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집사
2022년 10월 9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3:8-13
(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그분은 누구일까요? 집사를 집사되게 하신 이는 누구입니까? 집사란 더는 자기만의 세계가 없이 상실된 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영향력으로 인해 자신의 몸 전체가 삼킴을 당한 자가 집사입니다. 자기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때, 일곱 집사가 공히 성령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이는 성령받지 아니하면 집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오늘날 시대에서 집사님이 보고 싶은 겁니다. 진짜 집사님이 그리운 겁니다. 집사직이 있게 된 것이 성령의 충만이라면(행 6:3) 이는 인간보다 먼저 계신 분에 의해서 벌어진 사태입니다. 먼저 계신 분이 놀지 않고 일하기에 집사도 일하는 겁니다.
집사란 ‘∼의 사람’입니다. 본인을 위한 일을 해서는 아니되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장악한 그분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해서된 자를 두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집사 아닌 자’가 누구냐를 통해서도 밝혀질 수가 있습니다.
‘집사 아닌 자’의 특징은 자기 것을 때로 생각해두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을 늘 따로 챙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기 위해 필생에 걸쳐 사투를 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미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성령에 의해서 이미 하나님의 집사가 되어 버린 사람은 더는 사람의 종이 될 수가 없습니다.
“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2-23) 이처럼 신약의 성령받은 집사가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에스겔에서 예언한 새성전이 기존의 성전체제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성전을 부수는데 있어 하늘의 보좌가 작용이 시작점이었습니다. 에스겔 1장에서 나오는 보좌는 윗 보좌와 아랫 보좌, 이렇게 이중 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아랫 보좌가 하는 일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불태우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심판하고 나면 남은 형식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보좌에서 비쳐나온 ‘하나님의 형상’만 지상에 개입되게 됩니다. 즉 ‘형식’이 아니라 ‘형상’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형식을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태는 신약에 와서 무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전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2:19-22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유대인과 예수님과 대화하시는 이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겠습니까? 형식이 사라짐에 우리는 공포를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 현장에 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되고 난 뒤에 비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곧 새성전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으로 현재화합니다. 집사는 인간이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보좌 안에 있는 기능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던 그 모든 형식들에 대해서 에스겔 1장 보좌에 있던 천사들은 여지없이 다 부정하고 파괴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 집사를 통해서 이어집니다.
스데반집사도 성전의 형식에 대해서 사정없이 공격했습니다. “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8-50)
빌립 집사도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대리 희생자’로부터 출발해서 성경 전반을 다 풀이해주었습니다. (행 8:32-34) 이처럼 새성전, 곧 교회란 성령으로만 구성될 뿐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앱 2:21-22)
이처럼 ‘먼저 있음’으로 인한 파생된 직분이 집사입니다. 사람이 먼저 있고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계심으로 그다음으로 인간은 요청받는 대상이 된 겁니다. 즉 ‘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자들의 등장은 곧 먼저 주시는 분이 계심으로서 천국이 이루어짐을 말씀하는 겁니다. ‘먼저 있음’이라는 순서에 눈을 뜬 자들이 집사입니다. 즉 ‘내가 먼저 있음’이 그 어떤 경우라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각종 혜택과 후원을 입어 왔습니다.
그것 가지고 그동안 무엇들 했습니까? 자기 자랑과 자기 잘남과 자기 존재성을 공고히 하는데 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를 위해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를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말합니다. (마 25:26) 비록 주인이 눈에 보이는 현장에 없더라도 늘 ‘거기 먼저 계십니다’
이런 면을 아는 자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와서 주었던 것도 도로 뺐습니다. “너는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즉 자신을 위해 늘 분주하게 사는 자들은 하늘 나라에서 볼 때에 집사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게으른 자로 규정받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집사될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누구를 집사되게 하시면서 그동안 그가 깔고 앉은 자리를 보게 합니다. 거기에는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오로지 자신만 위해 살도록 부추긴 흔적만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잡다함 속에서 ‘먼저 계신 분’의 뽑아줌만이 특출하게 돋보이는 삶이 집사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형식이 나로 하여금 그 안에 내 것을 따로 갖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13강-디모데전서 3장 8-13절(집사)22100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 8-13절입니다.
디모데전서 3:8-13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오늘 읽었던 본문에 집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집사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분에서 종속되어서 더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는 자가 집사라고 합니다. 집사는 집사로 평생 살면서 ‘아니오’라는 말을 그분 앞에서는 하지 않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내 인생이 따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그분에 대해서 ‘못합니다, 안 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집사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 어떤 분에게 종속되어 있어서 그동안 모든 문제가, 자기에게 있는 모든 문제가 근원적으로 이미 해소된 사람이 집사입니다. 누구의 집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던 모든 것보다 더 능가하는 새로운 분을 만났다는 것을 몸을 통해서 발산해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집사지요.
저는 집사라고 하면 언뜻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가야산 호텔이 있거든요. 가야산 호텔, 우리가 수련회를 하는 그 호텔은 대순진리회 소속입니다. 그 호텔 식당에서 일하는 키 큰 아저씨, 벌써 우리는 수련회에서 십수 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딱 타입이 집사타입이에요. 자기주장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자기주장, 자기 고집, 이런 것이 전무하고 전혀 없는 사람, ‘나는 ……에게 소유되어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 그대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집사라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어떻게 배알도 없고 자기주장도 없고 왜 그래?’ 딱 집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사라는 것, 집사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자기 인생이 따로 있기 때문에. 누구한테 매여 산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집사가 뭐냐, 라고 하게 될 때에 집사의 반대말이 뭐냐를 생각하면 집사가 후딱 떠오르지요. 집사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자기 것을 따로 챙기는 사람,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필생의 투쟁을 벌이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흥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인생 즐거움, 자기 흥미에 빠져 있는 사람, 요거 집사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결국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집사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감독이야기 했지만, 감독이 없는 것처럼 집사도 없어요. 여러분, 교회 집사는 잊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자체도 없기 때문에 집사도 없는 거예요. 괜히 교회에서 집사, 집사, 해가지고 집사에 대해서 혼란이 일어나고 혼동이 일어나 버린 겁니다.
집사도 아닌데, 자기 맘대로 사는데 그게 무슨 집사예요? 실례지만 누구 집사입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내 맘대로 사는데, 내가 누구한테 종속되어 사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함부로 나를 모독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분명히 내 주인이 나고, 나는 내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데 내가 누구한테 매여 산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주보 앞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초대교회는 성령을 입은 일곱 집사들을 세웠고 특히 스데반 집사가 유명합니다. 오는날 바로 문제가 되는 대목이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주셨다는 겁니다. 특히 ‘누구에게는 아니 주셨다’는 게 심각성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시작이 뭐냐?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일곱 집사라고 되어 있습니다(행 6:3). 성령 받지 않으면 집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성령 받았다는 말은 하늘에 있는 영향력이 내 몸을 완전히 삼켜버린 상태, 그래서 더 이상 자기 것이 없는 사람, 이게 집사예요.
어제 서울의 한강에서 불꽃놀이 했거든요. 집에서 취미로 불꽃놀이 하는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1년에 한 번씩이나 할 때 불꽃놀이 구경 갑니다. 왜? 1년에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희귀한 현상이지요. 하늘이 막 번쩍번쩍하지요. 집사가 그런 겁니다.
집사라는 것은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요. 꼭 1년에 한 번씩 하는 불꽃놀이 같아요. 집사 있으면 우리 구경하러 갑시다. 왜냐하면 인간은 집사가 될 수가 없어요. 무슨 자존심도 없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무슨 자존심도 없이 누구누구의 종이 되어서 살아간다는 이게 현대인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교회 집사는 전부 다 가짜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성령 받은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여러분에게 해당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고린도전서 7장 22, 23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여기에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왜?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네 자유를 만끽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미 하나님의 집사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종이 된 처지에서 주인이 둘 될 수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데 거기 어디에 또 사람의 종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습니까? 없지요.
사람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 고린도전서 7장 방금 본 22, 23절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고. 남편들이 아내의 종이 되지 말라, 그런 뜻이지요. 아내는 남편의 종이 되지 말고. 그걸 좀 확대시키면 부모는 자식의 종이 되지 말고, 자식은 부모의 종이 되지 말고. 왜? 너는 하나님의 집사니까. 이미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 되는 순간 그때부터는 사람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자유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집사가 되면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그 자유를 만끽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유가 뭐냐? 그게 로마서 6장 19, 20절에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중요하기 때문에 한 번 더 읽습니다. 20절에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에 자유가 나와요. 네가 세상 사람이 되어서, 세상의, 세상 사람의 종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밥 먹고 사느냐, 그저 돈 있는 사람, 가진 사람, 배운 사람의 종이 되었고 교회 오면 목사의 종이 되고, 장로의 종이 되고, 또는 목사는 교인들의 종이 되어서 어떻게 잘 보여서 한 자리에 오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살아온 것, 그게 바로 사람의 종이 되거든요. 사람과의 관계로 엮여 있다, 그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그때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내가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아이고, 손님! 오셨습니까.” 뭐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럴 때 성경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네가 너한테 지금 종속되어 있다. 너는 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잖아. 너라는 인간에 너는 종이 되어 있어. 너라는 인간에 너는 종이 되어 있다고!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집사냐 모습이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생 남의 눈치 보고 사는데 그게 무슨 하나님의 집사예요? 누구 집사 있으면 좀 이야기해주세요. 불꽃놀이처럼 구경하듯이 좀 구경하고 싶어. 전부 다 사람 눈치 보고 살아가거든요. 가족 눈치 보고 살아가고 있고. 집사란 말이 어디 거기에 해당이 되겠어요?
“내가 종이 되었을 때는 의에 대해서 자유했다.”는 말이 여러분 좋게 들리시면 안 됩니다. 자유했다는 말은, ‘그런 게 있었나?’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 그런 게 있었어?’ 그러니 관계가 끊어진 상태, 관심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사도바울은 이야기했어요. “네가 죄의 종이었을 때, 사람의 종이었을 때 언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었냐, 이 인간들아!” 이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신경을 나와 내 가족과 내 밥 먹고 사는데 신경 쓰다 보니 네가 언제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느냐?’ 이 말, 그 표현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네가 죄의 종이었을 때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에 대해서 너는 무관심했다, 끊어졌다, 줄 끊긴 연(鳶)꼴이 되었다, 관계가 끊어졌다, 그걸 가지고 자유라고 한 거예요. 하늘나라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온 것을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그랬던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었으니까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거예요. “죄가 뭐예요? 죄가 뭔지 나 모르겠는데요?” 죄로부터, 이제 죄에 관심이 없어요. 이제 세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집사입니다.
그래서 이게 주보 초반에 나오지만,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를 세웠다는 것은 이것은 아주 특이한 현상이에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일이 아닙니다.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 집사들이 초대교회 때 한 게 뭐냐? 이거 초반부터 꼭 알아야 돼요. 집사가 한 게 뭐냐 하면, 교회를 부정하는 거예요. 교회 모든 형식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만약 우리 교회 집사 한 명이라도 있으면 우리교회 형식 다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형식이란 인간이 자기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한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형식들을 끌어모아서 ‘나 이렇게 믿음 있습니다’ 과시하기 위해서, 나 11시 예배 참석하고요, 오후 2시도 참석하고요, 뭐 봉사하고요, 헌금도 하고요, 1년에 두번씩 전도도 하고요, 이게 전부 다 형식이거든요. 나는 집사가 되어서 목사 섬기고요, 이게 전부 다 형식이에요.
이것을 깨지 아니하면 이것은 자기로부터 못 벗어난 사람이에요. 자기를 벗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집사라 하는 것은 오늘부로 인생을 끝내고 싶은 사람, 나 더 이상 살 필요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의의 종이고 사람의 종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인생을 끝내도 상관없는 이유가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후원해줬던 그 모든 후원,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나 구축하는데 다 허비하고 거기에 다 끌어모았잖아요. 하나님은 집사로서 일하라고 그동안 이만큼 키워줬고 살려줬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은혜를 뭘 구축하는 데 다 소비했는가? 내가 잘난 나 만들기 위해서 거기에 다 끌어모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없지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인간을 오늘부로 끝내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하나님이 평생 주신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잘난 체 하는 것으로 다 허비했는데 이런 인간이 어디 쓰잘데가 있겠어요?
어떤 분이 가족 모임이 있는데 오랜만에 모여서 한 수십 년 만에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자기가 옛날에 몰몬교에 빠졌다 하는 그 이야기를, 지금은 안 다니지만 다녔던 적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거기에 참석했던 대구 시내 유명한 권사님들 모여서 공격을 해댄 거예요. “어째서 그런 몰몬교에 빠지느냐? 거기서 나오라.” 빨리 나오라고, 기존교회에 가야지 왜 몰몬교회에 빠지느냐고 막 해댔어요.
몰몬교라 하는 것은 “한 뚝배기 하실래예?” 하고 광고하는 그 사람 다닌 교회, 그게 몰몬교에요. 로버트 할리인가 그 사람 다닌 교회가 몰몬교인데 참 그 이야기 듣고 속이 천불 났지요. 몰몬교에서 나오지 말고 너 자신에서부터 나와, 너 나자신에서부터! 내가 속해 있는 그곳이 이단이에요. 그것을 늘 눈치채는 그게 하늘나라 집사입니다. 교회 집사 되어서 교회에 충성하는 것, 그게 바로 이단이잖아요. 그게 몰몬교와 차이점이 뭡니까? 그게 몰몬교고 그게 신천지지요.
하루 온종일 생각하는 전체가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 생각합니까? 자기 것 따로 챙기고 누구한테 종속되지 않기,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기, 이게 필생이 투쟁의 목표였잖아요. 이게 누구 집사예요, 이게? 이게 자기 집사지 무슨 하나님의 집사입니까? 자기라는 인간의 종이된 채 자기가 명령하고 자기가 그 명령 지시에 따르는 것, 이게 바로 오늘날 교회잖아요. 이게 바로 이단이지 뭐가 이단이겠어요?
성령 받은 일곱 집사, 특히 스데반 집사, 빌립집사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사도행전에서 모든 형식을 다 부숴버린 거예요, 모든 형식을. 스데반집사같은 경우에 “성전? 성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예수님이 성전이다.” 그 이야기 해가지고 죽은 사람이 스데반집사 집사에요, 집사!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8-50)
그리고 빌립집사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서, 얼마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에 어떻게 들어가서 어떻게 빠져나오는가를 이야기한 거예요.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2-35)
곧, “이사야에 나오는 우리는 양 같아서 다 제 갈 길로 갔거늘 어떤 분을 보내서 우리 무리의 죄를 우리는 도망쳤는데 도망친자의 죄를 한분에게 쏟았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구십니까?” 물으니까 빌립 집사가 성경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아니다 아직 그때는 요한계시록이 없었구나, 창세기부터 해서 모든 성경을 전부 다 그로부터 해서 모든 성경을 다 풀이해줬다 하는 거예요. 이게 집사 역할이에요, 이게 집사 역할.
거기에 무슨 교회 조직이 있고, 제직회 2/3찬성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게? 장로는 몇 표 받아야 되고 몇 년 해야 권사가 되고 이런 형식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일곱 집사가 교회 형식에 맞춰서 일곱 집사 되었습니까? 성령으로 집사 되었어요, 성령으로! 이것은 사람의 종, 기존의 조직의 종, 교회 조직의 종이 아닙니다. 그런 집사를 보고 싶어요, 정말! 그런 집사를.
교회를 개무시하는 집사 보고 싶어요. 목사 시키는 대로 예, 예, 따라 하는 그런 집사는 꼴도 보기 싫어요. 교회 와서는 목사한테는 예, 예, 해놓고 밖에 나가서는 또 자기 맘대로 살고. 왜 성경에서 이 신약에 온 교회가 모든 형식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형식 대신에 형상을 집어넣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이 어려워요. 형식 대신에 형상을 집어넣어요. 그 형상은 하늘의 형상입니다. 형상에 대해서 에스겔 1장에 보면 거기에 형상에 대해서 잘 나와 있는데 형상이 어디서 출발하는가? 보좌가 두 개 있어요. 윗 보좌가 있고 아래에 보좌가 이중적으로 되어 있어요. 위에 있고 아래에 있고 겹쳐져 있어요.
위쪽 보좌는 하나님 쪽이고요, 하나님의 형상, 아래쪽 보좌는 예수님의 모습, 기능을 보여주는 보좌가 따로 있어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성경을 찾아보게 되면, 에스겔 1장 5절에 보면, 에스겔이 계시받고 하늘의 보좌를 보고 있는데 그 속에 네 형상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아래쪽에 있는 형상 전체가 사람형상으로 되어 있어요. 그 사람형상과 그다음에 1장 26절에 보면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사람의 모양이 또 거기에 있어요.
아래쪽은 요란스러워요. 번개 치고요, 위쪽은 무지개가 있어서 조용해요.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보좌가 이중적으로 되어서 아래쪽 보좌가 기존의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다 심판해버리고 없애버립니다. 에스겔 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심판하는 기능이 아래쪽 보좌에서 이루어져요.
거기에 왜 있느냐? 거기에 성전이 있거든요. 기존의 성전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래쪽 네 명의 천사와 더불어 그 천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전체가 사람 형상으로 지시를 내리는 그 양상이에요, 그게. 네 명의 천사 사이에, 20절에 보면, 그 생물 사이에 하나님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어서 생물이 지시대로 곧이곧대로 움직여요.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이 보좌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이 밑 아래쪽 활동성이 있는 이 천사의 기능이 곧 지금 집사의 기능입니다. 성령 받은 집사의 기능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집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믿음의 비밀이라고 했거든요. 그리스도의 믿음, 믿음의 비밀,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여기 9절에 보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믿음의 비밀이 뭐냐? 이것은 바로 성령이 올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속성 또는 연장성이 하나의 인물 속에서 그냥 주어지는 거예요. 그냥 이야기 계속 해 나가겠습니다. 성전이 부서지고 불타버려요. 아래쪽 보좌의 천사의 기능에 의해서.
그러면 성전이 깨지면 여기에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지거든요. 성전이 만들어지면서 성전의 형식은 깨지지만 본 내용은 계속해서 바통 이어받듯이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전의 바통 이어지는 그 내용이 처음의 성전 솔로몬 성전 때 열왕기상 7장 21절에 나옵니다.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야긴’이란 뜻은 저가 세우리라. 그다음에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성소에 두 기둥이 있고 그 기둥 사이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인물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거룩한 공간에. 그렇게 되려면 이 성전이 뭐로 바뀌어져야 되느냐 하면, 성전이 인격화되어야 돼요. 성전을 규정하던 규정들이, 요건들이, 형식이 탈피되고 하나의 인격으로 전환되면서 성전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때 인물로 형성할 때에 하나님의 형상, 보좌에 있던 형상이 거기다 기입이 되는 거예요. 쏘옥 들어오는 거예요. 형상이.
그러니까 형상 들어오고, 형식은 날아 가버리고, 집사의 기능은 있고 인간들이 세운 모든 제도의 집사는 날아가 버리고, 집사, 목사 제도 다 날아가 버리고 오직 기능만 있는 거예요. 성령님께서 하신 기능만. 아래쪽 보좌가 하는 일을 계속 해 나가는 겁니다. 그래야 성전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에베소서 보면 새로운 성전이 뭐냐? 2장 18절에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해놓고 21, 22절에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새성전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각자의 기능을 통해서 하나의 성전으로 구체화되어 진다. 이 기능이 집사기능이에요. 그러면, 집사 기능이 되려면 성령이 오시게 되는데 그러면 지난번에 했던 감독 감독하고 집사의 차이점이 뭐냐? 감독은 지난 시간에 했지만, 하늘과 땅의 연결점, 저는 그걸 이음새라 하고 싶어요, 이음새, 그 이음새가 하나님의 피로 성령께서 감독자로 세웠다고 했거든요.
감독자의 기능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피로 성전이 되어진다는 것을 감독하는 사람이 감독자예요. 하나님의 피, 인간의 노동은 없습니다. 인간이 행함은 없어요. 예수님의 행함으로만 천국 백성 된다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이 감독이에요. 감독역할.
그러면 그 역할 같으면 집사도 할 수 있는데 집사는 그 역할 말고 무슨 역할이 있느냐? 집사는 잡다함입니다. 감독이 그 역할을 한다면 집사는 모든 각종 자기의 직장, 사회 전반에 나가서 그들이 만나는 그 현장 속에서 ‘왜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로만 우리가 거룩함을 얻고 구원받는지’ 그걸 실제로 체험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걸 체험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 이음새에서 나왔던 그 하나님의 피가, 영향력이 집사의 몸 전부를 삼켜버려고 집사로 하여금 직장이나 각기 여러 고장에서 누굴 만나느냐? 세상과 접하고 만나게 되어 있어요. 세상을 만나면서 그 모든 것이 한곳으로 취합이 되는데 어디로 취합되는가? 바로 감독이 외쳤던 그 이음새,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그 이음새 거기에 모이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하나의 응집력이 작용하고 있는데요, 이점을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그 달란트 비유라 하는 것이 있잖아요. 그 달란트 비유가 그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떠나면서 직원들 세 명에게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 또 한 사람은 두 달란트, 나머지 한 사람은 한 달란트 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일 열심히 해라.” 그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이 본문이 천국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예요. 천국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이 땅에서 천국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첫 번째가 뭐냐?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을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달란트를 줬으니까 주지 아니하면 받을 수 없고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도로 빼앗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것을 주지 않으면 없다는 말은, 천국은 이미 거기 있다는 거예요. 집사를 받는 게 아니에요. 집사는 거기 있는 거예요.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한 게 아니고 예수님은 이미 거기에 있었고, 마리아가 예수님 있는 곳에 합류된 거지요. 집사라는 기능은 이미 있어요. 그런데 집사된 사람은 그 기능에 합류된 사람이에요. 내게 아니라니까!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집사 따려고 애쓴 게 아니에요. 집사가 와서 만남이 이루어진 거예요. 집사 기능이! 감독도 마찬가지고 어느 것도 내가 나서서 쟁취하는 게 없어요.
여러분이 이점을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을 알면 오늘 설교는 아주 쉽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보고 제자들이 “와~!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자랑질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1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바리새인들이 성전 가지고 뭐라고 시비 거니까 “네가 뭔데? 내가 뭔지 표적을 한번 보여줘? 이 성전 헐어버려.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했어요. 그 때 제자들도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물론 바리새인들도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현장에 오늘날 우리들이 있었다면 우리도 무슨 뜻인지를 모를 거예요.
자, 예를 들어봅시다. 한 46년 동안 지은 어떤 교회 건물이 있다 칩시다. 46년 동안. 이게 뭐 범어교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있다고 칩시다. 46년 동안 지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교회 이게 교회냐?” 나오니까 당회장 목사 내려와서 하는 소리가, 40대 당회장이 쫓아 내려와서 하는 소리가 “네가 뭔데, 우리 교회 전통이 46년인데 네가 뭔데 이 짓 하느냐?”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거 헐어버려! 내 사흘 만에 지어줄 게.”라고 했을 때 그 현장에 저와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걸 어떻게 납득하고 이해하겠습니까? 5초 드립니다. 이해하는 방법.
“이거 뭐야, 이 인간, 이거!” 멱살 쥐고 뭐라고 하겠어요? “너만 신자야? 너만 참된 믿는 자야?” 이렇게 나올 거에요. 백프로에요, 백프로. “네가 뭔데 46년 된 이 전통을 모독해? 이 교회 짓는다고 많은 장로들이 집 팔고 전세로 옮기고, 그래서 이 예배당 땅 샀다. 그래서 이 교회가 이 대구 도성에……” 도성이에요 도성, “이 도성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네가 뭔데? 범어교회 출신이 뭐 한두명이야? 다 우리나라 유능한 사람들 되어서 큰일 다 했다.” 나올 거잖아요.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도 역시 형상에 속하지 못하고 형식에 속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하고 똑같은 인간 밖에 안 돼요. 주님 하신 말씀을 제자들도 이해 못 했어요. 나중에 제자들이 부활하고 난 뒤에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고 난 뒤에 있던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구나.’ 비로소 그때 눈치 챈거지요. ‘아, 이 교회라는 것이 형식을 깨야 비로소 보이는 게 교회구나. 형식이 깨져야 비로소 형상이 되는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구나.’
그동안 수십 년 교회, 몇십 년 교회, 목사는 누구고 부목사는 누구고 전도사는 몇 명, 전부 다 형식으로만 이해했던, 형상이 아니고 형식으로만 이해했던 그 교회, 그 교회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야 돼요. 벗어나야 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줬기 때문에, 이미 주님이 갖고 있던 걸 줬기 때문에 비로소 발생 된 거예요.
그다음 사건들, 주께서 있지 아니하면, 주께서 여기 계시지 아니하면 벌어지지 않는 사건을 달란트 비유는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주인이요, 주인이 달란트 주고 멀리 출장 안 갔으면 그 회사 직원은 몇 명이냐? 세 명입니다. 그리고 그 직원들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인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달란트 주고 그 현장을 빠짐으로 말미암아 그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본인이 하나의 집사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인님이 여기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에요.
그런데 한 달란트는 주인이 빠지니까 ‘얼씨구나 좋다. 아, 이제 좀 숨을 쉬겠네. 주인이 있어서 내가 나다움을 발휘를 못 했는데 주인 빠지고 나니 비로소 나는 나를 찾았네.’ 이러고 있는 자가 한 달란트에요. 주인이 찾아와서 나중에 하는 말이 “내가 준 것 도로 내놔라. 너는 받을 잽이 못 돼. 받을 자격도 못 돼. 내놔. 너는 있음이 아니야. 너는 있음을 네가 가질 자격이 없어.” 내가 너한테 주는 것은 집사 되라고, 일하라고 주는 거예요. 그때 책망하면서 주인이 하는 말이 있어요. “이 게으른 자여”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 나와요. 26절에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자,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게으른 사람이 과연 게을렀겠어요? 요새 김건희 문제 크지요? 이준석, 국민의 힘, 거기에 매진하는 사람 게으릅니까? 나름 바빠요. 바쁜데 주님 보시기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런 세상적인 것, 그걸 누굴 위해서 그렇게 분주하고 바빴느냐.
아까 이야기했던 것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누구의 집사가 되는 것은 자신이 흥미를 능가할 만한 분을 만났다는 뜻이에요. 자신의 흥미를 능가하는 분을 만났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특징을 가진 그러한 특수성이 본인 안에서 그게 일어난 거예요. 나의 모든 것을 능가하는 다른 특수성이 내 안에 발생된 거예요.
그래서 그 특수성의 집사가 되고 특수성의 종이 되어버린 겁니다. 만약에 그 특수성이 없이 그냥 교회 나와버리면 일요일에 교회 나오고, 월요일에 딴짓하고, 화요일에 딴짓하고, 이렇게 되어버려요. 마치 팔레트에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녹색 물감이 짜여 있듯이 또는 통지표에 국어, 영어, 수학, 자연, 체육, 이렇게 있듯이 균등하게 모든 과목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가지고 오늘은 이거 하고, 내일은 이거 하고, 모레는 이거 하고, 자기가 자기의 종이 되고 주인이 되어서 자기 스케줄을 자기가 짜요. 이건 특수성이 없는 겁니다.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라는 작곡가가 있어요. 클래식 작곡가가 있는데 그사람이 transcendante, 초절기교라는 열두개의 연습곡을 썼어요. 피아노 치는 사람치고 아주 난해한 곡인데 그래서 이름도 초절이에요, 초절, 초절기교연습곡(超絶技巧 練習曲, É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그걸 우리나라 임윤찬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쳤는데 그 두 번째 étude가 뭐냐 하면, 트럼펫 소리와 목관악기 소리가 나는 식으로 작곡되어 있어요. 그곡이 왜 유명하냐 하면, 피아노가 여러 오케스트라 중에 하나가 아니라 피아노 하나를 가지고 오케스트라 전부를 초절, 뛰어넘는 곡, 피아노 하나 속에 모든 오케스트라를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쓴 곡이 바로 리스트의 초절기교, 그 곡이에요.
주님께서 어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아담으로 태어나서 너나 나나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누구누구의 집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특수성,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 못 하게 만드는 다른 초월적인 것이 들어왔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더는 자기만의 세계가 없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리스도의 성령 받은 사람은 더는 이제부터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 말이에요. 사람의 얽매일 필요가 없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 본인이지요. 더이상 본인의 종이 아니에요. 나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게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의 말씀처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뭐가 없느냐 하면, 자기 교회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초월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주를 위해서 살아야지 왜 자기 교회를 위해서 삽니까? 그런 것은 목사만 요구하는 거예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겁니다. 그것은 목사 너나 잘하세요. 자기가 성령 못 받으니 남들도 성령 못 받아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버리거든요. 성령 못 받은 사람은 꼭 티가 나요. 둘 다 성령 못 받아가지고 그저 계급으로 억누르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달란트 비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주인은 거기 있어요. 주인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종이 있는 거예요. 내가 먼저 이 땅에 있는 게 아니고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신 거예요. 이거 알면 집사입니다. 이거 알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참 쉽죠. 참 쉽지요.
내 아버지보다 주님이 먼저 계시고, 내 자식보다 주님이 먼저 계신 것을 아는 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 땅에 없어져도 괜찮아요.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그만큼, 이 땅에서 살 만큼 후원해줬습니다.
그 후원을 해줬는데 하나님이 후원해 준들 뭐합니까? 나라는 인간이 아담의 속성을 닮아서, 그 성질을 닮아서 나밖에 모르니까 전부 다 나 잘난 맛에 다 빼돌린 거예요. 그 귀한 것을 주를 위해 살라 하는데 나 이만큼 잘났다, 평생 나 이만큼 대단하다, 그것 자랑질한다고 평생을 다 허비한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는 식으로.
여기서 뭐가 있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보다 먼저 있다는 것은 나중에, 후에 생긴 사람에게 먼저 계신 분이 뭘 요구하느냐 하면 “너 상 받을래, 맞을래?” 이걸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상 받을래……, 하는 것은 “너 천국 갈래, 안 그러면 맞을래?(지옥 갈래?)” 그걸 먼저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에게 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나중 생긴 것이 먼저 생긴 나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하신 겁니다. 피조물 인간이 천국 가겠다는 이야기를, 그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려요. 천국은 주께서 넣어줘야 가는 것이지 내가 천국 가겠다고 원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걸 누가 알았는가? 스데반집사, 빌립집사가 안 거예요. 어느 정도로 알았는가? 그까짓 거 목숨 내놔도 괜찮을 정도로 알아버린 거예요. 진실, 진리를 알아버린 거예요. 진짜를 알아버린 거예요. 나보다 그분이 먼저 있고 그분이 나를 종으로 삼았다는그 점을 알아버린 거예요. 그걸 의의 종이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이 교회라는 곳이! 위로받으려고 오는 거예요. 사는 게 힘드니까. “하나님, 뭐합니까? 날 좀 위로해주소.” 그거 받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리고 죽어서 천당 보내 달라. 이거 완전히 요청하는 거, 이것은 완전히 그 순서의 선후가 바뀌었어요. 누가 종인지 누가 주인인지 구분도 안 돼. 지금 이 교회가!
“주께서 불러주셨습니다.” 이 한마디 하면 될 걸 가지고 “내가 왔으니 복 주소.” 복 달라는 거예요. 땡깡 쓰는 겁니까? 뭐 1인시위 하는 거예요, 뭐예요, 그게! 어느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빼놓고 어느 인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어느 인간도 교회가 될 성전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러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백퍼센트 주님의 지시고 명령입니다. 주님의 지시와 명령은 내가 나한테 내리는 지시와 명령을 개무시해 버려요. 그게 즐겁지 않습니까? 이게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한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에게 철저히 무시당한다는 게 이것은 얼~마나, 이것은 그렇게 발견하고자 했던, 그렇게 찾고자 했던 진리 그 자체 아닙니까, 그게!
왜 그동안 진리를 왜 몰랐는가? 내가 찾으려고 하니까 안된 거예요. 내가 나한테 입 맞에 맞는, 내가 나 잘되는 쪽으로,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쪽으로 자꾸 진리를 발견하려 하니까 진리가 발견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내 욕심이었거든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내 욕심이었거든요. 이 욕심쟁이가 뭘 해도 욕심이고 죄가 되지 그게 어떻게 자기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성도 입장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온 셈입니다. 이거 뭐 나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고함지른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이미 주님한테 후원을 많이 받아 왔어요. 받아 왔는데, 어릴 때부터 햇빛과 공기 많이 받아 왔는데 그걸 뭐 하는데 다 소비했는지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누구 좋으라고 그걸 허비했는지.
그렇게 해서 맺어진 결과물이 뭔지를 한번 돌아보세요. 주님은 주님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줬는데 그게 어느새 어느 날부터 내 것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박살 나야지요, 당연히. 그런데 왜 우리가 그동안 버티고 있는가?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해요. 그러면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마귀하고 상대하거든요. 마귀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벌이는데 물론 그것도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벌이지요. 그 일이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접근 못 하도록 그렇게 일을 벌여 온 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너한테 이익이 될까, 너한테 손해가 될까, 그것만 생각하도록 마귀가 자꾸 그런 식으로 우리를 현혹시켜 온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옴팍 빠졌고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 이유가, 주님의 개입 아니면 우리가 천국 갈 수 없는 이유가 그동안 우리에게 친근했던 그 짝들이 있고, 인생 살아온 그러한 습관 버릇 같은 것이 있어요. 나만 잘되면 만사가 행복하다. 그 원칙에서 우리는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오늘 본문 봅시다. 본문 보시면 이해 됩니다. 8절부터 봅시다.
1. 집사들도 단정하고
2.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3.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4.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5. 깨끗한 양심에
여기까지 다섯 개지요. 그다음 11절에 여자 집사, 들어갑니다.
1.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2. 참소하지 말며, 곧 여자들 뒷담화하지 않고요, 그다음에
3. 절제하며
4.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이게 여자 집사예요. 여러분, 이래서 인생 살맛 납니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살면 그렇게 재미가 나던가요? 이 땅의 삶은요, 남을 씹는 맛이에요. 롯데껌이라니까요, 씹는 맛에 살아요. 인간은 뒷담화 하는 맛에 살고 “이준석이 말이야……” 이 씹는 맛에 살아요, 씹는 맛에. “김건희 이거……” 이 씹는 맛, 논문표절 그거 씹는 맛에 산다니까요.
사람이 하나의 자기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나의 적을 만들어서 적을 씹음으로써, 인생사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고 겨우겨우 하루 버티는 아이디어입니다. 어디 신천지를 씹어봐야 우리 교회가 정당한지를 아는 것이 기존교회가 하는 짓거리에요. 지나 개나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한 주제에 누구 욕해요? 몰몬교에서 나가라고? 너부터 나가, 너부터, 너에서 빠져나가라. 몰몬교에서 빠져나가지 말고.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여러분은 술맛 본적도 없지요. 술맛에 들린 사람은 반주라는 것이 있어서 조금씩이라도 먹어야 되는데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술이고, 남들 씹고 비난하고 남 험담하고 질투하고, 이 세상에 대해서 다 남 탓이고 나라 꼴이 어떻고, 윤석열 대통령 탓이고…… 이래야 내가 숨을 쉬어요.
이게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집사? 집사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집사가 있어요, 이 땅에? 없어요. 이대로 사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은 이렇게 해요.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올 때 집사로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옵니다. 종으로 와서 딱 집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내가 집사로 이렇게 살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고요, 이걸 보고 누가 집사 되려고 해요? 집사라도 거부하고 싶지요. 집사라도 사임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집사, 하나님의 종으로 딱 집어버려요. 딱 집고 딱 떼어내서 집고, 집사 되고 난 뒤에 내가 전에 살았던 내 존재의 방석 있잖아요, 그 자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돌아보니까 이 본문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이 거기에 꿈틀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바로 네가 이렇게 살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고, 이렇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을 기겁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 어떻게 사는가? 이렇게 하면 되지요.
“집사들은 단정하지 않기를 원하고, 일구이언이 아니고 일구백언을 하고, 술이라면 환장을 하고, 더러운 이(利)에 대해서는 미쳐버리고, 깨끗한 양심은 이미 갖다 줘버리고, 믿음의 비밀……” 이것은 건너뜁시다. 이것은 근처도 안 갔으니 11절에 “여자들은 단정한데, 바깥에서는 단정하듯 하지만 집에서는 자기 옷도 안 치우고” 이런 거요, “참소하고, 누구 험담하면서 ‘좋은 것 하나 건졌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만 이야기해준다’ 해서 한 백 사람한테 이야기 다 해버리고, 그다음에 절제같은 것은 남 줘버리고” 이렇게 이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왔음을 뒤돌아보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이 잡다함으로 살아왔구나, 그래서 끈 떨어진 연처럼 이 악의 종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혼자 잘난체하고 헤매고 다녔구나, 그냥 버려서 지옥 가도 되는 존재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 주셔서 네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것, 그게 바로 전도고 그게 바로 선교입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나아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의 피가 인간도 아닌 쓰레기 같은 우리를 건졌습니다.” 교회 조직, 제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게 어떻게 우리를 구원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이게 새성전이고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신 은혜 가지고 내 잘난체하고 자랑질하는데 다 허비한 저희들, 버려도 되는데 안 버리시고 모든 이를 만나면서 일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게을러야 하는데 주의 일 되게 하신 이 은혜를 날마다 감사할 수 있는 주의 종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