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에스겔: 새 성전-원형 형상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모아주셔서 사람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바탕이 되는 기초가 되는 말씀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 움직이는지,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지, 어떻게 완성이 되는지 저희들이 같이 참여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교재 제일 끝에 보면, <앙리 마티스의 춤>이라고 그림이 나와 있지요. 이걸 왜 실어놨는가? 이것을 실어놓은 이유는 에스겔 1장부터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납니다. 보좌를 설명하는데 거기 나와 있는 이미지, 형상을 가장 유사하게 설명할 길이 없는가 싶어서 제가 찾아보니까 <앙리 마티스의 춤>이라는 게 적절한 거 같아요. 일종에 강강술래 같이 보이고, 여기 춤추는 사람이 다섯 명 나오는데 원래 보좌에서는 천사 네 명이 나옵니다. 네 명이 서로 날개가 인접해서 하나의 사각형을 이뤄요. 서로 날개를 연결시켜서 사각형을 이룹니다.
천사 하나 당 날개가 네 개 있고요, 두 개는 발을 가리고 두 개는 펼치는데 사용하고요. 날개 총 열여섯 개 나오고 천사 하나가 사람으로 소, 독수리, 사람, 또 하나 사자 이렇게 네 가지 면으로 나타나요. 천사 하나가 사면으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천사 하나가 사각형으로 보면 돼요. 그리고 바깥의 이것도 전체는 사각형.
이 천사의 보좌가 어디 밑에 있느냐 하면 새로운 궁창, 하늘로 보면 돼요. 그냥 하늘 막, 궁창 아래 돼 있고 이 밑에는 인간 세상으로 돼 있고요. 궁창 이후는 새로운 보좌가 또 하나 있어요. 수정 같이 맑은 궁창 위에 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여기에 인자 같은 분이 앉아 계시고, 이 궁창과 네 개의 천사 사이에는 번개가 칩니다. 여기 네 개 사이에 바퀴가 있어요. 바퀴가 각각 네 개씩 있습니다.
바퀴를 달리 이야기하면 gyroscope라는 게 있어요. 자이로스코프라는 게 지구의 자전 같은 것을 운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좀 기이한 현상이에요. 우리말로 하면 ‘회전의’라고 하는데 이 말이 더 어렵지요. 자이로스코프라는 뭐냐 하면 바퀴가 그냥 멈춰있으면 밑으로 뚝 떨어지는데 열심히 바퀴를 돌리면 이상하게 중력을 이겨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이게 안 떨어지고 자동적으로 회전하면서 돌게 돼 있습니다. 실제로 물리학에서 이런 걸 많이 다루거든요. 그래서 회전력이 중력을 이긴다. 회전하게 되면 떨어지지 않고 자생적으로 바퀴가 자기 고유의 회전력을 유지한다는 그런 내용인데 이런 바퀴가 네 개 있습니다.
천사는 날개 있지만 밑에 송아지 다리 같은 다리가 있고 여기에 발이 있는데 발은 송아지 발 같이 아주 연마가 돼 있다. 빛이 난다. 근데 이 전체, 바퀴도 그렇고 천사의 몸통 그렇고 공통점이 몸 전체가 전부 다 눈으로 만들어졌어요. 눈이 다 새겨져 있습니다. 바퀴에도 도는 바퀴 안에 촘촘히 전부 다 눈으로 박혀있고, 송아지 다리 같은 여기도 눈이 있고, 여기도 눈이 있고.
그래서 공통점이 눈, 그다음에 전체 천사 하나하나마다 숯불이 핀 것처럼, 여러분 갈빗집 가면 숯불갈비 하잖아요. 석쇠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 그 갈빗집에서 고기 얹기 전에 숯불이 벌겋게 빛나잖아요. 천사의 몸통 자체가 벌겋게 숯불 핀 것처럼 그렇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전부 다. 공통점이 눈이 있고, 숯불이 있다. 눈은 본다, 숯불은 다 태운다. 천사의 기능은 본다, 태운다, 입니다.
그러면 보좌에 있는 형상 전체를 소, 사자, 독수리, 그다음에 인간, 사람 모습으로 돼 있는데 소는 가축의 대표라 할 수 있고, 사자는 땅의 짐승의 대표라 할 수 있고, 독수리는 하늘 짐승의 대표라 할 수 있고, 사람은 이 세상 전체의 대표라 할 수 있고. 갑자기 대표가 되고, 대표가 하나님이 지정하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자연세계에서 소, 사자, 독수리, 사람을 주로 어떤 세상의 지역을 대표할 때 등장하는 짐승들이 이런 짐승들이에요. 이런 짐승들이 사면에 소가 있다면 여기 사자가 있을 것이고, 독수리가 있을 것이고, 인간이 있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돼 있단 말이죠.
그럼 이거는 전체를 한 마디로 말하면 뭐가 되겠는가? 이것은 바로 이렇게 됩니다. 공간 없음, 형상 있음 이렇게 돼요. 우리가 하던 이 공간은 하나님 눈으로 봐야 될 대상이고 동시에 그것은 불태워져 사라져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불태워지는 거예요. 뭐로 대체되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체가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소, 사자, 독수리, 사람과 비교해서 뭐냐 하면 이게 대비가 돼요. 그 반대가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은, 자연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형상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소, 사자, 독수리, 사람이에요. 대표적으로. 어떤 공간을 구성하며 어떤 지역을 대표적으로.
그런데 지금 공간이 사라지잖아요. 공간이 없어지면서 공간을 대표했던 소, 사자, 독수리, 사람도 같이 여기서 없어지는 겁니다. 그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 형상이에요. 그러니까 한 마로 말해서 이 천사의 형상은 뭐냐?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기능자, 기능적인 역할 이게 바로 천사가 하는 거예요. 이 천사는 변신을 제멋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만 제멋대로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천사는 인간이 살고 있는 우리 형상의 공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변신이 자유로우니까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인간 세상의 공간에서는 있음이 되고, 있음은 다른 말로 존재거든요. 존재가 되고 존재는 존재만의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 자기 고유의 형상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 형상이 하나님 쪽에서 내세운 형상을 갖고 있는 천사들에 의해서 모조리 다 작살나는 거예요. 없어지는 겁니다. 이 형상.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빼다 박아서, 그걸 반영체라 하는데 물을 보게 되면 물에 보는 사람의 얼굴이 비추겠지요.
그러면 그건 물의 형상입니까, 보는 사람의 형상입니까? 선문선답 아닙니다. 이건 상당히 과학적이니까요. 소재는 재료는 물이 되고 나타난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형상이 되겠지요. 그런데 보는 사람의 형상이 하나님의 궁창 옆에 있는 거룩한 데서 오게 되면 불로 싸질러야 되니까 이 형상은 무슨 형상이냐? 세상의 있는 모든 형상을 심판하는 형상이 되는 겁니다. 세상을 이렇게 보고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과 변화에 대해서 그걸 천사가 자기 형상화시켜서, 그런데 형상의 재질은 뭐냐? 눈으로 돼 있고, 숯불로 돼 있다는. 눈은 cctv로 돼 있고 숯불은 그냥 불질러버리는 거죠. 깡그리 불질러버립니다.
그러면 남는 건 뭐냐? 그렇게 다 불질러버리고 남는 게 뭐냐? 남는 게 바로 지금 제가 에스겔 1장을 이야기하거든요. 그럼 남는 게 뭐냐? 에스겔 48장이 남겠지요. 40장부터 48장까지 중점적으로 나오는데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 나와요. 이걸 전부 다 지워버리겠습니다. 전체 지워버리면 에스겔 1장부터 48장까지 한 그림으로 그릴 수가 있습니다.
1장에 하늘나라 보좌가 있지요. 보좌는 하나님 계시고 그 안에 하나님을 수행하는 네 개의 천사로 짜여있어요. 천사가 네 개다. 사각형이라 했지요. 각자의 얼굴도 사각형이고 전체가 강강술래 하는 모습도 사각형이에요. 여기에 자이로스코프라는 회전하는 바퀴가 있고. 바퀴는 움직일 때 하는데 이 네모난 천사와 네모난 사각형이 이루는 것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 볼 때 인간은 뭐로 보느냐? 인간을 동서남북으로 봐요.
이스라엘이 광야로 움직일 때 동서남북으로 움직였어요. 그 진 자체가. 레위 지파가 중간에 언약궤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 열두 지파가 대열을 이뤄서 움직였습니다. 이 동서남북 움직인다는 것은 모든 공간은 이 사각형 안에 다 갇혀있다. 세상 전체를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자, 왜 이렇게 사각형으로 돼 있느냐? 그건 아까 제가 설명했어요. 물위에 있는 이미지, 반영체로 하나님께서 어떤 활동을 할 때는 기존에 있는 인간세계에서 일어나고 벌어지고 있는 활동을 감안해서 그걸 그대로 받으면서 그대로 그냥 심판해버립니다.
그래서 천사의 모습은 이 세상을 압축해서 이렇게 응축해서 보여줬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지구가 있잖아요. 지구는 구, 공이죠. 사각형 아닙니다. 지구는 둥글고, 또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편평하다고 보지만 지구상에 내가 여기 있으면 저 사람은 러시아에 있고 미국에 있고 일본에 있고 인도네시아에 각자 있단 말이죠. 각자가 뭐냐? 각자 무엇을 갖고 있는가? 각자 형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그 형상의 본래 형상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각자의 형상은 그 원형-형상? 인간이 갖고 있는 각자의 형상을 이해하게 되면 전부 다 자기중심으로 모입니다. 사각형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해요. 그건 원형 형상에서 볼 때 사각형이고, 각자가 볼 때는 더불어 같이 형상으로 존중해가면서 살면 그만이거든요. 이걸 사람들은 공간이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나 에스겔의 성전에서는 원형-형상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냥 인간이 갖고 있는 형상은 자기 고유한 겁니다. 내 형상 다르고 다른 사람 형상 달라요. 왜냐하면 DNA가 다 다르기 때문에 형상이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런데 DNA 다른 것 말고 그걸 ‘다수성’이라 하는 겁니다. 인간은 다수성을 존중해요. 다수성과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한단 말이죠. 그걸 통합해서 하나로 본다는 것은 인간들은 그것을 시도하긴 하는데 그것이 시대마다 확정될 수 없고 매번 변합니다.
그리고 일본이 주장하는 다수성 모아놓은 그 하나를 다수성의 보통 반대말로 ‘일자’(하나)라고 해요.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일본의 일자, 한국의 일자, 미국의 일자가 다 달라요. 일본은 천황제도가 있고, 한국의 단군이 있고, 미국은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이 있겠지요. 또 파키스탄 같은 데는 알라 신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형상을 존중하고 이것이 신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각자의 형상을 모아서 다수성이 모아져서 하나의 고유한 일자를 내세우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이죠. 일자, 절대 신, 유일 신 이런 겁니다. 전능한 신. 여러분들 피곤해서 졸기 전에 빨리 중요한 것 해야 돼요. 정말 중요하거든요.
일자라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하나로 합시다. 유일자도 있기 때문에. 점선, 다수성, 생각. 다수성이 우리 민족이 고유 민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단군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다수성이 생각(사유)을 하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나 밑에 전부 다 통솔이 되는 거예요. 우리 민족은 하나다.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려거든 당신은 우리나라 국민이 될 수 없습니다. 스리랑카, 필리핀에서 온 사람들 귀화시험 칠 때 한국의 조상은 누굽니까? 나는 알라입니다, 그러면 탈락이죠. 너희 나라나 믿어라. 우리는 단군이 조상이다. 그것도 안 되면 김 태풍이고 뭐고 간에 한국사람 안 되는 거예요. 국가대표 안 되는 거예요. 다수성에서 다수성은 희박하지만 그걸 하나로 집결해 모으는 겁니다. 이게 생각이 그래요.
그런데 이 하나가 점선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게 경험에 다수성이 돼버리면 각자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모아질 수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 여름이 왔다. 여름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이 의사소통이 안 되지요. 여름이란 일자인데 여름은 날씨도 덥고 비도 오고 축축하고 매미도 울고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고. 여름이라는 사유체계, 이게 언어인데, 언어체계가 되면 의사소통이 되는데 내가 여름이 왔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여름이 뭔지 알아요.
왜냐하면 하나를 경유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는데 여름에 대해서 네가 아는 여름과 내가 아는 여름이 달라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짓을 내가 안다, 이럴 때 지난여름에 나는 집에 있었는데? 달라요. 네가 지난여름 보낸 것과 내가 보낸 것이 다 다르단 말이죠. 그럼 여름이란 일자가 깨져요. 다수성의 개성을 강조해버리면.
그래서 다수성도 확정짓고(실선), 하나도 되는 이런 경우는 인간의 언어상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의 개념, 여름이란 것은 비가 오고 해충, 매미, 날씨 덥다, 그걸 여름이라 하자. 그럼 날씨 선선하면 가을인가? 여름인데 날씨가 선선하다. 그럼 가을입니까? 규정해놓은 것에 조건들이 안 맞는 거예요. 그냥 그건 여름으로 하자. 그러니까 다수성을 다 포함한 하나는 존재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란 생각을 다듬어서 여름이 되는데 여름이란 개념이 되거든요. 인간의 생각을 다듬은 것이 개념이고 개념을 문자로 만든 것이 언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개념과 언어가 있어야 다수성 간에 하나를 통해서 개념을 통해서 전부 다 서로 소통이 돼요. 여름이 뭔 뜻인지 알아야 선생님이 여름방학이라고 하는데 학생이 스케이트 탈래, 하면 뭔가 잘못됐잖아요. 여름이라 하면 알아먹는단 말이죠. 일단은 일자를 경유해서 알아먹고 그러나 너의 여름과 나의 여름은 각자 다른 여름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하나라는 개념은 모호한 개념이 되고 일자는 날아가 버려요. 다수성으로 되돌아온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수성의 경험을 일자, 하나로 묶어낼 수 없다. 인간의 다수성의 경험을 일자로 묶어낼 수 없다. 경험 이것이 왜 중요하냐? 경험을 사람들이 뭐로 보느냐 하면 경험 자체를 현실로 봐요. 그러면 이쪽에선 뭐가 현실이냐? 개념들의 집합체가 현실이 되는 겁니다. 하나가 현실이 되면 이쪽은 환상이 되고, 다수성이 현실이 되면 일자는 뭐냐? 환상이 돼버립니다. 또는 다른 말로 꿈이 돼버리고, 일자가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이쪽 다수성이 꿈이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있다, 천국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뭐가 돼요? 이것은 한낱 있다가 없어지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돼버리는 환상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그러면 환상이 되게 되면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을 버리고 유일하게 현실이 되는, 예를 들면 천국에 대해서 천국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지요. 물을 때 언어로 묻는단 말이에요.
언어로 물으면 언어상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의 생각이 들어있지요. 네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면 이 생각을 명확하게 천국이 뭐냐를 말로 성경구절 동원해서 이해해버리면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천국이라는 현실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현실이냐 하면 그 단어를 내가 알고 있고 체험한 내 경험 세계의 다수성으로 되돌아와 버려요. 네가 아는 천국과 내가 아는 천국이 다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각되느냐 하면 사유, 생각이라 하거든요. 생각을 묶어서 뭐가 된다? 개념. 개념을 문자화하면 뭡니까? 언어. 언어가 돼야 사회소통이 가능하다 이 말이에요. 그럼 사회소통이 가능하면 이거는 자기 형상들 속에서는 이 전체 세계가 일시적으로 일자가 돼요. 하나로 묶인 단체가 돼버려요. 그런데 여기서 이 생각에 반발이 되는 어떤 새로운 경험이 등장하면 이것은 여기서 일탈이 되고 벗어나버려요. 일자, 하나가 돼야 되는데 여기서 배신자, 변절자 틀이 돼버리면 이 세계가 일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것을 이단으로 해서 제거하는 일들이 벌어져요.
그럼 제거하는 일들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분명히 이거는 전체 현실이라는 유일한 현실은 이것밖에 없다, 유일하니까 일자니까 전체 현실이라고 전부 다 포용했는데 이탈자 나오면 포용의 선을 더 넓혀야 되겠지요. 넓히면 넓힌 것에 대해서 이 사람은 뭐냐? 이단이라는 개념을 사용해버리면 배신자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개념체제로 일자가 되고 여기서 또 이탈돼버리면 이것을 포용한 새로운 개념을 또 만들 필요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여름이 온다. 그리고 겨울에 장마가 진다. 어떻게 하실래요? 그러면 슬슬 여름과 겨울의 개념 수정작업에 나서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 수정을 왜 합니까? 일자를 일자로 제대로 가동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로 단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단합해서 뭐하는데? 단합하면 우리가 만든 개념은 현실과 일치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일치해서 뭐하는데? 그렇게 일치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전체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뭐로? 사유로, 언어로, 말과 글자로 전체를 묶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공격대상이에요. 이걸 하나님이 공격합니다. 어떻게 공격하느냐 하면 형상으로 공격해요. 아까 보좌의 형상으로 공격합니다. 이것은 바탕이 어디냐? 인간 형상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 형상에서 나온 이건 원형 형상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기존에 있는 존재를 묶어서 이렇게 만든 거예요. 원형 형상이 아니란 말이죠.
원형 형상이 와버리면 언어세계를 공격해버립니다. 공격할 때 언어가 있음으로 그들의 형상, 그들의 존재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걸 하나님의 형상으로 공격해버리면 여기서는 존재 말고 뭐로 오느냐? 형상으로 존재를 공격하는 바가 되죠. 공격하는 바가 되면 인간들의 일자의 노력은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 공격으로 와해가 되고 마는 겁니다. 다 무너지지요.
인간들의 존재에서 나오는 형상, 에스겔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의 세계, 거짓 신의 세계. 그러나 인간으로선 내놓을 수 있는 극단적인 것은 뭐냐? 우상 외에는 내놓을 게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그걸 긍정해야 되기 때문에, 내 존재를 긍정해야 되기 때문에 나를 긍정해 줄 수 있는 조직과 단체와 사회와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필요합니다.
일자를 경유할 때 자기는 지금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굳히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현실이 자기 존재의 굳히기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다수성에 불과합니다. 다수성에 불과한 것을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일자는 규명됩니까? 일자는 만들어지지 않는 거예요. 명확하게 만들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보좌의 모습과 연결시켜봅시다.
보좌의 모습이 소, 사자, 독수리, 사람 이렇게 돼 있지요. 이거는 형상이에요. 그래서 중요한 것 다시 써보겠습니다. 공간은 없고, 형상의 세계만 있는 겁니다. 이것이 에스겔 보좌에 등장한 이유입니다. 공간이 없다. 이것 과연 믿어야 됩니까? 사람의 공간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먼저 누가 있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느끼는 겁니까?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지요. 시간을 측정하고. 네 집과 내 집의 거리가 얼마냐, 측정하잖아요.
그런데 에스겔 40장부터 나오는 나타난 성전, 새로운 성전을 보면 측량을 누가 합니까? 자, 묻겠습니다. 에스겔 다 읽어봤지요? 에스겔 40장부터 시작되는 성전의 측량을 ①천사가 한다, ②인자가 한다? 몇 번입니까? 천사가 해요. 인자는 쑥 이미 만들어진 성전에서 거닐 뿐입니다. 여기 부교재 첫 페이지에 화살표 나와 있잖아요. 움직이는 흔적을 보여주는 데 움직이는 사람이 천사입니까, 아니면 에스겔입니까? 모호하지요. 참 모호합니다.
천사가 움직인 것을 에스겔이 본 거예요, 안 그러면 에스겔 본인이 본 거예요? 똑같은 겁니다. 이게 똑같은 거거든요. 지금 제가 이걸 설명 안 해서 이해하기 힘든 거예요. 그러면 너무나 알기 쉽게 초등학생도 알기 쉽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 모르면 여러분 곤란합니다. 보좌가 1장에 나오잖아요. 40장부터 48장까지 여기 하나님의 성전 나오지요. 보좌가 인자를 통해서 성전에 들어와요.
인자가 누구냐? 인자스럽다는 뜻이 아니고 인자는 누굴 말하느냐 하면 에스겔 선지자를 말하는 거예요. 이게 인자, 사람의 아들이란 표시로. 인자가 와서 보좌가 인자로 오면서 이건 마치 원주에 있는 소금 산에 있다는 유명한 구름다리 있지요. 나도 안 가봤어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구름다리가 출렁다리 아닙니까. 내려앉아서 오잖아요. 연결되잖아요.
하늘의 보좌, 이건 형상이죠. 성전, 이것도 형상입니다. 천사가 만든 형상입니다. 그럼 이걸 보좌에서 와서 인자가 구름다리처럼 건너오면서 여기 이 동네가 무슨 동네냐 하면, 에스겔 2장부터 39장까지 이 동네가 무슨 동네냐? 이것이 바로 공간이란 말이죠. 처음에는 이스라엘 멸망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열방들, 이방민족의 멸망을 이야기해요. 구름다리처럼.
인자가 거쳐 간 곳은 전부 다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보좌가 성전 안에 들어올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네 명의 천사 위에 궁창 있잖아요, 덮개처럼. 궁창 위에 새로운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어떤 사람 같은 분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그게 다니엘 7장에 보면 인간 같은 이가 계시다고 나와요.
그 인자 같은 이가 지나오면서 이 공간을 멸망시킵니다. 공간이 없어요. 형상의 세계지 공간의 세계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공간의 세계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언어로 돼 있어요. 왜? 언어가 있어야 국가가 되거든요. 소통이 되고. 개념이 있어야 소통이 되니까. 언어가 있어야 자신의 존재 긍정이 돼요. 내 존재가 긍정이 된다고.
나는 어떤 존재냐? 나는 이 땅에 형상이 있어요. 인간의 형상 주변에 뭐가 있다? 들판에 소 있고, 하늘엔 독수리 있고, 저 산에는 사자가 있고, 인간이 있고 더불어 사는 이 공간을 천사가 그대로 빨아 당겨요. 빨아 당겨서 쳐버리는 겁니다. 네 형상은 원래 원형 형상이 아니야. 뭔가 잘못된 형상이야. 멸망되어야 될 형상이야, 라고 천사가 와서 멸망시켜버립니다.
멸망시킬 때 숨어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아까 천사 보좌에서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했지요. 송아지 다리 같은 연마된 쭉 뻗은 다리부터 해서 모든 날갯죽지에 뭐가 촘촘히 박혀있다 했습니까? cctv 눈들이 눈동자가 박혀있어요. 그리고 그 천사의 모습은 마치 뭐와 같다? 갈빗집의 숯불 피워놓은 손대면 댈 것 같은, 이걸 성경에는 벌건 쇳물 같다고 돼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지상에 있는 공간이 당할 운명, 당할 그들의 형편이 벌건 쇳물 같아요. 언제든지 숯불로 불질러버립니다.
이와 같은 천사의 모습은 어디 나오느냐? 이사야 6장에 스랍 천사가 나오는데 이쪽은 날개가 네 개지만 그쪽은 날개가 여섯 개에요. 왜냐하면 찬양하는 기능 때문에 날개 두 개가 추가됐고, 두 개는 몸을 가리고, 두 개는 날갯짓하고. 발 가리고 몸 가리고 찬양하고. 이사야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에게 뭐가 날아옵니까? 숯불이 날아와요. 숯불은 어디서 나온 숯불이냐 하면 그게 모세언약의 제단에서 나온, 모세언약 모습도 부교재 안에 있어요.
모세가 했던 성막에 있던 제단의 숯불인데 그 제단에 얹기만 하면 다 타요. 밑에 숯불 피우기 때문에, 맹렬하게 다 피우기 때문에. 이걸 식당에 가면 철판구이 있지요. 그냥 철판구이로 보면 돼요. 철판구이에 거기에 조개를 얹던 오징어를 얹던 쇠고기를 얹던 뭘 얹던 다 벌겋게 다 태우잖아요. 그러니까 제단 전체를 떼어 와도 되고, 숯불만 갖고 태우는 대상은 기존에 있는 공간세계를 형성하는 이 세상 전체를 다 철판 위의 제물로 사용해서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보좌에 나타난 천사의 형상입니다.
그럼 보좌의 형상에서 다수성, 일자는 왜 언급했느냐? 천사의 얼굴이 네 개로 돼 있어요. 이건 다수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다수성으로 억지로 일자를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 만들어진 일자가 뭐냐?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인간이 끄집어낸 것, 우리 하나가 되자, 전부 다 우상입니다.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없어요. 하나가 되는 경우는 원형 형상, 그것만 하나가 되지 그 외에는 이 지상, 공간 세상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최후의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신, 그 호칭이 여호와가 되던, 알라가 되던, 예수님이 되던 관계없어요. 이 땅에서 하나, 신이라고 언급한 것은 모조리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우상을 척결하고 우상을 박살내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파견한 자가 있는데 그게 인자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세상은 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인자, 예수님 스스로 호칭했던 그 인자에요. 다니엘 호칭할 때 인자, 에스겔 호칭할 때 인자, 다윗이 인간세계의 허무함을 이야기할 때 시편 8편에서 언급한 그 인자, 그 인자가 내려오는 와중의 그 공간은 다 사그리 불 질러지고 다 깨지고 박살나는 겁니다. 인간세계는 사라지지요.
그러면 이 인자가 뭐냐? 인자가 보좌의 내용을 함축한 일자가 되지요. 하나밖에 없는 인자가 됩니다. 그래서 지상에 나타난 일자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활동을 보여주는 게 일자에요. 그러면 천사는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 안 돼요. 어디 있습니까, 는 공간이 돼버려요. 하늘나라는 어디 있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우리 인간이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공간 자체가 있음 자체가 박살나버려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기는 너희 안에 있지, 어디 있어요? 예수님께서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바로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할 때 어디 있느냐고 묻는 너희는 천국을 위해서 너희들은 심판 받아야 될 대상으로 그 질문을 심판자에게 했다는 겁니다.
공간이 없다고 할 때는 나라는 존재, 나라는 형상 자체가 하나님께서 일절 애초부터 인정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누구와 비교해서? 인자와 비교해서. 그러면 인자는 살리고 우리는 왜 죽이는가? 인자 속에는 원형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원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인자 자체에 원래 형상이 들어있어요.
인간의 모든 공간을 다, 특히 이스라엘 성전 불타버려요. 성전이고 뭐고 다 불타요. 하나님이 있던 그 자리도 타버립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인자가 함축해서 머무는 곳이 뭐냐 하면 이 보좌가 성전 안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올 때 여기 변신이 돼요. 뭐로 변신을 하느냐 하면 왕으로 변신이 됩니다.
이 왕을 에스겔 35장, 36장에서는 다윗으로 오는 거예요. 왕으로 오셔서 동쪽 문으로 들어옵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오면 이 성전은 지금껏 있던 모든 인간세계의 모든 공간을 대체하는 유일자가 있으니까 일자가 머무는 진짜 공간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죠. 바로 에스겔에서 새로운 시간이 원형 형상에서 인자에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이에요. 이건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인자 자신이 성전이고요, 인자 자신이 시간이에요.
기존에 인간들이 누렸던 알고 있던 개념상의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형상이 심판으로 소멸됨으로써 시간과 공간과 더불어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시원하지 않습니까. 괜히 더운데 땀 삐질, 삐질 흘릴 필요 없잖아요. 없애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 없애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에서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이거에요. “잊어버려라. 미련 없이!” 네 자신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국가를 잊어버리고, 사회를 잊어버리고, 가정을 잊어버리고, 교회를 잊어버리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마지막엔 누굴 잊어버리는가? 내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주께서 인자께서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복음 아닙니까.
고민, 걱정, 염려 이 딴 게 왜 필요합니까? 내 자체가 없어진다는 데. 그런 신학이 왜 필요하지요? 필요 없어요. 교회 필요 없습니다. 교회 모여서 여호와 삼위일체, 일자 만들어서 삼위일체, 다 날아가 버려요. 인간의 개념, 언어 그거는 내 형상을 고집스럽게 거기서 끈질기게 어떤 정당성을 보장하겠다고 그걸 앞장세워서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율법, 성경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이 말씀을 사모했는지 몰라요. 많이 사모했어요. 그 사모한 결과가 예수님을 살해한 겁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 결과가. 쉐마, 쉐마 그 결과가 예수님 죽인 거예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들으라. 자신의 시간, 공간을 포기 못하고 성경 본 거예요.
자신의 형상, 그 형상 안에 자기의 인격과 과거의 기억들이 소복하게 다 들어있는 그 형상, 거기서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경험이에요. 자신의 경험이고 다수성 가운데 공통점을 뽑아내는 기껏 해봐야 그 정도고, 거기다가 이탈자 생기면 너는 이단이야, 라고 그렇게 이단이라고 하면서 이단으로 발생된 사건까지 한 울타리에 집어넣어서 그걸 전체 더 하자 없는 완벽에 완결에 가까운 체제를 구성하려는 인간의 이 모든 시도가 성경에는 그걸 우상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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