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보충(미가5장10~15장, 심판하시는 하나님)
어제 수요설교 핵심 부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나온 핵심 부분은 ‘선행하는 존재가 있으면 후차적 존재를 삼킨다.’ 이게 어제 수요설교에서 나왔던 핵심 부분이었습니다. 선행하는 존재는 뭐냐 하면 ‘내가 있음’이지요. 내가 있음.
후차적인 존재는 뭐냐 하면 ‘신이 있음’입니다. 내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너무나 확실하게 있기 때문에 신의 존재는 나의 있음에 다 가리워지는 거예요. 관심사가 서열상 뒤로 밀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뒤에 따라오는 신은 따로 신이 따로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리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있고. ‘우리를 만든 신이 따로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후차적 존재는 신의 존재는 삼킴을 당하기 때문에 종속되기 때문에 후차적인 존재, 신은 앞서있는 존재, 나를 위하여 있어야 돼요. 나를 위하여, 그 다음에 크게 쓰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조작되어야 되는 거예요. 신이. 그래야 순서가 맞잖아요.
일단 내가 있고 신은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나를 사랑하던지, 나를 후원하던지,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되려면 그 뒤따라오는 신은 선행하는 나를 없앨 수가 없어요. 뭘 도와드릴까요? 알리딘 램프에 나오는 서장훈처럼 등치 큰 머슴처럼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 동물 목소리해가지고 우렁차게 이야기 하잖아요. 조작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 조작을 어디서 하느냐 하면 교회에서 해요. 교회에서 신을 조작하지요. 그 조작된 신은 항상 뭔가 쓰일 때가 있어요. 쓰일 때가. 쓸모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되는데 우리 교회에서 만든 신은 아마 쓸모있을 걸요. 우리 교회 나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냥 여러분 자신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해서 가지고 오는 것을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믿음’이라 해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소유하겠습니다. 내가 그거 구매할게요. 그거 살게요. 구매할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왜 이렇게 일어나느냐 하면 이건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어서 그래요. 먹고 마시는 것이 여분의 것이 생겨나버렸어요. 그러면 일 안하고도 대장질 하는 계층이 발생되는 겁니다. 지도자지요. 그들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남 일할 때 칼질 해야 돼요. 칼질 싸움질해서 자기 것 놔두고 이웃나라의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올 때에 현 우리들은 그 사람을 영웅이라고 칭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권력을 그에게 줘버려요. 이게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신석기하면 골치 아프지요. 벌써. 신석기하면 우리나라 단군나라의 단군시대다 그리 보시면 됩니다. 삼국시대는 청동기시대라고 보면 되고요. 그 전에는 뭐냐 하면 자연과 일치화해서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자연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 수장되는 사람, 우두머리는 그냥 자연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자연을. 왜냐하면 권력이 자연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이야기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권력이 자연에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변화에 대해서 인간은 종속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비오면 농사를 못 지어요. 그걸 천수답이라하지 않습니까. 비 오고 바람 불고 그러면 농사 다 날아갑니다. 그 당시는 산업이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농사에 모든 목숨이 달려있는 거예요. 농사짓는데. 옛날 조선시대하고 마찬가지다 말이죠. 그 때 무슨 공장이 있겠어요. 그 때 무슨 수출이 있었겠습니까. 장보고나 짜투리 해가지고. 장보고가 무역상인지 해적인지 분간도 안 되지만.
옛날에는 경상도 말로 주점 주점 먹을 것만 해면 돼요. 각기 각기 제각기 제 먹을 것만 하면 돼요. 강 건너, 산 넘어 무슨 동네 있는가, 그들과 화해, 그걸 화백제도라 하는데 그냥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면 돼요. 친하게 지냈는데도 뭔가 문제가 있다 그러면 내 딸을 보낼테니까 그 쪽 아들 받아들이고 그런 식으로 하면 돼요. 솔로몬이 이웃나라에게 한 것처럼. 군사 하는 비용보다 외부적으로 혼인정책이 비용이 헐하게 치이거든요.
그래서 대장이라는 게 농사 말고 그냥 수렵채집 할 때는 채집 뜯는 것, 수렵 창 들고 잡는 것 그런 것은 권력이 자연에 있어요. 자연에 있다는 말은 늘 자연에게 순응하는 자세에요.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들 보세요. 밖에 사냥할 때는 염소 탈을 써요. 그리고 야생 소 있잖아요. 야생 소 할 때는 야생 소 탈을 쓰고 가는 겁니다. “이번 한 번만 우리한테 먹혀주세요.”이런 뜻인 거예요. “먹혀주되 우리가 죽으면 당신이 우리 고기를 가져가도 됩니다.” 짐승과 인간이 하나로 유지되는 사회였어요.
그게 어제 이야기했지만 그게 단군이에요. 환웅. 곰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짐승과 인간이 차등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 같은 동일한 자연의 권력 안에서 맥을 못 추고 있는 입장은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까 방법은 뭐냐, 서로 서로 협동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 자연에 일어나는 모든 천둥 번개라든지 가뭄 여기에 하나 하나마다 거기에 신이 있어요. 정령. 신. 신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신은 순응만 하면 하게 되어 있어요. 아주 오래된 고목 같으면 고목에 붙어있는 신. 어떤 신이 있다 말이죠. 특히 그게 신이 어디에 사느냐 하면 숲속에 많이 살아요. 요정들. 조그만 요정들. 호빗 하는 거 있지요. 난장이들 사는 것처럼. 요정들이. 거기는 북유럽의 신화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신화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연과 대결상태가 아니고 심리적으로 자연에게 그냥 굴복하는 그것을 나의 운명으로 그냥 수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 40, 50되면 그냥 죽으면 돼요. 뭐 검사하고, 보약 먹고, 암 조직하고, 코로나 마스크 쓰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자연으로 돌아가면 돼요. 그게 일체성이에요. 그게 삶과 죽음이 서로 통하고 있어요. 어떤 격리가 없고.
그래서 산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대우를 해주는 겁니다. 조상숭배하는데. 그 조상을 맡길데가 없어가지고 자기보다 더 우월한 힘을 가지고 더 빠르고 더 사냥을 잘 잡는 사자나 곰, 호랑이 그것에 사자에게 힘을 주고, 호랑이에게 힘을 준 그 신에게 조상을 맡기지요. 그걸 토테미즘이라 합니다.
조상을 상징화시킬 때 짐승을 해가지고 하는 거예요. 종족끼리 만난다는 것은 각각 서로 다른 짐승의 신을 따로 하는 종족끼리 모이는 것이지요. 석탈회, 박혁거세. 신라시대의 조상은 그렇게 형성되는 겁니다. 수요설교보다 더 길게 되었다. 큰일났다. 그런데 장군이 등장해요. 곡식이 잘되니까. 장군이 등장해가지고 이걸 팔아먹으면서 상회가 등장하면서 숫자 개념인 수학이 등장해요.
“내가 가죽을 얼마에 팔면 당신은 고등어를 얼마 줄 것이냐?” 거기서부터 계정, 장부가 발생되면서 숫자 개념이 나오고 그 숫자개념이 나오면서 농사지을 때 농사의 수확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밀물, 썰물, 별의 관측, 현재 이라크 바벨론에서 발달된 거예요. 수에르 최초의 문화에서. 그걸 해가지고 그걸 정확히 기록하는 자. 점성사라 하지만 엘리트. 요새는 검사들이에요. 엘리트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문자가 통용되면서 상대적으로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요하지요.
질서를 강요하면서 나타난 신을 다신에서 하나의 신으로 바뀝니다. 하나의 신은 엘입니다. 엘은 무정령이에요. 그냥 아무 형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엘이에요. 엘. 여기서 알라신이 나왔어요. 그냥 신이에요. 신. 신이 인생사에 관여 안 합니다. 엘은. 그런데 인생사에 관여하는 신이 나왔으니 그게 바알 아들이에요. 바알. 이게 이집트 신도 마찬가지에요. 바알. 부인이 있는데 아세라.
여기서부터 족보가 아주 혼란스럽지요. 엘의 부인이기도 하고, 바알 부인이기도 하고, 바알의 여동생이기도 하고, 뭐 이집트 신의 계보는 패밀리는 엉망진창이지요. 여기서 아낫. 아스다롯. 성경에서는 아스다롯. 모트 전부다 바알 아세라 사이에 나온 모트 하는 죽음의 신. 죽음의 신은 뭐가 발달했는가, 턱이 발달해가지고 시체가 있으면 시체를 갉아먹는 음부의 세계, 저승의 신이에요. 염라대왕 같은 것.
그래서 이 염라대왕이 신기가 안 좋으면 발작을 해버리면 4월달부터 셈족이 종교니까 현재 이스라엘 땅이. 10월달까지 비가 오지를 않아요. 비가 오지 않으면 10월달에 모종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바알이 누구를 이기느냐, 모트라는 죽음의 신을 이겨주기 위해서 응원부대를 동원하는 거예요. 제단을 세워서. 응원부대를 동원하는 거예요.
그러니 바알과 아세라가 70의 신을 만들었거든요. 신이 자꾸 만들어져야 이 바알 아세라 제국이 안정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안정감을 갖고 있으면 바알 아세라 섬긴 자기들도 우리 인간들도 같이 패턴이 정확한 질서정연한 인생의 안정적인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신들은 뭐하느냐 하면 이게 천둥, 번개, 폭풍, 농사 짓는 것과 관련된 천기와 관련된 인생사에 관여하는 거예요. 인생사. 이들이 관여하면서 결국은 여기서 번식. 자식 아들 딸을 얼마나 많이 놓겠느냐 하는 그런 번식에 관한 것. 민수기25장에 보면 바알브올도 있고 이 말이.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가 요란스러운 성관계를 하게 되면 땀이 나잖아요. 그 땀이 하늘의 비가 되어서 땅에 촉촉한 단비가 내린다고 본 거예요. 이런 제단에 많은 여자사제들이 있고 남자들 받지요. 성경에서는 이걸 창기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거룩한 요새로 하면 수녀들이지요. 거룩한 제단에서. 이성과의 사랑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신의 일을 신의 일에 봉사하는 입장에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자식을 놓으면 제일 먼저 자식을 누구한테 바치는가, 바알에게 바치는 거예요. 신의 뜻으로 했으니까. 이게 바로 인신봉양.
인간의 자기 아들을 신에게 바치면 신에서는 바알신에서는 최고의 귀한 것을 바쳤다고 귀한 것으로 보상해주지요. 그러니까 이런 관계, 이런 신의 관계에서 여러분이 한 번 따져보세요. 마치 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한 것처럼 하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어느 존재가 우선이에요?
나의 가족, 나의 가족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 자연의 횡포를 어떻게 방비해서 어떻게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자연의 그 움직임에 그건 인간을 넘어서 초월이라 해요. 초월. 초월적인 인식에 의해서 신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신이라는 뜻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인간 자체에서 삼차원을 넘어선 다차원적인 발상이 신이라는 개념을 낳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중들도 넘어지면, 아이구! 하나님! 하지요. 초월적 인식에서. 두뇌란 전피질, 전두엽 앞에 있는 가장 추상적 활동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의 두뇌 발달의 영향이라고 보지요. 메타. 삼차원.
그러니까 신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지요. 현대과학이 만들어 낸 신은 인공지능입니다. 인간 자기가 자기를 초월한 대상화를 자기가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인간이. 그러니까 우선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이에요. 인공지능 만들어서 클라우드, 클라우드는 구름이라는 뜻인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나의 두뇌 정보를 따로 정립해놓으면 우리는 부활 됩니다. 클라우드 안에서. 하나의 빅데이터 안에서 나는 영원히 살지요. 그 정보가 있으니까.
통 안에 두뇌만 두뇌피질이 있잖아요. 근육 두뇌. 주름진 근육만 있고 이 안에 각종 전기 신호를 보내버리면 여기서 뭘 만들어 내느냐 하면 세상을 만들어 내지요. 세상.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통 안에 있는 두뇌가 만든 세상이에요. 이 세상을 만들어서 여기서 뭐를 끄집어내느냐, 나를 만들지요. 전기 신호에 의해서 나를 뭐 할 수 있다? 안 죽고 부활시킬 수 있지요. 가능하지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전기 신호지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전기 신호.
신도 만들어 내지요. 믿음, 소망, 사랑, 다 만들어 내요. 메시아도 만들고 다 만들어 내요. 전기적 신호. 그거 만드는 위치가 전전두엽이라고 있어요. 요걸 자극하는 거예요. 자극한다고 다 된 게 아니지만, 오류를 줄여나가는 겁니다. 정확하게 신을 끄집어낼 수 있는, 신에 섬기는 희열을 주는 그 대목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지요. 도파민 같은 경우에 도파민에 신경 전달 물질이 도파민에 갔을 때 인간이 쾌감을 느끼는 그 경로를 추적해서 도파민과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전기적 자극을 주면 마약 하지 않더라도 마약의 효과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대체 종교지요. 종교를 대체하는 겁니다.
당연히 이건 없지요. 마귀에. 귀신에 이런 개념 없지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바알과 모트 죽음이라는 죽음을 싫어했으니까요. 인간은 옛날부터 공통점이 뭐냐 지금이나 죽음을 되게 싫어해요. 죽음을 어떻게 처리해 보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살아있음을 어디서 살아있는가를 몰라요. 어쨌든 살아있잖아. 살아있는 것을 계속 살게 만드는 여기에 전력을 다합니다. 모든 혼신의 힘을 여기다 다 쏟아 붓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끄집어낼 때 애굽에 이스라엘 없어요. 히브리인들이지 이스라엘 나라는 없어요. 나라 끄집어 낼 때 무슨 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무슨 사건이냐, 유월절 사건이 들어가지요. 유월절사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그들의 특징은 남들은 자기의 존재가 선행되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의 특징은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유월절 양이 선제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이 선행해요. 죽음에서 뭘 된다? 죽음을 품은 새로운 백성의 등장.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싫습니다 하는 양을 홍해 속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홍해가 갈라질 줄은 뒤따라오는 애굽사람도 몰랐고 오늘날 우리도 몰랐지요.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니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올 줄은 몰랐지요. 배타고 오는 줄 알았지요. 둘러오든지. 이처럼 주님의 사건은 항상 우리가 예측을 빗나가버려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그걸 예상하잖아요. 빗나가는 거예요.
수요일날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죄 안에 뭘 집어넣는가, 이미 죄사함을 받은 것을 이 안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우리의 상식은 뭐냐, 원서내고 합격통지서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상식을 벗어나버립니다. 합격통지서안에 내 원서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원서를 내버렸어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천국 원서 내놓고 합격통지서안에 원서도 포함되어있어요.
“이 원서 누굽니까?” “너잖아.” “제가 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시작부터 주의 일이지요. “왜 제가 원서를 못 냅니까?” “니는 유월절에 죽어야 돼. 유월절에.” 죽은 인간이 무슨 원서를 내요. 죽은 놈은 죽어야지요. 죽은 인간 되신 어린양의 피 안에 계신 분이 우리를 이스라엘로 만든 겁니다.
그 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끝. 이게 수요설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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