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에서 티셔츠를 하나 골랐는데 딱딱한 플라스틱 택이 붙어있다. 종이로 된 택은 바코드 부분을 찢어내면 물건을 훔쳐서 나가도 출구에서 센서가 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도난방지를 위해 손으로 제거할 수 없는 플라스틱 택을 붙여놓은 것이다. 이걸 억지로 제거하려고 하면 옷이 구멍 나거나 찢어질 수 있다. 나중에 계산할 때 직원이 택을 제거하려고 초강력 자석을 도난방지 택에 대니, 있는지도 몰랐던 얇은 철심이 안에서 쓱(SSG) 빠져나온다. 옷에 전혀 손상을 주지 않고 택이 깔끔하게 제거되었고 택 사이에 끼어 짓눌린 셔츠가 흐늘흐늘거리며 장바구니에 담긴다. 마치 하나님 죽음의 능력이 찾아오셨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자아의 핀이 쏙 빠지며 나는 사람이 아니라 흐늘거리는 몸이었음을 깨우쳐 주는 것 같다.
악마는 `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알 수가 없어서 사람을 애타게 찾았다. 나를 볼 수 있는 거울을 찾듯이 부모를 형제를 친구를 지도자를 그리고 정인을 만나고 지켜보고 느끼고 배우며 그렇게 내가 나를 보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그리고 사랑도 필요 없는 자리로 와 있었다. 나를 알 수 있는 나만의 거울이 완성되었기에 그저 나만 있으면 되는 독자적인 자리, 그게 바로 ‘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완전히 폐쇄된 홀로 나로 있는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강력한 자기 긍정성을 바탕으로 나 아닌 타인을 향한 신앙, 믿음, 사랑을 거론하는 것이 얼마나 진정성 없는 줄 알았다 해도 거미줄처럼 방사해 나의 체인에 접합시킨 촉수들을 일거에 끊어버리지 않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쓸모없거나 방해되는 관계는 내 쪽에서 끊는 것이 가능하도록 나의 신은 나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이렇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연결고리들 중 하나의 요소로 나는 예수를 믿었다.
신앙을 통해 나름 숭고한 모습을 갖출 수 있고, 혹시 가족 간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종교성으로 약간의 불편함이 따르더라도 오히려 서로 간에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더 큰 이점이 있기에 기꺼이 감수한다. 광신도, 이혼, 사회부적응이라는 용어가 간간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도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받는 제법 괜찮은 믿음을 확인받으며 은근한 쾌감까지 느낄 수 있다.
배우자를 생각하면 어차피 종교가 아니라도 결혼 이후부터 서로 맞지 않았던 성격을 신실한 믿음이라는 명목하에 맞춰주고 싶어도 이미 소통될 수 없는 갭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부정하면서 자기 마음의 갈등을 긍정으로 승화할 수 있다. 무엇을 해도 나를 훼손하지 않는 쪽으로 어떻게든 살고 싶은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억지스러운 믿음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복음이라는 줄이 나를 긍정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런 복음이 다른복음인 것을 나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이름표는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틈 하나 없이 완전봉쇄하는 작업을 오늘도 쉬지 않고 한다.
나의 있음에 진짜 있음이신 분이 부딪혀주시지 않고서는, 그리고 나의 긍정성을 진짜 있음의 부정성으로 쪼개지 않으시면 이런 꼬물거리는 욕망의 운동성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는다고 우겨도 나에게 필요하고 내 마음에 합치되어 행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 세상 신과 그 졸개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한 아름 안겨주는 정죄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말씀을 읽으며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면 성령 받았거나 아니면 성경을 한줄한줄 읽어내려갈 때마다 성령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부정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주님이 부정당한다.
다른복음 아닌 복음에 반발이 올라오는 가장 큰 이유는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시키면 할 용의가 있는 순수한 마음조차도, 아니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요소도 모두 묵살 시키는 말씀 때문이다. “그거 아니야! 하지 마! 스스로 선택도 하지말고 스스로 어떤 언급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오지 마!”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만 요구하신다.
“악마가 붙여준 ‘나’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떼고 다시 없음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너희 아비가 마귀인 것을 스스로 알 길이 있느냐?” 런닝맨(이름표 떼기 게임) 같은 게임 한 판 하고 끝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이름을 붙여준 ‘나’의 주인에게 복속되어있기에 ‘나’라는 이름표를 떼주기는커녕 서로의 이름표가 떨어질까 봐 두드려주고 다져주는 특별난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 이 세상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미쳤다고 거부했지만 자기 이름으로 온 자들을 향해서는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한다.
예수님은 이런 변질된 피조물의 상태를 이미 아셨기에 단절로 찾아오셨다. 부정성을 안고 찾아오신 예수님의 몸은 영이었고 하나님 계시의 흐름이셨다. 인간이 요청하지 않은 마주침으로 오시기에 난데없는 사건 속에 당황하며 나에게서 나오는 내 뜻을 펼치지만 모두 다 잘리고 부정된다. 주님의 해석이 스스로 질문해 오시고 내가 누구인지 답을 알려주신 것에 기쁜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만 보고 달렸는데 이걸 다 박살내려는 세력은 악마이고 이단이라고 규정하며 저항한다. 진짜 예수님은 이렇게 길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막힌 길로, 생명이 아니라 살인강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제 저에게는 주님밖에 없어요’라고 되뇌며,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죽음에 쫓겨 살려고 죽으라고 달렸던 것이고 도착한 곳은 막다른 골목길이다. 내가 찾아가는 예수님, 하나님, 십자가는 육이었기에 영처럼 막힌 벽을 통과할 능력이 없음이 밝혀지고 성령의 몸이라고 나름 확신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 낙망한다.
그렇게 갈망하던 십자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는데 왜 기뻐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단박에 알아보고도 기뻐하기는커녕 소스라치게 놀란 귀신의 마음을 도리어 공감하며, 막힌 길 앞에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이 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기쁨으로 창조하신 본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본래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을 담는 몸을 창조하셨지 자아가 있는 육을 만들지 않으셨다.
부활의 몸으로 벽을 통과해서 오신 예수님처럼 나도 부활의 영을 받은 주님의 택한 백성임을 부정하기 싫어서 객기를 부리며 돌진해도 소용없다. 내 몸을 십자가 벽에 뭉개고 찢어도 내 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생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절망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지시하는 자아의 소리를 들으며 그래도 아직 남아있을 나의 최소값,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뒤돌아서는데 돌아갈 자리가 없어졌다.
나는 울고 예수님은 웃는다. 내 사랑이 끝난 그 지점이 성령께서 벌써 착수하신 예수님의 제로 지점이고 주님의 이미 완료된 자아철거 작업의 반복지점이다. 주님의 답이 이전되는 순간 나를 향한 나의 진지함이 뽑히고 나보다 중요한 분이 연결되었기에 이제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유가, 내가 없는 이유가 나의 부정성과 함께 알아서 쏟아지기 시작하고, 이렇게 예수님의 희생만 활동했음을 증거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출몰을 통해 이 지옥 세상에서 빛의 세계를 미리 감지한다.
사건으로 창조된 주님의 백성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등장하는 과정 자체가 어린양의 피가 확산되는 혈관처럼, 현상처럼, 마디와 힘줄이 서로 연결되어 가듯이 주님의 공로가 하나로 회수되는 경로가 만들어지도록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성령으로 분배되고 죽은 몸이 살아 움직이게 되는 현상이다.
이 세상에 충만하게 셋팅된 말씀 속을 통과하며 죄된 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체험하고 증거하며 최종 하나 됨으로 수거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언급, 자기증명,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선택하시는 과정을 밟고 오도록 공급되는 생명의 흐름이다.
만나가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듯 예수님 생명의 떡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먹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율법완성이 이루신 그분의 사랑이 죄인들에게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알고 기뻐하며 죽으라고 주시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기예수의 나심을 듣고 자신들에게 종말을 알릴 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에 기뻐한 자들이 있었다. 시므온 그리고 선지자 안나는 그들 안에 자신들의 기대와 뜻이 아닌 다른 분의 뜻이 심겨져 있기에 뜻의 주인이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미리 알았고, 아기예수의 소식을 듣고, 보고, 기뻐했다. ‘이제 주의 종을 편히 놓아주시는군요’
나다나엘이나 아리마대 요셉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세리와 창기와 강도들처럼 위선꺼리가 바닥난 채로 너덜너덜 찢어진 자아의 틈 사이로 자신의 날 것이 드러난 자들 또한 세상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분명히 보고 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의 왕이 임하시기를 소망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살 이유가 소실된 채 눈뜬 시체처럼 살면서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알려주실 분을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했다.
메시아가 오셔서 세상을 악하다고 하실 때, 자기의 뜻을 품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는 모욕감과 분노감을 주었지만 이미 세상이 악한 것을 자신들 안에서 발견한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나 분노하는 자들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던 자들이나 모두 하나로 육임이 밝혀지는 십자가 사건 앞에 서게 되고, 어느 쪽이든 아무도 말씀을 믿은 적이 없음이 들통난다.
악마는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고 거짓말할 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 속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 했지만, 악마의 말대로 아담은 결코 죽을 수 없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악마의 몸이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이름을 주신 하나님에게 다시 복속되는 것은 불가능성이 되었다.
예수님이 첫 아담의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찾아주시는 방법은 아담의 몸인 죄 된 몸으로 오셔서 친히 하나님께 아담이 범한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고 대신 죽어주셔야만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 전에 정해진 약속, 아버지의 이름 안에 거하는 자는 죽어도 살려내신다는 사랑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죽은자들 가운데서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의 자리인 아버지 능력의 자리에 앉으사 친히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셔서 자기 백성을 발생시키신다. 죄 된 몸으로 어둠의 세력에 승리하신 주님만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악마의 몸에서 죄 된 몸으로 빼 내주실 수 있고 주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관계로 말미암아 또한 하나님과 연결되는 자녀가 된다.
텅 빈 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공로가 담긴 주의 이름표가 붙여져서 새로운 자기 백성이 창조되고 예수님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것처럼 자기 백성 또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주님의 행로로 그들을 이끄신다.
불같은 죽음을 만들고 떠나신 예수님을 만질 수 없음을 아는 순간 그제야 보인다. 두루 도는 저주의 불 칼이 둘러치고 있는 감옥에 갇혀 사망의 위협과 속임수에 놀아나며 평생을 두려워하며 살다가 그대로 지옥 불과 함께 멸망할 운명이 바로 나였다. 아직 있지도 않은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 사랑의 징표인 십자가가 자석처럼 다가와서 두려움을 유발하며 인간을 옥죄던 자아의 핀을 뽑아버리시니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자유의 품으로 흐늘거리며 빨려 들어가는 몸이, 주를 위해 죽을 자격조차도 없고 저주의 불이 마땅함을 아는 몸이 된다.
내가 불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인일 때 이런 쓰레기를 위해서 대신 불 속을 통과하신 예수님의 과정이 우리의 죄 된 몸을 통해 펼쳐진다. 어둠이 어둠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주님의 해석이 연결되면서 이제야 깨닫게 된다.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이 ‘보인다고 하고 안다고 하는 나’를 제거하셨기에 더이상 나를 알아볼 필요가 없는 그 어둠만이 예수님의 완전히 이루심만 부각하는 진짜 어둠이 될 수 있다.
수련회 동안 잠시 동거했던 분 중에 한 분은 입만 떼면 인간을 한방 먹이는 말들을 부지중에 흘려내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무도 그분의 말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결은 성령충만이 아니었다. 임시 동거자들에게 육이 기뻐하는 떡을 쉬지 않고 멕이면서 배를 충만하게 하시면서 ‘느그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거지’를 확실히 하신 다음에 말을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이미 들킨 본질을 감추려는 방어가 일어나지 않고 그냥 뚜껑 열린 귓구멍으로 말이 들어오는 상황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우리가 다 창녀같은 년들인데 뭐 대단한 거 있다고 그래? 내가 왜 사람의 이름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에게 이름을 붙일 자격이나 있어?’ ‘하하하하~’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가 미친 것 같다.
댓글 이근호
꾸역꾸역 계속 살아보려고 한 다짐들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결정인 것을 철저하게 실감케 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