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519a슥12장8절(보증자)-이 근호 목사
스가랴12장하겠습니다. 스가랴12장에 여러분 아까 제가 읽어보라 했잖아요. 2절에 보게 되면,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취하게 하는 잔은,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그 문지방이 흔들린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걸림돌이 된다. 쉽게 말해서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자꾸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표적이 되도록 그렇게 주께서 유도하는 겁니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도 계속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끼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모든 민족으로부터 점령하고 싶은 도성으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주께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8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한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보호한다. 보호하는 방법이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리 죽 보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굳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알아야 될 이유가 뭐냐. 그걸 꼭 알아야 돼? 그 점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1층에 살고, 예루살렘은 2층에 산다. 그러면 만날 일이 없지요. 올라오는 계단도 있는 게 아니고. 엘리베이터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다른 세계. 예루살렘을 2층에 산다 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1층으로 간주해 버려요. 그러면 우리집 옆집이 되지요. 그렇죠. 우리집 옆집. 옆집이 되게 되면 니나 나나 똑같다. 이리 돼요. 하나님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계시성, 특수성이 날아가버리지요. 인간은 2층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니나 나나 똑같다 하고 전부 다 같은 1층에 옆집으로 사는 거예요.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래. 니하고 나하고는 관계없어. 이걸 가지고 보편성이라 하는 겁니다. 보편성. 그냥 다 똑같아.
그런데 2층이 되어보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보편성의 반대말 특수성이 되어버려요. 특수한 예루살렘이 특수한 곳이 되었어요. 1층에 사는 보통 사람, 이방인들은 1층, 사람들은 이리 생각합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똑같은 거리를 두고 똑같은 어떤 신이 있다면 혜택을 입는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내가 내리는 비는 너도 내리고, 똑같이 보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 가운데 똑같은 우리인데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대우 받는 누군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질투를 느끼는 겁니다. 그게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차이 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서울이 왜 예루살렘보다 못해야 되느냐, 이유를 대라. 이렇게 나오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공격적으로 들이댈 때 이건 질투심이지요. 왜 서울은 안 되고 예루살렘은 특별대우 받아야 되는가, 전 세계 사람이 서울 올 때 성지 순례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예루살렘은 특별하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스가랴12장에서 나온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은 어디에서 일어난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어디서 일어난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다. 이리 봐요. 예루살렘에서. 스가랴 예언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예루살렘은 일반도시하고 다른 특별히 주목해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간단한 거예요. 십계명은 하나님부터 온 것. 십계명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겁니다. 모세가 자기가 소설을 쓴 게 아니잖아요. 모세가 스스로 심심해서 산위에 올라 가지지고 목각 깎아 가지고 십계명 만든 게 아니지요.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이 커져서 예루살렘이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십계명은 율법이지요. 율법이 구체화되고 실제로 지금도 예루살렘에 있으니까 실제로 역사 속에 턱하니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그냥 단순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 새로운 쇼킹한 시선을 가져야 돼요.
이게 뭐야?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루살렘에 외계의 UFO가 예루살렘에 앉아있다 할 때에 뭐 그럴 리 있겠지? 이 정도가 아니잖아요. 나는 목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이렇게 해가지고 전 세계의 예루살렘에 어떤 UFO에서 생중계가 된다면 집에서 라면 끓이다가 라면 냄비 놔버릴 경우가 있어요. 내가 지금 라면 먹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일단은 라면은 먹고 외계인은 나중에 하고.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기존에 내가 깔아놓았던 인생관 자체가 이게 뭔가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리면서 잘못되게 조립한 거예요. 그걸 조립 또는 그냥 정립이라 할 수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린 채 조립된 거예요.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온 가족이 파리로 여행 간다고 뉴욕에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특별휴가로 간다고 부산떨다가 결국은 제일 중요한 막내 악! 하는 거울보고 아버지 수염 크림 바르면서 악이라고 흉내 내는 말썽꾸러기 애 놔두고 다른 사람 다갔잖아요. 하도 애가 많으니까. 들 챙긴 거예요. 내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걸 놓치고 그걸 빵구 난 채 다른 것과 얼기설기 대충 남 흉내 내고 남 모방하면서 인생 이대로 가면 뭐 그렇게 꼴지는 안하겠지. 중간쯤은 하겠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겁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빠진 인생관은 뭐가 없는가? 구원은 없습니다. 그냥 살다 죽을래. 이거에요. 왜, 보편적이니까요. 1층 밖에 없어요. 그리고 2층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계속해서 스가랴에 예루살렘에서 강조점을 두는 이유는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게 스가랴의 주제입니다. 성전을 만들고 그 성전에서 만나자. 만남의 장소 있잖아요. 서울 고속도로 휴게소에 만남의 장소 있지요. 우리 거기서 만나자. 다른 곳에서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게 신약에 오게 되면 어디서 만나냐, 바로 주의 십자가에서 만나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십자가는 어디에 있는데. 그건 성령께서 없는 시공간을 십가가라는 시공간을 성령 안에서 만들어줘요. 이게 요한복음14장에 그걸 처소라고 합니다. 없던 처소. 없는 처소.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처소가 만들어져요.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에 보면 시공간이 구멍이 뚫리면서 기존 차원 말고 다른 차원이 기존 차원에 같이 이렇게 퉁하고 돌발해서 출몰해요. 다른 차원이. 그래서 이쪽에 있으면서 구멍이 나와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 보면 이쪽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이렇게 다른 세계로 통하는 겁니다.
다른 시공간에 구멍이 나가지고 그 구멍에서 이 시공간을 다른 세계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공간에 그것을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 안은 무엇을 대립시키느냐 하면 밖을 대립시키지요. 안과 밖을 대립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구원을 얘기할 때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믿고, 예수 안에서 사랑하고, 예수 안에서 소망하고, 사람들은 예수 안을 떼어버리고 믿음, 소망, 사랑 마구 동원시키는데 그거 안돼요. 베드로가 믿음, 소망, 사랑 없어가지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요, 자기 안에 있어서 그래요. 예수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자기 안에 있는 그 영토를 확대시키면 하늘나라가지 않겠는가 내가 만든 세계 안에 예수님을 초대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 세계관을 고수했던 겁니다. 그게 일차원적이지요. 베드로가 살았던 그 동네에 예루살렘 있지요. 성전 있지요. 스가랴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만나고 성전에서 만난다고 하니까 뭐 성전 있겠다. 주께서 성전에 오시면 되니까 우리는 팔짱끼고 기다리면 된다. 이리 생각한 거예요.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생길 줄은 베드로가 상상도 못했지요. 그게 새로운 처소, 그게 스가랴에 예언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성전 예루살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드는 방법은 처음부터 하늘에서 시내산에서 뭐가 내려왔습니까? 율법 내려왔지요. 율법이 내려와서 성전을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경로를 따라가면 되지요. 율법의 경로를. 참 쉽지요.
율법의 경로가 어디로 가느냐 보면 돼요. 야곱의 12지파 가운데서 율법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처음에는 레위지파로 가요. 레위지파. 레위지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어느 지파로 가는가, 여기에 야곱의 12지파가 있지요. 12지파 가운데 레위지파로 갑니다. 요셉지파가 둘로 나뉘어지잖아요. 므낫세과 에브라임으로 둘로 나뉘어지거든요. 에브라임은 로마에 중간에 있고요, 므낫세는 이쪽에 반, 저쪽에 요단강 건너 반, 그래서 큰 영토입니다. 에브라임. 므낫세. 길게는 납달리. 조그만 스블론. 앗셀 이렇게 12지파들이 죽 갓, 르우벤. 이렇게 죽 있는데 요 땅을 따로 따로 합치면 요셉지파지만 두 개의 요셉지파가 장자로 등극하면서 희생했다 이 말입니다. 다른 지파는 희생 안했는데 요셉이 희생했다. 그러니까 희생한 자가 장자에요. 로마서8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맏이가 되는 겁니다.
그 맏이 덕분에 아래 동생들이 다 살아요.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라. 이래서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는데 그것도 율법체제에 따라서 가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럼 12지파가 둘로 나눠지니까 12+1이 되니까 이게 13지파가 되잖아요. 여기서 하나 빠지는 거예요. 빠지면서 메타, 메타라는 뜻은 뭐냐, 초월.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를 메타 위치라. 영어로 하면 메타. 메타 위치. 우리말로 하면 초현실주의. 초(超)라는 뜻이에요. 이 지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거예요. 지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를 말하는 겁니다. 그 초월위치에다가 레위지파를 집어넣습니다.
그 레위지파는 현실에 땅을 갖지 못하고 뭐로 갖는가, 율법으로만 가져요. 그러니 율법을 배우려 하면 율법의 전문가 제사장 레위지파 제사장한테 이스라엘 전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1년에 3차례는 기본으로 와가지고 세미나 받아야 돼요. 세미나 받아야 됩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3절기가 있고, 그 다음에 다른 절기는 수시로 오면 좋고 그렇지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해야 돼요.
그 율법에 의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제사가 제대로 운영이 되면 나머지 12지파가 땅을 가졌잖아요. 땅이 그렇게 농사가 잘돼요. 그들의 농업 기술이 필요치 않아요. 레위지파가 제대로 율법대로 살게 되면 율법대로 제사 드리고, 율법대로 살면, 그리고 백성들이 율법대로 지시를 받으면 그 땅은 그냥 잘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수혜 또는 다른 말로 혜택, 수혜, 흔히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운영 구조는 뭐냐 하면 그냥 선물로 받는 식으로만 살아라. 선물로 받는 식. 광야에서 만나 받는 거 하고 똑같은 원칙입니다.
레위지파가 제대로 가동되게 되면 엔진이 제대로 가동되게 되면 그들은 그 엔진 가동에 주어지는 복된 그 결과를 그냥 받는 거예요. 적들 신경 쓰지 마세요. 적들이 물러가게 되어있어요. 적들이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쳐들어와도. 그 정도 괜찮은 시절이 잠시 있었지요. 여호수아. 여호수아 시절. 그 땐 아직도 언약궤가 살아있었어요. 그리고 사무엘도 언약궤 살아있지요.
그런데 이 레위지파가 땅이 없어요. 땅이 없으니까 양식은 누가 대주느냐, 12지파가 골고루 십일조라는 형식으로 레위지파의 생계를 보장해줘야 돼요. 그런데 이 열두 지파가 어느 때 부터 수혜, 은혜로 살기를 접습니다. 접어버리고 자기의 능력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능력으로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능력과 내 자질을 본인이 다시 점검해서 모든 영광이 나에게로 쏠려서 내가 남들에게 자랑거리 되는 존재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이야기 들으셨지요. 내가 선행되는 거예요. 신은 나중이고. 신은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그들은 유월절날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죽은 자 입장에서 주께서는 은혜로 살려주는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어린양의 존재가 우선이지 자기 존재가 우선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좀 살만하니까 우리의 두뇌는 폼으로 달렸나,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우리 식으로, 내 하는 식으로 해보자. 라고 하면서 여기에 사사기6장, 7장에 보면 드디어. 어제 수요설교는 시간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안 찾아봤습니다만, 아세라, 바알이 막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사야2장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나라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내 나라보다 더 잘 사니까요. 자기는 은혜에 고맙다고 생각했던 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어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어요.
마치 북한의 하루 300그램 양식을 배급받고 이리 사는 것이 다 어버이 수령의 은혜라. 해가지고 너무 너무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거예요. 그거 하다가 한국에 드라마 나오는 일반인들의 사는 살림살이와 배치되어 있는 전자제품보고 놀라버리는 거예요. 세상에 각 가정에 커피 뽑아내는 기계부터 해서 건조기부터 해서 냉장고는 최소 두 개. TV는 40인치 이상. 50인치. 차로는 여지간한 집 같으면 서울 같으면 두 대씩. 세상에 자기 사는 거 보면 꼬라지가 거지가 됐는데도 거지인줄 모르고 그동안 다 막혀가지고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 이거라도 여기가 바로 낙원입니다. 이러고 살았던 거예요. 여호와고 뭐고 속았어요! 속았어요! 이리 나오는 거예요. 속은 거예요. 선악과가 눈앞에 보이는데 저걸 안 따먹고 뭐하느냐는 거죠.
나를 잘 살 수 있게만 한다면 그까짓 거 부처나 예수나 하나님이나 그게 무슨 소용 있나.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그게 최고의 신이지. 전부 다 어디를 빠져나갔는가, 레위지파한테 십일조가 안 돌아갑니다. 니가 죽든 굶어죽든 말라, 나는 꼴 보기 싫어 세미나도 참석 안 해요. 이제는 누가, 누가 잘 먹고 잘 사느냐 에요. 경쟁에 나섭니다. 그 이방 민족이 잘 사는 이유가 있었어요. 없는 사람을 등쳐먹고 잘 살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특히 이방민족 가나안 민족의 해변가의 민족, 해변가의 민족들은 뭐냐 무역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무역을. 시돈. 현재의 레바논의 베이루트 도시들. 무역해서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외국 문물을 유통시키는 새로운 것을 유행시켜야 상품 가치가 올라가요. “아이고, 외국에서 이거 인기인데.” 하면 뭐 거기에 자기 제품에 식상하는 거예요. 뭐 새로운 거 없나, 눈이 희번둥 해가지고 사치품을 구매하게 되고 이 베이루트해서 어디까지 인도까지 유럽, 인도, 지중해 그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서 신제품과 더불어서 새로운 종교, 새로운 사상들이 막 밀려들어오는 겁니다.
무슨 종교든 관계없어요. 잘 사니까 됐잖아요. 잘 사니까. 잘 사는 걸로 그걸로 진리잖아요. 진리지. 여호와 백날 찾고 교회 백날 찾아도 지지리궁상으로 살아보세요. 그게. 아이고~ 나 같으면 차라리 죽는다. 사는 게 이게. 이게 사는 거냐. 레위지파가 인기가 시들했어요. 젊은 애들 교회 안 나갑니다. 이건 뭐 말씀이고 뭐고 관심 없어요. 돈이 안 되는데 뭐 관심이 돼요. 돈이 안 되는데. 그래서 레위지파가 “주여! 이대로 죽겠습니다.” 라고 할 레위지파가 아니지요. 레위지파가 돈이 안 되니까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레위지파 이 사람들이 뭐하느냐 이방종교의 제사장으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점 쳐주는 거예요. 점쳐주고, 타로점 쳐주고, 배운 게 그거 밖에 없어가지고 하나님을 빙자해서 행복하소서! 이런 쪽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만약 어느 집에 가가지고 제사장으로 늘 복을 빌어줬는데 갑자기 그 가정이 잘된다고 하면 더 큰집에서 큰 단체에서 스카웃 해가지요. 그게 사사기에 나오는 미가 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니가 한 가정의 제사장 될래? 그 제사장 레위인 소년이 있었거든요. 이 가정의 제사장 될래? 우리 지파의 제사장 될래? 해가지고 단 지파가 이 땅 버리고 올라가면서 납치해서 가지요. 그런데 그 미가 가정에서는 그동안 연봉계약을 했다 말이지요. 옷 주고 계약금을 받았는데, 계약금을 달라고 찍찍 울고 따라오니까 단지파가 안 갈래? 하니까 예. 하고 갔지요. 완전히 그쪽은 마동석이니까. 주먹가지고 손바닥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힘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군사, 정복, 노예, 쟁취, 소유가 모든 게 진리가 되는 그 시대로 접어듭니다.
레위지파 작살났지요. 아무 맥도 못 추는 거예요. 언약궤 빼앗깁니다. 여기서 레위지파가 뭐로 바뀌느냐. 레위지파가 아무 맥을 못 추거든요. 이게 사사시대입니다. 여기서 누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특별선택이 나옵니다. 그게 여기 8절에 나옵니다. 그날에 여호와가 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날에는 무엇과 같겠고? 다윗 같겠고. 다윗족속은 하나님 같겠고.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유다지파. 다윗은 유다지파입니다. 레위지파 율법이 제사 또는 십일조 받아먹는 식으로 가동되는 그 율법이 이제는 다윗 쪽으로 갔을 때는 율법이 어떤 식으로 변형이 되어서 그 실효성, 실제적인 효과를 드러내는가, 히브리서 한 번 봅시다.
히브리서7장을 보게 되면 상당히 어렵지만, 간편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7장3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모세가 누구를 만나지요.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지요. 아브라함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다른 차원의 존재가 살렘왕 살렘이 뭐냐 하면 나중에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의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 예루살렘의 왕은 이상해요. 차원이 일차원적인 보편적인 이런 세상의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3절에 보면 없고가 그리 많아요. 아비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도 끝이 없어요. 없음으로 가요. 분명히 있는데 없어요. 멜기세덱 제사장이 있는데 그걸 사람들은 있다고 말하지 말고 없다고 이야기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그 멜기세덱을 없다고 할 때는 그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사람이 실체가 있으면 있다, 없다가 되잖아요. 실체가 있으면 있는 거잖아요.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할 때는 이게 뭐냐 하면 이걸로 바꿔야 돼요. 맹세가 있다. 그 사람은 없어도 맹세가 있다는 거예요. 맹세덩어리가 멜기세덱이에요. 맹세덩어리. 그 맹세인데 맹세가 히브리서6장 1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Wherein God, willing more abundantly to shew unto the heirs of promise the immutability of his counsel, confirmed it by an oath: 이 멜기세덱은 뭐냐 하면 보증이 되는 거예요. 보증. 보증인이 되는 거예요. 보증인이 되면서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기를 보증하면 안돼요. 보증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을 믿는다든지 하면 안돼요. 그건 자기가 자기를 보증하는 거니까. 그건 소용없어요.
보증인을 따로 세웠다는 말. 보증인이 따로 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보증인’으로 할까요. 보증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보증인을 보증인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어떤 아래 직원 자기가 다루는 직원 또는 종. 종이 누가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임무와 미래와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걱정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미래에 걱정하면 안 되지요. 자기는 보증인이 따로 있음을 이 세상에 없고 따로 있음을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따로 새롭게 등장했음을 그 출현, 그 등장함을 보여주는 그냥 난데없는 종으로서만, 지방 지점의 어떤 직원들이라. 그냥 직원이지요. 본사 있고 협력단체 직원 정도 되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의 운명은 어디가 있습니까? 이 보증이 얼마나 이 인간시대가 더럽고 썩어빠진다 할지라도 보증만큼은 보증할 만큼 굳건하다, 를 보여주는식으로 변형이 되겠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손자가 누구지요? 야곱. 야곱에게 자식이 몇 명 태어났지요? 열 두명. 처음에 이 멜기세덱의 보증이 그 열 두명 가운데 레위 지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어느 지파로 간다? 유다지파로 가면서 보증의 굳건함을 보장해 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7장 6절에 나옵니다.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레위 지파는 아무것도 안 받았지만 레위 지파가 율법의 제사하는 일에 가담해야 되는 것은 그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잖아요. 레위 지파는 안 만났잖아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브라함 안에 레위지파가 이미 합류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미 그 안에 합류되어 있는 거예요. 그걸 영어로 하면 디벨롭(develop)이라 하는 거예요. 디벨롭이라 하는 것은 우리말로 발전이라는 말이 있어요. 발전. 그런데 발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디벨롭이라 하는 것은 그것보다도 더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화, 또는 현상 같은 말이지요. 사진 인화하고 사진 현상이지요.
감추어졌는데 어떤 화학 물질이 들어가면 거기서 발그스레 이미지가 거기에 사진이 비로소 발그스레 드러나지요. 성도는 별 볼 일 없는데 성도가 사건과 만나면 거기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증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런 사건에 말려드는 존재에요. 이게 성도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것이 없다는 거예요. 내 운명, 내 미래, 내가 걱정하고 염려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율법으로 니는 죄인이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된다는 하나님의 맹세와 계시 안에서 그 안에서 그걸 받아들이는 안에서 성도는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죄 지은 사람은 지옥 간다는 것을 발설해야 될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본인은 이미 용서 받은 입장에서. 그럼 남들이 뭐라고 하지요. “니는 어떻게 용서 받았느냐?” 하지요. 그렇다면 성도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그건 맹세 때문에 그래요. 맹세.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났던 맹세 안에 레위 지파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유다 지파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오늘날 모든 성도가 다 들어있었던 거예요. 좀 이런 예를 들어서 더럽기는 하지만 구더기처럼 다 들어있는 거예요. 구더기처럼. 그 안에 구더기처럼 다 들어있는 거예요. 된장 뜰 때 잘못 떠버리면 구더기..., 아이고, 괜히 했다. 오골 오골 다 들어있지요. 된장 맛있어요. 그러면.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설명이 안돼야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어요. 왜? 멜기세덱이 나보다 먼저 선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는 온갖 이단들을 다 접해야 돼요. 온갖 종교. 온갖 이단들 다 접해야 돼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선행 존재로 보면서 나왔던 그들이 조작해낸 하나님. 그 하나님이 그들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거 우상이거든요. 있지도 않은 하나님은 맹세로 오지, 이렇다 하고 신으로 오는 게 아니거든요. 맹세로 와요. 맹세로.
그래서 이 맹세에서 아까 레위지파까지 왔잖아요. 유다 지파 오게 되면 유다지파가 알려주는 바는 그 맹세는 결코 우리 인간이 이루질 못한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다 지파가. 유다 지파의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 뭐냐 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게 아니에요. 소년 다윗이에요. 소년 다윗.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거예요. 진짜 골리앗 입장에서는 화날만해요. 소년 다윗 얕보다가 한 방 먹었잖아요. 만약에 안 죽었으면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 정식으로 한 판 하자. 너 이리 와! 내가 그 때 너를 얕봐서 미안한데 삼세판이잖아. 진짜 니가 센지 한 번 해보자. 이리 나온다면 다윗은 그 도전에 응합니까? 응할 필요가 없지요. 왜? 본인이 이긴 게 아니니까.
내가 이겼으면 나한테는 어떤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아. 이렇게 하는데. 본인한테는 아무 능력이 없어요. 능력이 없는데 능력이 없고 뭐만 있느냐, 사건만 있어요. 자꾸 사울이 가만히 있는데 자꾸 찝적거려. 나를. 다윗은 자꾸 도와주려고 해요. 자꾸 도와주려고 해요. 사울은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갑자기 정치적 상황이 떠올라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말을 못한다 했다가 말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광주 간 거요. 전라도 당이라는 빌미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자기 국민당 다 데리고 간 이유가 우리 이제 광주 사태 너그 땅 아니다. 이리 된 거죠. 광주 사태 책임지라. 이런 식으로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인용하는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말을 아끼겠습니다. 더 하게 되면 정치에서 색깔 드러나요. 저 정치에서 색깔 없습니다. 그냥 무채색이에요.
이게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왜 사울에게 쫓기는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왕이 되어가요. 그게 희한한 거예요. 심지어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부하 직원의 아내와 간음하고 뭐해요? 죽여버리지요. 그럼 이건 누가 봐도 뭡니까? 다윗은 사형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초월적 왕이 되어버려요. 이스라엘.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아무 능력이 없어요. 내 구원에 내가 보탤 수 있는 아무것도 없음을 깔끔하게 정리가 되기 때문에. 나의 모친에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죄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 누가 니가 어떻다 라고 누가 이야기해줬겠어요? 주께서 유다지파 다윗에게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한 거예요. 그 작용을 한 것을 시편51편에서는 뭐냐 하면 그게 성신으로 이렇게 한 겁니다. 요새는 성령이지요. 성령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하고 살인하도록 그렇게 조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죄인의 것은 받지 않음으로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의 대완성이 되는 거예요. 상한 심령을 받음으로 비로소 율법은 완성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예루살렘이에요. 시편51편 한 번 봅시다. 17~18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은혜지요)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그 다음에 무슨 성을 쌓습니까?)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이미 다윗은 선지자에요. 선지자라는 말은 보증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보증인. 멜기세덱은 변하지 않아요.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늘 없음이 메타에요. 초월적 입장에서.
있음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증거로 활용하는 권한이 없음에 있어요. 있음에 있는 게 아니고. 없음에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그것이 모든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는 인간들을 자기의 종으로서 드러내지요. 일종의 사건의 흔적처럼.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라. 그 때 주께서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 이건 누가 하느냐 하면 이건 원래 레위 지파가 해야 되는데 레위 지파가 날아가고 지파가 어느 지파로 바뀌었지요? 유다 지파로 바뀌었지요. 유다 지파는 왕의 지파지요.
왕 자신이 번제와 제사에 제사장도 되고, 그 다음에 제물도 되는 거예요. 왕 자신이. 그러니까 이건 다윗이시라고 하면 안 되고 다윗 같은 분이 오실 때. 그 분이 오실 때 그게 가능한 겁니다. 그 분이 오실 때. 그래서 다시 히브리서 7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7장에서 15절에 보면,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멜기세덱이 살렘, 예루살렘의 제사장이었잖아요. 아브라함 만날 때. 그렇지요. 이건 2층이에요. 2층입니다. 초월의 세계에요.
1층이 뭐냐, 1층에 레위 지파가 이미 1층에 제사장 되었지요. 그런데 이게 별다른 다른 지파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제사장 되다가 이제는 유다 지파에서 영원한 멜기세덱의 내용의 보증을, 맹세를 품은 제사장이 등장하는데 그게 히브리서7장23절에 보니까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이 제사장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 지파지요. 그 다음에 24절,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예수님은 어느 지파입니까? 유다 지파로 오셨어요. 지금 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지파로 왔다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율법대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율법이 무효화된 게 아니고 실효성을 가져서 그 결과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그 자체가 온전한 제사장으로서 온전한 제물로 더는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다.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는 거예요.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구원 받은 자가 내놓을 게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유다지파가 오지 왜 예수님이 마지막에 레위 지파를 거쳐서 오느냐, 레위 지파를 거쳐야 인간은 왜 율법을 못 지키는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죠. 바로 그 과정을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과정을 반복되는 거예요. 왜 나는 아닌가, 왜 나는 아니어야 하는가, 왜 내가 내 힘으로 내 믿음, 사랑, 소망으로 구원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미 나 말고 특수한 분이 모든 일을 마감시키기 때문에 일이 이미 끝났어요.
노가다 시켜가지고 취직했다 하는데 뭐 통보를 잘못 받아가지고 11시부터 일한다고 잘못 받아가지고 가보니까 초자 현장 일군 되어 가보니까 벌써 고참들 다 집에 가고 없어요. 왜? 일이 끝났어. 11시가 아니고 새벽4시에 오라고 했잖아. 4시에 와가지고 덥다고 11시까지 하고 그 다음부터는 오후에 일 안 해버렸어. 현장에 그런 일 많지요. 이렇게 날씨가 비가 온다든지 이렇든지 하면 빨리 와서 진도는 나가야 되겠고 공정은 맞춰야 되겠고 날씨 안 좋을 때는 빨리 와서 하는데, 지가 딴 생각하다가 시간을 못 맞춰가지고 다 끝나버렸어. 끝났지요. 우리는 이미 끝났음을 보여주는 전리품이 성도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 내가 홀로 다 이루었어. 니는 원수도 안 되고 합격되었어.” 라는 통보를 품어야 돼요. 우리가. 그 통보를 품고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종교 이런 거 성경의 내용들을 우리가 다 알고 있어야 되지요. 인간이 부질없는 짓이 어떤 짓이 부질없는 짓인지를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전부 다 경험에 나서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21장42절, Jesus saith unto them, Did ye never read in the scriptures,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jected, the same is become the head of the corner: this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lous in our eyes?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건축자들의 버린 돌.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일하실 때에 왜 인간이 필요한지를 아시겠지요. 인간이 필요해야 인간의 보편성 안에 들어있지 않는 방식으로 너희들이 구원됐음을 인간이 동원해야 그걸 보여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니까 그 기도 아니다. 금식하니까 그 금식 아니다. 구제하니까 그 구제 아니다. 바리새인이 왜 필요합니까? 아니다, 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거 아니거든. 그거 복음 아니거든. 계속 아니다, 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이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다. 이 말이에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로마에 어떤 한 여인이 있는데, 이름이 아리아인데 한 여인 아리아는 그 남편 이름이 가에시나 포에투스인데 그 사람이 왕의 신하인데, 왕한테 믿보여가지고 반역했다는 혐의를 받아가지고 왕의 진노를 사가지고 왕이 칼을 던지면서 “어이! 가시 죽어!” 그러니까 그 가에시나포에투스가 벌벌 떨면서 “흐흐흐 못 죽겠어요.” 이렇게 하니까 옆에 아리아가 칼을 뺏어가지고 “거 봐! 자기 가슴을 확 찔러 봐! 거봐. 죽는 거 별거 아니잖아.” 물론 지가 칼로 찍어 죽었지요. 나처럼 죽으란 말이야. 죽음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건 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동안 인간들이 자기가 자기 인생을 보증한 거예요. 반칙이지요. 내 인생을 내가 나를 격려한 거예요. 참아. 잘 될 거야. 막 이리 하면서 계속 격려한 거예요.
힘 들 때는 소주 한 병 까가지고 노래방 노래 불러가면서 내일은 해가 뜬다. 노래 막 부르면서요, 스스로 자기에게 힘을 부여하면서, 사표는 내더라도 내일 또 열심히 싸워야지. 직장인이 매일 그렇지요. 뭐. 여기서 주저하면 안 돼. 다시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어나야 돼. 이런 식으로. 베드로 같아요. 주님, 제가 저 사람 여섯 번 용서했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일곱 번 용서해야 됩니까.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여섯 번 용서하고 자랑질 할 때 주님께서는 숫자를 확 늘여버렸지요. 일흔번에 일곱 번 하고 나 찾아오너라.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오직 자기만 믿어요. 자기 할 도리를 믿어요. 자기가 자기를 보증하는 그런 인생. 이게 일차원적이고 1층에 있는 거예요. 아래층. 누구의 보증인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증하면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 라는 그 발상 자체가 이건 성공해도 절망적이에요. 200억 벌어도 절망이고 수천억 벌어도 절망이에요. 이건희 딸이 자살했잖아요. 뉴욕에서. 1번, 밥 못 먹어서 자살했다. 2번, 용돈 떨어져서 자살했다. 몇 번입니까?
허무한 거예요. 우울증 걸려서. 허무한 거예요. 도대체. 성과는 내야 되겠지. 니는 삼성의 집안이라 성과내야 되지. 해보니 일이 잘 안되지. 뜻대로 안되지. 집안에서 원하는 것과 지가 하고 싶은 일에 또 어떻게 됩니까. 충돌이 일어났지요. 김도올 하는 사람이 있어요. 김용옥. 김용옥 그 사람 딸은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무슨 희한한 예술한다고 돌아다니면서. 내 인생 내가 산다.
우리는 내 인생 자체가 아예 없음을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해야 돼요. 그건 마귀가 쓸데없이 허풍만 댔다 갖다 부은 거예요. 지금껏 살아온 것은 주님의 약속, 십자가의 맹세, 복음 때문에 살아 온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519b슥12장8절(보증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사야44장26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황폐한 곳이 되게 해놓고 그 다음에 복구시킨다. 예루살렘이 황폐했다는 말은, 크게 쓰겠습니다. 예루살렘은 패배했다. 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패배했다는 것은 더 크게 쓰겠어요. 악은 꼭 이 세상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악이. 악은 끝내 이기리라. 되어야 돼요. 악이. 죄가. 이걸 모르면 우리는 현실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게 되어있고 전체를 다 접수하고 점령하게 되어있어요. 광주사태 일어났을 때 그 신부들이 막 노래를 부르는 중에서 하나님은 뭐하십니까? 하나님은 벙어리 하나님, 혀 잘린 하나님, 이렇게 악이 횡령한데 하나님은 왜 그냥 방치하십니까? 그런 노래가 나왔어요. 그 사람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몰라서 그래요. 악은 반드시 승리해야 돼요. 꼭. 반드시. 어디 뭐 기쁘지 않습니까.
자기가 구원받았다 해놓고 자기가 승리하겠다 하는 것은 지금 두 개를 같이 쥘 수 없는 것을 두 개를 같이 쥐려고 하는 욕심쟁이 우후후! 욕심쟁이에요. 욕심쟁이. 이건 서로 안 맞는 걸 다 쥐려고 하는 거예요.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서도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챙기겠다. 무슨 그런 구원이 있어요. 세상에 그런 구원 없어요. 한 쪽을 내놔야 돼요. 자존감이 뭉개지던지 아니면 악의 편에 서서 끝내 이기던지 그래야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식에 문제가 있지요. 나는 내가 속한 집단, 내가 속한 소속은 반드시 이겨야 돼! 내가 응원하는 단체는 반드시 이겨야 돼! 그 자체가 예루살렘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게 돼요. 이래서 주님이 우리를 떠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승리한다. 내가 승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속에 주님의 아픔이 들어오면 안 돼! 라는 뜻이에요. 철통수비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나한테 그저 좋은 것만 줘야 되지 주님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거라면 주님이라도 나는 사양하겠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수요일날 그렇게 설교하고 복음 이렇게 해도 막상 이 이야기 딱하니까 음찔하지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내부의 끙끙이는 용납 안 됩니다. 이게 12장의 제목을 단다면 예루살렘의 구원이에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내가 아는 예루살렘은 파멸되고 내가 모르는 예루살렘은 그 파멸위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왜 우리가 구원받아야 되느냐 하면 이미 내가 챙기고 싶고 내 탐심이고 내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가 아는 예루살렘이 반드시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알기 때문에 내가 익숙하기 때문에 내가 원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제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테니까 여러분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보세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 두 번째 문장은 방울을 고양이 목에 다는 것. 시작을 모르고 결과만 본 사람 같으면 이것이 똑같은 결과라고 생각들 거예요. 고양이에 방울이 없다가 뭐가 딸랑하고 쫓아다니니까 저건 고양이 목에다가 방울을 달아줬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게 방울이 아니고 이게 다이아몬드라면 주인이 고양이 목에 다이아몬드를 달아준다면 다이아몬드를 그 주변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자랑질하려고 고양이 목에 다이아몬드를 딱 달아가지고 가는 곳마다 다이아몬드가 고양이에 따라서 이동하는 거예요.
그러면 고양이가 빛나겠어요? 다이아몬드가 빛납니까? 다이아몬드가 빛나지요. 누가 그것을 다이아몬드에다가 고양이 목에 단다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이게 바로 예상 밖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예루살렘은 내가 너를 위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그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그걸 누가 부숩니까. 하나님 본인이 부셔요. 그건 인간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갈수록 점점 더 잘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점점 더 나아지고 발전되기를 원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장착되어있기 때문에 중무장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옛날에 취직이란 걸 해봤어요. 지금부터 197십 몇 년도에 취직을 해봤거든요. 79년도인가 취직을 해봤는데 42년전에 취직을 해봤는데 월급이 십칠만원이었어요. 약간은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뭔데 이리 많이 주느냐는 거예요. 십칠만원을 30으로 나눠보니까 하루에 오천원이에요. 엄청난 돈이에요. 자장면이 오백원쯤 되니까. 엄청난 돈을 주는 거예요. 그 때 교사 월급이 그만큼 됐었어요. 너무 많이 준다는 생각이 몇 개월 갔겠습니까. 십칠만원에서 이십만원 그 다음에 점점 오십만원 나중에 세월가면 점점 더 많아지는 거예요. 절대로 만족함 못합니다. 남들은? 이 나이에? 남들은? 이 나이에? 내 동창생은 얼마에? 다른 친구들은 얼마 버는데?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한달에 천만원 벌다가 한달에 한 구백오십만원 벌면 이건 뭐 비상 걸렸어요. 망했다. 망했다. 망했어. 끝났어. 나는 끝났다. 세상에 오십만원. 물가가 4%증가했는데 이게 뭐야? 마이너스가 뭐야? 이건 내가 나를 용서 못해.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막. 나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남편이 처음 월급 받아줄 때는 아내가 이렇게 합니다. “당신은 월급 생각하지 마. 내가 당신 몸 건강하게만 있어주면 나는 당신한테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중에 취직하고 난 뒤에 돈 벌어와! 돈 안 벌어오면 집구석 들어오지 마! 우리 마음이 왜 그런 거예요? 우리는 이미 우리 내부가 디벨롭 자꾸 열리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욕심과 탐욕이 시간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게 계속해서 뚜껑 열리듯이 계속해서 이게 샘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수습이 안돼요. 내가 감당을 못한다고요. 뒤로 돌아갈 재간도 없고 방법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의 욕망이 그렇게 가만히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가랴12장에서 주께서 원하는 건 이겁니다. “너가 쫄딱 망해봤나?” 이걸 묻는 거예요. 니가 쫄딱 망해봤나? 망함의 망함이 뭔 줄 경험해 봤어? 못했지? 내가 해줄게. 내 백성들아. 이러는 거예요. 내가 해줄게. 하~~. 그러니까 이건 예루살렘 불타버리고요. 나머지 전부 다 하여튼 성읍에 있는 거 다 불타버려요. 에스겔에 나오는데. 수련회 때 할 이야기고요. 모든 예루살렘의 것은 전부다 다 무너집니다.
이사야44장26절 아까 보셨잖아요. 하나님께서 거기 누가 있었나, 아무도 없어요. 예루살렘을 텅텅 비게 만들었어요. 비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들고, 예루살렘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누구도 다 분명하게 해놓고 그 다음에 그곳에 살아라. 누가 살겠습니까? 아무도 안 살지요.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마음이 낮은 사람들이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만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곳이라도 우리한테는 과분합니다.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구원받은 자의 태도입니다. 마음자세입니다.
그 때 내가 알던 예루살렘이 아니에요. 새로 마련해준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우리 자체가 예루살렘하고 똑 닮아야 돼요. 뭐냐, 우리 마음이 황폐해져야합니다. 내 욕심에 스스로 실망해야 돼요. 내 욕심에 실망해야 돼요. 그러면 그걸 인간적으로 하라 하세요. 인간적으로 못합니다. 자, 이 못하는 이유를 열왕기상18장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수요설교 때 설명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되어가지고 이걸 오늘 안양강의로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 열왕기상18장19절,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그 다음에 아세라 선지자 400명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관계라 했지요. 이러한 제사장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게 전부 다 민간 신앙을 아합왕이 인정했기 때문에 그래요. 민간신앙을 그들은 다 포섭을 하고 인정해줬기 때문에 너도 나도 여기에 다 더한 거예요. 고객들이 있으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 있는 겁니다.
850명되니까 여호와 선지자는 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이에요. 850:1입니다. 한 운동장에 모아보세요. 한 명은 찾을 수도 없어요. 850명이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150명 있으면 천명이잖아요. 천명되는 사람 앞에 한 사람 족집게로 못 뽑아내요. 통계상으로 무시해도 되는 겁니다. 평균값에 들어갈 영향도 못 미쳐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엘리야도 이걸 알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만 남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만들었어요. 나만 남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만 남았다는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없음이에요. 없음.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를 남겨둔 거예요.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흔적은 없다. 없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만 있다가 아예 없다 보다도 하나만 있네가 더더구나 강조가 되는 거예요. 우리 외손녀가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초등학교에 한달 동안 입학했거든요. 입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시험을 치는데 얼마나 공부를 시켰는지 시험을 치는데 시험 치는 문제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원기둥을 딱 그려놓고 다음 물건 중에 원기둥과 같은 도형의 이름을 쓰세요. 이렇게 하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가지고 아는 것은 이름을 쓰세요. 알아가지고 변아민 지 이름을 쓴 거예요. 담임선생님이 뭘 묻는 줄을 모르니까 다 그어버린 거예요. 옛날 같으면 죽죽 그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맞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세모로 해가지고 마음에 상처 안주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 은영 박사한테 배웠는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틀렸다 맞다가 뭔지를 몰라요. 자기 인생 자기가 살면 되니까요. 와가지고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어머나 맞는 게 없네. 세상에 맞는 게 있네. 세상에.” 이게 얼마나 긍정적 마인드입니까. 맞는 게 다 있느냐. 이건 아주 강조하라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다 틀렸다는 것은 강조하는 거예요. 어떻게 맞는 게 있지? 이상한 일이네. 어떻게 오늘날 성도가 있지? 이건 신기한 일이네. 그 신기함을 스가랴가 예언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없어야 합당해요. 성도가 없어야 되는데 이게 왜 있지. 그게 놀라라는 이야기에요. 성도가 있다는 점에 놀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하나가 남아서 엘리야가 하는 이 없음을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심판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있음을 심판하는 분이 너희들 보기에 없는 여호와께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단을 쌓아요. 제단을 쌓았는데 돌 제단을 쌓아놓고 여기다가 송아지를 놓았잖아요. 송아지를 놓고 난 뒤에 먼저, 열왕기상18장26절부터 제단 죽 나옵니다. 제단을 쌓아놓고 여기다가 송아지를 얹어놨어요. 그러면 지금 850명의 우상 숭배자들있잖아요. 그럼 여호와는 있어요? 없어요? 그들에게는 여호와는 없어요. 그러면 그들은 바알신이 있지요. 그럼 여호와가 없다가 뭐냐 하면 여기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바알신은 여기에는 없습니다. 왜 없느냐 바알신은 있잖아요. 850명 있잖아요. 여기는 없잖아요. 그러면 이걸 없애는 방법은 뭐냐 여기서 뭐가 나와야 이게 다 없어집니까? 뭐가 나와야 없어집니까? 불이 나와야 되지요. 불이 나와야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엘리야가 이들을 불사르는가, 아니에요. 엘리야 본인도 없음이 나와야 돼요. 뭐 없음? 엘리야는 심판권이 없음. 그럼 엘리야에다가 거기다 뭘 넣는가? 물을 3통을 집어넣어버려요. 물이 철철 흘러요. 그러니까 심판할 수 있는 어떤 재료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물이 흐른다. 지금 이 제단에서 일어나는 물 붓는 행위, 송아지 걸치고 물 붓는 행위, 이 모든 행위는 여호와께서 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행하는가 여호와 자신의 행함을 제단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고기해놓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없어지는가 한 번 보자. 라고 문제를 던져놨잖아요. 문제를 던져놨는데 거기에다가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불과 상극이 되는 물을 부어버려요. 그것도 조금, 폼으로 부었습니까? 도랑이 넘치도록 부었습니까? 도랑이 넘치도록 부었지요. 나중에 불이 나타나는데 도랑에 넘쳤던 물을 무엇이 다 빨아 당겨 버려요. 불이 다 핥아 없애버려요. 그리고 이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있음과 없음을 바꾸는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고 심판의 하나님으로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바알과 아세라가 승리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이겨야 되는 거예요. 엘리야 눈에도. 자기도 없음이 되어야 되니까. 만약에 엘리야가 “야, 나만 남았고 다른 사람은 없네.” 이리 되면 엘리야는 본인이 없음이 아니고 뭐가 돼요? 있음이 되어 숫자로 850:1이 된다니까요. 주님께서는 850:1이 되는 게 아니고 주의 뜻은 850:1이 아니고 850:0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 엘리야 본인의 일이 아니고 이 일이 무슨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1이라는 숫자로 겨우 등장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악이 이 세상에 필히 이겨야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에요. 결국은 세상은 하나로 통째로 한 통속으로 세상이 이겼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12장11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겼다 해놓고는 그 이긴 모습이 뭡니까?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음이 이긴 거예요. 이게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처구니없는 어떻게 보면 자기 위로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너무나 내세울 게 없었으면 어떻게 지 죽는 것을 이겼다고 표현하느냐, 아이고 안타깝다. 측은하다. 이리 나올 거예요. 그리고 가차 없이 죽음 속으로 내보냈던 것은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물어봅니다. 죽이는 자가 이겼습니까? 죽는 자가 이겼습니까? 그 이야기에요. 세상에서는 죽이는 자가 이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세상 사람들한테 죽임을 당함으로서 이긴 거예요. 죽지 아니하면 부활의 이김이 없으니까. 아이고, 여러분, 퍽이나 위로가 되지요. 사업하다가 망했잖아요. 주여, 이기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얼마나 망가졌으면 그런 식이라도 위로하려고 우리가 보는 우리가 애처럽다 할 거예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하는 말은요, 어느 누구도 이 스가랴 예언대로 지키고 말씀을 지키는 위인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보세요. 여러분들을 바꿔 줄 거예요. 여러분들이 바꿀 수가 없어요.
마지막 남은 게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오기만 남았는데. 이제 오기라는 말을 바꿔야겠어요. 가오만 남아요. 가오만. 강수연 때문에 바꿔. 마지막 가오만 남았는데 돈이 없지 우리가 가오가 없습니까. 우리는 돈도 없고 가오도 없어요. 돈도 없다는 강수연이가 180억이 있다고 하는데 많지요. 어떻든간에 사람들은 뭐든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뭔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 성도를 기어이 없음으로 발로차가지고 없음으로 자꾸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거의 20년전인가 와룡산에 놀러갔던 일곱애들이 개구리소년애들이 집에를 오지를 않아요. 다음에 보니까 다 죽었어요. 애가 죽었다 말이죠. 왜 죽었는가 해서 범인을 찾아도 범인이 없어요. 저체온증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다. 또 그 소리해가지고 애 부모들한테 욕 되게 얻어먹고. 수사했던 사람이 이건 추워서 죽었다. 이리 이야기하는데. 어쨌든 애들이 갔는데 돌아올 시간에 애가 안 들어오지요. 그러면 부모입장에서는 뭐냐 어제까지 있더라도 그건 어제 이야기고 오늘의 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럴 때 부모들은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예루살렘가지고 그렇게 다루시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 예루살렘이 건재하다 지금은 예루살렘이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없어요. 거기 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게 하겠다. 회복하겠다. 내가 거기다 주민을 두겠다. 하는데 여기 주민들을 살게 하고 회복하겠다. 하면서 어떤 사람도 예루살렘을 떠난 자가 자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여기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느냐, 돌아오는 건 누구 몫이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악이 승리하게 만들어요. 악이 승리하게 만듭니다. 악이 승리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는 뭐하게 하느냐 하면 실망감이 대단하겠지요. “아휴! 하나님만 믿어도 아무짝도 소용없구나!” 그렇게 하겠지요. “정말 하나님 믿는 내가 바보지. 믿을 걸 믿어야지. 세상처럼 돈과 힘을 믿어야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아무 실효도 없는 내용도 없는 그걸 왜 허풍선이 같은 걸 내가 왜 믿었지. 참 후회된다. 그래 이 참에 그만 떠나버리자.” 이러면 여기서 주께서 증명하는 것은 아무도 예루살렘을 채울 수 없다가 되지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노렸던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세상은 역시 강한 자, 불신 자 이방인이 강해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오시는가 누가복음13장 32, 33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스가랴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할 때에, 중요하니까 잘 들으세요. 집중해서. 예수님 본인이 쫓겨가는 원주민 역할을 본인이 몽땅 다 짊어지십니다. 그러니까 사람 탓을 하지 않아요. 인간은 원래 돌아갈 재주도 없고 구원받을 권한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하나님 백성 역할을 본인이 담당해요. 33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누가 원하지 않는가?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하는 자가 예루살렘이 완성되는 것을 그들은 원하지 않는 걸로 그렇게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해버린 겁니다.
왜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을 싫어하느냐 하면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나에게 어떤 아픔이 없는 상태로 예루살렘 주민으로 계속 꾸준하게 가고 싶은 거예요. 쫓겨남이 없이 철저하게 망함이 없이 그냥 가고 싶은 거예요. 따라서 그 예루살렘 주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해요. 둘 다 아담의 자손이니까. 니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니 마음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비난하거나 왜 믿음이 없느냐고 다구칠 쨉이 못 됩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주민을 채우는 일은 인간 선에서는 끝났어요. 어느 인간도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주님께서는 확정해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뭐냐, 예루살렘 주민들아, 나를 떠밀어라. 나를 밀어보라. 예수님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정짓고 나를 밀어버려.
33절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 바로 모레라고 하면 되는데 내일 모레는, 서서히 하루, 하루, 하루가 가는 방향을 보라는 거죠. 여기 3일이잖아요. 3일이니까 예루살렘에서 3일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너희가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자체가 갖고 있던 그 의미가 하나는 내 탓이고 초월하는 식으로 또 하나는 세상 식으로 둘을 구분지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던 고향이에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내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의미가 듬뿍 담겨있기 때문에 그 의미에서 자기가 발을 못 빼는 거예요. 자기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기를 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까워요. 예루살렘 재개발하는 게 싫어요. 왜? 내 동네 골목이 다 없어지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주민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합니다. 이게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게 성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거 알아들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고집이 있어가지고 자기가 살았다는 그것 때문에 내 것이 삭제된다는 것은 본인의 자존감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16세쯤 됐는가 어떤 소녀가 밤에 잠을 자면 자꾸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거예요. 잠만 자만 아버지가 자꾸 떠올라가지고 상담 받으러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서장훈한테 갔어요. 무엇이든 물어보살한테 갔어요. 아버지가 자꾸 떠오르는데 어쩜 좋습니까? 오기 전에 무당한테 갔답니다. 무당한테 가니까 아버지가 지금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에 떠돌면서 너가 있으니까 이건 돈 좀 수백만원 들여가지고 굿을 해야 아버지를 편히 모신다. 그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가 맞습니까? 순진하기도 되게 순진해요.
그러니까 그걸 듣고 서장훈이가 “내가 아버지다. 너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하니까 그 소녀가 “에이~ 서장훈이면서.” 이러지 않고 막 우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 이러면서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그러니까 지금 그 소녀는 자기의 자아성을 아버지의 추억과 더불어서 자기가 이렇게 구성을 해놓은 거예요. 아버지가 개인택시 했는데 개인택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말이죠. 죽어버렸으니까 이 마지막 대목을 다 메우지 않으면 본인이 내가 아닌 거예요. 내가. 아버지가 있어야 그게 나에요. 아버지가 없는 나는 그 전에 상상도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나는 나의 추억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에요. 외부의 타인의 추억으로 뚝배기 비빔밥 안에 섞어져 있는 거예요. 따로 이거 재끼고 이거 뽑아낼 수 없어요. 부부라는 게 세월가면 그리 돼요.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백날 우는 이유가 좋으나 미우니 같이 섞여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심지어 강아지 죽어도 그렇게 우는데.
그러니까 이 소녀는 아버지를 찾는 게 아닙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는 그냥 텅텅 비어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 전체의 반 토막 난 것부터 새로 이것을 메워나가야 돼요. 공부를 하던지, 다른 취미를 하든지. 어제는 어제부로 끝났잖아요. 다시 과거로 못 돌아갑니다. 지워졌어요. 중요한 것은 현재. 현재 내가 반 토막 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은데 자꾸 잠을 자니까 그래서 물었어요. 잠을 몇 시간 자느냐? 하루에 11시간 잔다는 거예요. 잠 좀 줄이라. 그게 해결책이었어요. 잠을 줄이면 아버지가 떠오를 수가 없지요. 잠을 줄이면. 하여튼 11시간 자가지고 뚱뚱해.
모든 인간은 과거가 발목을 잡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잘 나갔는데. 이렇게 뛰어났고, 과거에 이렇게 희망이 있었는데, 왜 앞일은 암담하냐 이런 식으로. 자꾸 사라진 과거가 자꾸 발목을 잡는 거예요. 그건 누구 탓이 아닙니다. 본인이 이 없어진 부분을 마치 지금의 환상처럼 본인이 이걸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망하되, 아무리 예루살렘이 망해보고 불타버렸어요. 예루살렘은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을 도로 회복하려해요. 스가랴에 말씀하셨잖아요. 사람 산다고 했잖아요. 이방인들을 쳐부수고...,
예루살렘을 망할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 포위되어서 망했잖아요. 아주 버려둔 거예요. 그럼 바벨론 다음에 헬라가 오지요. 로마오지요. 계속 예루살렘이 방치되어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계속 이방 힘의 권력이 거기서 상주하고 있으니까 예루살렘 이것이 다시 회복될 수가 없는 거예요.
스가랴 내용이 이래요. 진동이 일어나가지고 예루살렘 자체가 외계인 UFO도 아니고 사람들이 UFO를 사진을 팍팍 찍었는데 갑자기 UFO가 자동적으로 엔진 걸려가지고 비비빅 하늘로 가는 식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진짜 요한복음2장에 나오는. 이 46년간 지은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다. 사흘만에 짓겠다는 말이 뭐냐, 해설도 붙여있어요. 이는 부활하신 예수의 육체를 위함이라. 이리 되어있다고요.
아까 디벨롭 다시 해봅시다. 성전 자체가 이게 인화지인데, 아직까지 그 이미지가 몽땅 다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성전 건물은 건물로 보이지 그 안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신이 성전이라는 게 안 들어있어요. 예수님은 이제 그걸 서서히 보여주려 하는 거예요. 보여주는데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만 필요해요. 예수님의 몸만 필요하다. 이제 여러분이 알기 쉬울 거예요. 예루살렘은 없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민도 없다. 이게 먼저 성립되어야 돼요. 예루살렘 자체가 없어요.
예루살렘이 없으니까 회복도 복구도 없는 겁니다. 스가랴를 그렇게 해석해야 돼요. 지금 이 스가랴12장 보고 예루살렘이 벌벌 떨게 되면 그 예루살렘을 지배했던 그 여러 가지 이방민족이 그걸 다 떨쳐버려요. 다 떨어져 나가고 그 예루살렘을 얻고자 하는 유다백성들이 12장 이야기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쳐부수고 이게 우리나라의 성지야. 라고 그걸 다시 빼돌리는 그날이 와서 그게 6절에 나와요. “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12장 6절에 나오지요. 보고 계시지요.
예루살렘을 이렇게 “이건 우리거야.” 쥐고 있으니까 예루살렘을 쥐고 있으니까 그 근처가 유다 땅이잖아요. 유다에 있는 백성들이 유다지도자들이 일어나가지고 “어디에 우리 건데 감히 너희들이?” 쳐버렸잖아요. 불지르듯이. 불질러버리고 “아이고, 귀한 거 예루살렘.” 그걸 회복하는 식으로 예루살렘을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영광을 얻게 하는 거예요.
그게 유대장막으로서의 다윗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날에 먼저 유다장막을 예루살렘을 건지고 그 예루살렘에서 그 다음에 그걸 다시 다윗의 영광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겁니다. 옛날의 구약 때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9절에 보세요.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뭐한다? 멸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이 일을 유다뿌리에서 난 유다지파가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유다장막과 예루살렘의 영광도 진짜 나타나는 유다지파의 영광 다윗지파의 영광보다는 못하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이 이야기는 누가 봐도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전부 다 파괴됐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스가랴를 통해서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지요. “조금 있어 봐! 하나님께서 너희들 유다지도자들 동원시켜가지고 그들 이방인을 부셔가지고 오게 되면 유다지파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올 거야.” 누가 그렇게 봐도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아까 보았던 누가복음13장 보세요. 그 이방민족이 누구에요? 예루살렘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이 뭡니까? 예루살렘을 방해하는 자들이 되지요. 왜? 예수님이 누구한테 돌아가셨는데요? 그 스가랴12장 있는 사람들한테 돌아가셨잖아요. 유다지파한테 돌아가셨잖아요. 유대인들에게. 유다지파가 유대민족입니다. 유대민족이 결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확정지었잖아요.
그렇게 되면 드디어 성전하고 유대민족의 기다림하고는 관계 있다? 없다? 완전히 관계 끊어졌지요.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일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구원받고자 하는 자와 성도와 관계있다? 없다? 완전히 의도적으로 끊어놔요. 끊어놔야 구원 안 받은 내가 예수의 덕분으로 구원받은 그 영광보다 구원시킨 예수님의 영광이 더 크다는 것을 나중에는 알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꼼수를 발휘 안할 수가 없어요. 예수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예. 내가 그동안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했는데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받겠습니다. 이거 다 쓰잘데 없는 꼼수입니다. 지금 뭐가 빠졌어요? 주님의 아픔이 빠졌어요. 주님의 아픔은 뭡니까?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리는 그 백성들로부터 주님이 추방당하고 주님이 미움을 받아서 죽게 되는 그 아픔. 그 아픔이 삽입되지 아니하면 예루살렘 주민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리는 자들이 유대민족이고 헤롯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유대민족의 통치자. 예수님이 오실 때 통치자인데 이 사람이 뭐냐 하면 에돔사람이에요. 에돔사람. 유대인이 아니에요. 왕이 되고 난 뒤에는 유대인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서 거대한 성전을 세웠는데 그 성전이 뭐냐, 헤롯성전이고 그 헤롯성전이 지금 예루살렘의 서쪽 성전 벽이 남아있습니다. 그게 통곡의 벽이에요.
인간들이 끄집어낼 수 있는 한계를 예수님 당시에 유대민족이 다 보여준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설계도, 우리가 기대하는 원하는 과거의 영광을 예수 당신이 우리에게 들어주지 아니하면 나는 당신을 예수 당신을 쓸데없는 자로 죽여버리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주면 예수님 믿어줄게요. 잘 섬기겠습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 마지막으로 이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12장4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방민족들이 유대민족한테 공격을 받는데 그들이 공격받을 때 눈이 멀다 했지요. 말이 눈이 멀고, 그들이 눈이 멀어지게 돼요. 지금 이 예루살렘은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예루살렘 주민도 없고 예루살렘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지금 없는 이 유다민족 예루살렘 회복을 기다리는 유다민족이 있잖아요. 이 있음과 없음 사이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유다족속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맹세에 의해서 주어지거든요. 맹세 그 자체고, 약속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딱 들어와 보니까 유다민족들이 이스라엘 회복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살해당한 거예요. 그들이 구원을 원했기 때문에 구원자가 죽은 겁니다.
이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에요. 건축을 잘하기 위해서 그 돌을 버린 겁니다. 예수님이란 돌을 버린 거예요. 인간이 우리들이 성전을 조작하고, 인간들이 메시아를 조작하고, 구세주를 조작하고, 중보자를 조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들이 조작한 겁니다. 그 일이 지금 교인들 교회들이 하고 있어요.
그러나 막상 성도된 자는 우리가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 죽게 한 그 짓을 했습니다. 하고 그걸 그냥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참 쉽죠잉. “지금 세상들이 하고 있는 그 짓을 우리가 그 아이디어를 우리도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하고 이걸 인정해버리면 되잖아요. 그걸 인정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를 알기 때문에, 죄를 알고 그 죄에서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흔쾌히 그것이 주의 뜻이 아닌 것을 흔쾌히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주께서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똑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쪽에서 “십자가 그건 맞는 말인데, 그 십자가 능력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하면, 어떻게 그렇게 인식했습니까? 물으면 “그건 제 소관이 아니지요.” 왜? 나는 나만 생각하는데, 내가 뭘 끄집어낼 것만 생각하는데,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나의 예상 밖에 있었지요. 그 때부터는 이제 대화가 끝났습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26초 걸립니다. 대화가 안 되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지요. 많이 들었어요. “한국교회 다 썩었느냐? 니만 구원받고 니만 이단이냐” 그럴 때 이렇게 답변하세요. “나도 이단이다.” 그러면 되지 우리는 복음알고 니는 복음 모른다. 이러지 마시고. “나도 이단이거든. 내가 이단의 괴수거든.” 그때부터 이야기가 통합니다. 밥먹으러가자. 그러면 될 걸.
나는 안다. 나는 성령 받았다. 나는 성령 받았다 하면 저쪽에서는 나는 성령 안 받았나? 그 다음부터 소유 개념으로 다투고 있어요. “나도 이단이었었어. 나도 니하고 똑같은 생각이었었어. 나 다 알아. 그런데 주께서 구원하시는데 어떻게.” 강의에도 선거운동 마이크 소리 들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 식으로 안 되는 걸. 다시 한 번 찍어달라는 거예요. 지금. 회복해달라는 겁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회복할 거 다 끝났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주께서 다 이룬 전리품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계획 잡아서 요령 부려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담긴 그 뜻과 능력을 우리 죄인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케 하시니 이 모든 주께 은혜요, 주께 감사할 것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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