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에스겔: 새 성전-한 순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공간 자체가 날아가 버리는 이야기했지요. 두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의 원형 형상으로 인하여 시간 자체가 날아가 버린다. 시간이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 시간이 없다는 뜻인가? 교재 5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그렇게 돼 있어요. [‘once and for all’, ‘모든 것에 대한 한 번, 모든 것을 위한 한 번’]
이게 뭐냐 하면 시간은 어제, 오늘, 내일 이렇게 연결돼 있고 어떤 선처럼 라인처럼 구성돼 있잖아요. 그런데 ‘once and for all’, ‘모든 것에 대한 한 번, 모든 것을 위한 한 번’의 사건, 이게 십자가 사건인데요. 십자가 사건이 되어버리면 모든 시간이 하나의 사건, 단 한 번의 사건이죠.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빨려 들어간다(시간에 대한 심판).
그다음에 이게 다시 단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모든 시간은 파생됐다. 모든 시간은 흩어졌다, 거기서 나온다 이 말이에요. 시간의 파생물, 하나의 사건에 있어요. 시간과 사건의 차이만 아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사건은 시간을 다 끌어 모으고 빨아 당기고 다 퍼뜨리는 전개시키는 단 하나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원형 형상, 원래 형상에서 시도를 한 겁니다.
그게 시도가 되려면, “십자가 사건 했다. 너희는 다 죽었어.”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의 활동을 하나하나 끝까지 점검해서 악하다고 평가를 내려야 비로소 모든 시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군에서나 옛날에 학교에서도 그랬는데 군에서 제일 억울한 것이 한 사람이 잘못했는데 단체로 기합 받는 경우가 있어요. 참 굉장히 불합리해요.
그래서 지금껏 제 모토는 뭐냐? 군대를 없애라는 것. 내가 대통령 되면 군대 없애버려요. 뭐 깡패조직도 아니고 모든 것이 불합리해요. 한 사람이 했는데 단체기합을 왜 받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단체기합 할 때는 그 상관이 하나하나 전부 다 기합 받을 만하고 벌 받을 만한 것을 사전에 확인이 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기합 주는 그러니까 벌주는 사건이 정당하게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는 이 일을 위하여 천사는 하나의 고정된 존재가 되면 안 되고요. 천사는 기능이어야 되고, 이 기능은 뭐냐 하면 활발하게 활동해야 돼요. 천사가 활동해야 됩니다. 한 곳(공간)에 또는 한 순간(시간)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천사의 철칙이에요. 천사는 어디서 나왔지요? 에스겔 1장에서 나왔지요. 천사들이 눈을 갖고 있다. 그다음에 뭘 갖고 있습니까? 숯불을 갖고 있지요. 다 태워버려요. 벌겋게. 단 쇠처럼 돼 있어요. 개역성경에. 벌건 쇳덩어리에요. 만질 수도 없어요. 천사에.
저건 천사네, 그건 잘못된 거예요. 저건 천사란 존재야, 이렇게 평하면 이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가 내 존재와 유비, 내 존재와 유사한 존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천사도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천사가 변신한다는 것, 천사는 활동 그 자체가 천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을 못하고 천사가 어디 있지, 어딜 가면 천사를 만나지, 이러고 있다고. “천사를 찾아 사바 사바 사바” 이런 노래 있지요. *<날개 잃은 천사>
천사는 사람의 손에 쥐어지지 않습니다. 호칭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천사는 에너지에요. 그냥 활동 그 자체를 가지고 구석구석 모든 데에 활동합니다. 그걸 뭐라 하느냐? 천사는 유동적이다. 이 천사가 유동적인 것은 이유가 있어요. 천사는 유동적이다. 한 번 더 씁니다. 대비되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반대말, 고정적이다. 인간이 고정돼 있거든요. 고정에서 뭔가 발산돼요. 인간에 뭐가 있냐?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다섯 가지 감각이 있다고 하잖아요. 피부감각도 있고.
고정돼 있으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의식이 나와요. 인간이 생각하는 의식이 나온다고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걸 의식이라 해요. 나는 내 존재를 의식한다, 그런 뜻입니다. 인간이 의식하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잠잘 때 의식하지 않지요. 잠잘 때 두뇌활동이 잠시 휴식 취할 때 시냅스, 두뇌 대부분이 의식하지 않아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인간은 ‘의식+꿈’으로 돼 있습니다.
의식과 꿈인데 둘 다 인간에게는 의식과 꿈이 공통점이 있어요.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과 연관시켜보겠습니다. 의식은 생각하기 때문에 언어로 구성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구성이 가능해요. 말로 나는 뭘 봤다, 나는 밥을 먹었다, 나는 잠을 잤다, 운동했다 이렇게 언어구성이 가능해요. 그런데 꿈도 언어구성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둘 다 의식이에요. 꿈이 의식에 속합니다.
그러면 의식이 없을 때 무의식이 뭐냐? 의식이 무의식을 가려요. 가린다고요. 그러면 꿈은 무의식이지만 왜 의식인가? 꿈은 해석된 무의식이기 때문에 이건 언어구성이 가능하단 말이죠. 언어구성이 가능하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잘 들으세요. 언어가 동원되어 설명이 가능하다. 설명, 납득, 이해가 가능하다는 말은 뭐냐? 이거는 거짓말이다. 모든 인간은 말하는 순간 전부 다 거짓말됩니다. 조작이 돼요.
그 조작하고 조성하고 거짓말하는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속에 있는 무의식, 다시 말해서 욕망을 제대로 표현 못함이 상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거예요. 언어를. 그런데 자기 속의 욕망을 자기가 표현할 길이 언어만 사용했다면 거짓말되니까 그러면 자기 욕망을 표현할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죠, 없어요.
욕망이 한 80이라면 표현하는 것은 20내지, 20도 많다. 5내지 8, 20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나머지 60은 뭐냐? 구라입니다. 그러니까 20 속에 전체를 다 담은 것처럼 그렇게 가장되게 하는 거예요. 가장되고 연출되고 연기하고 꾸미고 속이고. 그러니까 인간은 가만있으면 안 속이는 데 말만 꺼내면 속임수에요.
그럼 인간의 욕망은 뭐냐? 욕망은 유동적인데 이유가 뭐냐? 욕망은 삶의 에너지기 때문에 삶의 활력이에요. 인간은 이유 없이 그냥 움직여요. 이유 없이 생각하는 겁니다. “너 왜 그렇게 행동했어?”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내가 뭔가 착실하게 다르게 살려고 했습니다, 하고 주저리주저리 말 꺼내는 순간 거짓말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삶의 활동력, 활력을 설명 못한 이유는 활력을 하나님이 애써 주셨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 힘으로 못 살아요. 그래서 인간이 욕망을 가짜로 만드는데 그 욕망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만든 게 뭐냐 하면 ‘나’에요. 자아에요. “나는 이렇게 밥을 먹었습니다.” 아니, 아니 그 말은 틀렸어요.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겠지요. 내가 배고픈 게 아니고 배고픈 당사자가 내가 된 거예요. 그거나 저거나. 그거나 그게 아닙니다. 이게 달라요.
이 말은 인간이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허겁지겁 아무리 애써도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책임지겠다는 자체가 또 거짓말이에요. “이번 죄는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어디 구라를 떨고 있어. 네 죄가 뭔지 알아?” 북한의 김 정은 지금도 숨 쉬고 있습니다. 누가 숨 쉬게 했는지 알아요?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숨 쉬게 하신 거예요.
“김 정은은 죽여 버려야 돼.” 물론 이거는 우파 쪽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금 정치적 중립을 애쓰고 있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애쓴다는 이것도 거짓말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죽으라고 해도, 푸틴 죽으라고 해도 백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해도 안 죽습니다. 왜? 푸틴을 작용하는 생존의 에너지나 우크라이나 국민들 에너지나 전부 다 본인들에 의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에게서 나온 게 아니에요.
누가 죽고 사는 그 문제는 본인 책임 하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로 지가 거짓말하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좀 받아 적으세요. 문제는 천사가 cctv를 온 천하에 도배를 했어요. 그래서 전부 다 까발리는 거예요, 이 거짓말을.
그러니까 천사는 욕망이라서 유동적이에요. 그걸 부유성, 떠다닌다 하는데 그냥 유에프오 같아.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어요. 운동할 때 초파리 같아. 계속 부채질하면서, 달아나지도 않아 계속 있어요. 어떤 때는 네 마리, 어떤 때는 서른 마리 달려들고요. 우리 인간으로서의 관리대상이 안 되는 게 천사입니다. 천사가 관리대상이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관리대상이 안 돼요.
그리고 거짓말쟁이한테 관리 받을 하나님도 아니고요. 입만 떼면 거짓말인데 인간과 협상할 일 있습니까, 타협할 일 있어요? 없어요. 천사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인간 활동을 천사를 수사관처럼 보내서 다 조사를 합니다. 조사를 해서 그걸 다 인간의 시간의 끝자락까지 가서 다 한 곳에 수집해요. 한 장소 수집합니다.
그게 바로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 한 순간, 그게 십자가입니다.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아울러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판정을 내려버렸어요. 판정을 내리고 그러한 징후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단 한 순간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 순간이 뭐냐? 본인들이 각자 다수성으로 죽는 순간, 죽음에 예외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왜 사는가? 죽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 단 한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겁니다. 인간의 긴긴 시간, 송해는 96세까지 살았지요. 그 96세까지 산 것, 그가 남긴 게 뭡니까? 전국노래자랑? 아니에요. 본인의 죽음입니다. 본인의 죽음이 개인적으로 살아 있을 때는 자기의 살아 있음이 내가 살아 있는 게 되지요. 나라는 아까 나왔지요.
이 나가 뭐죠? 욕망을 자기 나름대로 형상으로 하나로 결합시킨 것이 나잖아요. 이 나가 죽는 순간에 나는 없어져요. 사라져요. 전부 다 단 한 순간에 종속되는 겁니다. 단 한 사건에 종속이 돼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그 한 순간에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나의 증인이 아니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십자가의 증인이 된다 하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건드리지 마라. 나 십자가 안에 있다.” 이 말이 뭔 뜻이냐?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건드리지 마. 나 십자가 안에 있어. 너희들은 십자가 밖에 있어. 십자가 밖에 있는 인간이 십자가 안을 건드리면 안 되지. 이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요. 너희는 내게 죽었고 나는 너희에게 이미 죽었다.
그런데 이 죽었을 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었다는 그 순간 단 하나의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도착한 거예요. 사도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사람은 96년간 살아야 도착될 도착지점을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영을 받은 순간에 이미 도착한 거예요. 도착하고 그다음에 나온 게 뭐라 했습니까? 모든 것이 시간에 빨려 들어간다 했지요.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그 한 순간으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발생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통해서 이제는 그 순간을 다 보여주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것은 뭘 닮았느냐? 천사를 닮았지요. 천사의 보좌에서 열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 위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여기 덮개처럼 돼 있는 게 궁창이라 했지요. 궁창과 이 사이에 번개 치지요. 심판의 흔적입니다. 불결한 공간이죠. 이 위에는 굉장히 고요해요. 마치 KAL기 cm송처럼 비행기가 구름 위로 날아버려요. 구름 위라는 궁창 위로 날면 밑에서 전쟁이 나던 소낙비 오던 아무 영향 받지 않고 고요하게 날아가는 거예요.
고요한 적막의 순간, 그걸 삼층천이라 하는데 그 번개치고 요란스러운 후려잡는 세계, 오늘 2분대 잡자, 군대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내 밑에 다 집합. 그 날은 막사 뒤에서 잡히는 날이에요. 고참은 벌써 소주 2병씩 다 먹고 빠따 갖고. “목사님, 옛날 군대이야기?” 요새도 마찬가지에요. 여기는 요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고요해도 너무 고요해요. 이 위의 세계, 그 고요한 세계, 삼층천 세계, 궁창 위의 세계. 이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것은 바로 에스겔에서 인자, 에스겔 선지자가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 몇 개 단어를 다시 연결시켜봅시다. 유동적이다. 욕망은 에너지, 무슨 에너지? 활동 에너지. 멈추질 않습니다. 어디 한 곳 고정돼 있는 게 아니에요. 어디든지 왔다 갔다 해요, 천사가. 그래서 욕망이 유동적이고 무의식입니다. 이 무의식이 무엇을 공격하느냐? 의식세계를 공격하지요. 의식세계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언어로 돼 있어요. 개념으로 돼 있고 언어적 체계로 돼 있습니다. 언어적 체계로 돼 있을 때 나타나는 게 의미가 되는 거예요.
의미는 어디서 나왔느냐? 인간의 의식에서 나왔거든요. 무의식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무의식은 이해 안 돼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의식세계에서 언어세계에서 무엇이 안 되느냐 하면 이게 의견 통일이 안 돼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의견 통일이 안 되는 그것이 원형 형상에는 이게 옳은 겁니다. 이게 바른 거예요. 오히려 꾸미는 것이 거짓말이라 했잖아요. 이렇게 우리가 억지로 맞추려고 하는 게 이상하고 이게 어색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만난 지 백일 됐는데 여자가 하는 소리가, “다른 사람 다하는 뭐 이벤트 없나?” 남자는 여자한테 이벤트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이벤트를 함으로써 그 여자는 남자한테 자기 한계성을 노출한 거예요. 이벤트로 꽃을 줬다. 여자 입장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뭘 기억하느냐? 꽃을 든 남자에요. 남자는 그런 여자를 이용하지요. 여자 삐지면 꽃만 주면 해결되니까 다루기 쉬운 거예요. 여자가 갖고 있던 의식세계보다 더 넓은 범주를 남자가 그때부터 책정이 가능합니다. 설정이 가능해요.
그러니까 뭔가 이벤트하고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그거는 스스로 늪에 빠지는 거예요. 왜 그럼 그걸 해 달라하느냐? 여자가 남자한테 꽃을 선물해 달라, 너는 남들 하는 이벤트 없나, 이렇게 할 때 이건 뭐냐 하면 여자에게 남자는 그저 내가 형성된 의미구성의 일부로서 가담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니까 가담될 때는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두 번째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동질성.
당신이란 남자가 나란 여자를 원한다면 당신은 나의 생각을 이해하고 동조하고 알아야 돼, 그렇게 요구합니다. 동질성, 이게 가능합니까? 미쳤어요? 이런 경우 인간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근데 여자가 동질성을 요구하니까 남자는 맞춰주면 되는 거예요. 맞춰주고 다 먹는 거예요. 원래 소 잡고 개 잡고 돼지 잡을 땐 잘해줘요. 맞춰주고 다 잡으면 되잖아요.
여자는 아까 자아, 그러니까 이걸 생각해요. 자연은 대혼란이에요. 오늘 오후 설교에 이야기한 것처럼 자연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덧없음’이에요. 이건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카뮈가 이야기했거든요. 부조리 이야기한 사람. 자연은 덧없음이고 맹목적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인간은 행복을 원해요. 그러니까 이게 아귀가 안 맞아요. 인간이 플레이하는 이유가, 자연이 우리의 소원을 안 들어줍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쉬운 이야기죠.
하나가 탈나면 하나가 망가지고 하나 고치면 또 하나 망가지고요. 가스레인지 고치면 냉장고, 세탁기 고장 나고요. 잠시도 쉴 틈이 없어요. 냉장고가 왜 고장 났는가?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왜 이치냐 하면 삼성에서 냉장고 만들 때 날씨 좀 더웠거든요. 온도가 높다보니까 같은 제품이라도 다 달라요. 그 제품마다 제조환경이 다르단 말이죠. 그러면 삼성 냉장고 고장 난 이유가 뭐냐? 날씨 더운 거고 날씨는 왜 더운가? 탄산가스가 높아서 그런 거예요.
하여튼 모든 탓은 대자연이 수시로 요동치고 하나같이 일률적이 아닌 이 대자연 속에 고정점을 유지한다는 얼마나 억지스러운 인생입니까, 이게 말도 안 되게 억지스럽지요. 오죽했으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흘러가자 이렇게 하지만 배고프면 흘러가는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흘러가고 싶어도 흘러갈 수가 없어요.
뭐가 막습니까? 이 자아라는 것, 이 의식세계라는 것이 막아버려요. 자아는 뭐냐? 내 안에서 나는 같은 성질, 동질성이에요. 동질성 유지에요. 그래서 만약에 내 세계에 들어오려면 당신이란 남자는 나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조건 하에 나는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게.
만약에 나라고 구성한 요소가 96살까지인데 그중에 한 가지가 우연히 남자가 맞았다 칩시다. “당신 뭐 좋아해?” “스파게티.” “어, 나도 스파게티.” 남자가 스파게티 좋아해서 한 가지 맞았는데 그 스파게티 때문에 98가지가 맞는다고 착가하는 거예요, 스스로. 본인이 그렇게 착각을 해요. 왜냐하면 스파게티 좋아한다는 의미를 자기 본부에 가서 이걸 확장시켜요. 자랑질하는 거예요.
“내가 아는 남자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 스파게티를 똑같이 좋아하더라. 나머지도 나와 똑같을 거야.” 이래서 거기서 전도와 선교를 해요. 지가 지한테 내부에 선교한다니까요, 전도한다니까. 이 남자를 믿어라. 그러면 네가 행복해질 것이다, 이런 교리를 퍼뜨려요. 살아보면 스파게티 빼놓고 다 틀려.
자아는 결국 once and for all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는 이 혼란스럽고 혼돈, 종잡을 수 없는 이 세계의 그저 일부를 갖고 있는데 갖고 있어도 이 우주 자체가 무의식이거든요. 우주를 어떻게 알고 자연을 어떻게 알아요, 의식 없어요. 무의식 가운데 하나의 요소를 따와서 그걸 의식화시키고 그게 나라고 우겼던 겁니다. 우기게 된 거예요.
once and for all의 시초가 있어요. 시초가 뭐냐? 내가 결과적으로 십자가라 했잖아요. 시초가 선악과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이상한 스위치를 만들어놨어요. 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따먹어라.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따먹지 마라. 이러한 조건 하에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그러한 규정을 인간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확정지어버렸습니다. 인간의 팔자가 그걸로 종결되었어요.
그 선악과가 보여주는 once and for all, 단 한 번에 망가지고 해체되고 무너지는 그 원리가 하나님께선 그 원칙을 양보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그걸 완성을 시켜버렸습니다. 십자가 믿으면 모든 것 다 돼. 십자가 안 믿으면 모든 것 다 날아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뿐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바로 원인을 추적해요. 이 에너지, 무의식, 유동적, 종잡을 수 것,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자아가 생겨서 잡으려고 하는 순간 자아가 같이 있고 자아가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천사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천사의 활동이 어떻게 시작한다고요? 인간세계를 그대로 천사가 온 몸으로 받아들여요. 소, 사자, 독수리, 그리고 인간.
현재 이 인간의 의식세계에서 볼 수 있는 대표 형상, 동서남북을 표현하듯이 네 개만 필요한 거예요. 동서남북 그 바깥은 없기 때문에 모든 방향으로 보좌는 움직입니다. 보좌가 밖에 있는 것은 서로 대결하지 않아요. 자체적으로 대결하지 않고 한쪽으로 쫙쫙 움직이게 돼 있어요. 밖에 있어서. 그게 보좌 보면 나와 있어요. 1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한쪽 방향으로 간다면 그대로 주저 없이 신속하게 움직이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성경에. 속히 움직이더라.
1장에 그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인간세계는 작살났다 이 말입니다. 인간세계는 고정된 세계고, 의식세계고, 인간의 단어를 주고받는 세계. 문자, 단어, 의미를 주고받는 세계, 개념을 주고받는 세계. 단어, 개념이 모이면 이걸 담론이라고 잘 안 쓰는 단어가 나와요. 너무 어려운 단어기 때문에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론조성.
여론조성에서 인간의 정신 규합돼요. 하나로 합해집니다. 이것이 구체화되면 이게 국가가 돼요. 인간은 기존에 있는 담론에 의해서 정신이 탄생하는 거예요. 육신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인간이 갈고 있는 모든 정신은 가정이라는 조직체에서 가정의 여론조성에 의해서 이것이 정신으로 굳어지는 거예요. 자아가 형성된다 이 말입니다. 자아가 형성되게 되면 자아와 같은 것, 동질성 되는 것만 계속 끌어 모으고 그렇지 않는 것은 전부 다 내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도 내칠 때 그냥 내치는 게 아니고 악하다고 내치는 겁니다.
저한테는 그런 경험이 없는데 드라마 보면 가끔 나오는 게 있어요. 재벌 3세들이 심심하면 모여서 마약이나 피우고 술이나 먹고 파티나 여는 것, 그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사치합니까, 하면 내 돈 주고 내가 하는데 니가 뭔데, 이렇게 하지요. 물론 드라마 이야기지만 그것 어디서 배웠겠어요? 어릴 때부터 너는 특정한, 특수한 계급, 엘리트 계급이기 때문에 이런 술값, 이런 차, 페라리인가 뭔가 그런 돈 쓰는 것 아까워하지 마. 너 하나 귀하기 때문에 다 줄게.
이걸 singularity라고 해요. 독특한 존재, 엘리트도 싫어요. 독특해야 돼요. singularity 독특한 것, 특별한 존재. “네가 이 기업을 물려받아야 돼.” 이러한 특별한 가정교육에서의 자아라 하는 것은 뭐냐? 적어도 이 정도해도 나한테는 악이 되지 않고 선이 되는 그런 자아로 이미 굳어져버린 거예요.
어릴 때부터 재벌 총수의 훈련을 받고, 협상할 때는 큰소리부터 협박부터 시작하고 그런 것 배우는 거예요. 할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배워서 없는 사람은 짓밟고, 있는 사람한테는 아부하고 권력자에게 그런 것 다 배우는, 점점 배우는 게 뭐냐? 자기가 하나의 담론, 가정의 여론이 되고 자녀가 그 정신으로 물려받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여름에 더우면 뭐로 감사하냐 하면 저녁 때 등목하면 그걸로 감사했어요. 무슨 수영장이고 아이고. “뭐 바캉스? 소는 누가 키우는 데.” 우리 때는 말이야,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뭐 잔업? 지금 스리랑카, 네팔, 필리핀 사람들 작업, 오케이 다 받아들여요. 그것 모아서 고국의 부모들 밥 먹여 살려야 되니까 잔업을 자청합니다. 한국말 잘 못하지요. 네팔 이런 사람들. “뭐 근로조건이 안 맞다? 어디 배부른 소리하고 있나.” 그것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가 문제 아니라 바로 외국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자아를 형성시킨 자기의 여론, 담론의 자아 탄생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인자의 출생지가 어디냐? 인자의 출생지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에스겔을 보면서 인자된 선지자에서 무엇이 깨어지느냐? 인자, 선지자 에스겔 동질성이 깨어진다. 누가 깨느냐? 한 달 전 계시 다르고, 오늘 계시 다르고요, 그다음 계시 달라요.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늘 다르면 인자는 자기를 동질성을 갖출 여유가 없어요. 난도질당하는 거예요.
이 시점에서 다시 1강, 2강 정리하게 되면 지금 보좌는 인간이 알고 있는 공간도 아니고 시간도 아닙니다. 형상입니다. 자유로운 형상, 유동적인 형상,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형상, 인간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형상, 자연보다 더 무질서한 자연, 자연에 없는 자연, 자연 위에 있는 궁창 위의 새로운 원형, 모든 형상의 원형 그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거든요. 그것이 에스겔이라는 인간에 그대로 담겨버려요.
교재 8페이지에 보면, 선지자의 비참한 모습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좋지 않은 음식(4:9)] 좋지 않은 음식 정도가 평소 먹던 것의 ⅙밖에 안 돼요. 이거는 그냥 굶어죽어요. 490일 동안 이렇게 먹었다는 것은, 그것만 먹었다는 뜻이 아니고 계시 전할 때만 이런 식으로 먹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어느 위치에서? 예루살렘에서 천오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벨론 강가에서.
[밀어 버린 머리 모양(5:1)] 이거는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갈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거예요. 이때 쓰는 단어가 이거에요. 선취. 어려운 단어 아니에요. 미리 취한다, 미리 갖는다는 뜻이에요. 선지자가 뭐라고요? 미리 갖는 것, 자기 안에 뭐가 있다고요. 현재 살면서 미래의 삶이 먼저 침투해 들어온 것이 선지자에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라고 내가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성도고, 선지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시면 되는 겁니다.
미래의 삶, 어떤 책임지지 않는 미래의 삶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리 시작된 자가 성도에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 것처럼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자유로움이 이미 성도 안에 침투해서 성도한테는 어떠한 정죄함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고, 내 몸이 아니라 주의 몸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신약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구조적으로 이야기해서 혼돈이 질서 속에 질서를 파괴하면서 들어왔다.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하시면 됩니다. 종잡을 수 없는 혼돈이 내가 관리대상이 안 되는 관리대상을 벗어나는 무질서가 내 안으로 침투해버렸다. 왜? 나를 해체시키기 위해서. 자아가 문제거든요. 자아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아가 일방적으로 거짓말해서 대자연의 혼돈을 하나의 질서처럼 묶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자연과학이잖아요. 생물학, 물리학, 화학 그걸 말하는 거예요. 질서를 하나 묶어내는 겁니다.
묶어낼 때 그 의미로 대자연을 설명할 수 있느냐? 대자연의 파괴를 설명 못하지요. 제가 오늘 주일 낮에도 그걸 언급했지요. 세상 현실을 설명하는데 과학과 예술과 그리고 정치와 종교가 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등등의 성경이 이 세상을 설명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이 세상을 가상으로 보고 예수님의 세계를 진짜 현실로 봐서 진짜 현실,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을 설명하는 반면에
이 세상은 진짜 현실인지 그것도 모르고 지가 소경인 줄 모르고 눈 떴다고 자기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설명을 시도해서 그걸 묶는 것, 그 안에는 자아가 들어있고, 동질성을 유지하고, 그런 식으로 설명되니까 현실이 실컷 96년 동안 전국노래자랑, 하고 살았는데 그 노래자랑 끝나고 난 뒤에 지옥으로 가고.
묻고 싶어요. 아저씨, 할아버지 그동안 뭐했어요, 이렇게 죽을 동안 뭐했어요, 왜 살았어요? 모르지. 모르고 살은 거예요. 가봐야 알겠지. 그거는 살아 있을 때 하는 이야기고, 죽을 때는 갈 때까지 와봤잖아요. 와봤는데 죽음이라, 지옥이라. 그럼 뭐예요, 인생 뭐고?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게 농담인 줄 알았지요. 농담 아니에요. 진짜 죽어요.
그래서 하늘나라의 심판성이 인자에게 들어와 버립니다. 이 에스겔은 선지자거든요. 25세에 부름 받아서 30세부터 계시받기 시작했는데 B.C.597년에 바벨론 갔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천오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성신께서 환상 중에 왔다 갔다 했는데 에스겔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이거든요. 에스겔 아버지 이름이 유명한 사람이에요. 누굽니까? 미국 대통령 부시, 나올 건데? 맞네요. 3절에 부시의 아들.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에요.
제사장 특징이 뭐냐?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게 제사장이에요. 그러면 그 죄는 어디서 볼 때만 죄냐? 하늘에서 봐야 주님의 새로운 계시로 봐야 그게 죄지, 내가 죄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죄입니다. 거짓말쟁이가 무슨, 네 자신도 모르면서 나는 죄 지었습니다, 라는 거짓말을 왜 하느냐. “하나님 저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이 기가차서, “네가 어디서 잘못됐는지 네가 알기는 아냐?” “이런 것 잘못됐고, 저런 것 잘못됐고.” “그 평가가 잘못된 거야.”
“그러면 회개 어떻게 합니까?” “회개하지 마. 네가 회개할 자격도 없어. 그냥 죽어, 회개하지 말고.” 자꾸 회개하겠다는 의미가 살고자하는…. 인간이 살고자하는 것은 내 욕망이 사는 것, 에너지가 사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사느냐 하면 내가 사는 걸 산다고 이야기해요. 인간 세상에서 개념상. 인간사회는 내가 살아야 사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아이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러잖아요. 그 순간에 고속도로 차사고로 두 명 죽었는데? 내가 잘 살면 잘 사는 거예요. 남이야 죽든 말든 몰라. 나와 내 가족 잘 살면 잘 사는 거예요. 아멘? 예, 아멘. 우리 아들만 잘 살면 잘 되는 거라니까요. 남의 아들 말고 내 아들. 얼마나 보세요. 자연을 축소시킵니까? 자연의 활동성을. 왜 주님을 반대하는지 알겠지요.
그래서 이 제사장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성을 여기다 짊어지워요. 그러면 이 제사장은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담론discourse, 여론이 형성돼 있는 현 이스라엘의 신학체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체제는 이게 구원체제인데요. 이게 뭐냐 하면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구원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기존의 에스겔에서 주어지는 우리가 구원된다는 이야기와 하나님께선 이걸 저지한다는 모순되는 이중성, 그걸 누가 하느냐? 에스겔이 양면성을 다 담고 있습니다. 한쪽은 이스라엘의 희망을 담은 동질성과 그걸 깨부수는 이질성, 이 둘 다를 갖고 있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에게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동질성 자체가 죄라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성, 인간의 의미성, 언어성, 인간은 무의미하면 안 돼, 인간은 허망하면 안 돼. 인간이 왜 허망하면 안 되지요? 이유 대보세요? 이유 없잖아요. 나는 앞으로 오십 년 더 살래. 그렇게 살고 싶어요? 백 세 넘는데.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어떻게 됩니까? 그러한 시간성 자체를 벗어나는 방법은 아까 once and for all, 모든 것의 단 한 번이 꽂혀버리면 언제 죽는다 할지라도 그건 쉬는 시간이고요. 더 이상 성도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걸 제가 강의 때 언급했습니다. 성도에게는 죽음이 없다. 이거는 숨 끊어지는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생명뿐이다. 성도한테는 생명뿐이에요. 안 죽어요. 그러니까 죽음에 협박받지 마세요.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약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죽는 순간이 제대 날짜고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니까 죽음을 통해서 볼모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낮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죽음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패배했다고 여겨서 패배감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은 싫어하는 거예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내가졌다는 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졌을 경우에 자살합니다. 굉장히 심각하지요. 심각할 때는 여기서 강의를 끝내는 게, 다음 시간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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