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단면
2022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4:3-4
(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혼인도 하지 말고 음식을 가려서 먹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사도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는 곧 정확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주신 복음을 의도적으로 마귀가 훼방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는 복음을 막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권장합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순순히 말려들어 순응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인간들은 자기만을 남겨서 사랑합니다. 자기 사랑 너머에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에 관해서만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신앙인’이라는 신입니다.
이 신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의 아니게 계속 자신을 감추고 숨기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에게는 눈이 있습니다. 그 눈을 사물을 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그 얻어진 지혜와 지식으로 자기를 관리하고 키워나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런 나를 주시하는 시선을 놓치고 맙니다.
인간들은 자기 눈에 나간 시선 말고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부담을 느낍니다. 그리고 수치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 시선을 죽여서라고 치워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 주님이 잘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청소요 소제하시는 일입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처리하시는 겁니다. 살아 있음을 죽어있음을 만들어버리십니다.
실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칭칭 감겨있습니다. 굳이 죽지 않더라도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자기를 기켜려고 할 게 아니라 ‘지킭 나’가 없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성도가 된 자는 ‘내가 이것을 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이런 분임’을 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내가 행할 게 있는 책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 뿐입니다.(요 5:39)
인생사가 고민되고 걱정되는 것은 여전히 본인이 자기 인생을 건전하게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민을 일거에 없애는 일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문제를 출제하여 이브라함에게 치르게 하십니다. 이 시험치는데 있어 이삭은 그냥 아버지 시험에 말려들어간 것 분입니다.
이 시험의 핵심은 아브라함 마음 속에 희생양이 들어오는 겁니다.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교체되면서 아브라함과 희생양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시는 구조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있습니다. 이 교체 작업은 인간이 고상하게 자기를 꾸미는 작업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으로 하여금 원없이 스스로를 순정품으로 만들고 어떤 식으로 순결하게 만드는지를 시도하게 만듭니다. 마치 김밥을 하면서 김밥말이 양 끝으로 삐져나온 부분을 칼로 에누리없이 도려내는 이유는 김밥 몸통을‘정결의 결정체’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품이라고 자부하는 그 김밥 몸통 자체가 내리치십니다.
그렇게 되면 김밥은 그 내부를 노출하게 됩니다. 치즈 얹고 상추 얹은 햄버거를 두 동강내면, 절단된 치즈, 절단된 상추, 절단된 고기 패티가 보이겠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언약 사람의 절단면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완성됩니다. 순결하다고 자부했던 그것이 곧 복음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그러나 정작 오신 분은 세례 요한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8에 보면, 세례요한은 목베여서 죽습니다.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예수님의 경유해야지만 성취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실 엘리야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그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릴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방식은 세례요한처럼 광야에 외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마저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죽어야 합니다. 창세기 15: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제물을 둘로 쪼개어 도열하듯이 마주보게 했을까요? 그것은 진정한 ‘희생양과 더불어’는 사람의 행함으로 달성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깊이 잠들 때를 기다려서 하나님께서 쪼깨진 제물을 다시 복합시키십니다. 어떻게요? 심판의 불로서 말입니다.“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처럼 언약사람이 등장하고, 그 언약사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탕으로 해서 인류의 역사는 움직입니다. 이를 위해 인간은 본인과 이별해야 합니다. 헤어져야 합니다. 이삭이 아버지 시험에 말려들어서 양으로 교체되어 구원되듯이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과 아버지의 일에 말려들어서 구원되는 겁니다.
진실이 성도에게 작용하게 되면 성도는 자신의 한계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눈으로 자기를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자기 연출을 시도하는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주님을 행한 헌신과 정성을 내보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보고 싶은 바는 자신의 절단면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할례이며 이 할례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게’합니다.
선지자+메시야=두 동강 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통과하듯이 오늘날 성도는 자기 내부가 쪼개져서 주님의 ‘다 이루심’이 통과하는 길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만만하게 봐서는 아니됩니다. 주님은 성도를, 예수님처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전도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상대가 복음에 묻기 전에 먼저 복음을 주려고 하지 마세요. 천하보다 귀한 것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늘 주님의 일에 말려들었기에 ‘바르게 살려고’하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모두가 이미 죽어있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래서 구원은 주님의 몫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디모데전서 4장 3-4절(절단면)22103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4장 3-4절입니다.
디모데전서 4:3-4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여기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피하라, 가려서 먹으라, 이런 것은 먹지 말고 이런 것은 먹으라, 하는 그것을 디모데전서 4장 오늘 본문의 앞에 1절에 보면 이것을 가지고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귀신의 가르침의 그 노림수가 뭐냐? 믿음에서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기 위해서 귀신이 인간들의 양심 속에 작용을 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 스스로 본인이 본인을 관리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 이게 마귀의 악마의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주의 사도기 때문에 대충 넘어가는 게 없어요. 아주 정확하게 합니다. 그것은 주의 일은 협상 대상이 안 돼요. 봐주는 것 없습니다. “네가 최선을 다하는구나. 봐줄 게.” 이런 것 없어요. 최선을 다해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그 귀신들린 사람들 특징은 뭐냐 하면, 굳이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해요.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건진다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구원이라는 것은 건진다는 이야기에요. 물에 빠졌을 때 파닥거리면 못 건져요. 그냥 물에 빠져 죽어야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건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뜻은 뭐냐? 굳이 네가 너, 지킬 네가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지킬 내가 있어 버리면 맨날 하는 이야기가 나는 이렇게 애썼다, 이렇게 노력했다, 그렇게 나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뭘 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이런 분이었다.’ 주님이 이런 분이었다, 를 이야기해야지 ‘내가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최선을 다 했습니다.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런 게 나오면 안 되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인간들이 결정할 수 없고 인간들의 본심은 그냥 귀신들린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군지를, 본인이 전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아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나는 나에 대해서 잘 몰라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지켜보시고 살펴보시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눈이 박혀 있지만 우리 주님한테는 시선이 나오지요. 여기서 제가 눈과 시선을 구분했는데 인간은 눈이 박혀 있다는 것은 자기가 뭘 본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복도에서 열쇠 구멍을 통해서 방안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이것은 눈이 하는 작용이에요.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가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눈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내가 남의 방을 엿보고 있는 것을 복도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나를 지켜볼 때 그것은 시선이 되는 거예요. 타인의 시선이지요. 우리가 한참 정신 팔려서 열쇠 구멍으로 뭘 보고 있는데 어, 보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나를 누가 지켜볼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수치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가 누구를 보는 것은 되지만 나를 지켜보는 자가 따로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인간은. 왜? 수치감을 느끼니까.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아담과 하와가 본인이 눈을 가졌으니까 본인이 부끄러움을 처리를 합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혔지요. 이것은 내 눈을 가진 자가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켜보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담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10절)라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아는 것, 내가 아는 것으로 나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냥 어떤 결과, 내게 주어진 어떤 시선의 결과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이 말은, 내가 나를 구원할 수도 없고 건져낼 수도 없다는 거예요.
이걸 좀 더 넓게 이야기하면 내가 교회 와서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단을 내려도 그게 전혀 나한테 구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뭔가 귀신들렸는지 내가 자꾸 내가 만들어 나가려고 해요. 성경에 성도가 있으니까 성도도 내가 만들려고 해요. 나를 재료로 해서, 내 노력을 집어넣어서 내가 성도로 거듭나려고 시도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신이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든 신이에요. 주님은 인간이 만든 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께서 남기는 것은 주님의 시선만 남기지요.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교회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남의 시선이 부끄러우니까 1년 중에 11월쯤 되어서 뭐하느냐 하면, 가면 만들어서 자기를 분장하는 거예요.
‘할로윈 데이’라는 것이 그 축제에요. 자기를 가려서 본인 자체를 가리려고 하는 축제가 할로윈 축제입니다. 인간은 뭐 새삼스럽게 자기를 꾸밀 필요 없어요. 이미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가리고 있어요. 인간은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뒤집어쓰고 살아요.
오늘 아침에 방송에 보니까 149명이라 했어요. 149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에요.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무슨 새삼스럽게 149가 숫자가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그게 죽은 자들이에요. 인간은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뭐 새삼스럽게 숫자를 왜 그렇게 헤아립니까? 미친 자, 나쁜 자, 이상한 자, 인간은 그것밖에 없는데 뭐 새삼스럽게 누가 죽고 부상을 몇 명 당하고…….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가운데 함께 있어요.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은 자가 되어야 비로소 심판이라는 게 돼요. 죽었는데, 내 힘으로 아무리 해도 주님의 심판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데 자, 주님은 무슨 수를 써서 이 심판에서 나를 건져낼까?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주께서 무슨 일을 벌이시는가? 이미 죽어버린, 이태원 가나 안 가나 이미 죽어버린, 집구석에서도 이미 죽었어요, 주님께서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 가려 먹으라’ 하는 이 이단들에 대해서 사도를 통해서 정확하게 끝까지 파헤칩니다. 아까 했지요. 대충 넘어가는 것이 없다고요. 정확하게 합니다.
그들은 위선자 정도가 아니에요. 탈락자입니다. 위선자는 고치면 되지 탈락자는 끝이지요. 이 탈락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일찌기 언급을 했고 사도바울도 언급을 하지만요. 마태복음 23장 13절에 위선자, 허위, 이런 자의 조상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조상까지라고 할 것도 없어요. 모든 시대에 다 있으니까.
마태복음 23장 13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자기를 꾸미는 자여, 자기 눈으로 자기를 꾸미는 자 그들의 최고의 수, 그들의 꾸밈의 최고 상한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들이 주도해서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 가본다고 치고요, 거기서 큰소리치는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그들 보고 뭐라고 하느냐? 외식하는 자, 기만하는 자, 자기를 감추는 자, 위선자.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성격이 못돼서가 아닙니다. 여기 보면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천국을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천국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데 이 땅에 필히, 여기에 방해자들이 출몰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천국 갔느냐 안 갔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그 방해 공작을 네가 뚫고 지나왔느냐 안 왔느냐를 판정하면 되지요. 방해 공작, 그 방해 공작이 뭐냐? 그것은 바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신앙인으로 만들려고 시도하고 건전하게 자기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바르게, 건전하게, 착하게 살려고 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자’는 것은 조폭들이 하는 구호지요. 본인이 누군지를 알아야 착하게 살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무작정 착하게 살면 그게 제대로 구원받은 자에요?
여기 마태복음 23장 15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아주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요. 옥수수로 하든지 뭘 하든지 하여튼 선교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보고 성경을 보면서 알아야 돼요. 전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도는 사람이 못해요. 전도는 순전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복음을 원하기 전에는 복음 전하지 마세요. 개, 돼지한테 복음 전할 필요 없어요. 이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전도의 짐이 다 풀어졌지요? 전도하지 마세요. 상대방이 원하기 전에, “너 뭐 믿고 사노?” 이렇게 묻기 전에는 하지 마세요. 그 귀한 것 왜 그렇게 낭비하십니까? 얼마나 귀한 복음인데요.
“함부로 너한테? 너는 들은 자격도 없어.” 왜 그런 소리를 못해요? 우리는 세상을 너무 대충 살기 때문에 함부로 전도하고 함부로 선교합니다. 혹시 선교하고 전도하면 교회에서 칭찬받을까 싶어서, 주위에서 칭찬받고 주님한테 칭찬받기 위해서 하는데 전도는 애초부터 주님의 소관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라고 요한복음 6장에서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뭔데 주님께 자기가 보냅니까? 뭐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기도가 먹힙니까? 중보기도 안 먹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시는데 먼저 인간이라 치고 돌파할 수 없는 장애물부터, 먼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표로 해서 우리 환경, 삶의 환경, 일상의 환경 자체가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취향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어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이 자신의 위선을 스스로 돌파할 수 없듯이 우리도 눈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보는 내가 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위선과 나의 허세를 내 힘으로 내가 돌파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일이 새삼스럽게 새롭게 낯설게 다가오지요. 내가 못하는데 주께서는 내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실까? 주님의 주특기 중의 하나가 청소하는 거예요. 소제하는 겁니다. 소제하는 것은 쓰레기 같은 것이 필요 없을 때 치우는 것을 소제라 해요. 분명히 여기 머리카락이 있었는데 청소하고 나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주특기가 뭐냐? 있는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참 쉽지요. 있는 나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주의 일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뭐 “천국 가고 싶습니다.” “없어져. 없어져!” “구원받고 싶습니다.” “저리 가! 없어져. 내가 치울 거야.” 우리는 헤어질 결심을 해야 돼요. 내가 나로부터 헤어질 결심을 해야 됩니다.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만만하니?” 우리는 이렇게 답해요. “제가 그렇게 나쁜가요?” 나쁘지요. 주님의 시선을 모르고 내 눈이 있으니까, 내 눈을 활용하고 사용해서 나로 하여금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받으려고, 천국 가려고 시도하니까 이것보다 더 나쁜 짓이 어디 있어요? 주님이 하는 일을 완전히 개무시하는데 이것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죽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열심히 주의 율법 가지고, 말씀 가지고 지키려고 실천에 옮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이 거기서 왜 나오느냐 그 말이지요.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기 열심에 방해된다고 예수님을 제거한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주님의 제거작업이 여기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헤어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게 일어난 일은 내 위신과 관련되어서 내가 떠안고 가야 될 인생의 일이거든요. 내가 껴안고 갈 일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기껏 하는 게 내가 죽어서 내가 사는 것을 시도해요. 안 중근 의사, 이 순신 장군, 사람이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서 내가 사는 방법을 사용해요. 이게 종교입니다. 종교의 끝이지요. 인간의 죄의 한도치, 인간의 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같이 죽어서 같이 사는 것을 말해요. 같이 죽어서.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효험이거든요.
제가 아까도 누구하고 이야기했지만, 오늘 교회 오는 날이다. 그래서 11시 예배에, 멀리서도 ‘교회 가야지’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댁의 따님이 어젯밤에 이태원 안 갔습니까?” 그 소리 듣고 교회 오는 것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가는 거지요. 내 문제는 내가 안고 가야 돼요. 끝까지. 예배고 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은 뒷전이에요. 내 딸이 중요해요.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러나 주께서 어떤 사태를 일으켜 버리면 아직도 내가 나와 헤어질 결심이 안 되었다는 사실을 그때마다 새록새록 우리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와서 내 인생 문제 해결하고 상담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오영은 박사에게 찾아가세요. 교회 와서 기도한다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어디서 풀리는가?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바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제사 문제를 통해서 인생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언질을 주시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이게 내가 너를 시험하는 것이다.” 자, 우리가 어떤 테스트, 시험을 친다는 것은, 말로 “내가 실력이 있습니다.” 혹은 “실력이 없습니다.” 말로 하는 것을 주께서는 귀담아듣지 않아요.
문제를 누가 내느냐? “주님이 출제한 문제를 네가 풀 수 있느냐를 통해서 네가 모르는 너의 전부를 일거에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그렇게 하자.” 문제 출제를 주님 쪽에서 하는데 그 출제가 뭐냐 하면, “네 사랑하는 아들 있지?” 미운 아들 말고요,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아들, 미운 자식은 말고 “사랑하는 아들을 가지고 네 손으로 내가 만든 제단에 네 손으로 죽일 수 있느냐?”
요게 출제된 문제입니다. 딱 한 문제 나왔어요. 딱 한 문제에요. 10문제 나오면 골치 아파요. 딱 한 문제만 맞히면 돼요.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자, 그 문제를 주님께서 왜 내셨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수도 있어요. 자기 아들을 사랑하지만 죽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내가 자식을 사랑해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은 미치지 못해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고 그다음에 내 자식이에요. 왜냐하면 내게 속한 아들이기 때문에. 남의 자식 아니거든요.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확장이 내 아들이거든요. 그다음에 나오는 게 내 손자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손자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그 뜻이 ‘내 아들 있으면 내가 너를 그냥 방치하지 않을게. 내가 달려갈 게. 네가 지구 끝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엄마가 달려갈 게.’ 이 말은 남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네가 있는 그것이 내 맘이 있는 그곳이야.’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내 사랑을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마지막 테스트, 시험을 “아들을 죽여라.” 하는 것으로 시킨 겁니다.
거기에 아들 이삭은 아버지 시험 치는데 말려들었어요. 쉽게 말해서 아버지 운전면허 시험 보는데 거기 바퀴에 아들이 말려들어서 깔린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것은 너무 참혹하다, 너무 심하다, 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시험받을 때 거기에 말려든 자가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거기에 말려든 자.
십자가에 말려든 자라고 표현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은 아들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요, 인간 속에 희생양이 들어오는 구조적 장치를 아브라함의 제사를 통해서 개시하려고, 시작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들을 죽이면 끝까지 아들을 죽여야 되는데 아들을 죽이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이삭이라는 아들과 그 수풀에 있던 양하고 바꿔 치기 하는 거예요.
바꿔치기해버리면 이 인간, 미치고, 더럽고, 나쁘고, 이상한 주님의 심판이 있는 인간 속에 난데없이 하나님의 준비된, 영원히 창세 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희생양이 이 자리에 내부로 들어오는 장치를 아브라함의 제사를 통해서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인생의 모든 상담할 것, 사소한 문제가 일거에 해결 다 되어버렸어요.
모든 인생 문제는 어디서 생겼는가? 내가 나를 못 놓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내가 나를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뭐냐, 자기를 부인하라 하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 내는 사람 보게 되면 그것은 단순한 위선자가 아니고 탈락자입니다.
“예수 믿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바르게 사는 겁니다.” 그런 소리 하는 것은 목사도 탈락자고 그걸 듣고 아멘, 하는 소리도 다 탈락자에요. 그러니까 그런 교회가 있어 줘야 돼요. 왜? 그런 교회나 우리나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 구원은 받아놨고, 잘 챙겼고 이제 남은 것은 이 땅에서 복 받는 것인데 복 받는 방법은 착하면 되지 뭐, 이러한 자연스러운 생각, 어느 누구인들 안 들겠습니까? ‘구원은 받아놨고요, 복음 들어놨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바르게 살면 내 가족 내 식구 복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 말이지요.
왜 성도에게도 그런 생각이 듭니까?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주께서 하신 일을 계속 확인시켜 나가는 거예요. 도대체 주께서 뭘 하셨는가? 네 안에 내가 준비한 양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전혀 몰랐던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근처 수풀에 양이 한 마리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낌새 주고 알리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것. 요 문장, 이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아는 게 전혀 없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회 와서 천당 가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내가 누군지도모르면서. 그리고 성경도 봅니다. 성경 백 독 천 독을 합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합니다. QT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인도 모르고 성경 내용도 모르면서요. 성경 내용은요, “옆에 양 있다!” 요 핵심이 성경 내용이에요. “네가 열심히 하고 실천에 옮겨라.”가 성경 내용이 아니고 새롭게 알려줘요. “성경 안에 주께서 준비한 희생양이 있다. 그 희생양이 튀어나올 거야.” 그게 성경 내용이에요, 그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장에 그 말씀 나오지요. 39절.
이것은 성경을 천 독해서 아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알려줘야 돼요. 성경 본다고 해서, 뭐 문자 봐서 뭐하는데요. 성경 봐야 신학박사 밖에 안 돼요. 그런데 신학박사가 탈락자지요, 뭐. 성경은 한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성경을 통해서 아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날 사랑하는 상태에서 나오는 예수님이에요.
“예수 사랑하심은~” 그 예수 있잖아요. 날 좋아한다는 그 예수, 그 예수는 내가 만든 우상이거든요. 그런 예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몰랐던 예수님, 어떤 전제를 통해서 ‘하나님은나를 사랑하시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를 안고 있는 내가 그동안 한치도 몰랐던 주님, 주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예수 범주에 들지 않는 낯선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은 엉터리 예수를 품고 있던 내 안에 진짜 예수님이 교체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제사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일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제사부터 일이 시작된다. 바꿔치기하는데 이삭은 그냥 들러리로, 아버지의 제사의 시험에 그냥 걸려든 거고요. 이삭과 양을 바꾼다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 예수님을 바꾼다 그런 뜻이에요. 그걸 왜 바꾸시느냐? 바꾸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언약에 주어진, 아브라함은 언약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약이 주어지면서, 언약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외부 인류의 역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적인 분, 그러니까 다 이루신 주님이잖아요, 주님의 내부에서 일어난 그 일이 인류 역사로 장식됩니다.
그건 왜 그런가? 주님은 아무것도 아버지 앞에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악마로 인하여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된다는 그런 포장으로 자기를 외식하고 기만하고 위선적이지만 주님과 아버지 사이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아요. 아버지 시선이 뙤약볕처럼 그대로 쪼입니다. 아버지의 시선이. 아버지의 시선이 예수님의 내부를 장식해요. 내부 그대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말하는 진실은 뭐냐? 인간이 말하는 진실은요, 서로 좋을 때는 죽고 못살다가 나중에 헤어질 때 되면, 인간은 헤어질 때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요. 헤어지면서. “실은 나는 단지 좋아했지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막 이런 식으로 메일 하나 보내고 헤어져 버리지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이야기할 때는 전부 다 뜻을 새겨서 집어넣지요. 그러나 헤어지고 난 뒤에는 전부 다 뜻 모를 이야기에요.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다음 대목이 결정적입니다.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쓸쓸한 표정, 저게 헤어지는 징후였던가? ‘이제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런 표정인가? ‘여기서 헤어져.’ 이렇게 끝났어요. 시월의 마지막 그 밤이 내일 아닙니까, 내일.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자기가 과거에 투자한 것이 아까워 미치는 거예요. 가방도 사줬는데. ‘남자답게, 그냥 화끈하게 헤어지면 헤어지지.’ 이러고 싶은데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이 계절이 말썽이라.
나에게 꿈을 주지만~
위선을 주지만. 꿈이 위선입니다. 모든 꿈은 위선이고 나의 환상에서 오는 거거든요.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우우우우우~
지나가 보니까 우리가 주고받던 이야기가 다 쓰잘데기없는 뜻 모를 이야기인 것을, 진실이 아닌 것을 헤어질 때 압니다.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과 헤어지면서 어떻게 헤어지는가? 주님을 죽여버리지요. 왜?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항거가 뭐냐? 나에게 주시하는 어떤 시선을 내가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실정입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연출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 그때까지 나를 연출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삭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양과 인간을 바꿔치기하는 그 장치를 아브라함의 제사부터 시작하는데 그걸 언약이라 해요.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 안에 주님의 시선이, 예수님의 눈이 있지만 아버지의 시선이 너무 따갑게 느껴지니까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여기서 ‘그러나’,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마옵시고’ “주님,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게 기도에요. 기도는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고 응답이 먼저 있고 기도는 거기에 그 칸을 메워나가는 겁니다. 주님은 그 칸을 메우기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어요.
주님의 응답은 뭐냐? 나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나를 떼어놓는 거예요. 나와 헤어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떼어놓은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왜? 아브라함은 이제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아브람이 아브람에서 떼어 내지고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그 제사, 그게 언약입니다. 초라한 예수님이 이 세상의 심판주요 구세주가 되는 그걸로 전환되는 것은, 어린양의 기능을 예수님이 완료, 완성을 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아버지와의 교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지요. 예수님을 감당치 못하는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에 보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도 또는 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인은 이것은 우상입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내가 만든 신이에요.
쉽게 말해서 바르게 살면 내가 생각해둔 내 인생에 가까이 접근한다고 그렇게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살면 되는데 자꾸 바르게 살겠다는 것은, 내 인생 내가 안 헤어지겠다, 몰고 가겠다, 끌고 가겠다는 그런 고집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장치에 대해서 좀 복잡하지만 생각을 해 봅시다. 그게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 양과 사람을 바꿔치기하는 장치에 대해서 로마서 4장 9절에 보면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할례가 여기 등장하는 겁니다. 할례라는 율법이 등장해서 진짜 할례, 하나님의 숨겨진 바꿔치기 하기 위한 할례 할례를 하느냐, 아니면 그냥 시키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할례를 하느냐를 하나님께서는 가름하시는 거예요. 그 차이점을 보시는 거예요. 할례라 하는 것은 내가 끊어지는 것, 내가 조상에서 내려오는 그 육의 끊어짐을 할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남성의 생식기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나오는 그 부분을 잘라버리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잘라버립니다. 이것은 언약에 의해서 이제는 새로운 언약적 생식이 필요하지 육적 생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 언약적 생식이라 하는 것은 바로 양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 희생양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주도권을 쥐는 게 아니고 희생양이 주도권을 쥐는 그러한 새로운 천국의 백성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할례지요.
그런데 그 할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할례를 넘어서서 인간의 방해를 무릅쓰고 어떻게 넘어오는가? 17절에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아브라함에게 이 말을 할 때 아브라함은 전혀 자식이 없다는 것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천사 둘 대동하고 합 세 명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을 때 약속을 주는데 그 약속이 바로 이삭이었고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그런 존재로 바꿔주는 그것이 하나님의 준비된 성도입니다. 없는데, 나에게는 성도가 없었는데 성도가 나한테 생겨버렸어요. 내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내 생각에는 전혀 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없는 데서 생기는 데 없는 데서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거기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24절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죽은 데서 살리는 겁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것은 일단은 있는 것을 부정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인간들 생각에는 전혀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우리 몸을 하나의 변화의 현장으로 보는 겁니다. 전혀 예상 못 한 거예요. 불에 가까이 가면 죽는다, 깊은 물에 빠지면 죽는다, 사람 많은 데 가면 압사당한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예상 못 했지만 하여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예상 못 한 것이 뭘까, 를 내가 몰라요. 우리가 예상 못한 것이 이런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상 못 한 것이 아니고 예상해서 안 것의 범주에 들어와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예상 못 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정말 구원받았는지는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내가 어떻게 외식적으로 행동하는 것, 내가 신앙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면 되지, 이런 것 말고 우리 내부를 쪼개봐야 되겠지요. 우리 내부를 쪼개보는 거예요.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4장에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이것은 인간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고, 이런 나쁜 음식, 개고기 같은 것은 먹으면 안 된다, 목 베인 짐승이나 개고기 같은 것은 먹으면 안 된다, 이런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 말고 예상 못 하는 식으로 네가 모습을 보이는 게 뭐냐? 그것은 우리 내부를 잘라 봐야 되지요. 그래서 이런 이단들, 이런 외식하는 자들이 생각도 못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 내부의 절단면을 본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절단면.
주님께서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유대인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주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어떤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그때가 뭐냐? 자기 나름대로의 굉장히 순정하고, 순수하고, 정화되어 있고, 정결한, 순결함의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그 가운데를 잘라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를 건전하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나 이제 예수 믿었어. 믿었으니까 성경 보니 하라, 하라, 가 왜 그리 많아? 그러나 다는 못 지키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그 정성은 알아주시겠지.’ 하고 자기 정성 믿고 열심을 믿고 최선의 노력을 믿고 이걸 해 나갑니다. 그렇게 하면 남는 게 뭘까요?
그것은 내가 날이 갈수록 건전해지고 정결해지지요. 내가 거룩한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스스로 불의와 부정을 끊어내려고 애를 쓸 겁니다. 여러분이 김밥 만들 때 김밥의 꼬투리 있잖아요. 그 꼬투리를 잘라내지요. 잘라내면 뭐만 남습니까? 순정품 그것만 남지요. 주님께서 순정품 김밥 그 한가운데를 잘라버려요. “자, 네가 할 것 어디까지 했나?” “제가 순수한 김밥만 남겼습니다.” “그래 가져와.” 그 가운데를 잘라버려요. 불의와 부정을 끊어내서 이제는 이것만큼은 불의도 아니고 이것만큼은 정결하고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그 결정체를 주님께서 끊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성경 어느 대목에서 나오느냐 하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그 대목에 나옵니다. 그 대목 말라기에 있는데 말라기, 선지자의 끝이라서 말라기가 아니고 선지자의 이름이 말라기입니다. 그 말라기 4장 끝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5, 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요? 왜 어려운 말이냐? 일단 엘리야가 와야 돼요, 엘리야가. 그러나 우리가 아는 죽은 엘리야는 두 번 다시 오지를 않았어요. 또 두 번째 어려운 게 뭐냐?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리는 것’도 있어줘야 돼요. 그 기능으로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메시야가 온다고 마지막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또 엘리야 자체가 선지자 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막상 신약에 오게 되면 누가 왔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왔어요. 세례요한이 엘리야냐? 세례요한이 과연 엘리야일까? 이게 마태복음 14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헤롯의 딸이 춤을 주면서 헤롯에게 뭘 요구했어요.
7, 8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자, 세례요한은 죽습니다. 엘리야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주님은,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눈이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시선을 몰라요. 내가 나를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세례요한이 죽었으니까 엘리야가 아니겠지.’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주님은 “죽은 세례요한이 엘리야였다. 말라기의 그 말씀의 엘리야가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매치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연결시켰거든요.
그 연결되는 것을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냐? 세례요한이 어떻게 엘리야냐? 모습은 비슷해요. 엘리야도 광야에서 가죽옷, 모피 옷 입고 있었고 세례요한도 광야에 있을 때 두꺼운 모피 옷 입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엘리야, 그런 이미지를 제공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말라기하고 딱 견줘보면 이게 맞지를 않아요. 그 내력이 이렇게 돼요. 그 내력을 이야기하기 전에 어떤 팝송 가사를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고 이게 설명이 쉽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Both sides now”라는 노래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양 편에서>라는 거예요 ‘양 편’이 중요해요. <양 편에서> 이 노래가 올해 2022년 아카데미상 작품상에 <코다, coda)>라는 영화의주제가입니다. ‘코다’라는 뜻은 후주(後奏) 음악이 다 끝났는데 여지를 남기면서 있는 그것입니다. 전주(前奏)와 반대말로 후주라는 것이 ‘코다’인데 그 영화의 핵심주제로서 이 옛날 노래가 들어가 있어요.
그 가사를 보게 되면 가사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구름에 대해서, 또 하나는 사랑에 대해서, 나머지 하나는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한편에서만 봤다는 거예요. 구름을 한편에서만 보고 참 좋게 봤다는 겁니다.
Rows and floes of angel hair
And ice cream castles in the air
And feather canyons everywhere
I've looked at clouds that way
줄지어 떠다니는 천사의 머릿결 같기도 하고
공중에 떠 있는 아이스크림 성들
깃털로 만드는 계곡들
나는 구름을 그렇게 보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본 것이 다가 아니지요.
But now they only block the sun
They rain and snow on everyone
So many things I would have done
But clouds got in my way
하지만 구름은 이제 햇빛을 가릴 뿐이죠
그들은 모두에게 눈과 비를 뿌리고
제가 할 수 있었을 많은 일들도
구름이 끼어 저의 길을 막았어요
그래서 이 구름은 “from up and down” 위에서 아래까지, 밑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겁니다. 노래 제목이 <양 편에서> “Both sides now” 양편에서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하기를,
It's cloud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clouds at all
내 기억에 있는 구름은 환상일 뿐
구름의 실체를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at all).
그런 내용을 갖고 있어요. 그다음에 구름만 그런 게 아니고 사랑도 그렇다는 거예요.
Moons and Junes and Ferris wheels
The dizzy dancing way you feel
As every fairy tale comes real
I've looked at love that way
달들과 유월들 그리고 관람차
당신이 느끼는 어지러운 춤
마치 모든 꾸며낸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것처럼
저는 사랑을 그렇게 봤었어요
사랑은 마치 놀이동산 관람차처럼 그때는 동화가 현실이 되는 것처럼 사랑을 그렇게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떠날 때가 되면 쇼를 그동안 저 남자 저 여자 만나서 했던 남들 보여주기 위한 쇼를 벌였다는 거예요, 쇼. 위장하는 쇼를 벌였다는 거예요. 그들을 웃게 하고 아직 마음이 있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결실은 뭐냐?
I've looked at love from both sides now
From give and take, and still somehow
It's love's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love at all
이제 저는 사랑의 양쪽을 봐요.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제가 기억하는건 사랑의 환상이었나 봐요
정말이지 저는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겠어요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from give and take”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사랑은 내가 하는 쪽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받는 쪽에서 과연 사랑일까를 생각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양쪽에서 봐야 되는 거예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은 환상일 뿐 사랑의 실체를 모르겠답니다. 전혀, at all,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세 번째 테마에서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인생이 올 때는 서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보여주는 인생을 살았는데 하지만 지나고 나니 오랜 친구들이 점점 낯설어지고 그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네가 변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되었대요. 어떻게 봤느냐? 이기는 쪽과 지는 쪽으로, from win and lose,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기는 쪽에서 보는 인생과 진 쪽이 보는 인생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From up and down and still somehow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이제 저는 삶의 양쪽을 봐요
위쪽과 아래쪽에서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제가 기억하는 건 삶의 환상이었나봐요
정말이지 저는 삶을 전혀 모르겠어요.
인생의 실체를 모르겠답니다. 전혀(At all). 이걸 왜 하느냐 하면, 이게 창세기 15장 10절에 나와 있어요. 창세기 15장 10절에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게 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을 때, 제물을 바치라 할 때 그냥 바치지 말고 일단 그 내부를 쪼개서 쪼개고, 한쪽을 버리고 나머지 한쪽을 버리는 게 아니고, 그 쪼갠 쪽을 버리지 말고 딱 남겨두라는 거예요.
남겨두게 되면 여기서 보이지 않던 내부성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 내부성이 보이도록 양쪽을 도열하듯이 놔두고 밤중에,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모를 때, 아무것도 모를 때, 잠잘 때 밤 10시 한 20분 정도, 모를 때, 한국의 성인들이 다 잘 때.
한국은 세 패입니다. 민주당 패 있고, 국민의 힘 패 있고, 젊은 패 있고 세 패 있어요. 광화문에 이쪽 5만 모이고 저쪽 5만이 모일 때 이태원에는 10만 명이 모여요. 밤 10시 20분 그들은 할로윈 데이 축제한다고 거기 다 모여 있어요. 인간들이 몰랐던 그 내부, 딱 마주 볼 때 밤중에 하나님이 홀로, ‘홀로’입니다, 아브라함이 몰라요, ‘홀로’ 그 쪼개진 내부성 사이로 하나님이 불이 되어서 지나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내부를 쪼개는 것, 거기서 바로, 쪼개는 거기서 나타난 것은 피입니다, 피, 하나님의 피지요. 햄버거를 주잖아요. 치즈 덮고, 상추 덮고, 고기패티 덮잖아요. 그걸 둘로 쪼개는 겁니다. 쪼개면 뭐가 보이느냐? 치즈가 보이는 게 아니고, 패티가 보이는 게 아니고, 절단면, 패티의 절단면, 치즈의 절단면, 상추의 절단면이 보여요. 거기에 애벌레의 절단면이 나온다면 그것은 절단이지요.
깔끔하게 잘라낸다는 것, 주님은 우리를 제단에 눕혀서 주님의 피로 깔끔하게 그걸 도려냅니다. 사랑? 춘향가의 사랑은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그런데 아닙니다. “절단면을 보자. 너의 절단면을 보자. 네 안에 내 피가 있는지.” 함께 죽는 거예요. 주님이 나와 함께 절단된, 저주받은, 심판받은 절단면이 네 안에 있는지.
주께서는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걸 보는 거예요. 이걸 봐서 우리를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는지. “너만 절단하는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나도 절단했다.” 왜? 주님은 우리의 희생양이니까요. 희생양이 들어와서 그때부터는, 슬근슬근 톱질하세, 가 아닙니다, 텍사스 전기톱 가지고 한꺼번에 잘라버리지요. 한꺼번에 우리를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잘리면서 언약의 ‘다 이루었다’가 피가 되어서 분출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요, 모든 문제는 내가 나를 못 놓기 때문에 생긴 문제고, 내가 마지막으로, 궁극적으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에요. 내 자식, 내 손자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교회 부흥, 전부 다 나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잘라버려야 돼요. 잘라버리면 주님은 아들만 사랑합니다. 우리 주님만 사랑합니다. 주님은 언약의 사람, 다 이루었던 예수님만 사랑합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게 뭐냐?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부정성이에요. 이 자기를 부정하는 부정성, 이거 없으면 성도 아닙니다. 이삭은 껍데기였습니다. 아브라함테스트에 말려든 껍데기. 우리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있던 일에 껍질이라도 좋소. 그것만 해도 우리는 감지덕지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하고 마치겠습니다. 진실이란 나 자신의 한도치가 들춰지는 현상이지요. 나와 헤어지고, 나와 주님과 헤어지면서 그러면서도 그걸 언제 아느냐? 바로 헤어지고 난 뒤에, 이제는 인간과 헤어진 분이 주님이잖아요, 주님이 들어왔으니까, 내가 이미 나와 헤어졌고 나는 이미 내가 아는 신과 헤어졌음을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이미 알 때,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한 것도 그냥 시월의 마지막 밤에 했던 뜻 모를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 우리가 열심히 의롭다고 한 것도 의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냥 한 거지요. 그냥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냥 사세요. 그냥 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별 의미 주지 않고 그냥 살게 하옵소서. 그냥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게 내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