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6강) 사도행전20장28절(불쌍한 환자)20220328b
(강의:이근호 목사)
26페이지인데요, 위에서 세 번째 줄에, [유다이즘 식으로 자기의 행함에 따라 자비와 용서를 확보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다윗의 자손'을 애타게 찾겠는가! 불결한 자인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다른 방도를 언급하신 것이다.]
불결한 자인 세리와 창녀가 인간적인 종교적인 방법을 통해서 불결이 해소되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교회 들어와서 불결이 해소되는 게 아니고 불결이 불결답게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구원을 해주시는 거예요. 불결했었는데 깨끗하게 만들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불결이 더러움이 유지될 때 그 구원의 방식이 속성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구원받는 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구원 방식이 과연 생생하냐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방식에 있어서. 누가 구원받느냐는 의미 없고요. 그런데 유대인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우리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관심사가. 우리 인간 쪽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달랐던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사람을 빼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초대교회는, 사람을 빼는 방식이 뭐냐 하면 27페이지에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교회는 항상 성령의 지배하에 있다.] 사람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사람들이 시도하게 되면 필연적 어떤 결과가 나오는 인간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서 필연적 결과가 나오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전혀 원인이 없이 결과만, 하나의 작품만 남겨버리는 그 방식이 뭐냐? 사람 빼고 거기다가 뭘 집어넣고? 성령을 집어넣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게 바로 교입니다.
성령 받은 교회가 뭔가 하는 게 아니에요. 계속 성령 아래 있어야 돼요. 성령은 그냥 성령이 아니고 인간 하는 것, 하지 마, 하면서 나타나는 게 성령이거든요. 인간이 하는 것과 성령이 하시는 그게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뭐로 차이 나는가? 성령이 하시는 것과 인간의 차이는 이 차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십자가가 들어가요. 기껏 너희들이 하는 행위가 하나님을 죽였던 행위로 귀결됐잖아. 그런데 네가 뭐 또 행하려고 해. 하나님을 또 죽이려고?
너희들의 행함은 하나님을 죽이는 쪽으로만 그런 속성을 보이니까 그래선 하나님의 백성이 안 되니까 성령을 줌으로써 왜 너희들이 아니고 성령이냐를 보여주는 방식으로만 교회가 이끌어지고 교회가 운영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이걸 축약해서 “하나님의 피”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로써 교회를 다스린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오늘 공부할 것은 왜 사람의 신신한 믿음과, 사람의 성실성과, 순수함과, 고상함과 종교적인 착함 그런 것들이 왜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에 끼어들 수 없는 이유가 뭐냐? 그것을 구약 내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왔어요. 그 단체를 산헤드린이라 하는 겁니다. 이걸 우리말로 하면 공회,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에요. 유대인들의 통치방법은 국회의원들로 통치하는 거예요. 내각책임제 비슷한 겁니다.
그럼 왕은 뭐냐? 왕은 이미 시드기야 왕으로 끝났어요. 왕은 없습니다. 왕은 없고 율법에 관여하는 학자들, 전문가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 그들로 70명을 모았어요. 그림이 이렇습니다. 중간에 비워놓고 이쪽에 35명 앉거든요. 사두개인들. 또 이쪽에 35명 앉습니다. 완전히 마주보지는 않아요. 마주보는 건 영국식 국회고, 이렇게 반원처럼 돼 있어요. 35+35, 70명이잖아요. 산헤드린 71명이거든요. 한 명은 어디 있느냐? 중간에 대표자가 있습니다. 이게 대제사장이에요. 대제사장 중심으로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민수기 11장 24절에 보면 거기 70명의 장로들이 나오지요. 24절에 보면,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몇 명입니까? 70명을 끌어 모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역사 중심이다. 역사에 대해서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것을 끄집어내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헛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 70명을 뽑아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잖아요. 열두 제자에다 70명을 뽑아요. 노선이 다르지요. 의도적으로 그들이 하는 행세를 그대로 하시는 거예요. 하시면서 너희들 가짜야 하는. “너희들은 너희의 뜻에 의해서 뽑았잖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와서 뽑을 거야.” 그렇다고 그 조직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들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조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 동일한 조직을 만든 거예요. 나중에 열둘이 십사만 사천 되는 데요?
그런데 25절 보면, 방금 24절 했지요.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그러니까 그때가 그리운 거예요. 그 장로들이 시내 산에서 다른 백성과 달리 시내 산꼭대기에 더 가까이 접근했던 장로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여호수아는 더 가까이 갔었고, 최종적으로는 모세 혼자 올라갔었고.
장로들이 시내 산에서 더 올라가고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으니까 “맞다, 저거다. 저게 표준이야. 우리가 저런 진영과 모습을 갖추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했다고 특별한 성령이 임할 거야.” 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얼추 진영이 갖추어졌으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꾸며놓으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신으로 보충하게 되면 하나님 뜻에 완전히 합일을 이룰 것이라는 아이디어, 그건 유대인이나 오늘날 교회나 마찬가지잖아요. 장로석이 따로 있고 하지요. 보통 교회에서 성가대석 맞은편이 장로석이잖아요. 그래서 장로석에선 매날 설교시간에 자잖아요. 자면서도 설교시간에 기타 소리를 어떻게 찾아내는지 설교 경청의 달인들이니까. 축도할 때 깨어나고.
그래서 산헤드린이 있는데 이들이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70명의 지혜로운 자라고 자처하는 거예요. 그때 그 당시에 성신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를 받았다고 자부하고. 그 지혜 모인 자 70명에다 하나님이 지정한 대제사장까지 딱 겸비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라고 자부하면서 이스라엘에 일어난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일이 되려면 우리의 재가를 받아야 된다, 라는 그런 원칙을 고수한 겁니다. 이게 산헤드린 공회라는 거예요.
참 그들에게 어떤 권한이란 게 있는데 그 권한을 적어볼게요.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백성의 조직체를 이 사람들이 하는 것을 경유해야 왜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는지를 어떤 아이디어들이 원수가 됐는지 알 수 있거든요. 산헤드린 공회가 했던 한 네 가지의 권리가 있습니다.
첫째가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산헤드린의 중심자가 대제사장이고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간다고 돼 있으니까. 만약에 대속죄일을 행할 수 있는 대제사장의 존재를 부정을 한다면 뭐가 무너집니까? 산헤드린 공회에 대한 권위를 부정한 게 되니까 이거는 유대인 입장에서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지요.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 바울에게 너 왜 대제사장을 욕하느냐, 이런 식으로 힐난한 대목이 나옵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대속죄일을 함으로서 정신적인 지배층을 형성해요. 정신적인 지배계급을 형성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오늘날 성만찬할 때 아무리 설교할 때 기타 소리하고 엉망진창이고 지 마음대고 돈만 밝히고 누가 봐도 목사도 아니라고 이미 모든 교인들이나 주위 사람들 판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운만 걸치고 성만찬하게 되면 그래도 하나님의 사자다 이거에요. “우리 교회 사찰 집사가 그거 하겠나. 역시 좋으나 싫으나 기름부음 받은 목사가 해야지.”
평소에 술 먹고 오고 얘 때리고 형편없는 가장이라도 꼭 제삿날만 되면 낮에 목욕탕 갔다 오고 한복두루마기 입고 온갖 경건한 폼을 다 세우고 무게 잡고 아들 뒤에 서라. 며느리 너도 서고. 지가 먼저 지방 걸어놓고 절하고. 잘도 모르면서 수박 여기 놓고 생선은 여기 놓고. 그날만큼의 권위가 다음에 오는 제삿날까지 이게 이어져갑니다. “감히 가장인데 제사권 있는 가장을 술 좀 먹고 행패 부린다고 욕해? 내가 가장이야. 조상님의 은덕을 높이는 나 없이는 안 돼.” 그것도 모르면서 예예 하면서 우리 집 제사장이라고…… 정신적인 지주역할 하는 거예요. 가스라이팅? 갖고 노는 것.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절기를 주관하는 거예요. 이거는 대속죄일도 마찬가지지만 절기할 때는 전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다 모입니다. 백만 명도 넘게 모여요. 예루살렘에. 디아스포라 바깥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자기가 대속죄일 뿐만 아니고 절기 때 한데 모여야 돼요. 모여야 하나님의 메시아의 백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확립이 돼요.
요즘 말 같으면 이거에요. 대전도집회. 그동안 교회 안 나오던 사람들 남편들 다 데려오고 그동안 평소에 전도했던 사람 일부러 데려와서 좋은 옷 입고 오라하고 정 안 오려하면 차비 준다하고 점심 값 준다하고 봉투 써서 다 데려와서 소위 잠재돼 있는 우리 교회 표, 표 뭔지 알지요? 잠복돼 있는 부동표를 그때 가시화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모이는 숫자는 백 명이라도 숨어있는 교인이 삼백 명이라면 자기는 사백 명 목회자라고 그걸 자랑해서 계속 그 교회에 버티려는 정치적 전략이 있어요. 절기.
세 번째, 이 절기에 이들이 올 때 빈손으로 오겠습니까, 돈 들고 오겠습니까? 돈. 세 번째가 성전의 헌금을 관리하는 것. 역시 이게 본론이에요. 이게 본론이라고요. 돈 관리 누가 하느냐, 에요. 이게 실세입니다, 실세. 돈 관리. “당선자 청와대 옮긴다고? 청와대 딴 데 해? 기재부 돈 내지 마.” 이런 식으로 돈줄을 내가 쥐고 있어요. 그러면 당선자는 어떻게 하면 돼요? 만약에 용산에 짓지 않으면 정치적 발언이 되겠습니다만, 당선자 같으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나 같으면 천막 치면 되지. 개기는 거죠, 뭐. 완전히 전쟁터처럼 대통령 집무실을 천막으로 하는 거예요. 방탄이 어디 있어요. 총 쏘면 다 맞고.
성도들은 성전세 내야 되고 절기 때마다 절기 헌금 내야 돼요. 이걸 제가 수요일 설교 때 이야기했어요. 한 10% 냅니다. 십일조 말고 또 내야 돼요. 돈이 막대하지요. 그 돈으로 그들은 대제사장은 국회의원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월급 받고 사는 거예요. 성전세는 세겔로 내야 돼요. 이거는 시장에선 통용되지 않고 거기서만 통용되는 그걸 바꿔줘야 돼요. 또 성전에서 받은 사람은 그걸 바깥 돈으로 바꿔주는 그걸 환전소라 해요. 그 환전소를 주님께서 뒤집어버린 거예요. 헌금할 때 헌금함이 있지요. 멀리서 온 재벌들은 큰 돈 내는 거예요. 그런데 과부는 뭡니까? 2450원 동전을 내는 거예요. 자기 전 재산을 바치는.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전체 회당에 공문을 보내요. 공문은 의견을 취합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명령이에요. 본사에서 지부로 공문을 보내는 겁니다. 비비큐 값 이천 원 올리는 것. 안 올리면 퇴출이죠, 비비큐에서. 대리점에서 퇴출인 거죠. 회당제도를 통해서 이들의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사장이 뭐냐?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써 메시아를 만날 합당한 백성이 된다.
율법의 핵심은 바로 안식일 지키는 것과 그리고 할례, 두 가지를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나머지는 십일조나 이런 것 있고요. 앞에 성전은 그들의 성전 지내고. 기본적으로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과 할례를 행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깥에 있던 이방민족이 유대인과 함께 구원받으려면 두 가지의 의식을 경유해야 돼요.
첫째는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할례를 행해야 돼요.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자가 들어오게 되면 성전을 모독한 걸로 쳐서 성전의 순수성과 이스라엘 혈통의 순수성, 할례의 순수성을 거부한 게 되어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죽여 버릴 수도 있어요. 마치 그들에 있어서는 예수 안 믿어도 천당 간다는 것과 똑같이 되는 거죠. 할례라 하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아브라함의 약속에 준수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공회가 사도행전에서 또는 사도행전 이전부터 성경에 나타나기를 1차에서 5차까지 산헤드린 공회가 이뤄졌습니다. 그 공회가 어떤 경우에 했느냐 하면 산헤드린 이 사람들이 했던 1차가 마가복음 15장 1절에 온 공회가 모여서 내린 결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처결한 거예요. 1차 공회가 한 것이 예수님 당시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결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죽일 권한이 없기 때문에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방 사람인 빌라도가 유대인의 예수님 죽이는데 하나님 죽이는데 가담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겁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요? 이미 구원 방식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들이 미리 확고한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확고한 게 뭡니까? 인간들이 율법 지켜서 만든 형식과 제도 있잖아요. 그 시스템을 자기들이 옳다고 여겨 구성했기 때문에 그걸 부정할 수가 없어요. 미워할 수가 없어요. 그 시스템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래요. 최선이 문제에요.
제2차 결의는 사도행전 4장 1절에서 6절, 그리고 10절에 나오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기 위해서 공회로 모였어요. 베드로와 요한을 협박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제3차는 뭐냐 하면 사도행전 5장 17절에서 22절까지, 열두 제자를 옥에 가두어 채찍질하는 거예요. 이상하게 예수님 처형할 때도 가담했던 그들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도 예수님 제자들 공격이 되지요.
그러니까 두 번째 강의에서 제일 핵심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잘 들으셔야 돼요.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죽든 부활하든 말든 그들의 현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는 것, 아무리 우리끼리 십자가 복음이 좋다 해도 세상은 요동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환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그렇게 확정지어놨기 때문에 버림받기로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심정을 헤아려보세요. 새로 생긴 종교의 조그마한 이슈 때문에 기존의 국가시스템을 다 흔든다는 것은 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왜 손에 ‘왕’자 쓰면 그것이 싫은가요? 그 종교적인 요소가 감히 우리의 유구한 정치적 민주주의시스템에 겁도 없이 허락도 없이 끼어들었잖아요. 무당이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종교가 건방지게 끼어드느냐?
다시 말해서 아래쪽에 속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요소가 오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납득이 가는 것만 채워져야 될 그래서 누구나 수용되는 그 정치적 시스템에 왜 손에 왕 자 들고 등장하느냐 말이죠. 그 무당이 등장하는 거나 교회가 기도하는 거나 똑같은 차원이에요. 이들에게는. 일종에 양복에 밥풀 묻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세요. 그 사람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국가시스템, 민주주의, 손흥민이 한 골 넣는 것 지금 그게 중요한 거예요. 방탄소년단 그게 중요한 거예요. 살던 식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관성의 법칙이라 하잖아요.
시공간은 기존에 있는 이미 권세에 의해서 굴곡이 되고 구부러지게 돼 있다는 것, 질량에 의해서 이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에요. 특수상대성원리를 먼저 했는데 특수상대성원리는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삼십만 킬로미터. 그걸로 인하여 시간 자체가 일정하지 않다는 그게 특수상대성원리고, 일반상대성원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정된 공간과 고정된 시간은 없고 그게 전부 다 굴곡이 있다는 거예요. 빛도 그 굴곡 따라 오기 때문에 휘어진다는 그 이론이에요.
이 세상에 악마가 예수님의 원수가 권세를 쥐고 있으면 세상은 본의 아니게 악마의 요구 따라 굴곡지어서 올라갈 때 올라가고 내려갈 때 내려가는 그렇게 시스템이 자리 잡게 돼 있어요. 보이지 않는 영 때문에.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악마가 없잖아요. 종교적 요소를 빼잖아요. 남는 건 뭡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 남은 거예요. 과학적이고 기술적이고. 앞으로 정권은 기술 혁신적 정권을 하겠다고 안철수, 오늘 정치적 발언이 왜 나오노. 안철수를 인수위원회에 얹어놨잖아요. 그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에요.
아까 몇 차까지 했습니까? 3차까지 했지요. 4차가 사도행전 6장 12절에서 13절, 스데반 집사 하나 죽이는데 공회로 모였어요. 예수님 처형할 때 산헤드린이 모였거든요. 예수님이 그 앞에 서있었고 대제사장이 재판한 거예요. 제5차가 사도행전 23장 1절에서 6절에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재판할 때 사도 바울이 71명 가운데 재판 받았어요. 거기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이 있어요.
“나는 조상대로 믿는 것처럼 나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걸 믿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서 갑자기 공회가 두 조각났어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고 왜 안 믿느냐 하면 사두개인들은 헬라파에요. 그 당시에 로마사상에다가 성전만 지키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헬라철학에서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다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는 끝나요. 부활이 없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기 때문에 모세오경과 선지서까지 다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 재판하다가 저희들끼리 싸웠어요. 부활이 있다, 없다. 그래서 그들이 재판 못하고 벨릭스라는 총독에게 사도 바울의 이첩했고 그 이첩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나중에 로마까지 끌려가게 됩니다.
이게 이미 하나님의 각본에 다 짜여진 거예요. 그래서 산헤드린 이 사람들은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활동 속에서 예수님의 일이 아닌가, 어느 것이 악마적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 그걸 그들이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 한 것 해보겠습니다. 환란에 대해서. 환란이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된 게 환란이죠. 그 말씀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게 있었던 환란을 그대로 확장된 게 환란이에요. 그 예수님은 자기 인생은 십자가로서 압축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 믿는 백성은 자기 역사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다시 압축이 돼야 돼요.
그러면 압축되고 다시 튀어나오는 모든 일의 전개는 뭐냐 하면 나의 기억이 아니고 나의 기억이 모조리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님의 기억으로 바뀌게 돼요. 내가 없는 데서 출생해서 주께서, 주께서 출생하게 했고, 주께서 초등학교 가게 했고, 주께서 뭐하게 하시고 전부 다 주님의 일기장에 있는 내용들이 나라는 육체가 커가면서 계속 여기서 기입되는 거예요. 기입이란 말 알지요. 빈 장부에 주님께서 쓰시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 기억을 우리를 노트로 생각해서 거기다가 자기 일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노트에 일어난 일은 주님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에요. 그걸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사도들이죠. 그리고 스데반 집사고요. 스데반 집사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남의 일처럼 여깁니다.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 주여.” 나는 빈 노트에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빈 노트로 만들어요. “너 아니야. 예수님 내 일이야.” 성령께선 자꾸 꾸짖으면서 우리는 비워내거든요. 비워내면 이게 빈자리가 돼요. 공백이죠.
공백인데 우리의 육적인 요소가 아담적 요소가 공백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자꾸 욕망으로 이걸 채워버려요. 주님께서는 비워놓으면 또 우리 욕망이 와서 차지하고. 욕망은 뭐냐 하면 미흡함이에요. 미흡함, 결핍이에요. 전에 서울강의에서 했지요. 호색이란 건 무엇 때문에 생긴다? 결핍이에요, 결핍. 자꾸 결핍으로 메우는 거예요.
메우는 이유가 장래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내가 숟가락만 빨면 안 되지. 아이를 위해서 일을 해야지. 갑자기 주께서 지금껏 해왔다고 성령께서 그렇게 일러줬건만 내가 초조해서 안 돼. 내가 그냥 마냥 기다릴 순 없어. 장래의 나의 운명은 내 손으로 뭔가 달성하고 싶어요. 뭐 기도라도 해야 됩니다. 주께서는 하게 하셔요. 욕망 하게 하시고 욕망을 뜯어내지요.
이게 뭐냐? 응축의 슬픔이고 응축의 아픔인 거예요. 해놓고 뜯어내면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그런 뻔한 이야기 또 그 이야기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그 이야기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 사도들도 다 같이 매일같이 한 이야기에요.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
로마 갈 때 크루즈여행해서 곱게 가면 어떻습니까? 꼭 폭풍 불어서 로마 가는 그 시간만큼은 휴가 시간으로 보내면 될 텐데 로마 가면서도 사람들 구원해요. 몇 명인가, 사도행전 잠간 봅시다. 27장에 나오거든요. 276명(37절), 많이도 건졌다. 지금까지 합쳐서 많이 구원받았어요. 좀 풍랑 이는 가운데 고요하게 가면 되는데 로마 가서 본격적으로 할게요. 안 돼요. 로마 가면 자기 시간 아니에요. 주님의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자긴 아무 계획이 없어요. 원치 않는 길로 갈 뿐이에요. 성령께서 함께 해요. 딱 옆에 있어요.
풍랑을 맞아도 지 혼자 맞는 게 아니고 같이 주님께서 멀미하시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니 풍랑이야? 내가 일으킨 풍랑이지. 롤러코스트 탑니다. 그래서 섬에 당도했거든요. 섬에 당도해서 쉴 수도 있는데 섬에 당도해서 웬 추장부터 해서 거기서 독사에 물리기는 왜 물려요. 물렸는데 낫게 해서 하나님이 내려왔다 엉뚱한 소리하고 비합리적 비윤리적 발언해서 그게 아니라고 왜 나한테 절합니까, 이렇게 한바탕 벌이고, 이게 주님이 소동이거든요. 그리도 또 로마 가게 하고.
그렇게 했으면 로마 가서 쉬면되는데 그것도 안 되고. 로마에서 하숙하면서 이거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뭐 들락날락했지만 숫자는 늘어나지 않고 사람들 왔다 가고 또 다른 사람 오고. 도대체 내 교인이 없어. 왔다 갔다 언제까지 만나면 실패인 모양이라. 이처럼 산헤드린 공회에서 방해를 놓습니다.
그것을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반복성이라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보인다 했지요. 십자가는 묵시적 같이 성격이 다른 두 세계가 중첩돼 있습니다. 어느 날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지요. 대륙지각이 해양지각 밑으로 삽입되는 거예요.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맨틀 속으로 들어가듯이 계속해서 중첩된 이 세상에서 고요하지 않고 주께서 같이 중첩되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은 요한계시록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계속 질주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란이 뭐냐? 환란은 외부에서 오는 환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의 내부 환란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 진짜 주님 주신 것 없잖아, 이걸 확인시키는 거예요. 주님 자기가 준 성령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는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을 우리 몸도 살거든요. 따라서 성령이 중요한 거예요. 유대인들이 교회시스템이 중요한 게 아니고 성령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없으면서 성령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성경말씀이 있으니까 받지도 않았으면서 받은 척들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융통성 없는 곧이곧대로 고지식한 천사가 그 심사위원이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천사가 위에서 계속 압박 가하는 거예요. 결국은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랑 안 한다 했던가요? 주님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가 유일하게 하는 영어, Why me? 이때는 와이 미, 하면 안 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음성으로 해야 돼. 화이 미?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거기의 답변은 뭐냐? “너 아직 살아 있었어?” 이게 매일 반복돼요, 우리에게. 왜 나는 분명히 이재명을 찍었잖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다 있나. 그 상실감을 나는 못 견디겠다. 일주일 동안 밥도 못 먹었다. 0.7% 왜 주님은 내가 찍는 쪽이 떨어지게 했습니까? 밥맛 떨어지지요, 모든 의욕이 떨어지지요. 찍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예요.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너, 분명히 찍을 때 모든 만사의 뜻은 주께 맡긴다고 했나, 안 했나?” 나는 주께 맡깁니다, 하면 내가 찍은 쪽이 될 줄 알았지, 뭐. 이런 되도 않은 개그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은 세상 공격도 하지만 환란은 내 내부에서 환란을 유발시킵니다. 나를 업다운을 날마다 거꾸로 뒤집어버려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묵시를 현실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누가 필요하냐? 사탄의 활동이 꼭 필요한 거예요. 사탄의 활동은, 너 예수 믿지 공격한다, 이게 아니고 자꾸 종교적 이야기하지 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하고 시시한 밥풀 떨어내듯이 나의 수 시간 공들였던 복음을 툭 먼지 털어내듯이 털어내 버려요.
우리의 어떤 전도, 꼬실 수 있다는 기대감마저 몇 초 안 걸려서 다 떨어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 입으로 와이 미, 내가 얼마나 저거 꼬시려고 돈도 많이 들었는데 저 사람은 복음을 아예 막습니까? 공들인 그게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모든 걸 양보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럼 주님이 너 나한테 화내고 있는 거지, 맞지? 네가 나한테 화낼 쨉이 되느냐 묻는 겁니다. 네가 평소에 뭘 기대했어, 라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불신자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신자이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 내부에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선과 악의 다툼, 나의 의와 나의 의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주님의 의의 충돌 그 가운데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십자가는 살아 있다는 것, 나는 죽어 있다는 것, 그동안 주님이 살아 있고 십자가 살아 있는데 언약이 살아 있는데 자꾸 나는 현실로 돌아가면 나는 심장 뛰면서 내가 살아 있다고 이거는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인 것처럼 우리가 그걸 매일같이 확정짓고 그 토대 위에 우리는 어떤 행위에 나서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고 치고.
거기서 의미 있는 걸 하겠다. 그게 의미 있는 게 뭐냐 하면 교회시스템 아닙니까. 살아 있다고 치고 목사님,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헌금 할까요, 전도할까요, 반주할까요, 주일학교 교사할까요, 아침 일찍 올까요, 뭐할까요, 하는 거예요.
27페이지 봅시다. [실제로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까지 아니하며] 이렇게 돼 있지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요. 흉악한 이리를.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흉악한 이리로 볼 줄 모르고 하나님의 참된 목자라고 이해하고 그걸 받아들여요.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흉악한 이리가 어디 있느냐 하면 흉악한 이리의 정체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20장 그 앞의 말, 28절을 봐야 되겠지요. 흉악한 이리를 어떻게 규정을 했는지 사도행전 20장 2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성령 나오지요. 일단 성령은 교회를 통치하고 있지만 눈에 보입니까, 눈에 안 보입니까? 눈에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성령께서 보이는 사람을 세운 거예요. 그 보이는 사람이 무엇을 선포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의 핍니까, 하나님의 핍니까?
목회자의 희생이 아니에요. 목회자의 고생이 아니고 목회자의 애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가 피답게 유지되고 계속해서 피만 남길 수 있는가 보는 거예요. 그 피는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었음을 확정짓는 피였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죄인을 사랑하느냐 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돼요. 정신병자의 사랑. 이 정신병자의 사랑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걸 스토커라 해요. 내 사랑을 니가 왜 안 알아주느냐 하는 거예요. 이건 세상 사람들 사랑이고, 정신병적 사랑이 있어요. 이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사랑이에요. 인간들 자기 사랑하는 것이 이게 정상적으로 보거든요.
그 정상에 비춰볼 때 자기를 미워하는 사랑, 이거는 정신병적 사랑이에요. 그 사랑에 사도 바울은 나는 이 사랑밖에 모르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그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선 자기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 사랑,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김세환이 노래 부르면 뭐합니까. 사랑은 언제나~ 맨날 사랑 노래 불러도 그 안의 가사가 뭐냐? 사랑은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집사님 어디 이사 왔다 했습니까? 아산이요. 아산에 자기 이익을 계산하고 이사하셨습니까? 정답은 주께서 인도하셨다. 망했어, 망했어, 나는. 이런 식으로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 바로 안 됩니다. 반드시 거쳐야 돼요. 정신병자 나 사랑에서 이렇게 옮기는데 여기 성령이 개입하십니다. 성령이 개입하니까 처음에는 짜증나다가 그게 갑자기 감사가 되지요.
짜증나는 이유는, “나 이러다가 지옥 가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 저 혹시 지옥 가면 어떻게 해요?” 이렇게 질문하다가 지옥에 가든 말든 주께서 일하시는구나.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 있고 십자가 복음만 전파하는 걸 기뻐한다면 그걸 성경에서는 성령 안에 있다고 이야기해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니까 지옥에 가든 뭘 가도 그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관없는 일인지 아는데 목사님, 그래도 만에 하나 성령 받은 나를 지옥 보내면 어떡합니까?” 이젠 몇 번이나 예를 들어서 식상하기도 한데요 닭이 자기 따라온다고 정신병 걸린 사람, 당신은 강냉이가 아닙니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하고 난 뒤에 나는 강냉이가 아닌 걸 아는데 닭이 나를 강냉이로 보면 어떻게 합니까?
현재 정신병을 인간은 못 고쳐요. 의사도 정신병인데 같은 정신병자가 뭘 고칩니까? 그래서 정신병에서 치료됐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 이거에요.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대충 정리합시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람인 줄 아시면 병 나은 거예요. 정신병자는 지가 나폴레옹이라고 우기거든요. 이게 푸틴이잖아요, 푸틴. 그냥 머시마에 불과한데 지가 대통령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자리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나그네에 불과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령이 와서 나는 나만 주장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그걸 보고 기뻐해야지요. 나는 주님이사용하는 자료가 된다는 그것만 해도 얼마나 영광스런 신분인지 몰라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감격과 기쁨 가운데서 나타나야 돼요. 왜냐하면 이거는 내가 그렇게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있기 때문에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하늘나라 왔는데 무슨 또 다른 나라 생각합니까?
그래서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어제 오후 설교 때 했던 기도이야기인데요 성도는 내가 있는 곳과 내가 있지 않는 곳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돼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고 성령 바깥에 그리스도 밖에는 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육적인 망상은 마치 그리스도 밖에 내가 있어서 그게 다치면 안 된다고 내가 걱정하고 있지요. 그게 배설물로 빠져나가야 돼요. 아담의 요소니까. 아담의 요소가 있어줘야 십자가가 살아나니까 그것 한꺼번에 빠질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죽을 때까지 계속 있어줘야 내 구원 위주가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음만 드러내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챙기는데 급급한 우리 자신이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료로 활용됨을 이제는 오히려 고맙게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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