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무단점유

아빠와 함께 2022. 3. 30. 10:39

대전-77강 사무엘상31장1절(무단점유)20220328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상 31장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이걸로 끝납니다. 여기 사무엘상 31장은 사울이 길보아라는 데서 전사해요. 길보아 위치는 여기 갈릴리 바다, 요단 강 있고 사해가 있어요. 사해는 갈릴리 바다보다 한 4배 정도 큰가, 엄청나게 커요. 여기 중간쯤에 길보아 산이 있어요. 블레셋 원 땅은 남쪽인데 여기까지 와서 전투 벌여서 사울 왕을 죽입니다.

사울 왕만 죽인 게 아니고 옆에 있는 사람도 죽여요. 2절에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 이 세 사람 다 사울의 아들이에요. 한 사람만 안 죽고 세 사람도 죽었습니다.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죽는 이야기, 사람 죽는 이야기를 하나님이 계시로 나타내신 이유가 뭐냐? 우선 죽음이란 뭐냐부터 해야지요.

죽음이란 것은 점으로 소실되는 게 죽음이에요. 사라지는 거예요. 하나의 점으로 응축이 되어 사라지는 게 죽음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그러면 죽는 사람 입장에서는 있다가 없어졌으니까 다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용도로 죽는 사람은 이 사람이 인간으로서 서서히 죽어가면서 점으로 소실되면서 여기서 어떤 사건들이 죽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사태들이 어떤 요소들이 여기서 막 끼어들어요.

이 요소들이언약을 구성하는 요소에요. 언약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한 사람이 죽는 데 막 끼어드는 거예요. 사울이 죽는 것도 죽고 다윗도 나중에 죽어요. 죽으면서 사울은 어떤 요소가 끼어드느냐 하면 불길한 언약적 요소들이 끼어들어요. 다윗도 죽을 때는 불길한 요소가 아니라 복된 요소들이 일어나면서 다윗은 죽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불길하다, 다윗은 복된 것이다. 이 둘을 다 합쳐서 죽는 죽음이 뭐냐 하면 신약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 세상에 어떤 주변에 있는 보이지 않는 언약요소들을 실제 사건화 시켜서 유발하는 작동을 일으킵니다.

홋카이도에 눈이 많이 왔다 하지요. 이번엔 4미터나 내려왔다는데 홋카이도에 아무 사람도 살지 않고 눈만 내렸다. 그러면 눈벌판이 되겠지요. 그런데 홋카이도에 눈 내리기 전에 민가가 있다고 칩시다. 민가가 있다면 홋카이도 읍내에서 뚝 떨어진 민가까지 원래 도로가 있던 자리잖아요. 그러면 눈이 많이 와서 단절돼버리면 그 몇 가구 안 되지만 굶어죽어요. 식량부터해서. 그럼 제설차가 와서 그 민가를 향하여 진격해야 되겠지요.

진격하면서 수평적으로 돼 있던 눈벌판에서 중간에 길을 낸다 이 말이죠. 길을 내버리면 여기 있던 눈들은 어떻게 됩니까? 바깥으로 해서 눈이 더욱더 많이 쌓이고 여기 파낸 눈은 바깥으로 그리고 이 눈은 길로 작동해서 어떤 민가까지 집까지 갈 수 있겠지요. 이 세상은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고요해요.

원래 인간 세상은 그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못나나 잘나나 인간끼리 협조하고 인간끼리 의견을 내세우고 청와대와 인수위가 잘 화합해서 그 다음에 21세기 한국을 이끌기 위해서 좀 협의를 하고, 원래 인간들이 옛날부터 해왔던 거예요. 여기는 인간과 인간들만 개입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개입하면 안 돼요. 그게 바로 이방나라에요. 이게 하늘나라완 아무 상관없는 인간나라는 그래요.

그런데 만약에 투표해서 예수님이 당선자가 되었다 칩시다. 그럼 예수님은 십자가만 증거 하겠지요. 그러면 이거는 나라가 난리도 아니지요. 죽인다고 나서는 데 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다 죽인다, 영생이 없느니라. 이렇게 하게 되면 그동안 있던 종교라든지 그 다음에 카이스트 출신이다, 서울대학 출신이다 아무 소용없어요. 세리나 창기 직업에 관계없고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저주받는 거예요. 지옥 가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선 가만두겠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표를 안 찍지요. 표를 찍지 않습니다. 차라리 허경영이 찍지 예수님 찍지를 않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라요. 이스라엘은 사울이 원하지 않아요. 이런 자는 버림받아야 된다는 불길한 요소를 사울이 가는 진행방향을 따라 가면서 하나의 점으로 소실되면서 비록 사울은 아무 결말 없이 혼자서는 챙기는 것 없이 비참하게 죽지만 그 사울이 죽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들춰내진 인간으로서는 생각도 못한 이러한 불길한 일들이 이 세상 이스라엘에 가득 찼다는 사실을 사울을 사용해서 그걸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봄철에 농기구로 흙은 뒤집어내잖아요. 안쪽에 있는 감춰진 것을 바깥으로 뒤집어내는 거예요.

사무엘상 28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사무엘상 28장은 어떤 대목이냐 하면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사울이 만나는 장면이에요. 18절에 보면,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이게 뭐냐 하면 데스노트에요, 일본영화. 미국의 어떤 영화, <데스티니> 그 영화에 보면, 아무리 죽음을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어요. 미리 예고했는데 예고한 내가 죽을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도망치고 도피하고 요나 선지자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죽어야 될 자는 어떤 장소에도 예측하지 못한 죽음의 사태가 일어나서 죽는 그런 공포영화, 그게 바로 일본영화, 미국영화 같은 거예요.

지금 사무엘상 31장에 보면 사울이 그냥 블레셋과 전쟁하다 죽은 걸로 돼 있잖아요. 그럼 이것만 보면 그때 전쟁할 때 조심하지 경호원들 많이 붙여서 소주병 던져도 막을 수 있는 그런 용감한 사람 두고 혼자 있지 말고 죽을 것을 예비해서 아무리 해도 28장에서 이미 확정된 운명입니다. 확정된 거예요.

이게 어려운데요. 사울이 지금 살아 있는 상태 아닙니까, 28장에서. 28장은 살아 있는 상태지요. 그런데 31장에선 사울이 죽지요. 죽을 때 28장의 사울 입장에서는 아직 안 죽은 거예요. 아직 안 죽은 게 되지만 이 예언이란 게 사무엘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뭐냐? 네가 내일 죽으리라고 한다면 내일 죽는 게 아니에요. 예언이 떨어진 그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거예요, 그거는. 다만 칼이 맞는, 창에 찔려 죽는 그런 일은 아직도 있지만 이미 연극의 각본과 시나리오에는 확정된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의 성격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약 속에 있어요. 이 이야기 듣고 기쁩니까, 기분 째집니까, 아니면 갑자기 우울해졌어요? 공황장애 옵니까? 우울증과 공황장애의 단점은 뭐냐 하면 아직 확정된 게 없을 때 생기는 거예요.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어요. 얼마나 노력해야 내가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얼마나, 얼마나. 백지영의 노래 생각나는데, 얼마나 내가 노력하면 됩니까?

이게 바로 언약의 불길한 요소에요. 이게 버림받은 자의 공통점이 뭐냐? 얼마나, 얼마나. 이게 모든 버림받은 자의 몸부림치는 거예요. 인간은 행함이 없습니다. 없고 몸부림밖에 없어요. 뭐 서울 가서 케이팝, 그냥 몸부림치는 거예요. 행함이란 것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인간에게 행함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 언약 안에서 불길한 요소냐, 아니면 긍정적 요소냐 그 두 부류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몇 년을 더 살든 상관없어요. 그거는 문제 되는 건 아니고 네가 인생 살면서 주변에 언약적으로 부정적인 것, 불길한 것들이 자꾸 네 진행방향에서 숨어있던 불길한 요소가 들끓는지 봐야 돼요.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자와 한 통속이 된 겁니다. 사울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사울이, “난 버림받았어.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안 돼. 회개하고 돌아와야 돼.” 이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아직 안 죽었잖아요. 확정은 죽을 때 확정나기 때문에 본인이 죽어 있다고 한다면 이게 회개가 되는데 살아 있다고 우기니까 가능성을 계속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살아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해서 죽음을 일찍 받아들임으로써 본의 아니게 하나님께 받아들인 사람으로 확정됐기 때문에 그때부터 예수 믿는 것이 개시가 돼요. 시작이 됩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예수 믿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내가 믿는 믿음은 이거는 그냥 불길한 요소에요. “그래 내가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까 죽어서는 좋은데 가야지.” 그런 일반적인 이방적 요소, 비언약적 요소 그건 소용없습니다.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에 고생했다고 해서 안식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강원도의 청년이 부모한테 효도하고 순박하기 짝이 없어. 산골에서 농사지으니까 죄지을 기회조차 없어요. 그냥 연로하신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흙에 살고 순박하기 그지없고 이 땅에서 고생하고 죽어서 지옥 가서 또 고생하고. 고생 뒤에 낙이 온다? 낙지도 안 온다. 무슨 고생 뒤에 낙이 와요. 안 옵니다. 고생한다고 천국 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삼성그룹 이재용이 보세요. 얼마나 고생합니까. 부자 됐다고 고생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고생 없는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고생해요. 홀인원 한 번 못해서 맨날 골프장에 가서 마음 고생하고요. 백화점에서 산 원피스가 신상에 밀렸다고 마음 고생하고요. 인간이 살아 있는 한 고생은 당연히 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이방나라는 사울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언약적으로 버려야 할 자를 이스라엘 내부에서 비추어내지요. 언약의 양면성이에요. 탁구공 치는 라켓 있지요. 우리 어릴 때 탁구 칠 때는 고무판 있는 것만 치게 돼 있어요. 중국에서 고무판을 양면 다 해서 세계챔피언이 되고 말았어요.

언약은 양면에 고무판이 있어요. 한쪽만 보면 언약으로 구원받는다, 좋지요. 뒤로 해보세요. 뒤로 하게 되면 언약에 근거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야곱의 형 에서가 태어나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미움 받기로 작정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하면 이쪽 편,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이야기를 못해요.

이게 배부른 자의 여윤데,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옥의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저주의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지옥의 하나님] 제목 보고 으스스 거리고 무섭다는 말은 이건 사울 같은 존재에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어요. 공황장애 같은 거예요, 인생은.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을 미워하고 싫어할 때 그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같은 아파트 살고 가까운 이웃인데 우리 집안에 대해서 험담하고 하면 얼마나 속으로 죽으라고 저주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위암 4기다, 말기다 할 때 어떻습니까? 갑자기 미운 마음이 뭐로 바뀝니까? 측은하지요. 우리교회 집사님들 그렇게 해도 은혜 받았다는 댓글은 어제 처음 달렸어요.

어떤 분이 기도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상규 집사 기도가 뭐냐 하면 처절하잖아요. 전도서 몇 장인지 모르겠다. 전도서에 나오는, 한을 풀었어, 한을 풀었어. 제가 지금 의도적으로 변론하는 게 아니고 전도서 12장에 나오거든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절에,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관절이 안 좋다 이 말이거든요)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이가 안 좋고)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시력도 나가는 거예요) 길거리 문들이 닫혀 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메뚜기도 짐이 될 정도로 정욕이 확 다운되고.

그렇게 밉다가도 환자라 하면 측은해 하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는 모든 불신자를 불쌍히 여겨야 돼요. 왜? 환자니까. 앞에 성이 있잖아요. 김 머시기 나오면 김 환자, 박 환자, 최 환자,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들이에요. 환자들을 갈구어서 뭐합니까? 위암 4기인데요. 죽는 줄도 모르고 그냥 확정된 게 없으니까 자꾸 살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첫 번째 제목을 미리 해놔야 되겠다. 확정된 것 없다.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안정한 티를 안 내기 위해서 오버하는 거예요. 담배 피우고 술 먹고. 3대 허 씨, 허세, 허망, 허영. 남 따라 하면 대우해 줄줄 알고. 주일학교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돈도 없는 것이 염치없이 사람 대우받으려고 한다고. 돈 없으면 인간 아니에요. 그것 뭐 당연한 건데 이게 허영심 때문에, “돈 없다고 무시하나?” “그래.”

길거리에 모조리 환자들이에요. 환자인 이유가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운명은 내가 만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최초의 불경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 혼자 간다? 혼자 가다가 지옥에 빠지지요. 언약에 의하면 이미 확정된 거예요. 확정되지 않으면 어떤 사단이 벌어지는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몰아세웁니다. 상황 자체가. 몰아세우면서 주께서 물으시는 것은 이거에요. “너, 나한테 받은 것 없지? 솔직하게 나와. 네가 네 노력한 것밖에 없지? 나한테 받았다는 성령이고 그런 것 없잖아. 왜 자꾸 있는 척해? 받은 것 없지. 그런데 왜 받은 척해? 그러니까 내가 계속 널 몰아세울 거야. 기어이 나를 밀쳐낼 때까지.” 고마하이소. 많이 먹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를 살해할 때까지, 주님을 살해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걸 누가 했는가? 사울이 누구 보고 했습니까? 다윗 보고 한 거예요. 다윗은 생뚱맞은 거예요. 자기가 골리앗과 한 판 붙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있게 하셔서 그냥 돌 던지니까 맞아 죽은 거예요. 그런데 사울은 네가 뭔데 내 자리를 탐하느냐? 그런 게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 없는 인간들이 꼭 하나님이 하실 일을 시비 걺으로써 버림받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거예요. 주님이 하셨는데 니가 뭘 해서 성령 받았나, 이런 식으로 자꾸 묻는 거예요. 지가 평소에 하던 행세가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 사울의 잘못이 뭐냐? 왜 이렇게 저주받는가? 딱 하나에요. 점유. 점유라는 것은 어떤 공간을 차지하는 것. 무단 점유한 거예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내가 있는 자리가 내가 차지할 자리라고 자꾸 오해를 하고 있어요. 주님의 자리거든요. 주님의 소유권으로 등기돼 있는 자리라고요. 내 자리가 아니라고요.

이게 레위기에 나오는데 25장 55절 읽어볼까요?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면 이 땅 주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냥 하나님이라 해도 되고 이스라엘에게만 찾아온 하나님, 다른 민족에선 모르는 하나님,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나타난 하나님,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 땅인데 너희가 점유하도록 허락하마. 그중에 한 사람이 사울이었어요. 그러면 땅을 점유했을 때 땅의 원래 주인은 하나님이잖아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cctv나 블랙박스나 없었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증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 둘이 있던 땅이 만약에 인격자라면 뺨이 축축해. 피가 떨어졌어. 의인의 피가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제사가 받아졌다는 것은 관계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련성 있는 인물의 억울한 피가 땅에 떨어졌으니까 이거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땅의 취지가 살아요. 그냥 억울함이 묻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땅은 일관된 신고정신에 의해서 땅 주인 되신 하나님께 신고했지요.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의 피가 땅에 떨어졌으니까 주님은 복수하셔야 되고 범인 체포해야 됩니다. 이게 땅의 생리에요. 우릴 감시하는 사람이 한둘이 뭡니까, 온 땅이 cctv가 감시가 다 되는 거예요. 복수하마.

복수의 징벌이 뭐냐? 가인을 죽이는 게 아니에요. 키워 죽여요. 왜냐하면 이게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건데 사울은 점이 돼버리면 사울은 더 이상 없어요. 하지만 사울이 점이 된 이 점을 확대시켜버립니다. 가인을 죽여 버리면 안 되잖아요. 가인을 확대시켜버립니다. 가인의 세상이 되게 해요. 가인을 확대시킬 때 어디까지 확대시키는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예수님이 통치할 때까지 이 세상은 가인의 세계로 만들어버려야 돼요. 그래야 뱀의 자손에 대한 정당한 보복의 시행자가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점유를 할 때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사울이 점유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 잘못됐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했는가? 다윗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다윗을 통해봤자 사울은 계속 기세등등한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전쟁을 통해서. 사울 뒤에 뭐가 붙습니까? ‘왕’이 붙지요. 왕의 기능이 뭐냐 하면 전쟁해야 될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이 누구와 붙었느냐 하면 신접한 여인과 붙었어요.

자꾸 지금 블레셋 군사한테 최후의 일격당해 죽었다는 그 이야기를 계속 안 한 이유가 시작을 같이 동맹을 맺지 말아야 될 적과 동맹을 맺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결국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뭐가 돼요? 적이 내부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적 아닙니다, 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나 들으세요. 우리 자신 내부에서 하나님의 적이 여기서 양생된다, 배양이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메시아가 아니니까요. 로마서 5장 10절에서 우린 하나님의 원수 된 자거든요. 그냥 원숩니다, 하지 말고 이유를 알아야지요.

잘못된 땅의 점유, 이 땅을 사울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자기 땅, 자기 세상, 자기 나라로 여겼던 겁니다.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되는데 사울은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를 내려서 전쟁에 나서고 하는 겁니다. 마치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똑같아요. 자기 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다윗은 방해자니까. 그게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갖고 있던 자연스러운 아담의 생리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나의 전쟁을 하고 있어요. 내 자존심과 나의 의의 전쟁이죠. 이방나라는 다 그래요.

그런데 사울이 죽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그런 겁니다. 좀 더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구체화되겠습니다. 사울이 누굴 찾아왔느냐 하면 신접한 여인을 찾아왔습니다. 신접한 여인은 원수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죽였어야 돼요. 그런데 사울도 지식적으론 알지요. 신접한 여인은 율법으로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데 처음에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내쫓을 때는 어떤 마음으로 내쫓느냐 하면 내 나라 이스라엘을 내가 왕이니까 내가 이스라엘 땅은 내 이름으로 점유했으니까 내 나라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율법대로 시행하게 되면 모든 사랑과 관심을 내 것 내가 지키는 데다 관심 두고 성경말씀을 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냥 내 것 유지하기 위해서.

그럼 누구의 전쟁입니까? 주님의 전쟁 아니고 당사자 나를 위한 전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데스노트, 운명의 노트에 의하면 반드시 사울은 주님께서 몰아세우면 자기 본성,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말로는 번지르르하게 주여, 주여, 아버지, 아버지 하지만 주님께선 기어이 데스노트, 잘려야 될 노트에 의해서 그들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돼 있어요.

장난삼아 자식 결혼하니까 교회 권사라는 걸 숨기고 물어 보살한테 가서 장난이니까 이번 혼사가 잘 살겠습니까, 궁합 한 번 볼까요? 기어이 사단 내게 만들어요. 왜 봅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보는 게 아니거든요. 나의 영광을 위해서 보는 거예요. 교회가 그래서 운영이 돼요.

전에 설교했지요. 말씀 전한 은퇴하고 난 뒤에 다시 무슨 회로 모인다? 기도회로 모이는 거예요. 기도회가 뭡니까? 자기 요구사항 다 들어달라고 모이는 게 기도회잖아요. 기도회에 말씀도 복음도 필요 없고 성경말씀 보는 건 형식적이고 그건 큐티 용이고 실제로는 뭐냐? 내가 기도해서 기어이 내 소원을 이루고야 말리라, 그거잖아요.

그 보살들이 하나님께서 몰아세우니까 안 돼. 그거는 우상숭배야. 뭐 어떻고, 우리 조상 일제시대 때 얼마나 우상숭배자들이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뭐냐? 우상을 섬겨서 망했어. 백날 이야기해도 막상 기어이 딱 한 번만 보겠습니다. 그것도 장난이지 믿으려 하는 게 아니고 우환을 줄이는 게 안 낫겠습니까. 이왕이면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좋지요. 이왕이면 궁합도 좋은 게 좋지 뭐. 이런 식으로 그냥 만나듯이 사울과 신접한 여인은 만난 거예요.

이 이야기 듣고 이제는 나는 점 안 치고 궁합 안 봤기 때문에 천당 간다고 또 이런 이상한…… 이것 안 보는 이유가 뭐예요? 안 보는 이유가 자기를 위한 전쟁이죠. 인간은 점을 안 봐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누가 나한테 당신은 잘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기를 사람들은 원하고 있어요. 참 잘합니다, 욕인지 칭찬인지. 얘 공부 잘하네요, 신수가 훤합니다. 성경공부 몇 번 빠져도 얼굴만 좋고. 긍정적으로 좋은 소리 들으면 막 화내고 그런 사람 없어요. 네가 정녕 맥이는구나, 이런 사람 없어요. 기분 다 좋아합니다.

이게 우리 안에 사울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 듣고 다윗 쪽으로 갈 생각 마세요. 끝까지 가야 쟈크에서 분리되는 거예요. 성경은 그것 때문에 있는 겁니다. 사울 개인, 사적인 이야기 아니에요. 우리 이야기에요.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기능이에요. 인간이 감추고 숨겨놓은 것을 끝까지 주께서 먼저 시범조교로 들춰내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울 죽은 것, 그것 우리 모습이에요.

다시 정리하자면 주께서 인간을 태어나서 살게 하실 때 주변에 언약적으로 불길한 요소, 하나님의 원수 된 요소를 내 인생 살아가면서 주변에 들춰내서 계속 사태가 일어나게 만드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싫어하는 바가 주변에 계속 일어나게 하는 거예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나름대로 이번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고 한 거예요. 성공적으로 이끌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구원받겠지요. 구원받으면 그 공로가 누구한테 가겠습니까? 푸틴한테 가지요. 사울 왕 본인이 사령관이니까 가겠지요. 그러면 자기는 이스라엘에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날 목회자, 당회장과 똑같은 심정 아닙니까.

결국 이 사람에게 사울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오늘날 목사에게 뭐가 있냐? 교회가 있음 자체가 시험거리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뭔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 이게 무단점유에요. 제목을 무단점유로 바꿔야 되겠다. 이게 무단점유에요. 우리 것이 아니에요. 내가 지킬 게 없어요. 우리는 점으로 소실되면 되지 이거는 내 가정이고 내가 텃밭 가꿨다는 내 것, 이것은 동네방네 신접한 여인 다 달려드는 거예요. 도와드릴까요, 잘 되게 해드릴까요, 얘들 성공시키게 해드릴까요, 이런 것.

내 것 없는데 지킬 게 없어야 돼요. 왜? 우리의 운명은 이미 확정 났습니다. 확정 났고 나는 사울 같은 하나님의 원수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원받은 라켓에서 확정됐기 때문에 다른 쪽, 저주받은 쪽을 충분히 보는 거예요. 옛날의 내가 바로 그 육신대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은, 내가 죽은 가운데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나의 죽음 속에서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쉽게 말하면 아직 안 죽었다는 건 성립되지 않는단 말이죠. 이미 죽은 자만이 산 쪽으로 넘어와서 이미 죽었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 말 그대로죠. 갈라디아서 사도의 편지에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진정 사는 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이 언약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소실점 되도록 하나의 화장터의 점으로 되도록 그런 조치를 주께서 부지런히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행할 수 있는 행함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매일같이 주님이 주시는 선물만 받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코로나 때문에 벌벌 떨지 마시고요. 여러분 둘 중에 하나 고르세요. 여러분, 코로나 백신 맞을래요, 코로나 걸릴래요? 이게 코로나 걸리면 돼요. 미리 죽으면 된다니까. 미리 죽으면 살려고 애쓸 필요 없고 사는 게 전부 다 주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지금 백신 맞고 벌벌 떨고 있어요. 왜 떠느냐 하면 백신 맞고 떠는 이유는 코로나 걸렸을 때 내 몰골을 미리 상상하거든요.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뭘 안 돼, 누구 마음대로 안 돼. 아직 미래의 여분이 남아있다고 보는 거예요. 확정된 게 아니고. 코로나 걸리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요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은 언약만 살아 있고 주님만 살아 있는 거예요.

죽어서 살아가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스위트한 설탕 토마토 맛볼 때 이것 먹고 살아야지, 이게 아니라 죽었는데 또 죽으라는 선물이구나. 맛있는 토마토를 한 번 쉬는 시간에 잡숴보세요. 얼마나 맛있는지. 안 먹어본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그 유명한 설탕 토마토.

사울이 죽은 이유는 점유를 잘못한 거예요. 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이라고 여긴 거예요. 자기는 점에 불과한데. 점은 면적이 있으면 안 돼요. 내 자리가 없어야 돼요. 그냥 인간에서 점으로 하면서 주께서 언약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언약 안에 이런 불길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사울을 선택해서 데려가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상 12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울을 사람들 가운데 제비뽑는 장면이 나와요. 나중에 찾아보시고, 사울을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임금으로 주었다는, 12장 13절,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왕으로 세울 때 주님께서 제비뽑아서 세워요. 그전에 사울을 다 조치를 했지요. 여기 사무엘상 10장 20절부터 21절까지 보면, 사울이 모든 지파 가운데 베냐민 지파 뽑았고, 뽑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지요. 27절에, “어떤 비류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이렇게 나왔지요.

그러니까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은 빠지고 인간과 인간들이 협의해서 의논해서 한다고요. 그런데 그 의논해서 왕을 달라고 했을 때 그들에 맞춰서 왕을 뽑아서 준 거예요. 선택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왕을 구하는 너희를 버리기 위해서 똑같이 닮은 왕을 뽑아서 그들 속에 같이 섞어 넣은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상 10장 21절에 보면 처음에 베냐민 지파 뽑혔습니다. 그중에 마드리 가족이 뽑혔고 그중에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고, 얼마나 사울이 겸손한지 숨어버렸지요. 나중에 제가 본 12장 13절에 보면 드디어 공개적으로 나타냅니다. 너희의 왕을 보라. 그러니까 이거는 사울을 제비뽑은 거예요. 제비뽑아서 언약의 양면성, 다시 말해서 언약에는 뭐가 있다? 버려야 될 자는 버리기로 확정했다는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시 사무엘상 31장으로 와봅시다. 사울이 31장 3절에 보면 활에 맞고 죽었지요. 죽고 난 뒤에 4절에 보면,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모욕할까 해서 옆에 칼 든 사람에게 자기를 찌르라고 하니까 찌를 수가 없지요. 무서워요. 자기 칼에 스스로 죽었고 그 병기 든 사람도 같이 죽었고 그 날에 누구한테 죽느냐?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아들들 다 죽였잖아요.

그러면 묻습니다. 사울이 자살한 거예요, 아니면 블레셋 사람에게 진 거예요? 어느 게 정답입니까? 블레셋 사람한테 진 거예요. 블레셋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에요. 버림받은 민족에 누가 졌는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 왕이 진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이 패배한 겁니다. 이 패배한 것에 대해서 사울 쪽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슬퍼하겠지요. 그런데 이게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확정된 코스라는 사실, 어느 누구도 취소할 수 없어요.

제가 아까 했지요. 불신자에 대해서 환자니까 그냥 불쌍히 여길 뿐이에요. 그들은 보다 나은 자기 미래와 자기를 행복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밤잠도 안 자고 노력합니다. 지금 내가 아닌 더 나아진 나를 위해서 더 확실한 것, 더 좋아 보이는 길, 그걸 본인이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 노력 자체가 사울의 재판이에요. 사울 가는 그 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유가 뭐냐? 살려고 나름대로의 행위를 했잖아요. 뭘 했잖아요. 그 한 것은 주님의 확정에 아무 보탬이 안 돼요. 다만 그들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얼마나 세상이 하나님을 싫어하는지를 바깥에 둔덕처럼 퍼내는 것만 보이는 거예요.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바리새인처럼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 세계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상 이야기에요.

정리하겠습니다. 사울은 결국 누굴 만납니까? 이미 버림받기로 확정된 신접한 여인, 무당과 만나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 무당을 통해서 나오는 무당 세계를 위에서 강압적으로 사무엘이 영발 세계, 죽은 자의 세계까지 사무엘의 기능은 그대로 거기다 꽂힙니다. 아무리 우리끼리, 우리끼리 해도 주님의 언약적 위력은 소위 지옥까지 파급이 되어 지옥 가는 인간의 운명도 너희 쪽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사무엘을 통해서 확정지었습니다. 오늘 내일 너희들 사울과 아들들은 죽을 것이다.

그럼 착한 요나단은 왜 죽는가? 마귀 들린 게 아니고 왜 죽는가? 그거는 아버지 따라 죽어요. 육의 아버지가 죽기 때문에 한 통속으로 죽는데 하나님께서는 요나단 죽은 대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양아들로 삼아버리죠. 그러니까 노선에 접선이 되는 거예요. 접붙임이 되는 거예요. 그거는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 때문에 일단 죽자. 죽고 네 자식 살려낼 때 너도 사는 노선으로 끼어들면 되잖아.

우리는 어떤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사는 쪽으로 접붙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놓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그 이야기를 라켓에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나의 진면목을 마음 놓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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