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자기부인

아빠와 함께 2022. 10. 14. 08:44

이제는 더이상 오지 않는 마지막 ‘그다음’을 만난 사람들은 기다림 또한 끝이 났기에 다 이루신 분의 완성을 안고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메뚜기 삶을 살아간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생명을 담고 다시 살려지고 살려지는 영원한 생명을 그날그날의 나를 부인하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이루어졌던 곳, 인간이 있기 전의 자리로 되돌리는 작업이 현재 있는 몸을 통해 표현될 때 우리의 시작은 늘 나 스스로 이룬 결과의 자리, 종의 자식을 잉태하고 마귀의 열매를 잉태하는 자리, 가능을 잉태하는 자리이다. 죄의 종이 죽고 의의 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때, 내가 의의 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껍데기 안에서 생명으로 태어나주신다.

십자가의 반환점을 돌아서 세상을 반대로 거슬러 차근차근 주님의 안목을 따라가며, 죄의 종인 내가 죄를 지었던 것이 아니라, 죄의 껍데기인 죄의 자리만 있었고 죄만 가득 담겼던 그 옛 부대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마귀의 궤휼을 하나하나 주님의 CCTV가 되어 포착한다.

최종점을 지나서도 여전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7의 반복 안에 머무르면서 시간이라는 것은 주님의 배급 여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나, 나의 주인은 부재이고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모든 시간은 원래 그대로 흘러가고 있던 것이 되고, 오늘의 선물은 나 자체이기에 나를 위해 열심히 땀이 흐르는 수고를 하게 된다. 이미 영적 전쟁으로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혼돈스러운 내부를 노출 시키는 외부에서 온 선물이 이렇게 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모독받는다.

마음의 장판이 걷히지 않으니 무슨 일을 할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실패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그다음을, 이어지는 시간 속에 그다음을 기다린다. 내 안에 기다림이 있다는 것이 소원을 계속 만들고 나의 행위를 의지하게 만든다. 행위는 수치(數値)를 따져 계산하고 성과에 연연하며 그에 따른 보상과 대가를 기대하게 되니 나를 무가치로 만드시는 주의 사랑 안에 용서와 점점 더 멀어진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베드로가 가진 용서의 개념은 인간은 가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하니 행위로 연결되고 수치(數値)가 중요해지지만, 예수님이 알고 계신 용서는 아무도 용서를 받을 가치가 없는 무가치에서 시작하신다.

십자가 사건이 분명히 밝혀준 세상의 실상은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성령을 거역하지 않으면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절로 올라온다면 이것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반드시 성령을 거역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가 된다.

인간은 용서하는 것이나 받는 것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가치가 전무함을 알리는 사건이 성령의 침투하심이고 죄에 대한, 의에 대한, 심판에 대한 책망 안에 사로잡히는 주님의 택하심 그 자체가 몇 번이라는 횟수가 무의미한 무한의 용서이고, 주님이 그러기를 원하시는 자체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유나 따질 문제가 아니라,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과 지옥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절로 입에서 흘러나오게 하시는 관계의 문제이다. ‘다 괜찮아요. 다 상관없어요. 당신이라면...’

이렇게 기다릴 결과도 그리고 다가올 시간도 의미 없고 몸의 반응까지 내가 통제할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은 평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코 있고 싶지 않은 전쟁터에서 벌어진다. 북이스라엘이 아람 군대에 포위된 전쟁터에서 어미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들까지 먹을 수밖에 없는 참혹함이 현실이 되고, 죽는 자는 죽더라도 산 자는 살아야 한다는 목숨에 대한 집착이 더 큰 상실감을 만든다.

거짓 생명만 있는 죽은 세상임을 수시로 드러내는 영적 싸움이 환상이 아니라 실상인 것을 전하는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왕은 자기가 의지하던 여호와가 이같이 하였으니 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왕하6:33) 왕이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짐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자신의 계획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그다음만 기다리겠다는 결단이고, 이것은 왕을 옹호하는 모든 백성의 마음을 대표한다.

주께서 예언의 성취과정을 보이시는 어귀에는 이래도 저래도 죽은 목숨인 것을 알고 자신들의 그다음은 이미 절대 타인에게 넘어갔음을 분명히 인지한 문둥병자들이 배치되어있었다. 문둥병자들은 살 소망이 끊어진 채 원수의 소굴로 보내졌고 주께서 앞서서 다 이루신 예상치 못한 승전의 결과를 미리 맛보게 된다. 거저 얻은 혜택에 정신없이 누리기만 했던 문둥병자들은 어느 순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소식에 떠밀려서 이미 멸망이나 다름없는 이스라엘로 향했다.(왕하7:9)

언약대로 움직이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비언약적 광경은 죽어있으면서도 끝까지 살아있다고 믿도록 내어 버려졌기에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려고 자신을 더욱 의지하는 자기방어에 갇혀 질식하고 자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왕하7:12) 벌써 망한 자만이 기쁜 소식이 담길 그릇이 되고 그렇게 아름다운 소식이 담긴 자는 다시 멸망 속으로 보내지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었기에 너는 우상숭배를 했다고, 간음했다고 심판하시는 사건이 노크할 때 주께서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피를 먼저 주사하시는 접속이 먼저이고 그다음 저주의 율법을 퍼부으신다. 피가 건네는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에 사정없이 밀어붙이는 율법의 벽에 행함이라는 부적을 덕지덕지 붙이며 손수 막아서는 반작용이 절로 나온다.

내어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저주의 자리로 데려가시는 성령의 일하심은 감당하기 힘든 버려짐의 고통이 따르지만, 말씀의 환경에서 버려짐의 진짜 의미는 오직 주님의 것일 때만 성립된다. 주께 소유된 적이 없는 자에게는 버려짐이 아니라 받았던 것을 빼앗기는 일만 있다.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에게만(엡1:4) 허락되는 버려짐은 예수님께서 먼저 건네주신(눅22:42) 피로 말미암는 자기부정을 거친다. (단3:17~18, 롬9:3)

나의 중심축이 빠져나오는 움푹 팬 공허함 속에 박힌 십자가 축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부디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말씀이 진동될 때마다 잠시 잠시 가상의 삶을 찢고 영적 전쟁의 현실로 옮겨지고, 광야에서 발이 부르트고, 굶주리고, 목마른 모든 수고에서 인간이 빠져나가고, 출애굽기 19장의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주님 홀로 옮기셨음을 드러내야 하는 무익한 존재가 희미하게 비치고, 누가복음 2장의 시므온처럼 한 아기의 구원하심 앞에 비로소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벗겨지고 이스라엘의 위로가 입히는 주의 종이 된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시작만 있지 나에게 따로 마련된 그다음은 없다. 메시아를 죽이도록 만들어 놓으신 율법의 체제 안에서, 아버지의 것이었기에 아버지로부터 버려질 수 있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오셔서, 주님의 미리 아신 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의 절차를 똑같이 밟게 해주신다. 이렇게 예수님의 믿음에 실려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부정적 요소가 믿어지는 자기부인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오직 주의 공로만 부각하는 배경으로 쓰인다.

이제는 도대체 우리가 뭘 믿지 않고 있었는지 하나하나 선물 포장지 뜯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죄를 확인한다. 선물상자 안에 내용이 더럽고 수치스러울수록 죄를 묻지 않으시고 가려주신 일방적 사랑이, 주님이 주신 선물의 귀함만 더욱 밝히 빛나면서, 내 마음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의 중심축이신 주님이 기뻐하시면 연결된 지체도 기쁘고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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