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오답노트

아빠와 함께 2022. 4. 27. 09:51

대전-신명기 1강 (오답노트)20220425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부터 신명기 하겠습니다. 새겨들으라는 말씀이죠. 실패한 자리에서 율법 다시 보자. 공부 잘한 사람 특징은 바로 오류노트를 준비한다는 거예요. 틀린 것이 어디서 틀렸을까, 자체점검에 나서는 것, 이것은 혹독하게 자기를 나무라는 방법이죠. 타인이 앞에 내가 허점을 안 보이기 위해서 건성건성 자기를 그냥 변신하는 때우는 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성적표 부모가 어떻게 걱정하는가, 그걸 그때 그냥 쉽게 지나가려고 애쓰는 게 아니고 내가 성적에 대해서 어느 수준인지 혹독하게 점검하겠다는 것이 오답노트, 잘못된 것 점검하듯이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출애굽한지 사십년 후에 그걸 끄집어내놓고 반성하는 그것이 신명기 전체지만 특히 신명기 1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1장 전체 다가 그 이야기입니다. 이걸 설명하면 또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되겠어요. [왜 우리는 굳이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려 하는가?]

이 문장을 다시 해보세요. 왜 우리 자신은 남들이 나를 도와줘야 마땅하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그런 권한이나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근거가 우리한테 있어요? 없지요. 전혀 없습니다. 보통 전도할 때 우리가 복음을 전하잖아요. 그런데 상대가 꼭 그 말을 믿어줄 그러한 의무가 있습니까? 없지요.

이건 뭐 코로나 오미크론도 아니고 내가 걸리면 온 식구 다 걸려야 돼요? 아니 내가 교회 다닌다고 남편, 자식 교회 다녀야 됩니까? 그런 거예요? 그게 얼마나 이거는 자기 권한을 넘어선 무모한 욕심에 해당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희생적이고 열심이니까 남들이 나의 희생과 열심, 애씀을 알아줘야 된다는 시건방짐, 이게 얼마나 마귀적이고 악마적입니까. 자기 괴롭다고 남까지 굳이 괴로워야 돼요?

이러한 교만에 대해서 이게 오답이거든요. 오답노트 봤지요. 오답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내가 괴로우니까 남들이 나를 위로해줘야 돼. 나를 보호해줘야 된다 이 말이죠. “여러분들은 나를 보호하고 나를 위로해주어야 마땅합니다.” 무슨 이런 횡포가 다 있어요. 정답은 뭡니까?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내가 널 도와줘야 돼요?  분명히 오답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선악지식을 알고 머리가 돌았어요, 돌았어. 정신병자입니다. 전도지 나눠주고 복음 전한다고 그 사람이 꼭 믿어야 됩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오히려 반대로 나가야 돼요. 예, 그 말씀 전도지대로 믿습니다. 그 ‘믿습니다’를 의심해야 돼요. 이걸 왜 믿어, 왜 믿는 거야? 교회 교인들이 오게 되면 오는 사람을 의심해야 된다고요. 돈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떡을 주는 것도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도 아니고. 점심 먹으면 배부르긴 하다마는. 그것도 아니고 이 바쁜 시간에 대구 우리교회까지 교인들 오게 되면 대구외곽순환도로 새로 해서 통행료 천사백 원 내요. 천사백 원 내고 기름 넣고 먼 데까지. 근처에 교인들은 거의 없고 전부 다 온다 이 말이죠.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와 똑같은 거예요.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왔더냐? 조금이라도 목사를 도와준다든지 목사의 생계를 도와준다는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오답입니다. 인간은, 지금 신명기하면서 모세가 대충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다 거치고 난 뒤에 모세가 곧 죽어가면서 유언 삼아 신명기를 했거든요. 나중에 죽으면서 축복이란 형식으로 유언을 합니다.

인간들이 사십 년 광야 오기 전까지는 그들의 내부에 있는 비 진리성, 하나님 대적성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호렙 산, 유명한 시내 산 거쳐 광야에서 무슨 사건들이 많아요. 민수기에 보면 브리바 사건, 가데스바네아 사건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어요. 아말렉과의 전쟁도 있었고. 원망했다가 모세가 놋 뱀을 든 사건도 있지요. 열 번이나 주님께 대항했다고 하니까.

그런 사건을 통해서 왜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율법과 규례에 대해서 왜 꼭 정반대가 되는 어떻게 그렇게 대적이 되는 그 마음씨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거기에 대해서 신명기에 나옵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니까 내가 말씀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키면 됩니까, 라는 그 질문이 아니고 도대체 내가 망해야 되는데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그 저주의 요소가 내 안에 어떤 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장착되어 있습니까? 그것에 관한 내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명기에서 구원이란 게 누구 일이냐 하면 이게 결코 나의 일은 아니고 나의 일은 탈락할 경우에만 오롯이 주의 일이 됩니다. 구원이 주님 자신의 일이 돼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이라니까 좋은 걸로 여겨서 여기에 자꾸 끼어드는 게 문제거든요. 주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발로 차는 거죠.

이미 젖을 떼서 우유를 먹이고 밥을 먹여서 점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커야 되는데 얘가 자면서 젖 달라고 할 때는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옥도정기 바르고 억지로 떼어내려 하잖아요. 율법이 옥도정기와 같아서 너무 써서 떼어내야 하는 거예요. 너는 복은 어림도 없다. 원래 네 존재자체가 복 받을 입장이 안 돼. 저주가 가장 합당해, 라고 떼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주었다. 그러면 오답이니까 율법에 실패하죠. 그럼 뭐 받습니까? 저주받지요. 저주받으면 그걸 역사적으로 실제로 등장하는 게 뭡니까? 이 땅에서의 죽음이죠. 결국 신명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죽음 이야기에요. 죽음 이야기인데 다른 민족이 죽는 것과 달라요. 다른 민족은 물음표, 왜 태어났는지 모르고, 살면서 왜 사는지 모르고, 그다음에 물음표, 왜 죽는지 모르지요.

이걸 제가 어제 오후설교 때 무료함, 지루함. 되게 바쁜데 똑같은 일만 하는 거예요. 라푼젤 비슷하게. 무료하기 짝이 없는 그냥 물음표에요. 피곤한데 저녁에 회식한다고 술 한 잔 먹고 집에 와서 해장국 끊이라고 땡깡 부리고 아침에 또 허겁지겁 술 깼는지 덜 깼는지 모르고 출근하고. 이게 무료함. 술 먹고 회식하면서 뒷골목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왜 피우는데? 몰라요. 그냥 물음표에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에는 무엇이 개입되었습니까? 우리도 마땅히 물음표로 일관돼야 될 우리 인생에 무엇이 개입되었어요? 율법이 개입되어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결국 약속의 땅에 못 가고, 모세 본인도 못 들어갔어요. 못 들어가고 죽게 되는 것.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가는 것은 모세 율법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언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는 가나안 땅에 안 가고 천국 갔지요.

여러분 어느 것 할래요? 가나안 땅에는 못 갔는데 천국 갔어요. 모세가 천국 갔다는 게 어디 나오지요? 변화산에. 기본실력이 창창해 톡하면 톡. 교만, 교만 이제 교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등장합니다. 모세가 합격을 했는데 합격의 근거가 있어요? 예수님의 별세,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을, 성경이 이렇게 두껍잖아요. 짜봅시다. 참기름 짜는데 있지요. 방앗간에 짜보면 뭐 나오느냐? 피 나옵니다. 피로 쓴 책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증거가 피로 쓴 책이에요. 피가 피 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부활이 필요했던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부활이 피를 무효화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피를 앞장세우고 주님의 살아 있음을 피에다 양보하고 자기는 피 뒤에 숨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믿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와 관련성이 있어야 되지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존재가 살아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죄 사함을 부활에 있는 게 아니고 부활되신 주님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나 부활이 아니라 성령께서 끝까지 하는 것은 나 성령이고 살아 있다가 아니라 성령이고 주님의 부활도 다 누구한테 무엇에 밀어둡니까? 주님의 성과, 피 흘림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무엇이 없다? 생명이 없다. 생명은 반드시 이 땅에서 특정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개인적인 피 흘림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생명이 거기서 나오거든요. 생명이 피 사건에서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사건이기 때문에 시공간에선 존재할 수 없고요.

사건이니까 사건은 터져버리면 날아가 버리니까 사건을 통해서 피만이 정답이란 식으로 우리에게 느끼게 하고 다시 소유대상이 안 되고 그냥 날아가 버려요. 우리가 소유권 가지면 안 되잖아요. 소유권이 주님께 있어야지 우리가 소유권 가지면 안 되기 때문에 피를 이야기하고 그냥 또 다음 사건을 기대해야지요. 피를 한 바가지 갖는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알게 된 거죠. 아아, 내 피가 아니고 주님의 피구나.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십자가지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지요. 십자가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면서 십자가를 이야기해요. 그러면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나에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희생에만 있지 나의 희생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왜? 죄인이 죽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저주하고 죽게 되면, 그럼 율법에서 두 가지 있었잖아요. 하나는 저주와 죽음이 있고, 또 하나 뭐가 있습니까? 복과 영생이죠. 이쪽 노선은 율법이 있는 이상 이것도 같이 나와야 돼요. 저주 몫은 우리 인간, 인간 중에서 누구 몫입니까? 하나님의 선택된 자의 죽음의 몫이고, 복과 영생은 누구 몫이고? 누구 몫입니까?

이게 신명기에서 그게 나오지요. 너희와 함께 동행하는 분의 몫이다. 그 동행하는 분이 주의 이름이에요. 하나님 이름. 신명기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약속의 땅은 너희들이 갈 장소가 아니에요. 모세도 중간에 빠져버립니다.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누가 들어가느냐? 주의 이름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가는 곳에 주의 이름만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십 년 동안 뺑뺑이 돌리면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물론 두 사람 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 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갔다는 그 점을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 후에 태어난 자들이 들어갔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자손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그 토대, 오답노트의 토대 위에서 새로 생겨난 자녀들이 어디에 합류하느냐? 주의 이름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뭐냐 하면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인간적인 이성과 판단에 의하면 그 땅은 들어갈 수 있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해버렸어요. 인정하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땅을 간다는 약속 있잖아요. 그러면 약속은 들어간다. 인간의 판단은 못 들어간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둘 중에 어느 쪽을 버리느냐 하면 약속대로 들어간다는 것에 자기 자신의 판단을 오답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틀린 답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동영상 두 번째 강의가 뭐냐? 인생은 뭐다? 인생은 오류다. 인생이란 오류, 내가 뭘 해도 오류에요. 어떤 질문을 해도 질문 자체가 오류에요. 아예 질문을 안 하는 게 낫지 어떤 질문을 해도 그 질문 자체가 오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복은 파괴하면서 나타난다.] 파괴가 안 되게 되면 복을 받을 자가 나가 돼버려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쉬워요. 야구에 보면 공 던지는 사람을 투수라고 합니다. 여성분들 위해서 설명해드리는 겁니다. 공 받는 것을 포수라고 이야기해요. 그 정도는.... 진짜 여자를 무시하나. 그럼 이건 압니까? 투수가 공 던지고 공보다 빠른 속도로 포수 자리 앉아서 자기가 던진 공을 자기가 받는 경우, 그런 경우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 없던 세계가 천국이에요. 그 있을 수 없는 세계, 그게 천국이에요.

영생 없는 곳에 영생의 공을 던지고 영생을 십자가로 만들어놓고 그 영생을 누가 받는가? 예수님 자신이 부활로 받아버려요. 뭐가 시작해서 뭐가 왔는가? 받는 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생산되었는가? 부활이냐, 십자가냐? 십자가지요. 십자가 피라니까. 그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려고 예수님 이 땅에 오신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남겨서 십자가가 뭐냐 하면 바로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율법의 완성이고 그게 완성되면 복이 되고 거기서 없는 영생이 새로 생긴 거예요.

그러면 던진 투수가 공이 너무 빠르게 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주위의 공기압의 효과가 커지겠지요. 그 효과에 걸려든 사람이 성도에요. 너무 빠르다 보니 바람이 휙 지나가 버렸어요. 흔들, 흔들 정도가 아니고 소유 당했을 때 그게 성도에요. 이게 무슨 일이람?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지? 영어로 What happen? 난리도 무슨 이런 난리가 다 있느냐 말이죠.

우리 어린 손녀가 이걸 두 자로 아주 표현을 잘해요. 우째? 표준말로 어떻게? 뒤에 (이런 일이) 생략된 우째? 인형 갖고 놀다 인형 무너지니까 우째, 하고 감탄부터 먼저 해요. 어린애는 인형 갖고 놀다가 무너지면 우째, 라고 했지요. 다시 쌓으면 된다고 장난삼아 우째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무너져놓고 우째, 하는 그 장난은 왜 안 칩니까? 그런 여유는 왜 없어요? 이게 문제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한 복은 오지 않습니다. 복은 나를 파괴대상으로 간주하시고 파괴를 하고 파괴한 그 쓰레기 현장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생명이 나오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왜 굳이 이렇게 되는가? 예수님 본인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설교 잘했지요, 병 고쳤지요, 기적 행했지요. 거기서 영생 나왔습니까? 요만큼도 안 나와요. 그리고 예수님이 잘 있거라, 하고 나는 가르칠 것 다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나 맹자나 부처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 하고 하늘로 떠나버리면 영생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나는 신의 아들이라 외치면 영생 있습니까? 없어요.

죽는 신이에요. 신이 죽어요. 신이 죽는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신은 살아 있다고 믿는,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그 논리를 모든 인간은 다 갖고 있어요. 내가 있는 이상은 신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을 완전히 부셔버린 그 구조를 깨버린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가장 방해하는 게 뭐냐 하면 놀랍게도 이게 신학이에요. 신학의 우두머리 최고봉은 바리새인 신학이에요. 바리새인 신학은 하나님 주신 은혜를 어떤 식으로 인간이 관리하느냐? 관리에 대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유지하고 지켜내느냐? 거기에 대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신이 주신 어떤 이성과 판단력과 그 착함과 신선미, 아름다움과 선함을 동원해서 은혜를 은혜답게 선물을 선물답게 지켜보자.

그 신학이 바리새인 신학이고 그들 손에 누가 죽었습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가짜 하나님을 들춰내기 위해서 누가 죽느냐? 진짜 하나님이 가짜 신을 믿는 인간들 신도들 손에 죽었어요. 이것은 곧 뭘 뜻하느냐? 인간 신학의 한계, 인간의 모든 지혜와 인간의 기술이에요. 기술 자체가 지혜에서 나왔고 과학기술도 지혜에서 나와요.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학문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가 영생의 세계에요.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만 빼놓고 인간들을 내보낸 그 취지에 부합되지요. 딱 맞추지요. 생명나무 없는 곳에서 잘 먹고 노력하고 잘 살아라 인간아, 하고 보내버리지요. 그 자체가 저주에요. 생명나무 없는 곳에. 인간의 지혜는 논리와 논리구조로 사다리 쌓듯이 올라가고 있어요.

철저하고 철저하게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그른 것은 삭제하고 옳은 것만 남겨서 남긴 것을 발전시켜서 더욱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해서 결국 진리가 신의 진리와 합치하는 데 노력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학문은 그래요. 그걸 수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리’라고 합니다. 공리, 이건 어린애든 누구든 의심할 게 없는 진리 그 자체에요.

그 공리를 세워놓고 공리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1+1=2’다. 러셀이란 사람은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 논문을 냈어요. 아무도 못 알아듣는 어려운 수학논문을 냈어요. 1+1=2 됨을 이래서 증명한다. 이게 수리철학이에요. 과학도 철학이거든요. 신학도 철학이고. 인간 지혜의 집대성이 철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철학이라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인간의 과학의 집대성은 뭐냐 하면 살아 있는 것들의 영광을 위하여, 이런 목적이 있습니다. 자, 살아 있는 것들 중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바로 모든 인간들. 모든 인간들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은 노력하고 있던 거예요.

이 본색을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십 년 동안 누구와 동행시켰느냐 하면 주의 이름과 함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그전에 예비단계로 함께 이 땅을 같이 살아보는 거예요. 살아보면서 사십 년 동안 모조리 다 탈락시킨 겁니다. 아무도 주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 자신을 포기했으니까요. 살아 있는 것을 포기할 위인은 인간세계에서는 그런 인간은 없다 이 말이에요.

없으니까 주님의 할 일은 정해졌지요.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쓴 잔을 마심으로써 멀쩡한 자기를 어디에 던집니까? 하나님의 저주에, 이런 게 어려운데, 아까 율법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저주 나오지요. 묻습니다. 저주는 어디서 나옵니까? 방금 이야기했는데, 율법이 있어야 저주가 나와요. 율법을 경유하지 않고는 저주도 없고 뭐도 없습니까? 복도 없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율법이 주어져서 모든 인간을 심판 안에 두는 작업이 먼저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뭐 사랑의 하나님이라고요? 누가 그런 거짓말해요? 사랑의 하나님은 그냥 봐줘야지요. 무슨 짓을 하든. 율법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주님의 사랑이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랑이라 이 말이에요. 개념 자체가 달라요.

율법 집어넣고 사랑 이야기하자. 너 저주받아 마땅하잖아. 구원 받는다고? 어디서 그런 자기 분수도 모르는 게 구원이 어디 있어요. 구원 같으면 쫓아냈겠습니까? 구원이란 건 인간에게는 없어요. 구원은 오직 누구냐? 구원은 예수님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 없어요. 구원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언약 완성 외에는 다른 구원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된 상태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주께서 풍선에다 바람을 불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죽었던 예수님 안에서 드디어 부활의 세계를 포함해서 그게 무슨 안이다? 예수 안이 되었지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이 되어서 예수님은 합당하다고 선언한 상태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예수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지요.

본인들이 그런 세계를 싫어서 그 세계의 주인공을 없애버린 상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수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악착같이 따라가려고 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할 때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오지 마라 했어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가는 세계는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고 자기 세계에요. 자기 세계가 예수님 세계에 섞이면 안 되잖아요. 베드로는 본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 예수님의 세계에 참여하려고 한 겁니다.

죽기까지 따라간다는 말은 죽겠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비장한 각오, 대단한 희생적인 생각, 각오와 생각을 바람 넣어버리면 뭐가 돼요? 베드로 되지요. 내 결심과 내 각오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바람 넣으면 내가 이만큼 고생하고 노력했다는 것이 부풀어지겠지요. 마귀는 바람쟁이에요. 자꾸 우리에게 바람을 일으켜요.

바람을 집어넣어서 포기하는 척만 하고 포긴 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끝까지 독려하지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면 된다는 식으로 하게 하는 거예요. 마지막에 돌아서면 된다는. 실제로 얼마 전 사건에서 그 일이 일어났지요. 계곡에 깊은 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여자 서있고 앉아있는 자가 남편이에요.

남편의 목적은, 내가 너(아내)를 보호하는 성의를 가졌다는 것을 내가 이러한 인간이라는 것은 아내 네가 좀 알아줬으면 인정했으면 좋겠다. 내가 누구냐를 네가 있음에 내가 너로부터 인정받을 때 보람을 느끼는 자가 죽은 남편이에요. 그러나 이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의 존재는 충분히 인정했어요. 뭐로? 8억 원의 보험금으로. 됐어. 너의 가치는 네가 죽는 그 자체가 나에게 8억 원과 맞바꿀 가치 있음을 나는 인정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돈 가치 외에는 어떤 식으로도 나는 너를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그런 뜻이지요. 가평계곡 사건.

이러한 여성의 이야기에 신명기와 관련되어서 창세기 35장을 보겠습니다. 16절부터 보게 되면,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여기서 라헬이 죽어요. 제목을 라헬의 팔자라고 생각해보세요. 운명. 라헬은 알려진 기간, 21년+α 그 기간 동안 보게 되면 라헬의 팔자는 오직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겠다는 일념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언니 레아도 마찬가지고. 결혼이란 그냥 밥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취직하면 되지요. 물론 결혼이 취직의 일종이 돼버렸어요. 밥 먹고 살기에 직장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누가 내 대신 돈 벌어주고 나는 쇼핑백 균형 맞춰서 롯데백화점 왔다 갔다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것, 그런 희망도 못 갖습니까.

이건 뭐냐 하면 누가 나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보호해주고 나를 지켜주고 그리고 수시로 나를 위로해주되 그런 마음을 참 올바른 마음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 나 대신 내가 되는 어떤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결혼이라 하는 것은 어느 질문에 그런 답변했습니다만 자기 생존본능입니다. 나만 살면 돼요.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보호자로서 보디가드로서 어떤 남자라도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는 생존하는 거예요.

그러면 돈 많은 남자와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게 문제 돼요. 돈 많고 건강하고 이런 남자와 만나버리면 그 남자도 나와 동일하게 자기 것만 챙길 것이기 때문에 그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집에 개 한 마리 내가 그 남자의 애완견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돈 번다고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냐? 너는 삼시세끼 하루 세끼 밥이나 하고 꼭 국은 있어야 돼요. 밑반찬 내놓으면 안 됩니다. 국도 번갈아 가면서 그것도 지루 않게 해주고.

그러니까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그리고 늘 하는 것은 내가 남편 아니었으면 진즉에 굶어죽었다는 마음 가지고 남편의 공로를 치하하고 우러러 보는 마음으로 너는 살아야 돼, 라는 생각을 여자들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때는 뭐냐 하면 안 돼, 하고 혼자 상상하고 혼자 절규를 하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힘들지만 그런 생활은 내가 없잖아, 내가. 주인공인 내가 사라져버리면 아무리 돈도 좋지만 내가 살아지면 못 견딜 지경이죠.

그럼 뭘 해야 되는가? 그러면 돈 많다고 건강하다고 키 크다고, 키 큰 것은 자식을 위해서 그래야 돼요. 자식이 키 작으면 지가 용납이 안 되거든요. 여자는 키 작아도 하여튼 자식은 키 커야 돼. 아무리 계산해도 어떻게 할 거냐, 이 방법 아니면 뭐냐? 한 눈에 뿅 가는 남자를 만나고 이것을 뭐냐 하면 대학교 간사들은 하나님이 짝 지어준 배우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뿅 가는 둘이 삐지직 전선에서 번개 치듯이 뿅 가는 남자.

이걸 세상에서는 사랑. 일단은 사랑으로 맺어놓고 본론은 이게 돈. 그게 이 은혜가 둘 다를 얻은 거예요. 남자가 지한테 뿅 가게 만들어놓고 본론은 8억, 이게 라헬의 팔자가 그렇습니다.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하여튼 21년 동안 구체적으로 노동한 것은 14년 동안 사랑하는 여인 너를 얻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다는 남자의 진심을 진심으로 인정해줄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저 남편이 그때 그 사랑이 일관적으로 유지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언니도 같이 붙여줬거든요. 그렇다면 둘 사이에 문제는 남편이 나만 사랑해야 되는 이 사랑을 하나님 쪽에서 인정해주느냐는 여부가 그다음에 판정이 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누구 자식이 많은가, 그 자매간에 치열한 투쟁을 벌입니다.

투쟁에는 반드시 뭘 낚아내야 보람이 있습니까? 승자, 승리. 제가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여러분의 삶이 투쟁적인 삶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 이유가 없어요. 아무 이유 없는데 우리 마음속에 뭐가 있는가? 무조건 남한테 져선 안 된다는 것, 최후의 승자는 나여야 한다는 것,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게 어디서 왔어요?

아까 봅시다. 당신은 무조건 나 노력한 만큼 당신이 인정해주고 내 요청을 들어줘야 돼. 당신은 내 요청을 들어줄 의무가 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자기 위주 어디서 온 겁니까? 나는 무조건 승자가 돼야 돼. 이건 어디서 온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 해답이 없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이겨야 된다는 거예요.

그 이김의 전쟁이 뭐냐 하면 열한 자식이 태어난 겁니다. 뭘 하든 남편 꽤서 무조건 동침해서 얘를 낳았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장단 맞춰주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아니 동침한다고 아이 생깁니까? 아니거든요. 물론 날짜 계산하고 하겠지요. 하지만 동침한다고 아이도 우에 잘 낳는지. 오늘밤 너 들어가라, 다음에 나 들어갈게. 이런 것 하면서 어쨌든 간에 승자 싸움에서 라헬은 스스로 자기를 패자, 내 인생은 파괴되었다는 것을 인정해버려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쪽에 속한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파괴된 쪽이 하나님에 속한 사람입니다. 나는 인생 팔자가 슬프다. 이 이야기를 신명기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 동안 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의 땅이었지만 나는 구경도 못하고 서글픈 환경, 척박한 사막에서 내 꿈마저 날아가 버리고 여기서 허무하게 죽는다. 그 사십 년 광야를 헤맸던 남자만 육십 만인 엄청난 사람들이 이십 세 밑에 애들 빼놓고 홍해를 경험한 사람들 다 죽습니다.

나는 슬프다,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그걸 자식 이름에다 남깁니다. 너는 슬픈 여인의 자식이다. 이 슬픔의 여인의 운명에서 같이 연결돼 있다고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야곱은 뭐로 짓는가? 베냐민, 진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

그럼 누가 승자에요? 야곱은 바로 라헬을 끝까지 사랑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 쪽에? 레아 쪽이 아니고 바로 라헬 쪽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라헬을 대표하는 라헬의 운명에 핵심요소가 되는 여자 이름은 누가 들어가느냐? 마태복음 2장 18절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야곱의 진짜 사랑하는 본처가 돼요. 레아는 겉절이고요, 김장김치 아니고 예비반찬이고 진짜는 라헬입니다. 라헬이 애곡한다는 것은, 남편이름이 이스라엘, 야곱이잖아요. 야곱의 진짜 여인이 애곡한다.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게 바로 이런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인생에 팔자에 같이 가담하게 된 사람, 그 사람이 복이요 영생이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게 될 사람이에요. 먹는 노선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인간세상에서 사랑이란 것은 사랑으로 결혼한다 하지만 이 사랑도 이 결혼도 결국은 나의 세계의 안정화에요. 안정이란 말 누가 이야기했어요. 집사님이 안정이란 말했어요. 내가 볼펜 빌려서 받아 적었어요. 내 생활의 안정성을 도모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내 생활 안정하기 위해서 남편이든 자식이든 하는데 이 안정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안정이 외부의 시선에서 와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안정하면 비로소 우리는 안정하게 여깁니다. 남들 보기에 나쁘지 않게 보이는 것, 그게 심리적이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도모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 안정을 이렇게 심하게 도모하다 보면 주변에 있는 남편이나 자식이나 아내나 이런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내 안정에 도움 되라고 요청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제가 오늘 이 강의 처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왜 우리가 남한테 요청하느냐?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께 요청하느냐,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그건 이스라엘 자기 주제, 분수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니가 뭔데 나한테 요청을 해? 반대 아니야.” 자꾸 떡이 없고 물이 없다고 요청하는 하는 거예요. 원망하고.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몰라요. 그건 사십 년 동안 헤매야 마땅하지요. 우리는 누구에게 요청할 그런 쨉이 못 됩니다. 그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돼요.

약속의 땅은 관심사가 주의 이름이 어디로 가시는지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면 주의 이름 살아 있으면 비록 죽어도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은 약속을 주었고 그 약속 안에서 우리는 살아 있다. 그게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그 약속만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확정할 수 있습니까?

그때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강대한 민족으로 하여금 그걸 친히 정탐꾼들이 확인케 하는 거예요. 안 된다고 나자빠지는 거예요. 못 들어간다. 이럴 줄 알았지.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지 너희 안정을 도모하는 사람이지 주님 하는 일, 주님만 있으면 족하다는, 나보다 더 주의 계심이 족하다는 그런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들춰내면서 사십 년 동안 완전히 다 죽여 버리죠. 그게 오답노트였던 겁니다.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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