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질문답변20220425

아빠와 함께 2022. 4. 27. 09:50

대전-질문답변 20220425

왜 내가 정답입니까, 라는 것은 내가 원하고 내가 관심 있는 것, 내 쪽에서는 더는 꺼내지 않겠습니다. 이걸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위하여 살지 않겠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버리면 이걸 두 자로 ‘우상’이라고 해요. 우상이라 할 때 물체 섬기고 비는 게 우상이 아니라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성령, 나를 위한 복음 전부 다 우상입니다.

그걸 내가 주일 낮 설교에 했거든요. 방향성이 예수 믿습니다, 행함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겠습니다, 할 때 그런 주장을 하는 방향성이 누구 좋으라고 했냐 말이죠. 세상 교회는 행함을 주장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우리 교회는 믿음으로만 합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그게 바리새인의 신학이었어요.

바리새인 신학 다시 말씀드릴까요? 은혜로 구원 받기 때문에 그 은혜를 내 쪽에서 유지하게 되면 구원에 성공하고 도중에 주신 은혜와 선물을 내 쪽에서 관리 못하면 나는 탈락이다. 이게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뱀의 자식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내가 왜 정답입니까, 하는 것은 이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해서 어렵다고 하니까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도 어려운데....)

시간이 다 지나고 난 뒤에 오는 선물, 이걸 두 자로 하면 ‘성령’이라 해요. 시간이 다 지나고. 연극이 끝난 뒤에 모든 것이 결론이 난 상태, 그 결론이 뭐냐? 내가 주님의 정답이 되었다는 결론, 하나님이 연출하신 그 드라마의 결론이 내가 거기에 엑스트라로 참여하든지 주연 급은 아니고요 조연으로 하든지 간에 내가 주의 일에 참여된 자가 되었다는 그런 인식이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주어지지요.

그러면 애초부터 내 인생이란 없었지요. 주님이 주로부터 와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거대한 주님의 드라마 속에 우리는 하나의 피조물 역할을 영광스럽게 한 거예요. 이게 주님과 관련될 때 피조물 고유의 자기 존재의 창조된 이유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과 관련되지 않으면 그건 창조의 의미,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감사하면 돼요. 감사하고 고마우면 된다고요. 그런데 질문이 돼버리면 내가 나를 위한 관심사가 해결이 돼버리면 이거는 내가 질문했기 때문에 나오는 내가 챙기고자 의도했고 예상했던 감사기 때문에 이 감사는 내가 주인공이 돼버린 감사가 되지요. 그러니까 인생이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따로 있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의 신앙,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라고 돼 있거든요. 이걸 약간 제가 변주하겠습니다. 주께서 가라 해서 여기 있고 주께서 오라 해서 거기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과거완료로 설명해버리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지시해주시옵소서, 이게 아니라 이미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살아 계시다는 것, 살아 계시다는 것은 일하고 계신다. 주님이 살아서 실제로 일하고 계신 결과지요.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나오지요.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두 사람이 실망해서 내려가는 거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데 예수님이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예루살렘으로 가버려요. 엠마오로 가다가 예루살렘으로 도로 와버립니다.

누가 그렇게 했어요? 본인이 정답이에요. 내가 주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들어붙었지요. 저녁 될 때까지 같이 동행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엠마오로 가지. 왜 가지?” “몰랐어요? 예루살렘에 일이 터진 걸? 예수님이 죽었는데 우리는 실망해서 예수님을 돌아가셨으니까 우리는 우리 살 길 찾아가야지요.” 이런 이야기하면서 왔다 이 말이죠.

저녁 쯤 되어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면서, 그전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나무랐지요. 예수님이 자기가 본인이면서도 제3자인 것처럼 그분이 하신 말씀에 보면, 그분이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라고 남의 이야기처럼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주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지요.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절)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해석을 할 때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고정점이 되고, 그다음에 구약에 있는 모세와 선지자의 모든 말씀은 이 십자가 부활이 나오지 아니 하면 그건 성경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해석을 이렇게 했기 때문에. 성령님의 해석이 이 해석이란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 식사하실 때에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저희들에게 주시매,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보았더라.

그러니까 그 제자들은 두 개의 자아상을 갖게 된 거예요. 하나는 주님을 모를 때까지의 도상의 존재, 길을 걷고 있는 엠마오로 가는 존재, 이제는 예루살렘을 잊어버리고 엠마오로 자기 살 길 찾아가는 여전히 자기가 질문하고 답변을 얻어서 인생을 꾸려나가야 될 어떤 의무 같은 걸 짊어진 그 자아상에서 눈이 밝아져버리니까 지금 이 순간 주와 함께 있게 된 것이, 모세와 선지자가 주님의 십자가의 완성의 효과, 결과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32절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라고 해서 거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들과 함께 이 이야기를 합니다.

요게 왜 중요하냐 하면 지금 예수님이 부활한 상태에서는 본인이 나를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전부 다 그거는 아니에요. 그건 다 도상에 아직까지 미완료, 완료되지 못한 여전히 자기의 이득과 자기의 기대와 희망이 살아 있는 상태. 그런데 십자가 부활과 성령이 오게 되면, 나중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으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다 이루어진 상황에 하나의 밤하늘에 있는 붙박이별처럼 박혀 있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주님 안에 우리는 고정점을 갖게 된 거예요.

강아지 어디 있어요? 이 강아지는 길 가에 도상의 강아지가 아니에요. 이 강아지는 자기 집이 있어요. 이 아파트 안에 자기 집이 있잖아요. 우리는 고유의 변치 않는 고정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걸 다 이루었다는 효과인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제가 볼 때는 별 하나, 나 하나. 저 별은 나의 별~ 그 노래가 적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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