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에스겔: 새 성전-주님의 내부성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우상숭배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우상숭배를 피해서는 하나님이 없어요. 우상숭배를 피하면 또 다른 우상이 되는 겁니다. 반드시 우상숭배를 해야만 해요.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인간에게 알려주는 바입니다. 인간이 우상숭배를 해야 되는 이유는, 신이 어떠냐, 아니냐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존재의 만족과 안일함을 인간이 스스로 탈피할 수 없어요.
인간은 조금만 편하고 아무 문제없으면 대단히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나로 인하여 만족해요. 우크라이나 전쟁하든 말든 내가 편하고 내 월급 오르고 장사 잘 되면 그걸로 대만족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신을 섬긴 적이 없지요. 이미 자기 자신을 섬기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섬기기 때문에 신을 섬긴 적이 없습니다. 없으면서 아쉬울 때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이건 백 프로 그 신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에스겔 1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이러한 자기 존재의 만족과 안일성에 대해서 에스겔 1장 4절에서는,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이 몰려오는 폭풍, 구름 이게 우리 존재의 안일성을 박살냅니다. 참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너 전혀 모르지. 그냥 너만 편하면 오케이지. 그게 과연 언제까지 갈까? 북방에서 오는 폭풍과 큰 구름, 이것이 역사화된 것이 북쪽 나라 바벨론이 유다나라를 공격한 그 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인류의 대표자 삼아서 하나님이 직접과 이스라엘과 상대하면서 하나님 자신이 누군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다 나타내고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 개시가 되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지금 잠자고 있지요. 뭐, 자기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 우리가 골라 믿으면 되지, 이런 식이에요. 내 존재만 편하면 된다, 이런 식이지 이스라엘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들은 자기 관심밖에 있습니다.
마치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물가만 약간 올랐다 뿐이지 다른 데는 관심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활동과 본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에스겔이란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은 이렇게 활동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에스겔 1장 4절은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기 존재 만족에 빠져있습니다. 자기 존재 만족에 빠져서 북쪽에 무슨 소리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집단을 선지자로 바꿉니다.
이 선지자가 나중에 죽습니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에스겔에서 선지자가 죽었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 에스겔에서 선지자는 안 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에스겔 24장 15절에서 17절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죽습니다. 죽는데 여기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에스겔 선지자 아내가 죽는다고 돼 있이요.
왜 선지자가 죽지 않고 아내가 죽느냐? 그것은 여자는 내부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성은 내부성을 보여준다. 여성이 하나님 나라의 내부성을 보여주는 그 증거가 에스겔 16장의 내용이 23장 내용으로 더 확대가 되어 나오는데 23장에 보면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에스겔 16장도 언급돼 있지만 에스겔 23장에도 자세히 언급돼 있습니다.
거기에 오홀라와 오홀리바라고 해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나라를 이름을 붙여서 따로 처리하면서 동일한 운명으로 적시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에스겔 24장에 보면 오홀리바의 남편이 누구냐? 여호와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을 남성성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성성으로 표현합니다. 여성성으로 표현해서 그 자기의 내부가 자기 남편만 차지해야 될 여성이 그렇지 아니하고 다른 이방민족과 소통하는 것을 에스겔에선 이걸 간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음행, 또는 간음.
이스라엘이 선지자고 선지자는 죽는다는 여기에 그냥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우상숭배, 우상숭배를 아까 음행, 또는 간음이라 했지요. 우상숭배를 집어넣어서 이스라엘이 선지자로 바뀌고 선지자가 우상숭배로 죽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가 소멸되지요. 여기에 자기 존재의 만족, 뭐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었으니까 죽어 천당 가는 건 됐고, 일상생활에 편하게 살면 되지, 이게 자기 존재의 만족이거든요. 이 존재가 있음이거든요. 이 있음의 그 끝은 죽음으로 끝나요.
이 죽음이 어제 강의한 것처럼 어떤 죽음이냐 하면 다수성의 죽음이에요. 인간은 이 다수, 너도 죽고 나도 죽고 A 죽고, B 죽고, C 죽고, D 죽고 여러 가지 사람들의 죽는 죽음을 다수성이 죽는다는 경험을 하나로 만들어서 그들은 뭐냐 하면 죽음의 일자성, 죽음을 통합하는 하나의 의미, 죽음이란 이런 의미냐. 너 죽고 나 죽고 이렇게 죽는 게 죽음이야. 일자성으로 이렇게 의미를 찾는데 이것이 잘못된 틀려버린 거예요.
이거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다수성이 강조돼버리면 일자성이 날아가 버려요. 인간이 보편적으로 너 죽고 나 죽으니까 이걸 죽음이라고 하자. 여름 되면 해충 오고 날씨 덥고 이걸 여름이라 하자, 했을 때 그건 뭘 놓치느냐 하면, 여름에도 추울 수 있다는 것, 열대야가 없을 수 있다는 새로운 상황을 배제해버리고 저희들끼리 통하는 것끼리 대충 끌어 모아서 보편성으로 만들어버리면 너 죽고 나 죽으니까 죽음이라고 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죽음을 주장하는 데가 바로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에서 죽음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여러분 나중에 죽습니다. 죽기 전에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지요, 할 때 죽음이란 개념이 진짜 성경에 나오는 개념이 아니고 인간들의 경험상 납득이 되는 그러한 경험들을 끌어 모아서 이걸 진리처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죽음은 너 죽고 나 죽고에 죽음이 나타나지 않고 어떤 특정 인물이 심판받아 죽는 그게 유일한 죽음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인가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 죽잖아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죽음 외에는 다른 죽음은 없어요.
singularity는 독특한 거거든요. 이거는 사건으로 터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캐치 못하게 벌어진 사건. 이걸 어제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once and for all, 단 한 번의 사건, 이게 바람 같이 북방에서 몰려오는 거예요. 모든 존재의 안일함, 나는 교회에서 집사고 장로기 때문에 구원은 될 것이라는 자기 챙기는 데 존재의 안일함, 그 존재의 안일함과 결부된 게 보람상조에요. “나 죽고 난 뒤에 보람상조에 맡기면 다 될 거야.”
보람상조, 보험 이게 뭐예요? 보편화된 죽음을 의미해요. singularity 특수한 죽음이 아니고 보편화된 죽음이에요. 그걸 보험 넣듯이 미리 교회 가서 예수 믿는 겁니다. 천당 가려고. 그 행위 자체가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 종교행위 자체가 뭐냐 하면 자기 존재로 모든 의미가 스톱이 되고 마감이 되고 닫혀버린 거예요.
그런데 진짜 의미는 singularity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야 의미가 거기서부터 개시가 되는 거예요. 단 한 번에 단일한 두 번 다시 흉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사건에서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럼 교회는 뭐냐? 친목단체지요. 마음 맞는 사람끼리 만나고, 그걸 교제차단이라 하는데 사회에서 마음 안 맞는 사람은 차단시키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거예요.
특히 시골 교회에서는 취미고 뭐고 그게 우선이 아니고 정 씨 집안이냐, 이 동네 최 씨 집안이면 권사 빨리 되고 외지에서 날아온 사람이면 권사투표 백날해도 떨어지고, 장로 안 되고 그런 거예요. 그 동네 와사 한 십 년이나 있어야 집사라도 하나 얻어 건진다는. 지역적인 혈연단체가 강조되지요.
퇴니에스라는 사회학자가 이야기하는 사회에 두 종류가 있거든요. 혈연사회와 이익사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혈연사회는 공동체 중심으로 자기 집안, 혈족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있는 반면에 돈 가지고 들어와서 돈 행세하면서 새로운 공동사회로 전환되는 그러한 이익단체가 있어요.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란 용어를 씁니다만.
사회란 것이 이처럼 어떤 이익, 그리고 그전에 존재의 뿌리, 저 사람이 우리 집안의 뿌리냐, 아니면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돈을 제공할 수 있는 가진 자냐, 그런 요소로서 사회가 형성됩니다. 그 이야기가 야고보서 2장에도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돈깨나 있어 보이면 야고보서 교회공동체에서 사람들이 환영하고 돈 없으면 무시한다. 너희들이 어떻게 두 마음을 가졌느냐, 이렇게 야고보서 2장 초반부터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여러분들이 알면 좋겠는데요.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후견자 위치에 있어요. 후견 대상이 뭐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요.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로 삼았습니다. 이거는 혼자서 갈피를 못 잡는다 이 말이죠. 오늘날 이 시대에도 후견자 제도가 법적으로 마련돼 있습니다.
미국에 공부 많이 한 언니가 가 있고 한국에는 못 배우고 공부도 못하고 일 저지르는 동생이 있는데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가 병들어 있을 때 수발을 누가 들었느냐? 못 배운 여동생이 다 들었고, 언니는 그냥 안부만 전했지요. 비행기 값도 비싼데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아버지가 위독하다 해서 가 보니까 동생이 아버지 수발든다는 명목으로 3억 날렸어요.
지금 남아있는 아버지, 엄마 재산이 야채장사해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3억 날렸단 말이죠. 그럴 때 언니가 변호사 찾아오지요. 동생이 3억 날렸는데 수발든다고 비용으로 썼다 하는데 3억 자체 안에 내 돈도 들어있는데 어떻게 찾느냐? 이게 이민사회와 남아있는 가족끼리 실제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가 미국사회에서 허다하지요. 거의 70~80, 90프로 넘을걸요. 그때 필요한 제도가 뭐냐? 후견인제도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상담하는지 모르겠다만 사회복지사나 그런 사람에게 맡겨서 후견인에 보고해서 헛돈 안 쓰게 하는 제도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고아와 과부, 나그네로 간주해서 누가 후견하느냐? 주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돈 쓰는 것부터 해서 생명부터 해서 밥 먹고 사는 것,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 천국 가는 것, 그거는 이스라엘 본인의 결정과 결단과 믿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후견인이 어떤 조치를 해서 앞길을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가, 강력한 거인 족을 물리치는가, 그거는 후견인의 솜씨에 달린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에 여호와는 우리의 용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을 보면 자기 전쟁을 하고 있어요. 내가 뭘 하면 천국을 가? 천국에는 자기 전쟁으로 들어간 위인이 한 명도 없어요. 천국에 자기 노력으로 들어간 사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뭘 하느냐? 노력을 이야기한다고. 쉐마, 쉐마. 말씀을 들으라. 말씀을 들으면 지식되니 실천에 옮겨야 돼. 실천에 옮겨라. 교회에서 말하는 실천은 뭡니까? 돈 바치고 시간 바치는 두 종류로 간단하게 요약되는 데요. 여러분 다른 실천 들어봤어요? 요새 교회 다 안 다니니까. 목사가 실천하라는 건 딱 두 가지입니다.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요. 그 외에 없어요. 이거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모든 단체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고 통일교도 마찬가지고.
후견인제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서 그다음에 뭐로 전환되느냐? 아내의 후견자를 자처하는 남편으로서의 여호와가 등장합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호세아에 등장해요. 그전에는 없다가 호세아에 보면 나타납니다. 이거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겐 후견인이지만 아내는 가족이에요, 패밀리에요. 아내가 가족이란 말은 한 남편의 남성성 속에 남성성을 남성성답게 하는 내부성을 아내라는 자리로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무슨 뜻이냐 하면 네 안에 텐트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텐트, 천막. 네 안에 들어있는 텐트, 나의 색시야, 이런 뜻이죠. “남편을 모시고 있는 나의 색시여!” 지금 선지자 에스겔을 죽여야 되는데, 선지자는 죽어야 되거든요. 예수님이 선지자잖아요. 예수님이 죽어야 되는 것처럼 죽어야 되는데 여기 에스겔에서는 선지자가 죽는 게 아니고 아내가 죽는다고 했지요. 에스겔 24장에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전체가 졸지에 여성이 되고 말았어요. 에스겔 16장에 나오는 그 모습과 특히 23장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19금이에요. 이거는 읽어보기가 굉장히 곤란해요. 특히 16장 7절 같은 경우에,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이렇게 해서 지금 유다나 이스라엘의 행위를 아주 극단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몰고 나가십니다. 실제로 이렇게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통째로 특정 여인이 이스라엘 여자가 우상 섬긴다고 다른 이방 종교의 남신과 관계한다는 그런 특정 몇몇 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통째로 전체 유다와 이스라엘 전체가 벌거벗은 창녀 짓을 하고 있다고 퉁 쳐서 이 원리를 적용시켜버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묘사하느냐, 표현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그게 바로 여성성의 특징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성이 뭐냐, 하는 그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여성은 어떤 존재냐? 여성에게는 남자들이 이걸 알아야 돼요. [여성에게는 그 얼굴이 명승지이다.] 관광지. 얼굴 모양을 흩뜨려서도 안 고요, 화장을 만져서도 안 돼요. 여성한테는.
왜냐하면 여성은 거짓말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성은 자기에게 아무리 다가와 봐야 자기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 사실을 비밀로 고수하고 간직하는 존재에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마치 엄청난 비밀이 있어 보이는 척을 해야 그게 여성이에요. 그 남성들로부터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해 보이는 그걸 비밀로 유도하는 역할, 그래서 얻고자하는 게 뭐냐 하면 자식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날 자식이 생겼네? 그게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호세아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네가 사생아를 낳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을 낳아야 될 여인이 사생아를 낳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혼인한 아내가 어느 날 이방종교가 그 안에서 나와 버린 거예요. 이방종교의 내부성이 나와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중간 과정을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뭐로 채우느냐 하면 네가 꼬셨잖아, 이걸로 채우는 거예요.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통으로 쳐서. 네가 남편 버리고 나가봤자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내부성은 진짜 외부성과 하나가 돼야 되는데 그 외부성이 없는 내부성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진짜 하나님의 남편의 종자를 만들 자식을 낳을 수가 없어요. 남편과 떨어져서는.
그런데 내부성이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바깥에 하나님과 헤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여성의 행동은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채우려고 하고, 개뿔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안에 비어있음을 감추려고 하는 거죠. 채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얼굴과 머리모양과 화장발이에요. 성형수술. 성형수술 한 것 생각 안 하고 만약에 어떤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애가 완전히 DNA가 다른 아이가 나온 것 같아. “이상한데 내가 예상한 모습이 이게 아닌데. 이실직고해라.” “미안해. 성형수술 일곱 번 했어.”
그 비밀스러움을 간직하는 비밀의 가능성, 그 비밀 속에 막상 들어갔을 때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두 자로 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 마귀의 특징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악마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협박, 공갈, 위협하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인간은, 너 죽으면 끝난 데이,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네가 그렇게 하면 망하는 수가 있어. 죽는 수가 있어. 네 존재가 유지해야지. 네 존재가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야지. 인생 그만큼 선방했다는 소린 들어야지. 너 여기서 인생 망가질 거야? 망가지면 너 마지막은 자살밖에 없어. 자살해도 좋아? 자살 안 하려거든 여기 협상하고 타협해. 악마가 계속해서 끝까지 네가 죽어버리면 네 존재도 없어져. 그러면 너는 왜 사는지 의미 자체가 날아가 버려. 네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협상과 타협해야 돼.
악마가 계속 그 짓하는 데 그 악마가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 능력이 없어요. 왜? 악마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천사거든요. 존재의 무게가 이만큼 위험한 거예요. 존재의 안일함과 내 만족함, 존재보다 더 나가야 되고, singularity 특수한 존재로 가야 될 텐데 가질 않아요. 남과 비교해서 얼추 밥 먹고 살고 내 집 갖고 있으면 이 정도하면 하나님 저는 욕심 없습니다. 70평짜리 아파트에 차 한 석 대 정도, 달리 욕심 없습니다. 왜 자꾸 욕망이 키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북쪽에서 오는 폭풍을 몰라요. 에스겔 선지자가 인자라고 불리는 이유를 모르고요, 에스겔 선지자 자기 마누라 죽는 이유를 몰라요. 왜? 성경에 에스겔이란 책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성경 왜 있지? 그냥 크리스마스 때 빵만 주면 되지 성경 내가 왜 읽어야 돼. 성경 왜 있는지 모릅니다. 부모가 자기 존재의 안일과 만족에 빠져있으니까 자식들이 교회 나와도 자기에게 성경과 목사한테 들었던 설교와 자기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나 차이 난 걸 발견합니다.
우리 아버지, 엄마는 그냥 밥 먹고 살고 만족이고 어린애가 교회 가니까 이상한 설교하겠지만 그래서 얼른 듣기에는 예수 믿어야 구원 받지 예수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그 소린 들어서 애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내가 밥 먹고 살까, 아니면 거기다가 예수 하나 더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까?
엄마, 아빠가 요구하는 그 담론, 담론이 현실이거든요. 언어의 구조가 현실이에요. 거기서 명령이 나오고 명령은 언어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 지시 자체가 아이들한테는 현실, 현실, 현실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현실로 인해서 그 애의 정신은 형성되는 겁니다. 애들이 조화를 하는 거예요.
아빠가, “너 그렇게 공부 못해서는 밥 못 먹고 산다. 열심히 공부해서 따라 붙어라. 과외비 대줄 테니까.” 애는 정리해요. “밥 먹고 살고 스스로 내 존재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구나. 그렇다면 예수는 왜 있지, 교회 왜 가라 했지? 아아 예수님과 기도하고 빌고 예수님 말씀 잘 지키면 내가 원래 원했던 내 행복을 예수님께서 제공해주는구나.” 이걸 이미 아이들이 나름대로 협상과 타협을 본다니까요. 북쪽에서 오는 폭풍 같은 것 몰라요.
그러니까 애가 순진하게 고3 되어 교회 가니까 엄마 기겁을 해요. “고3인데 교회를 가? 미친 거 아니야.” 이거는 완전히 나라가 느부갓네살 바벨론이에요. “너 공직자가 밥 먹고 살아야지. 열심히 또 일할 것 아니야.” 다니엘 세 친구가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의 건강법 우리는 거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율법대로 채소 먹고도 누가 건강한지 나중에 측정해봅시다.” 에스겔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존재의 안일함이 이렇게 위험한 거예요. 그럼 존재의 안일함을 누가 옆에서 부추였느냐? 마귀지요, 뭐. 마귀가 겁난다고요. 아니에요. 마귀는 안에 텅텅 비어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일부러 하나님이 자극한 겁니다.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지 아니하면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진짜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시도하는 것, 그런 아이디어가 왜 나오느냐? 자기 존재의 안일함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내 존재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겠는가? 안일함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여성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성화시켰다는 게 비록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간음이지만 간음했다는 확정, 그리고 그러한 지시, 그러한 확인과 규정, 이게 이스라엘의 희망이에요. 전체가 간음했고 음행했다는 말은 남편이기에 할 소리에요. 남편이기에 관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 말고 다른 남편 없어, 그런 뜻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독자적으로 살지 말고 너는 나의 내부성으로 살면 돼.” 우리 남편은 이런 분입니다. 그것만 증거하면 사는 게 참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취지가 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럼 그런 아내를 어떻게 할까요? 화장도 하지 말고, 머리도 다듬지 말고, 롤로 말지 말고, 그냥 수녀원의 수녀처럼 기초로션만 바르고 그것만 하고 돌아다닐까요?
육체를 우상숭배, 간음, 음행 여기에 필히 내어주게 돼 있어요. 그게 왜냐 하면 이 존재는 존재된 내가 스스로 깨뜨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육에서 영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가는 길이 없어요. 그래서 이 육체는 어디 내느냐? 그 악마, 악마는 아무것도 없는 우상, 그 악마가 아무것도 없는 채로 지배하는 이방민족, 이 세상에 우리 육체를 내어주는 절차가 필요해요. 그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우상과 접촉하도록 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우상을 접촉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여자,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아내, 우리 남편을 여호와란 사실을 자기 존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를 깨뜨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 했다는 그걸 근거로 선지자, 인자 쪽으로 오게 하지요.
인자 입장에서는 가만있어도 이스라엘이 자기 쪽으로 오는 거예요. 올 때 멀쩡한 이스라엘 존재가 오는 것이 아니고 우상숭배와 더불어 밑에서 심판이 주어지잖아요. 우상숭배와 심판이 짝을 이룹니다. 네가 우상숭배 했고 심판받아야 될 그 이유, 근거, 핑계를 하나님께서 인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계속 던져주는 거예요. 너는 우상숭배자야, 라는 것을 이스라엘 본인들이 몰라요.
교인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요. 인간이 아는 죄인은 반성하면 나아질 수 있는 죄만 죄라고 규정해요. 이거는 singularity가 아닙니다. 독창적이고 특이한 그게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죄를 모릅니다. 자기 죄를 모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죄와 의를 구분하는데 그 구분하는 짓 자체가 죄에요.
로마서 13장 8절과 9절 누가 읽어볼까요. 어떻게 해석하는지 제가 아이디어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여기에 보면 적어볼게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할 때 간음, 살인, 도적질 이것이 무엇일까 인간이 몰라요. 모르는데 안다고 우깁니다. 자, 이걸 모르는데 안다고 우길 경우에는 뭐가 작동하느냐 하면 내 존재 유지에 무엇이 유리한지 예상한 것을 여기다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간음하면 간음이고 간음 안 하면 간음 안 한 자가 돼요. 살인하면 살인자고 살인 안 하면 살인 안 한 자가 돼버려요. 도적질도 마찬가지고 탐심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은 어느 지점에 와야 되느냐 하면 사랑 지점에서 오는 거예요. 사랑 지점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뤘다 하잖아요. 율법이 모두 이뤄져버리면 거꾸로 가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는 것이 뭐가 된다? 간음이 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뭐가 된다? 살인이 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적질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탐심이 되는 거예요. 해석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부사이에 사랑하지 않으면 간음죄에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간음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최종지점을 모르고 최종지점을 지워버리고 여기다 뭘 두느냐? 내 존재가 얼마나 의롭고 정당하고 계속 존재할 가치가 있다, 사랑 대신 이걸 집어넣어요. 이게 무슨 사랑이냐? 지독한 자기 사랑이에요. 지독한 자기 사랑을 집어넣고 그다음부터 간음 안 하기, 살인 안 하기, 도적질 안 하기, 그다음에 탐내지 않으면 내 존재 유지에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겁니다.
교회 교인들이 바로 이런 걸 원하고요 목사는 소비자에 맞춰서 그런 걸 설교합니다. 이래도 이단 아니에요? 이래도 교회가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맞잖아요. 사랑이란 것은 십자가가 사랑이에요. 남편이 죽은 거예요. 아내는 따라 죽으면 돼요. 논개가 달리 논개가 아닙니다. 난 밀양에서 죽은 여자와 진주에서 죽은 여자가 헷갈려. 진주에서 누가 죽었지요? 논개. 밀양에서 죽은 사람 또 있잖아요? 임진왜란 때 장군 껴안고 죽은 사람 있어요. 여러분 모르는구나.
우리가 주를 위해서 순교한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순교란 단어를 몰라요. 순교는 주님 사랑하는 그 자체가 주님 사랑하게 되면 오메가3 먹고 백날 먹어도 순교에요. 주님 뜻이 뭐냐 하면 지금 우상을 떨어내는 거예요. 우상 떨어내는 주님 주신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주님 주신 아내 됨에 세상적인 아내 됨이 가득 녹이 슬어있거든요. 녹을 뜯어내는 데 성경이 율법화 작업해서 뜯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 남는 건 뭐냐?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것만 남지요. 참 쉽지요. 정말쉬운 거예요.
제가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이단들의 특징은 율법 다 지키는 게 필생의 사업이었다. 이 내부성, 진짜 여호와를 남편으로 보는 그 내부성이 장착돼 있다면 그 여성의 역할을 그걸 자기 내부성을 외부성으로 드러내는 거예요. 자기 남편 자랑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혼자 있지 않고 영원한 남편과 함께 있다는 걸 굉장히 감사히 여기기 때문에 자기 자랑하고 자기 존재 이익을 챙길 그런 생각이 들질 않아요.
또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주춤주춤하는 이유가 있어요. 여기 교재에 나오는 2페이지의 죽음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하는데 강의 시간이 이것 설명한다고 혹시 허비될까 그게 아까운데요. 그래서 빨리 지나가겠습니다. 2페이지 밑에서부터 일곱 번 줄에 아까 이야기했어요. 보편적 죽음이라 하지 않고 이렇게 했어요.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도 제거된다.
인간이 죽어버리면 내가 죽음에 대해서 예상했지, 라는 생각도 같이 제거돼버려요. 삶의 의미를 찾을 길이 불가능해요. 죽음을 미리 예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예상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특히 불교 같은 데서 다 대비하고 있잖아요. 그 자체도 우상이에요.
그다음에 4페이지 보겠습니다. 동일성, 넘어가서 5페이지에 보면 일곱 째 줄에,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노선이 꽂혀야 과거의 연을 끊을 수 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인간이 어떤 라인을 잡을 때 내가 살다가 예수 믿었잖아.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 내가 어느 라인에 내가 언제 태어났고, 내가 교회 갔고 그때 성령 받아서 예수 믿었고, 나는 언제 죽을 때 그래서 나는 예수 믿은 게 계기가 되어서 천국 간다. 이렇게 되면 라인이 나의 존재를 위한 라인이 돼버리고 이게 우상숭배가 돼요.
주님께선 이런 라인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거는 내가 존재, 이미 있음에서 나온 있음보다 더 없음의 차원이 아니고 singularity 독특한 차원이 아니고 나 여기 있음, 너도 있지만 나도 있어. 다수성이죠. 다수성 입장에서 이 라인을 생각하면 이게 바로 우상이 된다고요. 우상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을 주께서 뭐로 바꿉니까? 인자, 에스겔로 바꾼다고.
에스겔은 자기가 예상도 못한 그런 라인이 등장하는데 그 라인으로 옮겨 타야 돼요. 그러면 이러한 라인 자체가 우리 존재 차원에서 이것이 거부당해야 되는데 우리의 존재는 스스로 이걸 거부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 거부하겠다는 우리 행위 자체가 내 존재의 유리함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내 존재는 내가 차마 버릴 수가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나를 제거할 수가 없어요. 예수라도 걸쳐놔야 나중에 혹시라도 천당 오면 예수 믿었습니다, 갈 수 있잖아요. 그러니 나를 제거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은. 그게 북쪽에서 오는 폭풍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도 닦아서 천당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5페이지 가기 전에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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