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외부의 피

아빠와 함께 2022. 10. 2. 21:20

설교노트

 

감독의 자격

2022년   10월 2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3:1-7

(3: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감독이라는 직분은 외부적입니다. 결코 자생적이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흔하고 흔한 조직체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그런 행정적 요소가 아닙니다. 감독이란 직분이 있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진정한 감독자는 절대로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가 지금 피 안에 있는지 피 밖에 있는 지를 가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피’란 곧 외부성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희생이나 수고나 땀이나 노력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일방적으로 흘리신 그 피입니다.

따라서 이 절대적 외부성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하나님의 피를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이해하지 못함을 성령께서는 확고히 하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으로만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감독은 ‘인간의 원함’을 쏙쏙 다 빼버리는 작업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교회 자체가 특이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구성해도 예상하지 못하는 단체이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설명은 시간 속에서 진행됩니다. 시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엮어내어 그것으로 세상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는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사건으로 등장됩니다.

한 예를 들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 가족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자식들, 손자들 앞에 노출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에 본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은 아무 조치도 없이 형들에게 알렸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아버지 노아의 부주의함과 치부를 치부로서 바라본 겁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치부를 보지 않으려했고 뒷걸음쳐서 담요로 그 치부를 가려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셈과 야벳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에게 축복합니다. 반면에 셈과 가나안에게는 사정없이 저주를 해버립니다. 이것은 노아 가정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은혜로 구원되었음의 의미를 일상 속에 스며들었는지 여부를 묻는 방식으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마치 없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상식이 되고 만겁니다. 즉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사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기정사실화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멸망과 불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나서서 하소연해봤자 변경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심판이 왔는지 미리 알면 될 일입니다. 인간의 기정사실화와 하나님의 기정사실화 사이의 간격 속에서 등장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피’입니다. 감독을 이 사실을 유지하고 지켜내면서 복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가름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런 감독마저 인간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해서 생긴 겁니다. 감독 시대란 예수님 이후, 사도 시대를 겪어서 등장됩니다. 이미 말씀 완결을 드러내기 위한 사도시대 이후, 주님이 이룩하신 ‘하나님의 피’로 인하여 절대 기준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 감독시대 이후에는 ‘성령의 공동체 시대’가 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즉 성도 자체가 감독이 되고 집사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적입니다. 자율적이라함은 자기다움을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모습일 반면에, 자유란 자신이 이미 죽은 자라는 입장에서 성령에 이끌려 사는 것을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 죽은 자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하나님의 피’가 이를 증명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이란 왜 ‘하나님의 피’라는 외부성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삶입니다. 감독 위치에 있었던 광야 시절의 모세와 아론은 같은 레위지파에 속한 고라 자손들에 의해서 심하게 공격받는 사건이 민수기 16장에서 17장에 걸쳐 나옵니다.

고라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드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다같이 거룩한 사람이고 함께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차등없이 계시는데 왜 모세와 아론은 우리들 위에 군림하느냐?”고 따지면서 시비를 걸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들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심판이라는 특이성 없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이점에 있어 그들은 노아의 아들, 함과 손자인 가나안의 의식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는 반발자 250명에서 각자 향로에 불을 담아 오기를 명하시고 결국 그 담긴 불길과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자리에 선 땅이 갈라지면서 그들은 모든 산 채로 생매장 되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였던 그 향로를 편절로 만들어서 거룩한 심판 작업을 행해지는 제단에 덧붙이도록 했습니다. 거룩이란 이처럼 반드시 ‘나의 심판’을 그 내용을 해야만 합니다. 나의 심판없는 거룩은 없습니다. 그리고 레위지파의 직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민 18:6)

이처럼 오늘날 교회의 모든 것은 있을 수 없는데서 생겨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주와 심판이 기정사화된 이 판국에 자신의 심판을 앞당겨 실시케 한 그 ‘하나님 피’안에 놓인 자들은 일방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왜 이것이 무의미하고 아무런 쓸데없는 일인가를 확인케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받은 성도만이 세상사람들이 읽어낼 수 없는 것을 읽어냅니다. 더는 자기를 바라보고 사는 자가 아니라 마치 아이슬란드 용암을 쳐다보는 관광객들처럼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서 그쪽 모든 것이 심판받는 그쪽을 쳐다보며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처럼 진리란 방향입니다. 주님 하신 일, ‘하나님의 피’가 작용하는 방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상식으로 살지 않고 특이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12강-디모데전서 3장 1-7절(외부의 피)22100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입니다.

디모데전서 3:1-7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직분이라는 이 이야기, 감독 직분을 누가 세웠느냐? 교회가 세워지면서 같이 세워지는 것이 감독 직분이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세워지는가? 거기 따라서 감독자의 업무도 결정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여기 감독자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오는데요. 그 내용이 뭘 감독하느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피는 우리 피가 아니지요. 그걸 외부적이라 합니다. 외부적으로 주입되는 피가 따로 있어요. 인간의 자기희생으로 교회 만들면 안 돼요. 하나님의 자기 피로, 자기의 땀과 피로 교회 만들면 안 됩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외부 피가 있어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해놓고, 이 하나님의 피, 외부에서 흘러온 것이 교회의 기초냐 아니냐, 를 그걸 감독하기 위해서, 감시하기 위해서 감독자로 세운 거예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피, 이 하나님의 피는 단회적이고요, 한번 ‘피 흘렸음’으로 끝났거든요. 이 단회적인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無)시간적’이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변함없이 일관된 원칙과 기조가 지켜지는 곳,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감독이 해야 될 것은 ‘당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피가 당신을 거룩케 했습니까?’를 묻는 이야기, 그것을 말하고 그 경계선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 그게 감독자죠. 성령의 감독자.

그러면 감독자, 왜 이게 필요하냐?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열두 제자가 사도가 되지요. 그 사도의 시대가 끝나고 그다음에 감독의 시대에 들어온 거예요. 사도가 해야 될 것은 성경을 완료시키는 거예요. 성경을 완료를 시켜서 더 보태거나 빼지 않는 그 말씀 자체로 완결책을 만드는 겁니다. 그 책의 핵심은 뭐냐? 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 거고 풀이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만 이야기해요. 인간의 교회 역사 이런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어떤 신앙적인 위인이 대단했다, 믿음 좋았다, 그런 것도 섞여서는 안 돼요. 오직 성경은 예수님만 뭘 하셨는가, 그것만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감독하는 자는 예수님의 피, 하나님의 피죠, 하나님의 피가, 그 외부적인 하나님의 피가 이 땅에 교회라는 것을 생성해 냈다. 그걸 언급하는 자가 감독자예요. 일종의 설교자라고 할 수 있어요. 감독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감독의 시대가 지금 이 시대에도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의 시대가 끝나면 감독자는 그 시대에 성경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사라져버리고 남는 것은 뭐냐? 공동체 시대가 오는 겁니다. 그게 요한 1서에 나와요. 요한 1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께서 너희를 직접 가르칠 것이다. 쉽게 말해서 “교회 없다”에요. ‘교회 제도 이런 것 없다’ 시대가 되는 겁니다. 성령의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요한 1서 2장 27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기름 부음이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뭘 붙잡으려고 하는데 그 붙잡는 것을 주님께서 실패로 만들어 버려요. 붙잡을 게 없게 만들어 버려요. 내 쪽에서, 인간 쪽에서 붙잡을 게 없게 만들어요. 왜? 그게 너무나 구약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붙잡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내가 구원받기를 원한다, 내가 천국 가기를 원해서 뭔가 붙잡거든요. 그런데 성경 전체가 외부적이니까, 이 외부적이라는 것을 초반에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피가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원해서 흘린 피기 때문에 교회마저도 내가 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해서 벌어진 사태가 교회 사태에요, 이게!

이 성령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한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다 빠져나가야 돼요. 다 뽑아내야 돼요. 그걸 제거해 버려야 돼요. 그걸 감독하는 자가 감독자예요. 은근히 뭐 노리고 음흉하게 교회 와서 이득 좀 볼까, 내 인생 행복하게 좀 만들어 볼까, 이런 것은 모조리 다 빼야 돼요. 왜 이것은 외부에서 원한 게 아니고 내가 원하고 있기 때문에. 내 가정, 내 인생, 내가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거 감시해야 돼요.

그래서 교회는 전적으로 무시간적이에요. 무시간적이라는 말이 상당히 어려운데,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생각에 잠겨버리면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가요. ‘벌써 이만큼 시간이 지났나?’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의 외부적인 생각으로 생성되고 일어나는 현상이 교회 현상이거든요. 교회가 있는 게 아니고 교회는 사건으로서 현상적으로 일어나요. 기도하신 집사님 기도내용처럼 하나의 사건화 되어서 교회가 불쑥불쑥 출몰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원래 그래요. 성령님께서 원래 그래요.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갔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 그게 무시간적이다, 는 거예요.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우리도 생각에 잠길 때는 ‘시간이 이만큼 되었어?’ 이렇게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그 교회는 2020년도에 뭐가 어떻고 그런, 서기 몇 년이니 그런 것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잔뜩 흐린 날씨가 되어버리면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지요. 이렇게 모든 것이 잔뜩 흐린 날씨가 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무의미하게 되어서 뭔가 덮쳐진 느낌을 받지요. 가까이 있는 먹구름 때문에 심리적으로 그런 현상을 육체적으로 느끼기 마련인데 멍~해버릴 때 멍~해버리고 그냥 모든 것이 덮쳐져서 그냥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살면서 우리가 제일 신기하고 경이로우면서도 해독하기 어려운 일이 뭐냐 하면, ‘거기 있다’예요. 거기 있다. 그냥 거기 모든 게 있는 거예요. 여기는 인간이 해명하거나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왜 있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네가 왜 있지?’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냥 거기 있는 거예요.

인간이 설명한다는 것은 원인을 추적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내 쪽의 어떤 수고 같은 게 들어갈 때는 설명이 되는데 모든 것이 그냥 선물로 있어 버리면 나의 모든 가능성은 완전히 무시가 되는 겁니다. 그냥 있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문자를 써서 ‘기정사실이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설명할 때는 기정사실로 설명하는데 이거 하나 여러분 꼭 아셔야 돼요. 세상은 이미 멸망과 불심판으로 들어가는 게 기정사실로 되었습니다. 왜냐? 그냥 하나님이 원해서 그렇게 하셨어요. 제 멱살 쥐고 흔들어도 소용없어요. 그냥 기정사실, 세상이 멸망하고 불심판에 들어가는 이것은 기정사실이에요. 그래서 성도로서는 그 이유를 미리 알면 돼요. 불심판 취소해달라고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이유를 알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기정사실이 있는 반면에 인간도 기정사실이 있어요. 뭐냐?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산다는 이것이 기정사실이에요.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요. 이것도 기정사실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정사실이 있고 인간은 인간 대로 기정사실이 있고. 그러니까 이 두 개의 기정사실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떻게 준비해도 인간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관심 두지도 않고 왜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사는가? 그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이슬란드에 가면 화산이 있는데 지금도 관광객을 모으고 있습니다. 용암이 눈앞에서 막 분출해요. 그 온 천지가 뜨근뜨근하지요. 과학자는 그 용암에 소시지 구워 먹고 그래요. 그러면 그 용암 속에는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과 모든 것이 다 불 속에 녹아져 버려요. 대지가 토하듯이 그걸 분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지금 그걸 바라보고 있거든요. 그걸 카메라가 저쪽 뒤에서 샷(shot)으로 찍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용암이 분출하고 있는, 맹렬하게 타고 있는 그 대지의 순수한 본질을 그대로 목격하고 있으면 얼굴 빛깔이 발그스레하고 홍조를 띄겠지요. 그걸 뒤에서 찍어버리면 사람은 뒷면, 등짝만 찍혀 나오겠지요.

이게 진리입니다. 진리란 나를 안 보는 거예요. 진리는 나를 보면서 ‘오늘 내가 뭐할 고?’를 바라보는 게 진리가 아니고 진리라는 것은 주님의 기정사실을 넋 없이 쳐다보는 거예요. 그것은 무시간적이에요. 세월이 천 년 가도 만 년 가도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질 게 없는 것을 기정사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냥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진리는 방향입니다. 진리는 방향이에요. 뭐가 진리냐? 자기를 보고 진리라는 말을 하면 안 되지요. 예수님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감히 건방진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심문하면서 그런 철딱서니 없는 질문을 했지요.

저는 그 자리에, 강의시간에서도 그런 소리 했지만, 그 자리에 마동석이 좀 있었으면 좋겠지요. 빌라도를 그냥 한방 치면서 “네가 왜, 왜 네가 네 자리를 염두에 두고, 네가 갖고 있는 네 자리를 염두에 두고 진리를 알아서, 그 진리를 내 것으로 강제로 빨아당겨서 내 것, 내가 진리 아는 사람 되려고 하는, 자기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소유화시키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넋 없이 쳐다보지는 못할망정.

“알아서 뭐하는데? 네가 진리를 알아서 뭐하는데?” 사람이 진리를 알고자 하고 복음을 알고자 하는 그 심보에는요, 안 망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더는 안 망해야 되겠다.’ 주님은 “아직도 네가 네 한계를 모르는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에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끝난 문제에요.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이게 하나님의 판정입니다. 주님의 판정이에요. 인간은 인간 나름끼리 서로, 화산 안 바라보고 저희끼리 마주 보면서 시시덕거리고 하지만 그 사물과 인간과 모든, 코끼리, 기린, 청초한 코스모스, 민들레, 전부 다 불 속으로 삼켜버리는 그 진리 앞에서 인간은 이미 죽은 겁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미 그게 기정사실이라는 사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그렇게 인간이 지옥 불에 가야 될 이유를 미리 당겨서 알면 되지요. 그걸 미리 알면 되잖아요. 노아 이야기 했지만 다시 하면, 창세기 9장에 노아가 술을 먹고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벌거벗었다고 되어 있어요. 이럴 때 노아의 자식이 두 편으로 갈립니다. 함과 그리고 그 아들 가나안은 아버지 노아의 찌질한 모습을 보고서 실망스러워서 놀려댔지요. “아버지가 저렇게 찌질하다.”

거기에 비해서 셈과 야벳은 그것을 거부했지요. 창세기 9장 성경 초반에 나옵니다. 노아가 하체를 드러내고 벌거벗고 있을 때에 제가 뭘 주목하느냐 하면, 25-27절입니다. 창세기 9장 25절 “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외부적인 용서, 하나님의 피가 없는 세계를 항상 우리는 잊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의 피가, 외부적인 하나님의 피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에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의 판단은 인간 나름대로 정확해요. 아버지는 찌질한 것 맞습니다. 찌질한 아버지보고 찌질하다 하는 그게 뭐가 나쁩니까?

지금 아버지에게서 함과 가나안 저주받은 쪽이지요. 저주받은 쪽에서 보는 눈에 굉장히 관찰력 있고 정확하다는 그 말은,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을 그대로 바깥으로 드러낸 거예요.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지 저게 무슨 꼴이냐?’ 그런 겁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냐 하면,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서 아버지의 허점과 허접함을 다 드러낸 그 모습을 보고서도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입장이잖아.’를, 그것을 기억하고 생각한다는 그쪽이 이상한 쪽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정은 이것보다 더 망가지고 더 허접하게 찌질해도 괜찮아. 왜 이미 심판을 통과했으니까, 홍수심판을 통과했으니까.’ 그것을 셈과 야벳은 뭘로 표현했느냐 하면, 아버지 하체를 보지 않고 뒷걸음질 쳐서 담요로 그 하체를 덮어주는 거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의 치마를 벗기고 가죽옷으로 덮어주는 것처럼 주께서 덮어주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될 것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방주로서 덮어주는 은혜와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맘속에 외부적인 요소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이게 굉장히 특이해요.

이런 면을 보고 셈과 야벳은 복 받았다고 아버지가 술 깨고 일어나서 그렇게 선언해 버렸습니다. 복과 저주, 감독이 할 일이 그거예요. 그 경계선에 있어요. 외부적으로 온, 외부적인 피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 왜 외부에서 거드냐 이 말이에요. 내 인생 왜 함부로, 내 인생 내가 판단력 있고, 관찰력 있고, 내가 내 인생 잘 관리하고 추스를 수 있는데 왜 외부에서 피를, 왜 그쪽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을 반기고 거기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정신없이 그쪽으로 방향 틀어서 바라보는 사람, 그게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걸 아주 어렵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정사실에서 인간의 기정사실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사는 게 기정사실이에요. 부모가 돌아가고 난 뒤에 자식들이 부모의 유류품을 정리합니다. 부모와 평소에 같이 살던 자식 말고 멀리 떨어져서 한 30년, 40년, 50년 떨어져 살았던 자식이 오랜만에 아버지 살던 집에 와서 정리도 하고 집도 팔아야 되고, 그래서 둘러보면서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유류품을 정리하면서 느낀 점이 뭐냐? 이거에요.

아버지 취향들, 어머니의 옛날 옷가지며 앨범의 사진 다 보면서 내린 결론은 딱 이거예요. ‘이것은 완전히 내 스타일은 아니다.’ 모든 자식은 다 그렇게 느껴요. ‘아, 나는 아버지 어머니처럼 사는 이것은 내 스타일 아니다. 갖다 버리자.’ 금붙이 빼놓고는 나머지 다 갖다 버려요. 돈 안 되는 것은 다 버려요.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이 각 개인마다 스타일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나에게 일체 외부적인 것이 접근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평생을,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그 뜻이에요. ‘감독자? 감독자 같은 것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 나는 감독자 같은 것 필요 없어. 내 인생은 내 스타일대로 밀어붙일 거야.’

그런데 오늘 본문에 감독자가 등장하니까 감독자의 존재 자체가 외부적이거든요. 얼마나 인간에게 자기한테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이게 인생에 거추장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원래 인간은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원해요. 딱입니다. 인간은 그것뿐이에요.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원해요. 함께 있고 싶은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 이것은 사람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사람 있는데요, 봉화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굉장히 마음속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상호를 이야기하면 “어린이 문구사”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되어줘서. 거기가 외진데 그 외톨이, 혼자 있게 되었는데 함께 있게 된 것을 굉장히 감사하거든요. 그래서 감독이 있다는 것, 여러분이 감독을 원합니까? 원하지 않거든요. 감독의 본질은 뭐냐? ‘나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하는 모델케이스입니다. 이게 감독이에요.

‘너희들은 혼자 살고 싶지? 나는 혼자 살고 싶지 싫어. 나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이게 감독이에요. 이게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보다도 실제로 예를 드는 것이 훨씬 편하겠습니다. 민수기 16장과 18장 7절까지 보겠는데요. 굉장히 긴 것인데 여기에 오늘 본문에 감독의 위치에 대해서 구약에서 너무나 잘 나와 있기에 제가 언급하는 겁니다. 레위자손, 레위지파가 있었는데 레위지파 가운데서 제사장은 특이한 역할을 맡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레위자손 중에 고라, 대표적인 것이 고라인데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제가 언급한 것과 한번 연관시켜 봅시다. 교회라 하는 것은 외부성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피 흘려서, 우리가 희생해서 교회 만든 게 아닙니다. 돈 내서 교회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의 피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감독자는 그 피가 계속해서 살아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감독하는 게 감독자의 임무에요. 그것도 그 감독자와 성령이 함께 있어요. 감독자가 홀로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함께 있어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겁니다. 그게 사도시대 끝나고 난 뒤에 감독시대가 되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독자의 위치가 민수기 16장 광야시대 때 이미 있었어요. 레위지파가 주동이 되어서 루우벤 지파까지 일부 합세해서 250명의 족장들과 더불어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대들 때에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습니다. 모세는 지도자고 아론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과 지도자에게 대든 겁니다.

참고로 레위인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성막 일에 보조역할이지 주도역할은 제사장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 출신이냐? 레위지파 출신이지만, 레위지파지만 제사장은 업무가 따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그들의 주장이 뭐냐 하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기를, 3절에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이것이 그들이 아론과 모세에게 대든 이유입니다. “네가 뭔데? 우리 다 같이 출애굽할 때 다 같은 입장에서 왔잖아. 너만 거룩해? 우리도 거룩해. 하나님이 너와만 있어?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데 네가 왜 대장질하느냐?” 이런 이야기에요. “네가 왜 감독질을 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 그들이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거룩이 뭔지를 지금 모르고 있는 것, 그것은 나중에 나옵니다. 조금 있다가 설명해 드릴게요. 거룩이란 개념을 그들이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그 이야기 듣고 거룩한 자가 누군지를 보이기 위해서 6, 7절에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너의 모든 무리는 향로를 취하고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즉 불을 담은 향로를 가지고 나오너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250명과 함께 하는 그 단체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뭔데 우리보고 가라 오라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그렇게 된 거예요.

12, 13절에 보면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보내었더니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너희들이 데려왔잖아.”

그래도 강제로 해서 17, 18절에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 오십이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찌니라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모세와 아론으로 더불어 회막문에 서니라.”

그래서 어쨌든 그 250명이 향로를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왔습니다. 이게 뭐냐? 특이성이에요. 이게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이라 하는 것은 외부적인 요소가 있어줘야 돼요. 향로를 그냥 잡고 있어요. 있는데요, 18절에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했던 250명 거기 놔두고 나머지는 빨리 그 자리에서 피하라고 했습니다. 20, 21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빨리 피하라고, 안 그러면 너도 죽는다고. 피해라.

그래서 피했거든요. 피했을 때 그 향로에 담았던 불이 나와서 산채로 그들은 불에 타죽습니다. 35절에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이건 뭐냐 하면, “소속을 분명히 하라. 네가 250명에 소속되어 있느냐, 아니면 이쪽 모세와 아론 쪽이냐? 소속을 분명히 하라.” 했습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 모세가 너무 겁이 나서 하나님께 말렸지요. “어떻게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다 죽이려고 합니까?” 22절이지요.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그러니까 250명 남기고 나머지는 다 빠지라니까! 빠지라는 이야기야. 빠져!”

빠졌더니만 30-35절에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소속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네가 모세와 아론편이냐, 아니면 고라 자손 그쪽 소속이냐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검토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고라와 이 루우벤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면서 주장했던 그 주장이 뭐가 잘못이냐 하는 거예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상식적이라서 그래요. 특이성이 빠져버렸어요. 상식적, 너무나 상식적이에요. 상식적이라 하는 것은 교회를 정치적이고 행정적으로 바라볼 때 상식적이 되는 겁니다. 함과 가나안이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면서 벌거벗고 술주정, 술주정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허접스런 모습을 보고 그들이 아버지를 비난했던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너무나 상식적이고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인간으로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지금 이 고라 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고라 자손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고 그냥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져버렸어요. 먼저 땅이 갈라지고 그리고 불태워서 다 죽여버렸어요.

향로를 들고 있는 게 뭐가 이게 이상한 겁니까? 향로 있다. 불을 담았다. 그래서 불 담은 향로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불이 살아서 나를 다시 삼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지요. 이것은 비상식적이지요. 인간은 상식적으로만 해요. 한계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아는 이야기만 한다고요. 납득되는 것만 이야기한다고요. 하나님이 보기에 잘못은 뭐냐? ‘왜 납득되는 그것만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걸 문제 삼았던 겁니다.

이제 거룩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에요. 하나님께서 250명을 죽였지요. 죽고 난 뒤에 민수기 16장 37, 3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오늘 내용 중에 제일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명하여 붙는 불 가운데서 향로를 취하여다가 그 불을 타처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이게 뭐냐 하면, 거룩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깨끗한 게 거룩이 아니에요. 인간이 더럽다는 것을 하나님이 외부성으로, 이질적으로, 상식적이 아니고 특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행했던 그 증거가 거룩한 거예요. 너는 심판받아야 마땅함의 내용이 들어 있을 때 이걸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거룩한 거예요. 하나님의 피가 거룩한 겁니다. 하나님의 경건 생활이 거룩한 게 아니에요.

제가 아까 로마서 8장 10절 말씀 들었지요. 다시 하게 되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외부성이에요. 이것은 특이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들어 있는 거예요. 이것은 KBS, MBC 뉴스에 안 나옵니다. 윤석렬 욕한 것만 나오지 이런 것은 나오지도 않아요.

인간은 이미 죽었다. 인간은 거부하는 거예요. “상식적으로만 삽시다, 제발! 좀 특이하게 이야기하지 말고 상식적으로 해봅시다. 내가 뭐가 나쁩니까? 내가 뭐가 죄입니까? 아니 교회 오는 것이 죄입니까?” 누가 한 말인지 “교회 나오는 것도 죄입니까?”

어떤 분이 지난 금요일인가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 이번 주일에, 오늘이죠, 오늘, “신천지 교인 두 명 데리고 가도 됩니까?” 하는 거예요. 저에게 전화해서. 그 사람이 지금 뭐가 문제인가? 공간문제에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요, 그리고 어디에 가면 된다는 그 자체가 성립이 안 되고요.

왜냐? 주의 일은 특이성, 사건이니까요. 교회 백날 천 번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그게 교인 아니거든요. 공간성이 문제가 아니고 ‘이번 주일’이라는 그 시간성이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의 상식으로 설명되지를 않습니다. 이 특이성은. 그건 사건이에요. 무슨 사건? ‘아, 내가 죽은 것 맞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거예요.

읽어낼 수 없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특이성이에요. 읽어낼 수 없는 것을 읽어내는 거예요. 매사 모든 일을 통해서. 그게 특이성입니다. 그게 성도에요. 지금 노아의 함과 가나안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버지가 체신머리 없이 술 먹고 자식 앞에서 하체 다 드러내놓고 자고 있는 게 그게 뭐가 아버지다워요? 그래서 아버지 값을 못한다, 아버지가 이래서는 안 된다, 그게 왜 죄입니까, 그게! 그게 뭐가 저주받을 일이에요?

그게 저주받을 일이에요. 그게 저주받을 일이에요! 그렇게 평가할 잽이 못 된다는 것을 함과 가나안은 노아의 물심판 속에서 못 느꼈던 거예요. 물심판이 왜 있었습니까? 나는 입을 뻥긋할 자격도 없다는 것, 나는 이미 지옥 천 번을 가도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웬 선물인지 지옥에서 빼냈잖아요, 지옥에서!

그러면 군소리하지 말고 샷을 저쪽 것으로, 카메라가 보는 그쪽으로 같이 바라봐야지, 용암 분출하는 쪽을 바라봐야지요. 하나님이 일으킨 기정사실을 바라봐야지요. 내가 어떻게 단독적으로 인생 살겠다, 그런 것 바라보지 말고, 나는 너보다 잘났다, 못났다, 그런 것 보지 말고 저쪽을 바라봐야지. 그게 자기 한계를 벗어나잖아요. 그게 외부성입니다.

하나님의 피, 하나님이 피를 흘리다니요! 신은요, 하나님은 인간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참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을 매개로 할 때 진짜 하나님이 그제야 그제야 나타났어요, 그제야.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죽었다.’ 이게 하나님이잖아요.

어디서 부처 같은 신을 믿어요. 어디 가짜 예수를 들먹이고, 가짜 삼위일체를 거론합니까? 그것은 너무나 지식적이고 상식적인데요. 인간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인간이 자꾸 납득이 되니까 교회를, 감독 집사 장로 만들어서 그걸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정치적이고 행정적이에요. 그것은 교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가서 교회가 없어져요.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보면 유명한 일곱 교회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가 왜 일곱 교회냐 하면, “7이라는 숫자는 묵시적 용어로서 하늘나라에만 있고 이 지상에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그런 현상을 나타낸다. 하늘에 있는 완전한 일곱 교회는 지상에서는 마치 반딧불처럼 반짝반짝하는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기존교회가 있거든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고 어떤 교회 존재로 보지 말라.” 그게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의 특징이거든요.

그 예가 뭐냐? “일곱 교회 있냐?” “있습니다.” “없애도 내가 없앨게.” 있다가도 없어져 버린 교회, 일곱 교회입니다. 그 일곱 교회, 첫 번째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면서 7절에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랑이라 하는 것은 홀로 하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같이 있는 거지요. 사랑은 그쪽에서 원해서 함께 있을 때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낯선 사랑, 내가 원한 것이 아닌 특이한 사랑이 주어져요. 특이한 사랑.

보통 사랑은 뭐냐 하면, 내가 해준 만큼 저쪽에서 해줄 때, 해준 만큼 해줄 때 그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딜(deal)이지요. 거래지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남녀 서로 짝을 만들어주는 그 예능프로 있어요. <나는 솔로>라는 예능프로, 나이 42살 먹은 노총각이 하여튼 철딱서니도 없어요. 처음 만난 여자하고 데이트하면서 무슨 소리가 불쑥 나왔어요. “언제까지 그렇게 뻐기시겠습니까?” 저 발언은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을 한 거예요.

나이 42살 먹었으니 갔어요. 맛이 가버렸어요. 어떻게 여자를 대해야 되는지 그것도 몰라요. 해서는 안 될 말, “언제까지 그렇게 뻐기실 겁니까?” 나의 데이트신청 안 받아주고 내 사랑 안 받아주느냐, 그런 소리 한 건데, 사랑은 딜이에요. 그냥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챙기면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외부적인 거예요. 우리 인간 내부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 특이한 사랑이에요. 그냥 죄인을 받아주는 사랑이고 아무 내세울 것도 없는 것을 그냥 안아주는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어떻게 사랑받아서 천당 가려는 인간한테는 그런 주님의 편지가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해석을 못 해요.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뭘 해드리면 돼요? 헌금해 드릴까요, 교회 출석할까요?’ 자꾸 뭘 할 생각을 해요.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어서.

물론 이 세상에도 특이한 사랑에 대해서 언급한 노래 가사가 있어요. 이것은 내가 안 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특이한 가사에요.

언제라도 생각이 생각이 나거든
그 많은 그리움을 편지로 쓰세요
사연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으면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주세요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지금 숨이, 목이 막힙니다. 너무 은혜로워서 김태정이 불렀던 <백지로 보낸 편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 거예요

이게, 이게 말씀 아닙니까!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 거예요.” 퍼내도 퍼내도 계속 퍼내는. 어떤 경우를 비례로 동반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주께서 평생 살면서 체득하게 만들고 경험하게 만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거든 이렇게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이 일을 왜 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이렇게 답변하세요. “이것을 해도 무의미하고 저것을 해도 무의미하니까 그 무의미함, 무의미로운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합니다. 나의 무가치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합니다.” 바로 감독이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주보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어요. 【감독의 자격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그 중간에 보면 【인간이란 하늘의 것을 대변하는 자와 땅의 것만을 대변하는 자들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감독이 하는 것은 하늘의 것을 대변합니다. 인간의 말로 백지로 쓴 편지를 보내놓고 거기서 읽어내래요. 감독이 읽어내라는 겁니다. 복 받은 사람인지 저주받은 사람인지, 내가 백지로 쓴 편지를 보낼 테니까. 이 성경 말씀이지요, 성경 말씀은 백지에요,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글자 안다고, 한글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 외부적인 주님의, 하나님의 피로 쓴 편지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것밖에 이해 못 하는 인간으로서는 이것은 성경 자체가 한계입니다.

여기서 뭘 얻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요. 꼼꼼하게 읽어낸 사람이 있지요. 니고데모,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또 하려니 뭐하지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본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꼼꼼하게 거듭남을 풀이한 거예요. 꼼꼼하게.

꼼꼼하게 풀이한 결론이 뭐냐? “내 이 몸이 늙은 몸인데 어떻게 늙은 엄마 몸에서 다시 나올 수가 있습니까?” 이게 인간이 꼼꼼하게 성경을 대했던 증거입니다. 뭐 문자대로 7백 독했다고요? 꼼꼼하게 7백 독을 했겠지요. 주님 보시기에는 백지로 쓴 거예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만든 책이 성경책이에요.

이걸 30년 50년 들어 가지고, 신천지 두 사람 데려가도 됩니까, 다른 교회는 신천지 오지 말라고 문에 프린트해서 붙여놨는데 가도 됩니까, 하는데 그런 질문은 반칙입니다. 하면 안 돼요. 이미 온 우리도 다 신천지에요. 다 불신자인데요, 뭐. 다시 말해서 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것은, 내가 죽어도 무가치하게 죽고, 죽어도 의미 없게 죽어야 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성경 말씀 주신 거예요.

이 감독 된, 이 거룩이라는 것은 바로 그 심판에다가, 십자가지요, 심판에다 우리를 미리 담가버리고 사건을 통해서, 심판사건을 통해서 이걸 경유하게 만들고 거치게 만들 때 이미 우리는 거룩한 성도가 된 거예요. 거룩한 사람이 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께서 그런 일을 하신 거예요.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구원방식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께서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은 거예요.

이게 할렐루야, 아닙니까! 이상한 용어지만 내가 오랜만에 씁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행정적 정치적으로 생각한 내가 생각해놓은 구원방법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그걸 피해가 버린 거예요. 교회는 어제부로 없어졌어요. 오늘 모이면 주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였다 했잖아요. 두세 사람, 그게 얼마나 특이합니까? “온 사람 숫자 세 봐라.” “두 명인데요.” 주께서 “아니야. 세 명이야. 나를 왜 빼?” 지금 인간들, 우리 사람들은 자꾸 예수를 빼버려요.

동사무소, 요새 동사무소라 안 하고 주민센터라 하지요, 동사무소에서 나와서 인구조사합니다. “식구 몇 명입니까?” “네 명입니다.” 주님이 있다가 “왜 나는 빼는데? 다섯 명이잖아.” 우리는 모든 게 상식선에서 머물고 맙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요. 내가 내 인생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악마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지 말아야 되는데, 특히 새신자한테는 절대로 감독의 자격을 주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악마의 정죄가 뭐냐? 철저하게 땅의 요소밖에 없는 것, 외부적인 요소, 하나님의 피가 없는 거예요. 외부적인 요소는 없고 땅의 요소만 이리저리 뭉쳐서, 인간의 종교성만 이리저리 뭉쳐가지고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내는 것, 그 소속에 대해서 지금 사도바울은 문제 삼고 있는 거예요.

계속 민수기 그 대목 보면 이렇습니다. 그래서 제단이 거룩하거든요. 심판의 제단에 거룩한 것에 뭔가 부착이 되려면 같이 거룩한 요소가 되지 아니하면 부착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경유 했던, 그 250명이 들고 있던 그 향로를 두들기고 펴서, 편철을 만들어서 제단을 아예 싸버려라.” 이것은 ‘거룩으로 합류를 내가 허락하노라.’ 그런 뜻이에요. 죽은 자만이, 이미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었다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합류가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그러고 난 뒤에 그 일은 위쪽, 성막 있는데서 그 난리가 벌어졌거든요. 민수기 16장 41절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이 피해버렸으니까 위쪽의 그 상황을 몰랐는데 그런 사달이 벌어지고 난 뒤에 모세와 아론이 내려오니까, 이번에는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42절에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왜 치려고 했느냐 하면, 왜 같이 나왔던 그 250명 왜 죽이느냐, 그 250명 죽은 책임을 모세와 아론보고 책임지라고 달려든 거예요. 치려고 달려든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타났지요. 이것도 특이성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나서서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나서서 말리겠습니다.” 하고 급히 향로에 불을 담아서 속죄하러 나가는 그 순간부터 전염병이 펴져서 죽은 자가 얼마냐? 1만 4천 7백명이었다는 겁니다. 49절에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다고 1만 4천 7백명이 죽었습니다.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당신 이 지도자 되었는데 해놓은 업적이 뭐냐, 우리 죽이는 것밖에 더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정죄의 구역, 땅의 구역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생각의 한도, 상식의 한계가 그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유명한 지팡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있지요.

하나님의 택한 자를 보라, 해서 지팡이 들고 오라고 했고 열두 지팡이 중에서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맺혔다고 민수기 17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결정적인 것은 18장으로 넘어가면 나옵니다. 6절에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 형제 레위인을 취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이게 결정적입니다. 뭐냐하면 선물이에요. 우리의 성도 됨이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나는 성도 되어서 천국 간다.’ “아니야, 아니야. 네 소유물 아니야. 성도라는 직분이 네 소유물 아니야. 이것은 선물이야.”

이게 은혜입니다, 은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아는 이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은 복이에요. 이것은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이성이 나를 덮쳤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방금 제가 설교한 이 이야기가 여러분 공포스럽습니까, 아니면 감사합니까?

노아의 아버지가 벌거벗었을 때 함과 노아의 손자 가나안은 아버지의 허접스러움이 공포스러울까요, 아니면 감사할까요? 바로 샘과 야벳은 그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노아도 찬양했어요. ‘너에게 그걸 알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하리로다. 네가 바로 복받은 자로다.’

감추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무리 감추고 감춰도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왜 이 은혜를, 이 세상에서 이게 어떤 큰 선물인데 이 선물을 하찮게 여기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불평 없이, 내 인생에 짜증 내지 않고, 자기 인생에 자기가 흠집 내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의 성도로, 주님의 외부적인 것, 하나님의 피를 증거할 수 있는 직분을 주신 것을 감사하지요.

그래서 사도의 시대가 끝나고, 감독시대가 끝나고 공동체의 시대가 오게 되면, 성령을 받은 시대가 되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감독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감독이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 거예요. 요 감독을 해서 행정적인 체제를 갖추라고 감독이나 집사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 속에 이 감독의 역할과 집사의 역할, 다음 주에 집사가 나옵니다만, 집사의 역할 다 들어 있어요.

이 집사나 감독의 역할은 바로 악마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서 이미 벗어났음을 이 세상 남은 인생을 살면서 계속 확인해 가라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짜 가짜도 구분 못 하거든요. <히든싱어> 진짜 가수하고 가짜 가수가 노래 부르는데요. 어떤 때 보면 가짜 가수가 진짜 가수로 오인 되어서 최종 승리하는 경우도 있어요. 진짜 가수가 떨어졌어요, 진짜 가수가.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에 나와서 찰리 채플린이 3등 했다고요. 진짜라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서 내가 누구냐를 살펴볼 필요도 없는 성도가 진짜 성도에요. 주님의 기정사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사실만 쳐다보기 바빠서 내가 주섬주섬 내가 누구냐, 자기 체면과 위신과 그것 챙기는데 신경 안 써도 되는 그것이 진짜 성도입니다.

자율은요, 살기 위해서 뭔가 하는 그것을 자율이라 하고 자유는, 이미 내가 상복을 입어서 죽은 자가 되어서 더 이상 날 살필 필요도 없는 걸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감독은 자유자에요. 성도는 ‘자유자’지 ‘자율자’가 아닙니다. 자율의 반대는 자유고 자유의 반대는 자율입니다.

‘나도 성령 받았다. 스스로 한다.’ 이것은 고라 자손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네가 뭐 잘났나?’ 그런 것 하지 마시고요, 무엇을 내놓느냐, 무엇을 증거하느냐, 아무것도 아닌 자를 주께서 외부적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피로써 구원받은 그것만 내놓으시면서 성령의 공동체로 구성되는 것, 이게 주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는 성경 속에서도 주님의, 하나님의 피를 끄집어낼 수 있는, 읽어낼 수 있는 그런 성령 받은 성도되게 하옵소서. 더 이상 죽은 자로 머물지 말고 죽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기쁘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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