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우리 사이

아빠와 함께 2022. 9. 18. 08:42

연인이 함께 가다가 여자가 지뢰를 밟았을 때 위험을 아는 남자가 주저 없이 보내는 반응은 ‘움직이지 마’라는 외침이다. 여자는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한 줄을 알지 못하기에 왜 자기에게 소리를 지르며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지에 당황하겠지만 둘 사이에 사랑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있다면 자신의 감정은 무시하고 남자의 지시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자신을 통제하려는 태도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매 순간 내가 움직이고 안 움직이고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작업해놓으신 비밀이 심긴 여부로 명령의 출처가 바뀐 결과만 있다. 주님의 일하심은 인간이 홀로 드러낼 수 없다. ‘홀로’라는 말은 공간 자체가 되실 수 있는 주님에게만 성립되고, 인간은 자신 안에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낼 힘이 없지만,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된 두세 사람이 모여서 낯선 세계를 비추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 그러니 개인 구원 자체가 말이 안 되고 하나님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남기고 떠나신 피를 증거 하는 현장 구원이고 친히 그의 나라가 되시는 예수님 구원뿐이다.

생명 나무가 없이 선악과나무 혼자서 죽음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만드신 두 나무 사이에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음이었다. 흙으로 만든 아담의 죽음이 진짜가 아니라 생명의 성령으로 잉태되신 두 번째 아담이 죽어주셨기에 비로소 진짜 죽음이 만들어졌다. 선악과는 죽음이고 생명 나무가 생명이라는 구분 지음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 참된 죽음이 뿜어내는 피가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시며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공간을 만든다.

개인이 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죽어서 천국 간다는 생각은 마치 내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아버지 앞으로 가져가서 내가 당신의 아들을 죽인 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아들의 피를 가져왔다고 기뻐하며 천국에 넣어줄 거라고 믿는 것은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천국은 가고 싶은 믿음과 동일하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기름 부은 자를 죽인 자에게 취하신 조치를 보면(삼하1:1~16) 아말렉 청년이 사울을 죽였다고 다윗 앞에서 고백할 때, 그의 겉모양은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쓴 채로 침통함을 표하고 있으나 그의 속모양은 이미 대세가 다윗에게 기울었음을 알고 죽은 사울 왕에게서 취한 면류관과 팔고리를 바치며 다윗의 나라에 백성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가 말씀의 세계 밖에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다윗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단번에 청년을 죽였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찌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삼하1:16)

기름 부음의 모형일 뿐인데도 그의 피를 흘리게 한 원수에 가차 없이 처분하셨던 하나님께서 모형의 실체이신 참아들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자를, 그것도 여전히 자신은 멀쩡히 살아서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인간에게 보이실 심판의 엄중함이 어떠할지에 인간은 너무도 무지하기에 우리는 복음을 듣고도 혼절은커녕 오늘도 나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물론 알고 있다는 것이 주께서 조성하시는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 너무 공허해서 복음이 들리지 않는 순간순간을 힘들어하며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려 애써도 오히려 복음을 알고 있기에 내가 살려고 복음을 의지하는 모습만 계속 들킬 뿐이다. 내가 나를 기억하는 한 나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다. 그리고 살아있다고 느끼는 한 나를 잊지 않으려는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참된 죽음 속으로 옮겨지지 않았기에 결국 아멜렉 소년처럼 산 채로 하나님 앞에서 내 입이 나에 대해서 증거 할 최후로 떠밀려간다.

죽으리라는 말이 사랑의 메시지이고 죽어주신 분이 다시 죽여주시는 경로로 오셨을 때 그분이 예수그리스도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자들은 그 ‘우리’에 포함된 개개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생겨나는 피의 공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임을 안다. 그들은 피 속에서 죽은 분의 명령이 들려올 때 ‘하고 싶다 안 하고 싶다’라는 마음 자체가 밀쳐지고 지시대로 이끌려가는 형편을 계속 되새김하는 자들이다.

형제간의 교제는 서로 들러붙을 수 없는 ‘사이’를 두고 이루어지고, 틈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섬김과 예수님이 친히 사랑하고 계시는 효과에 자동으로 반응하면서, 서로가 자신들을 지키지 못하는 현상에 말려들어 속에 담고 있는 역겨운 교만의 실상을 감추지 않고 서로 폭로 당한다. 그렇게 어느 쪽도 일말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고 온전한 죄인임을 깨닫도록 서로 돕는다.

서로가 서로의 쓰레기를 토해낼 때 우리 사이에 있던 틈이 피를 흡수하듯 죄를 빨아들이고 너와 나가 아닌 우리와 부딪혀 주시고 다투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왜 이런 말들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모든 필요한 말과 행동을 성령께서 공급하셔서 주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작업을 서로의 몸을 통해 재현시키고 체험케 하신다.

나의 모습이 십자가 위에 강도의 모습에 더 가까이 갈수록, 죄인 중의 괴수가 바로 자신인 것이 뚜렷하게 드러날수록 주님이 연출하신 사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납하심에 어쩔 줄 몰라서 그대로 공중분해 되기를 바랄 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엉망입니까?’라는 질문이 분해되고 ‘예수님께서 주의 나라가 되실 때 그곳을 장식하는 무늬가 되게 하소서’라는 주님의 고백으로 전환된다.

주께서 내가 나를 시인하지 않아도 되는 사라짐의 자유를 허락하시며 나를 지켜야 할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의미의 지점으로 만드시니, 오로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온전한 분노와 예수그리스도의 일방적 용서 사이에서 주의 심판의 공의로움만 샘솟는다.

아담이 선악과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인간의 무지가 손타는 하나님의 모든 자연물은 오직 한 분의 피만 드러내도록 쓰이고 있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이 사람임을 유지하려고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 했지만, 자연은 사람이 사람 아님을 부지런히 증명하면서 자연의 모든 효과가 오직 예수님만이 인자이심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사람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인간이 예수님과 대면했을 때 그토록 들키지 않으려 했던 본모습을 발각당한다.

짐승을 짐승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죽으셨기에 누구도 죄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심판이 마땅한 유일한 죄가 정해졌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단 하나의 죄이다. 나는 짐승이라고 죄인이라고 수십 번 수백 번 백신을 주입하듯이 자기를 미워해도 주님이 보내신 친구의 조롱 한방이면 나도 미처 몰랐던 죄의 정체가 돌파된다. 백신 맞았다고 통증이 감해지지 않는다.

형제를 통해 상처를 전달받을 때 그 상처가 안에서 작동되면서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나를 통해 전달된 상처로 아파했을 다른 형제의 고통이 떠오르고, 지시대로 전달하고도 고통 하고 있을 상대가 떠오른다. ‘주님이 하셨지’라고 담담히 넘어가지를 못하고, 내가 상처 나서 찢겨야만 눈에 보이는 형제의 상처 그 사이사이로 비치는 한 분의 아픔만 있었음을 깨닫는다.

복음이 서로를 예속하지 못하게 상대를 제치고 뛰어넘게 할 때,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상대를 밟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미리 제압된 상대가 밟혀주는 것이고, 그렇게 밟히면서 복음이 나오게 하시는, 이렇게 돌고 도는 주의 증인의 역할을 통해 주님의 섭리를 배우게 하신다. 사람들끼리의 실수도, 미안함도, 참음도, 겸손도, 배려도 성립될 수 없고 다만 악역을 감추지 않고 진솔하게 잘 연기함으로 나의 죄를 들춰내 준 것에 고마움은 남겨진다.

이미 예수 안에 우리로 편입된 자들은 자신의 주체는 없고 오직 주님의 자아로만 활동한다. 눈에 보이는 인간이 내뱉는 성도냐 아니냐, 진짜냐 가짜냐는 판단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주의 뜻대로 두세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에 의해 선악과의 증상과 생명 나무의 증상이 부여되면서 피를 위한 분수대가 잠시 만들어졌다가 다시 안개처럼 사라진다.

아무것도 기억지 못하게 모든 기억을 주님 쪽으로 끌어당기시고 내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알기에 하나님 앞에서 나의 증거는 없고 주님의 대신 증거 하심만 남도록 주님 품 안에 감추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역겨운 죄가 흘러나올 때마다 우리 사이에서 흘러넘치는 주의 피에 배어 들어가고 이렇게 나는 보이지 않는 기쁨을 아는 자들은 내일 아궁이 불 속에 던지기 위해서 오늘 햇빛과 공기와 양식을 허락하시며 살리시고 계신 주님의 마음을 공유받은 것에 무한토록 감사한다.

 

댓글

이미아

오늘 아침은 왠지 '걸어서 세계 속으로' 나레이션을 듣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아, 기분 따라서 사는 것 외에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저주 받아 마땅함 외에는 없는 것이지...!

임청일   220918

오늘은 좀 쉽게 쓰셨네요

그런데도 부정적인 내 시각인지 아직도 실체가 없는 표현에 조금은 불만입니다

복음으로 교제하는 실체를 적어주셨으면...  복음에 대한 설명은 이제 우리 다 외우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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