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항복의 기쁨

아빠와 함께 2022. 9. 10. 10:32

이 세상에서 내가 지킬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증거는 주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주님 앞에 다시 드릴, 아니 그것을 소망하는 내가 버려질 공간이 지금 이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벌써 세상 속에 임한 천국은 마치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온전한 망가짐으로 주님의 모습을 동일하게 그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재료로 너는 나를 위해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라는 주님의 마음을 공유한 한 강도가 ‘원래부터 주님의 것이었음을 기억하소서’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곳이고,

비난의 시선을 뚫고 들어온 여인이 주님 발에 자신의 모든 것을 깨어버리면서 이렇게 예수님을 깨뜨리는 죄만 흘리는 자가 바로 자신임을 고백하는 행함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주님 발아래 미리 면류관을 던져드리는 몸짓으로 자신들을 갈아 채우시는 한 분을 형상화한다.

이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육체로 보는 세상의 눈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은 항상 보이지 않는 분이며, 그저 악하고, 더럽고, 불법적이고, 하찮은, 흠모할 것이 없는 사람들만 덩그러니 보일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내가 아니고 주님이 다 하고 계십니다’라는 말을 한들 세상의 귀로는 들을 수 없기에 주님이 이 세상에 없음을 증거 하는 재료로 그들을 들어서 쓰고 계신 주님의 일은 대성공이다.

성령에 힘입어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 눈에는 자신의 망가짐을 뒤집어쓰고 계신 진짜 피해자이고 희생자이신 주님만 보이고 그분이 모든 일을 다 하고 계심을 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창조물 속으로 들어오셔서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죄의 종이 된 주의 백성을 속량하시기 위해 세상을 관통하시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일들이 흔적을 남기고 이루신 길이 되고, 주님 자신의 의로운 자취를 다시 회수하실 공간이 되시고, 생명이 흘러넘치는 성전이 되셨다.

예수님이 처소가 되신 후에야 그분이 뚫고 나가시며 남긴 주님의 살과 피를 성령을 통해 맛보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출현하면서 기쁘게 통곡한다. ‘제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야 제가 저주받았음을 천국을 소망할 수 없는 처음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자신을 포기한 자들은 자신이 죽기가 무서워 종노릇할 수밖에 없기에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국가를, 국가 안에서 같은 정신으로 똘똘 뭉친 가정을 스스로는 결코 떠날 수 없는 모든 사람 중 하나인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아시는 성경의 말씀을 알 수 없는 자인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해석이라는 무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일의 전부를 알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들의 의미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무지 안으로 들어간다. 무지 안에서만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철저히 종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물론 의의 종과 죄의 종을 가름할 판단에서조차 당연히 제외되는 이유는 판단이 먼저가 아니라 몸을 뚫고 나오는 능력이 먼저이고 그 능력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안에 담긴 복음만 지키시는 하나님이 몸을 어떻게 다루실지 그 결과를 이미 알기에 더이상 결과를 예상하며 기다리지 않는다.

낯선 무지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저주받은 자리를 벗어나서 나오는 모든 해석을 부인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기에 그저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몸의 행로를 따라가며 주의 작업을 느낀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말씀의 행로 그 자체가 주님 계심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심의 증거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를 믿을 수는 없으나 신뢰할 수밖에 없는 반응을 만들어내신다.

반응의 외관은 이러하다. ‘복음을 말하지 말고 그냥 드러내세요’ 그리고 내 안에서 나오는 모든 다른 복음들을 확인하면 되고, 복음의 무늬를 발라서 구원의 희망을 담고 부여한 의미를 확인하면서, 저주의 자리로 보내지는 이유를 만들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일을 그저 의지하면 된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신을 포기해야만 의지함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의지함은 시체가 주님을 업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체를 업고 활동하시는 것이며, 마리아가 자신의 택한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특심을 발휘하여 말씀의 자리를 고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 자체가 결코 마리아를 빼앗기지 않고 붙들고 계시는 현상이었다.

인간이 마땅히 우리를 만드신 주인으로 믿어야 할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모습을 하고 이 더러운 배신의 세계에 뛰어들어 보여주신 것은 배신당하고 찢겨서 이 세계를 빠져나오는 모습만이 진리가 진리 됨을 보이는 복된 모습인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사실을 배운다고 한들 어느 누가 너무 고마워서 자신을 배신해줄 누군가를 찾아 예수님과 똑같이 당하고자 안달 내며 부디 이 어둠의 세계를 속히 빠져나가기를 바랄 수 있을까. 그것조차 시도한다면 또다시 가롯유다의 한계에 부딪힐 준비를 해야 한다. 어둠은 스스로 빛을 알아보고 빛으로 나아오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빛이 올 때 어둠은 어둠일 뿐임을 나타내시려고 만드셨다.

성경 속의 말씀은 마치 성령이 주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의 살과 피에 동참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눈을 통해 입력되고 쏙쏙 이해된다. 말씀은 틀린 게 없는데 내가 나를 납득시키려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지 못하기에, 주님이 부르시니 부르심에 응하면 되고, 예수님의 선택 안에 놓여 동고동락할 수도 있고, 사도바울의 말씀을 듣고 기뻐했던 이방인 중 하나가 되어보기도 하며, 최종 목표지점인 신랑의 결혼 잔치에까지 신부로 동참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롯유다는 생명책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상상하며 환란 중에도 기뻐했고 주님이 씌워주실 의의 면류관을 주님 보좌 앞에 내어드릴 겸비한 마음이 준비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던져드릴 미래의 면류관이 마지막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안에 꼭꼭 숨겨놓은 드라빔이었다. 주님을 만나면 드려야 할 그것에 대한 소망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마지막에 주님께 드릴 것이 있는 자가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설마 주님께 다시 내어드릴 면류관을 소망하는 마음일 줄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면류관에 대한 희망을 미리 버려야 하는 순간을 만나면서 ‘나라는 너 따위는 지옥이나 가버려’라고 내가 나를 냉정하게 밀치며 배신하는 순간이 온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붙들고 의지했던 말씀이 나를 공격하기에 아무 의지 할 것이 없어진다. 복음만 남기고 가족도 돈도 어떤 환경도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도록 만들어 놓으시고 결국 마지막에 복음이 나를 공격할 때 나오는 처절한 절규는 ‘예수님, 어찌하여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을 믿어주지 않으십니까?’이다. 나는 주님의 종인 적이 없었고 항상 주님은 나를 믿어주어야 하는 하인이었다.

열두 제자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신을 믿은 믿음에서 어느 하나 예외가 없었고, 가롯유다 또한 자신 안에 죄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는 현상을 깨달을 수 없으니,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보다 더욱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자신을 버리려는 느낌을 받으며 원망이 올라왔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원수로 발각되는 것이 엄청난 은혜인 것을 알게 되는 주님의 새로운 선택 안에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가롯유다의 한계지점에 막혀있음이 당연하다.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한 한계 막은 오직 이 세상을 말씀대로 뚫고 들어오셔서 언약의 죽음으로 빠져나가신 그분의 영이 동일한 현상으로 뚫고 들어오셔야만 가능하고 이로써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이 언약대로 생산된 죄인인 의의 종이 될 수 있다. 이 특이한 죄인은 나를 믿어주지 않으신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와 아버지의 관계 속에만 있음을 알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나는 항상 주를 배신하건만 주님은 나를 향한 단 한 번의 배신으로 나의 마지막 남은 고귀하고 성결한 주님이 주신 주님의 것, 주님의 의와 사랑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나의 의를 공격하시고 무너뜨리신다. 주의 원수로 발각되어 주님의 발밑에 깔려있으니 아파서 너무도 아파서 눈물이 나는데 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기쁨에 당황한다.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기에 나를 규정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밀려오며 절로 폭격의 주체를 향해 두 손 들고 죄의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웃으면서 나아간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든지 나는 나를 알 길이 없기에 답답한 것이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운명이 녹화된 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모든 것을 하는 기계가 된다.

내가 원하는 말은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말을 하게 되고 세부설명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딱 그만큼만 하게 되니 내가 나에게 살떨림의 대상이 되고 원수가 따로 없어서 ‘당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고 내가 낯선 나를 정죄한다. 그러나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해명할 여력조차 어느새 상쇄되는 것은 내부에서 올라오는 책망의 소리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변명하고 수습하고 해명하려고 하느냐?’

십자가의 완성이 만드신 천국은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며, 이미 우리의 생명 또한 이 땅에 없다는 복음만 엄중히 울려 퍼지고 있는, 이미 세상에 만들어진 심판대를 보게 하시는 공간이다. 인간은 한 명도 없고 하나님만 계신 그분의 나라가 빛을 밝히며 잠시 임하셨을 때 우리는 미리 면류관을 던져드릴 긍휼의 순간을 허락받는다. 난데없이 발생한 구경거리의 재료가 나이고, 내가 얻어터지고 만신창이 되는 나를 실컷 구경하며 주님 앞으로 인도되는 바로 그때가 내가 사라질 수 있는 순간이다.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너도 나와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예수님 옆에 오기까지 주님은 살뜰하게 택한 자들을 배신당하는 경로로 인도하셨다. 세상이 공격하고 말씀을 함께 나누는 자에게, 함께 먹고 마시는 자에게,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자에게 공격당하게 하시며 냉정하고 너무나 명철한 주님의 십자가로 인도하셨다. 올라오는 모든 감정은 그저 털어내야 할 군더더기 먼지같은 것이고 오직 한 분의 판단만 냉철하게 남아계신 그곳이 오직 내가 아니고 주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기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 자비의 공간이다.

세상의 배신은 원한과 원망 그리고 분노를 부르지만, 주님의 배신은 막혔던 것이 뚫리면서 주님의 진심이 자리 잡으시는 장소가 만들어지기에, 진리 앞에 잠잠해진 욥처럼, 자신이 진즉 죽은 것을 알아버린 시체처럼 고요해지고 고요함 속에서 배신자를 품으신 사랑, 원수에게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다만 예수님의 믿음의 씨가 들어있기에 덮으시는 사랑만 남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 1서 4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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