 나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가 가는 곳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어요. ‘앞에 강대한 나라가 있든, 어떤 대단한 멋있는 나라가 있든 우리가 뚫고 갈 어떤 책임이나 그런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이었습니다.

내 나라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들어가려고 소망한 나라도 아니에요. 그냥 주님만 알고 있는 나라에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그냥 그 나라에 그냥 합류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굳이 그 나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어요. 아니 우리가 나에 대해서 굳이 알 필요가 없어요.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남이에요. 남이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 한 것도 잊어버리세요. 나쁜 일 한 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왜? 나는 나에게 남이니까.

이게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평생 귀신한테 매달려서 농락당합니다. 목사라는 귀신한테 농락당해요. 이거 해라, 뭐 해라, 뭐 해라, 그래야 가정이 복 받고 구원받는다, 이게 전부 다 사기입니다. 내 배후에 악마가 자꾸 잘해라, 잘해라, 너는 고결하다, 너는 완벽해야 돼, 너는 훌륭해야 돼, 너는 남에게 자랑질하는 인간이 되어야 돼, 자꾸 악마가 나한테 시키니까 그런 마귀가 달라붙는 거예요. 보이스피싱들이 달라붙는 거예요. 돈만 빼먹는.

여기 노래가 있는데 가사를 불러드릴게요. 이 노래 가사가 뭐가 문제점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이거 유명한 가스펠 송이에요. 찬송가에 있나 보니까 찬송가에는 없어요.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 저 동산에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이나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주시리

이 노래, 은혜스럽게 눈물 쫙쫙 뽑아내면서 불러야 될 이 노래, 이게 왜 문제 있는가? 정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노래가 자기 부정이 안 돼요. 고생 되게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동정, 막연하게 미지의 세계에 희망 갖는 것, 현실 도피적입니다.

이것은, 현실 도피적인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어떤 현실도피라는 것도 성경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세대, 죄의 종이 된, 귀신의 종이 된 이 세대가 끝나고 난 뒤에 주의 나라가 오는 게 아니고 이 세대에 이게 덮치는 것으로, 그냥 덮치듯이 이미 오는 세대가 함께 중첩되어 있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귀신의 세계는요, 맨날 권한 요구하고 뭘 달라고 하는 것은 그게 귀신이 만든 시간성이 있어서 그래요. ‘오늘은 고생이지만 내일은 잘 될 거야. 이 세상에서는 고생하지만 천국 가서는 편히 쉴 거야.’ 자꾸 시간성이 남아 있습니다. ‘내 노력 여하에 따라서, 내가 얼마나 합당하게 바르게 사느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나 신앙 좋으냐에 따라서 나의 미래는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가 결정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귀신들이 종교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기독교라는 것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이미 다 이룬 거예요. 이미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겁니다.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살아생전에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 이게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씨 좋고 양심 착해서 교회 나온 사람은 때려 죽어도 구원을 못 받지요. 아직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

사람은 이 땅의 귀신의 앞잡이가 되어서 특징이 뭐냐? 살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 주님은 뭐냐? 죽고자 하라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14:27) 죽고자 하라는 거예요. 내가 죽으니까 나 따라 죽으라, 하는 것이고 우리 인간의 본성은, 일곱 귀신 들린 본성은 살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이게 안 맞는 거예요. 나를 살려주시는 주 예수를 찾고 있어요. 믿고 있습니다. 나를 살려주는 주 예수, 나를 살려주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우리를 타자화시켜요. “너는 너에서 손 떼라. 너에 신경 쓰지 마. 너는 소실되어야 되고, 소멸되어야 될 그냥 흙이야. 너 그거 몰랐어? 너는 ‘아무나’의 너는 그 자체가 가치 없어.” 그냥 ‘아무나’에 해당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혼인 잔치에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초청했더니만 다 거부했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2장 9절에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아무나’ 데려오라는 거예요. 그게 ‘아무나’에요. “아무나 데려와! 너 자신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 두지 마.”

주님께서 우리를 무가치하게 하니까 악마가 바리새인을 앞장세우는데 바리새인은 저희 아비가 악마입니다. 악마의 자식이에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을 앞장세워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했습니다. 가룟유다도 마찬가지고요.

‘와~, 진짜 그렇게 살면 나 죽고 싶다, 정말.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너무너무 허무하고, 허무해도 너무 허무한 게 내가 평생에 날 위해서 살았는데 그 자체가 복음 듣고 일거에 허무해지니까 이 허무를 감당을 못해서 차라리 나는 죽고 싶다.’ 이게 가룟유다거든요. 죽고 싶다. ‘죽고 싶다’에서 더 나가는 게 ‘죽이고 싶다’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귀신이 본성이었어요. 악마의 본성은 적그리스도 적입니다.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고 이 본성으로 전 세계 모든 인류가 똘똘 뭉쳐서 하나로 단합되어 있어요. ‘예수를 죽이자. 예수를 죽이고 가짜 예수를 교회에 유포시키자.’ 그게 악마의 전략입니다. 왜, 왜 가짜 예수냐? 살 수 있는, 여러분에게 희망 주는 예수를, 사랑의 예수를 전파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 고민, 상담, 교회 와서 해결 받습니다. 여러분에게 희망 있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납니다.” 그 이야기, 긍정적인 것, 적극적 사고방식을 유포할 수 있어야 교회가 영업이 돼요. 장사가 돼요, 장사가!

절에 가서 비는 것과 교회 와서 비는 것이 똑같이 되어버린 거예요. 차이점을 못 느낀다니까요. 자기 부정성이 없어요, 자기 부정성이. 현대는 귀신이 없다고 합니다. 과학시대에 귀신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귀신이, 이제는 초월적으로 모든 인간이, 귀신이 노골적으로 마지막 때가 되어서 다 퍼졌어요.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귀신의 모습은 다른 모습으로 형상이 바뀌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주님의 말씀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주님께서는 주님의 취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님과 라이벌 되는 쪽을, 반대편에 있는 쪽을 끄집어내지요.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긴 적도 없고 이미 한 주인을 섬기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말, 그런 구라치지 말라는 거예요. 뭐냐 하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라이벌로 뭘 맞은편에 내세웠느냐? 돈을, 재물을 맞은편에 내세운 거예요.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여호와, 여호와, 입에 발린 소리에 대해서 주께서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예수, 예수, 하면서 예수 믿습니다, 하는 말에 주께서는 절대로 그 구라에, 그 위선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맞은편에 뭘 내세우는가? 돈을 내세우는 겁니다. 현대말로 하면 자본을 내세우는 거예요, 자본을.

1789년에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났는데 1793년에 단두대에서 왕의 목을 치고 그다음부터는 총재정부로 바뀝니다. 왕을 치게 된 그런 사태,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 했지요. 어떻게, 인조나 선조같은 왕을 어떻게 칩니까? 사대부들이 왕을 이용하지 왕을 치지는 않아요. 왕이 있어 줘야 자기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왕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하나의 일자, 다수성에서 뽑아낸 최고의 자리인데 국민들, 그때는 국민들이 아니고 백성들이지요, 그 백성들이 왕을 쳤어요. 이유가 뭐냐? 자본의 증가 때문에 그래요. 자본의 증가, 과학의 발달로 중산층이 생겨나서 국가 자체가, 국가라는 것, 정치, 국가 자체가 경제, 자본의 힘에 무너진 겁니다.

이 시대는 나라가 2백 개가 넘어도요, 이 시대에 못사는 사람들 전부가 여권 가지고 잘 사는 나라에 취직하려고 몰려가고 이동하는 노동자의 이동시대에요. 인터넷에서 어디에 일자리 있는가, 그것 찾는 시대에요. 국가와 민족보다 돈 이 우선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최고고 나는 돈보다 하나님이고, 돈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사람들, 그러나 나중에 교회 문제 생기고 뒤돌아보게 되면 비로소 생각나는 게 뭐냐? 교회에 십일조 낸 돈이 아까운 거예요. 인간이 철들었다는 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들었다는 말이 뭐냐 하면, 돈 귀한 줄 알 때 철든 거예요.

하나님 안다고 철드는 게 아닙니다. 돈이 늘 나와 늘 함께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이게 철드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사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을 테니 속으로 한번 답변해 보세요. 경제적 토대가 몰락하는 게 무섭습니까, 귀신이 무섭습니까? 진실 게임 한번 해볼까요? 거짓말탐지기 놓고 진짜 해볼까요?

돈 버는 가장이 아픈 것이 무섭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워요? 평생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돈 버는 가장이 아파보세요. 여러 가지 버전으로 할 수 있어요. 연금 깎이는 게 무섭습니까, 하나님이 무섭습니까? 여러 가지 버전으로 바뀔 수가 있어요. 지금의 이 시대에 귀신은 뭐냐? 요새 귀신 얼마 하나? 귀신이 가격화 된 거예요. 귀신, 포켓몬에다, 귀신 카페, 귀신 영화, 전부 다 귀신이 돈 되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부산 영화제에서 “PLAN 75”라는 영화가 있어요. 플랜 75. 일본영화 같은데 그 영화의 주제가 뭐냐? 나라에서 강제로 75세가 되면 강제로 안락사시키는 법을 제정했답니다. 영화입니다. 너무 기뻐하지 마세요. 영화니까요. 75세가 되면 무조건 다 죽이는 거예요. 죽일 때 나라에서 해주는 게 뭐냐 하면, 마지막 여행을 보내 주고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장례비용을 지급해요.

그것 제공하고 75세 되는 생일에 다 죽여버리는 영화. 생각하면 75세 이상 되는 사람은 끔찍하죠. ‘아이고, 내 모가지…….’ 끔찍하겠지만, 영화라서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영화라서 다행이 아니고 영화라서 슬픈 게 아니겠어요? 별 할 일도 없으면 살기는 왜 사는지. 뭐 살아도 할 일이 있습니까?

왜 <플랜 75> 그 영화가 우리에게 혐오스럽고, 끔찍하고, ‘그런 나라가 되면 안 될 텐데, 안 될 텐데, 공식적으로 안락사가 법적으로 정당화되면 안 될 텐데, 몰래 자식이 자는 잠에 주사 놔서 안락사시켜놓고 처벌받지도 않는 그런 시대가 오면 안 될 텐데……’ 하고 걱정하는 것,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 속에 일곱 귀신이 있어서 우리 자아를 시간성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시간성.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를, 너 자신을 남으로 여기고 네 인생에 대해서 관여하지 말라고 하실 때에 방법이 뭐냐?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 의식을 집어넣은 거예요. 시간 의식을 집어넣어가지고 항상 과거에 대한 미련과 그 과거의 미련을 미래에 대한 보상으로, 인생을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도록, 그래서 자기에게만 충성 봉사하도록, 평생 시간을 다 허비하도록 귀신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멸치가 필요한 이유가 육수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는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을,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을, 그림 한번 다시 보여드릴게요, 시간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을, ‘지난날 괜찮았는데 미래가 밝아야 할 텐데’ 하고 자기 시간만 계산하는 인간을 거기서, 위에서 그냥 뽑아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46세가 되든, 56세가 되든, 96세가 되든 네가 신경 쓸 것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다 이루었으니까. ‘저 멀리 뵈는 시온성’ 찾지도 마세요. 그냥 그 시간성을 뽑아낼 때 거기에 대한 귀신의 강력한 반대가 있습니다. 그 강력한 반대가 뭐냐 하면, ‘네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년에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사냐?’ 시간성이지요. 계속 시간성 가지고 압박을 하는데요. 하~, 그 압박에서 자유로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실제로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실제입니까, 구라입니까? 안 그러면 조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마가복음 16장 9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달라 마리아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냐 하면, 일곱 귀신이 있던 존재예요. 일곱 귀신이 나간 상태가 어떤 상태냐? 이제는 자기 종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관심 두는 사람으로 전환될 때 성령이 와서 일곱 귀신이 나간 사람의 특징입니다.

분명히 성령 받았다고 우기고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데 여전히 관심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면 뭐 나간 게 있어야지 뭐가 나갔는데요? 뭐가 나갔어요, 본인에게서? 달라진 거 없잖아요. 똑같잖아요. 그냥 신앙이나 처발라 가지고, 성경 가지고 QT한다고 처발라 가지고 그것 가지고 자기를 구원합니까?

전체적인 성경 내용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혼돈에서 빠져나와서 안식으로 집어넣는 방식입니다. 이게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혼돈에서 시작합니다. 혼돈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혼돈이 우리 자리에요. 그리고 우리가 뭔가 그럴싸한 인간으로 된 것은, 이것은 주님의 창조의 요소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풍선이 동그란 것은 누가 바람을 집어넣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바람 빠지면 풍선은 풍선이 아니고 납작한 고무밴드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바람 넣었다가 빼고 하는 것은 우리 소관 아니고 주님 소관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겁니다. 내 인생 내가 걱정한다고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내가 시도한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우리는 항상 미완료지요. ‘어떡하나? 어떡하나? 안되면 어떡하나? 이러다가 망하겠지. 나는 늘 미흡해.’ 미흡함이 나에게 두려움이 되고요. ‘집안 이것저것 재산 끌어모아 보니 75억밖에 안 돼.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75억 돼도 미흡해요. 자식들 장가 시집 다 보내도 미흡해요. ‘딸 시집가는데 나중에 애 봐 달라고 하면 나 못 노는데.’ 또 미흡하지요.

항상 시간 속의 인간은 미흡함이고 결함 덩어리에요. 이것은 뭐냐? 그 자체가 내 안에서는 혼돈입니다. 혼돈은 뭐냐? 귀신 세계예요, 귀신의 세계. 도대체 종잡을 수 없어요. 날 괴롭혀요. 그러면 우리는 뭐하냐? 교회 달려갑니다. 교회 달려가서 마음 안정도 얻고, 정서적 안정과 함께 하나님의 귀한 복음도 듣고, 마음을 스스로 안정화 해 보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면서 철야기도 하고 커피 마셔가면서 노력합니다.

귀신은 귀신같아요. ‘네가 그런다고 해서 나에게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도망쳐봐야 도망칠 수가 없지요. ‘네가 교회에서 한 짓, 십일조 하면서 한 짓이 뭐냐? 너 잘되려고, 네 가정과 네 가족 잘되려고, 네 미래 보장받으려고 한 짓이잖아. 하늘나라 보험 들려고 한 짓이지? 그게 바로 내가 집어넣은 내 마음이야. 귀신의 마음이야. 그거 못 빠져나가. 철저하게 너는 평생토록 너의 종이야.’ 네가 나한테 남이 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한테 주인 노릇 하고 있는 이런 것, 종교가 해결 못 합니다. 목사가 해결시켜주지 않아요. 5대째 신앙, 3대째 신앙, 뭐 모태신앙, 소용없습니다.

이 자본의 시대에서 백날 노력해 봐야 결국 그것은 토대가 돈, 재물이지요. 제가 참고로 요한계시록에서 이 시대는 자본시장, 장터지요, 그냥 장터, 자본시장, 뭐 고상한 용어보다 그냥 이 세상 전체가 장터에요, 장터에서 인간은 상품화되어 있고 하나의 상품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 10-13절에서 어떤 상품들이 오고 가는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이제 그 상품의 리스트 항목이 나옵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사람의 영혼들이라! 사람의 영혼까지라도 상품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자신에게 가격이 외부에서 매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나 얼마짜리 신랑이냐, 얼마짜리 신부냐, 심지어 노인정에 가도 저 노인은 얼마짜리냐, 값나가는 할아버지는 할머니들한테 인기가 있지만 꾀죄죄한 할아버지는 할머니들한테 왕따 당합니다. 점심도, 요구르트도 안 줘요. 세상 자체가 자본의 장터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갔잖아요. 우리도 귀신이 있는데 우리가 귀신을 빼낼 수는 없습니다. 인간세계에서는 귀신을 생각지 않고 그냥 인간대로 산다고 우기기 때문에 문제해결책이 없지요. 그러면 방법은 뭐냐? 바로 위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상의 위기를 줘버려요. 위기를 주면 위기의 특징이 뭐냐? ‘예상 못 함’이에요. 우리가 예상 못 함. 우리가 철저하게 내 인생을 안전운전하기 위해서 온갖 안전장치들을 다 하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교회 가서 예수까지 다 믿었는데 그 예수 믿은 것, 하나님 믿은 게 다 소용없고 쓸데없게 만드는 어떤 위기, 하나님 믿는 척 하지만 실은 돈을 믿었는데 그 돈이 난데없는 사태에 의해서 날아가 버리는 그 위기, 그 위기가 찾아왔을 때 특징은 뭐냐?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나의 주인공이라고 우겼던, 고집스럽게 우기면서 평생을 지내왔던 이 모든 것, 그게 소용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내가 주인공이라 할 때 우리는 뭐였습니까? 나는 나에게 속하고 너는 너에게 속한다고 주장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는 나에게 도움 될 때만 내가 너에게 의미를 주마. 애정을 보여줄 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줄게. 사랑할만한 거리를 줄게. 그러나 네가 나의 나 됨에 흠집을 낸다든지 나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나는 너를 내치리라.’ 그런 마음 자세로 살아온 거예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애들이라도, 어린애도, 돌 안된 애들도 예외가 아니에요. 본능적입니다. ‘효심이 깊은 양심 없는 사람’ 어떻게 보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아니에요. 효심은 깊은데 양심은 없는 사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아버지 잘 섬기기 위해서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사는 사람, 그런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생깁니까?

따라서 어떤 위기, 내가 내 손으로 어쩔 수 없는 위기상황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은 충동이 본능이 솟구쳐 올라오면서 내가 귀신 덩어리였음을 발각시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 쫓아낼 때 하신 일이었습니다. 너는 그동안 너를 몰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이 안 들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현장에서 주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동네에서 나가주세요.”라고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성령이 와서 일곱 귀신이 나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나의 위기관리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위기관리조차 내가 안 돼요. 위기관리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위기가 온 게 아니에요. 여전히 나로 되돌아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그림 또 볼까요? 이 그림 다시, 오늘 잘 써먹는다.

이 바다와 파도 속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제가 안 했는데요?”(마 25:35-40)라는 말을 해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네가 오늘 나를 위해서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구나.” “제가 안 했는데요?” “네가,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 “제가 안 했는데요?” “내가, 이 예수님이 옥에 갇혔을 때 네가 돌아봤잖아.” “제가 언제 했습니까?” 이게 바로 귀신 나간 사람의 특징이에요.

본의 아니게 주님의 일에 협조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주께서 창조한 사람입니다. 혼돈에서 창조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혼돈에서 창조하고 창세기 2장에 보면 안식일 지키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1,2,3,4,5,6,7, 또 1,2,3,4,5,6,7, 을 그 순환되는 시간, 주님의 시간을 우리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 시간은 뭐냐? “생일축하 합니다~” 언제 내가 태어났고, 언제 돌 지났고, 언제 초등학교 졸업했고, 중학교도 졸업했고, 언제 결혼했고, 앞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연금 타면서 몇 년 뒤에는 요양병원에 들어가고, 치매 걸려서 죽을지, 우리는 단회적이고 단선적이에요. 단선적인 시간 속에 지나온 것은 자랑스럽고, 앞에 남은 것은 대비하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독감 오면 독감 예방주사 맞으면 되고, 대상포진 예방주사도 맞으면 좋고, 전부 다 이게 예비하고 보험 들어놓으면,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 중심의, 노골적으로 해서 귀신 중심의, 더 해서 악마 중심의 나 잘났다는 것을 평생에 그것만, 내 안에 내가 신이 되어서 그것만 경배하는 나는 나의 신자, 내 종교의 신자, 나는 ‘할렐루야’ 나만 섬기는, 나를 신으로 모시는 그런 신자, 나만의 특수한 종교, 종교광신도, 나에게 매료된 광신도,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 뿐이에요.

그런 인간이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이런 나밖에 모르는 외골수, 고집쟁이, 이기주의, 이런 내가 “언제 주의 일에 협조했습니까?”라고 반문한다는 것은 주께서 나를 나에게서 떠나서 주님 편에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주님 편에서 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싸움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4-26절에 보면 바리새인이 예수님보고 욕을 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언제 갈등과 분쟁이 없어지느냐 하면, “제가 주를 위해서 언제 했습니까?”라고 내가 주님 입장에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길 때 ‘아하, 주님께서는 나를 나에게서 끄집어 내놓고 그다음부터 전에 내가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주께서 함부로, 임의로 주님 맘대로 부리는 것, 그것을 옛날에는 내 인생이라고 그렇게 묘사했구나.’ 평생의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 주인이 바뀌고 보니까 이것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활용하시고 이용하신 셈이었어요.

그렇게 되려면 어떤 위기가 와야 되는데 그 위기가 뭐냐? 위기라 하니까 또 뭐 찡그리고, 아프고, 다 망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는데 위기라는 것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님 나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위기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고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 에서부터 끊어진 상태, 거기서부터 벗어난 상태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상태의 역할은 우리 주님이 하셔요.

그것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28, 29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뭐만 있으면 되느냐 하면, “주께서 이렇게 나를 건졌습니다.” 그것만 알게 돼요. 건졌습니다, 를 알려면 내가 내 주인이던 그 시절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되지요. 지금도 우리 매일의 삶이 내가 내 주인이 되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앞일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가득하지요. 매사 복음 듣고 예배 시간 마치고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시작이에요. ‘집에 가스 불 끄고 왔나? 그냥 나왔나? 아, 모르겠다.’ 이런 거요. 늘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이 내가 관리할 일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그런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예상 밖의 일이 돼요. ‘가을 되면 단풍들겠지.’ 아닙니다. 우리는 단풍 볼 권한 없어요. 그러나 주께서는 단풍 들게 해서, 빨갛게 물들여서 여기서 저기까지 2.5킬로 터널 앞까지, 팔공산까지 갈 것도 없어요, 차 밀리는데, 가다가 샛길로 돌아보면 진짜 단풍길이 예뻐요. 제가 매일 아침마다 봅니다.

왜 단풍이 예쁘냐? ‘은혜인 줄 알아라. 이것아!’ 모든 것이 내가 원한 게 아니라 그냥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그냥 감사할 뿐이에요.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하는데 그 내용이 뭐냐 보니까, 3절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이런 거예요.

왜 그런 짓 합니까? 결혼하지 말고 섬겨야 되고, 이것은 나쁜 음식이니 먹으면 안 되고, 이것은 먹어도 되고. 왜 그런 짓 합니까? 그런 짓 하는 의도가 뭐냐? 아직도 본인의 미래를 본인이 장악해서 관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김 씨 같으면 김 귀신, 최 씨 같으면 최 귀신이에요. 박 씨 같으면 박 귀신, 권 씨 같으면 권 귀신. 그냥, 그냥 귀신이에요, 귀신.

내가 나에게 남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내 주인이 되어 가지고 나는 저 사람보다 행복하냐, 지금은 불행했지만 앞으로 더 행복해질 것인가, 저 사람 얼마나 잘 사는가, 나는 수입 얼마인데 저 사람 수입 얼마지, 저 가정은 자식이 저렇게 잘 자라는데 우리 자식은 내 말도 안 듣고 왜 저렇게 사는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파, 인생이…….

또 처량하게 “여자의 일생” 노래 한 번 부르고, 참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하고 세상 전체가 귀신의 세계에요. 귀신이 멀리간 게 아닙니다. 과학이 무서워서 귀신이 도망친 게 아니에요. 귀신은 돈줄을 쥐고 있습니다. 돈줄 내려왔어요, 돈 줄. 모든 것이 귀신이 자본의 돈 줄, 돈 없이는 못사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까, 나는 하나님보다 돈을 택하고 하나님은 돈 뒤에다 밀어내 버리는 거예요.

교회 나올 때는 몰랐지요. 사태 터지니까 하나님보다 돈이 우선이라는 것을, 본인이 본인을 감추지 못하고 본성이 탁 튀어나올 때, 앞으로도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할 때 그걸 뭐로 생각하느냐? ‘이게 주의 일에 협조하는 거구나. 내가 왜 옛날에는 죄의 종이었고 지금은 왜 내가 의의 종인가? 도대체 주께서 저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를 새롭게 새롭게 드러내는 그러한 순간순간들이 지금 이 시간부터가 아니라 옛날부터 죽 있어 왔는데, 다시 한번 그것을 매시간 확인하는 거예요.

네 시간은 없고 그저 다 이루었다는 것, 이 바닷물 속을 통과하는, 당당하게 여러분, 당당하게 꿀리지 말고, 과거에 매이지 마시고, 미래 염려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주께서 뚫어놓은 이 ‘다 이루었다’ 한 그것을 바다 갈라진 양쪽, 그 세상 귀신들, 손으로 만져도 괜찮아요, 그런 것을 체험해도 괜찮아요, 앞으로 또 체험할 거고, 오늘 오후부터 체험할 거예요, 체험해도 괜찮아요, 갈라진 그 귀신 세계를 그냥 유일한 길로써, 십자가의 길로써 통과하는 그런 즐거움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습니다. 귀신 빼고 해석했습니다. 남들같이 살면 대충 사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주님이 다 이루심과, 네 인생 네가 책임지라는 두 소리가 충돌하고 다투고 있는 현장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다 이루어졌기에 또다시 세상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내 죄에 대해서 깊숙이 알아야 될 그러한 일터가 생겼다는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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